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역사의 시대 구분                                   


한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는 언제나 그 시대 구분이 제일 중요하다.
심지어 어느 한 사가(史家)는 '역사학이란 시대 구분 작업이다.'라고까지 평한 적이 있다.  
어쨌든 이제 결국 성경 역사의 주역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중심으로 성경 역사의 구분을 시도해 보면
대략 다음 도표와 같이 12시대로 구분된다. 물론 그 기준에 따라 다양한 구분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는 정치.경제.문화.등의 일반적 분류 기준보다는 이스라엘 역사가 곧 하나님이 택하신 구약 선민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즉 구속사적 관점에서 큰 획을 그은 주요 사건 별로 구분한 것이다.
이는 가장 일반적인 성경 시대 분류이다.


 

  

 

시대

주요사건

관련성경

창조시대
?~B.C.2166

우주의 창조,사람의 타락.노아대홍수와 바벨탑 사건

창1-11장

족장시대
B.C.2166~1805

힙리 민족의 조상들인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의 생애.욥의 고난

창12-50장
욥기

출애굽 시대
B.C.1805~1406

애굽으로부터의 영광의 탈출.성막의 건축.시내산에서의 율법 언약 체결.가데스바네아 반역 사건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정복시대
B.C.1405~1390

가나안 정복 정착 전쟁.가나안 땅의 각 지파별 분배

여호수아서

사사시대
B.C.1390~1050

이ㅡ라엘의 범죄로 인한 이방민족의 침입과 사사들을 통한 구원.룻과 보아스의 결혼.사무엘의 탄생

사사기,룻기,사무엘상1-7장

통일왕국시대
B.C.1050~930

다윗의 이스라엘 왕위 등극, 예루살렘 성 정복.다윗 언약 체결.솔로몬 성전 건축

 삼상8-31장, 삼하, 삼상1-11장, 대상,
 대하1-9장,시편-아가서

분단왕국시대
B.C.930~586

여로보암의 반역으로 인한 남북 왕국 분열.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 멸망과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 와국 멸망

 왕상12-22장,왕하,대하10-36장,사,램,애 및  대부분의 소선지서

포로시대
B.C.586-539

다니엘과 세 친구의 환난과 구원
바사에 의한 바벨론 멸망

에스겔서,다니엘서

포로귀환시대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 귀환, 스룹바벨 성전 건축 및 예루살렘 성벽 재건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학개,스가랴,말라기

중간기대
B.C400-4

헬라 정복자들의 성전 모독.마카비 혁명.로마 폼페이 장군의 예루살렘 정복.헤롯 성전 건축

마 1:18-25,마 2:1-18

예수시대
B.C4-A.C.30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세례와 시험 승리.십자가 대속죽음과 부활, 승천

사복음서

초대교회시대
A.D.30-100

오순절 성령 강림.스데반의 순교.바울의 개종과 3차 전도 여행

사도행전,서신서,요한계시록

 

성경의 역사(1)

조승규 / 킹제임스성경신학대학 교수     

1) 바른 성경의 역사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시작되고 바울의 사역과 선교여행의 기반이 된 시리아의 안티옥(행 11:26)을 기점으로 해서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고, 또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독일과 영국 등지로 전해졌습니다. 이렇게 전달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손을 거쳐오면서 변개되지 않고 잘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은 전통원문, 비잔틴 원문, 혹은 다수 원문 등으로 불렸고, 에라스무스(1516,1535), 스테파누스(1550,1551), 베자(1598), 엘지버 형제(1635) 등에 의해서 헬라어 <표준원문, Textus Receptus>으로 편집, 출간되었습니다. 보존된 원문에서 1384년 <위클리프 성경>, 1525년 <틴데일 성경>, 1539년 <그레이트 성경>, 1560년 <제네바 성경>, 1602년 <비숍 성경>, 1611년 <킹제임스성경> 등의 영어 성경이 번역되었고, 또 이 원문에서 프랑스어 <올리베탄 성경>, 독일어 <루터 성경>, 이태리어 <디오다티 성경>, 스페인어 <레이나 발레라 성경> 등 세계 주요 언어들로 바른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이렇게 섭리로 보존된 성경들과 일치하는 우리말 성경은 1994년 출간된<한글킹제임스성경>이며, 이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된 가장 “정확”하고 가장 “권위”있는 성경입니다. 
 
 

성경의 역사(2)

조승규 / 킹제임스성경신학대학 교수     

2) 변개된 성경의 뿌리와 썩은 열매들


변개된 성경들은 보존된 바른 성경들과 다르게 시리아 안티옥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상징하는 부정적인 곳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기원했습니다. 이곳 출신의 “오리겐”(Origen, A.D. 184-254)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게 믿지 않은 에비온파의 일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권위에 대한 많은 성경 말씀들을 변개시켰습니다(눅 2:33, 요 1:18, 행 8:37; 20:28, 롬 14:10, 골 2:9,10, 딤전 3:16 등). 이렇게 오리겐이 변개시킨 성경에서 “유세비우스”(Eusebius, A.D. 260-340)가 50권의 성경을 복사함으로써 변개된 성경이 확산되었는데, 그것이 가장 변개된 두 사본인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입니다. “제롬”이 이 사본에서 라틴어 성경을 번역함으로써 변개된 성경이 로마카톨릭에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1881년에 영국의 두 학자, “웨스트코트”와 “홀트”가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근거로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하여 출간했는데, 보존된 헬라어 성경인 <표준원문>과 비교하여 5,700여 곳이 변개된 것이었습니다. 이 성경에서 1884년 영어 <개역본, Revised Version>이 번역되었으며, 이로 인해 1611년 이래 270년 동안 <킹제임스성경>을 사용해 온 교계는 하나의 커다란 혼란을 맞게 되었습니다. 소위 <킹제임스성경>의 오류들을 개정하여 원본에 가깝다고 한다면 그 성경은 <킹제임스성경>을 제압하고 꾸준히 사용되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지금 누가 어디에서 사용하고 있습니까? 현재 영어 <개역본, RV>은 출판이 중단된 지 오래되었으며 아무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그 성경의 지속성에 있습니다.


한편 독일 학자 “네슬”(Eberhard Nestle)이 1898년에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변개된 헬라어 성경을 근거로 일명 네슬판 헬라어 성경을 출간했는데, 이것이 현재 가장 변개된 헬라어 원문 성경입니다. 이 원문은 <개역한글판성경, 1961>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과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비교해 보면 <개역성경>은 신약에서만 2,200단어 이상이 삭제되었습니다. 과연 “삭제된 성경”(개역성경)과 “삭제되지 않은 성경”(한글킹제임스성경) 중 어느 것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겠습니까?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된 <개역성경>,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개역개정판>은 동일한 원문에서 번역되었는데, 왜 동일한 원문에서 네 가지 성경을 출간했겠습니까? 생명의말씀사에서 출간한 <현대인의성경>도 <개역성경>과 마찬가지로 변개된 같은 원문에서 번역되었으며, 아가페출판사의 <쉬운성경>도 변개된 같은 원문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이러한 한글 성경들이 하나같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래한 필사본들의 헬라어 원문을 선호하게 된 것은 바른 성경의 역사와 원문비평학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한국 교계는 처음 한글 성경이 번역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한 가지 변개된 원문에서 여러 번역본들이 출간되는 잘못된 역사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3)

조승규 / 킹제임스성경신학대학 교수     

3)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성경만을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주님의 말씀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하셨습니다(마 24:35). 변개된 부분으로 말미암아 오류를 지니게 된 성경이 어떻게 신학과 교리와 신앙의 최종권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변개되면 교회는 인본주의적인 종교 집단이 되며, 바른 믿음과 신앙은 자라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그분의 뜻대로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변개된 성경을 분별하고 바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은 히브리어 <맛소라 원문, Massoretic Text>, 헬라어 <표준원문, Textus Receptus>, 독일어 <루터 성경>, 프랑스어 <올리베탄 성경>, 스페인어 <레이나 발레라 성경>, 이태리어 <디오다티 성경>, 영어 <킹제임스성경>과 같은 맥을 유지하는 섭리로 보존된 성경입니다. 그 중에서도 영어 <킹제임스성경>은 1611년에 출간된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성경으로 입증되어 온 최고의 성경이며, 여기서 약 800개의 다른 언어들로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한글킹제임스성경>도 영어 <킹제임스성경>으로부터 번역하였고, 구약 어휘들은 히브리어 <맛소라 원문>으로, 신약 어휘들은 헬라어 <표준원문>으로 대조하여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은 1994년 4월 12일에 출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이 땅에서 분별력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말로 번역된 가장 “정확”하고 가장 “권위”있는 성경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의 대안은 바로 <한글킹제임스성경>입니다.
 
 

간략한 영어 성경의 역사

(위클리프 성경에서 킹 제임스 역본까지)

산드라 필립스 데보스 著

노 효성 譯

 

 

Ⅰ. 서론적 고찰
Ⅱ. 간략한 영어 성경의 역사
    A. 8세기와 10세기 영어 성경 번역의 수고들
    B. 영어 성경번역에 공헌한 존 위클리프
    C. 영어 성경 번역에 공헌한 윌리암 틴데일
    D. 마일즈 커버데일 성경
    E. 존 로저스의 매튜 성경
    F. 그레이트 성경
    G. 리차드 타버너의 공헌
    H. 제네바 성경
    I. 감독 성경
    J. 레임즈와 도와이 성경
    K. 1611판 킹 제임스 역본
Ⅲ. 결론

 

 


머리말


이 "간략한 영어 성경의 역사"의 저자는 전에 뉴저지주(州) 케이프 메이에 소재한 셸튼 대학에서 언어와 그리스어를 배운 나의 학생이다. 산드라 필립스 양은 후에 윌리암 데보스(그 역시 셸튼 대학에서 그리스어와 언어를 배운 학생이었다)를 만나 결혼했다. 지금 그녀는 자신이 배운 많은 것들을 어린 자녀에게 가르치고 있다. 적당한 때에 그리스어를 가르치겠지만 지금은 특히 "언어"를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샌디-데보스 부인-는 훌륭한 학생이었다. 그녀가 이수 과정에서 1968년 1월 13일에 작성한 이 논문을 "THE BIBLE FOR TODAY"가 출판해도 되는지를 물었을 때, 흔쾌히 허락했다. 그녀의 남편 빌도 동의했다.


그래서,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고 우리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도록 성실하게 약간의 편집을 해서 이렇게 "간략한 영어 성경의 역사"로 내놓았다. 이는 우리의 모국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잘 깨달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진가를 더욱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고, 기억하고 공부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함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총체적으로 축어적으로 영감을 받았으며 오류가 없고, 무오한 말씀이다!

 

Ⅰ. 서론적 고찰


A. 개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무오류하고 무오한 말씀인 성경은 모든 시대를 거쳐 내려오며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오류로부터 보존되어 왔다. 구약은 원래 그것을 처음으로 받은 백성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신약은 처음에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전파됨에 따라, 각 언어로 된 많은 성경 역본들의 필요성이 증가했다. 성경의 전(全) 역사는 매우 철저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영어 성경이, 특별히 존 위클리프 성경에서 1611년 판 킹제임스 역본까지가 어떻게 번역되었는가에 대해 간략하게 대답하고자 한다.

