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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신학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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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성경 연구원 홈페이지. 성경공부를 기초부터 심화하여 알 수 있는 곳. 성경에 관련된 자료 및 묵상자료, 성경공부, 질문 답변 등으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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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Tong - 돌이와맹이님의 돌이와멩이 ⊙ 저금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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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각종 꽃 상징


Acacia(아카시아)
 아카시아는 잘 살아 남는다는 이유로 영혼불멸을 상징한다.

Almond(아몬드, 감복숭아열매)
 아몬드는 신성한 승인(증표)의 상징이다. 
 (민수기 17:1-8 레위지파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나고 아몬드가 열리는 증표로 레위지파는 제사장의 지파로 하나님의 승인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성모마리아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Anemone(아네모네, 바람꽃)
  아네모네는 초기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 슬픔과 죽음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십자가 그림 안에서 자주 볼 수있다. 

Apple(사과)
  아담이 들고 있는 사과는 죄를 상징하고, 그리스도께서 들고 있는 사과는 구원을 묘사한다.

Aspen(사시나무, 포플러)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든 나무들이 슬픔 속에 절하였으나, 사시나무 만이 그의 자만심 때문에 경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시나무의 잎은 끊임없이 떨 게 되는 심판을 받았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사시나무가 십자가의 나무로 선택되었고, 그래서 그 공포 속에 사시나무는 떨게되어 멈출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Bramble(가시나무) 
 모세가 가시나무 앞에 섰을 때 불타는 떨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이에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의 상징이 되었다.
 (불은 타오르고 있었지만, 가시나무 떨기는 불에 타지 않았다. 이는 인간적 쾌락이 없는 순수한 신적 사랑의 불꽃을 상징한다.)

Bulrush(파피루스, 갈대류)
  파피루스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겸손의 상징으로 쓰인다. 그 이유는 물가에 흔하게 군락을 이루며 자라기 때문이다. 
  어린 모세의 얽힌 이야기에 근거하여(모세의 어머니는갈대상자에 아기 모세를 담아 나일강에 띄웠다-출애굽기 2장), 구원의 장소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Carnation(카이네션)
  붉은 카네이션은 사랑의 상징이고, 분홍 카네이션은 결혼의 상징이다.

Cedar(of Lebanon-레바논의 백향목) 
 백향목은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지녔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쓰인다. (아가 5:15)

Cherry(버찌, 체리)
 체리는 선한 행위로부터 나오는 달콤한(아름다운) 특성을 상징한다.

Chestnut(밤나무)
 밤나무는 순결을 상징한다. 밤나무는 가시나무에 둘려싸여 있어도 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Clover(클로버, 토끼풀)
 클로버는 삼위일체의 상징이다.

Cockle(가라지, 잡초)
 가라지는 (특별히 교회 안에) 사악한 침략을 상징한다. 이는 가라지가 밭과 곡식을 망치며 번져가기 때문이다. 
 마태 13:24-30  예수님의 가라지의 비유 

Columbine(매발톱꽃)
 매발톱꽃은 생긴 모양이 비둘기 같다고 해서 성령의 상징으로 쓰인다.
 'Columbine(매발톱꽃)'라는 이름은 라틴어 라틴어로 '콜룸바-비둘기'에서 유래하였다. 
 한줄기에서 핀 7개의 꽃은 성령의 일곱가지 선물을 상징한다.. (이사야 11:2)

Cyclamen(시클라멘)
 시클라멘은 성모 마리아에 관련되어 쓰여진다. 꽃 가운데 있는 붉은 반점은 마리아의 가슴에 담긴 슬픔과 고난을 묘사한다. 

Cypress(사이프러스 - 측백나무과의 교목)
 사이프러스는 보통 묘지에 심겨진다는 이유로 죽음을 연상케하고, 십자가의 나무로 쓰이기도 했다.

Daisy(데이지)
 데이지는 어린 예수의 순결의 상징이다.(15C 이후)

Dandelion(민들레)
 민들레는 쓴 허브 라는 이유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징한다.

Elm(느릅나무)
 느릅나무는 존엄성과 신실함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Fern(양치류, 고사리)
 고사리는 숲 속 깊은 곳에 그 아름다움을 숨긴다는 이유로, 겸손(고독한)을 묘사한다. 

Fig(무화과)
 무화과는 때때로 사과처럼 선악과로 묘사되기도한다. 또한 무화과 안에 씨가 많다는 이유로 욕망과 다산의 상징으로 시용된다.

Fir(전나무)
 전나무는 하늘을 향행 곧게 뻗쳐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선택을 묘사한다. 또한 인내를 묘사한다.
Glastonbury Thorn (글레스턴베리 가시나무) 
  글레스턴베리 가시나무(The Glastonbury Thorn)는 크리스마스 절기에 꽃이 핀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탄생을 묘사한다. 

Gourd (호리병박) 
  호리병박은 예언자 요나와 관계되었다. (요나 4장 - 하나님께서 뜨거운 태양을 박넝쿨로 막아주신 말씀) 이에 호리병박은 부활의 상징으로 쓰여진다. 
또한 호리병박이 사과와 함께 그려진 경우 악마의 해독제를 상징한다.

Grape (포도) 
  포도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특별히 주의 성체를 의미한다. 
  포도밭은 선교의 장(field)을 의미하며, 포도는 여러 선한 행위와 연관되어 묘사된다. 
  포도나무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한  15 나는 참 포도나무요...)

Holly (호랑가시나무) 
  호랑가시나무는 보통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시면류관을 상징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한다.
Hyacinth (히아신스) 
  하이신스는 사려깊음과 마음의 평화를 상징한다. 

Hyssop (우슬초, 히솝) 
  우슬초는 구약 이스라엘 제사때 정결예식 때 사용되었다. 이에 참회와 겸손의 상징이며, 세례의 상징이다.
  우슬초 묶음으로 동물의 피를 발라 정결예식을 하였다. (출애굽기 12:22)

Iris (아이리스) 
  아이리스는 백합과 함께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때로는 아이리스는 '칼의 백합(sword lily)' 로 불리며, 그리스도 고난에 의한 마리아의 슬픔을 상징한다.

Ivy (담쟁이덩굴) 
  담쟁이덩굴은 늘 푸른잎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신실함과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Jasmine (재스민) 
  제스민은 때때로 성모마리아를 묘사하는데 쓰인다. 이는 햐얀 꽃과 아름다운 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Laurel (월계수) 
  월계수는 승리와 성공을 묘사한다. 특히 시련과 유혹을 이긴 승리를 묘사한다. 이는 고대 올림픽에서 승리자에게 윌계수로 승리의 화관(월계관)을 만들어 수여하던 관습에 따른 것이다. (디모데후서 2:5)
 또한 월계수 잎이 시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원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Lemon (레몬) 
  레몬은 사랑의 정절을 상징한다.

Lily (백합) 
  백합은 순결의 상징이며, 이는 성모마리아의 제일 중요한 속성이다.

Lily of the Valley (은방울꽃) 
  은방울꽃은 이른 봄에 핀다는 이유로 보통 그리스도의 강림의 상징으로 쓰인다. 

Myrtle (은매화) 
  은매화는 사랑의 오래된 상징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방인이 그리스도에게로 개종하는 것을 상징한다.

Narcissus (수선화)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잘생긴(아름다운) 젊은이, 나르시스는 연못에 비친는 자기 얼굴에 반해 사랑하고, 그 얼굴을 껴안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고만다. 나르시스는 죽은 후 수선화로 다시 피어났다. 그런 이유로 수선화는 자기사랑(Self-Love)의 상징이다. 
  때때로 수선화는 신성한 사랑의 승리와 죽음, 이기심, 죄를 넘어선 희생의 승리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Oak (오크, 참나무) 
  오크는 이교도의 상징이 기독교에 의해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재해석된 상징이다. 또한 인내를 상징하며, 특별히 역경을 대항하는 신앙을 상징한다.

