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삶

                                                                            지 해 남 (북한이탈주민, 개천교화소 경험자)



나는 1949년 5월 17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전문학교인 고등 경공업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소녀시절 후 나는 여러 공장에 이름을 걸어놓고 선전대원으로써 모든 사회 성원들에게 당정책을 해설 선전했습니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구호를 소리높이 외쳐가면서 당이 제시한 인민경제 모든 분야에서 근로자들이 자신들이 맡은 인민경제 과업을 제 기일 내에 할 수 있도록 나의 “노래”로써 고무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1989년 이북에서 제13차 대회를 가진 해부터 나는 이북의 당 간부들의 어지러운 행동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간부들을 우상화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오히려 처벌받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1989년 이러한 배경에서 나는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과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저는 낙심한 상태로 어느 직장에도 취직 못하고 피를 판돈을 장사 밑천으로 장사질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함경남도 함주군 친구들이 1992년 12월 25 동짓날 저녁에 나를 청하여 노래를 부르면서 나의 마음을 달래어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 장소에는 손금을 보는 무당 한명과 다른 동무 3명 모두 5명이 함께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놀았는데, 이 장소에서 저는 남한노래 “홍도야 울지마라”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나의 스트레스를 풀면서 유쾌하게 친구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홍도야 울지마라”라는 남한 노래는 조선 예술영화 중 <민족과 운명>이라는 다부작 영화의 5부에서 카페 여가수가 부르는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이 영화는 박정희 정권을 시대적 배경으로 찍은 영화 였습니다.

몇달 지난 이후 1993년 5월 15일 함경남도 함주군 안전부 감찰과장이 저에게 이름을 부르면서 따라오라고 하기에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안전부 마당으로 따라들어 갔었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예심과(감옥 가기 전에 취조 받는 곳) 감방 철문을 열고 저를 집어 넣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얼마나 맞았는지 온 전신이 피멍이 들어 자리에서 1달 가량 일어나지 못했고 3년 형기를 받고 교화소에 끌려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함주군 안전부에 갇혔고 죄목은 김일성, 김정일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를 부르는 대신 수정주의 날라리 바람들을 사회에 유포선켰다는 죄의 두목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당시 사회 질서와 관련해 발표된 포고문에는 사회질서와 관련한 점을 치는 문제, 외국 노래 부르는 자, 국가사회재산 탐오 낭비, 일하지 않고 먹는 자, 술 마시는 자, 사기 현장 등 많은 조항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에 적응하게 잡히는 자는 무자비하게 처벌하며 때에 따라 사형까지 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같이 있었던 4명은 8개월 강제노동 가고 나는 두목으로 4명한테 “홍도야 울지 말라”라는 노래를 가르쳐주었다고 함경남도 함주군 안전부에 15일간 있다가 함경북도 명천군 안전부에 호송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또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문과 성추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당시 구루장 감방 경비원의 나이는 22~24 정도였습니다. 저는 너무 억울하고 철창 속에 갇힌 몸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시멘트를 네모난 형태로 4개를 잘라서 먹고 구류장 널마루 밑에 있는 오물들과 쓰레기들, 머리카락 등을 주어 먹었지만 죽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순간부터 구류장 경비원은 나에 대한 감시를 더욱더 강도를 높이면서 나를 더 꼼짝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상태로 명천군 안전부에서 화성군 안전부에 또 호송당하였습니다. 원래 저의 문제는 예심대상이 아니라고 예심처에서 전화가 왔는데도 아무튼 법관들은 철창에 갇힌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결함을 붙여서 징역을 보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나는 단지 잘못된 노래를 불렀다는 죄로 이런저런 사소한 결함을 들어 예심을 하였으니 나의 예심은 다른 사람보다 좀 경한 예심이었음에도 이러한데 다른 죄수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원래 교화소 밥은 하루 700g 씩인데 무슨 절약미로 떼여내니 한끼에 180g 밥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처음 신입자반을 졸업해야 교화반을 배치받는 사정으로 신입반에 들어가니 밥 한끼 100g 소금절임 배추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죽도록 맛있었습니다. 죽도록 맛있었던 사정은 허약에 걸렸던 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노동시간은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지만 국가의 바쁜 과제는 죄수들을 시키기 때문에 보통 22시간 일해야 합니다. 또한 남자 안전원들은 소위 여성 죄수들을 개별 담화한다는 이유로 사방대(안전원실)에 불러 성추행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1시간 매일과 같이 생활 총화 시간에 서로 남의 결함을 말하라고 하면서 호상 비판을 안하면 또 미달밥을 먹이기 때문에 죄수들끼리 죄 아닌 죄를 만들어 비판했습니다.

교화소는 1995년 9월에 소위 수령님의 배려라고 하면서 나에게 석방을 선포하였습니다. 석방되어 함주군에 배치받아 나아가니 사회의 모든 성원들은 교화소 출소자라고 했기에 직장 배치도 못받고 사람들도 나에게 곁을 주지 않아서 마음의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본 남편과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 다시 회복을 하자고 찾아왔기에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북한의 경제위기와 교화 출소자라는 어지러운 이미지로써 남편과 아이를 먹여 살릴 길 없어 수혈소에 가서 여러 차례 걸쳐 피를 팔아 아들을 먹여 살리면서 하루에 200~250 리씩 걸어 다니면서 아들과 남편을 데리고 장사질 하면서 3명의 식구들 생존을 유지하던 과정에 또 남편이란 사람이 장사밑천을 가지고 아들과 함께 어디론가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후 나는 남한을 목적으로 중국으로 도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98년 9월초에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이북돈 1000원을 가지고 출발하여 두만강행 기차를 타고 함경북도 무산까지 도착하였습니다.

무산은 국경지역이라 매일과 같이 길에 다니는 사람들의 통행증을 검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낮에는 계속 식당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면서 밤에는 개인 숙박소 사람에게 돈을 좀더 주고 숙박하면서 무산 국경경비대원을 한 사람 선택하여 먹을 것 200원 어치와 현금 200원을 주고 중국에서 장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돈을 더 주겠다고 하니 국경 경비대원은 나의 말을 믿고 통과시켜주어 낮 3시 30분경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닿게 되었습니다.

이북은 군인들도 배가 고파서 돈만 손에 쥐어주면 그 무슨 험악한 일도 도와 주었습니다. 그들은 제대할 때 조선돈 50만원을 손에 쥐고 제대해야만 사회에서 살아나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자비하게 군 내부규정과 관계없이 돈을 손에 쥐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이용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들어갔고 산속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을로 내려가 조선족 집에서 하루밤 재워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을 당했고 그래서 원두막에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잘 익지도 않은 실과를 따먹으면서 하룻밤을 지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과수원 주인에게 잡혀 과일을 많이 따먹은 죄로 며칠동안 그 집에서 인질로 잡혀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3시경 웬 승용차 한대가 아무런 경적도 울리지 않고 우리가 일하는 배나무 숲속에 들어 오길래 나는 근처 고추 밭에 엎드려 숨었는데 결국 나는 잡혀서 차에 태워졌습니다. 나는 이순간 북한군인줄 알고 너무 놀랬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길림성 룡정시라는 곳이었습니다.

나와 또 다른 여자 하나는 룡정시의 어느 홀아비의 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1명은 어디론가 팔려가고 나는 혼자 사는 영감 집에서 며칠간 성 노리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반항하다가도 공안에 끌려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나는 반항할 수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15일간 이 홀아비 집에서 성 노리개로 있으면서 밥이나 얻어 먹으면서 도망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중국 조선족이 날더러 흑룡강에 있는 언니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길래 공안대에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할 수 없이 조선족의 각본대로 움직여 그를 따라 떠났습니다. 알고 보니 나를 데리고 있던 홀아비가 돈이 없어 중국 조선족 사람에게 나를 빼앗긴 것이 였습니다.

나는 결국 길림성 돈화시 황니허 라는 곳의 중국 사람에게 중국돈 4천원에 팔렸습니다. 길림성은 매우 공안들의 검열이 심한 곳이라서 할 수 없이 이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남자의 키는 145cm 정도이고 외모가 매우 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집에 있는 동안 경찰들이 조사하러 오면 이불장안에 몇시간씩 숨어 있었고 이 사람은 내가 도망칠 것이 두려워서 일하러 나갈 때는 대문과 출입문 몇곳에 자물쇠를 잠궜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종일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서 대소변을 보아야 하였고 저녁이 되면 눈에 차지 않는 그런 몸서리 치는 괴물 같은 사람에게 억압적인 성회롱물로 순간 순간을 보내면서 오직 내가 이 집에서 탈출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내가 도망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의심한 이 사람은 나를 자기가 다니는 벽돌공장에 끌고 나가서 나를 밤낮으로 감시했고 공안대가 잡으러 오면 남자변소에 뛰어 들어가 몇시간씩 숨어 있고 또 벽돌 굽는 창고 안에서도 숨어있다가 온 전신이 익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때로는 쓰레기 창고에도 한겨울 몇시간씩 숨어 살아야 했고 또 공장 탈의실 옷장 안에도 몇시간씩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또 중국 놈들은 이북의 여자가 예쁘다고 하면서 내가 숨어 있는 곳까지 찾아와 동물원 짐승 구경하듯이 구경하면서 나를 성희롱하였는데 이들의 행동은 너무도 역겨웠습니다.




재외탈북자구호기금을 조성합시다!

여러분의 작은 정성이 재외 탈북자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몇달이 지난 후에도 도무지 탈출할 기회가 조성되지 않았었는데 중국 조선족을 통역으로 이용하여 흑룡강에 있는 우리 언니 집까지 중국 사람을 데리고 간 후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언니의 동무를 따라 산동성 위해시에 가서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식당에서 3개월 동안 일하면서 북한 녀성이라는 것으로 얼마나 수모와 멸시를 받으면서 돈도 제때에 주지 않고 식당의 어지럽고 힘든 일은 내가 다 해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들에게 잘못 보이면 공안대에 끌려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하다가 한국으로 꼭 가야 한다는 결심으로 얼마의 돈을 벌어서 북한 사람 6명과 공모하여 중국돈 700원을 가지고 휘발유, 구명대, 망원경, 라침판들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위해시 해수욕장으로 나가서 밤 12시경 고속 보트를 훔쳐서 한국으로 오던 중 배의 계기가 고장이 나서 배에 물이 찼고 깊은 수심과 높은 파도와 싸우다가 날이 밝을 즈음에 중국 개인 고기 잡는 사람에게 구원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허벅다리에 중국돈 50원과 쇠톱을 감추어서 가지고 있었고 만약 잡힐 경우 쇠톱으로 철창을 자르고 도망친다던가 아니면 차라리 자살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었습니다.

