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신학입문』

                                -칼 바르트-

                                        


1. 복음주의 신학의 특징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고 그들이 섬기는 여러 신들과 신성시 여기는 대상(자연..)들이 있다. 그들에겐 각각의 신학이 있고, 그들은 그것이 유일하게 옳은 신학은 아니지만 최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학”이란 하나의 특수한 학문으로서 “하나님”을 인지하고 하나님을 이해하며, 하나님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신학이라고 할 때, 이것은 신약성경과 16세기 종교개혁을 생각나게 한다.  여기엔 두 가지 고백이 있다. 1)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문서에 그 기원이 숨어 있고, 신약성경의 복음서 기자, 사도 및 예언자들의 문서에 밝히 게시된 신학이요, 2)16세기 종교개혁 때 재발견되어 채택된 신학이다.

 “복음주의적”이란 말은 “보편적(catholic)"이고 ”에큐메니칼“한 연속성과 통일성을 뜻한다.

이러한 신학은 복음의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바 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며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이 하나님을 이 하나님이 계시하는 방법으로 인지하고 이해하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학문적인 특징을 알아보면,

1)하나님이 복음주의 신학 보다 훨씬 우월하시고, 하나님은 인간과 신학을 향해 자비롭게 다가오시는 분으로 항상 새롭게 계시되어야 하고, 발견되셔야 할 분이다. 하나님의 행동들은 유일회적이고 너무 독특하여 결코 (다른 어떤 인간의 학문으로도, 신학을 포함하여)되풀이 될 수 없다.

2)복음주의 신학은 세 가지 종속적 전제를 갖고 있다.

 가)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자신을 알리실 때 인간이 변증법으로 풀 수 없다.

 나)하나님께서 신앙을 주심으로 자기에게 계시가 일어났음을 인정하고 고백한다.

 다)특정한 믿는 자들은 신앙의 이성(특별한 인지능력, 판단능력, 언표능력)을 받아 하나님께 헌신하는 신학적 노고(연구)를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실존의 증명과 주권의 증명을 전제로 하여 생각하고 말한다.

3)복음주의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의 행동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행동사안에서 자신의 실존과 본질을 증명하신다.

4)하나님은 자유하신 분으로 인간과 함께 하시는 분(인간 안에,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시다. -임마누엘 하나님.


I. 신학의 자리


2. 말 씀

  신학의 “자리”는 자신의 대상으로부터 연유하는 출발점을 말하며, 신학은 그 출발점으로부터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및 실천신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신학이란 말은 “로고스”(論)라는 말을 내포한다. 신학은 “말들”(Logia)이요, 논리(Logik)요“논리체계”(Logistick)이다. “로고스”(Logos)는 일단 “말씀”(Wort)으로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이 신학의 자리를 규정하는 첫 번째 것이나 유일한 것은 아니다. 신학은 이 말씀에 의해 창조되고 일깨워지며 도전받는다. 그래서 신학은 겸손하고 자유로운 학문이다.

 신학은 말씀의 증인들의 말을 해석하고 해명하며 이해시키는 것이다. 말씀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해석조차 할 수 없다. 신학의 자리는 말씀 밑에 있다. 하나님은 그의 행동을 통하여 그가 말씀하시는 바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좋으신 행동이기에 복음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과 계약행동을 보이신다. 즉 계약체결-지탱-수행-완성의 역사. 복음주의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한 내용과 완벽한 형태로 듣고 이해하며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은혜의 계약과 평화의 계약에 관한 말씀이다. 신학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며 예수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이 두 역사는 연계성과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신학은 경청해야 한다. 

 

3. 증인들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증인들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관심은 저들의 증언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로고스이다. 이것은 간접적인 정보이지만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다. 구약의 증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들, 계명들, 심판과 위협이 말씀을 통해 백성들에게 들려졌다. 사도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조명과 가르침을 받은 자들로서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기록하였다. 신약성경의 증언들의 기원, 대상과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행동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속사와 계시사이다.


 <복음주의 신학>과 <하나님 말씀의 성경적 증거> 사이의 관계;    

1)신학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므로,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하던 일과 복음주의 신학이 하는 일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증인들은 하나님 말씀에 정위(定位)된 인간의 사고방식과 언어로 증언하였다.

