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 울란바타르 (Ulaanbaatar)   주요도시 : 다르항, 에르드넷
    인구 : 약 265만명   주요민족 : 할하족, 카자흐족
    기후 : 대륙성기후   언어 : 몽골어
    면적 : 1,567,000㎢(한반도의 7배)   종교 : 라마불교(90%이상)

 

▣ 헌법

1924년 11월 인민공화국 성립과 세계에서 두 번째의 사회주의국가를 천명하면서 제정된 몽골 헌법은 이후 4차례의 개정과정을 거쳤다. 제1차 개정은 40년 6월 제8차 대인민회의 전당대회에서 이루어졌고, 제2차 개정은 60년 7월 6일 대인민회의에서 이루어졌다. 그 동안 몽골 헌법의 근간은 공산당 일당독재 인정과 사회주의국가체제 유지 등이었다. 그러나 몽골은 시장경제로서의 개혁과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90년 3월 인민혁명당 중앙위 제8차 총회에서 공산당 일당독재를 선언한 헌법 제82조를 수정함으로써 제3차 개정이 이루어졌다. 

현행 헌법은 92년 1월 13일 대인민회의를 통과함으로써 확정되었는데 전문과 6장 70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 헌법은 아시아의 구 사회주의 국가로는 처음으로 사회주의이념을 완전 일소하였으며, 국명을 몽골 인민공화국에서 몽골국으로 바꾸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 국가조직

몽골은 90년 9월 24일 정부조직법과 92년 신헌법 제정으로 국가조직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종전의 국가 최고권력기관이었던 대인민회의(The Great People's Hural)와 입법기관이었던 소후랄(국회)이 폐지되고 국가 최고회의가 생겨났다. 또 15개 부와 3개 위원회, 3개 특별기관이었던 정부기관도 14대 부로 축소 조정되었고, 신헌법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헌법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몽골은 국가 최고회의의 결정에 따라 위원장으로 비롯해서 전문위원회를 구성, 95년부터 정부기관 개편을 단행하고 있다. 또한 94년 1월부터 발효된 국가기관법에 의해 국민최고회의 산하 10개 상설위원회를 6개로 감축하기로 하였다.

▣ 국가최고회의(The State Great Hural)

국가최고회의는 헌법상 국가권력의 최고기관이자 입법권을 가지는 유일한 기관이다. 종전가지 몽골에는 두 개의 입법기관이 존재하였다. 그 중 하나는 대인민회의이고 또 하나는 대인민회의 휴회 중에 열리는 소인민회의(국회 : 50명으로 구성)이다. 그러나 신헌법에서는 이들 복수 입법기관의 일원화와 축소를 도모하여 유일한 입법기관으로 국가최고회의를 설치하였다. 
국가최고회의의 구성원은 76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이다. 이들 의원들은 피선거권이 있는 25세 이상으로서, 시민들의 일반·비밀·직접선거에 의해서 선출된다. 그리고 의장과 부의장은 의원들의 비밀선거에서 과반수를 획득한 자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이 국가최고회의의 임무는 다음과 같으며, 국내외의 주요정책에 관하여 심의·결정한다.
국가최고회의 회기는 6개월에 한 번씩 열리며, 최소 75일간 계속된다. 임시회의는 재적의원1/3이상의 발의나 대통령 또는 의장의 발의에 의해서 소집되며, 각 분야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몇 개의 상임위원회를 두고 있다. 

▣ 정치 체제 : 민주공화제(92.1.13 新민주헌법 발효, 2000.12.14 헌법 개정)
- 과거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의 중간 형태인 이원집정부제였으나, 헌법 개정으로 의회와 내각의 권력을 대폭 강화하여 의원내각제적 성격이 강화됨.
주요 지도자 

대 통 령 : N. Bagabandi 
총 리 : N. Enkhbayar 
국회의장 : L. Enebish 

▣ 주요 정당

몽골인민혁명당(Mongoli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 1990년 초까지 헌법으로 보장된 일당독재체제 유지
- '96.6.30 총선 패배 후 야당으로 전락(25석)
- 2000.7.2 총선 압승(76석 중 72석)
-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도 가입하는 등 중도좌파적인 성격으로 변신
- 당수 Enkhbayar


몽골민주당(Democratic Party)
- 구집권 세력인 몽골민족민주당(MNDP)과 몽골사회민주당(MSDP)이 2000.12.6 통합
- 현재 국회의원 2명
- 당수 Dorligjav


몽골민의의당(Mongolia Civic Courage Party)
- 국회의원 1명
- 당수 Oyun

몽골민주신사회당(MDNSP)
- 국회의원 1명
- 당수 Eredenebat

 

시장경제 체체로의 개편 

1992년에 국명을 몽골공화국에서 몽골(Mongolia)로 변경시켰으며, 몽골은 중앙아시아 고원지대 북방에 위치하는데 러시아, 중국 및 카자흐스탄과 접경하고 있다. 면적은 156만7천 ㎢(한반도 전체의 약7배)이고, 약 237만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수도는 올란바아타르, 주요도시는 다르한, 에르데넷이다. 1990년부터 자유시장 경제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중립 비동맹국가이다. 

