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계명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1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04문] 제1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1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 알고 인정하는 것과;1) 따라서 그에게 예배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되,2) 그를 생각하고,3) 묵상하고,4) 기억하고,5) 높이 여기고,6) 공경하고,7) 찬양하고,8) 선택하고,9) 사랑하고,10) 사모하고,11) 경외하고;12) 그를 믿고;13) 그를 의지하고,14) 소망하고,15) 기뻐하고,16) 즐거워하고;17) 그를 위하여 열심을 품고;18) 그의 이름을 부르고, 모든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19) 전인적(全人的)으로 그에게 모든 순종과 복종을 드리고;20)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조심하고,21) 무슨 일에든지 그가 노하실 때에는 슬퍼하고;22) 겸손히 그와 동행함으로써 하는 것입니다.23)
(1) 대상 28:9; 신 26:7; 사 43:10; 렘 14:22. (2) 시 95:6, 7; 마 4:10; 시 29:2. (3) 말 3:16. (4) 시 63:6. (5) 전 12:1. (6) 시 71:19. (7) 말 1:6. (8) 사 45:23. (9) 수 24:15, 22. (10) 신 6:5. (11) 시 73:25. (12) 사 8:13. (13) 출 14:31. (14) 사 26:4. (15) 시 130:7. (16) 시 37:4. (17) 시 32:11. (18) 롬 12:11; 민 25:11. (19) 빌 4:6. (20) 렘 7:23; 롬 12:1; 약 4:7. (21) 요일 3:22. (22) 렘 31:18; 시 119:136. (23) 미 6:8.
[105문] 제1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1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모시지 않는 무신론;1) 하나 이상의 신들이나, 혹은 참 하나님과 더불어 혹은 대신하여 어떤 신을 두거나 예배하는 우상숭배;2) 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우리 하나님으로 모시고 고백하지 않는 것;3) 이 계명에서 요구된 그에게 합당한 무엇을 빠뜨리거나 소홀히 하는 것;4) 그에 대한 무시,5) 잊어버림,6) 오해들,7) 잘못된 견해들,8) 합당치 않고 악한 생각들;9) 그의 은밀한 일들에 대한 대담하고 호기심을 가진 탐구;10) 하나님께 대한 모든 불경(不敬),11) 미움;12) 자기 사랑,13) 자기 추구,14) 그리고 그 밖에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나 감정을 과도하고 무절제하게 두며 그것들로 하여금 그를 떠나게 하는 모든 것;15) 헛된 경박한 믿음,16) 불신앙,17) 이단,18) 그릇된 믿음,19) 불신,20) 절망,21) 고칠 수 없음,22) 심판들 아래서의 무감각,23) 마음의 완고함,24) 교만,25) 뻔뻔스러움,26) 육신적 안심,27)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28) 불법적 수단을 사용함과29) 불법적 수단을 의지하는 것;30) 육신적 기쁨들과 즐거움들;31) 부패하고 맹목적이며 무분별한 열심;32) 하나님의 일들에 있어서 미지근함과33) 죽어 있음;34) 하나님에게서 멀어짐과 배교(背敎);35) 성도들이나 천사들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들에게 기도하거나 어떤 종교적 예배를 드리는 것;36) 마귀와의 모든 약속들과 의논,37) 그리고 그의 제안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38) 사람들을 우리의 신앙과 양심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39) 하나님과 그의 명령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것;40) 그의 영을 대적하고 근심시키는 것,41) 그의 처분들에 대해 불만하고 조급한 것, 그가 우리에게 내리신 재앙들에 대해 어리석게 그를 비난하는 것;42) 그리고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선에 대한 칭찬을 운명이나43) 우상들이나44) 우리 자신이나45)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돌리는 것입니다.46)
(1) 시 14:1; 엡 2:12. (2) 렘 2:27, 28; 살전 1:9. (3) 시 81:11. (4) 사 43:22-24. (5) 렘 4:22; 호 4:1, 6. (6) 시 50:22; 렘 2:32. (7) 행 17:23, 29. (8) 사 40:18. (9) 시 50:21. (10) 신 29:29. (11) 딛 1:16; 히 12:16. (12) 롬 1:30. (13) 딤후 3:2. (14) 빌 2:21. (15) 요일 2:15, 16; 삼상 2:29; 골 3:2, 5. (16) 요일 4:1. (17) 히 3:12. (18) 갈 5:20; 딛 3:10. (19) 행 26:9. (20) 시 78:22. (21) 창 4:13. (22) 렘 5:3. (23) 사 42:25. (24) 롬 2:5. (25) 렘 13:15. (26) 시 10:13. (27) 습 1:12. (28) 마 4:7. (29) 롬 3:8. (30) 렘 17:5. (31) 딤후 3:4. (32) 갈 4:17; 요 16:2; 롬 10:2; 눅 9:54, 55. (33) 계 3:16. (34) 계 3:1. (35) 겔 14:5; 사 1:4, 5. (36) 롬 10:13, 14; 호 4:12; 행 10:25, 26; 계 19:10; 마 4:10; 골 2:18; 롬 1:25. (37) 레 20:6; 삼상 28:7, 11; 대상 10:13, 14. (38) 행 5:3. (39) 고후 1:24; 마 23:9. (40) 신 32:15; 삼하 12:9; 잠 13:13. (41) 행 7:51; 엡 4:30. (42) 시 73:2, 3, 13-15, 22; 욥 1:22. (43) 삼상 6:7-9. (44) 단 5:23. (45) 신 8:17; 단 4:30. (46) 합 1:16.
[106문] 제1계명의 '나 외에는'라는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특히 어떤 가르침을 받습니까?
[답] 제1계명의 '나 외에는' 혹은 '내 앞에서'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모든 것들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다른 신을 두는 죄를 특별히 주목하시고 대단히 불쾌히 여기신다는 것과; 따라서 그것이 그 죄를 단념시키는, 그리고 그것을 지극히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일이 되게 하는 근거가 되고(겔 8:5, 6; 시 44: 20, 21), 또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그를 섬기면서 하는 무슨 일이든지 그의 앞에서처럼 하도록 설득하는 근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대상 28:9).
공예배
구원받은 성도들이 단체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공예배는 성도들의 기본적인 의무이다. 공예배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공예배가 성도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은 단지 부차적일 뿐이다. 찬송과 기도도 그러하다. 우리는 예배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께 단체적 경배를 드리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예배의 의식은 회중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시 설교에서까지도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하고, 그 다음에 우리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여야 한다.