 

B. "역본(Version)"으로서 영어 성경


영어 성경에 대한 연구에서 맨 처음 고려할 사항은 영어 성경이 다른 언어나 언어들로부터 번역된 "역본(version)" 또는 "번역본(translation)"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약은 최초에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프레드릭 W. W. 데스 바레스, "영어 성경의 역사" (1950), p. 2]

 

C. 영어 성경 보급을 도운 인쇄술


영어 성경 보급에 큰 영향을 끼친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진보 중 하나는 1454년에 요한 쿠텐베르그가 발명한 인쇄기이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1476) 인쇄술이 처음으로 영국에 도입되었다.


"이는 윌리암 카스튼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흥미를 끄는 주목할만한 사항은 그가 처음 인쇄한 인쇄물의 글자가 엉망이었다는 점이다."[Ibid. , p. 3]


인쇄기는 원본의 정확한 보급을 크게 도왔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기계였다. 그 이전까지는 필사자들이 원본을 정확하게 재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 결과 조그마한 실수도 없게 필사하는 것이 어려웠다. 때때로, 서기관이 어떤 부분을 변개하고자 하면 임의로 변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의식적으로 사소한 변개가 매우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 변개는 오늘날 원본에 가장 가까운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 본문을 찾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 중에 하나를 보여주는 본문이 어느 본문인지를 알 수 있게 하였다. ["THE BIBLE FOR TODAY(BFT)"는 1611년 판 킹 제임스 역본이 근간을 두고 있는 히브리 맛소라 본문과 그리스 수용 본문이 대체로 원본에 가장 가까운 본문이라고 확고하게 확신하는 바이다. 또한 BFT는 웨스트코트, 호르트, 네슬레, 사우터, 알란드, 연합성서공회(the United Bible Societies), 그 외 여러 무리들이 "보다 정확한 본문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시도했던 맛소라 히브리 본문 또는 그리스 공인 본문을 바꾸려 하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한다. 그러한 시도들은 오히려 순수한 본문을 낳기보다는 더 "부패"케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BFT에서 발행한 보고서인 DAW 저(著) "킹 제임스 역본에 기초가 된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 공인본문의 사례--증거와 논거의 요약"에 논의되었다.

 

Ⅱ. 간략한 영어 성경의 역사

 

A. 8세기와 10세기 영어 성경번역의 수고들


초기 영어 성경의 시작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캐드몬, 알드햄, 베데, 알프레드 대왕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살았던 8세기와 10세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헤르바르트 골든 메이 "영어 성경의 형성"(1952), p. 14]


  1. 캐드몬, 알드헬름, 베데, 알프레드 대왕 및 그외

캐드몬과 그 밖에 8세기와 10세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공헌을 자세히 다루지 않겠지만, 이들 각자는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에서 영어 성경 번역을 위해 공헌했다.


  2. 영어 성경의 필요

영국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들 중의 한사람은 후에 캔터베리의 대감독이 된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약 597년경에 영국에서 살았다. 많은 이들의 선교 노력으로 백성들이 기독교인들이 되었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 영어 성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초기 기독교 전파자들 중 많은 이들이, 특히 베데와 알프레드 대왕은 성경의 장(章)들을 번역하는데 공헌했다.

 

B. 영어 성경 번역에 공헌한 존 위클리프

 

  1. 위클리프의 견해

    a. 로마 권력에 반대함 : 영어 성경의 보급에서 고려할 다음 인물은 "로마가 권력을 탈취하거나 빼앗으려 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던 개혁자"인 존 위클리프이다.[Ibid., p. 16]

    b. 모든 사람이 탐구하는 성경 : 위클리프는 서민이나 성직자 누구든지 스스로 성경을 탐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를 알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믿었다. 그는 성경을 "백성의 소유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모국어로 된 성경을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랬다.[Ibid., p. 17]

    c. 위클리프의 설교단 - 롤라드(Lollards) : 위클리프는 지방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이른 바 롤라드(Lollards)라고 불리는 순회 설교단을 설립했다.

 

  2.. 위클리프의 번역

    a. 기타 조력자들 : 이 번역본의 얼마만큼이 위클리프의 번역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으나, 어쨋든 이 번역의 착상은 그의 공로이며, "그 시대 사람들은 그 번역본을 위클리프의 성경으로 간주했다."[Ibid., p. 17]

    b. 번역기간 : 먼저 신약성경이 약 1382년경에 완성되었고, 성경 전서는 1384년에 번역되었다. 이 때를 영어 성경이 최초로 완전히 번역된 때로 본다.

    c. 부패한 라틴 벌게이트 본문에 기초한 번역 : 위클리프 성경은 외경을 포함하였는데, 이는 이 성경이 히브리 본문과 그리스 본문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라 부패한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본문에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존재했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공인 본문"을 사용하지 않았다.

    d. 번역자들 : 헬포드 니콜라스로 알려진 사람이 창세기부터 바룩(Baruch) 3장 20절까지 구약을 번역했고, 위클리프는 신약과 바룩(Baruch) 3장 20절 이후의 구약을 번역했다.

 

  3. 위클리프 성경의 퍼베이 개정판

    a. 위클리프 사망 후 만들어짐. : 1384년에 위클리프가 죽은 후에 개정판이 만들어 졌다. 개정판의 일부가 더 일찍 나타나긴 했지만 현존하는 전체 개정판 필사본 중 가장 최초의 것은 1408년판이다. 이 개정 작업은 루터워스에서 위클리프의 비서였던 존 퍼베이라는 사람의 책임 하에 이루어졌다.

    b. 대부분 현존하는 사본들은 위클리프 개정판이다 : 오늘날 위클리프 성경은 약 170여 개의 사본이 존재하는데, 대부분은 퍼베이 개정판이다. 아직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필사본 형태로 존재한다.

    c. 틴데일 성경 전에 가장 인기있던 성경 :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 틴데일 번역이 나올 때까지 위클리프 성경은 가장 대중적인 성경으로 존속했다.

 

  4. 그의 사망 후, 위클리프 성경과 작품들은 정죄받고 불태워짐

1415년에 슬픈 사건이 일어났다. 존 후세에게 화형을 선고한 후, 콘스탄트 공회는 위클리프의 작품들을 불태우고 그의 뼈들을 "성별된 땅에서 파내고 태워 재로 만들어 스위프 강에 뿌리라"고 선고했다.

 

C. 영어 성경 번역에 공헌한 윌리암 틴데일


  1. 틴데일의 초기의 삶과 망명

틴데일은 1524년 자신의 고향 런던을 떠나 망명객으로 떠돌아다니다가 자유로운 도시 함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는 휘튼버그에서 독일의 "위대한 개혁자, 루터와 친한 사이로" 지냈다. [Ira Maurice Price, 영어 성경의 족보, (1906) , p. 245]


  2. 틴데일의 신약성경

    a. 웅텔이 인쇄함 : 1525년 4월, 틴데일은 완성된 신약성경 번역본을 인쇄하기 위해서 쾰른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후에 자신을 위해 일해 준 숙련된 인쇄공 웅텔을 만났다.

    b. 코클레우스가 틴데일 성경 보급을 차단시킴 : 틴데일의 작업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종교 개혁 운동의 적, 코클레우스가 틴데일이 영국에 보급하기 위해서 비밀리 인쇄한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코클레우스는 이를 쾰른 당국에 고발하여 틴데일의 작업을 중단시켰다.


  3. 두 번째 신약성경 인쇄 및 보급 시도

    a. 옴즈(Worms)로 도피한 틴데일 : 틴데일은 동료 로에(Roye)와 함께 배를 타고 루터교의 본거지인 옴즈(Worms)로 도피했다.

    b. 셰퍼가 틴데일의 신약성경을 인쇄함 : 옴즈에서 틴데일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의 번역을 인쇄업자인 셰퍼에게 넘겨 주었다. 번역본이 완성되었을 때, 신약성경들은 상자에 숨겨 배에 실려 영국으로 보냈다. 틴데일의 영어 신약성경이 영국에 도착하자, "그것을 읽고자 하는 일반 백성들과 불태우고자 하는 교회 당국으로부터 엄청난 수요가 있었다.[Ibid., p. 246]

    c. 틴데일의 신약성경을 파괴하려는 시도들 : 대주교 와함은 틴데일의 신약성경을 파괴하라는 칙령을 선포했다. 영국의 모든 당국자들이 틴데일의 성경을 짓밝으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4. 틴데일의 신약성경 번역 방법

틴데일의 영어 신약성경은 영어 성경 발전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

    a. 그리스어 다수 본문에서 번역함 : 위클리프 성경과 달리, 틴데일의 신약성경은 다른 번역본(즉, 모든 부분에서 부패한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에서 번역하지 않고, 1516년에 에라스무스가 출판하여 1522년에 개정한 신약성경 그리스 다수 본문에서 번역했다. (이 다수 본문은 후에 공인된 본문으로, 또는 실제로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으로 불렸으며, 이 본문으로부터 1611년 판 킹 제임스 역본이 번역되었다.) 프라이스(Price)가 말했듯이, "틴데일은 벌게이트, 에라스므스가 자신의 그리스 본문을 라틴어로 번역한 라틴어 번역본, 루터의 독일어 번역본을 이용했다."[Ibid., p. 248]

    b. 라틴 벌게이트와 다른 점 : 틴데일은 자신의 번역에서, 벌게이트와 교회에서 "소중히 하는" 성구들은 따르지 않고, 그리스어를 자신이 느끼기에 원문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로 번역했다. 이와 함께 성경을 몰래 들여온 것이 교회 당국의 미움을 불러 일으켰다.

    c. 충실한 그리스어 번역 : 그러나, 이러한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어에 충실한 틴데일의 신약성경은 "모든 계층을 위한 가장 최고의 신약성경 번역본으로서의 중요성을 확증시켰다."[Ibid., p. 248]

 

  5. 틴데일의 구약 번역 작업

틴데일의 신약성경이 유포되자마자 그는 히브리 본문으로 구약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a. 모세 오경 : 1530년 그는 많은 논쟁을 일으킨 여백 각주를 실은 모세 오경 번역본을 출판했다.

    b. 요나서 : 1531년 요나서가 번역되었다. 모세오경과 요나서는 틴데일의 생존시에 출판된 구약성경의 유일한 부분이었다.

    c. 구약성경 번역의 미완성 : 틴데일은 그후 3년동안 개정 작업을 하였다. 1534년, 그는 모세 오경과 신약성경을 개정했다. 그는 동료 죠오지 오예가 자신의 개정본을 발행했기 때문에 구약을 완성하기보다는 신약성경을 개정했다.