1. 몽골의 경제개혁 시작 

몽골의 경제 개혁은 1985년에 경제관리 부문의 개선과 중앙정부 통제의 축소 의지의 표명으로부터 개혁의 장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1986년에 관료제를 축소하고 부서별 지출자율권을 부여하여 지방으로의 지출이 많아지도록 하였다. 재정 수입을 위해 특정 산업의 국내 거래세의 인하 및 생산 보조금을 지급하고, 경화 거래지역으로의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국영 무역기업을 설립하였다. 1987년에는 구소련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경제 조정정책을 채택하였다. 국영기업에 더욱 많은 자율권을 부여하고 기업의 투자재원 조달에 도움이 되도록 조세를 감면하였으며, 재정 적자를 축소하기 위해 제 8차 5개년 계획동안의 투자사업은 소규모 프로젝트 중심으로 전환시켰다. 1988년에 예산 운용 권한을 지방 정부에 부여하는 분권화를 확대 추진하고 농산물 가격의 등락 폭을 지정 범위 내에서 인정하며, 생산 목표를 초과 달성한 부문의 시장 출하를 허용하였고, 민간 협동조합 설립을 허용하였다. 1989년에 동유럽의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어 몽골의 개혁도 확대 심화되었다. 민간이 가축소유제한을 완화하여 가구당 15마리까지 소유하는 것을 허용하였고, 일부 소매가격의 인상을 허용하였다. 국영기업간의 상호 협력에 의하여 가격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국영기업에 투자자율권과 경영자율권을 부여하였고, 국영기업의 독점적인 대외무역관을 폐지하여 민간기업에도 대외 무역을 허용하였다. 지난 10년 간 급속히 변화한 몽골의 여러 경제 정책들을 시기별로 정리한다. 

2. 1990 - 2000년의 개혁 

1) 1990년의 혁명 1985년 이후 꾸준히 요구되었던 정치적 개혁은 1990년 드디어 공산당 정권의 해체와 더불어 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는 민주정권을 창출시켰다. 이후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자유경제제도를 정립하는 정책을 추구하여 왔다. 1990년 이후 10년 간은 몽골의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가 진행된 시기였다. 몽골은 가격과 관세를 자유화하였으며, 재정세제, 사회보험, 복지정책 등을 개선하였으며, 인플레이션율을 낮추고, 외국방문자들을 위하여 비자 발급을 간편화하였다. 또 구조조정을 강화하고, 경제제도를 민주적으로 정립하고, 은행과 금융 및 공기업을 구조조정하기 위한 종합적인 계획을 출범시켰다. 

<표 2> 경제지표
  1997 1998 1999
GDP (백만 US$)  956.1  1038.0 992.7
1인당 GDP (US$)  455.6 390.4 400.0
물가 상승률 20.5 6.0 12.0
연간국내총생산 증가율(%)  4.0 3.5 3.5
산업생산 (1995년 불변 가격기준) 
십억 터그럭
226.9 234.3 237.0
실질경제 성장률(%) 4.0 3.5 3.2
경제활동 인구 (천명) 852.0 859.3 869.8
총근로자수 (천명)  788.3 809.5 830.0
실업자수 (천명) 63.7 49.8 39.7
수출 (백만 US$) 568.5 462.3 431.5
수입 (백만 US$)  503.4 582.4 471.4
외환보유고 (백만 US$) 90.0 86.8 137.8
 환율 (터그럭/1US$) 813.3 902.0 1072.0

1990년 3월부터는 시장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위한 민간경제부문의 확대, 공업단지의 분산, 경화거래지역과의 교역확대를 목적으로 하는 3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개혁과 관력하여 법률정비와 제도개혁 등의 개혁방안을 마련하였는 바, 그 내용은 민간의 가축소유제한 철폐, 일부 소매가격의 자유화, 2개의 상업은행 설립 등, 은행제도의 개편, 관세제도도입 및 조세관리를 위한 관세국(Custom Affairs Department)설립, 외환경매제도 도입,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한 외국인 투자법(Foreign Investment Law)제정, 예산운용의 지방분권화 확대, 국가할당량 초과 농산물의 시장출하 허용, 국영기업 자율권 확대, 민간의 대외무역 허용, 노동 인센티브제 도입, 민영회사 설립허용등이다. 몽골의 대외 지위 강화와 자원배분을 위하여 환율을 조정하였는데 1990년 7월에는 상업환율을 미화 1달러당 4.67 터그럭(tugrug)에서 5.63 터그럭으로 평가절하하고 8월에는 최초의 외환경매를 실시, 경매환율을 1 달러당 40 터그럭으로 결정하였다. 

