죤 브로져 (John Broger) 2차대전이 끝나자 극동지역에서 방송으로 선교를 하려 했던 세 사람은 그 꿈을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태평양 제38기동함대 장교였던 죤 브로져는 방송선교의 강력한 꿈을 안고 귀국하였고 그의 친구였던 로버트 보우만(Robert owman - LA에서 기독교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었다)과 윌리엄 로버츠(William Roberts - 목사로 LA에서 라디오 프로에 출연하고 있었다)가 그의 꿈을 지지하고 협력하였다. 브로저는 상해로 가 그곳에 중계소를 세우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필리핀에 극동방송국 Far East Broadcasting Company)를 설립하였다. FEBC의 가청범위가 넓어지면서 청취자들의 편지가 쏟아졌고 많은 이들이 성경통신학교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 시작한지 채 2년이 안되어 12,000명이 원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구소련과 중국에서의 청취율도 대단했다. 14년간 사역한 죤 브로져는 미 합참의장의 요청으로 군대로 돌아가 고문관으로 사역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된 로버트 보우만의 지도하에 FEBC는 더욱 크게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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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와 레오 핼리웰 (Jessie and Leo Halliwell) 아마존 강 유역을 따라 18,000Km를 오르내리고, 정글을 따라 1,600Km를 여행하며 밀림에 둘러싸인 벨렘(Belem)과 마나우스(Manaus)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의료사역을 펼친 핼리웰 부부는 결혼 직후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정하고 안식일교회의 선교부에 자원하여 브라질에서 사역하다 의료사역의 필요성을 깨닫고 안식년중에 의학공부를 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1956년 아마존 인디언들 사이에서 25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핼리웰 부부는 은퇴하고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남미의 안식일교회의 의료선교를 총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 아마존강은 이동병원선으로 붐비게 되었으며 이로써 그들의 개척사역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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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벡커 (Carl Becker) 다른 어느 지역보다 아프리카는 항상 의료선교사들의 흥미를 끌어왔고 또 의료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의 복음화는 크게 진전되었다. 수많은 유명한 이들중 아프리카인들의 생명을 구하고 건강을 돌보는데 특별히 헌신된 의료선교사를 한 명 뽑는다면 콩고의 위대한 문강가(Munganga)인 칼 벡커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의사로 개업한 그는 아프리카내륙선교회의 의료선교사를 구한다는 편지를 받고 옛 서약을 기억하고 고민 끝에 콩고로 떠났다. 오이카에서의 의료사역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중 그의 첫 번째 목표였던 복음화를 위한 영적사역에 헌신치 못함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의료사역이 영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듯이 의료선교는 복음전파의 밑거룸이었다. 그의 대하여 한 아프리카 의대생은 “많은 선교사들이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많은 선교사들이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문강가(벡커 박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고 그를 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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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파이크 (Kenneth Pike) 기독교계나 학문계를 통틀어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는 SIL(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의 원장을 수년간 역임했던 케네스 파이크였다. 그는 중국내륙선교회에서 선교사로 적합지 못하다고 파송을 받지 못하였고 여러 선교회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하다가 위클리프캠프에 입교가 허락되었다. 그후 멕시코에 가서 미즈텍부족의 언어공부에 두드러진 진보를 보여 여름 위클리프 캠프에 교사로 초빙되게 되었다. 캐머론 타운센드의 조카딸로 번역 선교사로 멕시코에서 사였하기 위해 준비하던 UCLA를 졸업한 수재인 에블린 그리셋(Evelyn Griset)과 결혼하여 최상의 번역 선교사 부부가 되었다. 미즈텍어 신약성경의 번역을 10년만에 완료하자 파이크는 언어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번역선교사들을 돕는 일에 전력하였다. 