Olive (올리브) 
  올리브는 보편적으로 쓰이는 평화의 상징이다. 올리브 기름은 성령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의 상징이다.

Orange(오렌지)
 오렌지 나무와 그 꽃은 순결과 고귀함의 상징이다. 
  아주 드문 경우 에덴동산에 있는 선악을 알 게 하는 나무(선악과)로 묘사되기도 한다.

Palm (종려, 야자)
  종려가지와 잎은 승리의 상징이다.

Pansy (팬지) 
  팬지는 기억, 회상 그리고 관상(침묵)기도의 상징이다.

Peach (복숭아) 
  복숭아는 미덕과 선행의 상징이다.

Pear (배) 
  배는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상징한다.

Plane Tree (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는 기독교인의 사랑과 성품을 상징한다. 이 나무의 가지가 높게 넓게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Plantain (질경이) 
  질경이는 르네상스 미술에서 주로 구원의 길을 찾아나선 순례자("way bread" of pilgrims)들을 상징한다.

Plum (플럼, 서양자두) 
  서양자두는 신실한 성도와 독립심을 상징한다.

 

 Pomegranate (석류) 
  석류는 보통 교회를 상징한다. 한 과실 안에 많은 씨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과 풍성함을 상징하기 한다. Poppy (양귀비) 
  양귀비는 그 마취 성분 때문에 잠 또는 무관심(냉담)을 상징한다. 때때로 죽음의 잠에 빠졌던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하기도 한다.

Reed (갈대) 
  갈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한다. 이는 갈대가 수치, 치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Rose (장미) 
  하얀 장미는 순결을, 붉은 장미는 순교를, 장미 화환은 천국의 기쁨을 상징한다.

Strawberry (딸기) 
  딸기는 정의로움과 선한 행위를 상징한다.

Thistle (엉겅퀴) 
  엉겅퀴는 죄에대한 심판을 상징한다. 특히 아담과 이브의 타락(원죄)을 상징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묘사하는 상징으로도 쓰인다.

ine (포도나무 덩굴) 
  포도나무는 진리의 포도나무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또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묘사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돌보심과 섭리를 묘사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한 15장)

Violet (바이올렛) 
  바이올렛은 겸손의 상징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을 묘사하기도 한다.

Wheat (밀) 
  밀은 복음의 씨가 뿌려져 알곡이 맺어져 추수하는 것을 상징한다. (보통 포도와 함께 그려진다.) 또한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묘사한다.


Willow (버드나무) 
  버드나무는 때때로 복음의 상징으로 쓰인다. 아무리 버드나무의 가지를 잘라 버려도 버드나무는 상관 없이 잘 자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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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2 : 56
 
할례 제정
창 17:9~14
이삭의 출생
창 21:23
 
욥 의 고난과 축복
욥 1~42 장
 
에서와 야곱의 출생
창 25 : 26
 
아브라함의 죽음
창 25 : 8
 
야곱의 하란 도피
창 28 : 10
 
유다의 출생
창 29 : 35
 
요셉의 출생
창 30 : 24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
창 37 : 36
 
이삭의 죽음
창 35 : 29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됨
창 41 : 46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
창 46 : 7
 
야곱의 죽음
창 49 : 33
 
요셉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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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시대
모세의 출생
출 2 : 12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 시작
출 12 : 37
홍해 도착
출 14 : 11
만나, 메추라기 시작
출 16 : 13~14
십계명을 받다
출 20 : 3~17
성막 건축
출 40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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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아론의 죽음
신34:5, 민20:28
두 번째 인구조사
민 26 : 1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임명
민 27 : 23
이스라엘의 요단 동편 정복
민 32 : 1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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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5:10~11
만나 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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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 3 : 15~30
 
삼갈의 사역
삿 3 : 31
 
드보라와 바락의 40년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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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의 40년 사역
삿 6 ~ 8장
 
돌라와 야일의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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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입다의 6년 사역
삿 11:1~33
입산,엘론,압돈의 25년 사역
삿 12:8~15
삼손의 20년 사역
삿 13 ~ 16장
사무엘의 75년 사역
삼상 7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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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0 : 24
 
기름부음 받은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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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9 : 1~15
 
사무엘의 죽음
삼상 25 : 1
 
사울의 전장에서의 죽음
삼상 31 : 6
다윗의 왕의 등극
삼하 2 : 4
 
다윗의 통일 왕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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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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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의 예루살렘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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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1 : 1~21
 
솔로몬의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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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건축 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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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건축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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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전도서
 