2) 1991년의 개혁 

1991년 초에는 대외교역에 경화를 사용케 하였고 CMEA (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COMECON이라고도 부름) 국가와의 관계변화에 대응한 국내개혁을 추진하였다. 2월에는 비상업거래에 적용하는 환율을 평가절하하여 1 달러당 40터그럭으로 조정하였고, 수입관세제도의 도입을 위해 관세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소매가격을 국제시장가격 수준으로 인상하였으며, 높아진 물가를 보상해 주기 위한 조치로 공무원임금과 연금의 인상 및 새로운 연금관련법을 제정하였다. 최저연금 및 기타보상을 규정한 공제법(Benefits Law)도 5월에 제정되었다. 민간기업과 협동조합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이들의 은행신용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한편, 상품수입 및 적자기업에 대한 재정보조금을 삭감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사유화추진법(Privatization Law)을 제정하여 국유기업 및 공장의 40%를 2∼3년 내에 사유화하게 하였고, 은행조직법(Banking Law)을 개정, 중앙은행인 몽골은행(The Bank of Mongolia)을 설립하고 상업은행을 분리·독립시켰다. 이와 함께 국내의 주식시장 설립을 위해 증권거래소법(Stock Market Regulation)을 제정하였다. 대외적으로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최혜국(MFN : Most Favored Nation) 대우를 부여받았고, 1백여 개의 기업에게 직접수출권과 공정무역거래를 허가하였다. 외국기업의 광물 및 에너지 분야에 대한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해 석유법(Petroleum Law)을 제정하여 석유 채굴과 시설복구사업에 참여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아시아 개발은행(ADB) 등 국제기구에 가입하였다. 

3) 1992년의 개혁 

시장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추진하는 몽골은 1992년 들어서 경제개혁을 한층 가속화시키고자 경제개혁파인 푼차긴 자스라이(Puntsagiin Jasrai)를 새 총리로 임명하였다. 새 총리는 우선 공공서비스(대중교통, 공공주택임대 등) 요금과 밀가루와 빵·보드카를 제외한 모든 물품의 가격을 자유화시켰으며 대외교역 물품에 대해서도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중앙은행인 몽골은행의 대출이자율을 물가상승률 정도로 인상하고 은행간 어음교환 및 지불보장협정을 단순화하였으며, 국가예산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정확성을 유지하기 위해 주간 모니터링제도를 도입하였다. 공기업에 대한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한편 증권거래소(Stock Exchange)를 개장키로 하였다. 외국인투자에 대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투자관계법 수정안을 국가최고회의에 상정하였다. 이 추정안의 주요 내용은 몽골에서 설립된 합작회사가 외국으로 이익금을 송금하는 경우 세율을 크게 인하하고, 합작회사에 대한 3 년간 법인관세를 면제하는 것 등이다. 

4) 1993년의 개혁 

몽골은 경제재건을 위해 1993년부터 1996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19%증가를 포함한 신경제 4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다. 민간경제부문도 시장경제화에 동참시키고자 간볼트(D Ganbold) 부총리를 중심으로 은행과 민간기업이 참여하는 중앙아시아 개발기금도 설립하였다. 외자도입의 규제를 상당히 완화하는 새로운 외국인 투자법을 제정, 7월 1일에 시행하였으며, 외국인투자 합작기업들이 사용할 수 있는 토지사용기간을 60년으로 하고, 이를 초과할 경우에는 40년간 연장하거나 몽골 정부가 회수하여 타 토지와 교환 혹은 배상을 하도록 규정한 토지법을 5월에 제정하였다. 또한 일반세법, 법인소득세법, 개인소득세법, 판매세법, 자동차세법 등 각종 세법을 정비, 시행케 하여 국가재정의 견실화를 추구하였으며 민간기업의 활성화를 지원키 위한 상공회의소와 민간은행의 영업활성화를 지원할 몽골은행연합도 설립하였다.회계감사법을 제정한 몽골은 외환자유화를 추진코자 변동환율제를 도입하였으며, 환어음 조정법과 환어음의 자유화 이행에 관한 조치를 채택하였다. 또한 몽골 국가최고회의는 저작권법(6월), 부당경쟁방지법(7월) 등을 제정하고 은행법을 개정(10월)하였다. 높은 인플레와 물자부족으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빈곤층 및 실업자를 위해 빈곤 및 저소득자 생활향상조치(4월)를 취하였고, 임금, 연금 등 생활보장수준을 올렸다. 대외무역 활성화를 위해 몽골 정부는 대외 무역활동조정령(2월), 경제개방법(3월), 수출입상품 규칙(6월) 등을 제정하였고, 두 번에 걸쳐 관세율을 인하하였다. 또한 몽골 중앙은행은 5, 50, 100, 500 및 1,000터그럭의 새로운 지폐를 발행하였다. 몽골은 IMF와의 합의하에 경제안정화 및 구조조정도 추진하였다. IMF는 1993∼96년 동안 몽골의 재정·금융시스템의 효율화, 대외무역 결제시스템 정비, 공업과 농목축산 구조의 개혁, 매크로 경제관리 효율화등을 위해 몽골 정부측(재무부, 몽골은행, 통상산업부 등)과 구조조정개혁 프로그램(3,600만 달러 지원)을 실시키로 합의했다. 

