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푸른 초원의 나라

제2편 우리가 품은 브리야트족
  제3편 과거와 미래가 함께 하는 나라



 

몽골의 브리야트족은 온누리교회가 입양한 미전도종족 중의 하나입니다.
온누리교회 간사들이 2000년 여름 휴가를 이용해
몽골로 아웃리치를 다녀왔습니다.
아웃리치의 현장에서 취재한 '끝없는 초원의 나라' 몽골을 소개합니다.

몽골의 정식 국가 명칭은 몽골리아 공화국입니다.
드넓은 초원이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지 않은 자연의 나라 몽골.
몽골의 영적 흐름의 중심에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라마 불교가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로부터 독립하면서부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98% 이상이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
그래서 더욱 많은 기도와 선교의 자원이 필요한 나라...
푸른 초원의 나라 몽골리아는 우리가 품어야 할 또 하나의 '땅끝'입니다.

 

자료출처:

               http://news.cgntv.net/mission/01_trip/trip01_7.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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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욤보

몽골 국기에 그려져 있는 소욤보(Soyombo)는 표의문자로서 아득한 옛날부터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민족적 표장이며 1924년 제 1회 대인민회의에서 몽골수립을 선언하고 자유와 독립을 의미하는 뜻에서 민족적 문양으로 정해졌다. 이 아름다운 표장은 윗부분에 상징적으로 묘사된 불꽃이 있는데, 이 불꽃은 몽골의 민족적인 상징을 나타내며 융성, 재생, 향상, 번영, 종족번성을 의미한다. 불꽃 밑에 있는것이 태양과 칼로 몽골 전 민족의 상징을 나타낸다. 즉, 소욤보의 불, 태양과 달은 몽골의 백성이요, 삶이며 영광인 것이다. 또, 끝부분을 아래로 향하게 한 창이나 화살은 ‘적에게 죽음을’을 의미한다. 표장의 위쪽과 아래쪽에 있는 두개의 직각형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실하게 봉사하라’는 의미이고, 물고기는 방심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며, 두 마리의 물고기는 남자와 여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표장의 양쪽에 수직으로 그려진 두개의 직각형은 요새와 성벽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욤보의 상징적인 의미는 몽골인의 오랜 문화와 결부되어, 자유와 독립을 의미한다.

 
몽골 민족의식

1. 어원 : 운데스텡과 야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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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의 민족의식을 검토할 경우 러시아나 중국 두 강대국에서 소수집단으로 거주하고있는 몽골족과 독립국 몽골(Mongolia)에서 거주하고 있는 몽골족 등 크게 2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양자 모두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지금까지 많이 소개되지 않은 후자의 관점에서 몽골족의 민족 의식을 검토해 보도록 한다 . 


  몽골국의 민족의식을 말할 때 흔히 운데스텡.야스트노오드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운데스텡은 운데스(뿌리, 기초, 근본)와 텡(~의 사람들)의 합성어이고, 야스트노오드는 야스탕의 복수형이다.

그리고 야스탕은 야스(뼈)와 탕(~의 사람)의 합성어인데, 몽골국의 운테스텡은 [몽골]과 [카자흐]라 불리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운데스텡은 현재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민족으로 다루고 있는 범주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한편 야스탕은 운데스텡의 하위 범주이고, 운데스텡을 [민족]이라 번역하면, 이 개념을 편의상 부족 수준에 대응시켜 이해해도 좋다. 운데스텡인 카자흐족은 몽골국 서북단 바양-울기 아이막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19세기 후반에 중국 신강지역에서 알타이 산맥을 넘어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카자흐족은 몽골국에서 소수민족이지만 민족의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의 거주지역이 지리적으로 변경에 있다는 점과 몽골정부가 지금까지 그들의 언어나 문화를 몽골족에 동화시키려는 강경정책(?)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는 민주화 이후 신생 카자흐스탄공화국으로 이주한 몽골국 카자흐족이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사정으로 다시 몽골로 귀환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과, 일반 몽골인들이 카자흐족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별 관심을 표명하지 않고 있는 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몽골국에서 출판된 민족학 서적에서는 다음과 같은 16개 집단이 야스탕으로서 언급되어 있다.즉< 할하, 두르부드, 우울드, 토르고오드, 바야드, 알타이 우량하이, 자흐친, 먕가드, 부리야트, 바르가, 우젬친, 다리강가, 호통, 토바 차아탕(차아탕), 토바 말친(토바), 함니강 > 등이다.