6명의 일행이 같이 지내며 다시 기회를 엿보던 중 어느 한국인이 우리들에게 중국돈 3천원을 도와주어서 우리는 또 기름과 구명대, 망원경, 라침판, 몇개의 빵을 사가지고 또 이번에는 발동선 고기 잡는 배를 훔쳐 가지고 위해시 호포라는 곳에서 몇몇 일행이 날씨와 안전한 날짜를 선택하여 밤 12시에 출발하였는데 남한으로 오는 과정 몇번씩이나 배가 고장이 났고 공해에 들어가지 못한 상황에서 3일째 되던날 날씨가 험해져 태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4일간 나와 춘실이란 녀자는 배멀미가 나서 정신이 오락가락 했었고 우리들의 운명은 바다귀신이 되느냐 하는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망원경으로 남한쪽을 보니 배가 2척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여 보니 이젠 남한 바다에 거의 다왔다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2대의 배를 한국의 배로 생각하고 두배를 향해 흰 천을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척의 배는 중국 배였습니다. 우리는 그순간 중국 배에 잡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도망하려 하였으나 너무나 지쳐서 결국 중국 배에 잡혀 중국 변방대에 15일간 잡혀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돈 천원을 빼앗기고 이북의 남자 1명은 변방대에서 도망친 죄로 그리고 우리 2명의 녀성은 족쇄에 묶여 밤에 변소에 갈 때도 팔목에 족쇄를 채운 상태에서 움직여야 하였습니다.

나는 중국 변방 대원들에게 우리가 아직 죄인이라는 판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족쇄를 풀어달라고 했고 족쇄를 안풀어주면 3층 창문에서 뛰어 내리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잠자리 옆에 남자 공안대가 밤새 경비를 서서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고 거의 15일간 팔목에 족쇄를 채워 끌고 다니면서 신문하였습니다. 나는 계속 한국사람이라고 우겼지만 이것이 인정되지 않아 계속 속좨를 찬 상태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안 감옥에서 약 10일경 체류하면서 가슴에 피멍이 들 정도상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중국 죄인들은 감옥 안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먹고 입고 뒹굴어도 괜찮지만 우리 2명의 이북 녀성은 3일간 밥이 없다며 굶겼고 화장지가 없어 변소도 마음대로 못가며 짐승처럼 취급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중국 공안 대원들에 의해서 중국 단동 구류장에 집어넣어 졌습니다. 단동 구류장에는 50명 정도 있었는데 30명은 이북 사람들이었습니다. 중국의 여성 공안대는 우리들의 자궁에서 돈을 찾아 내느라고 옷을 홀딱 벗겨 점프 동작을 30번씩 시키고 이에 성이 차지 않는지 자궁에 손까지 집어넣는 추악스러운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순간까지도 예측하고 중국돈 400원을 삼켰었습니다.

이렇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다가 2000년 12월 초에 이북에 있는 평안북도 신의주시 보위부 감옥에 북송 되었습니다.

보위부 감옥에서 20일간 있는 동안 이북의 안전원들은 우리들을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하였습니다. 감옥 안에서는 휴지도 없이 변을 보고 한 사발의 물에 세수하고 그 물에 손으로 뒤를 닦아냈습니다. 이곳에는 임신한 사람, 성병에 걸린 사람 어느 한 사람도 정상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쁜 여자는 다른 독방에 넣고 성노리개로 삼았고 수없이 죄수들을 매질했으며 절반 이상 벌레 섞인 설익은 옥수수 50g을 식사로 제공받는 인간 이하의 생활을 했었습니다. 임신된 여성들은 너무나도 먹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먹을 것이 없어 자기들의 손가락을 마구 물어뜯어 씹는 여성도 있었고 성병이 걸린 여성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소금에 자신의 하반신을 마구 비벼데서 엉망이 된 여성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겠습니까?

다른 여성들은 그냥 중국 땅에서 잡혀 나왔지만 춘실이와 나는 한국으로 도망가다가 잡혀왔기 때문에 더욱 처벌이 엄중하였습니다. 춘실이와 나를 각각 다른 방에 집어넣고 나에게 몽둥이 찜질과 모진 매질을 했고 이로 인해 치질이 재발하여 차가운 감옥 안에 앉을 수 없었고 그냥 모기처럼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고통에 신음하면서 생활하다가 20일이 지난 후 집결소에 끌려 갔습니다.

집결소에 끌려간 후 7주일이 지난 이후 석방자를 뽑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나는 제일 먼저 집결소 반장이 되었다는 공로로 석방되게 된줄 알았는데 실상은 중국으로 도망가다 잡힌 사람도 석방한다는 것을 보여준 후 내가 일단 집에 도착한 다음 체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는 다시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기차를 타고 다시 함경북도 무산으로 향해 떠나 2001년 1월 1일 아침 함흥 역전에 내렸습니다. 집에 와보니 오빠의 가족은 다 죽은 상태였고 내 아들의 생사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피멍이 든 아픈 가슴을 안고 다시 무산에서 낮 3시경에 살얼음판을 건너 중국 땅으로 건너 갔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마음이 착한 중국 조선족을 만나 이 집에서 7주간 일을 할 수 있었고, 이 조선족 도움을 받아 다시 위해시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한국 회사에 숨어서 중국 공안대의 눈을 피했고, 검열이 있을 때마다 산에 올라가 숨어 있다가 다시 내려오는 방식으로 공안대의 눈을 피해가면서 3개월을 일하다가 그곳을 2001년 10월에 떠나 4개월에 걸쳐 동남아 4개국을 거쳐 2002년 1월 14일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감옥살이와 구류장 생활 그리고 중국에서의 고통은 구체적으로 쓰자면 몇천장을 써야 하겠지만 여기서 줄이고 마지막으로 모든 인사 선생님들과 북한의 인권을 옹호하는 모든 분들에게 북한의 봉건 부패적이고 부정부패 정권이 인권을 유린하는 실상, 추악한 실상을 만천하에 폭로하여 세계의 화살표가 이북에 집중되여 지금 이북에 있는 백성들이 하루빨리 치욕스러운 사회에서 벗어나 이들도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인신매매·노동 착취에 노출된 북한 아동의 취약성-

노르마 강 뮤코
영국, 국제반노예연대 교육담당자

중국과 북한에서의 착취 및 학대에 노출된 북한 아동의 실태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우선 북한의 기아사태와 이에 따른 식량 및 경제위기를 초래한 사건들을 개괄하고 북한 난민들이 이웃한 중국으로 유입되게 된 데 대한 배경을 제시하고자 한다.

배경
1990년 초 냉전의 종식은 북한과 공산주의 동맹국 중국, 소련과의 무역량을 현저히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이는 북한의 농업 부문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트랙터를 돌리기 위한 연료와 비료를 만들기 위한 화학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식량 생산의 급격한 감소가 불가피하였다. 정체되어 있던 북한의 농업과 침체 일로의 경제 상황은 1995년과 1996년의 대홍수로인해 더욱 악화되었으며, 국가 전역에서 기아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본래 식량 배급제 (PDS)에 의해 분배되던 식량이 실질적으로 중단된 것이다. 계급, 즉 국가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식량에의 접근이 엄격히 통제되는 이 국가* 이 글은 2006년 2월 6일 아시아인권센터 주최 제1회 아시아인권포럼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Chung Byung-Ho, "Living Dangerously in Two Worlds: The Risks and tactics of North Korean Refugee Children in China", Korea Journal, Autumn 2003, p. 193.
에서 경제적으로 낙후된 동북부 지역이 기아에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식량에 대한 접근이 차단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뿌리, 풀, 나무껍질과 줄기와 같은 대체 식량을 찾아 헤매는 등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을 택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음식들은 영양학적 가치가 떨어질 뿐 아니라 소화시키기 어려워 특히 아동과 노약자들에게 극심한 소화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어린이들의 영양실조
유엔은 2백 만이 넘는 사람들, 즉 북한 전체 인구의 약 10퍼센트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기아로 인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UN Document No. E/CN, 4/2001/53. 7 February 2001, Paragraph 76. Estimates raging from 220,000 to 3,5million are cited in Marcus Noland, Avoiding the Apocalypse: The Future of the Two Korea,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2000, pp. 191-192.
기아와 계속되는 식량, 경제 위기는 어린이들에게 파괴적 영향을 미쳤다. 2005년 유니세프와 세계 식량 계획(WFP)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북한 아동들의 영양실조지수는 감소하였으나 아직도 연간 4만 명 정도가 빈약한 영양 공급과 이에 따른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영양실조에 따른 설사와 호흡기 감염이 사망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7세 이하 어린이 수천 명이 폐결핵, 불충분한 성장과 저체중 등의 소모성 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다. "40,000 North Korean Children Could Die From Malnutrition: UNICEF", The Korea Times, 10 October 2005.

북한인들의 중국 유입
기아는 식량과 일자리를 찾기 위한 이웃한 중국으로의 대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속되는 식량위기·경제 위기는 이와 같은 이주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중국에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탈북자들의 숫자에 대한 추정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최소한 5만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탈북자수에 대한 추정치는 10,000명부터 300,000명에 이른다. 본 보고서에서는 Johns Hopkins School of Public Health에서 작성한 보고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추정치를 사용하였다.
이 넘는 탈북자들이 백만에 이르는 조선족 Si Joong Kim, "The Economic Status and Role of Ethnic Koreans in China" in F. Fred Vergsten and Inbom Choi (ed.), The Korean Diaspora in the World Economy, Int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January 2003, p. 105.
들의 거주지이며 북한과의 경계에 위치한 길림성에 주로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탈북자들은 친척, 지인, 혹은 처음 만나는 동행과 더불어 일자리와 쉼터를 물색하며, 중국 당국에 발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간간이 이동하곤 한다. 중국 정부는 중국에 밀입국한 모든 탈북자들을 불법 이민자로 간주하며 체포할 경우 구금 후 북한으로 강제 송환한다.