그는 미시간 대학교와 SIL에서 강의와 연구를 계속하면서 음성학 이외의 언어학의 다른 분야로도 연구를 확대하였고 그의 연구는 전세계에 흩어져 일하는 성경번역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시카고대학의 에릭 햄프교수는 파이크의 첫 저서인 ‘음성학’은 ‘그 분야에서 가히 혁명적인 것이다’라고 하였고 덧붙여 지난 25년간 언어학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던 생소한 언어들로부터 만들어진 자료의 거의 절반은 전적으로 케네스 파이크의 연구와 노력, 가르침의 결실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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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로즈비어 (Helen Roseveare, 1925-) 영국의 지체높고 존경받던 콘월(Cornwall) 가문에서 태어나 캠브리지 대학 1학년때 회심, 숙부들과 이모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선교사로 헌신한 헬렌 로즈비어는 1953년 세계복음화십자군(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 WEC)의 선교사가 되어 콩고로 건너갔다.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그녀는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원 및 훈련학교를 개설하여 성공하였다. 후에 네보봉고로 발령되어 그곳에서 병원을 손수 세웠으나 후에 젊은 영국인 의사인 죤 해리스에게 그 책임자직을 넘겨주어야만 했고 이것은 그녀에게 무척 힘든 일이었다. 1964년 반군들로 인해 콩고는 유혈내전사태에 빠졌고 헬렌은 반군들에게 잡혀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안정된 후에 콩고에 다시 들어갔지만 흑인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그녀의 권위에 공공연히 도전하였고 심지어 동료들까지 그녀의 지도력에 회의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결국 20년 동안 이끌었던 학교를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후 더 큰 사역을 할 수 있게 하셨는데 그것은 기독교선교의 시급함과 필요성을 외치는 국제적인 강연자의 사역이었고 그것을 통해 더 큰 일을 감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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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프리드 (Paul Freed) 방송선교회 중에서 가장 크고 세계전역에 흩어져 있는 것이 트랜스 월드 라디오(Trans World Radio)이다. 1954년에 설립된 TWR은 오늘날 모두 합쳐 500만 와트 이상을 내보내고 있으며 전세계 인구의 80%가 가청대상이다. 이렇게 강력하고 훌륭한 방송 선교회가 설립되기까지는 랄프(Ralph)와 폴 프리드 부자의 헌신과 희생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TWR의 설립자인 폴 프리드는 선교사의 아들로 중동에서 자랐다. 휘튼대학과 나약선교사대학을 졸업한 폴은 유럽을 방문했을 때 스페인선교의 사명을 느꼈고 방송선교가 적합하다는 생각에 방송선교의 계획을 세웠다.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 모로코의 탕헤르(Tangier)에 아버지 랄프의 도움으로 어려움 끝에 “탕헤르의 목소리”가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철의 장막을 뚫고 동유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로코의 독립으로 몬테카를로스로 옮긴 TWR은 그 이후 세계적으로 그 방송망을 확대하였다. 헌신적이고 유능한 직원들, 기적적인 재정의 해결, 매월 선교부에 쇄도하는 수백 통의 편지들이 모두 TWR의 성공을 대변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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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스피어 (Robert E. Speer, 1867-1947) ‘학생자원운동(SVM) 정신의 구현자’라고 불렸던 로버트 스피어는 역시 SVM의 중추였던 죤 모트와 일생 내내 두터운 우정을 유지하 였고 모트처럼 평신도로서 해외선교운동에 헌신하였다. 프린스턴을 졸업한 그는 SVM의 순회서기가 되어 1년동안 천명 이상의 해외선교자원자들을 모집하였다.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중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선교부의 최고 행정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해왔다. 수많은 학생들을 선교사로 보내고 자신은 본국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 번민했지만 핵심자리에서 해외선교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수락하여 70세까지 46년간 사역하였다. 은퇴후에도 여러 대학과 집회에서 강연하며 해외선교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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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데이네카 (Peter Deyneka) 피터 데이네카의 슬라브복음선교회(Slav Gospel Association)은 자체적으로 방송국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방송을 복음전파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여겨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세계 선교방송국을 통해 방송하였다. 