  6. 배반당하여 투옥되고 죽임을 당함

    a. 헨리 필립스가 틴데일을 배반함 : 1535년에 영국사람 캐톨릭 신자인 헨리 필립스가 틴데일의 친구인 척 한 후 그를 차알스 5세에게 팔아 넘겼다. 차알스 5세는 틴데일을 브루셀 근처에 있는 빌보드성 토굴감옥에 가두었다. 틴데일은 투옥중에 번역 작업을 할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b. 교살되어 화형에 처해짐 : "1536년 10월 6일 틴데일은 공판에 회부되었고, 이단으로 판명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죤 폭스 같이 기도하며 화형대에 묶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였다. 그리고 교살당하여 화형에 처해졌다"[Ibid., p. 250] 틴데일은 흔히 영어 성경의 아버지로 불린다.

 

D. 마일즈 커버데일 성경

  1. 최초의 완전한 영어 성경

마일즈 커버데일은 "영어로 된 최초의 완전한 성경을 출판한 사람으로 공로를 인정받기에 마땅하다."[Ibid., p. 253] 커버데일은 1528년부터 1534년 까진 유럽에 있으면서 성경 번역 작업을 했다. 1530년에 그의 작품들을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달에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라는 헨리 왕의 칙령이 있었다. 여러 차례의 시도가 있었고, 토마스 크롬웰의 격려에 힘입어 1535년 10월 4일에 마침내 최초의 영어 번역본 성경 전서를 만들었다.


  2.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최초의 번역본이 아님

이 성경에는 목판 삽화와 지도가 들어 있다. 커버데일 성경은 원본의 번역본이 아니다. 왜냐하면 커버데일이 비록 틴데일의 모세오경 번역본을 사용했지만, 구약성경은 1524-1529년판 스위스-독일 주리크(Zurich) 역본에 근거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루터와 틴데일 성경을 조합한 것이다. 커버데일 성경은 외경을 포함시켰지만, 외경을 정경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설명을 달았다.

 

  3. 커버데일 성경의 중요성

커버데일 성경은 비록 두 번째 번역본이었지만, 영향력이 있었다. 그는 또한 영어 성경이 얼마나 벌게이트에 충실하게 번역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라틴 벌게이트와 영어의 축어적 번역을 대조시킨 대조 성경을 1538년에 출판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라틴 벌게이트가 많은 부분에서 부패한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이 벌게이트 용법의"전례대로" 번역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E. 존 로저스의 매튜 성경


존 로저스는 매튜 성경의 번역자로 알려져 있다. 이 번역본은 틴데일과 커버데일 성경으로 구성된 번역본이다. 매튜 성경은 대부분 그리스와 히브리 원문에서 번역되었다.

 

F. 그레이트 성경


  1. 커베데일이 번역함

1537년, 커버데일은 토마스 크롬웰로부터 "매튜 성경과 커버데일 자신의 성경을 대치하는, 매튜 성경에 기초한 다른 역본의 작성을 착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op. cit. , p. 37, May]

 

  2. 그레이트 성경의 크기

출간된 이 새 판은 쪽 크기가 11인치와 16.5 인치였기 때문에 그레이트 성경이라고 불렸다. 종이와 인쇄에서 모두 품질이 뛰어났다. 이것은 매튜 성경의 개정판이었다.

 

  3. 그레이트 성경의 본문

커버데일은 에라스무스의 라틴 본문과 신약은 라틴 벌게이트를, 구약성경은 먼스터의 축어적 번역본을 사용했다. 그레이트 성경은 "권위있는 역본"이 되었고, 최초의 공인된 영어 성경이라 불렸다.

 

G. 리차드 타버너의 공헌


그리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번역자였지만, 리차드 타버너 역시 많은 번역본이 나오는데 기여를 했다. 그는 뛰어난 그리스어 학생이었는데, 런던 탑에 갇혀 있는 동안 상당히 많은 번역을 했다. 이 성경은 "1582년판 카톨릭 신약성경 번역본에 영향을 끼쳤고, 이어서 킹 제임스 번역자들도 참고하였다."[Ibid., p. 40]

 

H. 제네바 성경


  1. 1543년 이후로 금지된 성경

헨리 통치 말기였던 1543년 이후로 의회법은 그레이트 성경을 제외한 모든 영어 성경의 역본을 폐지시켰다. "이 의회법은 (귀족이나 귀부인을 제외한) 여자, 장인, 도제공, 직공, 자유민 신분 이하의 하인, 농부, 노동자 등은 성경의 어떤 부분도 읽거나 사용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op. cit. , p. 73.]

 

  2. 성경 독자들이 핍박을 받음

메어리 여왕의 통치 시대인 1553-1558년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실제로 핍박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존 로저스와 크랜머는 성경을 읽는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 이 때는 존 칼빈이 제네바에 살면서 그곳으로 피신해 온 죤 낙스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수고하던 때였다. 커버데일도 제네바로 피신했고 1560년에 제네바 성경을 출간했다.

 

  3. "바지 성경"으로 불림

제네바 성경은 "바지 성경"이라고도 불렸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 7절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바지를 만들더라."[op. cit. , p. 74, Des Barres]

 

  4. 제네바 성경의 특징

이 성경은 영국에서 매우 인기있는 성경이었다. 크기는 7×8 인치이고, 로마체 문자를 사용한 최초의 성경이었다. 또한 최초로 장과 절을 나누었으며, 외경을 생략했다.

 

I. 감독 성경


이 번역본은 엘리자벳 여왕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째인 1568년에 출판되었다. "장려한 2절판"이라고 불렸지만,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이 성경은 오류와 부정확성으로 인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성경이 감독 성경이라 불린 까닭은 8명의 감독이 번역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J. 라임스와 듀에이 성경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대규모의 성경 번역이 이루어지자 카톨릭은 프로테스탄트의 이러한 성경 번역을 따라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엘리자벳 여왕 통치시기에 라임스와 듀에이로 갔던 로마 카톨릭 교도 망명자들이 번역을 시작했다. 신약성경은 1582년에 라임스에서 발행되었고, 구약성경은 1609년에 듀에이에서 발행되었다. 위클리프 번역본처럼, 본문에서 많이 부패한 라틴 벌게이트로부터 번역했다.

 

K. 1611판 킹 제임스 역본


이제 드디어 영어로 번역된 모든 이전 번역본의 정점인 1611년 판 킹 제임스 역본에 도달했다.


  1. 새로운 번역본의 요구

영국에서 제임스 왕이 권력을 잡은 지 정확히 일 년이 된 후, 왕은 "교회 안에 잘못된 점들을 논의하기 위하여 햄프톤 코트 궁전으로 크고 작은 정당들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했다.[op. cit. , p. 75, Des Barres] 이 때, 옥스퍼드에 소재한 Corpus Christi 대학 학장인 레이놀드 박사가 새로운 영어 성경 역본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 당시에는 세 가지 매우 중요한 역본들이 유통되고 있었다. ⑴ 1537년 판 그레이트 성경; ⑵ 1560년 판 제네바 성경; ⑶ 1568년 판 감독 성경.

 

  2. 54명의 학자들이 킹 제임스 역본을 번역하기 위해 임명됨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54명의 학자가 킹 제임스 역본의 번역자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반드시 따라야 할 세밀한 규칙과 규정을 만들었다. 이들 중 일부를 예를 들면:


  ○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읽히는 흔히 감독 성경이라 일컫는 성경을 따라야 하며 가능한 원본의 진리가 허용하는 정도에서만 변경한다.


  ○ 대언자와 성경 저자의 이름과 본문에 나오는 다른 이름들은 가능한 대중들이 사용하는 대로 그대로 따른다. [Rev. W. F. Moulton. 영어 성경의 역사, (1878), p. 196.]

 

  3. 킹 제임스 역본이 널리 수용됨

번역 작업은 1604년에 시작하여 1611년에 끝났다. 그 후 3백년 이상 킹 제임스 역본은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집과 교회의 성경이 되었다. 그러나 킹 제임스 역본이 첫번째 판이 그대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1613년에, 1611년 판 역본에서 300군데를 변화시킨 KJV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1629년과 1638년에 추가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해를 거듭함에 따라 철자, 문법, 구두점이 근대화되었다. "오늘날의 권위역(AV)은 모두 약 1750 군데를 변화시킨 것이다."[ R. 라이드 해리스, 당신의 성경: 성경 입문, (1960 & 1970,) p. 8]

 

Ⅲ. 결 론

비록 이 논문이 1611년 판 킹 제임스 역본의 번역과 출판으로 끝나는 간략한 "영어 성경의 역사"이지만 우리는 이 글이 주님의 섭리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하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KJV이후에 나온 많은 번역본들, 주목할 만한 것으로 1881년 판 영어 개역성경(RV), 1901년 판 미국표준역(ASV), 1946년 판 및 1952년 판 개역표준역(RSV)과 기타 수많은 현대 성경 번역본들에 관해서는 이 논문에서 검토되지 않았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성경을 믿고, 성경을 읽고, 성경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국어로 된 놀랍고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책을 가진 자신들의 특권에 더욱 더 감사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오늘날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배포하고 전함으로 인해 투옥되거나 사형에 처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주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부디 언제나 그러하기를!

 
 
 
 
 
"(기독영상)사라진 문명/최초의 기독교인 사도바울 "


 

 

 

 


 

 
<기독교 1000년 역사 /1부>

기독교 제2의 천년기가 시작되는 서기 1000년

나사렛 예수가 고대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난 지 천 년이 지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후 천 년이 지났으며,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고도

천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기독교는 계속되는 위협과

박해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았고,

오히려 기적적으로 크게 번성했습니다.

내일의 희망과 함께 새로운 천년기가 시작될 무렵

서구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는 기독교 국가임을 천명했습니다.

기독교는 암흑시기를 거치면서

전례없는 힘과 권력으로 유럽세계를 이끌었습니다.

기독교의 세력 범위는 유럽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 전체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력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한 수도사가 나타나서 개혁을 부르짖으며

전체 기독교 세계에 혁명의 불씨를 퍼뜨렸습니다.

이것은 전세계의 기독교 왕국을 산산이 뒤흔들고

기독교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 넣은

기독교 내부로부터의 혁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으로 거듭난

기독교의 제 2천년기 역사입니다.

