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은사<恩賜>

1960년대에 이르러 한국 기독교에 은사<恩賜>위주 신앙이 발생하였다. 은사위주 신앙은 21세기 현대 기독교에 이르기까지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선호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위에 신앙을 정립하지 못하고 은사위주의 신앙을 선호하게 된 것은 신학부재의 부흥강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무시하고 은사 체험위주 신앙을 더욱 강조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보다는 각종 체험적 신앙을 더욱 좋아하는 성도들이 부흥강사들의 은사체험 주의를 대대적으로 추종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 위주의 설교자들보다는 각종 은사들이 강조되고 나타나는 부흥 강사들을 더욱 받들어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으로부터 멀리 이탈되어진 3류 무속 신앙적 종교 형태로 낙후되어져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들은 모두 신학 부재의 부흥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이 은사 체험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 진리들이며 특히 사이비 이단들과 각종 사기군들이 끼어들어 활동하는 가운데 오류되어진 한국 기독교의 안타까운 병폐적 역사였다. 우리는 이와 같은 병폐와 오류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은사에 관한 신학적, 신앙적, 진리를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은사<恩賜>의 정의<正意>

은사<恩賜>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질 때에는 임금이 신하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어떤 것을 하사<下賜>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은사가 종교적 용어로서 사용될 때에는 신으로부터 <각종 은혜가 하사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용어가 기독교에 적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에게 부여하시는 각종 능력들을 말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능력들이 사역 현장에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능력> 또는 <하나님 종들의 은혜로운 사역적 능력>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은사는 하나님의 종들이 부여된 사명을 이행하는 과정에 <부수적, 보조적, 지원적, 후원적, 보완적,> 차원에서 부여된 제반능력을 의미하며 또한 그 능력들이 실제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은사 부여의 목적.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에게 존재하는 은사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 하에서 부여하신 능력들이다.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은사들을 부여하신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1) 자녀들을 위한 은사부여.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시는 목적은 그들의 신앙을 위해서이다. 성도들은 인간적인 속성에 따라 이론<신학>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각종 현상<기적, 이적,>을 더욱 선호한다. 때문에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에 실제적,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체험적인 것을 더욱 갈망하고 신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성도들의 특성을 고려하시어 그들의 신앙을 정립, 확립하시기 위하여 다양한 은사들을 그들에게 부여하신다.

2) 종들을 위한 은사부여.

하나님의 종들이 맡은바 사명을 이행하는 과정에는 경우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 등등이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초신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보다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각종 현상<기적, 이적,>을 더욱 선호하고 신뢰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맡은바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능력을 행사하게 하시어 초신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자들이 하나님 종들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 등등을 보고, 알고, 깨닫고, 믿게 하시는 것이다.

3. 은사의 구분.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부여하시는 은사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6-11>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1) 지혜의 말씀.

지혜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롭게 풀어 적용하는 것으로서 신학자, 설교자, 교사, 전도자, 신앙 상담자, 등등에 부여되는 은사이다. 지혜의 말씀 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아름다운 설교, 감동적인 설교, 감격적인 설교, 은혜로운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이 때로는 회개하고 때로는 감사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충성과 순종을 다짐하는 신앙적 결단을 하게 한다.

2) 지식의 말씀.

지식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정립하는 것으로서 신학자, 설교자, 교사, 전도자, 신앙 상담자, 등등에 부여되는 은사이다. 지식의 말씀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차원높은 신학으로 해석하고 정립하여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섭리를 다양하고 절묘하게 풀어 가르친다.

3) 병 고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는 각종 질병을 치유하는 특별한 은사이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종 질병을 고치며 귀신을 퇴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병행을 통하여 진행한다. 하나님께서 종들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부여한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병 고치는 은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이점을 명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병 고치는 은사를 뒤에 따르게 해야 한다. 많은 자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병 고치는 은사를 뒤에 따르게 하다가 나중에는 병 고치는 은사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뒤따르게 하다가 종래에는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형식적으로 데리고 다니며 병 고치는 은사를 전문으로 행사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능력으로 오해하고 착각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악행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서 병 고치는 은사를 거두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짓 은사를 진행하거나 사이비 이단적 오류에 빠져 3류 무당으로 전락한다. 이 분야의 한국 기독교 역사상 대표적인 전례가 전도관의 박태선이다.