1914년 16세의 나이로 러시아에서 미국에 온 피터는 회심 후 러시아를 오가며 복음을 전하다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여 1930년 이후로는 여행도 복음도 전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동유럽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그는 비슷한 비젼을 가진 이들과 슬라브복음선교회를 조직하였다. 클래런스 죤스의 주선으로 HCJB의 단파로 소련에 방송을 시작하였고 폴 프리드가 탕헤르에 TWR 방송국을 세우자 피터는 이를 활용하여 더 많은 프로그램을 슬라브 국가에 보냈다. 극동방송국과 다른 방송선교회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1960년대에는 소련에만 매달 600개 이상의 SGA 프로그램이 방송되었고 피터는 소련을 다니면서 SGA의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SGA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방송선교가 역시 주된 사역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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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이 리더호프 (Joy Ridderhof) 방송선교가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한편 그 한계점이 있었다. 그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언어를 쓰는 부족들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어 있으며 설령 언어가 알려져 있다 할지라도 사용인구가 적으면 그들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방송할 수 없었다. 성경번역은 부족을 언어를 배운다는 것도 쉽지 않았고 또 그 언어를 문자화해서 부족들을 공부시켜 성경을 읽게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죠이 리더호프가 이런 문제점들을 위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는데 그녀는 온두라스의 작은 부족을 위한 녹음선교의 길을 개척했던 것이다. 1930년대 초에 죠이는 독신선교사로 온두라스에 갔는데 6년 뒤 건강을 헤쳐 고향 로스 엔젤스로 돌아왔다. 거기서 두고온 선교지 사람들을 생각하고 녹음을 통한 선교를 고안해 내었다. 그 이후 원주민의 목소리로 복음의 내용과 음악을 녹음하여 선교하는 녹음선교회(Gospel Recording)가 1941년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멕시코와 중미를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35개의 새로운 언어와 방언을 녹음하였고, 알래스카, 필리핀 그렇게 녹음선교의 사역이 펼쳐졌다. 현재까지도 녹음선교회는 그 사역을 계속해 오며 수많은 언어와 방언으로 녹음 테이프를 만들어 전세계에 배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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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베티’ 그린 (Elizabeth ‘Betty’ Greene, 1920-1997) 항공선교는 묘하게도 여성에 의해 시작되었다. 베티 그리인을 MAF (Mission Aviation Fellowship)의 설립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전문사역으로서의 항공선교의 개념을 처음 소개하고 항공선교 초기에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녀는 최초의 전임 사역자였으며 새로 탄생한 선교회의 최초의 조종사였다. 2차대전 초기에 공군에서 복무했던 뛰어난 조종사로 전쟁중에 기독학생회지에 항공선교의 필요성과 방향, 계획에 대한 논문을 썼고 그것을 읽은 해군 조종사 짐 트럭스톤(Jim Truxton)은 크게 공감을 하여 베티에게 항공선교회를 조직하는데 합류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MAF가 조직되었고 곧 위클리프선교회의 요청을 받고 베티는 멕시코 정글, 페루에서 사역하였고, 수단오지선교회의 요청으로 동부 아프리카에서 수단, 에티오피아, 우간다. 케냐, 콩고 등지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을 조력해 주었으며, 마지막 사역을 이리안 자야에서 수행하고 은퇴하여 본부에서 사역하며 항공선교를 홍보하고 조종사를 모집하는 일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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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날드 맥가브란 (Donald McGvran, 1897) 맥가브란은 인도의 하다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후 다시 20년 정도 더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대중운동(Mass Movements)에 대해 연구하였다. 오래전부터 그는 현재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서는 세계복음화라는 목표의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여러 기독교학교들에서 선교학에 대해 강의하였고 1961년에는 기독교 역사상 선교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유명한 교회성장연구소(Institute of Church Growth)를 세웠다. 그에게 있어 개선책은 대중운동이었다. 즉 부족 전체나 혹은 동질성집단(Homogeneous Units) 전체를 기독교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집단-개인의 개종은 개별적인 회심보다 훨씬 더 안정되고 교회성장을 지속하게 해준다. 