 

 
<기독교 1000년 역사 / 2부>

종교재판, 에스파냐 왕국성립, 스페인 종교재판, 신학혁명,

기술혁명, 활판인쇄기 발명으로 인한 성서의 보급,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장 칼뱅의 신권정치, 르네상스,

영국의 개신교 운동, 영국 국교회 탄생, 토마스모어 성인추대,

로욜라 신학연구, 예수회 창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1000년 역사 / 3부>

유럽인의 신세계 정복, 신세계 노예제도, 과학의 비약적 발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갈릴레이 갈릴레오 이단재판, 과학혁명,

산업혁명, 감리교 확산, 대각성운동, 펜실베이니아 탄생,

미국 독립전쟁(진정한 의미의 교회와 국가 분리),

종교의 자유 인정,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1000년 역사 / 4부>

로마 카톨릭 보수 반동주의 고수, 제2차 세계 선교를 통한 기독교 팽창,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선교활동, 몰몬교 탄생 및 성장, 교황의 현대주의자 파문,

20세기 오순절 운동(성령강림운동), 근본주의자 탄생, 스콥스 '원숭이 재판',

라디오와 TV이용 복음 전파, 빌리 그레이엄, 흑인 교회운동, 마틴 루터킹,

유대인 대량학살, 교황 요한 23세 추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카톨릭 교회의 종교자유 인정, 해방신학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까바시마오 저, 한영철 역

    1.<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금세기 중엽에 그노시스 세계, 헤브라이즘 세계 및 헬레니즘 세계에 있어서 각각 극히 중요한 대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즉, 첫째 1946년(1945년이라고도 한다)에 나일강변의 한 촌락 나그.하마디(카이로의 남쪽 약 570킬로,옛 케노보스키온)에서 그노시스파의 서고를 발견했고, 둘째로 뒤에 말할 1947년의 사해 사본의 발견이며,셋째로, 크레테섬 크노소스 및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선문자 B가 1952년에 영국 건축가 마이켈,벤트리스(1922-1956)에 의하여 해독되고, 이것이 기원전 1400년대의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라는 것이 판명된 일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경위는 이렇다. 1947년 봄(1945년 이었다고 한다) 사해의 북서부 사막의 구릉지대 쿰란에서 베두인(아랍계 유목민)이 양과 염소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의 염소를 찾기 위하여 한양치기 청년이 반 쯤 허물어진 벼랑의 동굴에 돌을 던졌더니 무엇인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튿날 그 청년은 사촌 형제와 함께 그 동굴로 기어 올라가 보니 좁은 동굴 속에는 항아리의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안쪽에는 뚜껑이 덮인 항아리 여덟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일곱 개는 빈것이었고 나머지 한 개의 항아리 속에는 큰 두루마리 한 권과 작은 두루마리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이 두루마리를 결국 베들레헴의 고물상에게 넘어가고, 그 해 12월에 예루살렘의 헤브라이 대학이 이 세 두루마리를 사들이게 되었다.

    그후 사해의 서북 연안의 동굴은 베투인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답사되고 매년 계속해서 발견이 있었다. 와디,쿰란 지역의 동굴 발견은 1956년 봄까지 11개 곳(1956년에 발견)이었으며, 발견의 순서에 따라서 1(1Q,Qumran Cave1)에서 11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그 밖에 와디,므라바트 지역의 동굴, 킬베트.밀드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들,그리고 킬베드,쿰란과 아인.페스카 폐허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모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해 사본 또는 사해 문서라고 부르는 것은,1947년에서 수년 간에 걸쳐서 사해의 서북연안과 서안에 펼쳐져 있는 <유다의 황야>의 동굴이나 폐허에서 발견된 고사본들을 말한다. 발견한 장소나 사본의 내용과 성격 등은 여러가지이며, 그 정리와 분류는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간행된 사본과 단편들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1) 와디.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2) 와디.므라바아트(쿰란의 남쪽 약 16킬로미터,예루살렘의 동남남 약 24킬로미터)지역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사본 단편들(대부분은 2세기 전반, 특히 유대인의 대로마 제 2차 반란(AD 132-135년)시대에 속하는 것이며, 이 반란의 지도자 발,코호바에 관한 사료도 포함되어 있다.
    (3) 킬베트.엘밀드(예루살렘의 동남쪽 약 14킬로미터)지역의 유적(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자리)에서 발견된 신약성서의 사본 단편들(AD 5-8세기에 속하며, 쿰란 사본들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4) 아랍인 베투인들이 가지고 온 출저 불명의 사본 단편들.
    이것들 종에서 사해 사본이 중심이 되는 것은 (1)의 쿰란 사본들이다. 사본의 종류는 600종이나 된다고 하며, 두루마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도 10권 이상이 되며, 특히 동굴 1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전권(54난의 양피지로 돼있으며,전장 7.34미터,폭 평균 26센티미터,각 난은 평균 30행.이사야 66장이 전부 들어있다)과 동굴 4에서 발견된 키므엘기는 귀중한 것이다. 사본들의 연대는 대개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쿰란 종단의 본거지가 로마군에게 점령된 기원 67년에 걸쳐있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본은 대부분이 구약성서의 사본이다. 대부분의 두루마리 연대는 성서의 사본도 쿰란 종단 문서도 기원전 2세기말 이후, 특히 기원 전후의 그시게에 속한다 <사해사본>중에서 오래된 것은 와디.므라바아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단편들이며 기원전 8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발견된 많은 사본이나 파편을 양피지, 파피루스 ,동판,오스트라카 등에 기록되어 있다.

    2.<쿰란 사본들> 은 무엇을 말하는가

    쿰란 사본들은 구약성서 정전.외경,주해서 및 쿰란 종단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의 종교 문서로 나뉘고,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다음 네가지 문서로 대별된다.

    (1) 구약성서 정전의 사본들(단편을 포함)
    전체의 약 4분의 1이 되고 에스델기를 제외한 구약 각서가 있다. 신명기 이사야서,소예언서,시편등의 사본은 10종 이상이 된다. 주요한 것은 성마르크 수도원 소유의 <이사야서>의 두루마리(완본)와 헤브라이 대학 소유의 <이사야서>단편,<시편>단편 등이다.
    (2) 구약성서의 외경(또는 위경)
    여러가지 단편이 출토되고 있으나 가장 많은 것이 요엘서,에녹서 등이다.
    (3) 구약성서의 주해서
    창세기,시편,이사야서,호세아서,미가서, 나훔서,스바니야서,하박국서 등의 주해서의 단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장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하박국서 주해서는 가장 흥미 깊고 중요한 것이다.
    (4) 쿰란 종단의 종교 문서
    사해 사본을 남긴 사람들의 종교 집단의 조직, 목적 계율,의식 등을 기록한 <종규 요람><종단 계율제요>라고도 한다. <회중규정>,<축복기도문>,<감사의 시편>등의 예배식문에 속하는 문서, 그 밖에 <빛의 아들들의 싸움의 규칙>,아람어로 된 <외경 창세기>등이 있다. 그리고 1952년 3월에 발견된 동굴 3 속에서는 성전의 보물표와 그 숨긴 장소등을 기록한 이른바 <동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으나 이 리스트가 성전의 보물이었는지,또는 쿰란 종단의 재산이었는지,아니면 허구적인 것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동굴 1에서 남쪽으로 약 1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폐허는 오늘날 킬베트,쿰란<쿰란의 폐허>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이미 1851년에 F.두.서씨에 의하여 답사되었고 <사해사본>의 발견과 함께 이 폐허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51년에서 56년까지에 6회에 걸쳐서 예루살렘의 도미니코파 성서학원 원장 롤런,두.워 신부와 요르단 왕국의 고적 보존국장 G.L.하딩의 지도 아래 킬베트.쿰란의 발굴 조사가 실시되고 그 전모가 밝혀졌다.

    3.<쿰란의 폐허>는 어떻게 발굴되었는가

    두.워 원장이 얻은 결론에 의하면 ,킬베트,쿰란의 역사는 다음에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1) BC 8-7세기(철기시대 제II기)
    (2) BC 2세기말-AD 68년까지
    (3) AD 68-90년경 (로마군의 점령)
    (4) AD 132-135년(유대인의 대로마 제2차 반란시에 유대인 저항군이 점거)

    (1)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벽의 일부와 토기,오스트라카(ostraca)의 단편이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
    (2)의 시기에 속하는 유적은 쿰란 종단의 본거지로서 공동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건물은 북서쪽 구석에 견고한 성루가 있는 30미터 * 37미터의 장방형 건물이며, 안뜰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작은 방이있고, 집회실, 사경실,식당,부엌 등이 있다. 그리고 부근의 와디.쿰란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7개의 저수조, 6개의 욕실 등이 있고, 이것들은 쿰란의 종단의 교리나 생활을 아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 쿰란 종단이 형성된 것은 요하네.하르카누스(BC 135-104)시대였던 것 같다. 그후 기원전 31년에 이 근처 일대는 대지진을 만나 포기되었다. 이것은 건물의 균열로 알 수 있으며, 프라비우스.오세퍼스도 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쿰란 사본들을 만들어 낸 쿰란 종단은 그후 재건된 것 같다.
    이곳은 기원전 4년의 헤로데 대왕의 죽음에서 기원 7년경까지 사이에 재건되고 건물의 개축이 있었다.
    (3) 의 시기는 유대 반란 제 3년에 시작된다. 출토품 중에는 반란 제2년과 제 3년의 날짜가 새겨져있는 화폐 70여매와 로마군의 화살촉 등이 들어있다. 로마군은 1세기 말까지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4) 의 시기에 속하는 층에서 출토된 로마의 화폐에 의하면 로마 점령군이 약 10년간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후 단기간이기는 하지만 이유대인의 제2차 대로마 반란(AD 132-135)때에 발.코호바를 수령으로 하는 저항군이 일시 이곳에 진를 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워는 건물의 동쪽에 있는 묘지들을 시굴했다. 또 제분소,빵 굽는 곳, 도기 공장 등의 작업장도 발견했다.
    이상의 모든 점으로 봐서, 이 폐허는 유대교의 어느 종교 집단의 본거지이며, 종단의 구성원은 부근 동굴이나 천막에 있는 일시적인 건물에 살면서 이곳을 도장으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4. <사해사본>의 발견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종규 요람> 에 의하면,쿰란 종단의 단원은 자원해서 인적이 떨어진 이 유대 황야에 모여서 임박한 종말을 바라보며 메시아의 내림을 기다리는 종단의 엄격한 계율에 따라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사경은 그들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에 의하여 구약성서 각서 및 구약성 외경의 대부분이 양피지, 파피루스,동판 등에 필사되어 남겨졌다.
    <사해사본>의 발견은 좁은 의미의 성서학이나 성서 고고학 분야 뿐아니라, 특히 유대교의 공인된 교정본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구약성서의 본문 비판학은 물론, 기원전후의 유대교 역사나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교섭, 원시 그리스도교단과 유대교와의 관계 등의 제 분야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사해사본>의 연구는 전문가들의 국제적인 협력체제 아래 계속되고 있다.
    쿰란 종단의 단원들에 의하여 필사된 구약성서의 사본들은 세계 최고의 것으로 높은 학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나베.샤난<고요한 집>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 위에 있으며 22에이커의 부지에 60년의 역사를 가진 옛 베자렐 미술관 (주로 유대인의 민속 자료,슈나고게의 비품등의 종교 사료,16-20세기의 근대 서구 미술작품)과 성서,고고학 박물관(주로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고고 출토품)을 포함한 본관과 사해 문서들을 소장한 고문서관이 있으며, 그 중간에 현대 조각을 배치한 조각 정원으로 돼있다.
    그 밖에 창고, 연구실, 수복용 시설 등이 있다. 이 조각 정원의 설계가 그 규모 면에서 전후 최대인이 이스라엘 박물관은 1964년에 창립되고 이듬해 1965년에 개관했다. 그 내용은 광범위해서 고고학적, 미술학적, 민속학적 제 요소와 근대 미술관적 제 요소를 겸비하여 인류 문화유산을 통해서 미래의 전망을 하게 하는 총합적인 민족의 미술관이다.

