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의 개종
1882년 신사유림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성서번역과 선교사 초빙 및 유학생교회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진은 1883년 5월 개최된 일본 전국기독교대친목회에 참석한 이수정(가운데 한복입은 이)의 모습을 모여주고 있다.

 

정동제일교회 /한국최초의 감리교회로 1887년 창립되었다.

 

 

최초의 견미 사절단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비로소 기독교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 셈이다.

1883년 민영익(앞줄 가운데)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감리회의 가우쳐와 만나게 되어 한국선교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한국교회사(60)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4) 선교지 분할

19세기 말까지 한국에서는 개신교만 8개 이상의 교단이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호주 선교부가 부산을 중심으로 선교 거점을 확보한 경우 외에는 대부분 서울에 먼저 들어왔다. 외국의 공관들이 서울에 있었고 선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서울에 먼저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각 교단 선교부끼리의 선교지 조정등이 필요하게 되었다. 서울이나 대도시에서는 선교부들이 중첩적으로 포진하여 불편한 관계가 조성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복음의 소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교 지역을 분할해야 한다는 의견은 아펜젤러의 제안에 의해 1888년에 이미 미 북감리회와 미 북장로회 사이에 거론되었는데, 본격적으로 계약이 이뤄진 것은 1892년이다. 1892년 1월 처음으로 장로교 선교지 분할 위원회가 결성되어 남장로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했을 때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사이에 선교지 분할 협정이 체결되었고, 그해 5월 하순 감리교 대표들과 2,3차례 협의를 거쳐 6월 11일 장·감 대표들 사이에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선교지 분할 협정 초안이 작성되었다.

① 일반적으로 소도시들과 그 주변 지역들에 대한 공통적 점유는 우리의 각 선교회에 유익한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5,000명이 넘는 항구 도시와 읍들은 공통으로 점유되어야 한다.

② 5,000명 미만의 읍에 그 지역을 담당하는 선교사에 의해 하나의 선교구가 설치될 때 그곳은 해당 선교회에 의해 점유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다른 선교회가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권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역의 공백 기간이 6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그곳은 다른 선교회의 선교가 가능한 개방된 선교지로 간주된다.

③ 사역을 시작하거나 확장시키고 싶어 하는 선교회는 모든 선교지에 신속히 세력을 미치기 위해 점유되지 않은 지역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하는 바이다.

④ 우리는 각 교회의 신도들이 다른 교단으로 옮길 고유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 교회에 교인 혹은 후보자로 이름을 등록한 사람은 그 교회 담당자의 이명서가 없이는 다른 교회로 영입될 수 없다.

⑤ 여러 교회의 권징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호 존중하기로 가결한다.

⑥ 섬기고 있는 당사자의 이명서가 없을 경우 다른 선교회는 모든 사역 분야의 조사, 학생, 교사, 조력자들을 영입해서는 안된다.

⑦ 일반적으로 서적들은 무료로 주지 않고 팔아야 하며 가격이 균일해야 한다.

장로교 선교회는 감리교 대표들과 선교지 분할 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1893년 1월 23일 선교지분할위원회 위원으로 기포드(D. L. Gifford), 스왈른(W. L. Swallen), 무어(S. F. Moore)를 임명하였고, 그 해 한국에 파송된 전체 장로교 선교회와 감리교 선교회는 한국 내에서의 불필요한 선교 경쟁을 피하고 선교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교계예양이라는 선교지 분할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감리교 포스터(R. S. Foster) 감독이 한국에 왔을 때 이 협정에 찬성하지 않아 공식적으로 발효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안은 추후의 선교 사업에 골격 노릇을 하였다. 마땅한 다른 규범이 제시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잠정적인 협정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장·감은 오랫동안 이 협정을 존중하고 하나의 관례처럼 실천했던 것이다.

선교지 분할 협정에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온 것은 장로교 선교회였다. 그 후 장로교 선교회는 감리교와의 선교지 분할 협정을 타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고, 1897년 한국 선교 현장을 방문한 스피어 박사는 선교지 분할을 이루기 위해 애써 노력하였으나 감리교 선교회의 소극적인 자세로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비록 협정이 조인되지는 않았지만 그 후 장·감 선교회는 오랫동안 교계예양을 존중했다.

그러다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결성되면서 선교지 분할 협정은 더욱 활발해져 1905년에 평안북도 지역에서 북감리교와 북장로교가 선교지 분할 협정을 통해 영변 지역을 북감리교 선교회에 이양하고, 북감리교는 안주 지역을 북장로교 선교회에 이양했다. 그러다 한국이 일련의 대부흥운동을 지나면서 선교지 마찰을 피하기 위해 효율적인 선교를 추진할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1909년 9월 16일, 17일 서울 YMCA 회관에서 모인 지역 분할 협정위
원회에서 장·감이 역사적인 선교지 분할 협정을 공식적으로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한국 침략으로 인한 위기의식은 장·감연합운동을 더욱 촉진시켰다. 1909년에 채택된 선교지 분할 협정은 전혀 새로운 협정이 아니라 1893년 이후 장·감이 상호 지켜 온 분할 정책을 구체적으로 인준한 것이었다.

이 선교지 분할 협정은 재정의 낭비, 선교 시 마찰을 극복해 선교의 효율을 가져다 주었다는 면에서 상당히 의의가 있다.