5) 1994년의 개혁 

1994년 들어서도 몽골은 주요 경제하부구조, 특히 법·제도적 측면의 기반 강화에 주력하였다. 몽골은 통계법(3월), 외환조정법(4월), 사회보험법(4월), 유가증권법(9월), 민법(11월) 등을 개정하였고, 법인소득세와 개인소득세 및 특별소비세법 등 일부 세법과 토지법을 개정하였다. 또한 대외무역 부문에서는 식품, 통신, 의료기기 등 33개 품목에 대한 수입관세를 경감하였으며, 8월에는 대폭적인 수출입관세율을 개정하였다. 반면 수출입품목의 품질검사 업무규칙을 제정하고 수출입 계약의 신고를 의무화하는 등 대외무역활동을 강화하였으며, 외자도입 기업의 창설 및 사업활동 규칙을 제정하였다. 사유화 추진과 관련해서는 이미 상업부문의 100%, 가축의 95%가 추진되었다고 평가하고 주택 사유화를 위해 준비키로 하였다. 특히 몽골은 빈곤층을 감소시키고자 기본계획을 작성하고 국민의 최저 생활기준을 1인당 도시 4,200 터그럭, 지방 3,700 터그럭으로 인상하였다. 이에 따라 공무원 급여소득자의 급여도 25%, 연금은 30% 인상하였다. 대외 원조와 관련 몽골은 아시아개발은행(ADB : Asia Development Bank)과 연계하여 경제하부구조 정비와 시장경제체제의 기반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ADB는 1994-97년 동안 몽골의 통신전력등의 인프라 정비와 농목축산업 생산성 향상 등 11때 프로젝트에 3억달러의 차관을, 몽골의 사회복지, 농목축업 발전 경제시스템 정비 등 26개 프로젝트에 1,250만 달러의 무상원조자금을 지원키로 하였다. 

6) 1995-2000년의 개혁 조치 

외국인투자법 시행 등 일련의 경제개혁 정책이 점차 성과를 보이면서 1994년부터는 경제가 성장세로 발전하였다. 1995년에는 외국인 투자기업의 급증 및 대대적인 민영화 작업의 진행에 따른 민간부문의 성장과 주요수출품목인 동 및 캐시미어의 국제가격 급등으로 생산 및 수출이 호조를 보여 6.1%의 양호한 성장을 기록하였다. 1996년 Enkhsaihan 신정부 출범이후 시장경제로의 이행 가속화를 위해 해외투자 유치, 세법개정, 관세철폐, 사유화 본격추진 등 개혁·개방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1996년 「민주연합 연립정권」 출범이후 시장경제 이행 가속화를 위해 관세철폐, 해외투자 유치, 사유화 등을 적극 추진하였다. 갑자기 불어닥친 아시아 경제위기가 몽골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무역적자 (96년이후 연속), 기업도산, 은행부실화 등 경제상황이 악화되었다. 1991년 이래 6차에 걸쳐 개최된 몽골 원조그룹회의는 몽골 경제재건 및 시장경제 이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몽골지원 국제회의를 통해 획득한 자금으로 고속도로 건설사업과 공항 확장사업, 화력발전소 건설사업 등 인프라투자와 중소기업육성 등에 사용, 경제 인프라의 점진적 개선을 했다. 1998년 들어 무역 및 재정수지 적자가 큰 폭으로 늘어나면서 몽골이 시장경제 이행에 큰 장애로 작용한 바, 1998년도 무역적자는 155.6백만불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이러한 현상은 몽골의 주수출품인 구리, 캐시미어, 양털 등 원자재 국제시세 하락에 기인하였다. 재정적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로의 이행과정에서 은행 구조조정, 공무원 급여인상, 연금인상 등 각 분야에서의 정부지출은 급증한 반면, 대형 국유재산의 민영화 부진, 세원 및 세수 증대 부진 등으로 정부 예산수입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데 기인하였다. 몽골정부는 재정수입 증대를 위한 IMF의 권고에 따라 98년 7월 1일 이래 신규로 도입, 실시해 오던 부가가치세의 세율을 10%에서 13%로 인상시켰다. 1998년의 아시아의 경제위기과 국내 정치상황 불안정, 정부의 시장경제 관리능력 부족 등으로 금후 당분간 몽골 경제전망은 불투명해졌다. 무역적자 누증과 국제수지 방어를 위한 몽골정부의 외환정책에 따라 현지화인 터그럭 환율은 1998년 3/4분기이래 급속히 하락, 1998년초 810터그럭(tugrug)대이던 대미달러 환율은 1999년 3월 1,100터그럭(tugrug)대로 진입했다. 1999년에 몽골이 국가수준을 정하게 한 결과 몽골의 수준을 1B로 정하였다. 이 수준을 미국의 "Standard and Poors"사가 정하였는데, 몽골의 정부 내각이 여러번 바뀌었지만 프로그램이 하나이었기 때문에 정책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2000년에 선거에 이긴 인민혁명당의 새로 나온 정부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 경제성장을 4.0%로 계획하였지만 기후의 어려움과 또 다른 어려움 때문에 성장률은 1.1%로 나타날 셈이다. 2000년에 "조드" 폭한으로 인해 3,5백만 가축이 사망하고, 산업, 운송, 통신, 무역의 성장이 농목축업의 손해를 보상하고 있다. 또는 농업의 수확물량이 9%로 감소하였다. 산업 총생산품은 1999년에 대비하면 2.4% 성장하였다. 2000년에 무역량이 1006.5백만 달러에 달하고, 이중 수출은 432.3백만 달러 수입은 574.2백만 달러이었다. 주요 수출품의 가격이 올랐지만, 수입량(석유가격 오른 것이 원인)이 증가함으로서 무역 적자가 141.9백만 달러이었다. 