이들 야스탕의 형성과정은 역사적으로 각각 다르고 복잡늡玖? 그 가운데는 알타이 우량하이나 차아탕과 같이 그 내력이 명확하지 않은 야스탕도 포함되어 있다.


2. 야스탕의 인식과 어투

 1989년 민주화 이후 각 야스탕은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게 되었고,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야스탕의 전통적인 관습에 관한 저작이나 논의가 연달아 나타난 사실이다. 민주화 이후 사회주의 시대에 억압받았던 몽골족의 전통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기서 야스탕 전통의 부활과 몽골족 전통의 부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가를 검토하는 것은 현재 몽골국의 민족의식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특히 서몽골 또는 오이라트 몽골로 통칭되고 있는 복수 야스탕들에서 이러한 전통의 부활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주목 할만 하다. 여개에서 몽골 세계제국시대 이후 17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동.서 두 몽골족(몽골과 오이라트)의 대립의 역사적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몽골국에서 이 오이라트와 대립된 좁은 의미의 몽골 야스탕은 할하이다. 할하는 몽골국 전체 야스탕의 70%를 차지하는 주요 집단이다.

몽골국 서부에 거주하는 복수의 야스탕들이 자칭이든 타칭이든 서몽골 혹은 오이라트 몽골인데 반해, 할하는 하나의 야스탕 뿐이고, 할하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 할하 몽골이라 칭하고 있다. 그러나 서몽골 또는 오이라트 몽골 사람들은 하난의 야스탕인 할하를 단지 할하라 부를 뿐 할하 몽골이라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호칭의 존재방식을 통하여 두 집단 구성원간의 상호인식이 명백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볼수 있다. 결국 할하인들은 스스로를 할하 몽골이라 부름으로써 야스탕인 할하를 운데스텡인 몽 골 (민족)과 동의어로 쓰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배경에는 할하가 다수집단이고 할하방언이 몽골국 표준 방언인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일종의 할하주의를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시절에 장기집권한 독재자 체덴발 서기장은 두르부드 야스탕 출신이었고, 그 당시 몽골인들 사이에 [서부 두르부드인은 사람이 아니다. 가축의 4개의 정강이는 고기가 아니다]라는 반두르부드적인 말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그 시절 각 기관의 회의석상에서는 할하의 야스탕으로서 지위를 명확히 하도록 요청하는 발언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보면 사히주의 시대에는 어떤 특정 야스탕이 다른 야스탕을 앞서가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면 이를 억제하는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야스탕을 둘러싼 논으를 검토하는 일은 몽골국(당시는 몽골 인민공화국)이라는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을 더듬어보는 일과도 관계가 있다.

할하의 다수의식은 전통을 이야기하는 방식에도 나타나 있다. 그들이 민주화 이후 몽골족의 전통관습을 말할 때 할하를 초월한 광범위한 몽골족을 대변한 말이 되고 있는 것은 서몽골 야스탕이 자신들의 전통을 말할 때, 반드시 자신들의 야스탕 이름을 붙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이들 서몽골 야스탕이 자기네의 전통을 말할 경우 야스탕의 특수성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다른 야스탕과 경계의식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몽골을 대표해서 말하려고 하는 할하의 [집합적 어투]와 서몽골 해당 야스탕의 [개별적 어투]는 서로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모두 몽골족의 전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서몽골 야스탕의 [개별적 어투]는 몽골족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으며, [집합적 어투]를 오히려 보강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빠뜨려서는 안될 점은 소수의 [개별적 어투]가 다수의 일원적인 문화나 언어에 대한 저항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이다.


3. 집단범주의 정치성

  하나의 야스탕에 불과한 할하가 할하 몽골이라 자칭하는 것은 자기네를 야스탕에서 운데스텡으로 격상시키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야스탕 이름에 몽골을 붙인다고 해서 항상 그러한 목적을 띄는 것은 아니다.