솔로몬의 죽음과 왕국 분열
왕상11:43~12:20
분열왕국 年代表(B.C)
유다 왕국
북 이스라엘 왕국
통치기간
시 대 일 지
성경구절
통치기간
시 대 일 지
성경구절
931~ 913
르호보암왕
41세에 왕이되어 17년간 통치하였으나 우상숭배로 애굽의 시삭의 침략으로 성전의 모든 보물을 빼았김.
왕상14:21~31, 대하 10~ 12장
931~ 910
여로보암 왕
단과 벧엘에 우상을 세워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여로보암의 집을 심판 받게 됨.
왕상 13:1 ~14:20
913~ 911
아바얌왕
북방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부 성읍을 점령
왕상 15:1~8
910~ 909
나답 왕
나답이 악을 행하여 바아사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하며 바아사가 왕으로 오를 때 부왕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있는자는 모두 죽임
왕상 15:25~31
911~ 870
아사왕
하나님을 섬겨 우상을 제거하고 제단을 다시 세웠으나 최후에는 자만에 빠지며 선지자를 투옥시킴.
왕상 15:9~24
909~ 886
바아사 왕
나답의 부하로 있다가 모반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음
왕상 15:33~16:7
873~ 848
여호사밧왕
개혁운동과 유대인에게 율법서를 가르치며 35년간 통치함.
왕상 22:42~50
886~ 885
엘라 왕
바아사의 아들로 아르사의 집에서 술에 취해있을 때 시므리에 살해당하며 부왕시의 예언대로 시므리가 바아사의 온집의 족속을 남기지 않고 멸절 시켜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룸
왕상 16:6~14
853~ 841
여호람왕
여섯 형제를 죽이는등 악을 행하다가 병으로 죽음.
왕하 8:16~24
885
시므리 왕
7일간 왕에 있다가 악을 행하다가 군대장관 오므리의 공격을 받자 왕궁에 불을 놓고 자살함.
왕상 16:15~20
841
아하시야왕
악을 행하다가 예후의 군대에 의해 살해됨
왕하 8:25~29
885~ 874
오므리 왕
세멜에서 산을 사서 성을 건축하고 사마리아라 하여 수도로 하였으며 최고의 악을 행함
왕상 16:15~28
841~ 835
아달랴왕
아하시야의 아내로 악을 행하다가 유다국민에 의해 살해됨.
왕하 11:1~16
874~ 853
아합 왕
아합이 신전을 짖고 바알숭배를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하는 등의 우상숭배하여 하나님의 노를 격동시켜 극심한 가뭄과 엘리야 선지자의 갈멜산 대결이 벌어지는등 엘리야의 활동무대임.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 예언대로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아 죽음을 당함.
왕상
16:28 ~22:40
835~ 796
요아스왕
대제사장 여호야다로 인하여 우상을 타파하고 성전을 수리하며 매일 번제도 드렸으나 대제사장이 죽자 우상을 섬기고 꾸짖는 대제사장의 아들을 죽이는등 악을 행하다가 그의 부하들의 반란으로 죽임을 당함.
왕하
12 장
853~ 852
아하시야 왕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다가 사마리아에 있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중병에 걸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확인해보고자 엘리야 선지자에게 오십부장과 오십인을 세 번까지 보내 확인 받자 죽임을 당함.
왕상
22:40
~왕하 2:18
796~ 767
아마샤왕
유다왕국을 정리하며 에돔과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는 패해 예루살렘성이 파괴되고 왕은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후 모반으로 피살됨.
왕하 14:1~20
852~ 842
여호람 왕
바알의 주상을 제거하였으나 여전히 우상을 섬겨 악을 행함. 이 당시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선지자 계승이 이루어짐.
왕하 3:1~9:25
791~ 739
웃시야 왕
여호와를 쫓아 유다왕국을 부강케 하였으며 나라가 강해지자 교만해져 제사장의 직분을 무시하는 등의 범죄로 문둥병으로 죽음,
왕하 14:21~ 15:1~7
841~ 814
에후 왕
아합과 이세벨의 바알숭배자를 근절하며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숭배자를 살해하고 아합가에 대한 숙청작업을 하는등 하나님을 섬김
왕하 9:1~10:26
739~ 731
요담 왕
여호와 앞에 정도를 걸어 나라를 발전시켰으나 백성의 죄악을 다스리지는 못함.
왕하 15:31~38
814~ 798
여호아하스 왕
여전히 악을 행하는 여호아하스왕은 후에 아람왕에게 패함
왕하
13:1~9
731~ 715
아하스 왕
친 앗수르 정책을 추구하여 이사야 선지자의 권고를 듣지 않고 가나안의 모든 우상을 예루살렘에서 섬기며 성전의 기명을 뜯어내고 성전을 폐쇄시켜 버림.
왕하 16:11
798~ 782
요아스 왕
엘리사의 예언대로 잃었던 성들을 아람에게서 빼았고 세 번쳐서 이기며 요아스왕 앞에서 엘리사는 병으로 죽음
왕하
13:10 ~14:16
715~ 686
히스기야 왕
우상을 췌파하며 성전을 정결케하고 화목제,번제와 제사를 드리고 유월절을 지키도록하며 앗수르의 침공시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사야의 권고를 받아들여 승리함. 죽게 될 때 15년의 생명연장의 언약으로 해가 10도 뒤로 물러가는 이적을 보이심.
왕하 18:1 ~20:21
793~ 753
여로보암 왕
악을 떠나지 못하고 우상숭배를 하였으며 이스라엘땅을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하였음.
왕하 14:23~29
686~ 642
므낫세 왕
부숴 버린 신당을 다시 세워 우상을 숭배하고 반대파를 죽이며 앗수르에게 예속된나라를 만들다 하나님의 징계로 왕이 쇠사슬에 결박되고 갈고리에 꿰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감. 바벨론에서 앗수르를 섬기기로 서약하고 풀려와 회개하여 모든 우상을 제하고 여호와를 섬기도록 백성에게 명함. 이사야 사역 종결.
왕하 21:2~16
대하 33:2~10
753~ 752
스가랴 왕
왕이 악을 떠나지 아니하여 6개월만에 살룸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함
왕하
14:29
~15:12
642~ 640
아몬 왕
타락한 정치로 인하여 신하들의 반역으로 죽음.
왕하 21:19~26
752
살룸 왕
스가랴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한달만에 므나헴에게 죽임을 당함
왕하 15:10~15
640~ 609
요시야 왕
모든 우상을 제하고 성전을 수리하다 율법책을 발견하여 온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기로 서약하며 유월절을 지키는등 경건한 정치를 하였으나 애굽과의 전쟁에서 죽음을 당함. 스바냐 사역 종결, 에레미야 사역 시작
왕하 22:1 ~23:30
752~ 742
므나헴 왕
살룸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악을 행하였으며 앗수르왕의 공격시 일천 달란트의 조공을 받쳐 공격을 면함
왕하 15:14~22
609
여호아하스 왕
에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여호아하스를 제거한 후 형을 왕으로 삼고 애굽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죽음
왕하 23:31~33
742~ 740
브가히야 왕
므나헴의 아들로 왕위에 올라 악을 행하였으며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다가 부하인 베가의 반역으로 죽임을 당함.
왕하 15:22~26
609~ 597
여호야김 왕
애굽왕의 임명으로 유다의 왕이 되어 애굽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에레미야,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청종치 않고 암흑정치로 느부갓네상의 침략으로 그는 예루살렘에서 죽음. 하박국 사역 시작하며 다니엘 바벨론으로 끌려감.
왕하 23:34 ~24:7
740~ 720
베가 왕
악을 행하였으며 앗수르 왕에게 여러곳의 땅을 빼앗기며 엘라의 아들 호세아의 반역으로 죽임을 당함. 미가 사역.
왕하 15:27~31
597
여호야긴 왕
왕위에 오른지 3개월만에 바벨론으로 많은 백성들과 포로로 끌려갔으며 여호야긴은 일평생 바벨론에서 그래도 후한 대접을 받음.
왕하 24:8~16
731~ 722
베가를 죽이고 마지막의 이스라엘의 왕으로 악을 행하여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함. 호세아 사역
왕하 15:30~17:6
597~ 586
시드기야 왕
바벨론왕이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워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꾸어 통치하게 만들었으나 바벨론을 배반하여 느부갓네 살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죽이며 그의 두 눈을 뽑아 버린후 바벨론으로 잡아가 죽는날까지 옥에 가둠으로서 남 왕국 유다의 멸망. 에스겔의 예언 시작
왕하 24:17 ~25:21
年 度
시대 구분 (B.C, A.D)
시 대 일 지
성경 구절
580
바벨론 시대
다니엘의 사역
단 3:19~25
570
에스겔의 사역 종결
539
고레스의 바벨론 점령
단 5 : 30
538
고레스의 1차 귀환 조서
대하 36 : 23
537
이스라엘의 1차 귀환
스 2 :1
536
성전 재건 1차 작업 시작 및 중단
스 3:8~4:23
530
다니엘의 죽음
522
다리오의 바사왕 즉위
520
성전 재건 작업 재개
스5:2, 학1:1
516
페르시아 시대
제2 성전 완공
스 6 : 15
458
이스라엘의 2차 귀환 조서 및 귀환
스 7 : 9~11
444
이스라엘의 3차 귀환 및 성곽 중수 필역
느2:9~11, 6:15
432
느헤미야의 2차 귀국
느 13 : 7
332
헬라 시대
페르시아 멸망과 헬라시대 시작
167
하스몬 왕조 시대
헬라시대 멸망과 하스몬 왕조 시대
63
로마 시대
하스몬 왕조 시대 멸망과 로마 시대
63
유대인의 독립국가 멸망
47
로마는 파사엘을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헤롯을 갈릴리의 총독으로 임명
37
헤롯의 유다왕 즉위
A.D 4
예수의 탄생과 헤롯의 죽음
마 2 : 11
12
디베료 가이사의 로마황제 즉위
30
예수의 수난과 부활승천
마 27 ~ 28 장
54
네로의 로마 황제 즉위
70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함락 및 성전 완전 파괴
324
비잔틴 시대
콘스탄틴 황제 시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
337
콘스탄티우스 2세 시대
476
로마 왕국 분열로 서로마 멸망
640
모슬렘 시대
모슬렘 시대 시작
1099
십자군 시대
모슬렘 시대의 멸망과 십자군 시대
1099
십자군의 예루살렘 탈환하여 팔레스타인을 기독교 성지로 회복시킴
1291
맘룩 시대
십자군의 멸망과 맘룩의 팔레스타인 점령
팔레스타인에 모슬렘 사원이 건축됨
1453
동 로마 제국 멸망
1517
오스만 제국시대
오스만의 팔레스타인 정복
1917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영국의 팔레스타인 정복
1917
영국의 발포어 선언(유대국가 설립을지지하는 성명)
1947
UN에서 이스라엘 독립 승인
1948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독립 선포
1949
제1차 중동전 발발 (팔, 영토 70%점령)
1956
제2차 중동전 발발 (시나이 반도 점령)
1964
팔레스타인(PLO) 공식 출범
1967
제3차 중동전 발발 (6일 전쟁으로 동 예루살렘 합병, 시나이반도, 가자지구,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지구 점령)
1973
이집트,시리아와 제4차 중동전 발발
1981
이스라엘, 골란고원 합병
1982
이스라엘 레바논 침공으로 PLO 망명길..
1993
이스라엘, PLO 상호 승인 합의
오슬로 협정 Ⅰ
1994,10
이스라엘, 요르단 평화협정 체결
1995, 5
오슬로 협정 Ⅱ
1995,11
라빈 이스라엘총리 암살
1996, 1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출범
1996, 6
리쿠르드당(네타냐후 총리) 집권
1997, 1
헤브론 철 수 의정서 서명
1998,10
와이리버 협정 체결
와이 의정서 Ⅰ
1999, 5
예후드 바라크 총리 당선
1999, 9
샤롬 알세이크 협정 체결
와이 의정서 Ⅱ
1999,10
요르단강 서안 ~가자 안전통로 개방
2000, 9
이스라엘 아리엘 샤론 당수 알 아크사 사원 전격 방문
2001, 2
샤론, 압도적인 지지로 바라크를 누르고 총리 당선
상기의 연대표는 성경에 정확한 연대가 기록되지 않아 많은 자료를 정리하였으므로 연대가
다소 다를 수도 있습니다.
*참고자료 : 관주 성경, Korea Computer Mission, 박종수 교수의 자료 응용, 기타 신문 자료.
우리가 고쳐야할 기독교 용어들. 
 Ⅰ.기도와 관련된 용어
   