2)그러나 신학은 예언자나 사도들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고, 최초의 증인들을 통하여 저 말씀에 대해서 묻는다.

3)신학의 자리는 성경의 증인들의 자리 보다 높지 않다. 현대의 훌륭한 신학자라도 그렇다.

 성경적 증인들은 그들의 특수한 시각에서 특수한 양식으로 계시된 말씀에 대해서 생각했고, 말했으며, 기록하였고, 이 말씀과 직접적으로 충돌을 통하여 행동했다. 

4)신학의 자리는 성경의 자리 밑에 있다. 

5)신학자에게 중요한 단 한 가지는 하나님과 친숙하게 되는 것이다. 신학은 성경에서 출발하여 성경으로 항상 돌아감으로 이 대상을 만난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거한다.”

6)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행적의 다양한 증거를 만나는데, 신학은 동일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신구약으로 유랑하는 것이다. 

7)신학은 성경 증언 안에서 하나님의 로고스를 항상 새롭게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시도함으로 응답한다. 성경 본문의 인간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반사시키고 메아리치고 있다는 사실과, 또는 어느 정도 그러한가를 다시 이해하고 항상 새롭게 밝혀야 한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구절이든 자명한 것으로 전제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어비평학적, 역사비평학적 분석과 함께, 가까운 본문과의 관련성, 먼 본문과의 관련성도 주의깊게 연구하며, 여러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서 탐구해야 한다.


4. 개교회로서의 공동체 (Die Gemeinde)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인들을 만나는 곳은 “개교회로서의 공동체”이다.

‘교회’라는 표현은 “기독교”, “믿는자들의 회중”, “성도들의 교제”라는 세 가지로 사용될 수 있어서 “개교회로서의 공동체”라는 단어를 사용함.

  하나님 말씀은 1)신뢰에 의한 신앙과 순종적 수용을 요구 하고, 2) 세상에 대하여 말씀의 증인이(둘째 서열의 증거, 첫째는 예언자, 사도들) 될 것을 요구한다.

  세상에서 공동체의 역할은 1)세상에 실존한다는 사실로 말하며, 2)세상 문제에 독특한 태도로 말하고, 3)사회의 연약한자들에 대한 말없는 봉사로서 말한다. 또한 4)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으로 말한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진리에 대한 물음’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바르게 이해하고, 철저하게 숙고하며, 명쾌하게 표현하는가? 둘째 서열의 증거를 잘 수행하는가? 세상문제에 대한 바른 입장에 서 있는가.  말 없는 봉사활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특수 활동; 신학활동 -공동체의 행동을 ‘진리 물음’에 조명하여 검토하고, 설교, 교육, 목회 상담의 말들이 하나님 말씀과 바른 관계를 가졌는가를 항상 새롭게 물어야 한다.

 신학은 전통에 의하여 규정된 교회 공동체의 선포를 ‘진리 물음’의 불에 노출시켜야 한다. 신학은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맹목적인 수긍과는 구별되는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의 성격을 갖도록 해야 한다.

 신학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해야 할 일; 세 가지

 1)신구약 성경 본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신빙성이 있는 증거인지, 그렇다면 어느 정도 그러한가를 물어야 한다.

 2)교회 공동체의 사고와 말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여러 가지로 뒤얽히고 혼동된 역사를 갖고 있다. 교회 공동체의 교리들, 신조들, 신앙고백들은 여러 유혹을  막기 위한 문서이다. 이러한 전통도 진리물음 없이 마구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신앙의 지성’에 근거하여야 한다.

 3)신학의 역사가 교회 공동체를 결정짓는 전통에 속하지만 , 선배들의 신학을 귀기울이면서 물음 제기를 하고, 더 좋은 해석을 내서 새롭게 수용해야 한다.


5. 성 령


 성령은 루아흐(Ruach)요, 프뉴마(Pneuma)이다. 움직이는 공기, 입김, 바람 및 폭풍을 의미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분으로 성부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찬송을 받으셔야할 분으로(니케아 신조),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요 성부 성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하신 분이다.