동질성집단의 원리라고 명명한 맥가브란의 대중운동 개념은 1974년 로잔회의에서 발표된 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는 1955년 이전까지 모든 선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이고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선교방법을 뒤흔들어 놓았다. 맥가브란이 그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몇몇 신학교에서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선교학을 전문적 연구 차원으로 부상시켰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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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스트래컨 (R. Kenneth Strachan) 라틴아메리카선교회(Latin American Mission)의 설립자인 캔 스트래건과 그의 아내 수잔 사이에서 태어나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란 케네스 스트래건은 20세기 선교전략에 있어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었다. 그가 개발한 심층복음화(Evangelism in Depth)는 그의 저서 「복음화를 위한 혁명」 보여주는 바와 같이 가히 혁명적인 것이다. 아버지 사후 원치 않았던 선교회를 떠맡게 되었고 점차 사명감을 가지고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대규모집회를 통한 전도활동들은 외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왔으나 그런 방법으로는 라틴 아메리카 복음화를 이룰 수 없겠다는 회의가 일기 시작했고 결국 대규모 전도팀이 내방하는 것보다 교회가 중심이 되어 전도에 전도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중점적인 계획이라고 믿었다. 이로부터 교회의 총력동원(Total Mobilization of the church)이라는 전략을 개발해 내었다. 평신도를 훈련시켜 전도활동을 극대화한다는 취지의 심층복음화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선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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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피어스 (Bob Pierce, 1914-1978)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일에 나도 마음 아파하자”라는 좌우명을 가졌던 밥은 실로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의 친구였다. 미국 대공황의 어려움속에서 근근히 순회전도자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던 그는 청소년사역에 헌신하다가 중국에서 청소년집회를 인도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1947년 중국을 방문하였다. 두번째 중국에 갔을때 고아원을 방문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고 감기에 걸려있는 어린 소녀를 보고 ‘이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느냐?’라고 보모에게 항의할때 이미 수용인원의 4배가 넘는 고아들을 돌보고 있던 그 고아원의 보모는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하며 그 아이를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어 그 후로 밥은 기독교자선사업에 헌신하게 된다. 중국의 공산화로 그곳에서 사역할 수 없게 되자 1950년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국을 방문하여 불쌍한 아이들의 고통을 보고 국제선명회(World Vision International)와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음식과 의복과 약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몇 년이 안 되어 2,000명이 넘는 고아들을 돌보았고 수 년이 지나자 그 수는 100배 이상 늘어났다. 10여년간 그는 세계에서 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10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보낸 사자로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동서를 횡단하며 기독교인들에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도와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렇게 모금된 수십만 달러는 세계각처의 고아원, 병원, 복음전도집회소 건축을 비롯한 구호사역에 쓰여졌다. |