1. 당신⇒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은총으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세우신 이 교회를..”.

이와 같이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만일 어느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당신이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말은 의당 다음과 같이 고쳐서 말해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이다. 우리말 2인칭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당신’은 다만 3인칭에서는 극존대어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3인칭이 될 수 없고 우리 간구를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에 해당되므로 ‘당신’이란 호칭은 안 된다.(제86회 / 2001년)

2. 기도 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 ⇒ 기도 드립니다(기도합니다)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같이 동사 ‘기도하다’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써야 하는데 요즈음 이를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드렸습니다’ 와 같이
과거형을 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5분이나 10분전에 기도를 시작했으므로 간구 한 모든 말들은 문법적으로는
이미 과거 또는 현재완료가 되므로 동사 ‘기도하다’의 과거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
기도(祈禱)는 글자 그대로 그 핵심이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간구다. 간구의 내용은 소원이며 소원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러한 미래 지향적인 소원을, 즉 우리의 바람을 ‘기도하였습니다’로 끝낼 수는 없다.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로 끝내는 것이 옳다.(제86회 / 2001년)


3.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 주님.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라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법상의 문제가 있다.
즉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지 못한다.
2인칭에는 존칭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 호격 조사 ‘-아’나 ‘-야’가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친구 사이나 아랫사람에게는 “복동아.”, “철수야.”와 같이 부를 수 있지만
손윗사람에게는 호격 조사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버님이시여.”, “할아버님이시여.”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 이미 사어가 된 ‘-이여’, ‘-이시여’를 붙여서는 안되고 그저 ‘주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로 해야 옳다.(제86회 / 2001년)


4. 우리 성도님들이 ⇒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국어 존대법에서는 청자(聽者)가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은 바른 표현이 못된다.

“할아버지. 형님이 가셨어요.”, “아버지. 누님이 오셨어요.”

첫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할아버지‘와 주어인 ‘형님’ 및 화자(話者)인 손자 ‘나’다. 여기서 청자인 ‘할아버지’가 최상위자이므로 ‘형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 없다.

둘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아버지’와 주어인 ‘누님’과 화자인 ‘나’다. 여기서도 청자인 ‘아버지’가 최상위자이기 때문에 ‘누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할아버지. 형이 갔어요.”, “아버지. 누나가 왔어요.”

공중기도에서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일한 입장,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즉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격이다. 그러므로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회중을 가리켜
‘우리 성도님들’ 이라 존대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저희들’, ‘교회의 권속들’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제86회 / 2001년)

5. 대표 기도 ⇒ 기도 인도
예배 순서 가운데 기도 시간이 되면 예배 인도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000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000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000님이 대표 기도를 하시겠습니다.”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못된다.
온 회중이 머리를 숙여 무언의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할 경우 우리는 이를 ‘기도 인도’라 부르는 것이 좋다.
기도 인도자는 기도의 대표자가 아니다. 이 기도 인도자는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다른 사람들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는 생각까지도 그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기도 인도자는 대표로 뽑힌 어느 운동 선수와는 다르다. 그는 대표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며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온 회중의 생각을,
즉 그들의 소원을 보다 깊게, 보다 하나님 뜻에 맞게, 아울러 그 절차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기도 인도자가 기도할 때 회중은 결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없다. 만인제사장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사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기도에 있어서 ‘대표’, ‘대신’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대표기도’, ‘대신하여 기도’는 ‘기도 인도’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제86회 / 2001년)

6. 사랑의 예수님 ⇒ 사랑의 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예수님’, ‘고마우신 예수님’ 등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을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뢴 후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되어 있다. 역시 이 속에도 성부 하나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본임을 알아야 한다.(제86회 / 2001년)

7. 참 좋으신 하나님 ⇒ 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요즈음 ‘참 좋으신’과 같은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재고를 요하는 말이라 하겠다.
즉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인 말들을 보면 ‘거룩하신’, ‘만유의’, ‘생명의’, ‘신실하신’, ‘의로우신’, ‘자비하신’, ‘영원하신’, ‘위에 계신’,
‘능력이신’, ‘진실하신’, ‘구원하시는’, ‘하늘에 계신’, ‘사유하시는’, ‘은혜로우신’, ‘보수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홀로 하나이신’, ‘천지를 지으신’... 등과 같이
대부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들이 수식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참 좋으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가 된다.
즉 ‘참 좋으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 정서로 느끼는 바대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얄팍한 주관적인 감정으로 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를 과장하여 발전시킨다면 ‘사랑스러운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과는 판이한 뜻이 된다.), ‘미운 하나님’, ‘야속한 하나님’, ‘귀찮은 하나님’...등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제86회 / 2001년)


Ⅱ. 예배, 예식과 관련된 용어


8. 사회자 ⇒ 인도자(예배시)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사회자라고 하면 마땅히 일반 회의의 진행자를 의미한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예배가 아닌 결혼예식이나 임직식 같은 인간 중심의 의식에서는 진행을 맡은 사람을 사회자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현장에서 사회자라는 명칭은 경건성의 결여를 느끼게 하므로 단순한 사회자(presider)의 개념을 넘어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로 부름이 타당하다.
인도(引導)의 사전적 의미는 “알려주며 이끄는 일”이므로 예배 인도라는 말을 회의에서의 사회와 구분지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본 교단 1998년 총회에서 통과된 표준 예식서에는 모든 예배의 진행자는 인도자(引導者)로, 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로 표기하였음을 밝힌다.(제86회 / 2001년)

9. 성가대 ⇒찬양대
우리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전담한 찬양대를 최근에 ‘성가대’로 많이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출판사들이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르는데서 보편화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 우리 한국 교회는 찬양대라는 이름이 통용되었고 성가대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세이카다이...성가대(聖歌隊)’가 그대로 직수입되면서 성경에도 없는 '성가대’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성가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이며, 우리의 ‘찬양’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성가대’라는 용어는 성경의 정신과 우리의 고유한 이름인 ‘찬양대’로 바꾸어 부름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10.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용불가(설교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한 인간이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위하여 어떤 사실이나 바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빌고 원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표현이 설교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 타당한가를 연구 검토시킨 바 있는 본 교단 총회는 1981년 65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

첫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에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설교는 설교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축도는 축도대로 하는 것이 좋다.