 성령은 성자 실존의 기원, 사도들의 근원, 원시 교회공동체의 근원이시다.

 복음주의 신학이 성령 힘 영역 내에서만 복음의 하나님에 대해 겸손하고, 자유로우며, 비판적이고, 기쁨에 넘치는 학문이요 영적인 신학이 될 수 있다. 성령이 신학에서 떠나는 경우 두 가지는 1)신학이 성령의 인도와 경고를 수용하지 않고 자기 고집을 세울 때, 2)성령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을 망각하고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이다.( 교직, 성례, 안수, 봉헌, 사죄행위에 성령이 항상 전제 되어 있는 것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성령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와 신학에게 자유롭게 은혜를 베푸는 생명력이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려면 “성령님이여 오시옵소서!”라고 간청해야 한다.


II. 신학적 실존


6. 놀라움(경이, Wonder)


 복음주의 신학은 한 인간(또는 신학자)의 실존과 행동 속에서 맥박치는 역사이다.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신학적인 인지, 탐구 및 사고의 시작에서 “놀라움”을 경험한다. “놀라움”은 “기적”이란 말에서 나왔다. 이것은 상식적인 경험의 규범과는 상충되는 그 무엇의 현존의 역사가 일어난다. 성경에서는 “기적”을 “표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적들은 임마누엘의 역사 속에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들이다. 이것은 현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도움을 주고 인간을 구원하는 사건들로 새로운 말씀에 의해서 일어나고, 인간들에게 소망으로 다가오는 큰 빛이 미리 비추어진 것이다. 이 가적들은 임마누엘 역사에 대한 성경적 증언들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이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표증에 불과하며,  새로운 것이란 새 인간 예수를 말하며,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자이고,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의 성취요 완성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고지되었고 신약의 예수님 안에서 완결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자비이다.

 새 것이란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매듭짓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예수님은 모든 기적들 중에 기적이신 , 무한히 경이로우신 분이다.  이 분에 대한 놀라움은 인간을 필연적으로 가장 깊은 놀란 인간이 되게 한다. 신학자가 신학자 될 수 있는 것은 충격적이고 근본적인 놀라움에 의한 것이다. 신학자는 이 은혜를 수용한 사람으로서 이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신학활동을 한다.


7. 관 여


  신학은 진지한 학문이 되어야 할진대 단순히 경탄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기적이 인간에게 놀라움을 경험하도록 할 때, 그 사람은 그 대상에게 관여되어진 인간이 된다.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부르시고 참여케 하시며 탐구하게 하신다. 신학자는 그 대상에 의해서 붙잡힌 자이고 , 그 대상에 의해서 압도되지 않으면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없다. 

 신학자의 실존에 대해서 알아본다. 

1)신학적 실존;(세상 안에서의 실존) 신학적인 실존이란 각 인간의 실존처럼 우주의 현세 속에 있는 실존이다. 이 실존은 세속 시간의 한 토막 속에 있다. 모든 자연인과 똑같은 환경 속에 있으면서 특수 과제에 참여한 피조물로서 실존한다. 모든 점에서 다른 사람과 나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그러나 신학자는 하나님 말씀에 직면하여 살고 있다. 신학자는 다음사실을 은폐시킬 수 없다. 1)하나님 말씀은 인간의 온갖 곤경과 약속들보다도 더 심오한 곤경과 고차원의 약속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2)하나님의 말씀은 전 인류의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이요,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맺어졌으며, 성취된 인간과의 은혜의 계약이요, 하나님이 인간과 이룩하신 화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동시대인의 모든 짐을 나누어지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인 신학자의 마음을 꿰뚫고 들어가 문제시하고, 관계하며, 관여한다.

 2)신학적인 실존은 인간 일반의 실존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실존이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존이다. 신학자는 이 세상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고립될 수 있고, 이것을 탈피하기 위하여 기독교의 일에 더 참여한다. 신학자는 예배 질서 설교에 대해서 진리물음을 할 임무가 주어져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학자가 자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신학자에게 찾아오셔서 교회 공동체를 심판하신다.