가족의 해체
많은 북한 사람들에게 있어 가족의 해체는 일상적 사건이 되어 가고 있다. 부모들은 중국으로 떠날 때 자녀들을 북한에 남겨두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동과 일자리를 찾는 과정에 장애물이 된다는 점 외에도, 국경을 넘을 때 어린 아이들이 잠재적 위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어린이들은 이혼이나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버려지기도 하며 Lee Keum-Soon et al., White Paper on Human Rights in North Korea 2005, KINU, 2005, p. 273.
북한에 남겨진 자녀들은 가장이 되거나 친척들과 살게 된다. 어린이들은 중국으로 홀로 떠나거나, 혹은 부모 중 한 명과 함께 떠나기도 하지만 온 가족이 한꺼번에 이주를 시도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한 가족들은 강제 송환에 의해 서로 헤어지기도 한다. Refugees International, "No Chance to Dream: North Korean Children in China", 7 July 2004.


중국의 북한 아동들
중국의 북한 아동들은 불법 이주자로서 중국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 송환될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므로 Chung Byung-Ho, op. cit., p. 194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이들은 교육 받을 권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 몇몇은 교회들이 비밀리에 주관하는 성경 강의에 참여할 수 있으나, 중국 학교에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중국 학교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고액의 등록금을 지불해야 한다. 학비를 마련했다 할지라도 중국 공안의 단속 강화는 북한 아동들로 하여금 학교에서 멀어져 집안에서 사실상 죄수와 다름없이 살아가도록 하고 있다.

중국인과의 결혼
많은 북한 여성들에게 결혼은 뿌리치기 어려운 제안이자 포기하기 어려운 기회이다. 결혼은 이들에게 기본적 필수 요소인 먹을 것, 마실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할 뿐 아니라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하는 생존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언제든 북한 여성들은 자녀들과 함께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동반 탈북을 하거나, 정착 후에 아이들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다. 몇몇 아동들은 가족의 새로운 일원으로 잘 대접받는 반면 다른 아동들은 언어적, 신체적 학대를 당하거나 가족간의 불화로 인해 의붓아버지로부터 가출을 강요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대다수의 북한 여성들이 농촌 출신의 중국 남성과 결혼하기 때문에 이들의 자녀들은 농업과 관련된 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오랑 출신인 열 두 살의 한 소녀는 2001년 어머니와 중국인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의붓아버지는 그녀로 하여금 여름에는 들에서 일하게 하고 겨울엔 땔감을 모아 팔도록 하였다. 그는 그녀와 어머니를 자주 구타하였으며 가끔 도끼 등으로 때리기도 하였다. 소녀는 결국 도망쳤으며 현재 선교사 가정에 은신 중이다. Joel R. Charny, Acts of Betrayal: The Challenge of Protecting North Koreans in China, Refugees International, 2005, pp. 5

밀입국한 북한 여성과의 결혼은 법적 효력을 지니지 않으며 만약 해당 여성 혹은 그 자녀가 중국 당국에 의해 검거되었을 경우 여타 불법 이주자들과 마찬가지로 강제 송환을 당하게 된다. 중국 가정에서의 여성과 자녀의 지위는 불확실한 것이어서 언제든 내쫓길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들의 불법적 지위는 이들에게 어떠한 형태의 보호 혹은 의지할 수 있는 가능성도 허락하지 않는다. 착취 혹은 학대당하는 어머니와 자녀들은 강제 송환과 구금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이상 당국에 신고할 수 없다.
더욱이 북한 여성과 중국 남성의 결혼은 정부에 의해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중국 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 뇌물을 통해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 가능하나 비용이 무려 1만 위안(1,300달러)에 이르는 등 매우 높기 때문에 대부분의 북한 어린이들은 진학 연령에 도달해도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다.

인신매매
본 조사에서 대다수의 인신매매 사례들은 성인 여성과 연관되어 있었으나, 어린 소녀들의 인신매매 또한 존재하며 언급될 가치를 지니는 심각한 문제이다. 대부분의 인신매매 사례는 강제 결혼인데, 중국에서의 강제 결혼 현상은 정부의 한 자녀 낳기 정책과 농촌 지역에서의 남아 선호 사상, 그리고 농촌 여성들의 도시 유입으로 인한 성비 불균형으로 초래된 것이다. 농촌 마을에서 남녀 성비의 불균형은 13대 10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 Justin McCurry and Rebecca Allison, "40m Bachelors and No Women ... the Birth of a New Problem for China", Guardian, 9 March 2004.
되며 이러한 상황에서 인신매매자들은 북한 신부를 어디에서나 최소 400위 안에서 1만 위안(50-1,300달러) Good Friends has indicated that the average is from 3,000-5,000 yuan (US$375-625). Cited in Good Friends, Report on Daily Life and Human Rights of North Korean Food Refugees in China, June 1999, p. 21.
을 받고 매매할 수 있다. 이 여성들과 소녀들은 대부분 빈곤, 연령, 이전의 결혼 경력, 혹은 장애 때문에 중국 여성에게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중국인 농부들에게 팔려 가게 된다. Hannah Beech, "Buy Freedom", Time, 162:20, 24 November 2003.

평양 출신 의 한 15세 소녀는 1997년 결혼을 빙자한 인신매매를 당했다. 이 소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유모로 일한 바 있는 화룡성의 중국인 가족과 거주하고 있었다. 고용주들의 공모로 그녀는 인신매매자들에게 유괴되어 4천 위안(480달러)에 외진 시골 마을의 한 남성에게 팔려 갔다. 어머니는 인신매매자들에게 4천 위안을 지불하고 딸을 구출하기 위해 중국 남성과의 결혼에 동의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Norma Kang Muico, An Absence of Choice: The Sexual Exploitation of North Korean Women in China, Anti-Slavery International, 2005, p. 5.


꽃제비
지속되고 있는 북한의 식량과 경제적 위기는 점점 더 많은 아동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꽃제비라는 이름의 이러한 아동들은 버려지고 고아가 되거나 극심한 기아로 인해 집을 떠났다. 동행이 없는 이들은 어른들처럼 종종 10-15명이 그룹을 형성하여 식량과 일자리, 그리고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돕기 위한 수단을 찾아 중국으로 탈주한다. 대부분이 소년들이며 연령대는 10세 이상이다. 이들은 시장, 기차역, 공항, 그리고 특히 남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외국인 전용 식당에서 구걸을 한다. 이들은 매우 민첩하여 물건을 사고 팔거나 자신들의 소규모 수입을 가족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자주 국경을 넘나든다. 이들은 거리, 비디오 아케이드, 아니면 선교사들이나 인도적 기구에서 제공하는 쉼터에서 잠을 잔다. 거리의 아이들은 주기적인 경찰의 단속에 가장 종종 가장 먼저 검거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곤 한다. Human Rights Watch, The Invisible Exodus: North Koreans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November 2002, pp. 15-16.


강제 송환의 결과
허가 없이 북한을 떠나는 것은 사형에 필적하는 범죄인 까닭에 강제 송환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불러온다. 송환자들은 아동을 포함하여 모두가 최소한 한 달에서 세 달을 감금 노동 시설에서 보내게 되는데, 여기서 이들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불결한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며, 강제 부역을 하게 된다. 탈출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구타, 고문, 모욕적 대우, 그리고 심지어 강제 낙태와 영아 살해 등이 이들 시설에서 자행되고 있다. See David Hawk, The Hidden Gulag, US Committee for Human Rights in North Korea, 2003.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어 온 탈북자들은 우선 보위부(국가 안전 보위부)에 끌려가 구타, 굴욕적인 몸수색, 그리고 중국에서의 활동에 대한 심문을 당하게 되며 아동들도 예외가 아니다. 상황에 따라 보위부에서의 심문 절차는 이틀에서 몇 주까지 소요될 수 있다. 중국인과 결혼했거나 임신한 여성들과 소녀들, 그리고 이전에 국경을 넘은 기록이 있는 사람들은 더욱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된다. 이후 이들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감금 시설로 보내지는데, 남한 사람이나 선교사와의 접촉 등 정치적으로 더 민감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진다. 극단적인 경우 이들은 처형되기도 한다. David Hawk, op cit., p. 58.

발육 부진으로 인해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던 한 16세 소년은 1998년 부모가 모두 기아로 사망한 후 식량을 찾아 중국으로 떠났으나 국경을 넘자마자 중국 경찰에 검거되었다. 북한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보위부에서 구타당하고 혜산의 9.27 캠프로 보내졌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 곳에는 삼백 명의 죄수들이 작고 누추한 숙소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으며 매일 평균 두 세 명이 죽어 나갔다고 한다. Andrew S. Natsios, The Great North Korean Famine, USIP, 2002, pp. 76-77.
설립된 날짜를 따라 이름 붙여진 이러한 9.27 캠프들 은 1997년 거리에서 생활하는 아동들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북한 정부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시설이 하는 일은 주로 식량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노숙자(주로 아동들)를 검거하여 온기도 없고 물과 옥수수속만이 주어지는 텅 빈 건물에 구금하는 것이었다. 이 아동들은 가끔 한 달 가량을 감금당하기도 한다. 많은 아동들이 탈출을 시도 하거나 경비에게 뇌물을 수수한다. 이러한 캠프들은 결국 취약한 위생상태와 식량 부족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
아동들은 보통 감금 시설의 힘든 노동으로부터 면제되었으나, 여전히 이들 시설에서의 아동들의 처우는 매우 가혹하다. 예를 들어 2000년 중국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에 강제 송환된 한 열 여섯 난 소녀는 심문을 위해 청진의 보위부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한 달간 감금되어 있었는데 첫 열흘간 경비원들은 소녀로 하여금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15시간 동안 바닥에 담요나 방석 없이 꼿꼿이 앉아있도록 하였고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몸을 뻗으면 머리에 손을 얹고 종일 서 있어야 했다. Joel R. Charny, Op. cit., p. 3

1998년 어머니와 함께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또 다른 열 여섯 난 소녀는 힘든 노동을 면제받지 못했다. 그녀와 어머니는 구타당하고, 숨긴 돈을 찾는다는 명목 하에 몸수색을 당하고, 중국에서 남한 사람이나 선교사를 만난 적이 있는 지에 대해 심문 당했다. 이들은 무산의 노동단련대로 보내져 검게 썩은 옥수수가루로 만든 묽은 죽을 먹고 살았다. 소녀와 어머니는 둘 다 양배추밭에서 일하고 산에서 통나무를 운반할 것을 강요받았다. 경비원들은 이들이 빨리 달리지 않을 때마다 이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Norma Kang Muico, op. cit., p. 10.