셋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의 사용은 회중에게 자극을 주고 흥분시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고는 안 되게 만들어 설교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미신적 기복 사상을 키워 줄 우려가 있다.

넷째, 설교의 근본 목적이 흐려지고 회중들에게는 설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아멘”을 하게 하는 식으로 유혹되기 쉽다.

연구위원회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설교시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를 하지 않도록 건의하였고 총회는 이를 아무 이의 없이 통과시킨 바 있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서 한국교회의 설교 사역을 바로잡는 일이라 보아 설교시에 이 말의 사용을 억제함이 타당하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11. 대예배 ⇒ 주일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큰 예배가 있고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가 예배일진대,
거기에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를 지칭하여 대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교회들이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 때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대예배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대예배가 있다면 소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소예배일 수가 없다.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한에 있어서, 어떤 예배도 소예배일 수가 없다. 다만 예배일뿐이다.

물론 시간별로 예배를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라든지, 주일 저녁(오후) 찬양 예배라든지, 혹은 시간에 따라 1부 예배, 2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예배”라는 용어는 합당한 말이 아니다.(제86회 / 2001년)

12. 열린 예배 ⇒ 열린 집회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1990년대 이후에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예배는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로 알려진 집회의 형태로,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통하여 소개되면서 한국 교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본래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구도자”라는 부자연스러운 번역 대신에
1990년대 초에 유행하던 “열린”이라는 단어로 의역한 것으로 “구도자의 집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열린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구도자의 집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보다는 “전도집회”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 혹은 구도자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예배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응답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배의 기본 정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받거나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열린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의 행위여야 하지,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예배가 회중지향적이 되고,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이 드림에 있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그 예배를 통해서 얻어내는데 목적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영혼구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위한 집회이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차라리 “열린 집회”로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많은 교회에서는 불신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한 “구도자의 집회”와는 별도로 신자 중심의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즉 구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 집회로서의 열린 예배의 개념보다는 기존 신자들에게 새로운 생동감을 주는 예배로서의 열린 예배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예배는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전통적인 예배를 벗어나서 잔치적이고 시각적이며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많이 격려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인데, 이를 가리켜서 “열린 예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 자체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능하면 “열린 예배”라는 용어의 사용은 삼가는 좋겠다. 의미상으로도 “열린 예배”가 있다면 “닫힌 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무엇이 열린 예배이고, 무엇이 닫힌 예배인가?
또 무엇에 대해서 열려있고, 무엇에 대해서 닫혀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굳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활기 있는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열린” 이라는 용어보다는 “젊은이 예배” 혹은 “찬양 예배” 등으로 사용하고,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13. 예배봐준다 ⇒ 사용불가
흔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업예배를 봐준다” “구역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 행위이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내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이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드리거나 봐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점을 봐준다”는 미신적인 용어를 상기케 하는 “예배봐준다”는 표현은 예배 신학적으로 볼 때에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용어이다.
(제86회 / 2001년)

14. 준비찬송 ⇒ 사용불가
찬송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곡조가 있는 시이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 곡을 붙인 성도들의 경배의 표현이며, 기도이며, 때로는 성도들의 신앙고백과 결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이면 열심히 찬송 부르는 것을 성도의 바른 자세로 알고 찬송을 열심히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찬송의 생활이 습관화 되다보니 때때로 찬송의 목적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준비찬송”이라는 말에서 찾아보게 된다. 교회에서 “다같이 준비 찬송을 부르면서 앞자리부터 채우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찬송을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런 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송을 시간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나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준비찬송”이라는 용어는 마땅히 사용해서는 안 된다.(제86회 / 2001년)

15. 예배 / 예식 / 기도회 ⇒ 구별사용

한국교회는 어느 나라의 교회보다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이다. 그래서 예배와 각종 기도회로 한 주일에 여러 차례 모인다. 주일 낮을 비롯하여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밤,
그리고 매일 새벽 등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열심은 세계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모임에 예배라는 명칭을 붙여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돌, 회갑, 추모 등의 모임에도 예배라는 명칭을 붙임으로써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배와 예식과 기도회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신 창조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결코 인간을 위한 모임이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배와 예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돌, 회갑, 추도, 입학, 졸업, 결혼, 입당,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를 할 경우에는 예식으로 표현하고,
예배와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목적으로 모이는 수요 저녁 모임과 금요 철야 혹은 심야 모임 그리고 매일 새벽 모임 등은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으로 명시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를 통과한 「표준예식서」의 정신을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주일예배, 주일저녁 찬양예배, 교회학교(주일학교)예배,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 경건회(각종 회의 시작 전)(제86회 / 2001년)

16. 헌금 ⇒ 봉헌
한국 교회의 예배 순서 가운데 “헌금”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 순서는 원래 봉헌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 속에서 봉헌의 순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봉헌의 의미는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즉 봉헌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정성을 다하여 경청한 무리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내어놓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순서를 “헌금”이라는 용어로, 즉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로 지칭하는 것은 봉헌의 의미를 아주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헌금”이라는 용어보다는 “봉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마땅하다.(제86회 / 2001년)


17. 축제 ⇒ 잔치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축제'를 “축하하고 제사지냄”이라고 단순하게 풀이하여 실어 놓았으나 이가원과 임창순의 ■東亞漢韓中辭典■에서는 "축제란 제사 이름이니,
묘문(廟門) 안과 밖에서 이틀에 걸쳐서 드리는 묘문제로서 조상을 사당 안에서 제사지내고, 그 다음날 사당 밖에서 지내는 제사이다“라고 정의해 놓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마을 제사를 영어의 Celebration 과 Festival 같은 축하행사를 보면서 자신들이 제사에서 마음놓고 떠들고 소리지르면서 춤추는 고유한 행사와 모양새가 비슷함을 알고,
1928년에 '축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그들의 사전에 도입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은 축제의 문제점을 보면서 이제는 성경대로 잔치,
또는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등으로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예를 들어 성령 축제..성령 잔치, 부활절 축제..부활절 절기 행사, 성탄 축제..성탄 축하 행사 등이다.
참고로 공동번역에서는 57회, 표준 새번역에서는 13회에 걸쳐 무분별하게 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나 개역 성경과 개역 개정판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힌다.(제86회 / 2001년)

18. 하나님의 축복 ⇒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복에 관한 표현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축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상과 같은 표현들을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복을 비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다음의 성구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비는[祝福]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降福] 분임을 잘 밝히고 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지라.”(개역 한글판 창 12:3)

“그가(멜기세덱)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개역 한글판 창 14:19)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또는 “복 내려(베풀어) 주시옵소서.”로 바로잡음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Ⅲ. 장례와 관련된 용어


19. 소천(召天)하셨다. ⇒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숨을 거두었다.


최근에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의 죽음을 알리는 광고에서 “고 ■■■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셨다.”는 문장을 보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교회에서 발표한 이러한 광고는 매우 부끄러운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 “나는 소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비록 사전에도 없는 어휘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소천을 받았다.”로 해야 한다.