예컨데 몽골국 이외에 거주하는 몽골족, 러시아령 부리야트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부리야트는 바이칼호 주변에서부터 중국 동북부, 몽골국 북부 등 넓은 지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다. 1958년 소련 정부는 이들의 명칭을 부리야트 몽골에서 몽골을 삭제하고 부리야트로 바꿨다. 이 명칭은 1991년 소련 붕괴에 즈음하여 부리야트가 주권을 선언한 후에도 그대로 남았다. 여기에는 부리야트인들이 스스로 부리야트 몽골이라 자칭함으로써 자기들을 몽골의 야스탕적 존재로 규정하려고 하는데 반해, 러시아 정부는 부리야트를 어디까지나 운데스텡적 존재로 간주하려고 하는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부리야트가 운데스텡적 존재가 되면 몽골과 분리된 러시아의 소수민족에 불과하지만, 야스탕적 존재라면 러시아 이외에 거주하는 몽골족과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결국 러시아정부는후자의 사태에 못을 박고 있는 셈이다.

이상에서 집단의 상위범주를 운데스텡, 하위범주를 야스탕으로 설명해 보았다. 그러나 이들 범주의 명칭은 몽골국에서도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이 다른 몽골족 거주지역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더구나 운데스텡과 야스탕의 구별은 할하나 부리야트의 사례에서 명확하듯이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13세기 칭기스칸이 대두할 무려벵 몰공이라는 명칭은 보작것 없는 하나의 집단의 명칭에 불과했다. 요컨데 몽골은 요즘과 같이 운데스텡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야스탕적 존재였다. 1206년 칭기스칸은 야스탕적 존재인 각 유목집단의 연합체를 [대몽골국]이라 명명했다. 이러한 사실은 몽골이라는 명칭이 [출자적 집단(出自的 集團)]이라기 보다도 오히려 집단을 제편하는 과정에서 성립한 [정치적 집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몽골은 그후 투르크계 사람들을 편입하여 집단을 재편했다. 역사 과정에서 편입 재편이 반복되고, 따라서 집단범주의 명칭도 똑같지 않았다. 현재 몽골국에서 운데스텡과 야스탕이라는 집단범주로 파악되고 있는 집단은 이러한 긴 역사적 과정에서 편입과 재편을 통하여 현재에 이른 집단이다.  

몽골민족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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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몽골(Mongol)이라 불리는 사람들(이하 몽골족이라 부른다)의 거주지역은 국경에 의해
 크게 3개 지역으로 구분 할 수 있는데, 각각 러시아연방의
부리야트 공화국, 독립국인 몽골국 (흔히 외몽골이라 부른다), 중화 인민공화국의 내몽고자치구(흔히 내몽골이라 불린다) 이다.

몽골족은 이밖에도 러시아령 칼묵 공화국, 중국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 청해성 등지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지난  [몽골 유목문화대전]의  중요전시물의 하나로 투르크(터키)어로 기록된 퀼 테킨 비문 복제품이  있었는데,[몽골 유목문화대전]에 왜 하필 투르크어 비문이 들어가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고대 터키인들이 몽골고운에 살고 있었다면, 현대 터키인은 조상의 땅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속단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현재 터키공화국에서는 극히 일부이지만 시오니즘을 연상시키는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는 세력도 있다. 비문에는 확실히 투르크 백성은 우투겐(하상의 발상지)땅을 보존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쓰여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현재의 [터키공화국]과 [몽골국]이라는 국명과 근대 이전의 [민족. 부족]집단의 이름을 같은 것으로 지레짐작한 데서 생긴 오해이다. 계통적. 혈통적 유대를 가진(혹은 그러한 자기의식을 갖고 있는)인간집단을 가리키는데 같은 [민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밖에 없지만, 근대 이전과 현대 사이에 그 의미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선 인식할 필요가 있다.

최근 중앙아시아 관련 각종 출판물도 이 점을 똑같이 강조하고 있는데,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이하 간략하게 서술해 두기로 한다.

