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광시좡족 자치구 개관

   공식 명: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면적: 236,000KM2 
   인구: 48,220,000명 (2002 년)
   주도: 난닝 (南寧)
   종족: 한족 60%, 좡족 32%, 야오족, 먀오족 등
   종교: 소승불교(90%), 기타(5%) 
   기후: 봄 가을이 길다.
             대부분의 지방에는 겨울이 없다. 
   

2. 중국 광시좡족 자치구 현황

중국 남부에 위치한 자치구이며, 광둥성, 구이저우성, 윈난성과 접한다. 약칭은 구이[桂], 주도(主都)는 난닝[南寧]이다. 행정구역은 5개의 지구와 9개의 시,
10개의 현급 시, 59개의 현, 12개의 자치현으로 나뉜다. 지대가 높아 해발 1000m-1500m 정도이며 2/3 이상이 돌산이다.

주민의 60%는 한족(漢族)이기에 좡족 자치구라는 말이 무색하다.
좡족 외에 야오족[瑤族], 먀오족[苗族], 퉁족 등이 함께 살고 있으며 좡족은 총인구의 1/3 정도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통치를 받다가 1958년 자치구가 되었다.

광서자치구는 연해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방이 늦었다.
서 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동남아, 서 남아의 교차지역으로 중국 서남지역에서 해외로 향하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농업과 공업부문은 개발이 부진한 편이나 계림(桂林)이라는 명승지를 중심으로 관광업이 비교적 발달해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사탕수수이며 전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다.

3. 중국에서 광시 자치구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사건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인구수로 1위인 좡족은 90%이상이 중국 남부의 광시 좡족 자치구에 모여 산다.
과거 광시성으로 불렸던 광시 자치구는 지난 1958년 소수민족 자치구로 공식 지정됐다.
자치구의 전체 면적은 중국 전체 면적의 2.5% 정도에 불과하지만
중국에서 소수민족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좡족을 포함해 먀오족, 이족, 둥족 등 약 12개 이상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이들 소수민족은 사용하는 언어와 문자, 생활방식 자체가 한족과는 다르다.
하지만 소수민족이 자치구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8%가량에 불과하다.
자치구 내 한족 인구는 좡족의 거의 2배에 달한다.
한족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서 소수민족 자치구의 취지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지난 1948년 전까지만 해도 한족들은 좡족을 퉁족으로 불렀다.
개견자 변이 붙은 ‘퉁’자는 야생 들개를 상징하는 글자다.
한족이 좡족을 천시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족과 매우 다른 문화 때문이다.
지난 1965년에 이르러 한족 출신 저우언라이 총리의 제안으로
약 20가지로 중구난방 불러왔던 퉁족의 명칭을 모두 ‘좡족’으로 통일해 정리했다.
‘좡’자는 ‘강하다’ ‘억세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한자다.

강하고 억센 민족들이 주로 살다 보니 광시 자치구는 ‘반란’의 땅으로 이름이 높다.
대개 정권의 반역자들이 이곳으로 도망치거나 귀양을 온 것이 이유가 됐다.
반역자의 자손들도 멸시와 차별대우를 받으며 대를 이어 사회불만세력으로 자라났다.
중국 역사상 최대 반란 가운데 하나인 태평천국의 난도 광시 좡족 자치구에서 일어났다.
특히 이 반란에는 좡족이 깊이 개입했다.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은 비록 광둥성에서 태어난 한족이지만,
그 아래서 각각 군자금을 모으고 군사들을 지휘한 서왕 소조귀,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 등은 모두 좡족 출신이다.
이들 좡족이 지휘하는 반란군은 북상을 거듭해 당시 중국 제2의 도시 난징을 점령하기도 했다. 

중국의 최고권력자로 군림했던 덩샤오핑이 최초로 공산반란을 일으킨 곳도 광시 좡족 자치구다.
파리와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덩샤오핑은 1929년 ‘덩빈’이란 가명을 사용해 광시에서 농민폭동을 주도했다.
비록 폭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덩샤오핑은 광시에서의 폭동을 계기로 공산 혁명가로 두각을 나타낸다.
지금은 과거 덩샤오핑이 농민폭동을 일으킨 광시 자치구 바이써시에 덩샤오핑의 동상과 함께
공산반란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이후 그가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최고 권력을 잡은 뒤에는 광시 자치구에서 종종 여름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또 신해혁명을 일으키고 오랑캐 타도를 외친 중국의 국부 쑨원도 광시를 북벌의 기지로 삼았다.
이들 외에도 광시성에는 예로부터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한 군벌세력이 항상 존재해 왔다.