반면 몇 가지 폐단을 가져왔는데, 그 하나는 한 선교지에 한 신학만을 오랫동안 심어 주어서 그 신학이 그 지역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1930년대 진보주의자들이 등장해 보수주의에 도전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진보적인 캐나다 선교회가 담당했던 함경도 지역 출신들이었다. 북장로교 선교회 담당 지역이었던 평안도와 경상북도, 남장로교 선교회가 담당했던 전라도 그리고 호주 장로교가 담당했던 부산 지역 등은 모두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이렇듯이 한 신학사상을 오랫동안 가르쳐 오면서 그 신학이 그 지역을 지배하는 현상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고, 지역마다 다른 신앙적 특성으로 나타나 지역적 골을 깊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또 하나는 한국인이 어느 교파의 기독교인이 되느냐는 신자 자신의 자유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교지 분할의 산물로써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는 폐단을 안고 있다. 공동 구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 지역에 한 선교회만 독점적으로 전도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선교지 분할에 의해 결정되어진 대로 감리교인이 되거나 장로교인이 되었으며, 같은 장로교라도 청교도적인 장로교인이 되거나 다소 자유스러운 장로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선교지 분할에 의해 서로 선교지역을 주고받는 바람에 몇 천 명의 감리교인이 하루아침에 장로교인이 되었고, 같은 수의 장로교인이 감리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협정은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 사이에 이루어져 다른 군소 교단(침례교, 성결교, 구세군 등)에 대한 배려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한국교회사(61)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5) 네비우스 선교 정책

(1) 선교 정책의 필요성과 네비우스의 방한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선교를 위한 총체적인 선교전략(the overall strategy)으로 1890년 채택한 것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Methods)이다. 초기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브라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 뛰어난 잠재력은 있었지만 모두가 20대의 젊은이들로 선교 경험이 없었다. 게일이 25세, 언더우드
가 26세, 아펜젤러가 27세, 알렌 의사가 27세 그리고 그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던 스크랜턴 선교사도 29세에 불과했다. 그래서 패기와 복음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지만 전혀 선교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처녀지와 같은 이 한반도에서 선교 방향을 정립할 수 있도록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었다. 이때에 한국에 와서 젊은 선교사들에게 선교방법에 대한 도전을 준 사람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네비우스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1890년 6월 중국 산동반도에서 1854년 이래 30년 이상 선교 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 네비우스(John L. Nevius) 목사 부처를 초빙하여 2주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한국 선교사들이 앞으로 명심하고 실천할 선교방법의 원칙을 제공받았다. 주로 재한(在韓) 북장로회 선교사들 십여 명은 그의 강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가 쓴 선교 정책에 관한 저술들을 탐독하며 그의 선교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언더우드와 그의 선교회는“비록 우리 사업이 좀 더 느리게 시작되고, 여러 해 동안 눈에 보이는 열매를 크게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결국에는 다른 방법보다 이 계획을 조심스럽게 따르면 더 확실하게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결정”했다. 그 시점부터 네비우스 선교 방법은 북장로교뿐만 아니라 전체 장로교 선교회의 중요한 선교 정책이 되었다.

이들은 한국선교 정책의 통일과 후에 도착하는 선교사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1년 후인 1891년에, 네비우스의 원리를 선교 현장에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일련의‘규범과 세칙’(Rules and By-laws)을 채택했다. 이 원리를 채택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울에 있는 미션스쿨 학생들의 부모들이 학비 일부를 부담하도록 하는 것과 방학 동안에는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정책을 변화시킨 일이었다. 한국에 새로 파송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은 누구나 도착한 후“네비우스 선교정책에 관한 책을 한 부 받아 첫 해 말에는 언어에 대한 시험을 합격해야 함과 아울러 이 원리를 완전히 터득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 시험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습득은 적어도 한국에 입국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고, 따라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선교 정책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2)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내용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여 전도한다.
②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게 한다.
③ 자전: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모든 개인과 집단(소수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휘묻이 법에 의해 사역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한다.
④ 자치:모든 그룹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교구들은 나중에 목사가 될 유급 조사들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집회 시에는 교인들을 훈련시켜 훗날 구역, 지방, 전국의 지도자가 되게 한다.
⑤ 자립: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한다. 각 그룹은 창립되자마자 순회 조사의 봉급을 지불하기 시작한다. 학교조차도 부분적인 보조금을 받도록 한다. 이것은 설립될 당시에만 필요하다. 개 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⑥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 공부를 한다. 그리고 모든 영수와 조사는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
⑦ 성경적 권징을 통해 엄격한 징계를 실시한다.
⑧ 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한다. 아니면 최소한 영역이라도 분리한다.
⑨ 법정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⑩ 민중의 경제 문제에서 가능한 경우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3)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