4) 능력 행함.

능력 행함의 은사는 일반적으로 각종 질병 고치는 은사와 귀신을 퇴치하는 은사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각종 능력에 대한 은사를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5) 예언함.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언에 대한 은사를 오해하여 3류 무속인들이 행하는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러한 3류 무속적 차원의 예언을 오히려 금지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언은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적 삶에 오히려 해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미래를 안다는 것은 때로는 사고나 위기에 대한 사전예방을 위하여 필요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오히려 성도의 삶을 비 진리로 몰아넣을 수 있다.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면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한 각종 방법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에 누구나 보다 더 좋은 미래를 세우기 위하여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각종 불의한 방법까지도 동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도들의 인간적 성향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예고해 주는 차원의 예언은사를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것으로서 장차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진행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구별하고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은사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은사와 병행된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중대한 일이 발생하거나 또는 성도들의 일신상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될 때에 꿈, 환상, 환청, 등등의 비상섭리를 발동하시어 교회와 성도들이 그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게 하신다.

6) 영들 분별함.

영들 분별함이란 하나님의 영<성령>의 역사하심과 귀신<사탄> 역사함을 분별하는 은사를 말한다. 사단은 매우 교활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유혹한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신학>을 알지 못하면 사단의 흉계를 하나님의 계시로 오해하여 비 진리에 빠지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종말론에 성도들이 미혹당하거나 또는 비 진리 이단들의 주장들에 현혹되어 그들을 추종하는 것은 모두가 신학을 모르기 때문d다. 1990년대 초 하방익, 권미나, 이장림, 등등의 종말론에 많은 성도들이 미혹되고 심지어는 목회자들까지 그들을 추종하였던 것과 성락교회 김기동, 예루살렘교회 이초석,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구원파, 박옥수,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등등을 추종하는 자들은 모두 신학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진리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말씀<신학>을 알면 하나님의 계시와 사단의 흉계를 분별하게 되고 하나님의 종과 사단의 종들을 분별하게 되고 비 진리에 빠지지 않는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교회에 진리<말씀-신학>을 가르치라는 사명을 일률적으로 부여하신 것이다.

7) 각종 방언 말함.

각종 방언 말함의 은사는 두 가지 차원에서 부여되는데 하나는 개인적 신앙을 확립시켜 주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을 위하여 <도고-대도>하게 하기 위함이다. 초신자나 믿음 약한 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확립한다. 한편 타인을 위하여 은밀하게 도고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방언으로 기도하게 하시어 기도의 내용을 감추어 주심으로서 기도하는 대상의 수치를 가려주신다.

8) 방언들 통역함.

방언들 통역함의 은사는 각종 방언에 대한 통역의 은사를 말한다. 그러나 방언 통역의 은사는 특별한 경우에만 부여될 뿐 일상적으로 행사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신 것과 방언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통역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더욱 많기 때문이다.

9) 믿음.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서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되는 은사이다. 믿음은 성도 본인의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느끼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리하여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믿음의 은사는 믿고 신뢰하는 차원의 종교적인 신앙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경륜적 신앙이다. 따라서 믿음의 은사는 가장 큰 <3대 은사>에 속한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믿음의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믿음의 은사보다는 체험적 은사를 선호하여 하나님을 위한 경륜적 신앙을 갖지 못하고 3류 일반종교적 신앙에 머물러 있다.

10) 소망.

소망의 은사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한 소망이고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순간마다 함께하시므로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망의 은사는 믿음, 사랑과 함께 가장 큰<3대 은사>에 속한다. 소망의 은사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부여되는 은사로서 믿음에 의한 결과적 은사이다. 성도들은 소망의 은사에 의하여 현세를 사는 동안에 발생하고 조성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

11)사랑.

