선교는 순교다
(사도행전 20:22~24)

 

이 중 표   목사(한신 목회개발원 원장)

 

 하나님의 은혜로 제6회 전국 목회자 세미나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큰 영광 가운데 개최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여기 참여하신 전국의 동역자 여러분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금번 세미나 주제를 '교회 발전을 위한 선교 개발'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의 성령이 계시해 주시는 감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지금 한국 교회에 선교적 사명이 새롭게 요청되고 있음을 각성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한마디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것은 곧 선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사신 목적이 선교요, 사역의 알파와 오메가를 선교에 두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선교사역에 동참하게 된 것은 최대의 영광이며 행복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한번 살다 가는 일생에서 주께서 오신 목적을 이루시는 일에 부르심을 입는 것은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곧 선교적 생애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입으로 전도하고 행동으로 전도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전 삶이 선교인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선교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교사역을 계승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이제 목회자는 전 사역의 초점을 선교에 맞춰야 합니다. 우리의 목회가 선교가 되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됩니다. 만약에 일생 동안 큰 교회당을 짓고 열심히 교회 성장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선교가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 우리의 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선교의 열정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이 나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교를 위하여 십자가의 길로 직통하셨고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교의 뜨거운 열정이 타올라야 합니다. 선교한다는 것과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당에 모이고 선교사업을 많이 하여 성공적인 목회자로 존경을 받을지라도 주님의 선교와 일치하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종은 수많은 동역자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교회 성장에는 남다른 의욕이 있으나 자기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종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심령 속에서 진실로 선교의 열정이 타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운동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운동이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운동입니다. 선교를 교회 성장과 같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역사 속에 살아서 나타나는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양적인 성장은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선교적 측면에서 영적인 대각성과 부흥이 따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이고 선교 사업이 활발한 가운데 교회 성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성장과 선교적 발전은 다릅니다. 선교는 교회 부흥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장'은 되었지만 '부흥'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과 교회 건물의 확장 사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고 한다면 부흥은 심령의 변화와 회개를 통한 '영적 각성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성장을 가시적인 변화라고 한다면 부흥은 인격적인 내적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선교한 것인가 아니면 교회를 확장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서적 의미에서, 부흥운동은 영적 각성과 사회적 개혁이 일어나며, 민족이 새롭게 갱신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는 수많은 청중이 교회당으로 모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개혁이 전혀 없으며, 도덕적인 타락과 사회적 부패가 오히려 만연되고 있습니다. 민족적인 갱신운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1970년 한국 교회 부흥운동은 사회적인 변화도 동반했었습니다. 우상을 타파했습니다. 구습을 버렸습니다. 저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3·1운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성장은 민족의 양심과 국민의 도덕성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부흥운동은 영국을 위기에서 건져내는 대각성운동이 되었으며 사회와 국가의 도덕적 풍조를 변화시켰습니다. 찰스 피니가 들어가서 부흥운동을 일으킬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 앞으로 돌아올 뿐만 아니라 그 지역사회의 술집이 문을 닫고, 교도소는 죄수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지방 법원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인구는 이 지역에 3배로 늘었으나 범죄는 3분의 1로 줄었다." 왜냐하면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을 통해서 놀라운 선교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교회도 많아지고 교인들도 많아져서 찬송·성경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은 많은데 여전히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사회는 타락하고, 범죄는 증가하고…… 온통 사회가 무질서해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어느 것 하나 교회를 통해서 질서가 잡혀진 것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당을 얼마나 크게 짓고, 사람이 많이 모이고, 헌금이 나오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가에는 관심이 있으면서도 교인들이 영적으로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당을 못 짓는 것은 탄식하면서도 양들이 해골처럼 파리한 것에 대해서는 탄식하는 주의 종들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총동원해서 교회당을 채우려고 출석 교인은 그토록 원하면서도 뜨거운 전도의 열정을 가진 사람은 못 봤습니다.

 

선교는 생명 사랑 운동

 

 우리는 선교적 사명에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성장을 위해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교인을 만들기 위해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천당 보내려고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인간 사랑이 핵심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전도해서 교인 몇 명을 채웠다고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관심이 없고 "네가 한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중히 알았느냐?"라고 묻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도할 생각은 없고 사람 모으려고만 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인은 되지만 그리스도인은 안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에 가서 교수님들에게 이런 주장을 합니다. "교수님들은 영어 시험으로 신학교에 입학시키지만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명도 전도하지 않은 사람은 신학교에 들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전도의 열정이 없는 사람은 소명이 없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사명이 없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공부를 시킵니까?"