공예배의 요소들은 찬송, 기도, 설교 혹은 강론, 헌금 등이다. 고린도전서 14: 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고린도전서 16:1, 2,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 이익)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빌립.보서 4:18, "에바브로디도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공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는 설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단순히 예배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악을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전도서 5: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사무엘상 15:22, 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누가복음 10:41, 42,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러나 한가지가 필요하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배의 바른 방식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요 제사장이시다. 그를 통해서만 죄인이 구원을 받고, 그를 통해서만 성도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며 예배할 수 있다. 에베소서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의를 힘입지 않고서 드려지는 예배는 다 인본주의요, 윤리 종교에 불과하다.
둘째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져야 한다.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spirit 영, 심령, 혹은 성령)과 진정(truth 진리 혹은 진심)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신약 시대의 예배는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형식에 구속되지 않고,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으며 어떤 외형적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인간의 부패성은 종교를 형식화, 의식화(儀式化) 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는 그러한 잘못을 경계해야 한다.
신약 아래서의 공예배는 구약 시대의 성전 제사의 대치물이 아니다. 구약 시대의 성전 제사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예표이며 또한 성도들의 신앙 생활의 상징이었다. 비록 넓은 의미에서 공예배도 하나의 제사이지만, 구약 제사와 같이 예배만이 제사라는 관념은 비성경적이다.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제사이며 그런 의미에서 예배도 제사일 뿐이다. 로마서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히브리서 13:15, 16,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찬송
찬송이란 하나님을 높이어 노래하는 것, 곧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속성들과 그가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높이어 노래하는 것이다. 찬송가 19장, "내 영혼아 찬양하라, 주님 앞에 엎드려; 구속하신 넓은 은혜 높이 찬양하여라." 우리 찬송가 책에서 직접 하나님을 높이어 찬송하는 가사들은 55장 이전에 '찬양과 경배'라는 주제의 가사들과 73장부터 203장까지의 가사들 중의 다수이다.
성도의 노래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찬송하는 것뿐 아니라, '영적인 노래들'도 있다.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의 기도들과 간증들, 그리고 위로와 격려와 권면의 말들이 거기에 속한다. 찬송가 책의 많은 노래들은 이런 부류의 것이다. 예를 들어,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보혈과 신으로 거듭나니." 278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부르네. 내 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란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이렇게 보면, 찬송가 책 이름은 '찬송가'라고 하기보다는 '찬송들과 영적 노래들'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성도들의 찬송들과 영적인 노래들은 서로에게 영적 교훈과 유익을 준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 말씀을 원문대로 번역해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며 모든 지혜로,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들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마음에 감사함으로 주께 찬양하라"이다. 이것은 찬송들과 영적 노래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회중에게 교훈을 주는 의미도 있음을 증거한다. 신명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노래를 가르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깨우치시기 위함이었다. 찬송과 영적 노래에는 이렇게 성도에게 교훈과 유익을 주는 목적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찬송해야 하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므로 우리는 그를 찬송해야 한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의 이름과 그 영광을, 그의 지혜와 그의 능력의 무한하심을, 그의 선하심과 그의 인자하심의 풍성하심을 마땅히 찬송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4:10, 11,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므로 우리는 그를 찬양해야 한다. 시편 96: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여기에 있다. 에베소서 1:6, 12, 14,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우리의 죄와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해야 한다. 사실 구원의 경험과 지식과 감격이 없는 자는 하나님과 주 예수께 진정으로 찬송을 드릴 수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그를 높이고 자랑하고 찬송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5:9,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 . .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7:9, 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14:1, 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 . .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14만 4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우리는 어떻게 찬송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바른 가사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세상 음악은 단지 육신적 감정과 갈망을 토로하는 것이지만, 성도의 찬송과 영적 노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간증하고 감사하고 고백하며 간구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 가사나 찬송이 될 수 없다. 찬송에 있어서 가사는 곡보다 더 중요하다. 따라서 찬송가책의 찬송과 노래들이 다 똑같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가사의 내용에 따라 더 가치 있는 것도 있고 덜 가치 있는 것도 있다.
우선, 찬송의 가사는 복음 진리에 일치해야 한다. 찬송의 가사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가사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우리의 죄와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가사이어야 한다. 속죄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며 진수이므로 속죄의 찬송들은 가장 귀한 찬송들이다(예를 들어, 28장, 145장, 147장, 186장, 188장, 189장, 196장, 200장, 210장, 403장 등).
뿐만 아니라, 찬송 가사는 또한 성경의 교리 체계에도 일치해야 한다. 성경의 교리 체계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어떤 노래들은 찬송이나 영적인 노래가 되기에 부적합하다(예를 들어,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272장, "인류는 하나되게 지음 받은 한 가족"). 자유주의 교단들과의 연합 활동은 이런 오류의 포용을 초래하였다. 신성한 찬송가 책 안에 찬송답지 않은 가사들이 포함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근심시키거나 노엽게 할 일이다.
우리가 쓰는 통일찬송가는 한국교회의 영적인 퇴보의 산물이다. 한국 교회가 여러 해 동안 썼던 새찬송가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1959년 예장 총회가 WCC를 탈퇴하고 에규메니칼 운동 반대를 결의한 후 그 때까지의 '합동찬송가' 출판 사업도 에큐메니칼 계획의 하나라는 것을 선언하고 그와 인연을 끊음과 동시에 . . . . 이것은 영구히 한국 기독교계 보수 진영 전체의 찬송가책이 되기를 기원하고 끝이는 바이다." 이것이 바른 정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은 이런 정신에서 퇴보하였다.