지금까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은 자립(Self-Support), 자 치 (Self-Government), 자 전 (Self-Propagation)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시카고 대학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한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곽안련
(Allen D. Clark) 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이 성경공부에 있었고, 이것이 자립, 자치, 자전의 실현을 가져다 주었다고 지적했다. 성경의 구체적인 연구와 삶 속에서의 실천이 결국 자립, 자치, 자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비 칸 선교사 역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근간이 성경연구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해서 하비는“네비우스 방법의 중심은 자립이 아니며 자치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모든 기독교 사역의 기초로 강조한 것과 성경공부 모임을 통한 훈련에 있다. 이것에 의해 성경은 연구되고 신자들의 마음에 적용되었다.”고 하였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성경 중심의 선교 정책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그 중심 되는 원칙은 성경공부를 장려하여 모든 교인으로 하여금 성경지식을 얻어 어떠한 사람을 상대해서든지 자신 있게 전도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선교사들은 각 지방의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했고, “배출된 지도자들은 각기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성경을 가르쳤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신자나 불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먼저 자신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권위 있는 성경의 토대 위에 구축된 윤곽이 뚜렷한 신뢰할 수 있는 진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곽안련 선교사가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경공부 제도가 없었다면 네비우스 선교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강조하는 성경공부는 단순한 성경공부가 아니라 오늘날 소위 말하는 제자훈련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 여섯 번째 항이 말해 주듯이 모든 신자들은 그룹의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실시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공부가 아니라 일종의 신앙양육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조사들과 영수들은 선교사들로부터 사경회나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그들이 현장에 가서 다시 그룹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던 것이다. 리더가 먼저 훈련을 받고 훈련받은 대로 현장에 가서 조원들을 모아 놓고 훈련시키는 오늘날의 제자훈련 공부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성경공부 방식이 모든 교회 현장에서 실천에 옮겨져 초기 한국교회는 설교보다 말씀 공부를 더 중시했다.

이 네비우스 방법은 단순히 네비우스의 선교 경험에서 우러나온 선교 정책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선교 전략을 세운 것이었다. 네비우스는 고린도전서 7장 20절의「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선교이론을 발전시켰고 적용하였다. 이는 성경적인 방법이었고, 초대교회의 발자취를 따라 행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교회가 세워진 후,「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고 했다. 그리고「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고 했다.

사도들은‘백성을 가르치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행 4:2)고 전했으며, 그「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행 4:4)고 하였다.

사도들은「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행 6:4)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에 집사들을 세우게 되었고, 업무를 분담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져서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는 환난을 당했다. 이때 핍박을 피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여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헬라인(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였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보냈고, 바나바는 사울
(바울)을 데리고 와서 일 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큰 무리들을 가르쳤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으며, 저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고 저들을 후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처음 교회들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고, 그 가르침을 따라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으며,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고, 집사를 세워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워 나갔으며, 지도자(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여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립, 자치, 자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 원리는 선교지의 신생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독립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적인 방법을 통해 제시해 주었으며, 이 원리를 채택하여 한국교회에 적용한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및 다른 장로교 선교부는 이 원리를 택하지 않은 다른 선교부보다 더 많은 성장을 가져 왔다.

한국교회사(62)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5) 네비우스 선교 정책

(4)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사경회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한국교회에 가져다 준 큰 결실은 사경회 운동이었다. 1909년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은 한국선교 25년을 회고하면서“그(네비우스)로부터 우리 선교사역의 두 개의 위대한 원리-사경회(the Bible training class system)와 자립-의 사상적 씨가 나왔다.”며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사경회와의 관련성을 언급했다.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솔직히 말해, 모
든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위대한 성장의 가장 큰 비밀은 사경회 제도였다고 믿고 있었다.”사경회는 한국교회에 요구되는 교회 지도자들을 육성 발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경회를 통해 영수와 조사와 권사를 발굴할 수 있었다.

사경회의 시작

사경회의 기원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채택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8년 새문안교회 주일예배에 50명이 참석할 정도로 성장하고 한국의 전역에서 복음이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언더우드는 한 해가 지나기 전 몇몇 한국인 사역자들을 집중적으로 양육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1889년 10월호‘미셔너리 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의하면“막 한 해(1888년)가 끝나기 직전에 8명의 한국인 사역자들이 자신들의 고향과 사역으로 돌아가기 전 교육을 받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도록 기도하기 위해 서울에 모여 함께 한 달을 보냈다.”고 하였다. 언더우드는 자신의 집에서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한국인 사역자들을 교육시켰다. 이것이 후대 사경회의 모체가 되었다.

하지만 사경회가 하나의 중요 선교 정책으로 정착한 것은 1890년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채택하면서부터이다. 1890년 언더우드는 서울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여 한국인 7명을 한 달 동안 훈련시켰다.“ 언더우드의 집 남서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열린 첫 사경회에 참석한 이들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서울 출신이 세 명이었고, 북부 출신과 황해도 출신이 각각 두 사람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사경회 참석자가 전 해보다 배 이상이 늘어난 18명이었다. 그 중에서 경성의 서상윤, 홍정후, 의주의 한석진, 송석준, 구성의 김권근, 양순백, 문화의 우종서, 해주의 최명오, 장연의 서경조, 비성의 김병갑 등 한국교회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경회의 정착