 자기 지역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해서 멸망해 가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려보지 못한 목사는 이미 목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여 방황하는 내 백성을 민망히 여기사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사도 바울의 선교 열정

 

 사도 바울은 위대한 목회자요, 신학자요, 영광스런 순교자입니다. 바울은 세 번째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항구 도시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모아놓고 고별 설교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위대한 전도자의 순교 정신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사도 바울이 얼마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명에 불타고 있는가를 여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교의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선교의 열정입니다.
 교회 성장을 바라는 마음과 선교 열정은 다른 것입니다. 선교 열정이 없는 교회 성장 운동은 다만 사업적인 욕망일 뿐입니다. 선교의 열정도 없이 교회만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주의 종들도 교회 성장의 욕망은 있으나 선교 열정은 메말라 있습니다. 너도 나도 좋은 자리에 교회를 세워 큰 교회를 만들려는 욕망과 꿈은 있으나 인간의 영혼을 구원해야 된다고 하는 눈물과 사명감은 메말라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조용히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물을 흘리며 전도해 본 경험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목사는 소명이 없는 목사입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몸부림치며 기도한 적은 있어도 한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내 눈에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이미 소명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의 사역에 부름받은 이후로 저 멸명해 가는 형제들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 본 적은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그리고 한 생명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선교하는 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요 살아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런 간절한 마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 너는 세상에서 사업을 하고 온 사람이지 나와 같이 선교를 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씀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겸손과 눈물이라."고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습니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를 행하느니라."

 

1. 사도 바울의 선교의 핵심은 은혜의 복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복음이 어떤 복음이었습니까? 그것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준 복음입니다. 이 은혜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입니다. 은혜의 복음은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주신 부활의 예수가 이제 내 안에 살아계시기에 오직 예수로 사는 바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급선무는 자기에게 먼저 은혜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은혜의 복음이 되지 않고는 남에게 결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토록 복음에 미쳐서 결박과 환난이 자신을 기다리지만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데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이 은혜가 되고,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것은 단순히 입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먼저 나에게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대한 은혜를 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서 내가 최대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서 최대의 은혜를 자기가 받지 못한 사람은 남에게도 그 은혜로운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16절에서 '나의 복음'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의로워지는 복음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복음이 자기 복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기의 복음이 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전도하기 전에 자기에게 먼저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교 활동을 볼 때 예수님은 30세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복음 전파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전파한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구약으로부터 예언된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러 왔다고 하셨지만은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면서 그의 선교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심으로 선교를 완성시켰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할 때 입으로 전파하거나 행동으로 전파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그의 선교를 완성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입으로 복음을 전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입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예수 믿고 복 받으시오."라고 전했습니다. 이렇게 전도해서 천당도 많이 갔으며 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 선교에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주의 선교이고, 하나는 에큐메니칼 하나님 선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에 두 가지 선교의 초점이 있는데, 섬기는 예수가 있고 죽는 예수가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이 섬겼던 대상은 민중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다 민중이었습니다. 이 민중을 섬기는 선교가 민중 선교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공생애 활동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님의 선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신학자들은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고, 인간을 위해 사신 것을 중요시하고 이 세상에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샬롬운동이요, 인간 구원을 곧 이 땅에 평화를 이루는 데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선교 신학이 한국 교회에 전혀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선교는 철저하게 자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루시는 평화는 전쟁 없는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일어난 후에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은혜로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선교사역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바로 그러한 복음입니다. 끊임없이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안고 돌아가야 될텐데 교인들을 데려다가 교회 안에서 세속의 욕심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삶의 변화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귀한 시간 우리는 은혜로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처럼, 먼저 자기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에게서 먼저 이 변화된 은혜가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기 죽음을 보았고, 그의 부활을 통해서 자신도 부활할 것을 믿고 이제 예수로 산다, 이 은혜로 산다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은 순교자 스데반의 복음을 받았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죽으면서 순교자의 영성으로 은혜의 복음을 확증시켰습니다. 이 복음을 받은 바울이 순교자적인 선교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보다 선교하는 데 힘썼습니다. 자기의 복음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저들에게 그대로 일어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선교적 사명과 그의 고백은 스데반 집사에게서 왔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를 보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한 것을 바울은 보았습니다. 이 스데반 집사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바울이 예수를 만나는 그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바울에게 은혜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 위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스데반의 놀라운 부활의 영성이 바울의 심령 속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라고 하는 것은 순교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순교

 