    박물관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고문서관>에는 사해 문서 및 기원 2세기의 발.코호바의 반로마 봉기 관계의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고문서관은 지상으로는 흰 돔과 장방형의 검은 외벽을 보일 뿐이고 중요한 부분은 지하로 들어가 있다. 그 내부는 이중의 포물선 돔으로 돼있으며, 그것은 굴곡이 있는 거대한 항아리 같이 생겼다. 소용돌이 치는 굴곡은 천장 꼭대기에 있는 약 1.8미터의 구멍까지 위로 뻗혀 있으며, 그 구멍에서 하늘 빛이 실내로 비쳐 들어온다. 고문서의 역사의 중요성을 재현해 주는 것 같은 설계와 구조의 건물이다.

    5. 예수의 탄생은 기원 1년인가

    현재 우리가 보는 역사서는 연대를 표시하는데 서혁 기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탄생한 해를 기원1년으로 하고 그 이전을 기원전 (BC.Before Crist)로표시하고, 그 이후를 기원후(AD.Anno Domini)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남러시아의 스키티아 지방에서 출생한 6세기 로마의 수도이사이며 연대사가인 죠니 시우스,엑시구스(497년경-550년경)가 525년에 로마 교황의 명령을 받고 <부활절>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글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탄생 기원을 채용하여 확립하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 건국 754년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이 기원법은 9세기가 되어 프랑스 왕국 카로링왕조 제2대 왕 칼 대제(742-814)시대에 다른 기원법보다 결정적인 우위에 두게 된 이후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년표에는 예수의 탄생을 기원전 4년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정확하다면 서력 기원법의 전체 체계는 기원전에 관해서는 4년을 빼고 기원후에 관해서는 4년을 가해야 한다. 그 근거는 차치하고 실제로 예수가 탄생한 것은 후일의 연구에 의하여 기원전 6년경에서 기원전 4년경 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는 오랜 습관대로 이것을 편의상 그대로 상요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동시대의 다른 인물에 비해서 비교적 정확한 편이지만,예수의 탄생에 관한 사료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과학적 검토에 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소극적이긴 하지만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나 그 이전이라고 주장하는 연대의 연대학의 성과를 인정하고 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2장 1절이하에 의하면, <예수는 헤롯 왕 때(BC 3-74)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했으며 헤롯왕의 유아 학살의 명령을 피해서 이집트로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누가복음에도 로마황제 어거스투스 시대(BC 27-AD14)에 전 로마 제국의 인구조사 칙령이 있어서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유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남쪽 약 9킬로미터에 있는 도시이며 다윗왕과 관계가 깊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해서가 아니라,예수가 다윗의 호순으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다윗과 인연이 있는 베들레헴이 예수의 탄생지로 전해졌다고 한다. 마가복음 12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 자신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 또 예수의 생애에서 베들레헴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또 예수의 탄생지는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의 거의 중간에 있는 갈리리아의 도시나사렛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나사렛은 예수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도시였다.
    아무튼 마태,누가 양 복음서의 탄생 기록은 예수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이 그 만년에 로마 황제의 신뢰를 잃고 그 결과로 헤롯은 광기가 들어서 많은 육친까지도 살해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고,그것은 구약성서 위경의 모세의 승천 6장 이하에도 나타나있다. 누가복음의 탄생 설화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모두 헤롯왕 시대라고 했다. 그리고 <클레니오(로마의 귀족 스루피큐스.퀴리노)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에 한것보다 이전의 국세조사>때였다고 한다.

    1세기의 유대 역사가 프라비우스.요세퍼스(37년경-100년 이후)의 <유대 고대사>나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5장 37절 등에 의하면 클레니오가 유대에서 인구조사를 한것은 기원 6년이다. 아마 이 인구조사는 몇년에 한번씩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칼타고 태생의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로 유명한 텔트아누스(160년경-220년이 이후)의 <마르키온에 대한 반론>4-16에 의하면 사르투르니누스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BC 9-6)에 인구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4세기의 로마 역사가 문법학자 마크로비우스(340/360년경-?)에 의하면 어거스투스가 동시대인 헤롯이 자기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2세 이하의 남아를 모두 학살한 것을 엄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마크로비우스에 의하면 예수는 평화 정책을 써서 각지의 신망을 얻고 로마 황제 어거스투스(그는 헤롯왕가의 유대인에게도 우호적이었다고 한다)시대와 헤롯왕 시대에 탄생한 것은 분명하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 의하면, 예수의 활동의 시작은 30세경이며,그는 그 만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30년경에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지방 총독 본디오 빌라도(26-36)에 의하여 극형,즉 십자가형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 확증되고 있다. 이 해부터 역산하면 예수의 탄생은 기원 전후가 된다.
    한편 헤롯은 기원전 4년의 과월절 전에 요르단강 하류의 서쪽 여리고에서 죽은 것이 역사적으로 확정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후는 될 수 없다고 한다. 여러가지 점을 고려해서 예수의 탄생은 기원전 6년에서 기원전 4년 사이라고 추정된다.
    인간 예수의 짧은 생애는 그 죽음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으나, 예수를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 =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원시 그리스도교단 안에서 형성된 전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삼일만에 부활했음을 전하고 있다.

    6. 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인인가

    각 복음서에 의해서 묘사돼 있는 예수상은 차이가 있으나 복음서는 전체적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예수>란 헤브라이어 인명 예수아 또는 예호수아(여호수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예수스이다. 사도행전 7장 45절,히브리서 4장 8절에는 모세의 후계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예수>로 기재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야훼의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며, 인명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기원 1세기의 프라비우스.요세퍼스나 파피루스 문헌등에 의하면 헬레니즘 시대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10명이 넘었다고 하니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꽤많았던 것이다. 골로새서 4장 11절에도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라는 예가 보인다. 마태복음 27장 16절에는 <예수.바라바>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리스도>Christos (<크리스도>또는 하리스토스>라고도 표기된다>란 그리스어의 동사 크리오 chrio(<기름 붓다>란 뜻)에 유래하는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뜻이며, 헤브라이어의 마시아하,아람어의 메시하,즉 그리스,라틴어형의 메시아스 Messias에 해당한다(요한복음1장 41절 4장 25절).

    기름 특히 향유는 고대에는 귀한 것이었다. 올리브유의 용도는 여러가지였으며, 기름에 유향을 섞어서 태워 향기 예물로 바치거나(레위기 6장 15절),기름은 번영의 표시이며(신명기 8장 8절,예레미야서 31장12절),귀중한 상품으로 수출됐다(느헤미야기 5장 11절,에즈라기 3장8절),또는 기름은 융성(신명기 33장 24절),기쁨(시편45편 7절,히브리서 1장 9절)의 상징이 되며,기름이 떨어지는 것은 비애를 나타내는 것이었다(요한계시록 6장 6절).

    돌 벼개를 벤 야곱은 천사의 꿈을 꾸고 깨어서 그 돌을 세워서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창세기 28장 18절,이것은 가나안 종교의 특징의 하나인 신성한 돌을 숭배하는 흔적이다), 사울,다윗 그 아들 솔로몬드 제사장 아론,예언자 엘리사도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사야서 45장 1절에는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고 했으며, 이방 페르샤의 왕 큐로스가 구약성서에서는 왕의 칭호인 <메시아>로 불리고 있다. 이것은 큐로스가 유대인을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에서 해방했기 때문이며 이 호칭이 당시 일반 민중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원래 보통 명사였으며 복수형도 있었을 것이다.<그리스도.예수>또는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칭호>인 예수 (인명)>라는뜻이다. 그리스도는 나사렛의 예수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목수였던 요셉을 가장으로 하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구약성서를 읽고 주의 사람들에게도 요셉의 아들로 인정받고, 나사렛에서 교육을 받아 성인이 되었다. 모친 마리아는 카톨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모친>으로 숭배되고 있다. 예수에게 여러 동생들이 있었다. 사해 문서는 예수가 태어난 배경을 전해주고 있다.

    7. 알파벳은 언제 생겼는가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최대의 유산은 알파벳과 헤브라이즘일 것이다. 전자는 실용적인 유산이며 후자는 정신적인 유산이다. 먼저 알파벳의 정의부터 해보자.

    알파벳이란 말의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즉 표음 문자를 가리키며, 이런 글자가 일정한 순서로 배열된 자모표 이다. 원칙적으로 1장 1음을 표기하는 것이다. 4항에서 말한 것처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은 우선 글자의 사용 여부로 할 수 있다. 오리엔트에서는 기원전 3천년대에 이미 글자가 사용되었다. 즉,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인의) 쐐기글자와 이집트의 신성 문자가 그것이다. 양자가 모두 독자적인 표의 문자이며, 각기 극히 복잡한 구조와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기나 신관 계급등의 독점물로서 신성시되었다.

    한편 이러한 서기제도는 대 신전이나 대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의 산물이었다. 이 글자들은 처음은 그림 글자에서 발달한 것이었으나 거의 원형 그대로 일부 표음 문자로 바뀌어 갔다. 이렇게 해서 글자는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 함께 발달했으나 지금부터 약 2천년전에는 읽혀지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미 기원전 2천년경부터는 가나안인은 쐐기 글자와 신성 문자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가나안 글자의 창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기원전 1500년 경에 <시나이 그림 글자>가 나오고 이것이 알파벳의 직접 조상이 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인의 발명한 글자를 페니키아인,아람인,이스라엘인 들이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각지에서의 무역 활동 상의 필요 때문에 표음화된 이집트 글자를 근거로 해서 독자적인 간략한 표음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지중해를 통해서 그리스.로마로 전달된 알파벳은 유럽인의 글자로서, 즉 라틴 글자의 알파벳으로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라틴 글자의 알파벳 없이는 유럽 문화는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나안에서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처럼 거대한 중앙집권 국가는 성립되지 않았다. 가나안 사회의 중심은 상인층이었다. 그들에게는 왕후나 신관과 같이 서기를 양성할 경제적인 힘은 물론 없었으나 문자를 신성시할 필요도 없고 문자를 오직 실용적인 기호로 바꾸어 사용해갔다.

    별표에서 보는 것처럼,첫 글자는 <숫서 머리>를 뜻한다. 숫소는 가나안어로 <알프>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글자도 <알프>로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 <알프>는 <숫소>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순히 <아> (엄밀하게 말하면,<아>를 발음하기 직전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 라고 하는 첫 소리를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0세기의 비문에는 이 <숫소의 머리>가 이미 양식화 되어 두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어 있었다. 이 글자가 180도 회전하면 고대 그리스 글자(BC 8세기)의 알파가 되며, 이것을 90도 회전하면 라틴 글자 A가 된다. 둘째 글자는 <집>을 뜻한다. 이것은 가나안어의 <집>을 나타내는 <벳>의 첫 소리 B음을 나타낸다. 이 그림 글자는 기원전 10세기에는 한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고 그것을 180도 회전한 것이 고대 그리스 글자 베타가 되고 그 베타의 윗부분 획이 이어져서 라틴 글자 B가 됐다고 한다.