 3)신학적인 실존은 세상 안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실존한다. 신학자 개인의 피택과 칭의, 성화 소명, 기도, 활동, 그의 능력과  청지기적 사명, 금전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이성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신학자는 자신의 기능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엄습 받은 자요, 질문 받은 자요, 고발 받은 자요, 심판받는 자요, 위로받는 자요, 경고 받은 자이다. 신학의 대상은 전인적으로 관여하며, 가장 사사로운 것까지도 관여하신다.

  

8. 책임적 관여 (Commitment:사명)


 하나님은 인간을 격려하고, 일어나 걷게 하시며 인간을 자유케 하신다. 그러나 그 대상이 인간에게 가도록 명령하고 그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를 사용하도록 명령하신다. 이것을 “책임적 관여”라 한다. 책임적 관여는 신학자의 全 실존을  포괄한다. 신학자의 실존은 그의 특수기능 때문에 책임적으로 관여한 실존이다. 신학만이 가져야 하는 방법론(법칙성); 신학은 단순한 “놀라움”과 “관여”를 넘어서서 인식과 고백을 위한 책임적 관여로 전진해나가야 한다.

 신학자는 “신앙의 지성”을 추구한다. “신앙의 지성”의 특성에 대해 알아본다.

 1)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은 통일성을 갖는다.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이 있다.

  신앙의 지성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출발하여 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신학적 인식은 성경의 다양한 요소들로부터 하나의 참 구심점을 향한 인식이다. 그 중심은 예수이다.

  신학적 인식에서 “본다고 하는 것”은 신학의 대상의 구체적인 형태를 주의 깊게 자세히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하나의 형태를 다른 것과 “함께 본다”. 또한 하나의 특정한 형태 속에서 그 대상의 한 형태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신학적인 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바라봄”, “함께 봄”, “들여다 봄”이다.

  진정한 신학적 인식의 첫 번째 표준은 중심이신 예수“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으는 인식에 있다. 즉, 모든 생각들, 개념 및 말들을 이 중심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출발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모으는 인식에 있다.

2)신학의 대상이란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나타난 복음의 하나님이신데, 이 대상과 신학자의 인식의 관계는 주종 관계와 같다. 신학은 어떤 통찰법칙도 신학체계의 중심으로 인정될 수 없고, 신학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대상에게만 속박되어 있다. 신학은 자신의 대상, 즉, 신적 로고스로부터 산출되어지는 논리, 변증법, 수사법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신학은 자유로운 학문이다. 신학은 인간의 모든 인지능력, 판단능력 및 언어능력을 하나님께 순종시키면서 사용해야 한다.

“신앙의 지성”의 두 번째 중요한 표준은 신학(의 통각)보다 그 대상이 우선이다.

3)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은 하나의 일정한 성향, 일정한 강조와 경향 및 뒤바뀔 수 없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 신구약 본문을 보면 이중성이 있다. 이 이중성은 인간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Yes" 와 "No". 복음/율법,  은혜/심판, 생명/죽음. 이 둘 중에 하나가 먼저고 다른 하나가 뒤 따르며, 하나가 위이고 다른 하나가 아래이며, 하나가 크고 다른 하나가 더 적다.

하나님의 “Yes"와 ”No"는 상호 보충적이거나 상극적인 것이 아니다.

 신학적 인식의 세 번째 표준인 신학의 대상이 지닌 내적 경륜이다. 즉, “Yes"가 ”No" 보다 우월하며, “복음”이 “율법” 보다 우월하고, “심판” 보다 “은혜”가 우월하고, “죽음” 보다 “생명”이 더 우월하다.


9. 신 앙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많은 인간 가운데 한 인간을 자유케 하여 일어난다. 인간이 그 자신은 보잘 것이 없으나 하나님에 의하여 미 말씀을 긍정하고 신뢰하며 순종하도록  부름 받았고 자격을 부여 받았다. 한 인간이 하나님의 행적에서 언표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남으로써 신앙에로 자유한 인간이 되었다. 이  대상이 그를 항상 다시 만나며, 이 대상에 대한 긍정과 신뢰를 항상 다시 가능케 하며, 순종하게 할 때, 이 인간은 새롭게 된다. 