이러한 감금 시설에서 살아남은 아동들은 풀려나는 즉시 중국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구타와 영양실조, 강제 노동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아동들은 다시 체포와 강제 송환에 대한 지속적인 공포가 기다리고 있는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만이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만약 다시 강제 송환될 경우 구금 시설에서의 처벌이 훨씬 더 가혹할 것임을 잘 알면서도 국경을 건넌다.

결론
이것이 중국과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착취와 학대에 노출된 북한 아동들의 실태에 대한 본 발표의 결론이다. 본 발표는 비록 북한 어린이들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사실상 수천 명의 북한 남성, 여성, 그리고 아동들이 착취와 학대, 노예나 다름이 없는 처지에 노출된 채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과 북한 어느 쪽에서도 보호 받지 못하며, 이들의 참상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식은 극히 미약한 상황이다. 인신매매를 당한 이들을 비롯하여 누구든 중국 당국의 주의를 끄는 자는 강제로 북한으로 송환되어 구금을 당하고 강제 노동과 고문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다음 권고 사항들의 이행을 요구하는 바이다.
l 중국 당국은 중국 탈북자들의 강제 송환을 중단하고 북한으로부터 인신매매되어 온 사람들에게 인도적 조치를 취할 것
l 북한 정부는 구금 시설에서의 강제 노동을 중단하고 형법을 개정하여 허가 없는 출국이 가혹한 처벌을 수반하지 않도록 할 것
l 북한 정부는 UN 특별보고관의 접근을 허가하여 구금 시설과 감옥 내 환경을 비롯한 북한의 인권 상황을 모니터할 수 있도록 할 것
l 국제 사회는 중국과 북한 이주자들로 인해 영향을 받는 다른 국가들과의 논의에서 북한 사람들의 인권 문제를 제기할 것             <시민연합>
[北내부 사진②] 여중생 열병식…‘뇌물 버스’…8월 평양

[北내부 사진②] 김정일생일 열병식 90초 위해 1년 훈련
[2006-10-24 18:13 ]  양정아 기자
핵실험으로 전세계의 관심이 북한에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데일리NK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안보리 대북결의안이 채택된 직후의 북한 내부 모습을 공개한다.

영상의 촬영시점은 미사일 발사 한 달 후인 8월 하순이고, 장소는 평양과 사리원 지역이다. 평양 주변을 촬영하던 촬영자는 평양시 서성구역 연못동에 위치한 3대혁명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겨 버스를 기다리는 주민들과 열병식 훈련에 참여중인 여중생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여중생들은 내년 2월 16일 김정일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진행되는 1분 30초의 열병식을 위해 1년 내내 강제훈련에 동원된다. 영상에는 여중생들이 발끝 하나라도 어긋나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학생들을 다그치는 당 간부의 목소리도 생생히 담겨있다.

강도높은 반복훈련으로 인해 열병식에 참여한 학생들은 대부분 심각한 관절염이나 소화기 계통의 병을 얻게 된다고 한다.

3대혁명전시관 앞 버스 정류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주민들의 줄이 수백 미터 이어지고 있다. 원래 규정대로라면 30분에 한 대씩 운행해야 하지만 2~3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버스가 도착하면 먼저 승차하기 위해 노약자, 유부녀, 어린아이까지 밀치는 모습이 보인다.

버스 줄을 새치기하기 위해 '줄반장(버스 줄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뒷돈을 건네는 모습에서 북한 사회 깊숙한 곳까지 뇌물 문화가 스며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상적 사회 시스템이 무너지고, 뇌물과 권력을 통해 사회가 운영되는 것이 북한의 현 주소임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다.


3대혁명전시관 근처에서 열병식 훈련을 하고 있는 여중생들이다. 중학교 5,6학년인 여학생들의 나이는 16~17세다. 탑위에 있는 사람은 구역 청년동맹 열병식 준비위원 일꾼이며, 당간부다. 탑 아래는 훈련 음악을 담당하는 ‘장치기술자’다.

통제자의 말이 들린다.

“말하는데, 10행대 끝에서부터 두번째 나와라 일루. 나와라 일루. 앞에서 신호준 다음에는 까딱하지 말아야지 왜 움직거려? 나와라 여기. 동무네는 '나머지 훈련조'에 속해. 다 적어놓으라. 중대장들은….. (지적한 여학생을 향해) 남아서 훈련하라”

탑 위의 통제자는 학생들 오른쪽 어깨에 부착된 행렬표를 보면서 실수하는 학생들을 계속 지적한다. 이날 훈련은 보폭과 발끝 높이를 맞추는데 집중되어 있다.

김정일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김일성 광장에서 진행되는 1분 30초의 열병식을 위해 이들은 1년 동안 강제 훈련을 받는다. 하루 연습은 총 12시간동안 진행된다.

오전 7시에 집합해서 2시간 훈련, 30분 훈련, 다시 2시간 훈련, 집에서 도시락을 싸와 12시부터 1시간 동안 점심을 먹고 다시 오후 훈련을 재개한다. 오후 훈련도 2시간 연습, 30분 휴식, 다시 2시간 연습 후 당일 훈련 총화를 마쳐야 끝난다.

6개월간은 각 구역별로 연습을 하고, 나머지 6개월은 '4. 25 여관'에 들어가 전체 연습을 진행한다. 4.25 여관은 평양시 교외 미림관문 부근에 있는데 중학생, 대학생, 청년동맹, 사회단위가 모두 모여 실전 리허설을 갖는 것이다.

미림여관에 들어가면 ‘서서 똥을 싸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도 높은 반복훈련에 시달려야 한다. 열병식 연습으로 다리가 굳어 변소에 가도 앉지 못한다는 말이다. 열병식에 참여한 학생들은 대부분 심각한 관절염이나 소화기계통의 병을 얻게 된다고 한다.

3대혁명전시관은 평양시 연못동(서성구역)에 위치하고 있다. 화면에는 사진을 찍어준다는 간판이 보인다. 사진은 크기에 따라 3백원에서 1천 2백원까지 하는데 캠코더로 동영상 촬영도 해준다. 보통 사진을 찍고 크기에 따라 돈을 지불한 다음 3~4일 후에 다시 와서 찾아간다.

화면에 나오는 동그란 건물이 바로 3대혁명전시관의 제1관이다.

화면에 차표를 파는 매대가 나온다. 연못동-순안(순안비행장이 있는 곳) 노선의 출발점인 곳이다.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느라 길게 줄을 서서 앉아 있다. 원래 규정대로면 30분에 1대꼴로 운행을 해야 하는데 시간은 지켜지지 않는다. 때로는 2~3시간동안 버스가 오지 않다가 2~3대가 연달아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3대혁명전시관 앞에는 지하수 수도관이 있다. 평양의 일반가정에도 수돗물 공급이 원활치 않으며 수질 상태가 매우 열악하기 때문에 근방 주민들이 물통을 들고와 식수를 받아간다. 물통은 모두 중국산 플라스틱 통이나 페트병이다. 특별한 통제는 없다고 한다. 촬영시간은 한낮으로 사람들이 별로 없다. 하지만 아침시간이나 저녁시간에는 1백미터 이상씩 물을 뜨려는 사람들의 줄이 이어진다고 한다.

정류장 맞은 편에서 버스가 시동을 걸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선다. 버스는 앞문과 뒷문이 있는데 앞문은 군인전용 문이고 뒷문이 일반 주민들이 승차하는 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줄로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경무대(북한의 헌병) 군인들이 군인줄에 줄서있는 사람들에게 대해 신분증과 외출증을 검사하고 있다. 군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휴가나온 군인이거나 군인가족들이다.


화면에 완장을 찬 ‘줄반장’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전문적으로 ‘줄’만 관리하는 사람이며, 정식 직업이다. 차표는 차장의 책임이며 줄반장들은 순서에 맞게 사람들을 승차시키는 일을 하거나 새치기를 차단한다. 하지만 이런 줄반장들에게 5백원을 쥐어주면 당당하게 새치기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버스표는 120원인데 줄반장이 받는 뇌물은 5백원이다. 새치기 줄 밖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줄반장에게 돈을 준 사람이거나 새치기를 시도하려는 사람들이다.



버스승차가 시작되자 줄반장들이 새치기를 통제한다. 줄 서 있는 사람들사이에서는 새치기를 지적하는 항의가 이어진다. 승차 줄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다음 버스에서 앉아가기 위해서 자기 순서를 지키고 있다. 줄반장과 미리 이야기가 된 사람은 슬쩍 버스에 올라타고 줄반장과 이야기가 안된 사람은 면박을 당하는 모습도 나온다. 줄반장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까지 밀쳐낸다. 버스가 한대 올때마다 이런 작은 소동이 일어난다.

정류장 맞은 편에 주차되어 있는 버스들은 청진버스공장에서 생산된 북한산 버스인데 정규버스들의 운행이 끝난 저녁 시간에 1인당 5백원씩 받고 사설운행을 하는 ‘써비차’(사적영업을 하는 버스, 화물차를 통틀어 북주민들은 써비차라고 부른다. 써비란 써비스에서 유래된 말로 '서비스차'를 줄인 것이라 함) 들이다.



조선인민군 호위총국 10호 초소에서 검문하는 모습이다.

촬영자는 순안구역에서 연못동으로 나가는 버스에 타고 있다. 버스가 정차한 곳은 평양시 형제산 구역 간리초소 앞이다.

10호초소는 평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열하는 곳이다. 평양시민이 아닌 지방 사람이 여행증명서를 갖고 있는지 확인하며 물품검사를 하기도 한다. 단속에 걸리면 단위 집결소에 끌려가 강제노동에 처해지게 된다. 평양 외곽은 모두 호위총국 10호 초소에서 주민들을 검열한다.

검열원들은 대부분 10대 말~20대 초반인데 검사하는 주민들에게 존칭어조차 쓰지 않아 일반 주민들은 매우 싫어한다. 버스 승객이 많아 서 있는 사람은 밖으로 내리게 해서 검사를 하고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검열원이 버스에 올라 증명서와 물품을 검사한다.

간리(평양 진입 동네) 초소의 건물에는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를 목숨으로 호위하자”는 구호가 걸려 있으며, 초소 인원은 일반 중대 인원보다 약간 적은 100명 내외라고 한다.

다른 버스가 도착하자 검열원이 다가가 버스에 오르고 있다. 중국에서 수입된 2층 버스다. 평양에만 유일하게 있는 2층 버스다.
 