광시 자치구의 수도는 난닝이다. 난닝은 중국의 수도 베이징보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와 더 가깝다.
난닝과 하노이 사이의 거리는 391㎞로 서울~부산보다 짧다.
광시 자치구 구이린의 울룩불룩 솟은 산봉우리들은 베트남 하롱베이와 거의 완벽할 정도로 흡사하다. 

본래 이 지역은 과거부터 낙월•백월•남월 등으로 불리던 곳이다. ‘월남’이란 이름은 남월을 거꾸로 읽은 이름이다.
남월의 수도는 광시 자치구보다 더 동쪽인 광둥성 광저우였다.
‘양광’으로 부르기도 하는 광시 자치구와 광둥성 일대는 원래 베트남인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 지역의 언어인 광둥어는 베이징어와 소통이 불가능하다.
현재도 광시성 구이린에는 베트남을 치기 위해 출병했던 한족 복파장군 마원의 주둔지와 유적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광시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오늘날 베트남에 자리를 잡았다. 때문에 베트남인들 가운데 일부는
광시 자치구의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한다.

영유권 문제 때문에 중국과 베트남은 줄곧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다.
베트남의 독립영웅이자 국부인 호찌민은 한때 국민당 장제스에게 잡혀
1년6개월 동안 광시성의 한 감옥에 갇혀 있기도 했다.

지난 1979년에는 양국간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화교가 탄압받고 있다는 명분으로 중국군이 20만 대군을 동원해 베트남을 공격한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 간의 여러 얽힌 문제 가운데 국경 문제도 한 요인이 되었던 이 전쟁은
덩샤오핑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사상자는 오히려 중국군 에서 더 많이 나왔다.

중국과 베트남과의 국경 문제는 2008년12월31일, 측량작업과 경계비 설치를 위한 9년간의 작업을 모두 완료하고
육지 경계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음을 공식 발표 하며 일단락 되었으나
해안 경계선에 대한 것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4. 중국 화난지방 선교

광시 자치구가 속해 있는 중국 화난지방은 오랜 전부터 선교사가 들어가 사역한 지방이지만
현재는 공산주의와 여러 박해로 인해 지하에서 활동하는 일들이 많다.
그러던 중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으로 인해 중국 선교와 화난 지방의 선교 사역에 큰 계기가 마련되었다.

선교적 측면에서 볼 때 홍콩이 중국 영토가 되는 시점을 뱀에게 먹히는 두꺼비 이야기와 견주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 영토가 된 홍콩은 잠정적으로 거대한 공산 세력이 지배하는 중국에 흡수되어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선교 전략적 측면에서 홍콩 반환은 바로 뱀을 죽이고 몸 속에서 번식하는 두꺼비와 같이
중국선교의 극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 귀속되는 주권이양은 중국 대륙선교를 비전으로 품고 있고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경이로운 일이다.

홍콩은 중국 디아스포라와 본토에 대한 복음전도, 제자훈련, 매체, 문서사역 등에 있어서
활동의 중심이자 재정의 원천이었다.
기독교 인구는 10%에 불과하지만 505개의 학교, 사회단체의 60%, 병원의 25%를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큰 영향력을 끼쳐왔다.
이 노하우는 홍콩에서 광둥성(廣東省)으로, 광둥성에서 화난(華南)지역으로,
화난지역에서 전 중국 대륙 안으로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홍콩만큼이나 중국사역을 안전하게 준비하고 민첩하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효과적인 지역이 없기 때문이다.
전에는 밖에서 가능하던 일들이 이제는 안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반환 전에는 홍콩인이 중국을 왕래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통행증을 발급 받으면 여권 없이도 왕래가 가능하다.
외국인의 경우에도 여행사를 통하여서 비자를 받으면 수시로 왕래가 가능하다.
매일 기차로 왕래하는 수만 명의 승객들 중에 사명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수 많은 기독교 책자들이 대륙으로 운반 되고 있다.
세관에서는 모든 짐들을 철저하게 검사하려고 하지만 통행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에
열린 구멍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하여 기독교 자료들은 계속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외국인의 경우에도 통행증은 조건에 따라서 신청할 수 있다.

현재 중국 정부가 취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를 포섭하는 작업 가운데에도 지리적으로 근접한 화난 지역을 이용하고 있다.
바다를 끼고 있고 동남아와 가까우면서 비교적 산업적으로 덜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화난 지방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오고 가며 복음을 나르는 길목으로
전 중국과 동남아 가운데 활로를 펼쳐 나아가는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 일을 통하여 화난지방이 더욱더 사역에 활기를 얻게 된 것은 자명한 일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