  신학의 대상은 이 신학자가 신학적으로 인지하고, 탐구하며, 사고하며, 말할 수 있도록 그를 주장하신다. 신앙의 강조점  몇 가지를 지적하면;

 1)신앙이란 하나의 확고하고 확실한 약속에 대한 냉정한 포착이요 담대한 포착이다. 이것은 신앙에로 자유하게 하시는 성령의 현존과 행동에 의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 신앙은 강요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행동으로, 하나님이 부여하신 은총에 대한 감사로 응답하는 것이요, 이 은총의 자명한 결과이다.

2) 신앙이란 하나의 역사(歷史)이다. 신앙은 어떤 상태나 어떤 속성도 아니다. “그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에 대한 신앙”,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신앙은 신념이 아니다. 여러 명제적 진리 조항(신조, 교리 등등)에 대한 신념이 신앙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믿는 것이다.

3)신학자에게 필요한 신앙의 순수성, 견고성에 대한 표준은 신앙이 강하고 깊고 불같은 사실에 있지 않다. 적은 신앙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정위되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신학적으로 실존한다.

4) “주여 나의 불신앙을 도우소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기도를 드림으로 “ 나는 믿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받은 자는 신앙의 지식을 위한 활동과 신학연구의 활동을 할 수 있다.


III. 신학을 위협하는 요소들


  세상에 있는 많은 신학들은(타종교) 자기 대상에 대한 깊은 불안, 불안전 및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 원인은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자체에게 있다.

 신학과 신학자를 공격해오는 불확실성이다. 이 의심에 찬 불확실성은 “놀라고“ ”관여되고“,”책임적 관여를 한“ 신학자에게도 찾아 온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고 결국엔 흡수되어 버린다.  신학을 위협하는 요소에는 의심, 고독, 시험(하나님께로 오는)이 있다.


10. 고 독


 고독의 이유;

1)신학은 세상 사람이 많이 다니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고 험한 길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고독을 느끼게 된다. 단과대학에서도 신학자의 자리는 가장 별 볼일 없다.

2) 교회에서도 신학자는 고독한 자리이다. 또한 목사는 목사직에 따르는 후광 때문에 그가 사는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3)한 시간의 교회 설교 / 세상에서 온갖 매체를 통해 듣는 것에는 양적으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신학적인 노력 과제가 고립을 느낀다.

 그런데 이 “고립”은 신학의 본질과 상치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이기 때문에 신학은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한 변혁이요 계시이며, 최대한의 보편사이다.

 신학의 고독을 없애려는 시도는 실현될 수 없다. 신학은 “순례자들의 파생적 신학”이다. 이 순례자들의 눈은 어두우나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인식에로 조명 받았고,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고 나아가지만 미래에 있을 보편적 계시의 영광을 모두 투시할 수 없다.

 신학적 인식, 신학적 사고, 신학적 언표는 결코 보편적인 인식, 사고, 언표가 아니요, 보편적인 것이 신학이 될 수 없다. 

 이런 고독은 교회 공동체에도 있다. 신학자는 교회 공동체에서 뿐만 아니라 동료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고독해야하고 이것을 감수해야 한다.

 신학은 자신의 질문과 응답에 있어서, 위대한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 기독교인, 비기독독교인들과 의견대립을 느낀다. 신학의 중심 테마는 ‘새로운 우주 속에서 새로운 인간이기 때문에, 그 책임에 있어서 비판적이고 항상 혁명적인 일을 수행한다. 따라서 실천적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사고와 의견에 상충된다.

  신학이란 신학에서 직.간접으로 결과하는 윤리적, 실천적 충격 때문에 세상삶드이나 경건한 무리들에게도 통속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고독을 참고 견뎌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1. 의 심

신학을 위협하는 “의심”은 신학 자체 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고독‘ 보다 더 위협적이다

 의심은 두 가지 형태로 신학을 위협한다.

첫째는 신학 활동 전체의 본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의심- “진리물음” 제기로서 “의심”

 당연히 있어야 할 것.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의 시각에서 진리물음이 제기하여 새롭게 탐구해야 한다.

둘째는 “고독”과 같이 참고 견뎌야 할 성질의 것으로 “의심”이다.

 우리가 신학활동을 감행할 수 있으면서도 수행할 수 있을까라고 불안을 느끼는 경우이다.