[양정아 기자] www.dailynk.com
평양 뒷골목…어린 세대들은 죽어간다

[北내부영상④] 절망의 꽃제비들… 대북정책 목적 도대체 뭔가?
[2006-11-03 19:19 ]
데일리NK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한달 후인 8월 평양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입수해 긴장된 정세속 북한 내부 모습을 독점 연재하고 있다.

대낮 도로변에서 안전원(경찰)과 주민간 싸움이 벌어지고, 버스를 타려고 해도 뇌물이 필요하며, 김정일 생일 기념행사 90초를 위해 1년간 피땀어린 연습을 해야하는 여중생들의 모습까지. 이번 영상을 통해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 있었던 평양 주민들의 일상 생활이 외부세계에 있는 그대로 전달됐다.

연재의 마지막 순서로 꽃제비들의 모습을 모아봤다. 북한 전역에는 아직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나이의 아이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길거리를 떠돌고 있다. 이는 평양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촬영자가 찾은 평양과 황해북도 사리원 지역에도 어디를 가든 꽃제비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린 동생을 업고 구걸을 다니는 모습. 지갑을 훔쳤다는 누명에도 말 한마디 못하고 눈물만 훔칠 수밖에 없던 억울함.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 아이들의 미래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심지어 성인이 될 때까지도 거리의 부랑아로 남아야 하는 이들에게 내일에 대한 희망은 찾아보기 힘들다.

평양을 다녀왔다는 남한의 이름있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뒷골목으로 쫓겨다니는 이 아이들의 존재를 과연 알고나 있을지 모르겠다.


촬영장소는 사리원 외곽이다.

길가에서 담배파는 처녀가 “~언니야 대담배 가져오라. 대담배~”라고 말한다. 대담배란 담배 한 개비를 뜻한다. 1갑에 1천 5백원짜리 '고양이 담배'(크레이븐)의 경우 한 개비에 1백원~1백50원에 판다. 생활이 어렵다보니 10대 중반의 소녀들도 장사에 나선다.

할머니는 길가에 앉아 있다가 손가방을 잃어버렸다. 순간 손가방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꽃제비 아이를 발견하고 아이를 붙잡았다. 아이는 숲에다 옥수수 반토막을 감추려고 하다가 할머니 눈에 띄었다. 할머니는 아이를 의심하고 있다. 아이는 울면서 가방을 훔치지 않았다고 부인한다.

주변에 있던 담배장사 아가씨들(10대후반)은 방금 할머니 옆에 있던 양복입은 남자가 범인일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런 어린애들은 가방같은 물건은 훔치지 않는다며 아이의 무죄를 주장한다.

(할머니)“이걸 왜 숨기는가 하는 거야, 이새끼야, 그러니까 너가 그걸(가방을) 가져가지 않았나? 가, 지금 이 강냉이를 숨기려고 하니까 내가 널 끌고 오지 않았나? 너 끌고 간다 저기. 너 이제 사리원에 못와. 집없는 애 끌고 간다 말야, 빨리 대라. 누가 가방 가져갔나?”

(담배장사 아가씨)“여기 남자 하나 있지 않았나요? 새카만 모자에 사람..”

(할머니)“양복입은 사람 여기 있다가지 않았나? 여기 앞에 있었지 뒤에 있었나? 앞에 있었지”

(담배장사 아가씨)“남자들이 다 채가요. 아이들이 못 채가요. 애들이 못해요”

(할머니)“이 애가 여기 왔다갔다 말이야”

(담배장사 아가씨)“돌리기(소매치기나 좀도둑을 지칭하는 말)는 그렇게(아이처럼 남루하게) 입고 안 다녀요”

(할머니)“아니 야가 요 앞을 이렇게 지나가다…”


꽃제비가 앞에서 담배를 말아 피우고 있다. 30대로 보이는 이른바 어른 꽃제비다. 모자에는 약간의 잔돈이 놓여 있다.

사리원 역 앞에 장거리 버스들이 대기하고 있다. 버스마다 올라타서 동냥하는 꽃제비 아이들이 등장한다. 아이가 아이를 업어 키우는 모습도 눈에 띈다.

화면은 평양 서성구역으로 지하철 붉은별 역 앞의 공원이다. 공원이름은 ‘붉은역 앞 공원’이다. 공원에는 음료수와 과자, 담배, 빙과를 판매하는 매대들이 보인다.

한여름이 되어 공원의 나무들에 송충이가 늘어나자 근방의 인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이 송충이를 잡고 있다. 송충이를 잡을 살충제가 없어 어린 학생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인민학교에서는 ‘좋은일 하기 운동’이라는 미명하에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 공공근로의 영역을 해결하는 일이 흔하다. ‘좋은일 하기 운동’은 정규 수업 외에만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며, 정규 수업을 빼먹는 일도 많다고 한다.

이날 동원된 학생들에게는 1인당 1kg씩의 송충이를 잡는 과제가 떨어졌다. 학생들은 나무젓가락과 나뭇가지를 이용해 송충이를 비닐 봉지에 담아 교사들에게 확인을 받아야 한다. 어떤 학생은 나무에 올라가 송충이를 잡는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날 동원된 학생들은 약 100여명 정도였으며 오전 내내 4시간 정도 송충이 잡기에 나섰다.

화면에는 공원을 떠돌고 있는 꽃제비들이 땅바닥에 앉아 있는 장면도 나온다. 꽃제비들과 학생들은 옷차림에서부터 확연히 차이가 난다.

평양에서는 인민반 별로 매달 5리터씩 맥주를 구입할 수 있는 맥주표를 나누어 준다. 이 표를 인민반에서 받아 이곳에서 확인도장을 받으면 1잔(500cc)을 50원에 구입할 수 있다. 뒷거래 가격은 400원인데 할일 없는 노인들이 이 맥주표를 모아서 대학생들이나 젊은이들에게 200~300백원에 판매한다. 도장을 찍는 곳은 선교구역 대흥동 거리다. 한번 줄 설 때 1장씩만 도장을 받을 수 있다.

써비차(일명 달리기 차, 돈을 받고 사람들을 태워주는 장사차량)가 출발하기 전에 짐과 사람 위치를 정리하고 있다. 짐, 민간인, 군인 등 빈자리가 없어야 차는 출발한다. 안전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기 때문에 에서는 대형 인명피해가 나는 경우도 많다.

사리원 외곽의 농촌 도로에 화물차가 전복되어 있다. 한국에서 보내준 경운기가 화면에 지나간다. 차도에 서 있는 달구지와 부딪혀서 화물차가 전복됐다.

사고 수습을 하던 교통 보안원이 “3반 (작업)반장 새끼랑 6반 반장, 조장들 당장 (보안서에) 잡아 넣어라! 가둬 넣어라!(사람을 잡아서 구금하라) 다 잡아 넣어라!”고 고함을 치고 있다. 보안원은 차 도로에 농장 작업반의 달구지를 세워놓은 바람에 사고가 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장소는 사리원 서리동의 시멘트 시장이다. 이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시멘트가 kg단위로 소매되고 있다.

화면에 나오는 수레는 짐을 날라주는 짐꾼들의 것이다. 돈을 받고 짐을 날라주는데 거리와 무게에 따라 요금은 다르다. 소가 수레를 끄는 것이 인상적이다.

사리원 농촌에서 인민군 화물차가 미나리와 베이어 합판을 싣고 있다. 승리58화물차는 목탄차로 이용되고 있다. 시동을 걸자 연기가 운전석에 들어와 연기를 빼느라 잠시 소동이 벌어진다.

평양시 낙랑구역내 진료소에 붙어 있는 포고문이다.

포고문의 제목은 ‘포고, 전력선 통신선을 끊거나 마약거래 행위하는 자를 엄벌에 처하는 데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다.

내용은 전력선, 통신선을 끊거나 팔고 사는 행위를 절대로 하지 말라, 마약을 비법적으로 거래하는 행위를 절대 하지 말라, 전력선·통신선을 끊거나 비법적 마약거래 자는 법기관에 신고하라, 비법적으로 마약거래 한 자는 10일 내에 자수하라, 자수하지 않으면 사형에 이르기까지 엄벌에 처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포고문의 작성은 인민보안성이며, 주체 93년(2004년)으로 표기되어 있다(연재 끝).
'평양도 식량공급 중단 위기'


        

     


◇북한 주민들이 줄을 서서 식량을 배급받고 있다./연합자료사진

지난해 10월 부활한 북한의 식량 배급제가 평양에서도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은 23일 소식지에서 평양양곡관리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 "3월에는 배급이 나오지 않았고 4월에는 10일 분의 식량만 공급했으며 5월부터는 시민에 대한 식량공급이 전면 중단된다"고 밝혔다.

소식지는 앞으로 식량공급이 5-6개월 정도 중단될 경우 일부 평양시민들은 식량구입을 위해 국경지역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평양시민들 사이에서는 "국경만 넘어가면 최소한 먹고 살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북한당국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시민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소식지는 주장했다.

그러나 당기관, 법 및 경제기관, 생산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대규모 공장.기업소에서는 식량 공급이 원만히 이뤄지고 있다고 소식지는 덧붙였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최악의 식량난을 겪게 되면서 식량공급을 전면 중단,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토록 했으나 작년 노동당 창건 60돌(10.10)을 시점으로 배급제를 재개하고 시장에서 식량 거래를 중단시켰다.