브라더 앤드류와 오픈도어스 선교회 (Brother Andrew & Open Doors) 브라더 앤드류는 네덜란드의 평신도로 성경을 자유롭게 사거나 읽을 수 없는 지역에 성경을 밀입하여 배포하는데 헌신하였다. 오픈도어스 선교회는 반기독교정권과 정면대결하는 정책을 펴고 있어 국가의 법과 권위를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으면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대답한다. 15년간 앤드류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단 한번도 체포당하는 일 없이 성경을 철의 장막 안으로 반입했다. 그가 「하나님의 일군」책을 쓰기까지 그의 사역은 거의 비밀에 싸여있었다. 그 책이 출판디자 후원금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전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역에의 참여를 희망해왔다. 동시에 공산국가들도 그의 사역을 알게 되어 그는 요시찰 인물이 되었으며 동구권 여행을 사실상 금지당했다. 오픈도어스의 유명하고 논란이 많았던 성경밀수작전은 1981년 “진주작전”이라고 불린 600만 달러를 들여 200백톤의 성경을 중국으로 반입했던 작전으로 타임스지는 ‘중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성경반입작전이었다’고 표현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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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윈터 (Ralph Winter, 1924-) 오늘날 혁신적이고 비젼에 가득 찬 선교의 지도자로 미국선교센터(U.S. Mission Center)의 랄프 윈터를 꼽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 공대를 졸업하고 코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프린스톤 신학교까지 마친 그는 과테말라의 마야 인디언 가운데서 10년간 사역하다가 도날드 맥가브란의 요청을 받고 풀러신학교 세계선교원에 합류하였다. 그후 1976년 무일푼으로 미국세계선교센터를 건립하고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 사는 1,700으로 추산되는, 20억이 넘는 미전도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막중한 짐을 짊어졌다. 미국선교센터는 여러 교회와 학생단체들과 연계된, 수십개 선교회로부터 온 300명이나 되는 사역자들을 망라한 ‘벌집’이었다. 센터는 본질적으로 선교단체들이 협력하는 ‘전략창고(Think Tank)’의 역할을 감당했다. 랄프는 ‘전시생활(wartime lifestyle)’을 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전시생활은 보통 때보다 돈이 더 들 수도 있고, 덜 들 수도 있다. 만일 어떤 군인이 참호 밖에서 휴대용 식량을 먹고 있다면 그는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조종하는 전투기는 한달에 4만 달러를 유지비로 쓸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전시는 평상시와 모든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선교를 위해 뛰는 사람은 그런 전시생활을 해야만 한다.’ 랄프가 선교에 끼친 최대 공헌은 많은 선교회들과 개인들이 그를 통하여 세계선교에 대한 계획과 비젼을 새롭게 하고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결심을 새롭게 했다는 데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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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리챠드슨 (Don Richardson) 오늘날 서구에서 가장 흥미를 자아내고 실제적인 선교이론가 중 한 사람이 돈 리챠드슨이다. 그의 책 「평화의 아이(Peach Child)」「대지의 주인들(Lords of the Earth)」은 타문화권 선교의 어려움을 평신도들에게 전해주었다. 그의 화해유비론(Redemptive Analogy: 영적진리를 토착민 풍습에 적용하는 원리)은 1973년 달라스 신학교의 한 세미나에서 발표된 후 많은 비판과 지지,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20세 청년이었던돈은 1955년 프레이리성경학교의 예배 때 뉴기니아 식인종에게 가겠다는 서약을 하고 1962년 첫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렸다가 아내 캐롤과 함께 뉴기니아로 건너갔다. 그들에게 맡겨진 싸위(Sawi)족은 배반과 배신은 이상적인 규범이고 식인풍습과 해골사냥의 풍습이 복합된 문화를 가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족이었다. 오히려 그의 사역때문에 가까이 오게된 부족들이 싸움만을 일삼자 그는 포기하고 떠나기로 하였다. 돈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서로 화해하기로 결정하고 특유의 평화의식을 거행했다. 그것은 자기의 자식을 적에게 주고 대신 한 아이를 데려옴으로써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돈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희생하신 뜻을 싸위족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유비가 되었다. 돈의 가장 뛰어난 학문적 걸작은 기독교 개종운동을 다룬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영원(Eternity in Their Hearts)라는 책이다. 그가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창조자를 인정하는 “어떤 위대한 정신(One Great Spirit)”이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4장 16-17절의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을 증거하셨다는 말씀에 기초하여 돈은 선교사들에게 자신감을 갖고 사역하라고 권했다. 