초기에는 전국에서 선택된 이들을 대상으로 중앙의 한 지역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였으나 1894년 이후부터는 여러 지역에서 사경회를 열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들을 훈련하는 기간도 대폭 조정되어 훈련생들을 1, 2개월 동안 신학 교육을 시키는 대신 2주 동안 전교인을 대상으로 훈련시키는 방식으로 수정되었다. 그때부터 전국 주요도시에서 사경회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그 후 사경회가 보편화되면서 도(都) 사경회의 경우 500명에서 1,000명이 참석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평양, 선천 그리고 재령 등 교세가 놀랍게 확장되고 있던 이들 주요 서북지역에서는 1,100명, 1,300명 그리고 1,800명이 참석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지나고 백만인구령운동이 한창 일고 있던 1909년에는 이들 세 개 선교부에서만 600개 이상의 사경회가 열렸으며, 총 41,000명이 참석했다. 그 해에 전국에 흩어진 8개 선교지부 중 여섯 개 선교지부에서 열린 사경회에 32,000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숫자는 여섯 개 선교부의 전체 교인의 39%에 해당한다. 사경회 참석자들이 쓴 1909년 한 해 동안의 비용만도 2만 5천 달러가 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인들의 성경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1893년부터 1901년까지는 전 교인이 사경회에 참석하다가 1901년 정규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좀 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교회 지도자를 위한 상급반과 일반 교인들을 위한 하급반으로 분리되어 운영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경회는 크게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사경회와 교회 지도자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사경회로 구분되어 실시되었다. 초창기 사경회는 대개 선교사들이 순회하면서 열흘 동안이나 두 주일 동안씩 지도하고 가르쳤다.

일 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상급반 사경회는 대개 모이기 편리한 큰 도시에서 개최되었고, 사경회를 마친 후에는 각기 교회로 돌아가서는‘교인들을 위한 사경회를 열거나 성경반을 조직하여 배운 것을 가르치게 했다.’지도자 육성을 목적으로 한 사경회는 각 지방의 형편에 따라 보통 10일간씩 개최되어 올바른 성경지식을 심어 주었고, 참석자들은 교회로 돌아가서 자신들이 배운 것을 가르치고 그대로 설교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경회는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평신도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개 교회에서는 봄이나 겨울 농한기를 이용해 사경회가 열렸는데 주로 개 교회 사경회는 한국인 목회자들이 담당했다. 이와 함께 각 지방에는 정월이나 2월 혹은 7월 농한기를 이용해 15일에서 1개월 동안 모든 교인들을 대상으로 단기간 성경학교가 개설되어 평신도 지도자들을 육성했다.

연중 2주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사경회는 당시 90퍼센트가 농민들이었던 직업 분포 상으로 볼 때도 매우 적절한 방식이었다. 추수를 하고 난 후 겨울철은 농한기라 농부들에게는 시간을 내기가 용이했고, 봄철 농번기가 끝나고 전답에서 제초 작업을 한 직후인 7월에도 두 주 동안은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이 기간을 이용하여 사경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특히 신정이나 구정이 시작되는 2주간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연휴 기간이었기 때문에 사경회 기간으로 가장 적합했다. 평양대부흥운동 수년 전부터 한국교회는 신년 초 두 주간을 사경회 기간으로 지켜 오기 시작해 오랫동안 장·감을 초월해 한국교회의 중요한 행사로 이어져 왔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의 겨울 남자 사경회가 1907년 1월 2일부터 14일까지 개최되었던 것도 그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사경회 경비의 자립

1901년부터는 사경회에 참석하는 이들이 자비로 경비를 부담하도록 하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책과 소책자를 무료로 나누어주는 대신 소정의 금액을 받고 판매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것은 학교 교육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학비의 일부는 학생이나 부모가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 후 입학을 허용했다. 1899년 설립된 평양숭실중학교의 경우 어느 정도 선교회의 지원이 있었지만, 모든 학생들을 자립시킨다
는 원칙하에‘각 학생은 매일 한나절 동안 노무과에서 일하고 그 대가로 양식을’제공받았고, 모든 학생들은 방과 후‘길 닦기, 새끼 꼬기와 신발 만들기, 문지기 일, 책 제본하기, 인쇄소에서 일하기 등’과 같은 노무를 통해 자신들의 학비와 식비는 물론 ‘의복과 서적 등도 학생이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사경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왕복 여비는 물론 사경회 기간 동안 체재비 일체를 본인들이 감당해야 했다. 1910년 곽안련 선교사가 인도한 서울의 한 사경회에는 14명이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신들이 왕복 여행비용과 체재비용을 부담하면서 강원도 동해안에서 200마일을 걸어 왔고, 세 사람은 130마일을, 그리고 80명이 평균 20마일을 걸어서 왔다.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며 매년 도처에서 이러한 일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사경회 프로그램

보통 2주 혹은 1주간 계속되는 사경회 프로그램은 오전, 오후 그리고 저녁 세 부분으로 나뉘어 오전에는 성경공부를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오후에는 전도를 나가 사람들을 저녁 전도 집회에 초청하고, 저녁에는 전도 대상자들은 물론 원근 각처에서 모인 사경회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 집회가 열렸다. 이것은 일종의 부흥회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기성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새롭게 다질 수 있는 기회였고, 초신자들에게는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저녁 집회는 보통 300명, 500명, 혹은 1,000명 또는 그 이상 모인 가운데 지명도있는 부흥사를 모시고 열렸기 때문에 기성 신자이든 교회에 처음 참석한 이들이든 일단 참석만 하면 영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더구나 참석자들 모두가 말씀을 사모하여 원근 각처에서 모인 이들이었기 때문에 사경회 저녁 집회는 개 교회에서는 보기 힘든 영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러한 부흥집회와 그 결과들은 교회와 교인들의 전 삶에 계속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경회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훈련의 수단으로 뿌리 내렸다. 때문에 사경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배우고 그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배려되었다.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중에서 우러난 것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권위가 그들의 삶을 지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조사나 선교사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일찍부터 그리스도인의‘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되었다.