 사도 바울은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마치려 함'이란 헬라어의 뜻은 사도 바울이 순교 직전에 하고 있는 말과 일치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여기 달려갈 길을 마치는 일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과 같은 심정입니다. 복음 전도를 끝내는 것과 자기가 죽는 것을 일치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순교적 신앙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고 한 단어는 여기 사도 바울이 "내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서 '마치려 함(     )'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선교적 사명을 마치는 것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이 선교의 끝이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이 선교의 사명의 끝이다." 이것이 바로 사명을 받은 사도 바울의 심정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혹시 이 가운데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이 있습니까? 이 땅에서 교회 성장을 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이 있습니까? 허상입니다. 헛된 일입니다.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 병들지 마십시오. 사람 많이 모으기 위해서 병들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는 선교적 사명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내놓은 것처럼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목회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떠난 후에도 복음이 계속 전파되고 있습니까? 내가 입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소리로만 그치고 있는지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 지역 사회를 떠난 후에도 내가 살았던 그 지역 사람들의 가슴속에 복음이 심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선교사역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역 사회를 떠난 후에도 나를 통한 선교사역이 계속된다면 그 선교사역은 순교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서 떠났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자기 죽음을 선언하고 부활로 살아간 사람은 부활의 영을 통해서 끊임없이 선교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살았던 공생애 기간 동안 민중들에게 입을 열고 외치며 선교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었고, 성령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그의 선교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었으나 바울의 부활의 영이 우리 속에서 선교사역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죽었으나 지금도 한국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들의 선교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선교 개발은 순교 개발입니다. 내가 죽고 부활해야 선교가 가능합니다. 죽어 천당 가는 복음이 아니라 지금 죽어 예수가 내 속에서 부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들어가는 곳마다 선교사역을 통해서 사회가 변화되고, 민족이 갱신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시골에 갔습니다. 우리 주의 성령이 얼마나 이 종을 전도에 미치게 해서 울게 하던지 늘 눈물을 흘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형제들을 만나면 눈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사님, 왜 우십니까?" "형제가 예수 믿지 않고 지옥 갈 것을 생각하니 이토록 눈물이 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전할 때마다 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울지 마세요. 내가 믿어줄게요." 그래서 그때 많은 사람들이 믿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밤 전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나고 달도 밝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의 성령이 얼마나 감동을 주던지 잔디밭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이 종을 순교의 제물로 삼으셔서 이 고을 사람들을 다 구원해 주시옵소서." 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슬 맺힌 잔디 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고을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이 종을 제물로 삼아 주시옵소서."
 그러자 주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종아, 네가 진실로 이 고을 사람들을 위해서 순교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이 고을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제가 얼마든지 이 고을 사람을 위해서 내 한 목숨을 제물로 내놓을 수 있습니다."
 "종아, 이 고을 사람을 구원하려는 것은 욕망일 뿐이다. 네가 한 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네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느냐?"
 "주님,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죽는다면 손해 아닙니까?"
 "나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것이지 많은 숫자 100마리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생명은 하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네 눈에 한 생명이 보여야지 숫자가 보이면 너는 선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선교는 위선이다. 많은 생명을 위해서 죽는다고 한다면 네가 벌써 위선자가 된 것이다. 네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네 눈앞의 한 생명을 위하여 네 생명을 내놓을 때만 진정한 선교요, 순교가 되느니라. 내가 이 땅에 와서 죽은 것은 인류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한 생명을 위해서 죽었다. 왜냐하면 생명은 인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 있기 때문이다."

 저는 그때 깊은 회개를 했습니다. "한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이 종에게도 한 생명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는 너무도 숫자에 연연해합니다. 큰 교회를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있는 것은 선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눈물 흘리는 것도 없이 수많은 청중만 모아 놓았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만 나는 도무지 너를 모르겠다. 너는 청중을 모으는 재주는 좋았다만은 한 생명을 구원하는 선교사역과 순교사역은 네게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큰 교회에서 목회하지 못했다고 탄식했던 과거를 끝내야 합니다. 이제 내 눈앞에 보이는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피흘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부르짖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음성이 내 고막을 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구원한 사람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베드로가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가 구원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옆에 있던 강도 하나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강도 하나가 "주 예수여, 당신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했던 신앙고백은 제자가 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강도 한 사람이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는 거기서 강도 한 사람이 구원받았을 뿐입니다. 주님은 그 한사람을 구원시키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 이후에는 성령이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수많은 사람에게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제 모든 주의 종들이 오직 한 생명을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사역이며, 여기에서만 진정한 선교개발이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선교는 성령의 사역

 

 예수님께서 이루신 선교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성령이 임함으로 우리에게 사건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성령의 사역이며, 성령의 임재 없이는 선교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순교적인 선교 활동이 성령의 힘으로 되어지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만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심령의 매임'은 '성령의 매임'입니다. 성령께서 자기를 이끌어 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여기서 '증인'이라고 하는 말은 순교자요, 순교자는 선교를 위하여 생명을 내놓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숭고한 사명을 받은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최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타오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귀한 시간 주께서 우리를 이 거룩한 성산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 소리치고 있습니다. "나에게 선교해다오." 이 민족이 소리치고 있습니다. "나에게 선교해다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순교해달라는 말입니다. 당신들이 죽어서 순교자의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교회당을 크게 짓고 사람 많이 모아서 성공하려는 목회자의 그 허상과 헛된 욕망의 영광을 보이지 말고 그대 예수와 같이, 저 스데반과 같이 죽으시오. 그리고 바울처럼 죽으시오. 그리고 순교자의 영성으로 이 민족의 가슴에 들어가다오." 저 하늘에서 우뢰소리처럼 울려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의 종들이여! 이제 눈을 열어 하늘을 봅시다. 그리고 마음 문을 열고 하늘의 음성을 들읍시다. 지금 이 민족의 양심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민족이 소리치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면 이 민족이 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선언해야 합니다. "나는 죽었다. 그리고 예수로 살았다."라고 외칠 수 있을 때에만이 민족을 살리는 선교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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