경제지표 (%)

1997

1998

1999

2000

2001

GDP 성장율

4.0

3.5

3.5

4.0

4.5

총지역 투자액/GDP

25.3

27.3

na

na

na

총지역 저축액/GDP

30.0

28.3

na

na

na

인플레션율(소비자가격지수)

36.6

9.8

7.6

5.5

4.3

화폐공급(M2)성장율

32.5

-1.7

32.1

15.0

15.0

재정수지/GDP

-8.6

-11.5

-10.0

-9.4

-7.7

수출성장율

16.6

-12.1

2.8

12.8

14.3

수입성장율

-1.5

9.5

-15.4

8.6

11.8

현금수지/GDP

1.3

-11.9

-4.7

-9.5

-8.4

채무액/수출액

6.3

6.9

5.0

4.8

5.0

[몽골의 주요 경제지표, 1997 - 2001]

주요 무역품목 교역국

- 수출품 : 석탄, , , 형석, 몰리브덴 광물 캐시미어 피혁제품

- 수입품 : 기계류, 일상 소비재

- 주요 무역상대국 :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한국

 


 

 

※ 아래의 자료는 국제사랑의 급식 웹사이트에서 옮겨 온 것으로 '몽골 한인 선교사회'에서 1998년에 발행한『98 몽골 선교현황』 자료집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자료홈: http://www.nomadlove.org/mongolia.html#top]

 

>>국호와 지리적 위치<<
1) 국호
몽골의 공식적인 국호는 REPULIC OF MONGOLIA로써 몽골이란 본래 '용감한'이란 뜻을 지닌 부족이었으나 칭기스칸에 의해 MONGOL 및 지역의 이름 MONGOLIA로 변환되었다.
몽고라는 이름은 지난 수 천년 동안 북방 민족으로부터 전쟁에 시달려 온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하기 위하여 우매할 "몽”과 옛 "고"를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

2) 지리적 위치
몽골은 아시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토바, 브리야트 공화국과 남쪽으로는 중국의 신강 위그로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이 남한의 16배인 약 1,566,500㎢ 인데 남북 거리가 1,263 ㎢, 동서거리가 2,405㎢, 전체국경 선의 길이는 8,114㎢에 달한다.

 

>>몽골의 인구<<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추세로 1998년 3월 몽골 정부 통계로 1960년에 비해 두배가 늘어났으며, 1998년 현재는 2,394,921명이나 인구 증가율은 점차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에 비해 인구가 작은 것은 기후적인 악조건과 과거 한때 남자의 40%가 독신 라마승에 달했던 라마교의 영향 때문으로 보고 있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영아 사망율이 많이 개선되었고, 인구증가를 위해 출산 을 장려하며 모자 보건 시설이 발달되어 있다. 현재도 출산 장려를 권장하는 사회 분위기이지만 도시에서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아이들을 적게 낳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몽골 인구의 특징은 인구 밀도가 낮고 젊은 층이 많다는 것이다.

>>기 후<<
몽골의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서 날씨의 변화가 심하고 건조하다.
긴 겨울(10월-4월)을 가지고 있으며 나머지 봄, 여름, 가을이 합하여 겨우 5개월밖에 안 된다. 기온은 지방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연중 가장 더운 7월에는 12℃~20℃ 가장 추운 1월에는 -15℃ 안 밖이며, 가끔씩 그 이하로 떨어질 때도 많이 있다. 하루 평균 기온이 0℃이상인 날이 연 평균 170~190일 정도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매우 적으며 그 중 65~78%가 여름에 내린다. 연 평균 비가 내리는 날은 15일 에서 20일 사이 이며,비가 적기 때문에 늘 건조한데, 울란바타르시의 연 평균 강수량은 233mm로 서울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심한 온도 변화로 수도 울란바타르의 경우 겨울에는 영하 35~40℃, 여름에는 영상 25~30℃로 연교차가 세계에서 가장 크다. 긴 겨울과 적은 강수량 때문에 감기가 몽골 사람들의 생활에서 떠나지 않고 농작물 재배가 어려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외부 활동 가능한 시기가 1년 중 5개월 밖에 안되기 때문에 자연 생산성이 떨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후와 싸워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겨울이면 모든 땅이 얼어붙기 때문에 건설, 도로건설, 탄광 등도 불가능하며, 모든 강과 호수는 겨울에 얼어버린다.