 또한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 임마누엘의 역사에 대한 의심 등등-“yes"와 ”No"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방황하는 것으로 확신이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인간이 그의 근원과 목적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병든 사고요, 부패와 오류에 항상 노출된 사고이다. 이것은 기도로만 넘을 수 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의심의 세 가지 원인과 세 가지 형태;

1)이세상의 권세와 권력이 무서운 힘으로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항할 때, 신앙에 대한 회의가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힘 보다 우월하다.

2)교회 공동체의 연약성, 불일치, 부패, 설교(잘못된) 때문에 회의를 기질 수 있다. 역사적으로 십자군, 종교 전쟁, 마녀 사냥, 노예문제, 인권문제, 사회정의 문제...

3)사생활의 구조적 결점 때문에 호의를 느낄 수 있다. 즉 이원론적 삶- 하나님말씀에 대한 의지/세속적이고 하잘 것 없는 의지를 함께 갖고 산다. 신학적 사고, 언어, 행동/자의적인 사고 언어 행동을 함께 갖고 있다.

  이러한 “영양실조”와는 반대로 “과식”도 있다. 이것은 그의 관심이 오직 신학 작업에만 몰두해 있는 것으로 “영적 권태”에 빠지게 된다.


 다음 세 가지로 결론을 짓는다.

1) 자신이 회의론자라는 것을 회의해서는 안된다. 그는 본의 아닌 회의자요, 회의는 완결될 수 없다고 회의하지 않는다.

2) 그의 두 번째 형태의 의심이 무성에 기원을 둔 나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회의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이 빼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교태를 부려서는 안된다.

3) 신학자는 아무리 극단적인 회의에 직면하여서도 절망해서는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

 

12. 시 험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도 위협을 받는다. 신학은 밖으로부터(고독), 안으로부터(의심), 위로부터(시험) 위협을 받는다. 신학은 자신의 작업의 모든 나무, 풀, 지푸라기를 태워버리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의하여 연단을 받는다(시험). 신학자가 당하는 시험이란 인간에 의해서 기도되고 작동된 작업으로부터 하나님이 피하시는 사건, 얼굴을 가리시는 사건, 성령의 현존과 행동을 거부하시는 사건이다.

 신학은 아무리 훌륭해도 그 자체가 죄악되고, 불완전하며, 부패한 인간의 행적이기 때문에 교회와 세상에서 전혀 쓸데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자비란 하나님의 선택인데, 이 선택 안에서 또 유기하신다. 하나님의 자비란 부르심인데, 이 부르심 안에서 작별을 고하기도 하시고 제거해 버리기도 하신다.

 모든 신학 활동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유용하려면 하나님의 불에 노출되어야 하고 이 하나님의 불을 통과하여야 한다.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모든 신학은 비난을 받을 만 하며 하나님에 의해서 시험에 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자는 언어적 형식과 구조를 다룰 때 자신의 개념을 비유 정도가 아니라, 실체 자체와 동일화하는 주제 넘는 짓을 하지 않았나? 신학이 하나님의 로고스를 그것의 유출들 속에 가두어 두며, 그것의 유추들을 하나님 보좌까지 높여 이것을 예배하고 선포하지 않는가?

2) 신학활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학도 인간적인 허망한 표출인 것 같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마음과 입술로 반목질시하며 글을 통해 깊은 불신을 나타내며, 우월감을 풍긴다.

3)신학은 본성상 이론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비난받고 시험받을 만 하다. 참 하나님과 참 인간 사이의 구체적인 상황을 상실하고 있다. 신학의 영역과 세상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부조화!

4)신학이 이룩한 성취에 있어서도 시험을 받을 만 하다. 신학이 교회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였는가? 또 세상을 향한 교회의 봉사를  진척시켰는가? 오히려 잘못 인도하고 봉사를 방해하지는 않았나?

  여기에서 제기된 위협이란 신학이 언제 어디서나 잠재적으로 받고 있는 위협이다. 신학이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고는 살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시험은 신학자와 그의 놀라운 작업에 부여되는 하나님의 은총의 한 계기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너무 무섭고 심하지-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태우는 불이라 불렀거니와-신학의 구원과 신학의 철저한 순화를 가져온다. 이 시험으로부터의 도피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신학이 이 시험을 참고 견디지 못하면 신학은 결코 기쁨에 찬 학문이 될 수 없다.