이런 문제뿐 아니라, 또한 성령에 대한 어떤 찬송들은 성령의 오심을 간구함에 있어서 성경적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된다(예를 들어, 172장, "빈들의 마른 풀같이." 173장,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177장, "성령이여 강림하사").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이미 오셨고 그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표현의 가사는 옳지 않다. 우리는 성령의 오심을 간구할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속에 오신 성령께서 우리의 인격 전체를 주장하시고 감동하시고 인도하시기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곡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시편 96: 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행위이다.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러므로 예배와 찬송은 가장 좋은 방식으로 드려져야 한다. 빌립보서 1:10,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 음악의 아름다움은 질서와 조화와 안정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정상적 화음(도미솔, 도파라, 시레솔)과 정상적 박자(센박과 여린박의 순서)와 적당한 소리세기와 빠르기에서 나온다. 불협화음이나 너무 빈번한 싱코페이션의 사용, 그리고 과도한 소리세기와 빠르기는 질서와 조화와 안정성을 깨뜨리고 결국 음악의 아름다움을 깨뜨린다. 음악의 조화와 안정성을 저버린 현대음악은 인간의 육신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음악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으로서는 적절치 않다. 오락적인 음악은 우상숭배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다(출 32:6, 19).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과 영적 노래에 있어서 얼마큼 세속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지 말고 가능한 한 세속적 풍조를 배격하고 가장 경건하고 아름다운 곡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세상 음악은 인간의 육신을 만족시키는 것이지만, 성도의 찬송과 영적 노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에베소서 5:19,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도, 공교한 악기 연주도 진실한 믿음과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의 아름다운 목소리나 악기 소리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나 악기 연주를 원하신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이다(히 13:15). 그러므로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원하신다. 때때로 외적으로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진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감동도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찬송은 성도의 영적 생활의 표현이므로 우리는 진실한 속죄 신앙을 가지고 늘 말씀과 기도로 은혜 충만함을 누리는 성도에게서 은혜의 찬송을 기대할 수 있다. 난 지 몇 개월이 안 되어 시력을 잃어버렸던 파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가 평생 약 8천 개의 은혜로운 찬송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를 통해 성경을 많이 배웠고 주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늘 보는 첫번째 얼굴이 나의 구주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눈이 멀어 그를 더 잘 찬송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만일 시력이 있었다면 나는 결코 나의 찬송시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는 그가 쓴 찬송시가 많이 있다.
마리아 숭배
천주교회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평범한 인간 이상으로 높이고 숭배한다. 천주교회는 우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승천을 주장한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선언하였고, 1950년 피우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하였다. 제2 바티칸 회의도 똑같이 선언하기를, "마침내 원죄의 모든 더러움 없이 보존된 그 순결한 동정녀는 . . . 그의 지상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리움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한, 천주교회는 신도들에게 마리아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카톨릭 교리서에 보면,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에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각별한 공경과 기도를 드리고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도와주시기를 청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부당한 많은 칭호들을 돌린다. 제2 바티칸 회의는 선언하기를, "[마리아는]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리움을 받았고 주님에 의해 만물 위의 여왕으로 존귀케 되었다"고 했다(VIII. 59). 제2 바티칸 회의는 또 선언하기를, "하늘로 올리움을 받은 후 그[마리아]는 이 구원하는 직책을 버리지 않으셨고 여러 가지 중보사역에 의해 계속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선물들을 가져다 주신다. . . . 그러므로 그 복된 동정녀에게 우리는 교회에서 변호자[보혜사], 돕는 자, 은혜 베푸는 자, 그리고 중보자의 명칭들로 빈다"고 하였다(VIII. 62).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기도해야 하며,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신적 경배와 기도를 올려서는 안 된다(출 20: 3; 요 14: 6; 행 4:12; 딤전 2:5). 마리아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에 불과하다. 누가복음 1:38, "마리아가 가로되 [천사에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우리는 성경에서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높임을 볼 수 없다. 무리 중 한 사람이 '당신을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라고 예수께 말하였을 때, 그는 말씀하시기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하셨다(눅 11:27-28). 또 그의 모친과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그의 모친을 다른 제자들보다 달리 특별히 높이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46).
그러므로 천주교회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 대하여 신적 명칭과 속성을 돌리고 신적 영광을 돌리는 것, 특히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보혜사, 중보자, 천국의 문, 구원의 길, 천상 천하의 어머니와 여왕 등으로 부르는 행위는 확실히 비성경적이고 우상숭배적이다.
현대적 우상: 돈, 지식, 인간, 쾌락
마리아상이나 불상 같은 우상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과학이나 돈이나 육신의 쾌락이나 인간 자신 등이 현대적 우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스포츠나 영화나 성적 즐거움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 골로새서 3:5,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사도 바울은 말세에 이런 풍조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적으로 경고하였었다. 디모데후서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 . .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리는 이런 현대적 우상들을 경계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물질만능주의의 풍조를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제사, 차례, 조상숭배
우리 나라의 추석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명절이 되고 있다. 제사와 차례는 조상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행해지지만 실상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사하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믿음이 약해서 제사에 동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사람이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제사한다고 그들의 영이 와서 음식을 먹거나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들의 영은 돌아와 제삿상의 대접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제사나 차례로는 결코 죽은 조상들을 위할 수 없다. 실상, 참된 효도는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사람이 제사를 드리면 귀신들이 기뻐하며 영광을 받는다. 고린도전서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제사나 차례는 귀신에게 하는 행위요 귀신과 교제하는 행위이다. 성도는 귀신을 섬기거나 귀신과 교제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제사나 차례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는 것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귀신을 섬기거나 귀신과 교제하는 것을 노여워하신다. 그러므로 친지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그 때 사람들의 마음은 상하지 않게 되겠지만, 하나님은 심히 노여워하신다. 하나님께서 노하실 때 그것이 사람에게 무슨 복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제사는 사람에게 복이 아니고 화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선친들이나 사랑하는 이들의 묘에 가서 절하거나 묘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묘지를 둘러보고 풀을 자르고 깨끗하게 돌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 명절을 당해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교제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거나 음식을 같이 먹는 것도 좋은 일이다.
우상 제물 문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우상 제물에 대해 증거하면서 몇 가지 점을 강조하였다.