<1> 역사자료에 등장하는 투르크 와 몽골

 무대를 몽골고원으로 한정해 살펴보아도 거기에는 유사이래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몽골 등 여러 민족집단이 흥망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그 흥망이라는 말은 이러한 [민족]이 갑자기 출현했다가 잠깐만에 완전히 소멸했다는 뜻은 아니고, 요컨데 보통 [유목부족연합체]라 불리는 대규모 연합체가 잇달아 교체되었다는 뜻이다. 흉노가 연합체의 중심세력이 되면 그 주변집단은 여기에 통합되어 [흉노가 되었다]는 것이다. 흉노가 망했다는 것은 연합체의 구심력이 약해져 분해되고, 연합체 성원들도 자신을 이미 흉노로 여기지 않게 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목집단은 개별집단이 전멸하는 경우도 물론 있었을 것이지만 흉노로 되고, 돌궐로 되고, 몽골로 되면서 유구한 세월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 사이에 동일한 집단명을 유지하면서도 말하는 언어가 바뀌고, 때로는 체질인류학적인 특징조차 완전히 바뀌어버린 예도 있었다.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중국 사서인 [주서]는 당시 키르기즈인을 [얼굴이 햐얗고 눈이 푸르다]로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의 키르기즈인은 투르크계, 결국 터키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몽골로이드]외모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집단이 쿠르크계였는가, 몽골계였는가라는 의론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좋을듯하다. 왜냐하면 몽골과 투르크 사이에 확연하게 선을 긋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는 단지 후대 관찰자인 우리의 눈으로 보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유목민 자신들도 그렇게 인식했다.
이 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훌레구울루스(이른바 일 칸국)의 재상 라시드 웃딘의 [집사]의 [부족편]부분이다. 본편은 그 당시 여러 유목 부족을 다음과 같이 4장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이하는 알리자데의 교정본에 의함)

 

  • [제 1장; 오구즈 제부족, (즉) 그 자손과, 글 형제 및 숙부 자손 중에서 그와 동맹한 자로부터 나온, 위에서 기술한 24부족의 역사와 이야기에 대해서]여기에는 위구르, 킵차크, 카를룩 등의 이름이 언급되고, 이어서 [모든 몽골가 투르크 제부족과 유목민]은 노아의 아들 야페테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이 전승은 라시드 이후에 야페테의 자식은 투르크, 그 자식은 몽골이라든가, 몽골에 쌍둥이 형제가 있어서 그드링 타타르라든가, 더욱 시대가 내려가면 투르크가 장자이고 몽골이 차남, 그 많은 형제 중에 친. 마친(즉 중국 내지 사람)과 울루스(즉 러시아)가 있었다라는식으로 발전 변형하게 된다.
  • [제2장; 현재는 모골(몽골의 페르시아 어형)이라 불리지만, 옛날에는 모든 부족이 고유의 명칭을 가지고, 각각 한 사람의 수령, 수장을 가지고 있었고, 각각 하나의 부족에서 유래하는 투르크 제부족의 기술에 대해서]. 잘라이르, 오이라트, 타타르, 그 밖의 부족이 여기에 포함된다.
  • [제3장; 그들도 또한 각각 독자의 군주와 지도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앞장에서 서술한 투르크 제부족이나 모골 제부족과 계통, 유연적(類緣的)관계가 없고, 그러나 모습과 언어는 그들과 가까운 투르크 제부족의 기술에 대해서]여기서는 케레이트, 나이만, 옹구트 등과 나란히 제1장에서도 이름이 거론된 위구르, 카를룩 등이 다시 언급된다.
  • [제4장; 옛날부터 그들의 명칭이 모골이고, 그들로부터 많은 부족이 갈라져 나온 투르크 제부족의 기술에 대해서] ]여기에는 몽골사의 전문가가 보통 몽골 제씨족이라 부르고 있는 우량카트에서 킹키야트에 이르는 26개 집단이 열거되어 있다.

 라시드는 의심할 바 없이 그 당시 유목부족의 자기인식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위와 같이 분류하였다.
그에 의하면 몽골은 투르크였다기 보다는 투르크는 유목부족의 총칭이었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시간적으로 몽골이 발흥한지 3세기 반이 지났지만 단기간에 저 유라시아 대륙 초원의 대부분을 지배한 돌궐(이 한자는 투르크의 音寫이다)에 대한 아득한 기억이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를 투르크의 일부로 간주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몽골이 돌궐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세계제국이 길]을 내딛기 시작했을 때, 그에 따라 유목부족은 [몽골로 되었다]는 것 역시 자연스런 과정이었다고 간주해야 한다. 이번에는 몽골로 통칭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통칭으로 사용된 몽골도 폐기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느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겠다.