13. 소 망

신학이 무엇을 행하며, 무엇을 수행하고, 무엇을 성취해야 하나를 알아본다.

신학은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역경과 위협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것은 그 대상 자체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러나 큰 희망을 갖고 과감하게 수행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손이 있을 때 더 용기를 발휘하게 되고 높임을 받게 된다. 

 

14. 기도

 신학 작업의 첫 번째 기본적인 행동은 기도이다. 신학 작업은 연구이며, 봉사이고, 사랑의 행동이다. 우리는 기도로써 신학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일한다(laborare)"에는 ”기도한다(orare)"가 포함되어 있다.  “일한다”는 것이 “기도”요 기도의 의미이다.


1) 신학작업의 특징은 교회와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창들뿐만 아니라, 천창(天窓)을 통해 하늘과, 하나님의 말씀과 행적에도 열려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학 작업에 모든 노고를 다해도 때로는 일에서 손을 놓고 신학의 대상 자체에만 몰두하는 안식을 가져야 된다. 안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함으로써 신학 작업은 열려지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옳게 조명되며 나아가서 올바른 일들이 성취된다.

2) 신학적인 작업의 대상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분”이다. 이 분은 “그의 행적”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신학 작업의 과제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분의 말씀”을 교회와 세상에 전해주는 것이다.

3) 신학 작업은 다른 학문처럼 ‘도출된 결론’을 갖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제까지 인식되고, 성취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놓고(제사행위처럼)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며 “하나님의 뜻대로”라고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4)신학작업의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이 있다.

 주관적인 측면은 연구자의 청결한 마음, 진지한 의도, 선한 양심의 소유자로 작업하기에 알맞은 자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총은 ‘하나님의 자기 노출’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신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고 하나님께 “간청’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오셔서, 제가 알 수 있도록 당신을 노출시켜주시옵소서!”


15. 연구

 기도는 내면적, 영적인 운동으로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인 운동이고, 신학작업에 있어서 연구란 외향적, 수평적 운동으로서 정신적, 영육적, 육적이다.

 “ 연구 없는 기도는 공허하며 기도 없는 연구는 맹목적이다.”

“연구”란 진지하고 열심히, 부지런히 일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신학자는 1)일시적 충동으로 한 때 신학연구를 하는 자가 아니라, 평생을 신학도로 사는 자이고, 2)목사나 교수가 되기 위해서 신학연구를 하는 자가 아니라, 신학에 사로잡힌 자이어야 한다. 


 신학  연구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주된 대화- 구약 예언자들. 신약의 사도들이 우리(또는 교회, 이 세상)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과,

2)부차적 대화- 과거 신학자~ 직전 신학자들의  성경석의, 교의학 및 역사탐구, 실천적 탐구를 검토하는 것이다.


 신학연구의 여러 분야(분과)에 대해서 1)성경석의 2)교회사 연구 3)조직신학 4)실천신학

1)성경석의- 성경본문을 읽고 설명하는 것으로

 (1)역사 비평학적 연구-문법 언어학 형식사 세계역사 문화사 문헌사의 비교연구

 (2)신학적인 성경석의-성경 본문들이 역사적 사실을 진실된 것이고, 하나님의 언어와 행동의 증거요 선포로 받아들이는 연구이다. 즉 “성령적 석의”, “성령의 자기 증거”를 묻고 들음.

2)교회사 연구- 사도시대 이후에 걸어온 기독교 역사. 교회 공동체의 삶의 역사.

 * 신학연구가 열매를 거두려면;

 (1) 연구자가 역사의 주제를 구체적으로 응시해야 하고,

 (2)“비당파적인 교회사와 이단사”(아르놀드,Arnold)를 추진해야한다.

 신학적인 역사학-  교회사에서 얼마나 육적인 것이 있었는가를 관찰하고 지적해야 함.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공동체 역사를 연구 조명하고 공동체의 미래적 회집,

    공고히 세움과 파송을 위해 봉사한다.