첫째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우상은 어떤 신적 존재, 어떤 초인간적 존재가 결코 아니다. 세상에 오직 우리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둘째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의 생각을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으면 양심이 더러워진다.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다는 것은 우상을 어떤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우상숭배이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헛되고 거짓된 사상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 우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약한 형제를 범죄케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했다(고전 8:9). '자유함'이라는 원어(엑수시아)는 '힘, 권리'라는 뜻이다.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먹을 자유와 권리가 성도에게 있을지라도, 그 행위가 약한 자들에게 거리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으로 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약한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으므로 그를 넘어지게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타종교인들에 대한 태도
세속 사회는 종교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다원화 사회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인들에 대해 사랑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타종교인들의 사상이 잘못된 것이지만, 실상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모든 사람의 사상이 그러하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이 다 어두움과 무지 아래, 허무 아래,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그들은 우리가 전도하고 구원해야 할 대상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움이나 정죄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며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는 이방 종교들에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종교 간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더크 멀더는 "당신은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느끼십니까?"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물론이죠, 물론이죠"라고 대답하였다 WCC의 타종교들과 이념들과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WCC를 통해 출판한 성경과 타종교인들이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종교적 다원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방 종교의 신들은 참 신이 아니다(출 20:3; 신 4:39; 시 96:5; 사 43:10; 45:6). 이방 종교들은 헛되고 마귀적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엡 2:2, 3). 여기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지 않는 유대교인들을 향해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24). 유대교인들이 그러하다면 그 외의 다른 이방 종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제2계명
출애굽기 20:4-6,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2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08문] 제2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2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서 제정하신 모든 종교적 예배와 규례들을 받아들이고 준행하고 순수하고 온전하게 지키는 것;1)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와 감사;2) 말씀 읽는 것과 전파하는 것과 듣는 것;3) 성례들을 거행하고 받는 것;4) 교회 정치와 권징;5) 교회의 목회와 유지;6) 종교적 금식;7)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8) 그리고 그에게 서원하는 것;9) 또한 모든 거짓된 예배를 부인하고 미워하며 반대하는 것;10) 그리고 각자의 지위와 부르심에 따라서 그것과 모든 우상숭배의 기념물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11)
(1) 신 32:46, 47; 마 28:20; 행 2:42; 딤전 6:13, 14. (2) 빌 4:6; 엡 5:20. (3) 신 17:18-19; 행 15:21; 딤후 4:2; 약 1:21, 22; 행 10:33. (4) 마 28:19; 고전 11:23- 30. (5) 마 18:15-17; 마 16:19; 고전 5장; 고전 12:28. (6) 엡 4:11, 12; 딤전 5:17, 18; 고전 9:7-15. (7) 욜 2:12, 13; 고전 7:5. (8) 신 6:13. (9) 시 76:11. (10) 행 17: 16, 17; 시 16:4. (11) 신 7:5; 사 30:22.
[109문] 제2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2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1) 의논하고,2) 명령하고,3) 사용하고,4) 어떤 모양으로든지 승인하는 모든 것;5) 하나님 즉 삼위의 전체든지 그 중 어느 하나든지 간에, 내적으로 우리 마음으로나 혹은 외적으로 어떤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나 표현하는 것;6) 그것을 경배하거나,7) 혹은 그것 안에서나 그것에 의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것;8) 거짓된 신에 대한 모든 표현과,9) 그것들에 대한 모든 경배나 그것들에 속하는 섬김,10) 우리 자신에게서 발명되고 채택되었든지,11) 혹은 비록 고대성(古代性),12) 관습,13) 헌신,14) 선의(善意), 혹은 다른 어떤 구실의 이름 아래서라도15)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전통에 의해서 받은 것이든지 간에,16)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부패시키거나17) 그것에 더하거나 그것에서 빼는18) 모든 미신적 고안물들;19) 성직 매매;20) 신성 모독;21)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와 규례들에 대한 모든 태만과22) 경멸과23) 방해와24) 반대입니다.25)
(1) 민 15:39. (2) 신 13:6-8. (3) 호 5:11; 미 6:16. (4) 왕상 11:33; 12:33. (5) 신 12:30-32. (6) 신 4:15-19; 행 17:29; 롬 1:21-23, 25. (7) 단 3:18; 갈 4:8. (8) 출 32:5. (9) 출 32:8. (10) 왕상 18:26, 28; 사 65:11. (11) 신 4:2. (12) 벧전 1:18. (13) 렘 44:17. (14) 사 65:3-5; 갈 1:13, 14. (15) 삼상 13:11, 12; 삼상 15:21. (16) 마 15:9. (17) 말 1:7, 8, 14. (18) 신 4:2. (19) 행 17:22; 골 2:21-23. (20) 행 8:18. (21) 롬 2:22; 말 3:8. (22) 출 4:24-26. (23) 마 22:5; 말 1:7. (24) 마 23:13. (25) 행 13:44, 45; 살전 2:15.
[110문] 제2계명을 더 강화하려고 거기에 부가된 이유들은 무엇입니까?
[답]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신 말씀 속에 담긴, 제이계명을 더 강조하기 위해 첨가된 이유들은;1)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에 대한 정당하심 외에,2) 자신의 예배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심과,3) 영적 간음으로 여기시는 모든 거짓된 예배에 대한 그의 보복적 분노;4) 이 계명을 어긴 자들을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로 여기시고 그들에게 여러 세대에 이르도록 벌하시겠다고 위협하시는 것과;5) 그것을 준행하는 자들을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로 여기시고 그들에게 많은 세대들에 이르도록 긍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6)
(1) 출 20:5, 6. (2) 시 45:11; 계 15:3, 4. (3) 출 34:13, 14. (4) 고전 10:20-22; 렘 7:18-20; 겔 16:26, 27; 신 32:16-20. (5) 호 2:2-4. (6) 신 5:29.
열린 예배
요즈음 일부 교회들에서는 '열린 예배'라고 하여 교회의 전통적 예배모범을 깨뜨리고 예배 시간에 멀티비젼, 드라마, 무용, 세속적 형식의 복음성가와 밴드를 도입하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교회들은 '문화학교'를 개설하여 영어 회화, 꽃꽂이, 바이올린 등을 가르친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일찌기 자유주의적 교회들에서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복음주의적이라고 하는 교회들에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영성'이 있는 활동이라고 선전된다. 또 이런 류의 교회들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청중들을 모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대형교회가 목회의 성공이라고 인식하는 대중의 평가 방식에 이끌리어, 많은 목사들은 '여하튼 교회가 수적으로 커지고 봐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
열린 예배는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에 의해 처음 구상된 예배로서 구도자들(seekers)을 위해 밴드와 현대음악, 멀티미디어와 드라마 등을 사용한 예배이다. 1988년 하이벨스 목사는 대예배의 하나로 토요예배를 추가하여 드리기 시작하였고 현재 그의 교회는 똑같은 형식으로 토요일과 주일 각각 두차례씩 4번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새들백교회, 월드하비스트교회, 갈보리 채플, 한국의 온누리교회, 사랑의 교회, 소망교회, 만나교회 등이 이런 예배를 드린다. 열린 예배의 특징은 시청각적 효과와 축제적 분위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는 기독교 2천 년 역사에 일찌기 없었던, 지금까지의 전통적 예배 의식과는 전연 판이한, 새로운 예배 형태로서 이 시대의 세속적 문화와 표현 방법으로 예배 형태를 바꾼 타락한 예배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죠지는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열린 예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들을 다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이들은 교회의 외형적 구조 변경을 강조한다. 강대상을 큰 강대상 대신 작은 이동식 탁자로 대치한다. 의자는 등받침이 없는 것을 놓고 거기에 걸터앉는다. 강단을 무대로 전환하여 노래나 춤이나 연극을 할 수 있도록 요란스런 조명 세트를 장치한다. 조화 또는 생화로 강대상 좌우를 가득채운다. 대형 자막 또는 전광판을 설치한다. 고도의 방송용 음향 장비를 설치한다.