그러나 이토록 실수가 많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불러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경우는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20.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용어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하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어느 장례예식에서 목사가 “이제 침묵으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립시다.” 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문객이 문상을 하면서 유족들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나 '명복(冥福)'이라는 용어는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 말은 불교의 전용어로서 불교 신자가 죽은 후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거기서 받게 되는 복을 가리킨 말이다. 곧, 죽은 자들이 복된 심판을 받아 극락에 가게 되기를 바란다는 불교의 내세관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가 지금껏 교회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용어 대신 순수하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든지,
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와 같은 말로 유족을 위로함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21. 미망인 ⇒ 고인의 부인, 고인의 유족

미망인(未亡人)이라는 용어는 순장(殉葬)제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순장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음을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먼저 죽은 시신과 함께 묻는 장례 풍속을 말한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와 이집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특히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분신 자살하여 순장되는 ‘사티..라는 풍습이 1829년 법으로써 금지되기까지 존속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22대 지증왕 3년(주후 502년)에 왕명에 의하여 순장 금지되기까지 이러한 제도가 존속되었다.

이런 순장제도가 성행할 때나 쓰일 수 있었던 ‘미망인’ 이라는 용어의 뜻을 풀어 보면 “남편이 죽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인데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용어의 뜻을 알았을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임을 깨닫게 된다.(제86회 / 2001년)


22. 칠성판(七星板) ⇒고정판 또는 시정판
우리의 장례문화에 변화가 일고 있으나 아직껏 가정에서 죽음을 맞은 경우가 많으며 그 때마다 목회자가 직접 시신을 다루는 일이 많다.
이때 시신이 반듯하게 굳어지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널빤지를 시신 밑에 깔고 손발의 위치를 반듯이 잡아 준다.
여기에 사용되는 널빤지 사용의 전통적인 관례가 이 널빤지에 북두칠성을 본 따서 일곱 개의 구멍을 뚫었다 하여 ‘칠성판’이라 부른다.
흔히 우리 교회에서도 적당한 이름을 못 찾아 ‘칠성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유래는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토속 신앙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신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기에 순수하게 ‘고정판(固定板)’ 또는 ‘시정판(屍定板)’으로 부름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23. 영결식, 고별식 ⇒ 장례예식

인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행하는 예식을 칭하는 용어로서 ‘영결식’, ‘고별식’, ‘발인식’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우리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결식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며 고별식은 ‘작별을 고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교리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표현은 적당하지 못하다.
그리고 발인식은 시신을 담은 상여가 집에서 떠남을 뜻하기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

이러한 용어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에서는 표준예식서를 통하여 이미 장례예식으로 정리하였기에 이제는 모두가 ‘장례예식’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해야 한다.(제86회 / 2001년)

24. 삼우제(三虞祭) ⇒ 첫 성묘(省墓)
우제(虞祭)란 장례를 마친 뒤에 지내는 제사로서 우리의 장례문화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이 때의 제사는 세 번 갖게 되는데 그것을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라 한다.
이 중에 아직도 삼우제라는 이름은 교회 안팎에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최근의 삼우제는 장사 지낸 뒤 3일 만에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관례로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성묘란 시체를 묻고 뫼를 만드는 일, 즉 산역(山役)이 잘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다. 아직도 매장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는 가족들이
3일만에 성묘를 하는 일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본 교단의 표준예식서에는 삼우제라는 이름을 ‘첫 성묘’로 부르도록 하였는데 매우 적절한 용어라고 본다.(제86회 / 2001년)

Ⅳ. 회의와 관련된 용어


25. 고퇴 ⇒ 고퇴 또는 의사봉
한국의 장로교회는 정규 회의에 사용하는 의사봉(議事棒)을 ‘고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 용어는 국가나 사회 기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며,
한국 교회 가운데서도 장로교회에서만 제한적으로 쓰고 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는 회의가 열렸던 때의 일이다. 절차위원장이 은으로 십자를 면에 새기고 청홍으로 태극을 머리에
그리고 광채 있는 은으로 띠를 띤 견고한 ‘마치’를 마삼열 회장에게 전달했다. 회장은 이 물건이 영원토록 대한장로교 노회의 마치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마치’란 이름이 속되다는 의견이 있어 회장은 기 일, 한석진 두 사람에게 이름을 개정하도록 임무를 맡겼다.
두 위원은 이틀 후 회의에서 ‘나무마치 퇴(槌)’자와 ‘고두’라 할 때 쓰는 ‘두드릴 고(叩)’자를 합하여 ‘고퇴’라 정했음을 보고하였고,
이것을 길선주 회원의 동의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고퇴’라는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에서 작명되어 결의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공식적 효력을 가진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노회 창설 때 제작된 의사봉에 대한 개별 명칭으로 지어졌고, 기독교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은 이름이며, 장로교회 밖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특수용어임을 고려하여, 장로회 총회의 상징적 의사봉 만을 ‘고퇴’라 부르고 그 외에는 ‘의사봉’이나 ‘사회봉(司會棒)’이라는 현대적 용어로 바꾸어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제86회 / 2001년)

26. 자벽 ⇒ 지명, 임명

교회 회의록에 종종 ‘회장 자벽’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심지어 ‘자백’이라고 잘못 써 놓은 사례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고어에 유래를 두고 있어 현대에 와서 거의 세력을 잃어버린 말을 교회가 고수하다보니 이처럼 생소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자벽(自辟)이란, 장관이 자기 뜻대로 관원을 추천하여 벼슬을 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이는 <수교집록(受敎輯錄)> <조선철종실록(朝鮮哲宗實錄)>에서 용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벽 행위는 각 관아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기준도 없이 자기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에 대거 기용함으로써 심각한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미나 정서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이 말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의장이 임의로 어떤 임원을 임명하는 일’로 바뀌었으나 어감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각종 회의에서 굳이 이 용어를 고집하고 있다. 대체로 회의 벽두에 특별위원을 선정하는 경우에 국한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회장의 자의임명이 불가피한 형편이라면 ‘회장 자벽’이라는 용어 대신에 ‘회장 임명’ 또는 ‘회장 지명’으로 고쳐 쓰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27. 증경 ⇒ 전(前)

‘증경(曾經)’이란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의 고대시가에 기원을 둔 특수한 말이다. 증(曾)은 ‘일찍이’라는 뜻이고, 경(經)은 ‘지내다’라는 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찍이 지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노조린(盧照隣)이라는 사람의 작품 <장안고의(長安古意)>에서 ‘증경’이라는 시어가 나오는데, ‘증경학무도방년(曾經學舞度芳年)’
■일찍이 춤 배우느라고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네■ 정도이므로 그다지 심오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한자어를 전통적으로 존중하며 차용하기 좋아했던 선비들이 이런 희귀한 용어를 우리나라에 들여왔고, 한국 교회도 교단을 위하여 일한 경력이 있는 분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자
이 단어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는 이 용어를 전혀 쓰지 않고 있어 ‘증경대통령’ ‘증경총장’ ‘증경사장’이라는 호칭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교회에서만 ‘증경총회장’ ‘증경노회장’으로 부르며 심지어 ‘증경청년회장’이라고까지 하여 이 단어를 남용하는 실정이다.
신분을 존중하기 위해 중국의 고대어를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총회장’이라고 하여 존대의 정도가 손상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제86회 / 2001년)