<2> 민족으로서 투르크와 몽골

  몽골 세계제국 붕괴 후 언어적으로 투르크화하고, 종교적으로 이슬람화하면서도 [통칭]으로서 몽골의식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티무르제국의 경우 동시대 사람들은 이를 차가타이 울루스의 후계로서 보다는 차가타이 울루스 그 자체로 인식하였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투르크어를 차가타이어라 불렀다. 나아가 그 차가타이어 문학을 대표하는 [자서전]의 저자 바부르가 수립한 왕조는 모골, 즉 몽골이라 불렸다. 그러나 이 의미도 전술한 것처럼 지역에 따라 시기적 차이를 두고 점차 엷어져 간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아마도 어떤 개인이 속한[민족]은 단 하나라고 하는 근대의 [민족의식]이었다. 다민족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도 사람은 자신의 귀속을 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서 자세히 서술할 여유는 없지만 오래된 통칭인 투르크는 오스만제국의 잿더미에서 소생한 터키공화국으로 재발견디었지만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제민족은 각각 독자적인 명칭을 채용하거나 혹은 강제되어, 몽골은 단지 몽골국과 중국의 몽골족(다만 몽골어를 말하는 사람들 모두는 아니다) 이름으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의 생활현장에서는 여전히 민족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강과 몽골에서 들은 많은 이야기 가운데 이러한 상황을 짐작케 해주는 하나의 에피소들을 적어 두고자 한다.

현재 몽골서부에 거주하고 있는 우량하이족 중에 카자흐라는 씨족(姓)이 있다 . 전승에 의하면, 그들의 선조인 카자흐인은 말을 훔치러 왔다가 붙잡혔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에 유망한 젊은이 들에게 우량하리 처녀를 주어 이부족의 일원으로 삼고 카자흐라는 성을 쓰도록 했다고 한다. 카자흐라는 비교적 큰 민족 이름이 아주 작은 우량하이족의  소수 씨족명이 되었다. 중앙 유라시아 유목민은 태고 이래로 이렇게 복잡한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

 
몽골의 역사 이야기
 
몽골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는  분들을 위해 몽골(蒙古)에대한 유래를 먼저 설명하는 것으로 한다.

 사실
몽골(Mongol)은 원래 '용감한'이란 뜻을 지닌 부족어였으나, 징기스칸이 지닌 특별한 카리스마(Charisma)로 인해 오늘날엔 전체 몽골인 과 몽골어를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몽고(蒙古)라는 이름은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卑下)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사용한데서 비롯 되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민족간의 갈등과 경쟁은 결국 상대 민족을 비하 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아직도 한자로는 몽고(蒙古)라고 표기 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 엄연히 몽골리아의 공식 국가명칭이 MONGOLIA 이고 민족이나 민족어를 지칭할 때 MONGOL 이라고 표기 함으로 우리는 몽골국 또는 몽골인, 몽골어 등으로 지칭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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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역사는 역시,정복자 칭기스칸 과 함께 시작된다고 해야 할 것같다.

초기 몽골족 가운데는 몽골계 외에도  투르크나 탕구드계(西夏)등 여러 언어 집단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3 C 초 테무진이 칭기스 칸에 추대되고 몽골제국을 창건하면서 세계무대에 인식된 [칭기스칸]과[몽골]이 갖는 두단어의 카리스마(Charisma)로 인해 그들 소수부족 각자의 언어와 의식 모두는 철저히 몽골에 동화되고 만다. 이렇다보니 오늘날 몽골족 대부분이 칭기스칸을 자신들의 시조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 일 것이다.

 이렇게 주류를 이룬 몽골과 소수부족들이 어우러져 형성된 몽골은 칭기스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元)왕조를 세우면서 드디어 국가형태를 갖게되는데, 원(元)왕조 [1271 ~ 1368 ]는 원(元)의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재위 1330-1370:元 순제)-를 끝으로1368년  주원장(홍무제)의 명(明)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후 몽골은 지금의 고비사막지역으로 쫓겨나 13세기의 화려한 모습을 숨긴채 북원(北元)이라는 고립 국가로 남게 된다.(기록에 의하면 1377년까지 고려는 북원과 부분적으로 무역거래를 했던 것으로 보임)

 이후 1616년 누르하치에 의해 건국된 후금은 1636년 국명을 청(淸)으로 바꾸고, 내몽고지역에 대한 복속을 완료하며,1644년 중원을 제패함으로 결국 몽골은 만주계 청(淸)왕조의 속국이  되고 만다.