에드 답손은 열린 예배가 형식에 매이지 말 것, 현대적일 것, 강요하지 말 것, 편안하게 해줄 것 등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형식에 매이지 않기 위해 목사나 안내 위원이나 성가대원은 모두 청바지나 또는 가벼운 옷들을 입으며, 현대적이기 위해 전자 기타, 드럼들, 심벌즈, 키보드 등을 사용하여 기독교적 록 음악을 연주한다. 또 강요하지 않기 위해 공개적으로 초청하거나 앞으로 나오도록 하는 부담을 주지 않는다. 또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강대상 주변을 재단장하여 교회 강단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
릭 워런은 1998년 한 세미나에서 전통적 교회를 극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로 변형시키려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1) 현대적 스타일의, 비(非)위협적 '구도자(求道者) 집회'가 전통적 일요일 예배를 대체해야 한다. (2) 복장은 평상복이어야 한다. (3)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4) 설교는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똑같이, 종종 심리학과 격려적인 성경본문을 섞는 설교 후에, 자신들에 대해 좀더 기분 좋게 생각할 수 있도록 오직 긍정적인 내용이어야 한다. (5) 교회의 사역들은 대중의 필요들을 충족시키도록, 우울증, 무절제한 식사, 불임(不姙), 동성애자들의 가족이나 친구, 낙태 후의 일, 별거(別居) 등을 위한 후원 그룹들을 가지고 준비되어야 한다. (6) 교리적 교훈은 일요일들에 교회 전체에게 주지 말고, 예배 시간과 별도로 소그룹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한다. (7) 실용주의적(實用主義的) 타협의 정신이 우세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인 에큐메니칼 '구도자' 교회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편안하게 하고 즐겁게 할지는 모르나, 그것들은 비성경적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
.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들은 찬송 대신 현대 기독교 음악(CCM) 즉 크리스챤 록 음악을 부른다. 새들백 커뮤니티 교회의 릭 워런은 크리스챤 록 음악을 새 노래라고 말하며 새 노래를 부르라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음악의 가사들이 더 근래의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악의 스타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날마다 듣는 것이어야 한다." 새들백 교회의 음향 시설, 밴드, 노래하는 이들과 연주 등의 오락 구성물은 어떤 세속적 록 연주회의 것과도 경쟁할 만하다. 워런은 교회가 해야 할 첫번째 일들 중의 하나가 오르간을 밴드로 대체하는 것이며, 교회 찬양대는 독창 연주자를 배경 음악으로 후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말하기를, 몰아대는 비트를 가진 큰 소리의, 쉰 목소리의 음악이 그의 회중들이 듣는 종류의 음악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주말 집회 때 정말, 정말 소리가 크다. . . . 나는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 자 그 이유는, 어린아이 같은 대중들은 음악을 느끼기를 원하지, 단지 그것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적 음악의 사용을 주장하는 것을 우상숭배의 죄와 동일시 하였다.
릭 워런은 말하기를, 자기 교회가 현대 팝송과 록 음악을 채택한 것은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우리 교인의 96%가 성인 현대 음악을 듣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새들백 교회에서 우리가 사용하기로 선택한 주요 음악 스타일이다," "우리는 열린 예배에서 찬송은 더 이상 부르지 않기로 전략적 결정을 세웠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교회에 전도의 대상으로 정해준 종류의 사람들에게 맞는 음악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들의 다수는 설교의 내용이 빈약하고 설교는 예화, 간증, 재담,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들로 가득찬다. 하나님, 죄, 심판, 회개, 예수님의 속죄의 피, 믿음, 구원, 지옥 등의 근본 교리들이나 거룩함, 고난, 인내, 영적 싸움 등이 강조되지 않는다. 설교는 때때로 연극으로 대치된다.
그러나 열린 예배와 이런 류의 목회는 심히 인위적이다. 우선, 정말 '열린 예배'가 오늘 시대에 바람직한 것이라면, 먼저 기도와 성경 연구와 신중한 토론을 통해 목사와 장로들이 임직 서약 때 하나님 앞에서 수락했던 '예배 모범'을 고쳐야 할 것이다. 어떻게 목사들이 신앙 양심의 거리낌 없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으로 수락했던 예배 모범과 역행하는 예배 형식을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는가?
열린 예배의 문제점은 (1) 예배가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지기보다는 인간 중심으로 드려지기 쉽고 (2) 경건함보다 흥미 위주가 되기 쉬우며 (3) 설교보다 의식 위주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엄숙하고 질서 있게 행해지고 예배 음악은 아름답고 안정되게 연주되는 것이 합당하다. 또 성경은 분명히 예배의 순서가 찬송과 기도와 설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보이고 있다. 시편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고린도전서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빌립보서 1:9, 10,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고린도전서 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교회의 문화적 행사들도 성경 교훈들과 초대 교회의 모범에 맞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본연의 임무와 사명이 있다. 그것은 예배와 영적 성장과 전도의 일이다. 특히 전도는 예수님 자신의 사명이었고 그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일이었다. 초대 교회는 이 임무와 사명에 충실하였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는 오직 이 임무와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성경은 개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만 정확무오한 법칙이 아니고 목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인간적 생각과 지혜로 예배드리거나 교회를 운영하지 말고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예배드리고 목회해야 할 것이다. 심히 혼란스런 오늘날의 교회 현실 속에서도,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지시하는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우리 모두는 성경의 교훈대로 목회하고 교회를 운영해야 한다.
현대 기독교 음악(Contemporary Christian Music)
우리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음악의 급속한 변화를 보고 있다. 이전에 술집이나 댄스 홀에서 들을 수 있었던 종류의 음악들이 교회 안에서 연주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방송국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들, 기독교 서점들에서 파는 찬송 테이프들 가운데 그런 것들이 적지 않다. 교회 음악들이 세속 음악과 매우 비슷해졌다. 기도원들에서 연주되는 밴드나 전도 집회 시 세우는 밴드들은 완전히 세상적인 기분이 든다. 심지어 신학교들에서도 그런 류의 밴드가 연주되고 그런 류의 노래들이 불리워지고 있다. 이러한 음악의 변화는 우리 주변에 이미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그 증거를 수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지만, 최근에 보도된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보자.