    알파벳이라는 명칭 자체는 그리스.알파멧의 처음 두 글자 알파와 베타에서 나온 것이며, 그 어원은 가나안어의 <숫소의 머리>와 <집>에 유래한다. 고대 이스라엘인은 가나안이게서 알파벳을 배우고, 이것을 독자적으로 헤브리어 글자로 발전시킨 것이다.

    8. 유럽 사조의 근본은 무엇인가

    전항에서 우리는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유산의 하나, 즉 실용적인 유산인 알파벳의 기원을 살펴봤으며 다음은 정신적인 유산인 헤브라이즘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헤브라이즘이라는 것은 원래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고나 행동속에서 자라난 것이며,고대 이스라엘인의 유일 인격신 야훼 신앙에 유래하며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되고 신의 의로움과 사랑을 근본 원리로 한다. 헬레니즘(그리스 사상 문화)과 함께 유럽 정신의 전통을 형성하여 온 2대 사조의 하나이다.

    영국의 문예 사회 평론가 머슈.아놀드(1822-1888)가 평론집<교양과 무질서> (1869)에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논한 이래, 이 양자가 유럽사상의 2대 원류로서 파악되게 되었다. 보통,헤브라이즘은 인간중심주의의 헬레니즘과 대비해서 논의되는데

    그것은 구약성서에 근거한 헤브라이적 사유의 특질을 나타내는 경우와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으로 대별된다.

    노르웨이의 신학자 트리프.보만(1894-)은 그 저서<그리스도인의 사유와의 비교에 의한 헤버라인의 사유>에서 헤브라이인과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의 구조적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헤브라이인의 사유벙밥의 특색은 동적이고 힘차고 열정적이고 자주 거의 폭발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비해서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은 정적이고 온화하고 절도를 중히 여기고 조화를 사랑하는데 있다. 헬레니즘이 이성적 과학적 미적인데 비해서 헤브라이즘은 의지적 윤리적 신중심적 인생관 세계관이고 그 특색이다.

    예수가 언제 어디스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자세히 알아 내기는 사료의 제약으로 극히 어려운 일이지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유대인의 편협한 선민 사상도 부정하고 하나니의 사랑과 공정을 믿었고, 그것을 유대교의 전통적 문화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보면 변경지인 북쪽 갈릴레아를 거점으로 해서 도시와 마을을 순회하면서 동포에게 전했다.

    그리스도교는 일면으로는 유대교를 모태로 해서 그것을 계승하고 다른 면으로는 그것을 변형 발전시킨 것이다. 유럽인이 받아들인 헤브라이즘은 신약성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된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인 것이다.

    4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인이 고전 고대의 세계로 침입하여 이른바 헬레니즘,헤브라이즘,게르마니즘의 융합이 시작되고 역사의 담당자가 로마인에게서 게르만인으로 바뀌고,그와 함께 무대도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유럽으로 이동하고 역사 개체로서의 유럽이 형성된다.


이사야 A 사본의 32-33단(columns)
 
 
그리스도교 기원 살아숨쉰다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 필사본
구약성경 전승과 본문형성 규명 자료
 
 
   1947년 봄, 이스라엘 사해 북서쪽 해변가. 한 목동이 잃은 염소를 찾아 나선다. 절벽에 있는 구멍에 혹시나 염소가 빠졌는가 싶어 돌을 던져 염소의 울음소리를 확인한다. 그때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동굴로 들어간 목동은 항아리 안 가죽 두루마리를 발견한다.
 
   이 우연한 ‘찾음’으로 가장 오래된 성경필사본인 ‘사해사본’은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사해사본이란
 
   ‘사해사본’(Dead Sea Scrolls). 영어를 그대로 풀면 ‘사해 두루마리’. 생소한 말이다. 요약하면, 이스라엘 사해지역에서 발견된 성경필사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는 1947∼1956년 사해지역 유다 광야에서 발견된 성경사본을 통틀어서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사해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 중에서 쿰란(Qumran) 지역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뜻한다. ‘쿰란사본’으로도 불린다. 주로 종교적 학문적 의미로 사해사본이라 하면, 좁은 의미의 쿰란사본으로 생각할 수 있다.
 
   1947년 쿰란지역에서 베두인족 목동 무하마드 아드 디브에 의해 첫 동굴이 발견된 후, 56년까지 모두 11개 동굴에서 850여 종류의 사본들이 발견됐는데, 이를 쿰란사본이라 한다. 이 사본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필사된 것들이다.
 
   2000년 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사본들이 유다 광야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실을 두고,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라 부른다. 제 1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단편들이 대부분이며, 특히 500여 종류가 발견된 제 4 동굴의 사본들이 양과 중요성에 있어 의미가 있다. 사본은 파피루스나 양피지로 만들어졌고, 대부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여졌다.
 
   사해사본의 가치
 
   ‘사해사본’은 현존하는 성경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역사학적으로, 알렙포 사본(925년 경 기록), 레닌그라드 사본(1008년 기록) 보다 1000년 이상 오래된 성경 본문을 보여준다.
 
   쿰란에서 발견된 850여 사해사본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에스테르기를 제외한 215여 종류의 구약성경 사본. 두 번째로, 구약성경의 다양한 외경 사본과 마지막으로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룬 이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공동체 생활조직, 사상 등을 적은 쿰란-에세네파 사본이다.
 
   특히 구약성경 사본들은 성경의 전승과 본문 형성의 역사를 규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구약성경의 정경들이 확정되기 이전의 본문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소라 본문’, ‘사마리아 오경’, ‘칠십인역’ 등 여러 다른 본문들과 유사하기도 하지만 쿰란공동체
고유 방식으로 필사한 것도 있어 비교연구에 도움이 된다.
 
   또 성경 사본 외 나머지 사본들은 예수 그리스도 활동시기였던 기원후 1세기, 당시 팔레스티나 유다이즘 연구의 직접적 문헌으로서 가치가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 쿰란에서 발견된 구약성경 사본 수
 
   모세오경 : 창세기(19), 탈출기(17), 레위기(13), 민수기(8), 신명기(33)
   예언서 : 여호수아기(2), 판관기(3), 사무엘기(4), 열왕기(3), 이사야서(21), 예레미야서(6), 에제키엘서(6), 다니엘서(8), 열두 예언자(8)
   성문서집 : 역대기(1) 에즈라-느헤미야기(1), 시편(34), 욥기(4), 잠언(3), 룻기(4), 아가(4), 코헬렛(2), 애가(4), 집회서(1), 토빗기(5), 예레미아의 편지(1)
 
   에스테르기를 제외한 오늘날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모든 책들의 사본이 발견됐는데, 특히 시편, 신명기, 이사야서 사본이 상대적으로 많이 발견됐다. 현재 ‘쿰란사본’ 공식판은 옥스퍼드대학교 출판사의 ‘DJD’(Discoveries in the Judaean Desert) 시리즈를 통해 39권까지 발표됐다.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전시품 소개
 
 
 
● 사해사본 회중규칙서 ‘1Q sa’
 
회중규칙서는 공동체 규칙서의 두 개 부록 중 하나다. 회중규칙서는 마지막 날에 등장할 두 메시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메시아 규칙서(Messianic Rule)라고도 불린다. 히브리어로 적혀있으며 기원전 1세기 전반부에 필사되었다. 현재 요르단 문화재 관리국이 소장하고 있다.
 
● 성묘성당(주의 무덤 성당)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한 장소와 예수의 무덤을 둘러싼 위치에 세워진 성묘성당 내부 모습이다.
 
● 물고기 모양 등잔
 
물고기 모양의 등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 중 하나인 물고기는 그리스어로 ΙΧΘΥΣ인데,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글의 첫 글자들을 모아놓은 것과 같다.
 
 
● 쿰란 항아리
 
1947년 베두인 목동들이 사해사본을 발견했을 당시 사본이 담겨있던 항아리이다. 접시모양의 뚜껑과 함께 몸체가 긴 이 항아리는 ‘쿰란공동체’가 거주했던 곳인 ‘쿰란’ 유적지와 사본이 발견된 동굴에서만 발견되었다.
 
● 마다바지도
 
요르단의 마다바에서 발견된 비잔틴 시대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모자이크 성지 지도 이다. 크기는 가로 16m와 세로 6m로 전시회에서 실물 그대로 복원된다. 세계적 고대 문화유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모자이크 지도가 발견된 마다바는 3500년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 유로기아 토큰
 
비잔틴 시대의 상징적 유물이다. 당시에는 모든 일상적인 생활 물건에 대부분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특히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가 그려진 장면은 토큰과 병에 많이 장식되어 순례자들에게 보급됐다.
 
● 청동등잔과 등대
 
청동으로 만들어진 등잔과 등대로 십자가가 장식돼 있다. 예수 이전의 유물에서도 발견됐지만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구속을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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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전 12월 4일 개막

진본 3점 등 총 8점과 고대 기독교 유물 800여점 전시

내년 6월까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장서 열려

 

현존하는 최고의 구약성경 사해사본이 국내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

기원전 기록된 가장 오래된 성경의 사본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기원 과정을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해사본과 기원’전(www.scrolls.co.kr)이 지난 12월 5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장에서 개막되어 내년 6월 4일까지 개최된다.

 

 

사해사본 재단 이사장 웨스턴 W.필즈 박사는 개막식에서 “세계적으로 사해사본 진본은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며 “이번 전시회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심을 돈독히 하며, 다른 종교인들에게는 초기 기독교 역사와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기독교의 가장 의미 있는 유산인 사해사본과 함께 약 800여점이 고대 기독교 유물이 함께 전시된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국내에 첫 전시되는 사해사본은 기원 전 250년에서 기원 후 68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사본이다. 이것은 1947년 사해지역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후 세기의 고고학 발견으로 불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회중규율집(1Qsa), 코헬렛(전도서) 사본(4QQoha), 이사야서 주해서(4Q162), 증거집(4QTesiminia), 출애굽기/탈출기(4QpalesExod) 등 진본 5점과 7.34m에 이르는 이사야서 두루마리, 보물 지도로 추정되나 아직 풀리지 않는 구리 두루마리 복제본 등 총 8점과 그리스도교 10대 유물인 신약·파피루스도 을 만날 수 있다.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은 발견된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 제1동굴에서 제11동굴까지 붙여 놓았다. 영어로 표시할 때는 숫자를 처음에 붙이고, 쿰란(Qumran)을 뜻하는 알파벳 ‘Q’를 붙여 1Q, 2Q, 3Q 등으로 표시했다. 아울러 각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동굴들의 명칭에 덧붙여 이름을 붙이거사 숫자를 붙여서 표시했다.