28. 휘장 분배 ⇒ 꽃 증정

총회나 노회에서 개회를 선포한 직후 ‘휘장 분배’라는 순서를 갖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점차 이를 생략하는 추세이지만, 역대 회장들과 주요 임원들이 일제히 단상으로 올라가
도열하면 이어서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등장하여 임원들의 가슴에 꽃을 꽂아 드리는 모습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휘장(徽章)’이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모자나 의복에 붙이는 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표지(標識)’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 익숙해진 영어 단어로 ‘배지(badge)’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회의 초반에 원로회원에게 상징적인 지위를 부여하고자 배지 대신 가슴에 꽂아 드리는 꽃은 결코 휘장이라 할 수 없으며, 이 순서 또한 매우 형식적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분배(分配)’라는 용어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분배는 고르게 나누어준다는 뜻이므로, 원로들에게 표지를 고루 나누어주는 순서라는 의미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굳이 이 순서를 사용하려 한다면 ‘꽃 증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가장 타당하리라 본다.(제86회 / 2001년)


Ⅴ. 교회생활과 관련된 용어


29. 당회장 ⇒ 담임목사. 당회장(당회 회의 때)
많은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당회장으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예배순서를 실은 주보나 교회 게시판에 당회장 000 목사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원래 당회장이란 영어의 Moderator로서 토론이나 회의의 사회자 또는 중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래서 당회 회의를 주관하는 목사를 비롯하여 노회와 총회의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을 모두 ‘모더레이터’라고 부른다. 그러기 때문에 당회를 주관하는 순간에는
목사를 ‘당회장’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그 외의 시간이나 장소에서는 ‘목사’ 또는 ‘담임목사’로 부름이 타당하다.
이 호칭이 바로잡아지지 않으면 장로를 언제 어디서나 ‘당회원’으로 불러야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제86회 / 2001년)


30. 예수 ⇒ 예수님, 성령 ⇒ 성령님
우리의 언어문화는 윗분들을 호칭할 때 ‘님’자의 사용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특히 자신이 섬기는 신의 존재를 호칭할 때는 ’님‘자 또는 그 이상의 존칭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신도들은 ’부처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이 철저히 ’님‘자를 사용하여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그 위(位)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하게 되어있다. 성삼위가 동격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한동안 논쟁이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325년 니케야 공회의에서는 제2 위격 예수님의 신성문제가 확정되었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제3 위이신 성령님의 신성문제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에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성삼위는 동격이신데 어느 위에는 ‘님’자를 붙여 호칭을 하고, 어느 위에는 그렇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호칭할 때도 ‘님’자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 ‘성령님의 역사’로 언어의 순화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31. 전야제 ⇒ 전야 축하행사
이 용어는 ‘축제’라는 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부활절 축제’ ‘성탄 축제’라는 용어를 ‘부활절 절기행사’ ‘성탄 축하행사’ 등으로 바꾸어 써야 할 필요성을 밝혔으므로,
부활절 전날 밤에 갖는 행사도 당연히 ‘부활절 전야제’ 대신 ‘부활절 전야 축하행사’라고 불러야 한다.

전야제는 전날 밤에 여는 축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종 제사가 새벽에 열리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앞날의 밤은 이것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보름이나 중추절 같은 명절의 전날은 밝은 달을 바라보며 축하의 행사를 펼치기에 적절했었다.

성경에는 어떤 행사에서 전야에 모여 축하 자리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에서는 부활이나 성탄처럼 새벽에 이루어진 일을 축하하기 위한 전야 행사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행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전야제’ 대신 ‘전야 축하행사’라고 하여 제사의 성격을 배제하고,
밤 깊은 시간까지 축하한다는 순수한 의미를 담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32. 사모 ⇒ 사모님

예로부터 스승을 높여 사부님이라 했으며 이에 걸맞게 스승의 부인을 높이어서 사모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서는 목사 부인도 사모님이라 부르고 있다.
선생이 자신을 사부라 부를 수 없듯이 선생이나 목사도 자기 부인을 사모라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느 목사가 자기 부인을 가리켜 사모라고 한 다음과 같은 표현은 잘못 된 것이다. “우리 집 사모는 다녀왔지요.”

또한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들도 자신을 사모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최근 목사 부인들이 모여서 “사모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사모회”는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목사 부인들이 자신을 사모라 지칭했기 때문이다.

이 “사모”는 주로 제자나 평신도들이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을 높여 불러 주는 말이기 때문에 실제 사용 될 때는 “사모님”이 될 수밖에 없다.(제86회 / 2001년)


87회


1. 천당(天堂) ⇒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늘나라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 간다.”, 또는 죽은 사람을 가리켜 “천당에 갔다.” 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천당’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성경에는 물질로 된 유형의 집 또는 공간으로 이해하기 쉬운 천당의 개념이나 서술이 없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이 땅의 종교 문화를 형성한 타종교에서 유래된다. 한민족의 일반적인 종교개념이나 사전적 풀이에서는 천당을
“하늘 위의 신의 궁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인 정토(淨土), 즉 깨끗한 국토, 곧 부처와 보살이 사는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을 천당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천당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교도들이 즐겨 쓰는 ‘천당’이라는 어휘보다 한글성경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만이 온전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 ‘하늘나라’로 사용함이 적절하다.(제87회 / 2002년)

2. 입신(入神) ⇒ 사용불가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기도하는 열심은 매우 소중한 특성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한 기도생활은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를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각각 달리 경험하게 한다.
그러는 중에 여러 형태의 은사를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신학적인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기도원 등에서 기도에 집중하다가 “입신(入神)”을 했다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입신(入神)이란 무속종교의 표현으로서 무당에게 신이 내려 인간으로서의 자아의식을 상실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사전에서는 입신(入神)을 한 인간이 영묘(靈妙)한 경지에 이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신의 경지에 이름” 이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표현은 천주교가 주로 사용한 공동번역의 민수기 11장 25~27절에서 유일하게 사용했을 뿐 본 교단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개역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영을 내리실 때” 또는 “영이 임하실 때”로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그 분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입신(入神)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용어이다.(제87회 / 2002년)


3.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 사용불가
기도하는 중에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살아있다는 표현은 ‘언젠가는 살아있지 못할지 모른다’
또는 ‘아직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등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극히 제한하는 표현이 된다.(제87회 / 2002년)


4.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 룻기, 욥기, 잠언, 아가
룻記書, 욥記書, 箴言書, 雅歌書 등으로 말하거나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자체에 記, 言, 歌 등이 있어 ‘書’ 자가 의미상 과잉표현(redundancy)이 되므로
그렇게 쓸 수가 없다. ‘創世記’ 나 ‘출애굽記’ 에 ‘書’ 자를 붙여 ‘創世記書’로나 ‘출애굽記書’로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啓示綠’에 ‘書’ 자를 붙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말 성경이 바로 쓰고 있으며, 같은 한자를 중국어나 일본어 성경 책명에서 그렇게 쓰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제87회 / 2002년)

5. 시편 ○장 ○절 ⇒ 시편 ○편 ○절
많은 사람이 시편의 장 절을 나타낼 때, 시편 몇 장 몇 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몇 장과 몇 절은 산문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의 구분을 신■구약의 다른 책의 구분을 나타내는 ‘장’ 과는 달리 ‘편’을 쓰는 것은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 성경이나 일어 성경에서도 우리나라와 같다.(제87회 / 2002년)

6. 하나님의 몸 된 교회 ⇒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하나님의 몸 된 교회’란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와의 관계에서 비유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온 몸의 지체가 머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과 같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교회론의 한 단면이다.
그는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을 결합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천명하고 있다.(엡 1:20~23) (제87회 / 2002년)


7.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설교용어)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시는 하나님(기도용어) ⇒ 사랑하는 하나님

설교를 할 때 흔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라고 하는 말은 말하는 이가 그 동사 ‘사랑하시는’의 주체가 될 때에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말하는 주체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존대를 나타내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기도를 할 때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란 말도,
그 ‘사랑하시는’이란 동사의 주체를 말하는 이 자신을 가리키는 뜻으로 말하는 경우라면, 즉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옳지 않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경우를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의미는 흔히 ‘사랑하시는 시민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경우처럼
그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고 말하는 이(화자)인 것이 분명하다. 만일 사랑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라 해야 분명하다.(제87회 / 2002년)

8.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 ⇒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예배로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겠습니다.