사경회를 통한 생활 교육

사경회는 체계적인 말씀 교육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의 구체적인 말씀의 실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한국교회를 한단계 도약시키는 역할을 했다. 사경회는 단순히 성경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교회 치리법, 주일학교 운영법, 교수법, 불교와 다른 종교, 위생 문제, 안식교와 같은 타 교단, 아동 교육, 건강법 그리고 기독교 문화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이것은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
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줘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경회는 단순히 말씀을 공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에 실천할 수 있도록 주일학교, 금연, 금주, 청결, 결혼관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종교적 소양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바른 신앙생활의 출발은 주일성수에서 시작된다는 확신 때문에 처음부터 주일성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때문에 학습과 세례문답의 자격 조건 가운데 주일성수는 가장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만약 교회 임직을 맡은 자나 입교인이 특별한 이유없이 주일을 범했을 때는 권징조례에 의해 엄격히 권징에 처해졌다. 마펫은 오늘날의 학습교인에 해당하는 원입교인과 세례교인으로 교인을 대별하고 원입교인은 3개월의 훈련과정을 거치도록 하였고, 우상숭배, 조상제사금지, 성수주일, 부모효경, 축첩금지, 여자에 대한 처우개선, 음주, 거짓말, 도둑질, 잡기, 간음 등 악습관을 버릴 것 등 신자의 규범을 준수하는 이들에 한해 문답을 거쳐 세례를 베풀었다. 이외에도 술 취하거나 노름, 포도주와 아편을 만들거나 파는 행위, 도박을 하거나 도박 집을 개설하는 것도 금했다.

브라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엄격한 주일성수, 교리주의 신앙, 반자유주의 신앙관을 한국교회에 뿌리내려 주었다. 객관적인 말씀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태동시키게 되었고, 따라서 엄격히 주일을 성수하게 만들며, 교리주의적인 보수신앙을 심어 주어 말씀을 이질화시키는 어떠한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국교회사(63)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5) 네비우스 선교 정책

(4)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주일학교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주일학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고, 주일학교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가장 큰 실천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채택되던 1890년에 시작된 주일학교 사업은 곧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보완하는 질적 성장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아 갔고, 그 수도 놀랍게 신장되었다. 1897년 평양에만 5개의 주일학교가 운영되었고, 교재를 인쇄하여 사용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시작된 성경 중심의 주일학교는 장로교뿐만 아니라 감리교 안에도 견고하게 자리 잡아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복음에 기초한 교회로 출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주었다.

감리교는 선교 초부터 주일학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1888년 스크랜톤 여사에 의해 주일학교가 처음 시작되었고, 1892년 10월 노블 선교사의 아내 노블 여사에 의해 정동교회 청년주일학교가 시작되었으며, 유년주일학교는 노블 선교사가 1893년 9월 아현교회로 옮겨 가면서 시작되었다. 1893년 감리교는 주일학교 연합회를 조직하였는데,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 趙元時)가 위원장을 맡으면서 주일학교가 상당히 발전했다. 1893년에는 5개의 주일학교가 있었는데, 1930년에는 359개로 급성장했으며, 주일학교 학생 수도 1893년 133명에서 1930년 13,303명으로 급증했다.

감리교 중 가장 주일학교가 잘된 곳은 평양 남산현교회였다. 1896년 부임한 노블 선교사 부부의 노력에 힘입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등급별 유년주일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공과는 미국교회에서 사용한 만국통일공과를 번역 등사해서 사용하고 매주 금요일 저녁에 교사들을 모아 놓고 예습을 시켜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1903년 1백 75명이 모이는 주일학교가 얼마 후에는 평균 500명이 모이는 주일학교로 발전했다. 1911년 100명으로 처음 조직된 영아부도 이듬해엔 500명이 모이는 영아부로 성장했다. 1910년대에 이르러 남산현교회 주일학교는 영아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청년부, 장년부로 세분화되어 운영했다.