식량 배급제 재개에도 불구하고 함경북도를 비롯해 산간 오지의 국경지역에서는 식량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반면 평양시민들은 안정적으로 식량을 배급받은 것으로 알려졌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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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탈북 소년의 눈물겨운 이야기

13세 소년이 탈북, 피를 흘리며 쓴 수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선 보인 그 비극보다 더 처절한 비극을 연출한 21세기 현대판 지옥에서의 탈출 드라머. 이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동포에게 감사 드립니다. 잊지 않으리라...(틀린 글자 -오자 - 가 많으니 양해 바랍니다. )


남조선분들에게 드립니다.
북조선에서 도망쳐서 여기지금 중국에서 이글을 씁니다
저의 고향은 평양입니다,아버지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학부 선생이였고 어머니는 김형직사범대학에서 외국어학부 선생이였습니다, 누나는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기악을 배우는 학생이였습니다, 저의가족은 평양시 동대원구역에 살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에 올라오자마자 인차 아버지,어머니.누나와함께 정치범 관리소에 가게되였습니다, 평양에살때 우리는 행복하게 잘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친구들과 술마시다가 술에취해 로동당에 어긋나는 정치적 발언을하여 반당,반혁명분자로 되여 우리집식구들은 함경북도 명천군인가하는곳에 정치범관리소에 잡혀가게 되였습니다, 밤에자는데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드리며 사람들이 밖에서 소리쳤습니다
아버지가 나가서 문을 열었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4명이 시꺼먼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아버지 가슴을 쎄게 때리더니 량쪽에서 팔을 비틀어 뒤로하여 족쇄를채우고 두사람은 아버지를 끌고나가고 두사람은 우리집을 수색하엿습니다. 집안이 전부 마사지고 부억에 내려가 사발까지 다 깨버리더니 어머니와 누나.나를 방바닥에 앉으라고하더니 아버지가 집에서 반혁명적소리들을
하지않았는가,나쁜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는가.록음기로 라지오를 듣지않았는가,하면서 여러가지를 자꾸 물어보앗습니다
아버지 당증을 찾아서 그것은 자기네들이 건사한다고 하면서 주머니에 넣었고 아버지가 전국지식인대회에서 와 사로청대회,그리고 군대때 대회에 참가하여 찍은 기념사진4개를 몽땅 벗겨서
보자기에 싸가지고 자기비판을 할준비를 잘하고 있으라고 하더니 밖에 나오지 못하게 밖으로 열쇠를 채우고 가는것이엿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건강하지 못한데 그때 사람들이 나가자 마자
기절하면서 쓰러�습니다,누나와 나는 울면서 어머니를 흔들엇지만 새벽에 날이 밝아서야 어머니는 깨나더니 누나와 나를 안고 계속 울엇습니다
아침에 9시되여서 까마즈차가 오더니 (러시아제 화물트럭) 우리집물건을 다 실어가고 어머니와 누나,나는 갱생에 (68년 북한산 �차) 타라고 하더니 평양시보위부에 싣고가 거기서 2일밤 감방안에 있으면서 나는 그냥 있고 어머니와 누나가 계속 불리워나가 조사를 받앗습니다
손도장이랑 여러번 찍더니 3일되는 아침에 랭동차에 타라고 (북한에서 자체로 철판으로 차적재함에 철집만들어쒸운차인데 호송이나 포약 ,탄약,등 중요물건 나를때 이런차를 쓴다)하엿습니다
그안에 들어가니 아무것도 없고 군대 4명이 총을메고 앉아있다가 우리를 끌어올려 놓앗습니다
그때 우리가족 뿐아니라 젊은남자 3명,녀자2명도 함께 갓습니다
그사람들은 손과 발에 족쇄를 다 채우고 우리가족은 그냥갓습니다
쉬지않고 게속 가다가 모를곳에서 밖에나가 변소보라고 (소변)하면서 우리가족은 차에서 내리게하여 길옆에서 변소를보고 족쇄에 묶이운사람들은 차에물넣을때쓰는 바게쯔를 올려보내 거기다 오줌을 누게 하엿습니다,우리식구를 타라고하더니 문은 하나만 닫고 하나는 열어놓고 군대4명과 운전수(운전기사),별을 단사람2명이 밥싸온걸 펼쳐놓고 밥을 먹으면서 <먹고싶지?그러게 왜 당을 반대하나? 당을 배반하면 너희들은 짐승보다 못해!>하면서 쌍욕을 하면서 자기들끼리만 밥을 먹더니 별을단 사람 한명이 나를보고 <야!거기새끼반동!이리와!>하더니 <네애비,에미반동이여서
너두 고생하는거야>하면서 밀빵두개와 절군오이반찬 한젖가락 크게 집어서 내손바닥에 주면서 다먹은다음 올라가라고 햇습니다, 저는 오이만 씹어먹고 빵은 먹는것처럼 하면서 춤(침)을 발라 꽉 쥐여 쪼꼬마게 덩어리 두개를 만들어쥐고 <잘먹엇습니다>인사하고 차에 올라가자마자 한덩어리는 엄마입에 넣고 다른 한덩어리는 누니입에 쑤셔 넣엇습니다
어머니는 아무말도 못하고 내손을 꽉잡고 빵덩이를 입에문채 나를보면서 눈물흘렷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새벽 2시쯤해서 관리소에 도착햇는데 정문앞에 사람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잇엇습니다,

(이 아이가 들어간 수용소는 함경북도 화성군에 있는 16호 관리소인데 원래는 중요범죄자들만 취급하던곳이다 반당반혁명분자,반당반혁명 종파분자,들로써 관모봉기슭에 잇던 정치범 관리소를 없애게 되면서 거기에 있던 김창봉 ,허봉학 등도 여기에 있다가 화성관리소로 왓다고한다
관모봉 관리소를 없애게 된근원은 6군단을 해산하면서 9군단사령부를 관모봉기슭에 건설하면서 그안의 정치범 관리소를 없애게 되엿다 또한 온성군 종성구의 정치범수용소도 그안에 인민군 담배농장을 건설하면서 인원을 각 정치범 관리소들에 분활 배치햇는데 여기인원중에서 엄중범죄자들이 화성 관리소로 가게 되엿다
6군단 사건마무리하면서 체포된 사건관게자들도 모두 화성으로 옮겨�는데 당시 그인원들 을 실어나른 사람 이 본인과 혈연관계이다
이때부터 화성의 정치범 관리소는 부피가 커지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엿다)