 

전시회 개막 테이프 컷팅

 

전시관은 쿰란 동굴의 발견, 사해사본관, 쿰란공동체, 이스라엘의 멸망, 로마의 박해, 유대인의 흔적, 등잔의 변화, 비잔틴 시대, 마다바 지도, 그리스도교의 흔적, 십자가 길, 나도 고고학자(체험관)라는 테마로 구성되어 사해사본과 함께 사해사본을 쓴 쿰란공동체 생활을 하던 이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이스라엘의 멸망에서부터 비잔틴 시대 그리고 중세 시대까지 기독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골함, 쿰란 항아리, 빌라도 동전, 유물을 통해 당시 시대상과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비롯한 주요 성지 유물과 함께 매년 200만 명의 성지순례객이 찾는 예수 탄생 교회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골고다 언덕의 예루살렘 성묘교회의 일부가 복원되어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순례 체험의 기회까지 제공하게 된다.

마바다지도

 

사해사본 외에 기독교 유물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바로 비잔틴 시대의 복원된 마바다 지도이다. 약속의 땅을 보여준 6세기 지도인 이 마바다 지도는 대표적인 모자이크 성지 지도(가로 16m×세로 6m)로, 성경과 관련된 기독교의 제단과 교회들의 위치를 표시함으로써 기독교 구속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사해사본 재단, 요르단문화재청, 프란체스칸 박물관,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 연구소, 히브리대학 오라이언 센터, 듀크 대학교, 뮤렌버그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익슬란 주최로 열리며, 한국 사해사본 전시사무국이 주관하고 있다. 예매는 티켓 링크를 통해 가능하며, 사전 예매 시 2000원 할인 된다.

바다바지도 관람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세계성서공회연합회 번역 정책위원회 위원)는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특별 강연(12월 10-14일)과 거기에 이은 사해사본 및 파피루스 사본 전시회는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2세기로 접어들기까지 한 번도 시도되어 본적이 없는 경사가 아닐 수 없다.”며 “이번 특별 강연과 전시회를 통해 △성경사본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며 △성경 본문의 전달 과정에 과한 관심을 고조키시고 △성경 본문이 전달 과정에서 비록 필사상의 오류가 발생하고, 때로는 독자를 위한 설명적 첨가가 발생하거나 신학적인 견해차에 기인한 어휘 선택이 이문(異文)과 이독(異讀)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성경 본문이 오랜 기간 동안 전해 내려오면서도 정확하게 전달됐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며 △이러한 공헌은 한국 교와 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인식을 한 단계 높이 끌어올릴 것이고, 특히 교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원과 성경 본문 전달에 관하여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게 하며’(딤후 3:14) △성경에 대한 어떠한 공격도 스스로 물리칠 수 있는 지적 유산과 능력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한편 사해사본 재단이 주최한 진본 전시회는 그 동안 미국에서 일곱 차례 열렸으며, 외국 전시는 영국에 이어 한국이 두 번째이다.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중·고생 1만2000원, 초·만4살 7000원이며, 20인 이상 단체 관람일 경우 해당 금액에서 각각 2000원이 적다. ☎ 02-785-8710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특별전
2007-12-05 ~ 2008-06-04

전시장소 :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장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특별전

전세계를 감동시킨 세기의 발견으로 주목을 받았던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전'이 12월 5일부터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사해사본은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후 68년 사이에 쓰여진 고대 성서로서, 2000년동안 사해 근처 동굴에 감춰져 있던 비밀의 문서이다. 사해사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서의 사본으로서, 1947년 발견된 이후 고고학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 성과이자 세기의 발견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구약성서가 기원후 쓰여졌다는 일각의 의심을 일축시키는 자료로서 많은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사해사본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최고의 성스러운 유물로서, 예루살렘에 방문한다 해도 사해사본의 진본을 보기는 쉽지 않다. 이는 사해사본을 보유하고 있는 이스라엘박물관과 록펠러박물관에서 진본을 잘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이스라엘박물관의 '책의 전당'에서 적은 수의 진본으로 관람할 수 있을 뿐, 전시되어 있는 대부분은 레플리가(복제품)나 사진으로 대체되어 있다. 이번 한국전시회에서는 진본 5점을 포함한 8점을 감상할 수 있는 다시 없는 좋은 기회다.

또한 이스라엘의 멸망에서부터 비잔틴시대, 그리고 중세시대까지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800여 점의 유물들을 통해 당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의식, 그리고 종교관을 알아볼 수 있는 감동적인 전시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주 최
. 요르단문화재청(Department of Antiquities of Jordan)
. 사해사본재단(Dead Sea Scrolls Foundation)
.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ECole biblque et archologque franaise de Jrusalem)
. 프란체스칸박물관(Franciscanum Museum of Jerusalem)
. 히브리대학 오라이언센터(The Orion Center for the Study of the Dead Sea Scrolls and Associated Literature)
. 듀크 대학교(Duke University)
. 뮬렌버그 대학교(Muhlinberg College)
. 프린스턴 신학대학교(Prinecton Theological University)
. (주)익슬란(Ixlan, Inc)

■ 후 원
외교통상부, 문화관광부, 서울특별시, 한국관광공사,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마음한몸운동본부, 가톨릭신문사, 국민일보, 극동방송, CTS기독교TV, CBS기독교방송, 평화방송 평화신문

■ 전시기간 : 2007. 12. 5 ~ 2008. 6. 4

■ 관람시간 : 오전 10시 ~ 오후 9시(전시기간 중 무휴)

■ 전시장소 : 용산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장

■ 전시회 구성 : 쿨란 생활관, 사해사본관, 그리스도교의 기원, 예수의 발자취, 예수의 탄생.죽음.부활

■ 관 람 료
. 개인 : 성인(15,000원) / 중.고교생(12,000원) / 만4세 ~ 초등생(7,000원)
/만 65세 이상(13,000원)
. 단체 : 성인(13,000원) / 중.고교생(10,000원) / 만4세 ~ 초등생(5,000원)
* 단체 : 20인 이상
. 장애인 및 국가유공자 50% 할인(1~3급 장애인 동반 1인 50% 할인)

■ 문의전화 : (02)785-8710 / 사해사본 전시사무국 (주)익슬란

■ 홈페이지 http://www.scrolls.co.kr

■ 커뮤니티 : club.cyworld.com/scro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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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란연구.............글: 박경철

관련 사이트 : 영어 독어

성서박물관안의 이사야 두루마리
  1. 쿰란 사해 사본이 나오기 까지
  2. 쿰란 공동체: 엣세네파?
  3. 예수와 쿰란
  4. 세례요한과 쿰란
  5. 바울과 쿰란
  6. 쿰란 1-11번 동굴에서 발굴된 지금까지의 문서들
  7. 1QIsaa:쿰란 1번 동굴에서 나온 대이사야 두루마리 원본
  8. 쿰란 연구 참고 문헌들

쿰란 사해 사본이 나오기 까지, 첫번째 이야기

전 세계를 2천년의 잠에서 깨운 1947년의 봄

관련 사진들은 마우스로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항아리 뚜껑 모양의 성서박물관 지붕
신학생이라면, 아니 이제는 일반인들에게 까지도 누구나 쿰란 이라는 이름은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해 북쪽에 있는 지역의 이름이지만, 일반적으로 쿰란 사본, 사해 사본등으로 그곳에서 아주 오래된 성서가 발견된 것 쯤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쿰란의 이름은 이제 전세계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대충 개론적으로 알고 있는 쿰란의 이야기이지만 쿰란의 중요성만큼 우리는 쿰란에 대한 이야기, 그 처음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것 같다. 실제로 쿰란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도 서방세계에서는 막대한 연구비가 투자되고 있고, 그와 함께 아직도 매우 활발하게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쿰란은 우리에겐 먼 옛날 이야기 처럼 들리는지도 모른다.
쿰란에서 나온 수많은 자료들은 무엇보다도 성서신학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결코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 또한 쿰란 공동체 연구는 성서가 침묵하고 있는 중간기와 함께 예수 시대, 그리고 그 다음 초대 교회 시대에 대한 매우 중요한 당시 시대상을 밝혀 주기 때문에 쿰란 연구는 매우 중요하게 그리고 좀 더 자세히 신학교와 학계에서 다루어 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우선 이 쿰란 이라는 이름이 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이야기 부터 들려 주고자 한다. 아주 흥미 진진한 이야기들을...
쿰란 11개 동굴 지도 쿰란이 전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은 1947년 초 한 베두인 아랍계 청년 Muhammed edh-Dhib에 의해서였다. 흔히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하루는 양들을 치던 목동 무함메드가 잃은 양을 찾고 있었는데, 한 벼랑위 작은 구멍 하나를 발견한다. 그는 자기의 잃은 양을 찾으려고 내려가기 앞서, 우선 혹시나 사나운 짐승들이 있지나 않나 싶어서 그들을 �기 위해 돌을 던져본다. 그러자 그는 안에서 무언가 쨍그렁 하고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무하메드가 조심히 그 아래로 내려가 보니 깨진 항아리 조각들과 함께 양피지위에 무언가 옛 날 글씨들로 빼곡하게 쓰여져 있는 낡아빠진 두루마리들을 보게 된다..... 이것이 2천년 이상 숨겨져 있던 언청난 보물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그 첫 사건이다. 또는 무하메드가 금광을 찾기 위함이었다는 말도 있다. 이곳이 쿰란 연구의 시작이 된 바로 쿰란 제1번 동굴이다.
쿰란사본의 첫 발견자 Muhammed edh-Dhib(우측) 예전에 이스라엘에 혼자 배낭을 메고 갔을때, 이곳 쿰란 공동체 집터에 갔었다. 오늘 날 관광객들이 가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쿰란 공동체 집터에서 건너편으로 마주 보이는 곳이 4번동굴이고 그 오른쪽으로 가면 5번 동굴이 있고, 4번 동굴 멀리 뒤쪽 산지에 보이는 굴이 바로 6번 동굴이다. 그런데, 관광객들에게 들려 주는 안내원들은 바로 이 4번 동굴을 바라보면서 처음 베두인 소년이 돌을 던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내원의 설명이 끝나자 관광객들중 짖꿎은 몇이 건너편 동굴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아주 몰상식한 미국인들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말렸다. 쿰란 집터(빨간색)와 4번 동굴(검정색 화살표)그리고 이것은 4번 동굴이고 그 베두인 청년이 돌을 던졌다고 하는 곳은 여기서 북쪽으로 한참 더 떨어져 있는 제1번동굴이라고 가리켜 주었다.

