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예술선전대 가수로 활동하다 2000년 6월 가족과 함께 입국, 현재 탈북동포사랑회를 섬기고 있는 김명희 선교사를 만나 그의 삶을 들어봤다.
1996년 부모형제 17명이 탈북하여 서울에 정착하므로 북한에서 더 이상 생활할 수 없어 1999년 7월 중국으로 탈북 하던중 남편은 체포되어 북한 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탈북 중국 심양에서 기다리는 동안 미국과 한국선교사들이 머물며 활동하는 분의 집에서 생활하던중 주님을 영접하게 됐다고 한다.
어느 날 가족들이 두통이 심하고 신열이 나면서 몸에 종기까지 났는데 사진전단이 붙은 수배령이 내려있는 상황이라 병원을 갈수 없었다고 했다.
점점 심해져 가는 자녀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고통스러웠던 그는 선교사들을 찾아가 기도를 부탁했고 기도 받는 가운데 두통과 신열이 내려 3일후 종기까지 깨끗하게 치료되는 체험을 경험하고 더욱 주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서울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체험한 이야기를 하니 어머니는 9살때부터 남편도 자식들도 모르게 50년을 기도로 살았다고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기도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김 선교사는 중국을 떠나 미얀마로 내려가면서 또 한 번 주님의 사랑을 체험게 됐다. 공안들이 찾아왔을 때 아들이 유창한 중국말로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 중국말을 한마디도 못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을 할까 하고 아들에게 물어보니 나도 몰라 그냥 나오는 대로 말을 했어라고 대답을 했고 나중에 그것이 방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4일의 기차여행을 마치고 미얀마에 도착해 대사관에서 들은 이야기는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말뿐이었다. 우리를 인도하던 선교사는 농장에 우리를 맡겨두고 잠시 중국에 다녀오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돌아가 버렸다
농장은 마약중독자들이 일하는 곳이라 언제라도 생명을 잃을 수 있어 원망하며 두려움속에서 있어야 했고 자녀들을 지키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한다.
며칠이면 한국으로 갈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주일, 한달, 4개월이 흘러도 갈수 있는 방안이 생기지를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바위에 올라가 눈물로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기도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모여 있는 일꾼 중 한 아들이 칼을 들고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설치고 있어 너무 무서워 아무도 나서지 못해 그저 지켜만 보는데 어느 순간 내 마음에 담대함이 생겨 그 아들의 손을 잡고 사탄아 물러가라! 를 3번 외치니 아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일이 일어난 후 농장 주인이 찾아와 기도를 해 달라며 집으로 무작정 끌려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100여명의 노승들이 모여 주인집 할머니를 가운데 눕혀놓고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고 했다. 그 때 이미 할머니는 맥이 없었고 코에 손을 대보니 숨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하나 걱정을 하는 순간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음성이 들렸다.
할머니를 안고 한참을 기도하니 후하고 숨을 내뿜자 눈을 떠보니 노승들의 모습은 없었고 3일동안 더 머물면서 기도해 주는데 마치 가족처럼 대해주어 주님의 살아계심을 또 다시 체험을 통해 느끼고 한국으로 갈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수 있었다.
그 후 김 선교사는 금식기도를 시작하고 9일째 되는 날 대사관에서 찾아와 태국을 걸쳐 김포공항에 내리게 해주셨다고 한다. 김 선교사는 한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정착금은 사기당하고, 빌려주고 보증을 서주면서 모두 잃어버려 갈 곳이 없을 때 교회 지원을 통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됐다며 주님과 교회에서 베풀어 주신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저 탈북자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또 더 주님을 깊이 알아 바르게 섬기며 전하고 싶어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며 생명 다하는 날까지 주를 위해 헌신할것을 강조하면서 변하지 않도록 기도를 부탁했다. 김 선교사는 현재 고촌중앙교회를 섬기며 통일안보강사 찬양간증사역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