죤 비새그노 박사의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제일침례교회(남침례교단)는 그 교회의 솔리드 록 카페에서 1994년 행사로 엘비스 대회와 비틀즈 음악 연주를 가졌다. R. L. 하이머즈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지 이 저녁 예배가 완전히 은사주의적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 . . 안내 위원들은 귀걸이를 하고 짧은 바지와 모자를 쓴 남자들이었다. . . . 우리는 나이트 클럽이나 록 컨서트나 마약 소굴에 들어왔을 때 느꼈을 것처럼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 . . [그러나] 그 교회는 남침례교단 안에서 '보수적' 교회들 중의 하나라고 간주된다."
미국 남침례교단의 달라스 제일침례교회는 경건한 W. A. 크리스웰 목사가 원로목사로 있었는데, 그 교회에서 2002년 7월 25일 밤 하드코어-어돈 연주회에서 청년들은 떠들석하게 춤을 추었다. 그 지역 신문은 보도하기를, "떠들석한 춤과 천둥 같은 기타들과 크리스챤의 경건으로 어울러진 연주회로 인해 그 교회의 부속건물인 장엄한 스펄젼 해리스 빌딩은 흔들린 것 같았다"고 하였다.
미국 남침례교단에서는 2000년 신년 전야제가 '유스링크 2000'의 일곱 지역들에서 삼일 밤, 이틀 낮 밀레니엄 축제로 치루어졌었다. 네 개의 남침례교 기관들에서 후원한 이 행사는 남침례교 역사상 가장 큰 청년 모임이었다. 그 모임은 4만 6천 명 이상의 남침례교 청년들을 모았고 그들은 미국 내에서 알려진 '기독교' 록 밴드들에 의해 귀가 찢어지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찬양과 예배 음악을 즐겼고 약 새벽 2시까지 웃으며 노래하며 소리치며 춤추었다고 한다.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다수는 록 음악이다. 록 음악은 1950년대에 생긴 것으로서 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60년대에 비틀즈로부터 80년대 마이클 잭슨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음악 형태를 가리킨다. 록(rock)이라는 말은 록컨롤(rock and roll)의 줄인 말이다. 이 말은 미국의 방송 음악 진행자인 알란 후리드(Aland Freed)가 처음 사용했는데 성적, 육체적 움직임을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시카고 대학의 알란 블룸 교수는 "록 음악은 성적 욕망이라는 오직 한가지에 마음을 끈다"고 말하였다.
록 음악의 한 특징은, 곡에 있어서, 드럼이나 씸벌즈나 기타를 사용한 자극적이고 반복적인 비트에 있다. 촬스 브라운은 말하기를, "아마도 록 음악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비트이다. 록 음악은 비트 때문에 다른 음악들과는 구별된다"라고 하였다. 반복적인 비트는 사람의 감정을 강하게 몰아대고 자극한다. 록 음악의 다른 한 특징은 당김음(싱코페이션; 약약강 격)를 많이 사용하고, 불협화음(도미솔, 도화라, 시레솔 같은 화음이 아닌 것)이나 단조(短調)를 자유로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래의 질서와 사람의 감정의 안정성을 빼앗는다. 록 음악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높은 음과 시끄러운 소리로 연주하는 것이다. 대형 제트 비행기는 이륙시 대략 120데시벨(db)의 소음을 내며, 천둥소리의 최고 기록은 약 125데시벨인데, 록 콘서트에서의 고음은 대략 130-140 데시벨이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의 감정을 사로잡고 어지럽히고 흥분시키고 격화시킨다. 또한 록 음악은, 가사에 있어서, 폭력, 반항, 자살 권면, 마약, 음란, 그리고 사탄 숭배 등의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현대 기독교 음악(CCM), 크리스챤 록 음악, 혹은 록 스타일의 복음송들은 곡에 있어서 세속적 록 음악과 매우 비슷하다. 가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곡에 있어서 현대 기독교 음악은 세속 음악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의 작곡 형식은 전통적 형식과 매우 다르다. 그것은 전통적 클라식 음악이 가지는 질서와 조화, 안정성, 아름다움 등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극적이고 반복적인 비트와 리듬, 당김음을 많이 사용하고 또 불협화음과 단조를 자유로이 그리고 자주 사용한다.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 음악은 매우 육감적이다. 스펜스 박사는, 거의 모든 복음송들에 록 음악의 형식이 들어가 있으며 그것들은 대부분 은사주의자들이 만들며 주로 사람의 감상적인 체험과 느낌에 근거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소위 가스펠 록은 육신적 음악이라고 평가한다. 또 그는 "현대 기독교 음악(CCM)에 젖으면 몇 년 후에 록 음악으로 간다"고 경고한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존귀하시다. 그는 무질서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우리는 "아름답고 거룩한 것" 혹은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시 96:9)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해야 할 것이다. 성도들의 찬송과 노래는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것이므로 경건하고 질서와 안정성이 있고 조화와 아름다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성도의 노래는 세상의 것과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롬 12:2; 요일 2:15-17). 그것은 결코 세상의 노래처럼 자기만족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세상의 문화 속에는 중립적 요소들도 있으나 죄악된 요소들도 있다. 오늘날 육감적 록 음악들은 육신적 즐거움과 만족을 줄지는 모르나, 확실히 성도들의 찬송이나 노래로는 부적합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노래에 영향받은 현대 기독교 음악(CCM) 즉 크리스챤 록이나 그런 류의 복음송들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현대 복음송들의 곡들과 가사들을 검토하여 선별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옛날부터 즐겨불렀던 찬송가들을 부르도록 권장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해야 하지만, 그 노래들은 경건하고 조화롭고 안정적이고 아름다워야 한다. 우리는 음악에 있어서도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한다(빌 1:10).
제3계명
출애굽기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제3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12문] 제3계명에서 요구된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3계명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그의 칭호들, 속성들, 규례들, 말씀, 성례들, 기도, 맹세들, 서약들, 추첨들, 그의 사역들 및 그가 그것에 의해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 바 그 외의 무엇이든지, 생각과 묵상과 말과 글에 있어서 거룩함과 경외함으로, 거룩한 고백과 합당한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과 타인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3문] 제3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3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요구된 대로 사용하지 않음과; 그것을 무지하게, 헛되이, 불경하게, 속되게, 미신적으로 혹은 사악하게 언급함으로 남용함이나 그의 칭호들, 속성들, 규례들 혹은 사역들을 신성모독적으로 즉 위증함으로 사용함; 모든 죄악된 저주들, 맹세들, 서약들과 추첨들; 합법적인 경우에 우리의 맹세들과 서약들을 위반함과 불법적인 경우에 그것을 지킴이며;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대해 원망함과 불평함, 이를 호기심으로 파고들거나 잘못 적용함;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것의 어느 부분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곡해하여 속된 농담들, 호기심의 혹은 무익한 질문들, 헛된 말다툼 혹은 그릇된 교리를 지지하는 데 쓰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나 피조물들이나 하나님의 이름 아래 포함된 어떤 것이든지 진언(眞言, 주문)이나 죄악된 정욕과 행위들에 오용함이며;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와 도를 훼방하고 경멸하고 욕하거나 어떻게든지 반대함이며; 외식으로나 악한 목적으로 종교를 고백하는 것이며; 종교를 부끄러워하거나, 합당치 않고 지혜 없고 결실 없고 무례하게 행함으로써 종교에 수치거리가 되거나 종교를 배반하는 입니다.