사랑의 은사는 믿음, 소망과 함께 가장 큰 <3대 은사>에 속한다. 사랑의 은사는 소망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전제로 하여 부여되는 은사로서 믿음에 의한 결과적 은사이다. 사랑의 은사는 기독교 은사 중 최고의 은사이다. 사랑의 은사가 기독교 은사 중 최고의 은사인 것은 기독교의 모든 것에 대한 원인과 과정과 결론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진행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결론된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섭리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나타나고 정립되고 확인되며 피조가 하나님 섭리의 동반자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승귀됨을 통하여 나타나고 정립되고 확인된다. 이와 같은 하나님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사랑의 은사를 부여하시고 사랑의 은사를 이행하게 하신다. 따라서 기독교 성도의 사랑은 사는 신앙의 결산이고 사명의 결산이다.

4. 은사의 우열.

은사주의 신앙자들 대부분은 은사에 대한 우열을 주장한다. 그들은 특히 병 고치는 은사, 귀신 쫓는 은사, 예언의 은사를 능력의 은사로 평가한다. 반면에 또 어떤 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개인적인 것, 또는 믿음 약한 자들을 위한 것 등등으로 폄하하여 무시하기도 한다. 한편 <고전13장,14장>은 사랑을 강조하고 예언의 은사를 강조하는 반면에 방언의 은사를 폄하하는 듯 하다. 그러나 <고전13장,14장>의 내용은 예언의 은사와 사랑의 은사를 강조하고 방언의 은사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전체적인 문맥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모든 은사가 우열의 구분 없이 동일함을 강조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높이 평가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다독이기 위하여 방언의 중요성보다는 예언<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의 의도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는 예언<하나님의 말씀>안에 행사되어질 때에 비로소 그 <의의>가 살아 역사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의 강조와 같이 하나님의 은사는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던 교회적인 것이던가에 관계없이 어떤 우열이 없이 모두가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부여하신 은사이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 특히 한국 교회에는 말씀의 은사보다 신유의 은사를 더욱 강조하는 풍조가 있다. 그리하여 병 고치는 은사, 귀신 쫓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들을 선호하여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신유의 은사를 비롯한 특별한 은사들은 모두가 말씀을 전하는 것에 대한 보조적 수단으로 주어진 것들이다. 교회의 모든 사명은 오직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각종 은사와 이적과 기적들은 말씀을 보좌하고 보조하는 도구들로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수차, 강조하고 있으며 가르치는 자들을 배나 존경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몰지각한 자들은 말씀은 등한시하고 눈에 나타나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특히 예언을 선호하여 소위<예언하는 자> <기도하는 자>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들을 <영안이 밝은 자> <영적인 자> 등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기도원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무당들이 속출하여 독버섯처럼 암약하고 있다.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는 자들 중에는 신학 공부를 충분히 하지 않은 자들이 많고 심지어는 전혀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자들도 있다. 때문에 말씀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가운데 3류 종교의 무당들이 하는 짓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섭리, 모든 계시를 성경에 담아주셨다. 성경의 하나님 계시는 완전하여 더 하거나 제할 것이 없다<계22 : 18-19>. 따라서 모든 것은 성경, 곧 말씀을 통하여 증거 되는 것이지 3류 종교의 무당들과 같이 점치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예언의 은사란 무당들이나 점쟁이들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치는 것을 말하며, 영적으로 밝다는 것은 성경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와 능력은 기도만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연구와 기도가 병행되어졌을 때에 비로소 주어진다. 말씀에 대한 구별의 기초가 되어있지 않은 자가 아무리 기도해도 그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진행되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특별하고 다급한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또는 직접 들려 주시기도하고 보여주시기도 하는 가운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시기도 하며, 종들에게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하사 어떤 일을 진행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상적인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계시와 섭리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아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선포하셨다. 그러나 말씀<성경>이 정립된 후에는 모든 일은 말씀<성경>을 통하여 진행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들에게 무당이나 점쟁이들과 같은 형식으로 일하게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무당이나 점쟁이들에게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무속 신앙인들은 점쟁이나 무당들의 <예언>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들은 과거의 일들은 때때로 잘 알아 맞추지만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는 순전히 엉터리이다. 종교 심리학자, 또는 종교학자들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그들은 과거의 일들은 어느 정도 감지하지만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들을 찾고 그들의 말을 신봉하는 것은, 좋은 것을 원하는 어떤 기대심리와 나쁜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들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무당이나 점쟁이들의 예언들은 무엇을 아는 것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추측과 어떤 경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당과 점쟁이들이 오로지 추측과 경험에 의해서 예고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자들도 있겠지만 그들은 자신과 연결되어 있은 어떤 존재를 통하여 예언한다. 그 존재는 사단이거나 아니면 사단의 휘하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존재<사단 또는 사단의 졸개>는 사실상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존재이다. 사단은 능력이 있어 과거의 일은 알지만 미래의 일은 전혀 모른다. 왜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만약에 사단에게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로 인하여 자신에게 닥칠 고통을 알면서도 아담을 타락시키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에게 닥칠 무서운 심판을 알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미 끝난 싸움을 아직도 계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무당이나 점쟁이들에게 역사하는 존재들은 미래의 일들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그러한 역사를 전개하는 것은 사실상 미래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 때문에, 즉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가 나중에 얼마나 많은 심판을 받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싸움이 처음부터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기회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유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5. 은사의 수여자.