꿱꿱 소래기치며 우리를 보고 머리를 들지말고 손을 올려 머리뒤에 붙이라 하면서 초대소에 들어가더니 족쇄에 묶이운사람들은 그냥 그길로 차에 싣고 들어가고 우리가족은 방바닥에 무릅끓고 앉으라고하더니 이것저것 물어보며 책에다 쓰는것이였습니다
사람4명이오더니 어머니와 누나를 먼저 데려내가고 우리를 데려온 사람들에게 이젠 다 �다 돌아가도 된다고하자 그사람들은 자기네끼리 말하면서 나갓습니다
사무실바닥에 혼자앉아잇는데 어떤 보안원이 오더니 나를 데리고 가더니 감방에 가두엇습니다
들어가기전에 입고온 옷들을 다벗기고 거기서 죄수복을 주엇는데 너무커서 마대처럼 너덜거리고
너무 낡아서 다 구멍이 뚫리고 때가 너무껴서 옷처럼 보이지 않앗습니다
그안에는 20살부터 10살까지 남자아이들만 30명잇엇는데 그런반이 6개엿습니다
나는 4반이엿습니다
내가 잇는데는 3구역이라고 햇습니다
새벽에 반장이 기상하고 소리쳐서 다 깨여나 밖에나가 줄을 섯습니다
그때 밖을 보니 량옆이 다 벼랑인데 벼랑에다 동굴을 파고 거기에 기관총을 걸고 군대들이 보초를 섯습니다 내가 거기 잇을 때 벼랑초소를 세여보니 12개가 3구역을 지키고 잇엇습니다
그날부터 가구 만드는 조에서 목수일을 배워주기 시작햇습니다
우리가족은 다갈라져서 아버지는 1구역 ,어머니와 누나는 2구역에 갓는데 1구역 아버지방은 손과발에 족쇄를 차고 잇어야하는 엄중한 죄수구역이고 2구역은 허리굽히고 들어가는 콩크리트 창고인데 계단으로 해서 땅속으로 내려가면서 방들이 잇엇습니다
천정은 살창을 치고 그우에 보초병이 총을메고 보초를 섭니다
2구역은 강제로동을 시키는곳인데 남자들은 벌목과 제재일을하고 (통나무를 판자로 만드느곳)
녀자들은 농사일을 하엿습니다, 3구역은 나이많은 사람들과 어린아이들 .그리고 1.2구역의 가족들이엿는데 죄수들을 치료하는진료소도 잇엇습니다
밥은하루 두끼주엇는데 한끼는 감자1개와소금몇알을주고 다른한끼는 통강냉이 삶은것을 한줌주거나 벼겨,강냉이겨를 가루내여 범벅을 만들어서 한덩지씩 주기도 햇고 통밀을 삶은것을 한줌주기도 햇습니다.나는 일을 잘하지못한다고하면서 반장이 자꾸만 절반씩 빼앗아갓습니다
그래도 선생님들에게 말하면 안되엿습니다, 감옥주변에는 풀도 제대로 나지못하게 약을쳐서 배가고파도 풀�을데가 없엇습니다,어쩌다가 빽빽이풀과 고마리풀,도꼬마리풀과 강태나무풀을보면 선생들에게 들키지않게 뿌리까지 다 뽑아서 먹고 나머지는 씹어서 덩지 만들어 숨겻다가 밤에 잘때 몰래 먹엇습니다. 3구역안에사는사람들중에는 산에서 도토리를 잘줏거나 송이버섯을 잘따는사람들은 그래도 산에서 일하면서 칡뿌리,머루,다래,돌배도 먹는데 우리처럼 평양에서 살던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관리소안에서 시키는일만 햇습니다
작년에 관리소에 들어왓을때 몇달동안은 우리가족이 모두 검토기간여서 남들보다 고생을 숱해햇습니다, 일주일에 2번아니면 3번씩 아버지와 우리가족을 한자리에 모이게하고 여러가지를 물어보앗으며 감시원선생들이 아버지가 제대로 불지않는다고 하면서 우리가족이보는앞에서 각자몽둥이로 아버지를 때리엿으며 메고잇는총에서 소제대를 뽑아서 때렷습니다
또 어떤때는 전동기에 끼우는 피대를 잘라서 만든 채찍으로 때렷습니다
아버지가 맞아댈때마다 어머니는 기절하엿습니다, 어머니가 기절하면 선생들은 물한바게쯔를 떠다가 나에게 주면서 엄마에게 부으라고 하기에 나는 무서워서 떨면서 엄마의몸에 물을 부엇습니다,아버지가 그때마다 소리치면 선생들은 <이새끼. 아직 정신 덜 들엇다>면서 량옆에서 달려들어 아버지의 관절사이에 각자나무를 끼우고 무릅을 밟아대엿습니다, 어떨때는 아버지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여기자료가 다잇다,돈 얼마를 받앗어.안기부요원대라,너희단체를 대라>하면서
때렷습니다,너무 맞아대여 아버지는 이발이 남은것이 없고 입이 터져서 말도 제대로 하지못하엿습니다, 머리를 다 깍아�는데 머리가 너무 맞아대여 성성한데가 없엇습니다.
온몸이 상처가 가뜩햇고 제대로 걷지못하니까 선생들이 량옆에서 끌고 다�습니다
선생들도 때리고 조사나온 양복차림의 사람들도 때렷습니다, 자꾸만 대라고하면 아버지는 그런일이 없다고하면서 선생들에게 대들고 그러면 여러명이 달려들어 거의죽게 때렷습니다
작년겨울 12월
설날며칠앞두고 우리가족을 모두 불러내여 <설전에 네새끼일 끝내야 한다,골아프다,야 이새끼야! 시원히 확 불어버리믄 너두 편안하구 나두 편안할거 아니냐>면서 1구역안에잇는 작업장창고앞 돌배나무에 묶어놓앗습니다,양복입은 사람이 동복(외투)큰거 걸치구 나와서 앉아잇고 다른 선생들은 옆에 서잇엇는데 양복입은 사람이 다른선생에게 가서 각자 6개를 가져오라구 시켯습니다
그선생이 한쪽에 메고잇던총을 목에다 걸어 가로메더니 (인민군에서 지어총!자세를보고 하는말)
가서 제재소에서 켜둔 각자나무를 가져왓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나에게 하나씩 쥐라고하더니 <이제부터 한마디 물어봐서 말안하면 한사람이 3대씩 힘껏 때리라> 고 하엿습니다
저도 3번이나 9대를 아버지를 때렷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는 그런걸 모른다.나는 당에 떳떳하다> 하면서 겨우겨우 말햇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들은 < 이새끼 이래서는 안되겟다> 하면서 어머니와 누나를 발가벗기더니 마당에 광산에서 쓰는 광차가 4개 잇엇는데 거기에 물을 꼴뚝 ( 가득)채워둔것이 얼어서 곡괭이로 깨더니 (까더니)그안에 들어가라고 하엿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는 울면서 발악하니까 선생들이 얼음속에다 엄마와누나를 넣고 나오지못하게 꼭대기에서 발로 누르고 잇엇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앞에 다시세우고 아버지의 죄를불게하면 <너희는 집에 갈수잇다> 하면서 시켯습니다, 제대로 말을하지않는다고 꽁꽁언 어머니와 누나의 온몸을 군관혁띠로 때렷습니다
또다른 선생한명은 우리어머니의 두다리사이를 벌리게하고 <이년 까치둥지 멋잇다>하면서 엄마의 아래도리 털을 당기면서뽑앗습니다, 다른선생은 누나에게 < 야,너 대학다닐때 아새끼들과 (청년들)몇판햇나?>하고물으니까 누나가 울면서 <한번도 그런일이 없습니다>하니까 거짓말한다면서 <벌려라 보자,검열하겟다>하면서 맨땅바닥에 눕게하더니 다리를 하늘공중에 벌리라고하더니
신발신은채로 누나의 아래도리를 후벼대며 그리고는 각자몽둥이로 비비면서 <쌍년 .많이 놀아�구만 .그래도 거짓말이야>하더니<거짓말한대가다,너 처벌이다> 하더니 가스라이타를 크게 올리더니 <움직이면 밟아죽인다>하면서 소리치며 누나의밑에 불을 달아놓앗습니다
누나가 악!소리치며 비트니까 선생들은 와하고 재밋다고 하면서 고아댓습니다
그날 우리가족은 모두 죽는줄 알앗습니다, 어머니가 기절한후 정신을 차리지못하자 그때에야
조사가 끝낫습니다,
그후 10일이지나서 또 가족이모여 조사를 받앗는데 저녁때까지 하다가 생활총화한다면서 (북한에서는 한주일에한번씩 당생활총화,청년동맹생활총화.지맹원총화등 을한다) 다른선생들은 다 가고 두명이 남아서 아버지는 기둥에 묶어놓고 어머니는 나무무지에다가 바줄로 두손을 묶어놓은다음 나는 어머니와함께 묶어놓더니 누나를 보면서 <이년은 이안에 온지 1년 돼 오는데두 아직
고기 좀 붙어잇구나 ,뭘 도적질해 먹구 고기 안빠�나?>하더니 누나에게 <네년 이상하다.왜 고기가 안빠지는지 검열해봐야겟다>하면서 억지로 옷을 벗겻습니다
아버지가 묶이운곳에 가마니와갈대로 만든 나래가 잇엇는데 (갈대를 엮어서 두루마리처럼 한것임)선생들이 그걸끌어다가 누나에게 그우에 누으라고 하더니 한 선생이 <이간나 .때 호미루 긁을 지경이다.더러워서 못보겟다>하더니 지하족을 벗고 발사개하나를주면서 광차속에 잇는물에 적셔서 밑을 깨끗이 닦으라고 햇습니다 (자기는 새 발사개를 품에서 꺼내 갈아신엇다고함)
누나가 발사개를 적셔서 닦고 또 닦자 시뻘겋게 되엿습니다
누나가 접어드는 두선생에게 반항하자 누나를 몇대 때리더니 다른 한 선생은 말아피우던 독초꽁초를 (북한군은 권연이 없어 잎담배를 신문지로 말아피움 )누나의 젖꼭지에 비벼대며 죽여버린다고 하면서 누나를 땅바닥에 쓸어뜨리고 누나의 얼굴우에 엉뎅이를 대고 눌러앉아 두손을 발로 눌럿습니다,그래도 누나가 발버둥치자 손과발을 따로따로 묶엇습니다
발하나는 아버지가 묶인 기둥에 묶고 다른발하나는 어머니의 몸과 나무무지에 묶고 두손은 기둥과 광차손잡이에 묶어 놓더니 <네간나 ,오늘 걸레 만들겟다>하면서 강간햇습니다
그리고는 엄마와나에게 다른선생들에게 말하면 너희는 그시간부터 이세상에 없을줄 알라고 윽박질럿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이래도 불지않느냐하면서 이런 독종새끼니까 안기부 밀정한다면서 아버지를풀어 얼음물에 잠그려고 하엿습니다
그때순간에 아버지는 최대의; 힘을 다하여 한 선생의 옆구리에 매달려잇는 총창을 비틀어잡고 자기배에 힘껏 찔러 자살햇습니다,군대들 자동보총에 칼꽃는것을 혁띠에 매달아서 옆구리에 달고다닙니다 .칼집채로 박히다보니 아버지주변에 피가 숱해 흘럿습니다(북한군 AK자동소총에는 육박전을 위한 총창이 있는데 혁띠에 차게끔 되여잇다)
선생들이 급해서 연락해서 의사들이 와서 담가에 싣고 가는데 그때까지는 아버지가 숨이붙어잇다가 가는도중에 사망햇습니다 그때 엄마가 또 기절하면서 신경이돌아 다음날 정신병자병동에 들어가 있다가 어느날 변소칸에서 인분을 세사발되게 먹고 죽었습니다
(그사건으로하여 처녀를강간햇던 군인 두명은 강직처벌되여 다른부대로 갓다고함
그문제로 하여 우에서 검열까지 내려왓으며 관리소내 군인들 사상투쟁회의도 잇엇다고함 )
누나도 잡병이 많이와서 계속 앓앗는데 아버지,엄마가죽은후 머리가돌아 정신이 들락날락햇습니다,나는 하나남은 누나를 살려보려고 내게 나오는 음식을 몰래몰래숨겨 제재소에 심부름갈때마다 누나의 호실에 던져넣엇습니다 매일저녁 사상개조회의를 햇는데 남자들따로,녀자들따로 앉히고 공부시키다보니 누나와 나는 마주보며 소리도 내지못하고 울기만햇습니다
누나는 점점 약해져서 정말 귀신처럼 되엿습니다
머리도 �어먹개처럼 (마구헝클어짐)깍아놔서 어떨때는 누나를찾기도 힘들엇습니다