그는 연구를 통하여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의 신 개념을 기독교와 관련시키면 큰 성공을 거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선교사들은 이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열심만 내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아마 돈 리챠드슨 처럼 평신도나 학자들에게 똑같이 지지를 받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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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왕 (Thomas Wang) 중국 북경의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토마스 왕은 11살때 불타는 전도자 죤 성을 통해 회심하고 15세때 하나님의 사역에 전임으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어바나선교대회에서 도전을 받고 1차 NACOCE(중국선교를 위한 북미대회)를 개최,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380명 모임으로써 선교를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1974년 스위스에서 열린 로쟌대회에서 중국교회 지도자들을 독려하여 CCCOWE (Chinese Coordination Center of World Evangelism - 세계선교를 위한 중국협력센터)를 창설하고 1976년 홍콩에서 중국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선교를 위한 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로쟌운동의 국제총무로 임명되어 1989년 마닐라에서 열린 2차 로쟌대회의 사무총장으로 운영을 담당하였다. 1989년 서기 2000년까지 대사명의 미완성과업달성을 목표로 미전도종족을 향한 교회와 선교세력들을 규합, 조정하는 기독교 21세기운동(AD 2000&Beyond Movement)을 주도하였다. 기독교 21세기운동의 여호수아작전2000은 세계종족의 제자화를 향한 기독교역사상 최대의 전략적 동원운동으로 이 운동을 위하여 여러 나라의 여러 교단과 선교기관들이 열정적으로 후원하였다. “2000년까지 모든 종족에게 교회를!”이었다. 그 비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교회가 없는 종족가운데의 교회개척사역에 헌신하는 움직임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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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죤스톤 (Patrick Johnstone) 패트릭 존스톤은 20세기 선교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세계선교의 비젼에 관한 한 그는 윌리엄 캐리에 근접한 인물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 시대의 윌리엄 캐리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하였고 현재는 WEC 국제본부 선교정보연구실 대표로 있는 그는 그의 책 「세계기도정보Operation World)」를 통해 20세기 교회의 선교사역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전세계의 각나라, 각 족속의 복음화상황이 손에 잡히게 들어옴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남은 과업을 바라보며 비젼에 불타게 했다. 선교정보 수집과 분석, 전략설정에 평생을 바치고 있는 선교전략의 세계적 권위자인 죤스톤의 두 번째 저서 「교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큽니다」는 매우 광범위하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에 선교적인 통찰력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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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시 (Luis Bush) 현대 세계적인 선교지도자인 아르헨티나에서 태생의 루이스 부시는 1989년 마닐라에서 열렸던 2차 로쟌대회에서 미전도종족이 집중되어 있는 위도 10-40도 지역을 표현한 “10/40창” 개념을 주창하여 이 지역의 복음화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개념을 통해 1993년부터 시작된 “창을 통한 기도”운동은 3천5백만명의 중보기도군단을 동원하였다. 부시는 한국 서울에서 열렸던 GCOWE’95에서 전세계에서 최우선 미전도종족을 향한 교회개척운동인 여호수아작전 2000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재까지 있어왔던 어느 것보다도 그 규모가 크고 널리 보급되어진 세계선교의 네트워크인 기독교 21세기운동(AD2000 & Beyond Movement)의 국제총무로 사역하였고 현재도 선교운동의 지도자로 선교동원과 강연에 힘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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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 럽 (John Robb) OMF의 선교사로 말레이시아에서 사역하였던 죤 럽은 그후 월드비젼에 속하여 100여개국을 돌며 선교사훈련 및 자문으로 일하였고 부탄, 캄보디아, 보스니아, 모로코 등지에서 초교파적 특별기도운동을 일으켰다. 기독교21세기운동(AD2000 & Beyond Movement)에서 미전도종족 국제총무로 사역하였고 현재 전세계의 선교 네트워크들 간에 연결점이 되어 협력사역을 조장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어진 대사명라운드테이블(GCR- Great Commission Roundtable)의 지도자로 협력선교의 선봉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종족선교개념의 힘」,「평화를 만드는 기도의 권능:발칸반도 등 분쟁지역 사례」등이 있다.
| | 선교자료: http://www.omygod.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