선교회가 이렇게 주일학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어느 교회나 주일학교를 잘 육성하면 아이들이 심히 많아 한 학교로 발전할 수 있고, 또 이들이 장차 중요한 교회 일꾼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주일학교는 곧‘장래 교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감리교회는 이와 같은 안목을 갖고 주일학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1888년 주일학교가 조직된 후에는 바로 배재학당 안에 설치된 인쇄소를 통해 여러 종의 주일학교 교재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알렌 클락(Allen D. Clark)이 지적한 대로‘1905년부터 1911년까지 주일학교가 급속히 성장’했는데, 이것은 부흥운동이 발흥하면서 장·감이 연합으로 주일학교 사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조직된 후 그 첫 사업으로 주일학교 공과위원회를 조직했다. 1907년 장·감연합공회는 세계 주일학교 연합회에 한국 주일학교 발전을 위해 사역할 사람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전국 주일학교 공과를 통일하고, 장·감 선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공과를 출판할 기금 확보에 들어가는 한편 전국 주일학교 사업을 총괄할 총무를 세웠다. 1910년에 처음으로 세계 통일공과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1911년에는 주일학교 사업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장·감연합공회 산하에 13인으로 구성된 종교교육위원회를 설치했다. 1913년에는 세계 주일학교 대표자 한 명이 스위스 취리히(Zurich)에서 열린 세계 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 한국에 들러 한국의 주일학교 현장을 시찰하였고, 이때 한국주일학교를 위해 기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 해 4월 19일에는 서울 경복궁에서 세계 주일학교 대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에서 14,700명이 모여 처음으로 주일학교 대회를 열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주일학교 수가 급증했고, 주일학교는 곧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블레어 선교사의 노력에 힘입어 1920년 한 해에만 주일학교는 1만 개에서 1만 4천 개로 증가했다. 그 해 일본에서 열린 세계 주일학교 대회는 한국의 주일학교 사업의 발전을 위해 향후 3년 동안 세계 주일학교 지도자를 파견하여 해마다 6개월 동안 전국의 주일학교를 방문 지도하고 전국 각처에서 주일학교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1921년 제1회 전국 주일학교 대회가 열렸고, 1925년 제2회, 그리고 1930년 제3회 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이와 같은 놀라운 주일학교의 성장 이면에는 블레어와 1920년부터 주일학교 총무로 일해 온 홀드크로프트(J. H. Holdcroft, 許大殿) 그리고 부총무로 일해 온 정인과(鄭仁果)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주일학교 교육이 교회의 성장에만 기여한 것은 아니었다. 주일학교 교육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그들의 의식과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복음이 개인의 의식변화와 영적 각성을 촉발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 줌으로써 민족과 사회 앞에서 부끄럼이 없는 일원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복음이 문화 변혁으로 이어지고, 애국, 애족으로 이어졌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5)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영향 및 평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한국교회를 주목받는 선교지로 올려놓는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에서 선교를 개시한 지 불과 25년 만에 세계가 주목할 만큼 놀라운 결실을 맺었던 것은 성경 중심의 선교 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매년 세례를 받은 교인의 수도 1890년 약 40명에서 1900년에는 1,986명, 1910년에는 10,082명으로 급증했다. 그 결과
1886년에 9명이었던 세례교인의 숫자가 1900년에는 7,500명, 1910년에는 119,273명, 1920년에는 144,062명, 1930년에는 194,678명 그리고 1936년에는 341,700명으로 급증했다. 1884년에는 단 한 명에 불과하던 장로교 선교사가 1910년에는 206명이라는 엄청난 숫자로 증가했고, 1920년에는 269명으로 그리고 1927년에는 323명으로 급증했다. 1901년 199개에 불과했던 교회의 수는 1910년에 1,157개, 1920년에 1,738개, 1930년에 2,335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분명 하나로 획일화 시킬 수는 없지만 수많은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 한국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한 가장 근본적인 요인을 성경중심의 선교 정책에서 찾고 있다.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가 지적한 것처럼 북부지역의 놀라운 교회성장, 장·감이 거의 동시에 북부지역 선교를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50년이 지난 1930년대에는 이 지역 장로교 교세가 감리교에 비해 약 6배나 높았던 것도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말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촉진시킨 다른 부차적인 요인들이 없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리차드 베어드는‘네비우스 선교 정책’외에 다른 부차적인 요인으로 서북지역의 특별한 사회 경제적인 상태, 초기 서상륜, 서경조 형제의 활발한 리더십 그리고 이 지역에의 장로교 선교사들의 대거 유입을 들었는데, 이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성장 요인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은혜였고,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 한국의 국내·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사상적 환경을 조성하시고 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확장될 수 있도록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셨으며, 그 중심에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있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선교 현장에 접목시켰던 언더우드, 마포삼열, 아담스, 리, 위트모어, 헌트, 스왈른, 블레어 등 1세대 선교사들 모두가 한국선교의 놀라운 결심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깊은 연계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하나같이 공감하고 있었다.

곽안련 선교사는 그의 시카고대학 논문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오늘날의 한국선교의 기적은 그 배후에 의심할 바 없이 전통적인 종교들, 한국인의 유순성, 리더십에 잘 따르는 한국인의 국민성, 평안함에 대한 한국인의 갈구, 국왕의 호의, 여성의 지위향상, 한국인의 애국심, 참되고 신비한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종교심성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지만, 가장 큰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성경중심의 선교 정책을 통해 처음부터 한국교회를 성경중심의 교회로 구축하면서도 단순히 성경공부로 끝나지 않고 소위 사경회를 통해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모임, 곧 부흥 사경회로 연결되어 한국교회에 부흥운동을 촉진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복음을 배우고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고 그리고 그것을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도록 훈련시킴으로써 한국교회의 질적 성장을 가져다 주었다.

이와 같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감리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감리교는 속회제도, 전도부인, 순회 사경반, 신학회 등을 도입하여 실천에 옮겼는데, 이들 제도의 근간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정신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근간을 이룬 사경회가 감리교 안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렸다. 감리교는 감리교 본연의 속회제도를 도입하여 도시의 교인들을 몇 개의 속회로 나누어 각기 지도자를 하나씩 정하여 속회를 인도하게 했으며, 새신자들을 관리하도록 만들었다. 그와 함께 비록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지방 전도사, 권사, 전도부인을 임명하여 교역자가 해야 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부여했다.