 이처럼 몽골에게 17C는 몽골족이 러시아와 중국 두 강대국에 병합되는 시기라 볼수있는데, 바이칼호 주변의 부리야트 몽골족은 러시아제국에 병합되고, 내.외몽골은 청조의 영토에 편입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남.북 몽골의 청조 편입 시기의 차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내몽골(남몽골)과 외몽골(북몽골)이 구분되어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게된다.

 청(淸)의 속국이 된  몽골인들은 결국 황폐한 초원 지대로 밀려나 오늘날과 같은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갖게 되는데 , 1911년 청(淸)조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탄생 속에 몽골은 가장 영향력있는 활불인 제 8대 젭춘 담바 호탁트를 국가수반(보그드 칸)에 추대하면서 독립을 선언한다. (이때 내몽고 지역의 활동가들이 합류했고, 몽골족의 통합을 위해 내몽고지역에도 군대가 파견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민족통합운동은 러시아와 중화민국의 간섭으로 실패한다)

 하지만 몽골이 독립을 선언한 외몽골 지역이 원래 중국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중화민국이 침공해 들어오자 결국 몽골(외몽고)은  독립을 취하하고, 1915년 몽골. 중국. 러시아의 캬흐타 조약으로  중화민국의 자치구로 전락하게 된다. 더욱이 1917년 러시아의 혁명으로 몽골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두 강대국의 균형이 깨지자 1919년 중화민국은 몽골왕공들을 협박하여 몽골의 자치지위마저 -자발적으로-반납하게 한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의 반혁명 (白軍)세력이 러시아 본토에서 혁명세력에 패주난입해 몽골지역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중에 1920년 몽골지역으로 들어온 반혁명 (白軍)세력 운게른 남작은 몽골인의 反漢감정을 이용하여 1921년 수도 후레(울란바타르)지역의 중국군을 러시아 국경 캬흐타로  몰아내고, 라마교의 활불(달라이 라마)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세워 외몽고에 일시적인 독재자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되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몽골인들은 러시아 혁명군의 원조를 받아 중국군과 활불 정부군을  맞서 열심히 투쟁하고 결국 1921년 수도 후레(現-울란바타르)를 점령하게 되는데, 몽골은 활불 정부군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7월 11일>을 지금도 독립 기념일로 기념한다.이렇게 몽골 해방군에 의해 성립된 몽골정부는 다시 제8대 젭춘담바 호탁트를 국가수반으로 하게 되고, 정부 내각수반 갖추게 된는데 이때까진 특별히 사회주의 색채를 띄지는 않았지만, 1924년 접춘담바의 사망이후 조금씩 사회주의 색채가 나타나서 결국 1924년 11월  몽골 인민공화국(인민당-인민혁명당)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세계에서 2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한편 내몽골 지역은 일본군이 1930년대를 거쳐, 2차대전 패전 전까지 내몽골을 장악 하고있었지만 계속되는 게릴라전쟁으로 인해실질적 지배권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런중에 당시 대장정을 마치고 섬서성 연안에 머무르고있던 모택동은 일본의 점령지 내몽골에 대해서 자치구로 인정할 것을 약속하게되고, 결국 1947년 5월 1일 내몽골은 중국에서 첫 번째 자치구가 된다.

 몽골국(외몽골)지역은 당시 사회주의 종주국인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중국정부도 외몽골 지역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고,이렇게 됨으로 오늘날과 같은 외몽골(몽골공화국) 과 내몽골(중국 자치구)의 형태를 갖게 된다. 외몽골(몽골국)이 1961년에 유엔(UN)에 공식가입하고, 1964년 중~몽 국경이 확정되어지자 내 외몽골의 분열이 고착되었다.실제로 숫자상 몽골족(Mongolian)들은 몽골 독립국-외몽골(몽골국)-보다 내몽골 지역에 더 많이 살고 있지만, 오늘날 이들(내몽골인)의 독립의지 또는 외몽골인(몽골국)의 통일의지는 몽골지기 개인생각엔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한민족 南.北韓간의 통일과 몽골족 中.蒙간의 통일은 닮은 듯 너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제목 : Genghis Khaanii magtaal
          

.자료출처: http://image.segye.com  "http://image.segye.com/blog/Files1/heaven/m-conquest.jpg       http://blog.joins.com/usr/b/l/bluemir33/16/doongly_78339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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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십댄스팀: 몽골 울란바타르 선교교회)

2006년 영등포 구로 공동체 아웃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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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음악: 몽골을 축복하소서(몽골어 찬양) +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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