3)조직신학-교의학 윤리학을 탐구. 성경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공동체를 지배하도록 해야.

  이 학문을 말씀을 진정으로 숙고하고 명상해야한다. “조직적(systematisch)”이란 "포괄하는, 결론을 내는, 배제하는 작업“을 의미하지 않고  ”진정으로(ordentlich)“를.

 교의학과 윤리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각시대에 형성되는 질서, 형성 지식체계, 목적론을 확고히 붙들고, 이것을 자기 시대의 공동체에 타당성있는 것으로 만들 때 진정한 학문이 된다.

4)실천신학- 교회 공동체의 실천, 공동체의 선포로 나아가는 신학이다.  각시대 마다 자기 표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섬김을 받으며,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이 공동체를 통하여 얼마나 섬김을 받는가에 있다.

 실천신학의 목적은 설교 교육 예배 복음전도의 형태를 띤 교회 공동체의 선포를 위해서 꼭 필요한 언어를 찿고, 발견하며, 배우고, 실천하기 위함이다.


16. 섬김

 섬긴다고 하는 것은 나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신학 작업은 “하나님의 말씀에의 섬김” -하나님 말씀을 시중드는 것이다. 칼빈의 교직 분류 중에서 “집사직(Diakon=섬기는 사람)"- 말씀을 섬김; 구약성경의 탐구와 해석 (스데반,빌립;행6:8)

 * 칼빈은 교직을 1)교사직(Doktor)-성경해석, 신학자 2)목사직-설교, 교육, 교구목사                          3)장로직-교회공동체의 외적 삶을 지도 4)집사직(Diakon)으로 분류함.

 신학작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말씀에의 섬김과 시중들음이다.

 신학은 섬김을 위해서 부름 받았기 때문에 지배해서는 안된다. 신학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말씀을 전해 받은 인간을 섬겨야 한다.  

 

신학의 특수 섬김은 교회 공동체의 다른 섬김과 다르다. 그러한 관점은;

 신학은 설교, 교육, 목회 상담이 직적적인 자기 일은 아니지만, 이것들에 대한 진리 물음을 해야한다. 신학적 해명을 제공하고, 진리문제를 도와야 한다. 설교가 하나님 말씀을 잘 반사시키고 반향하도록 돕는 사명. 

 신학은 교회 공동체에게 성경말씀에 의한 구속만을 생각나게 하고, 다른 모든 구속으로부터는 해방을 권장해야 한다.

 교회의 설교는 ‘고저의 낙차’가 적용되어야 한다. 즉 위로부터 밑으로, 하나님의 밝은 삶으로부터 인간의 어두운 삶으로, ‘고저의 낙차’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교회의 선포는 여러 요인(지역, 민족, 대륙적 전통, 사회 & 민족적 전통, 편견)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메시지의 순수성은 고수해야하며, 이 메시지의 에큐메니칼한 의미와 성격, 보편교회적 의미는 주장해야 한다. 

 신학의 섬기는 작용이 없이 진리 물음이 기독교 안에서 잠들어버리는 것은 최악이다. 진리 자체가 기독교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17. 사랑

 신학의 원리; 앞에서 다룬 원리들- 성령, 신앙, 소망은 신학의 필수 전제 조건이고 이것들은 신학의 대상에 의해서 미리 주어진 것(선물)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감사할 일이다.

    “사랑은 세워나간다.”- 바울

사랑이 없는 신학은 비참한 논쟁이요 말들의 소모이다. 지식 자체는 교만케 한다.

 신학작업이란 그냥 받는 사랑의 선물을 수용함으로 시작되며, 지속되고, 끝맺는다. 사랑만이 신학작업을 활기 있게 해줄 수 있다.  


 “사랑”은 Eros 와 Agape

 Eros: 한 피조물이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주장, 만족, 성취를 추구하는 욕망, 추진력, 노력을 제공하는 근원적인 힘이다. 학문적  Eros로서의 사랑은 지성적 형태의 욕망 갈망, 추진력, 노력이다. 이것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운동이다. 인간의 지식은 대상을 향하여 대상과 연합하고 이 대상들을 소유한 후 향유하려는 상향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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