감리교는 장로교 사경회 제도와 유사한 순회 사경반을 조직하여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방 교회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사경반을 조직하여 목사가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이들이 교회로 돌아가 교인들을 가르치도록 하는 일종의 지도자 사경회였다. 지방 교회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과정을 가르치고 그것을 졸업하고 장래 교역자가 되기를 원하면 신학반으로 보내 완전한 감리교 교역자로 교육시켰다.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사경반도 운영했다. 지방 교회는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모이기 편리한 중심 도시에서 1주에서 2주 동안 사경회를 개최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사경회 때에 성경 가운데 한 권을 택하여 가르치거나 적당한 종교서적, 교회사 개관, 성경인물 전기, 감리교회의 규례, 때로는 음악이나 위생도 가르쳤다. 장로교의 사경회 제도를 그대로 본 딴 것으로 이 제도는 곧 감리교의 중요한 연중행사로 정착되었다.

신학 교육, 사경회 제도, 주일학교, 전도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중심 원리였고, 이것은 적어도 장로교 내에서는 더욱 철저하게 지켜졌다.

한국교회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입각하여 처음부터 사경회와 다른 신학 훈련의 제도를 통해 평신도 지도자들을 육성하여 이들을 사역에 동참시켰다. 성경 중심의 평신도 지도자 육성은 독립정신을 앙양하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자립과 자전과 자치를 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제공해 주었으며,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를 육성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형성해 주었다. 또한 한국의 개신교는 한국인에게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쳐 복음을 통한 문화 변혁의 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이능화는‘조선기독교 및 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에서“한국 개신교는 재래의 악습관을 개변시켰고 민족정신을 개조시켰는데 그 주요한 것을 예거하면 음사(淫祀)의 폐기, 계급의 파제(破除), 여성의 지위향상, 근로정신, 혼상례(婚喪禮)의 종간(從簡), 민주주의 사상의 도입 등이다.”라고 했다.

한국교회사(64)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Ⅳ. 복음의 확산

한국의 개신교는 금교령과 영아소동 등 예기치 않은 여러 가지 복음 전파의 장애 가운데서도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였다. 이에 한국에 파송된 개척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에 고무되어 기왕에 중시되었던 순회전도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당시 전도여행은 결코 낭만적인 여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때로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참으로 힘겹고 고된 여행이었다. 하지만 전도여행만큼 중요한 교회사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해리 로즈(Harry A. Rhodes)가 지적한 것처럼 첫 선교사들이 수행한 긴 순회 전도여행이 중요한 선교사역 정책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장·감 선교사들의 순회 전도 노력에 힘입어 1880년대 말 복음은 전국적으로 놀랍게 확산되어 나갔다.

1. 순회전도

1) 북부지역의 복음 전파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이후 북부지역에서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전 조용히 복음이 확산되고 있었다.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복음을 전해 놀라운 선교의 결실을 맺었고, 다시 언더우드와 다른 초기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조사가 되어 한국교회의 설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해서 한국의 복음화는 주로 한국인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것은 1893년 제1회 선교사 공의회가 한국선교의 지침으로 삼기 위해 채택한 10개의 선교 정책 가운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선교 정책은 노동자계급에 우선 전도할 것, 가정주부의 개종을 중요시할 것, 지방도시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교육을 실시할 것,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유의할 것, 성서 역간에 힘쓸 것, 모든 종교 서적을 한글로 출판할 것, 자급·자치의 교회를 만들 것, 신자
는 누구나 전도자가 되게 할 것, 의료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료하여 환자를 감화시킬 것, 그리고 지방 환자의 경우 왕진의 기회를 만들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케 할 것 등 민중을 대상으로 한 선교 정책이었다.

처음부터 복음이 한국인에 의해 저변 확대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있던 선교사들은 신학적인 훈련을 먼저 마친 후 임명하는 과정을 취하지 않고 임명한 후 훈련시키는 과정을 밟았다. 이와 같은 순서는 본래 전통적인 장로교의 입장은 아니었다. 미국 제2차 대각성운동의 과정에서 감리교가 사용했던 순회전도사 제도를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도입한 것
이었다. 북장로교 선교회는 1892년 전도구역을 세분하여 의주 전도사 김관근에게 평안북도 일대를 그리고 평양 한석진에게는 평안남도 일대를 관할하도록 맡겼다. 이들은 초기 한국교회의 설립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도를 충실하게 실행한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를 실시한 것은 감리교도 마찬가지였다. 감리교는
1888년 강재성, 조한규를 전도사로 임명하여 조한규에게는 배재학당의 파견근무를 맡겼고 강재성에게는 지방 전도사업을 맡겼다. 특히 강재성은 1892년 인천 전도사로 파견되어 인천교회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역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복음은 한반도 전역에 놀랍게 저변 확대되어 나갔다. 선교지 분할 협정이 비교적 충실하게 수행되어 남·북감리교가 서울을 거점으로 제물포, 수원, 송도, 원산, 원주 등 경기 중부와 충청남북 지역으로 선교를 확대해 나간 반면, 남·북, 호주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는 서울, 대구, 부산, 전주를 비롯한 남부 전역과 소래, 의주, 평양, 원산을 거점으로 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북부 전역에 널리 복음을 전했다.