[114문] 제3계명에 어떠한 이유들이 첨부되었습니까?
[답]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이 말씀에 나타나 있는 제3계명에 첨부된 이유들은, 그가 여호와시요 우리 하나님이시며, 그러므로 그의 이름이 우리에 의해 남용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오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특히, 비록 이 계명을 범한 많은 이들이 사람들의 비난들과 형벌들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무죄자(無罪者)로 여기고 용서해주시기는커녕 그들로 하여금 그의 의로운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합법적 맹세와 서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장은 맹세와 서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 [맹세의 의미] 합법적 맹세(oath)는 종교적 예배의 한 부분이니, 그것에서 정당한 기회에 엄숙히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을 불러 그가 주장하거나 약속하는 것을 증거하시고, 그가 맹세하는 것의 진실됨 혹은 거짓됨에 따라 그를 판단하시기를 구한다.1)
(1) 신 6:13; 마 26:63, 64; 롬 1:9; 고후 1:23; 히 6:13-18.
2. [맹세에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만이 사람이 맹세해야 할 이름이며, 맹세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되이 혹은 경솔히 맹세하는 것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죄악되며 매우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중대한 일들에서 맹세는 구약 아래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되므로, 합법적 맹세는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될 때 그러한 일들에서 행해져야 한다.
3. [맹세의 내용들] 맹세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러한 엄숙한 행위의 중대함을 마땅히 생각하고 그가 참되다고 완전히 확신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거기에서 공언해서는 안 된다. 또한 누구든지 선하고 옳은 것과, 그가 그렇다고 믿는 것과, 그가 행할 수 있고 행하기로 결심한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맹세로 자신을 구속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되었을 때 선하고 옳은 어떤 것에 관한 맹세를 거절하는 것은 죄이다.
4. [맹세의 말과 구속력] 맹세는 명백하고 일상적인 의미의 말로 해야 하고, 애매함이나 생각의 보류(保留)가 없어야 한다. 그것이 죄를 짓도록 구속할 수는 없지만, 죄악되지 않은 어떤 것에 맹세했으면 비록 사람 자신에게 해가 될지라도 이행할 의무가 있고, 비록 이단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 맹세했을지라도 그것은 깨뜨려질 수 없다.
5. [서약] 서약(誓約, vow)은 약속적 맹세와 같은 성질의 것이고 같은 종교적 조심성을 가지고 해야 하며 같은 신실성을 가지고 이행해야 한다.
6. [서약의 대상과 방법] 서약은 어떤 피조물에게 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만 해야 하고, 서약이 받아들여지도록 그것은 자원함으로, 믿음과, 의무의 양심으로, 받은 자비에 대해서나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을 것에 대한 감사의 방식으로 해야 하며, 그것에 의해 우리는 필요한 의무들에나 혹은 적절히 그것에 도움이 되는 한 다른 일들에 우리 자신들을 더 엄격히 속박한다.
7. [서약해서는 안 되는 것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에 금하신 어떤 것이나, 거기에서 명령된 어떤 의무를 방해할 것이나, 그의 능력 안에 있지 않고, 그것의 이행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의 어떤 약속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행하기로 서약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들에서 평생의 독신 생활과, 공언(公言)된 가난과, 규칙적 순종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도원 서약들은 더 높은 완전함의 수준들이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므로 그리스도인이 걸려서는 안될 미신적이며 죄악된 올무들이다.
맹세는 구약성경에 하나의 인정된 종교적 규례로 명령되어 있다.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참 하나님으로 맹세하라고 가르친다. 신명기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이사야 45:23,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맹세]하리라." 이사야 65:16,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맹세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마 26:63, 64). 또 바울도 자신의 말의 진실함을 위해 하나님께 자주 호소하였다(롬 1:9; 고후 1:23).
그러나 주 예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는가? 마태복음 5:34, 3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위의 구절에 대하여 칼빈이나 매튜 풀(Matthew Poole)은 주석하기를, 주께서 모든 종류의 맹세를 정죄하신 것이 아니고 당시 바리새인들이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자기 머리 등으로 맹세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죄가 안 된다고 한 잘못된 가르침을 반대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주께서는 당시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맹세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방식들이므로 금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라는 말이다. A. A. 핫지도 설명하기를, "그러므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은 정당한 경우들에 참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려고 의도된 것일 수 없고, 일상적 대화와 사소한 경우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려고 의도된 것이 틀림 없다"고 하였다.
제4계명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제4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16문] 제4계명에서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4계명이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지정하신 시간, 특히 칠 일 중에 하루 온종일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의 시작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 주간의 일곱째 날이었고 그 후부터는 그 첫째 날이며 세상 끝날까지 계속 그러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며1) 신약에서 주의 날[주일]이라고 불리웁니다.2)
(1) 신 5:12-14; 창 2:2, 3; 고전 16:1, 2; 행 20:7; 마 5:17, 18; 사 56:2, 4, 6, 7. (2) 계 1:10.
[117문] 안식일 혹은 주일은 어떻게 거룩하게 지켜져야 합니까?
[답] 안식일 혹은 주일은, 단지 언제나 죄악된 일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날들에 합법적인 세상적 직업들과 오락들로부터도 온종일 거룩하게 안식하며;1) (부득이함과 긍휼의 일들에 사용되는 것 외에는)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대한 공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예배에 사용하는 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여김으로써 거룩하게 지켜져야 하며;2) 이를 위하여 우리는 그 날의 의무들을 위하여 더 자유롭고 적당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고 미리 부지런히 절제있게 우리의 세상 일을 배치하고 적절히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3)
(1) 출 20:8; 출 16:25-28; 느 13:15-22; 렘 17:21, 22. (2) 마 12:1-13; 사 58:13; 눅 4:16; 행 20:7; 고전 16:1, 2; 시 92편; 사 66:23; 레 23:3. (3) 출 20:8; 눅 23:54, 56; 출 16:22, 25, 26, 29; 느 13:19.