>>정 치<<
몽골은 오랫동안의 사회주의 폐쇄 정책을 실시해 왔으나 1988년 12월 제 5차 공산당 (인민 혁명당) 총회에서 개혁 정책과 민주화를 추구하기로 결정하였고, 90년 7월 29일 최초로 민주 총선을 실시하여 국회를 구성하였다.
그후 서방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개선하고자 힘썼고, 그 결과 일본과 미국, 한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이끌어 내었다.
유엔이나 적십자사와 같은 국제기관을 통해 대외 교류 확대를 하고 있으며, 외국의 자본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몇 가지 가시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그 결과 상업 차관의 도입과 인도적인 차원에서 긴급 식량 지원 및 의류, 학용품 등의 원조를 얻었다. 한국과는 1990년 3월 25일 대사급 수교를 하였다.

>>경 제<<
몽골의 국민 1인당 소득은 $335이나 1인당 국내 총 생산은 $2,185로 국민들의 생활 수입은 낮은 편이나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혜택이 자본주의 국가와 다르기 때문에 화폐 가치로 단순하게 비교하기가 어렵다.
국유 재산 사유화 조치가 91년 5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몽골은 지난 70년 동안 정치와 경제 부분에서 소련 연방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대부분의 소비재와 건설재 등을 소련이 공급해주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동맹국가로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지난 89년 소련 연방이 시장 경제로 전환되었다. 동구와 소련의 철수로 몽골은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공업 및 건설 사업은 예전보다 더 부진한 상태에 있으며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가장 큰 어려움은 극심한 생필품 부족 현상으로 인한 엄청난 물가 폭등과 국가 재정의 부족을 경험하였다.

대개 91년에 비해 식료품 가격은 62배나 폭등하였고 교육비는 무려 89배나 올랐다. 전체적으로 약 51배나 오른 소비자 물가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 사회주의 제도 아래서의 생활을 동경하도록 하고 있다.
국가 재정도 많은 부분이 해외 원조와 장기 저리 차단으로 메워나가기 때문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큰 폭의 재정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새로운 사회 간접 자본 건설을 위한 투자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고 늘어나는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 할 만한 정부 차원의 시도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물가 상승률이 많이 둔화되었고 89년 이후 국민 총 생산이 감소하다가 93년을 고비로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96년의 전년도에 비해 경제가 무려 6.3% 성장하였다. 또한 실업률이 1994년의 8.7% 에 비해 1998년 3월말의 통계 자료는 경제 활동 인구 가운데 실업률이 2.6%인 62,744명으로 나타났다.
1996년 이후의 물가 상승률을 살펴보면 그렇게 두드러진 변화는 없었으나 1998년 3월 현재 100%를 기준으로 볼 때 1997년보다 119%, 1996년 보다 172%의 상승률을 나타냈다. 몽골의 시장 경제로의 이행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자유시장 (바라니자흐)인데 가장 큰 시장은 일주일에 네 번 모이는데 많이 모일 때는 한번에 약 20,000명으로 하루 종일 출입하는 사람을 모두 합치면 10만명 가량 모인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중국제 값 싼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한국 물건도 많이 볼 수 있는데 대개 한국의 두배 가격에 팔 리며 몽골 사람들에게는 매우 품질이 좋은 물건으로 알려져 있다. 1995년 9월에는 조순 서울 시장이 울란바타르를 방문하였으며 서울시와 울란바타르시가 자매 결연을 맺고 울란바타르 시내에 서울의 거리를 신설하였다. 양국간의 무역은 95년의 경우 $4,600만 규모이며 한국이 몽골의 제 4위 수입국이며 수출은 제7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양국의 교역은 날로 확대되고 있다.


>>역 사<<
몽골은 칭키스칸으로 인해 세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고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워 비로소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원나라(1279~1368)는 순제를 마지막으로 1368년 한민족 계인 명에 의해 멸망했고 그 후 몽골은 고비 사막로 쫓겨나고 13세기의 모습을 갖춘 채 신비한 고립 국가로 남게 되었으며 이후 1616년에 성립한 만주라의 속국이 되었다. 청나라는 비옥한 땅을 모두 빼앗아버리고 몽골인들은 황폐한 초원 지대로 밀려나 유목민으로서의 삶이 더욱 고착되었다. 1911년 한 민족계의 사람들이 청을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세웠으며 외몽골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외몽골은 원래 중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외몽골은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국내의 혁명으로 힘을 쓰지 못하자 중국이 침공을 시작하였고 결국 외몽골은 독립을 취소하였다.