(1) 북부지역의 복음 전파

한반도의 북부에 복음의 확장이 급속히 진행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에 의한 복음의 준비와 그 결실 때문이었다. 또한 북부지역의 복음의 확장을 가져다준 두 번째 이유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소래와 평양을 비롯한 상당수의 관서 지방에서 그 전쟁의 피해는 대단히 컸다. 일본과 청나라,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의 격전지가 주로 북부지역이었고, 때문에 이들 지역에는 전쟁의 상처가 깊게 패여 있었다. 전쟁의 공포와 상처는 지역 주민들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 복음의 문을 여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더구나 전쟁의 피해 속에서도 민중들과 호흡을 같이했던 선교사들로 인해 민중은 더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북지역에 복음을 확산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이들 지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국내의 어느 다른 지역에서보다 부흥운동을 간절히 사모하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장로교와 감리교 모두 마찬가지였다. 개척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물론 평양, 의주, 선천, 재령에 정착한 맥코믹신학교 북장로교 선교사들, 원산에 거점을 마련한 로버트 하디와 저다인 그리고 개성에서 사역하던 남감리교 크램, 스톡스, 갬블, 리드 모두 뜨거운 부흥운동의 열정을 소유한 이들이었다. 원산에서 활동하는 한국침례교의 아버지 펜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후에 입국한 동양선교회도 부흥운동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우리는 이 지역의 복음의 확장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고, 친히 역사를 이끌어 가셨는가를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① 의주 지역 순회전도

의주와 평양과 소래는 타 지역에 비해 선교사들의 순회가 잦고 비교적 두드러진 성장을 이룩한 지역이었다. 의주는 조선과 중국이 통하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조선과 청국의 밀접한 관계상 청국에 인접한 의주는 오랫동안 중요한 국경도시로 자리잡아 왔다. 따라서 어느 정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던 중국과 접촉이 많았고, 그 중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과 오랫동안 접촉한 이들도 있었다. 의주 출신 이응찬이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난 후 같은 의주 출신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를 포함한 네 사람이 1876년 만주 우장에서 로스의 동료 존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1883년 백홍준이 자신의 고향 의주로 돌아와 권서인 겸 전도인으로 활동하면서 의주에는 일찍이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1888년 11월에는 아펜젤러가 북부지역을 순회전도하면서 평양을 거쳐 의주로 가서 백홍준에게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된 박상모, 송상하 두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때 아펜젤러는 의주에서 1명의 세례교인과 14명의 학습교인을 얻어 감리교회를 창립하고 그곳에 교회 건물로 사용할 집도 구입했다. 이들 외에도 당시 의주에는 여섯 명의 장로교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 의주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심은 어느 지역보다도 높았다. 1888년 11월 25일에는 감리교가 지방 전도사로 두 명을 임명했다.

1889년 봄에는 언더우드 부부가 신혼여행의 일환으로 송도, 소래, 평양, 강계, 의주를 여행하면서 2개월 동안 600명의 환자들을 돌보았다. 비록 이 여행은 동료들도 반대할 정도로 위험한 여행이었지만 다행히 언더우드 부부는 한국 정부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행 허가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언더우드 부인은 1889년 4월 27일 신혼여행 중 의주에서 세례받기를 지원하는 자들 백여 명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언더우드
는 한국 안에서는 세례를 베풀 수 없다는 여행증명서에 기록된 규칙대로 국내에서 이들에게 세례예식을 시행하지 않고, 세례 지원자 100여 명 가운데 김이련, 김관근 부자를 비롯 33명을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데리고 가 그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도 거행했다. 언더우드에게 100여 명이 세례를 지원했고, 그 중에서 무려 33명이나 한 번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 그리고 이성하, 백홍준이 뿌린 복음의 씨가 얼마나 놀랍게 성장하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선교사들이 그곳을 방문하지 못하다가 1891년 5월 마펫이 동료 선교사 게일과 전도인 정공빈, 최명오를 동반하고 관서를 순행하면서 송천을 거쳐 8월에 평양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고, 의주에 도착하여 지방을 시찰하고 복음을 전하였으며, 압록강을 넘어 봉천에 이르는 1,400마일의 긴 전도여행을 강행했다.

이 여행에서 마펫과 게일은 1889년 언더우드가 33명에게 세례를 주었던 의주에서 2년 동안 선교사의 지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공동체가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했고, 또한 봉천에 가서 한국선교의 개척자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나 깊은 교제를 나누며 서로 간의 깊은 공감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한국 선교사들의 놀라운 복음의 열정, 선교적인 잠재력을 확인한 로스는 1892년 의주 청년들을 통해 이미 많은 결실로 이어진 자신의 한국인 선교사역을 한국 북장로교 선교회로 이첩시켰다.

이처럼 1891년의 전도여행은 북부지역 선교 확장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되었다. 마펫과 게일은 만주의 봉천에서 다시 동만주까지 전도여행을 계속해 한국인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고려촌을 순방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함흥에 들렀다. 서북 각 도와 만주 각 현까지 순찰하고 지방 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등 그 여행은 기대 이상의 성적을 얻은 전도여행이었다.

의주 지역에 복음이 놀랍게 확장되자 북장로교 선교회는 1891년 의주에 작은 집 한 채를 사서 전도인의 주택 겸 본부로 쓰면서 순회하는 선교사들의 임시 숙소로도 사용했다. 1892년 빈톤(C. C. Vinton)과 함께 의주를 방문했을 때 마펫은 한석진, 김정현, 김석례 3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평양에 새 선교부를 개설할 계획 하에 이 중 한석진을 평양에 거주하도록 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주시켰다. 1896년까지 마펫이 평양에 거주하면서 의주를 순회하다 휘트모어(N. C. Whittemore) 선교사가 이 지역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후 의주는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자주 순방하는 북장로교 선교회의 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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