[118문]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왜 더욱 특별히 가장들과 기타 윗사람들에게 주어집니까?
[답]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더욱 특별히 가장들과 기타 윗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까닭은, 그들 자신이 그것을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통솔 아래 모든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는지 보아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이 때때로 그들 자신의 일들로 저들을 방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1)
(1) 출 20:10; 수 24:15; 느 13:15, 17; 렘 17:20-22; 출 23:12.
[119문] 제4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4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요구된 의무들 가운데서 모든 빠뜨린 것들1)과 그것들에 대한 모든 부주의하고 소홀하고 유익되지 못한 수행과 그것들을 피곤해 하는 것;2) 그리고 게으름에 의해서와 그 자체가 죄악된 일을 행함으로써3) 그리고 우리의 세속적 일들과 오락들에 관하여 모든 불필요한 일들과 말들과 생각들에 의해서 그 날을 더럽히는 모든 것입니다.4)
(1) 겔 22:26. (2) 행 20:7, 9; 겔 33:30-32; 암 8:5; 말 1:13. (3) 겔 23:38. (4) 렘 17:24, 27; 사 58:13.
[120문] 제4계명을 더 강화시키려고 거기에 붙여진 이유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4계명을 더 강화시키려고 거기에 붙여진 이유들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일들을 위하여 칠 일 중 육 일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그 자신을 위해서는 오직 하루를 남겨두신 그 계명의 공평성으로부터,1) "제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그 날의 특별한 타당성을 강조하심으로부터,2)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제칠 일에 쉬신 하나님의 모범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날을 그의 예배를 위한 날이 되도록 거룩하게 하심으로써뿐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 복의 수단이 되도록 정하심으로써 그가 그 날에 주신 복으로부터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3)
(1) 출 20:9. (2) 출 20:10. (3) 출 20:11.
[121문] 왜 제4계명의 시작에 기억하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답] 제4계명의 시작에 기억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은1)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얻는 큰 유익 때문인데,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지키고2) 그것을 지킴으로써 다른 모든 계명들을 더 잘 지키고3) 또한 신앙의 간략한 요지인 창조와 구속(救贖)의 큰 두 가지 은택을 계속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도록 준비하는데 도움을 얻고;4) 또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그것을 매우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인데,5)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본성의 빛이 더 적지만6) 그것이 다른 때들에 합법적인 일들에 있어서 우리의 본성적 자유를 통제하기 때문이며;7) 그것이 단지 칠 일 중 한번만 오며 많은 세속적 일들이 그 사이에 와서 그것을 준비하거나 그것을 거룩하게 하도록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너무 빈번히 우리 마음을 빼앗기 때문이며;8) 또한 사탄이 그의 수단들로 그것의 영광과 심지어 그것의 기억을 지워버려 모든 불경건과 불신앙을 들여오려고 심히 노력하기 때문입니다.9)
(1) 출 20:8. (2) 출 16:23; 눅 23:54, 56; 막 15:42; 느 13:19. (3) 시 92:13, 14; 겔 20:12, 19, 20. (4) 창 2:2, 3; 시 118:22, 24; 행 4:10, 11; 계 1:10. (5) 겔 22:26. (6) 느 9:14. (7) 출 34:21. (8) 신 5:14, 15; 암 8:5. (9) 애 1:7; 렘 17:21-23; 느 13:15-22.
성수 주일(聖守主日)
구약의 안식일
오늘날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본받은 것이다. 십계명의 제4계명은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한다(출 20:8). 구약의 안식일은 어떻게 지켰는가?
첫째로, 시간은 제7일 하루 종일이었다. 출애굽기 20:9, 10,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 .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둘째로, 대상은 집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출애굽기 20:10,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셋째로,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시 제7일에 쉬셨고 그 날을 구별하여 복 주셨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넷째로, 방법은 세속적 일들을 중단하고 휴식하며 성회(聖會)로 모이며 매매(賣買)나 오락을 금하는 것이었다. 출애굽기 23:12, "너는 육 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 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출애굽기 34: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칠 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출애굽기 35: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레위기 23:3,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성회(聖會)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그의 말씀을 듣는 모임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영적 훈련과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였다. 느헤미야 13:15-22에 보면, 안식일에 노동이나 매매하는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므로 금지되었다. 이사야 58:13, 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여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다섯째로, 벌칙은 사형이었다. 출애굽기 31:14, 15,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7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민수기 15:32-3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거할 때 안식일에 나무하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다.
여섯째로, 중요성은 언약의 표이었다. 출애굽기 31:16, 17,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에스겔 20:12, 13에 지적된 이스라엘의 죄는 안식일이 언약의 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더럽힌 것이었다.
일곱째로, 예표적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안식이다. 안식일 계명은 사실상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참 안식은 하나님 안에 있다.
성수 주일(聖守主日)의 근거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참 안식을 예표하였다. 이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땅의 저주와 인생의 수고는 죄의 결과이었다(창 3: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사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참 안식을 주셨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므로 구약의 제7일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마가복음 2:28,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골로새서 2:16,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칼빈은 말하기를, "초기 교부들은 관례적으로 이 계명을 예표라고 불렀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된 한 날의 외적 준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 . 말하자면 그는 안식일의 참된 성취이시다. . .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미신적인 날들의 준수를 완전히 피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은 하나님께 대한 공적 예배의 날이라는 도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4계명의 성취는 위축된 경건 생활로가 아니고 풍성한 경건 생활로 성취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신약 성도는 구약 성도보다 더욱 자원적으로 하루 이상을 구별하여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에 주일을 공적 모임의 날로 주셨으므로, 우리는 억지로가 아니고 즐거이, 자원적으로 이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
칼빈은 비록 안식일 계명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으나 교회의 공적 모임을 위한 필요성은 오늘날도 유효하며 따라서 신약교회는 주일을 공적 모임의 날로 힘써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1618-19년 개혁교회의 정통적 도르트 대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7일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적합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묵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므로, 주일[주의 날]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하게 성별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7은 안식일에 관해 단순히 말하기를, "그것은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는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부터는 주간의 첫째날로 바뀌었으며, 성경에서 주의 날로 불리우고,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 또한 6일 간의 육체적 노동과 수고로부터의 휴식도 여전히 필요하다. 초대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서 본을 보여주었다. 사도행전 1:13-15,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 .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120명이나 되더라." 사도행전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행전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