은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행사되지만 그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시고 그들이 은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은사를 수여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은 은사를 <적용하시고 진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은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을 통하여 행사되어지는 은사를 과시하거나 자랑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쓰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은사를 통하여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지 사람이 아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았다는 그 자체가 곧 영광이다.

6. 은사의 진행원리.

모든 은사를 전개함에 있어서 진행 원리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의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그리스도>가 기독교의 출발이며 핵심이고 결론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 이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좌하고 보증하는 방법이고 수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우선이고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각종 신비한 은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뒤따르며 보좌하고 보증하는 방법이고 수단인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가 바르게 정립되지 않고 순서가 바뀐다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가 무시되거나 약화되고 은사들이 우선적으로 강조되면 기독교로부터 오류 되고 변질되는 비 진리에 빠지게 된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이나 이단자들이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원리를 알지 못하는 신학 부재의 부흥강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그리스도>보다 은사체험 위주신앙을 강조함으로서 기독교 신자들을 기독교로부터 이탈시키고 변질시킨 것이다.

7. 은사의 진행방법.

모든 은사를 전개함에 있어서 진행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행<기도, 명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사를 진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예수 그리스도>가 곧 은사 진행의 법적 행정적 근거<말씀-법-로고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자들은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행하지만 개념은 <안수> 또는 <안찰>을 통하여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1) 안수.

안수는 구약시대에서부터 전승되어온 관례이다. 구약시대의 안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축복할 때에 머리에 손을 얹는 것으로서 일반적인 관례이고 다른 하나는 임직에 대한 의례로서 의례<儀禮>적 관례이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영력>이 안수를 통하여 전달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신약시대의 안수례 역시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졌는데 후기신약 시대의 안수례는 하나님의 종들을 임직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은사를 진행할 때에 시행하는 안수례는 그, 안수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력이 전달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사 진행의 법적 행정적 근거인 <말씀-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사를 진행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은사 진행을 통하여 나타나는 능력의 결과는 <말씀-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 것이고 그러한 역사적 진행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안수례를 시행하는 것이다.

2) 안찰.

안찰이란 용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현대 기독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안수와 안찰을 같은 차원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은 분명한 오류다. 안찰<按擦>이란 용어는 누르거나 비비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환자의 경직된 신체를 풀어주는 것이다. 반면에 무속인들은 안찰을 귀신을 쫓아내는 무속적 행위로 사용하는데 이때에 주로 대나무, 소나무, 복숭아나무 등등으로 때리고 훑어냄으로서 귀신을 쫓아낸다. 기독교를 자처하는 <그러나 전혀 기독교가 아닌> 일부 기도원들이 환자를 치유한다거나 또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묶어놓고 안찰하는 가운데 사고를 일으킨다. 심하게 누르고 때려서 부상을 입히거나 사망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들은 <말씀-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사를 진행할 때에 각종 능력이 나타난다는 원리를 모르고 안수 또는 안찰을 통하여 어떤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오해하는 무지에서 발생된 것이다.