하여간, 무하메드는 이것을 갖고 베들레헴 장터에 갔다가 거기서 구두수선공인 '칸도'(원래 이름은 Kahil Iskander Shahin이지만 '칸도' 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를 만난다. 칸도는 가죽 신발들의 끈들을 꿰메어 주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 그는 골동품 중개상으로 일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칸도는 그것을 자신이 속해있던 시리아 정교회 소속 예루살렘의 성 마가 수도원 당시 감독 이었던 사무엘(Athanasisus Yeshue Sammuel)에게 가져갔다. 그는 이것이 시리아 문서인줄로 알았다. 사무엘 대주교는 한 부분을 불로 태우자 그 모양이 오그라드는 것을 보고서 이것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음으로 이것이 얼마나 오래된 것이며, 그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 시내반도에 있는 카타리나 수도원에 학자겸 주교로 가 있던 영국인 알렉산더(Boyd Alexander)와 함께 조각 하나를 찢어 두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금방 부스러지고 말았다.
문제의 인물 칸도(왼쪽) 그는 이것이 당시 카타리나 수도원에 보관돼 있던 그 어떤 것들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믿었다. 사무엘 대주교는 이것이 옛 시리아 문서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것의 가치가 얼마나 클 것인지에 흥분해 있었다. 그는 당장 칸도를 불러 나머지 모두를 찾아보라고 지시한다. 사무엘 대주교는 초조하게 칸도와 베두인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나타나질 않았다. 어느날 수도원으로 몇 명의 베두인들이 찾아왔을 때, 수도원에 있던 주교 푀트너(Pförtner)는 그들을 매몰차게 밖으로 내 보내고 만다. 그들은 거지 차림이었기에 수도원안으로 들어 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조하게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무엘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칸도와 함께 이들을 찾아나선다. 그런데 이미 그 사이에 이 베두인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나머지 3개의 두루마리들을 다른 골동품상에게 벌써 팔고 난 뒤였다.
이사야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사무엘 대주교 1947년 7월 다행히 칸도는 이 3 두루마리를 찾게 되고 사무엘 주교를 위해 약 250 달러를 주고 구입한다. 사무엘은 칸도에게 그 중 3분의 1을 수고비로 준다. 그리고 6년 뒤에 이스라엘 정부에게 250,000 달러에 팔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알려지기는 이것을 처음 발견하고 팔었던 무하메드는 그 돈으로 사냥감 총 한자루와 자기 부인을 샀더랜다....

처음에 학자들은 이것의 연대를 기껏해야 중세때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이미 1920년대 필레스틴에 고고학 작업들이 있었고, 곳곳에서 암시장들을 통해 거래되던 옛 문서들이 있었지만, 모두 그리 오래된 것들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쿰란에서 나온 이것도 역시 그런 모조품정도의 하나일 거라고 여겼다.

1948년 2월 사무엘은 당시 고대근동 미국연구원(오늘날 올 브라이트 연구소로 불림) 성서학자인 트레버(John C. Trever) 박사를 부른다. 트레버 박사는 이것이 놀라울 정도로 오래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트레버 박사는 그 7,34미터의 두루마리를 보고서 기원전 1-2세기의 이사야 사본이라고 알아맞췄다. 54쪽으로 된 1장에서 66장까지 전부 다 들어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 전해진 그 어떤 히브리 사본의 연대보다 1000년 이상을 앞댕기는 순간이었다. 1990년, 94년에 실시된 방사능 연대 측정실험은 이를 기원 전 2세기 것으로 결정했다. 트레버 박사는 사무엘의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중 두 장을 윌리암 올브라이트 교수에게 보낸다. 1948년 3월 8일 올브라이트 교수는 트레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금세기 최대 사본발견에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 무슨 믿기지 않는 발견이란 말인가요....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진품이 틀림없소...."
사무엘 대주교와 트레버 박사 사무엘 정교회 감독과 칸도뿐 아니라 이미 이 소식을 알게된 이들이 있었다. 요르단의 문화재관리위와 그 밖에 도굴단들이었다.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쿰란에 대한 발표는 발견된지 1년 뒤인 1948년 4월 12일 당시 문화재관리위원장이었던 하딩 장군이었다. 아직 이스라엘이 독립되기 이전이었고, 처음으로 다시 그 동굴을 찾게 된 것은 1949년 1월 말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원래 동굴입구 아래쪽으로 그 보다도 훨씬 큰 입구가 이미 뚤려 있었다. 도굴단들이 벌써 다녀갔던 것이다. 최소한 이곳엔 56개의 항아리들과 대략 80개의 두루마리들이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다 사라지고 그곳에서 단지 70개의 조각들만을 주워 돌아온다.
원래의 1번 동굴(원)과 도굴된 모습 하딩장군은 당시 팔레스틴 고고학 박물관(현재는 록펠로 박물관)총무였던 요셉 사드(Joseph Saad)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이 둘은 끊임없이 예루살렘 구시가에 있던 성 마가 수도원에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미 그 사이 사무엘 주교는 수도원 누구도 몰래 자기의 두루마리들을 갖고 미국으로 뜨고 없었다. 어느 날 하딩과 사드가 여느때와 같이 수도원에 갔을 때, 길 건너편에서 한 여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녀 남편이 일년전 사해 근처 한 동굴에서 일할 때, 거기서 옛날 골동품들을 찾았는데, 누구도 살려고 하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여기 수도원에서 이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까 해소 왔노라는 것이었다. 하딩과 사드는 눈이 둥그래져 서로를 쳐다 보았다. 즉시로 그들은 그녀의 남편을 데리고 박물관 지하로 갔다. 지하실 책상위엔 발굴품들이 놓여져 있었다. 그 남자는 순순히 자백을 했고, 갑자기 웃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신의 담배쌈지가 어찌된건지 지금 박물관 지하 책상위에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도굴시 동굴에 떨어졌다가 발국팀들이 주워왔던 것이었다.
1번 동굴 안쪽에서의 모습, 왼쪽 위 구멍이 원래의 것, 아래 두개는 도굴꾼들에 의해 파진 모습 그 남자로부터 모든 배후에 칸도가 있다는걸 알았다. 그러나 칸도를 찾아 나선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왜냐하면 칸도가 있는 베들레헴은 1949년 당시 요르단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베들레헴은 현재 요르단 서안지구에 속해 있지만 6일전쟁이후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이스라엘의 손안에 쥐어지게 된다.
우여곡절끝에 베들레헴에 온 사드가 칸도를 만나게 될때의 일들은 참으로 목숨을 건 일이었기도 했다. 결국 사드는 칸도의 환심을 사게 되고 드디어 칸도는 예루살렘 박물관까지 오게 된다. 물론 아직까지 동굴의 이야기는 꺼낼 생각도 못한다. 잘못하다간 칸도는 물론이고 그 엄청난 보물들이 어디론가 꼭 꼭 숨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칸도가 드디어 사드에게 자신의 가죽 지갑을 보여준다. 거기엔 손가락 크기의 무언가 적혀 있는 작은 가죽조각 몇이 들어 있었다. 칸도가 이를 팔려는 눈치를 보인다. 그리고 칸도는 다시 돌아간다. 사드는 자심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절대 실수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칸도가 돌아가자 마자 사드는 이 사실을 박물관 관장인 하딩장군에게 알린다. 며칠이 지나 칸도가 다시 사드에게 왔을때, 누굴위해 사려고 하느냐고 사드에게 묻는다, 잠시 예루살렘을 방문중인 한 영국인 교수라고 사드는 얼버부린다. 그리고 그 영국인이 나머지 모두를 다 사고자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여리고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면서 칸도는 반드시 그 영국인이 나와야 한다고 단서를 단다. 칸도가 가자 사드는 무작정 아무 영국인 하나를 우선 찾는 일이 급해진다. 물론 그 방면에 전문가같은 행세도 부려야 할 사람이었다. 다행히 박물관에 한 영국인 직원이 쑈를 하기로 하고 그들은 여리고에 있던 다 쓰러져가는 한 호텔로 향한다. 사드는 칸도에게 그 영국인 가짜 교수를 통해 요르단 돈으로 800 파운드, 약 2300 달러까지 지불하겠다고 말한다. 하딩이 사드에게 지시했던 거였다. 다 낡아빠지고 너덜너덜한 쪼가리들한테 그동안 값이 엄청나게 뛰어 오른건 이미 라디오를 통해 바로 미국에 와 있던 사무엘 감독이 자신의 두루마리를 25만달러에 팔려고 한다는 방송이 나간 뒤였다. 칸도가 갖고 온 조각들을 대충 깔아 놓으니 약 1.25m2정도 펼쳐졌다. 서로간에 흥정이 오고 갔고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온 칸도에게 사드는 결국 요르단 돈으로 200파운드를 얹어 1000 요르단 파운드를 건네준다. 무엇이 되었든지 비록 다 낡아빠지고 너덜너덜한 조각들이지만 더이상 무지한 이들 손에서 더 헤어지도록 할 수는 없었다. 뒤돌아 나가는 칸도에게 사드는 한마디 던진다. "참, 하딩씨가 안부 인사를 전하시더군요...."

수케닉 교수 한편, 1947년 11월 23일 당시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였던 수케닉 교수는 골동품 수집인이었던 아르메니아인 친구 오한(Levon Ohan)으로부터 급한 전화 한통을 받는다. 오한은 전화로는 말할 수 없지만 친구의 조언을 구한다는 급한 목소리를 남긴다. 수케닉은 급하게 친구에게 달려 가려 했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선 특별 통행증이 필요했다. 친구는 아랍진영이었고, 자신은 유대지구에 살고 있었다. 당장 통행증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둘은 다음날 아침 경계 철조망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는다.
다음 날 아침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만난 두 친구간엔 낡은 두루마리 조각 하나가 전해진다. 옛 히브리어가 양피지위에 쓰여져 있는 것을 본 수케닉은 자신의 눈을 의아해 한다. 이런 것은 평생 듣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친구 오한은 그것을 아랍 베두인들로부터 얻었으며 그런게 베들레헴에 아직 더 있다는 말도 들었다고 수케닉에게 전한다. 수케닉은 오한에게 빨리 베들레헴으로 가서 그 나머지 것들 모두를 구입하라고 급하게 전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신은 이 조각을 더 살펴보고 통행증을 구해 보겠노라고 하고 헤어진다. 이가엘 야딘 11월 27일 드디어 친구로부터 전화가 온다. 오한을 만난 수케닉은 이 모두가 진품이라는 것과 함께 당장 내일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약속한다. 그러나 당시 베들레헴으로 가려면 아랍인 버스를 타고 가야하고 유대인들에게 이는 위험 천만스런 일이었다. 수케닉의 부인이 무릎을 꿇고 말린다. 다음 날 저녁까지 발만 구르던 수케닉의 집으로 당시 이스라엘 독립운동의 무장 조직이었던 하가나 총지휘자이며 훗날 군참모총장을 역임하게 된 그의 아들 이가엘 야딘이 들어온다.이가엘 야딘은 훗날 아버지 수케닉 교수보다 더 유명한 고고학자가 되고, 그에 의해 텔 하쪼르(개역 성서엔 하솔 이라는 지명으로 나옴)와 마사다가 발굴된다. 텔아비브에 본부를 둔 하가나에서 이제 곧 예루살렘 탈환을 앞에 두고 예루살렘 사전 정찰을 나온 야딘은 아버지 서재에 들어갔다가 책상위에 펼쳐져 있는 희귀한 옛 문서 조각들을 보게 된다. 이를 본 수케닉은 아들에게 묻는다. "이가엘,... 내가 베들레헴에 갈 수 있겠니?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할텐데 말이다.. 그것도 당장 내일 아침에..... 뭐라고 말 좀 해보아라"


쿰란 그 두번째 이야기 쿰란 두루마리를 얻기 까지의 우여곡절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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