평양에 잇을때 우리누나는 너무 고와서 (예뻐서) 화보에도 (잡지)나고 청년문학에도 나고 하엿습니다, 아빠트사람들이 정말 영화배우감이라고 (북한에서는 예쁜여성들 을 영화배우감으로 비유하여 표현한다) 하면서 성격도 조용하고 말이적고 례절이(예의)밝아서 대학에서랑 누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칭찬햇습니다 , 그러나 감옥에 온후 별의별고생을 다당하고 별의별일을 다 당하면서 누나는 병신이되고 페짝이 (페인,식물인간이름)되엿습니다
그러면서 8월달이 되엿는데 그때부터는 관리소에서는 먹을것이 없어 감자밭에서 감자를캐서 죄수들에게 주엇습니다 ,감자캐는건 녀자들이 호미로 감자를 캐놓으면 남자들이 삼태기에 담아 선생이 지키는곳에 가져다 모아놓으면 소달구지가 와서 실어갓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여 선생들이 모여앉아 감자구워먹는다고 경비서던선생가지 불더미에 간사이 남자죄수 3명이 누나에게 달려들어 강간하는데 누나가 저혼자 죽엇습니다
계속 앓는데다가 며칠동안 먹지못하고 있다보니 감자캐러 나와서 경비선생의 눈을피해 생감자를 정신없이 먹엇는데 그게탈이 난데다가 남자들이 달려드니 너무 혼이나가 정신발작까지 일으킨것입니다,선생들이달려와서는 뻔히 기색을 알면서도 <도적질해 먹으니까 죄만나 죽지>하면서 감자캔줄기로 덮으라고 햇습니다 그리고 남자죄수 3명은 호송선생들이 데려갓습니다
그때나는 감자캐는데 없고 산나물 다듬는조에서 일하다보니 누나가죽은줄 몰랏습니다
계속 안보이기에 선생들에게 누나를 찾아달라고 하면 머리를 때리면서 모른다고만 햇습니다
나와친한 영수가 알려주어서야 나는 누나가죽은줄 알앗습니다
그런줄도 모르고 잇엇는데 사람이 없어지면 관리소가 야단칠텐데 조용하기만햇습니다
며칠동안 비가게속오니 밖에 내보내지않고 감방안에 가둬두기만 하다보니 소식을 알수가없엇습니다, 그게 8월 10일전인데 20일이 다 되여서야 다시감자캐기가 시작되면서 나도 감자캐는데
나갓습니다,밭에먼저 들어간사람들이 밭정리하면서 누나의 시체를 찾앗습니다
관리소에서는 10일그때 죽은걸 처리해야겟으나 그사이 비가 계속오니까 다시 감자캐기할때가서 날라다 처리하려 한것이엿는데 우리담당선생이 그걸모르고 나를 그만 감자캐기에 내보낸것입니다, 나는 울면서 선생들에게 우리누나 묻어달라고 햇지만 선생들은 가마니에 둘둘 말아 죄수들보고 들라하더니 나를 따라오지못하게하고 그날 화장터에 갓다가 화장해 버렷습니다
관리소안에 화장터가 잇는데 한달에 10명이넘게 화장햇습니다
누나의시체를보니 한손에는 감자줄기가 썩어잇엇고 다른손에는 흙이 잇엇습니다
입안에는 감자썩은것이 흙과 함께 잇엇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입안의 흙과 썩은감자를 파내면서 누나를안고우는데 선생들이 달려와 나를 때리면서 반장에게 소리쳐 나를 데려가라하더니 가마니에 말아서 누나를 가져갓습니다
나는 며칠을 몰래울며 보냇습니다
우는것이 선생들에게 들키면 반혁명분자를 동정한다하면서 사상투쟁무대에 세우기때문에 우는것이 들키지 말아야햇습니다
나와제일친한애가 영수인데 내보다 두살 더 먹엇는데 <남자새끼.그만한건 참고 견뎌내라.그리구 잊어버려라.어떻게하나 살아야한다,통일되면 무슨일이오겟지> 하면서 나를 생각햇습니다
영수네는 할아버지가 전쟁때 악질치안대로 사람들을 많이죽엿는데 월남한것이들켜 가족이모두 중국에가서 숨어잇엇는데 3년만에 잡혀서 여기온지 4년되엿고 아버지는 그때 인차 죽고 어머니는 2년전에 죽엇다고함니다. 형과누나는 소식을 모른다고 햇습니다, 누나가 중국에 잇다고 하면서 자기네가 중국에 잇을때 못먹어 본것이 없다하면서 중국자랑을 많이햇습니다
9월부터 버섯�는조를 만들엇는데 나도 거기에 뽑히게 되엿습니다
아직 버섯이 나지않아 먼저 산나물을 �기 시작햇는데 한사람이 하루에 두배낭을 꽈 채워야햇습니다, 영수도 함께 다니게 되엿는데 그애는 자꾸만 도망가자고햇습니다
무섭기도하고 길도모르고 선생들이 총을들고 지키는데 어떻게 도망치겟는가고 하자 고사리 �는체하면서 저산만 넘으면 된다고 햇습니다, 자기가 3년넘게 여기를 다녀서 잘아는데 어디에
철조망잇고 어디에 구뎅이가잇고 어디에 지뢰묻은것까지 다 안다고햇습니다
산나물 �으러 8일다�는데 풀이라도 실큰먹으니 힘이좀 낫습니다
우리가 도망치기전날인데 그날 영수는 큰 뱀을 잡앗습니다
대가리만 �어버리고 절반을 돌로 끊어버리더니 손가락을 배에넣고 밸을 쏟아버리고 껍질채로 우리는 풀�는흉내내면서 씹어 먹엇는데 가죽이 너무질겨 잘 넘어가지 않앗습니다
나는 할수없이 가죽을 버리고 몸뚱이만 꿀꺽꿀꺽 넘기엿습니다
영수는 래일은 꼭 뛰자고 햇습니다, 다음날 보슬비가 많이내렷습니다
선생들은 비옷을쓰고 사회사람들이 물건들을 들고와 산나물과 바꾸는데 술과 바꾸어서 저희들끼리 몰켜서서 마시엿습니다 , 감시조장들이 사방에서 보고잇지만 우리는대담하게 봐둔곳으로 기여나갓습니다, 때마침 저쪽에서 지키던 감시조장 한명이 나무꼭대기 올라가 지키다가 비에 나무가젖어 미끄러지면서 떨어�는데 그바람에 선생들이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못하고 거기로 몰켜갓습니다. 그사이 영수와나는 철조망을 나무가지로 벋치고 그밑으로 넘어가 반대켠 산꼭대기로 정신없이 뛰엿습니다, 영수가 미리한말이 몇사람이 이렇게 도망치면서 아래로 뛰는바람에 잡혀 총에 맞앗다고 하면서 산꼭대기에는 관리소 보초들이 보이기때문에 거기로 도망갈 생각을 못한다고하면서 우리는쪼꼬만하기때문에 잘보이지도 않고 보슬비가 내리면서 안개가껴 쌍안경으로도 잘안보일거라하면서 등잔밑이어둡다면서 거기로 가자고 햇습니다
산꼭대기 거의올라 갓는데 총소리가 여러번 낫습니다
우리가없어진걸 알고 찾기시작한거 같습니다
영수와나는 죽을힘을 다하여 뛰고또 뛰여 산2개를 넘엇습니다
골짜기에 물이흘럿는데 영수는 개들이 혹시 냄새 맡을수 잇으니 물속에 숨자면서 물에서 우리 둘은 저녁 어두어 질때까지 잇엇습니다, 그런데 군대들이나 개들이 오지않앗습니다
영수는 저산만 넘어가면 화성 역전이보인다고 햇습니다
나는 그때에야 여기가 함경북도 화성군인걸 알앗습니다
관리소에서 칠보산이 가깝다는 소리는들엇지만 살고잇는데가 어데인지 모르고 잇엇습니다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면서 산나물 �는사람들이나 소토지(산에 일군 땅에서 부업일하는사람들 )
일하는사람들 을 보면 멀리피해서 마을 까지 와서 밤이된다음 영수와나는 유치원을 습격햇습니다, 거기서 속도전가루 한중태기와 강냉이쌀 3키로되게 훔쳐가지고 나와서 한집을 또 털어 옷을 갈아입엇습니다 그집에는 먹을것이 없고 배를삶아서 식장안에 둔것이 잇엇는데 우린 영수와 둘이서 다 먹어버렷습니다, 영수는 기차타면 안된다고하면서 길로가지말고 철길을 따라가자고 햇습니다. 세상에나서 함경북도에는 처음왓는데 청진까지 오는데 정말무섭구 힘들엇습니다
걸어서 생기령이라는곳에까지 왓다가 화물방통타고 청진수성에 갓는데 거기서 철이형을 만나게 되엿습니다(중국에 같이온 청진내기아이18살)
철이형은 자기혼자서 중국에 7번이나갓다왓고 중국에 친척이랑 아는사람이랑 많다고하면서 자기가 데려다주겟다고햇습니다. 장마당에서 영수와 싸�는데 영수가 이겻고 또 영수가 먼저 철이형에게 친구하자고 하는바람에 우리는 3명이 친구가 되엿습니다
철이형이 남양교두에서 기다리다가 중국들어가는 석탄방통에붙자고 햇습니다
나와영수는 수영을 할줄 모르기때문에 두만강물이 깊은데 빠지면 죽는다고하면서 정광이(광석 1차가공 분말가루 ,무산광산에서 캔쇠돌 가루내여 청진제철소에서 철생산하는원료임)중국에
많이 들어가는데 이제 정광방통이 남양역에 들어오면 거기에 동굴을 파고 숨으면 된다고햇습니다,먼저온성에 갓다오자고햇습니다, 돈을 만들자면 장마당큰데가서 한탕해야 되는데 철이와 영수는 그런 도적질에 펄펄 날앗습니다
온성 주원 장마당옆 다리밑에서 자면서 3일동안 장마당에서 쓰리(소매치기)한돈이 3만원이나
되엿습니다 이제 정광방통 들어오면 검사원에게 돈을주고 우리가 파고들어간 데는 쇠꼬쟁이로 찌르지않게끔 약속한답니다. 먼저 남양군당학교 뒤산에올라 중국쪽을 보앗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면 결핵병원인지 간염병원인지 잇엇는데 거기로 사람들이 많이다녀서 우리는위험해도 벼랑끝에다가 나무로 벋치고 그날밤 거기서 잣는데 영수가 태질하면서 그기둥을 차는바람에 아래로 떨어�습니다. 그아래에는 철길이지나가고 군대들의 잠복초소도 잇엇는데 악! 소리치며 영수가떨어지자 사방에서 전지불 (후래시)들이 달려오더니 왁작왁작 햇습니다
철이형은 내입을 틀어막으며 빨리 빠져나가야한다면서 나를끌고 반대켠산으로 도망�습니다
나는울면서 영수를 찾지못한채 도망쳐야 햇습니다
깊은산속에서 나는 영수를 부르고 또부르며 울엇습니다
억울하게 아버지,어머니.누나를 관리소에서 빼앗기고 죽으려고 할때도 영수가 없엇으면 나도 죽엇을것인데 지금까지 영수때문에 살아남앗는데 이제는 내 친형이고 형제인 영수마저 죽엇으니 어떻게 합니까
불쌍한 영수는 이렇게 두만강을 앞에놓고 죽엇습니다
그다음날부터 영수가죽은 주변의 불룩한 웅뎅이와 묘지는 다뚜져보앗지만 끝내 영수의 시체를차지못햇습니다
그렇게 4일이지나서 철이형과나는 중국들어오는정광방통에 숨어서 10월5일날 중국안도라는곳에 도착햇습니다, 안도에 잇는철이형 친척은 돈 350원주더니 집에들여놓지않앗습니다
거기서 뻐스를 태워�는데 목단강나가는차라고햇습니다
철이형과나는 목단강에 7일날도착햇다가 다시버스를타고 철이형이 아는사람의 도움으로 천진에 오게되엿습니다.북경에서는위험하기때문에 천진에서 기차를타던지버스를타라고 그래서 먼데 안쪽으로들어가라면서 철이형이아는사람이 알려주엇습니다
조선사람식당에서 밥먹고 나오는데 이렇게 한국에서온 기자삼춘을 만나게되엿습니다
지금도 눈앞에서 아버지,어머니,누나,영수의모습이 사라지지않습니다
저는지금 이팝에 고기를 배불리 먹고잇습니다,먹으면서 항상 생가합니다
나는크면 꼭 복수하고야말겟습니다
아직은내가 어려서 잘모르지만 중국에와서 남조선영화도 많이보앗고 남조선사람도 보앗습니다
기자삼춘이랑 여기고마운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알게 되엿습니다
저는크면 꼭 죽은 아버지,어머니,누나,영수의 복수를 할것입니다
기자삼춘이 편지를쓰라고해서 지금 쓰는 이편지가 남조선사람들에게 전달된다고 하니 아버지.엄마.누나생각이 더 나면서 울음박에 나오지않습니다
저를도와 주십시오
은헤를잊지않고 꼭 갚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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