8. 은사 활용에 대한 원칙.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은사를 활용할 때에 신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신 목적은 자녀들과 종들과 교회에 덕이 되고 유익이 되게 하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은사를 진행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1) 은사의 분별.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은사가 나타날 때에 먼저 그 은사가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은사인가 하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 같은 은사라도 하나님께서 부여한 은사가 있고 사단의 음흉한 계략에 의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는 은사를 부여받은 본인은 물론이요 성도들과 교회 전체에 덕을 세우고 유익을 주는 은사이다. 따라서 그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은사이며 그 은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 등등이 나타난다.

(2) 사단의 음흉한 역사.

사단은 항상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한다. 때문에 사단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사를 가장한 교묘한 역사를 진행한다. 그러나 사단의 역사는 교묘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불의와 비 진리적 상황을 전개하므로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소위 <투시의 은사>라고 하여 성도들의 일상적 삶이나 또는 성도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단은 성도들의 일상적 삶이나 또는 성도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하여 성도간의 갈등과 분열과 불화를 일으키고 나아가서는 교회 전체의 갈등과 불화를 조성한다. 뿐만 아니라 거짓 <투시의 은사>를 제공하여 성도들을 이간하고 분열하여 교회 전체를 어지럽게 만들기도 한다. 사단은 또한 말씀이 전혀 정립되지 않은 자들에게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귀신쫓는 은사, 기도의 은사, 등등을 가장한 여러 가지 유형의 능력을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분열시키기도 한다. 말씀이 전혀 정립되지 않은 자들이 사단의 역사에 휘말리어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귀신쫓는 은사, 기도의 은사, 등등을 가장한 여러 가지 유형의 능력을 제공받으면 교회 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한 능력을 제공받은 자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인 것으로 믿는 가운데 그 은사를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기어 열심히 활용한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부여한 은사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교회에 각종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에 목회자를 비롯한 주변의 성도들이 그들에게 말씀으로 충고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은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를 떠나 개인적인 활동을 계속하는데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3류 무속인들과 같은 자들이 되고 만다.

3) 교회 질서에 순응.

은사를 부여받은 자들은 그 은사를 활용함에 있어서 반드시 교회의 질서에 순응해야 하는바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목회자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은사자들이 은사를 활용할 때에는 반드시 담임 목회자의 지도와 지시를 받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담임 목회자의 지도와 지시없이 활동하지 않으며 만약에 담임 목회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부득이한 사정이 될 때에는 장로나 전도사 등등의 지도자들과 상의하거나 또는 그들과 함께 활동한다.
한편 담임 목회자는 동역자나 성도들 중에 은사자가 있으면 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고 유익이 되게 한다. 교회에 은사자가 많을수록 교회가 부흥되고 발전한다. 특히 담임 목회자 자신에게 없는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있는 경우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목회 동역자로 주신줄 알고 그들의 활동을 지혜롭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반면에 사단의 역사에 휘말린 자들이 있게 되면 교회는 심한 몸살을 앓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자들이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함부로 활동하면 담임 목회자는 지혜롭게 그들을 다스리어 교회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
성도들은 은사자들의 활동이 교회의 질서를 무시할 때에 그것이 사단의 역사인 것으로 알아 그들을 초청하거나 그들을 추종하지 않아야 한다. 즉, 은사자들이 담임 목회자의 지휘를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활동할 때에 그들을 초청하거나 추종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그들의 래방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2) 자랑하지 않는다.

은사자들은 자신의 은사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 특히 담임 목회자에게 없는 은사를 받은 자들은 교회의 질서에 철저하게 순종하여 담임 목회자의 목회 권위와 권세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삼가고 주의해야 한다. 은사자들이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거나 담임 목회자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는바 그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결과이다.

(3) 사례받지 않는다.

은사자들이 은사를 활용할 때에 어떠한 경우에도 사례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며<마10:8>,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다. 은혜 입은 자가 사례를 하고자 하면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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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소위 <기도원> 또는 <기도하는 자>들이 은사 활용을 빙자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게 하고 그것을 자신들이 착복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3류 무속적 행위이며 하나님을 상품으로 팔아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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