동시에 러시아의 반혁명 세력도 침입해와서 라마교의 활불(달라이라마)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였다. 나라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외몽골은 러시아 혁명의 원조를 받아 중국군과 활불 정부군과 맞서 싸워 1921년 수도를 점령하였다. 활불 정부군으로부터 정권을 인수 받은 날이 7월 11일로 현재의 독립 기념일이 되었다. 1961년에 유엔에 가입하였고, 1964년 중~몽 국경이 확정되어 내 외 몽골의 분열이 고착되었다.

1956년 체덴발이 인민 혁명당 서기장이 된 후 당내 친 중국피를 숙청하고 친소련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고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 발전을 위하여 힘써왔다. 대부분 국민들은 중국에 대한 국민감정은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중국의 영향은 매우 깊다. 한편으로는 지난 70년 동안 소련 연방의 사회주의 제도아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현대 몽골인의 생활 양식이나 사 고 방식은 러시아를 본받은 서구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사 회<<
1) 유목 몽골
사회의 모든 면모가 유목에 의해 조성되어 왔는데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몽골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자원 때문이 아니라 유목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평균 이하의 강수량과 기온에서 극심한 변화로 특징지어지는 복잡하고도 고도의 기술이 요하는 환경 적응의 과정이 바로 유목인 것이다.
유목은 일정한 구역의 한계 없이 매우 광활하게 매년 장소를 이동해야 하는 직업이다. 환경학적으로 매우 제한된 구조의 몽골 환경에서는 농사가 적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유목은 몽골 사회에 다양한 초원의 자원을 활용하는데 용이하다. 유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동성이다. 한 곳에서 일 년 동안 사람 과 가축을 생존하게 하는데 충분한 자원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목을 농사와 함께 할 수 있는데 이는 안정적인 풀과 오아시스가 있는 곳에서 가축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제한된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다.
유목사회는 공통적으로 일정한 틀이 없다. 즉 문제를 극복하며 위협을 피하고 지구상에 축적된 대상인 정착에 별 가치를 두지 않으며 이동성에 가치를 둔 민족으로 발전되었다.

2) 보건 몽골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사회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병원들이 많이 지어졌으며 의사들의 수도 많은 편이다. 의사 1인당 진료 인구는 403명으로 한국의 855명의 반밖에 되지 않지만 출생 1,000명당 영아 사망수는 한국의 21명보다 세배나 많은 60명이다. 의사의 질적인 수준은 매우 낮은 편이다.
1990년 시장 경제로 전환이후 러시아의 의약품 보급이 중단되면서 극심한 의약품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UN과 서방 국가 정부, 국제적십자사 등에서 긴급 구호 차원에서 약품들을 보내긴 하였지만 아직도 거의 대부분의 병원이 처방은 주지만 약품은 공급하고 있지 못하며 몇몇 의료장비들이 있어도 낙후된 것이거나 고장나 있는 상태이다.
몽골 사람들 가운데 가장 흔한 병은 신장염과 고혈압 증세이며 피부병과 결핵이 널리 퍼져있다. 치아가 정상적인 사람들이 드물지만 시설을 갖춘 치과 병원은 거의 없고 세라믹으로 인공 치아를 만드는 기술이 없다. 아이들은 감기와 폐렴에 늘 노출되어 있다.

3) 교 육
97%의 높은 문자 해독율을 보유하고 있는 몽골은 1924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근대 교육이 도입되었다. 1990년 이후 자유민주주의 제도로 개혁하면서 교육부분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사립 교육 기관의 자유화, 학과 편성의 자 유화, 일부 국립 교육 기관의 사유화 등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전교육 과정이 무료였으며 국가가 직접 관장해 왔는데 국가재정 형편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공립 교육 기관을 사립 교육 기관으로 이양하는 단계에 와있고, 교육 환경도 점차 나빠지고 있다.
다른 부분의 개혁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육 발전이 뒤쳐져 있으며 교원들의 급여수준 도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현재 몽골의 교육 기관은 총 930개이며 전 인구의 21.4%인 482,000명 이 어떠한 교육 기관이나 학교를 통해 배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중학교에 418,300명, 대학교에 40,400명이 배우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종 교<<
몽골의 종교 현황은 샤머니즘/정령 숭배가 약 50%, 라마불교가 26%,회교 약 4%,기독교 약 0.03%~0.11%정도이다. 현재 울란바타르에 39개, 지방에 39개의 교회가 있으며 그 중 3곳은외국인 교회 (인터내셔널 교회, 한인 교회, 중국인교회 ) 이다. 기독교 신자는 어린이를 포함하여 7,440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 중 16세 미만의 어린이 비율이 36%이다.

1) 샤머니즘
몽골은 샤머니즘이 번성한 지역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중앙 아시아의 혹독한 생활 환경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서 샤머니즘에 젖게 만들었으며 다양한 종교적 심성도 샤머니즘에 녹아들었다. 샤머니즘은 몽골 역사 초기부터 13세기 혹은 16세기까지 몽골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종교로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샤머니즘은 몽골인의 심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생활 곳곳에서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샤머니즘은 칭키스칸 시절 즉 초기 몽골 제국 시절에는 국가 무당이 전쟁에 관하여 충고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였고 국가 종교로 인정되었다.

칭키스칸은 "우리 몽골인들은 우리의 생사가 달려 있는 유일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라고 말한바 있다. 하나의 강력한 최고의 신개념은 유라시아 초원의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사고였다. 몽골인들은 텡게르( TENGER )라는 유일신을 믿었다. 텡게르(TENGER) 라는 개념은 '하늘 의 신','하늘의 힘센 지도자'라는 뜻이다.. 무속의 다른 기초 기능들에는 예언, 점, 그리고 잃어버린 가축이나 물건 을 찾는 것이었다.

무당들은 춤과 노래 그리고 심지어 마약의 사용 등을 통해 황홀경에 빠져든다. 어떤 이들은 의식에 앞서 굶기도 한다. 지금도 어느 곳을 가든지 '어버'라고 하는 성황당 같은 것이 널려져 있다. 여전히 무당들이 있으며, 지방으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 젊은 사람들이 점을 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있으며 최근도시에서 점술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다.

2) 불 교(올랑 보다니 샤씬)
위그르족을 통해 문화와 함께 불교가 유입되었다. 칭기스칸은 티벳형 불교를 선호하여 샤머니즘과 함께 불교식 예배도 드렸다. 몽골이 세계적 제국으로 변함에 따라 샤머니즘은 국가 종교의 위치를 불교에 양도하였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채택하여 정신적 통일을 이루려 했듯이 쿠빌라이칸은 불교로 원나라의 정신적 통일을 추구하였다. 또한 불교의 특성상 국가 권력과 상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원나라의 제국 붕괴시 불교는 다시 약화되었고 오늘날 중국식 불교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박물관이 한 개소 있을 뿐 이다.

3) 라마불교(샤르 샤씬)
라마 불교가 처음 몽골에 유입된 것은 1230년대 오고타이때다. 그 후 세조 쿠빌라이가 1253년 티벳을 점령했을 때 당시 라마 불교의 동자 승려인 파스파를 초청하였고 그가 세조의 존경을 얻어 라마 불교는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파스파는 티벳어를 기준으로 하여 몽골문자의 기원이 되는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였다. 몽골의 라마 불교는 티벳형 불교와 샤머니즘이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대부분의 경전이 몽골어로 번역되지 못했고 간단한 입문서 정도만이 소개될 뿐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라마법회는 티벳어로 진행되며 참석 한 대중들은 거의 그 의미들을 모른 채 예식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에서와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마 승려에 대한 존경은 깊다. 티벳 불교는 수도원 식이다. 몽골이 공산화되기 전인 20세기초 외몽골에는 그 나라 부의 20%를 움직이는 583개의 수도원과 사원 건물을 갖고 있었다. 거의 모든 몽골의 도시들은 수도원이 있는 자리에서 발전했다. 당시 울란바토르로 알려졌었던 후레는 몽골의 가장 뛰어난 살아 있는 부다의 직위에 앉았다. 이는 성직 계급에서 달라이라마와 펀첸 라마 다음에 오는 세번째 것이다.
1970년대 초 100명의 승려들의 공동체인 간단 수도원이 울란바타르에서 열렸다. 이 사원은 몽골에서 유일하게 활동하는 수도원이었다. 소수의 지역 수도원은 박물관으로 남았고 간단 수도원은 박물관으로서 관광 명소였다. 그들 승려들에게 5년간의 훈련기간을 마친 많은 젊은이들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의 동기나 선택의 이유를 물어도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라마 불교는 이미 이 나라의 역사, 전통예술, 그리고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뿐 아니라 정치에 이르기까지 간여하고 있는데 굳이 동기를 새삼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안는다.
불교와 불교 승려들은 항상 중앙 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 해왔다. 몽골에 있는 불교 사원도 예외가 아니다. 사원과 국가는 서로를 지원하고 성육신의 교리는 성육화 된 살아 있는 부다들로 하여금 강력한 몽골의 귀족 가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4) 회 교
회교는 카자흐족이 주로 믿는데 주로 몽골의 서부 지역에 분포하며 수니파 회교도이다. 울란바토르시에도 7,000명 가량의 몽골 국적의 카자흐 인들이 살고 있으며 수도에서 30Km 떨어진 날라이흐시에도 회교도들이 4,000 ~ 5,000명 있으며 회교 집회소가 있다. 현재 몽골안에 모슬렘 교도를 위한 회교 집회소는 약 5개소로 추산되고 있다. 카자흐인들은 생활 속에서 체득된 습관적, 명목적 모슬렘이 대부분이고 영지적인 저항이나 신앙적 의식은 희박한 편이다. 따라서 모슬렘의 확산을 막고 개방 적인 모슬렘 선교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몽골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 가 있는 지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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