“다같이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예배시에 성도들은 결코 주기도문을 단순히 외는(외우는) 것, 즉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 한 마디 뜻을 바로 새기면서
음송(吟誦)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른 표현은 “다같이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 “다같이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도
그와 같은 경우로서 옳지 않다. 즉 “다같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주기도문을 외운다”라는 표현이나
“사도신경을 외운다”라는 표현은 그 자체가 주기도나 사도신경을 진지하게 뜻을 생각함이 없이 형식적으로만 소리내어 외는 행위이다.(제87회 / 2002년)


9. 중보기도 ⇒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기독교에서 “중보”라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단 한 분의 중보자이시다.(딤전 2:5)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계시고 성육신 이전에도 선재(先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중보자이셨다.(요 1:3,10; 골 1:16; 히 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행위가 가장 명백하고 독점적으로 드러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구속사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보는 이미 완성된 구속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구속의 열매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끊임없이 의존하며 살아간다.
예컨대, 믿는 자들이 드리는 감사와 기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진다.(요 14:14; 롬 1:8; 골 3:17; 히 13:15)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눅 22:69; 골 3:1; 히 12:2)
하늘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한 일면은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롬 8:34; 히 7:25)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종말에 있게 될 부활과 심판의 때에도 계속될 것이다. 즉 부활과 심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요 5:28~29, 고전 15:22, 52~54; 살전 5:16; 마 25:31~46; 요 5:27; 행 17:31)

그러므로 중보기도라는 표현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며, “이웃을 위한 기도”, “중보적 기도”, 라는 표현으로 사용함이 적절하다.

중보적 기도는 중보자의 기도(중보기도)와는 다른 “나” 아닌 “남”을 위한 기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제87회 / 2002년)

10. 제사, 제단, 제물 ⇒ 예배, 성단, 예물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소나 양을 잡아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제물의 피를 단에 뿌린 뒤 그것을 불살랐다.
이것이 곧 레위기의 제사요, 이 단이 바로 모세의 제단이며, 죽임을 당한 소나 양들이 희생의 제물이었다.
이 제사는 마침내 모든 제물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성되었고, 신약시대에 들어 예배로 내용과 형식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교회는 지금도 예배를 제사의 의미로 이해하며 다음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게 하옵소서.”, “기도의 제단에 나와서, 작은 제물을 바칩니다.”

한국 문화의 특징으로서 제의적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는 점을 지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신화, 민속, 종교의식 등이 모두 제단 근처에서 성육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구약의 제사용어를 예배 속에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부자연스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한국교회 역시 제의적인 문화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제사는 ‘예배’로, 제단은 ‘성단’으로, 제물은 ‘예물’로 바꾸어야 한다.

한편, 제단을 ‘강단’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으나 이것은 성례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설교만 이루어지는 단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므로 ‘성단’이라 함이 적절하다.(제87회 / 2002년)


11. 영시(0시)예배, 자정예배 ⇒ 송구영신예배

영시(0시)는 하루가 끝남과 동시에 또 하루가 시작되는 밤 12시 정각, 곧 자정을 가리키는 시각이다. 교회가 이 시각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한 해가 지나가고
다시 시작하는 연말연시의 자정에 국한된다. 그러므로 연말연시의 0시에 드리는 이 예배를 영시예배나 자정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예배는 감리교회의 존 웨슬리가 언약갱신예배(Covenant Renewal Worship)라는 이름으로 소개하였는데 새로운 해를 맞아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우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예배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날짜의 특성을 강조하여 야성회(Watch Night Worship)라는 이름이 나왔고, 한국교회에서는 단순히 시각만을 앞세워 0시예배라 부르고 있다.

예배가 시작되는 시각을 예배의 명칭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낮11시예배, 밤7시예배가 예배의 이름이 될 수 없듯 0시예배 역시 마찬가지다. 또, 0시는 예배 시작 시각도 아니다.
교회에 따라 밤 11시나 11시30분에 시작하여 고백의 시간을 갖고 새 언약을 세우는 중에 새해를 알리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일을 가리켜 ‘송구영신’, 또는 ‘송영’이라 한다. 이 의미가 예배의 성격 및 내용과 일치하므로 ‘송구영신예배’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송영’은 ‘송구영신’의 준말이지만, 찬양에서의 ‘송영’과 동음이어서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있으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제87회 / 2002년)

12. 수양회 ⇒ 신앙수련회

절기가 바뀌면 교회마다 행사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특히 기도원이나 수양관이 있는 교회는 그 장소를 활용하여 행사를 펼치는데 그 내용이 점차 새로워지고 다양해져
말씀집회, 찬양콘서트, 각종 이벤트, 세미나와 워크숍 등을 포함하게 되었다.

아무리 수양관에서 행사를 치른다 하더라도, 이런 행사를 전통적 용어인 수양회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그 성격이 크게 바뀌고 말았다. ‘수양’이란 도덕적 품성을 닦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소극적이고 정적인 느낌을 주는 이 용어를 가지고서는 현대의 다양한 행사 내용을 다 담을 수 없다.

교회의 공동체 훈련이라는 목적을 잘 드러내면서 다양한 행사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 ‘신앙수련회’가 적합하다. ‘수련’은 마음과 몸을 잘 닦아서 익힌다는 사전적인 뜻을 갖고 있으며,
특히 정신을 닦고 기르는 데 사용하는 종교적 용어로도 익숙하다. 여기에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한 뚜렷한 목표를 앞에 내세우게 되므로 가장 합리적인 명칭이다.(제87회 / 2002년)

13. ...... 기도로 폐회합니다 ⇒ ......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기도로 기도회를 마칩니다.

예배가 끝날 즈음해서 예배 인도자가 이제 “○○○ 목사님 축도로 폐회합니다”, “○○○ 장로님 기도로 폐회합니다” 또는 “○○○ 집사님이 폐회기도를 해 주시겠습니다”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 안의 각종 회의에서 그 회의가 끝날 무렵 의장이 “○○○ 장로님의 기도로 폐회합니다”, “폐회기도를 ○○○ 집사님이 해 주시겠습니다”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무의식중에 예배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예배가 회의가 아닌 이상 반드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주일날 드리는 주일 낮 예배는 물론 새벽기도회나 수요기도회, 금요밤 심야기도회 등도 비록 우리가 관례를 따라 ○○회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바로 예배의 일종이므로
이 때에도 “○○○의 기도로 폐회합니다”와 같이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교회 밖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든지 예배가 끝날 때
위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은 안 된다. 예배는 어느 경우나 ‘○○회’가 아님을 분명히 새겨둘 필요가 있다.(제87회 / 2002년)

14.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 ⇒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 기도로

예배드릴 때 기도 인도자가 기도의 마무리를 하면서 ‘예배의 시종을 하나님께 의탁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와 같은 표현을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예배의 시종을 하나님께 의탁드리며’는 바람직한 표현이 못된다.

의탁은 ‘어떤 것에 몸이나 마음을 의지하여 맡긴다’는 의미다.

내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거의 ‘그가 대신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인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이 예배를 도리어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방관자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이 예배를 하나님께 의탁하면서’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필요할 시는 “이 예배를 주장하시고” 또는 “이 예배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고”로 쓸 수 있다.(제87회 / 2002년)


15. 태신자 ⇒ 전도 대상자
생소한 용어가 교회 안에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는데 바로 ‘태신자’가 그것이다.


이 말은 믿지 않는 어느 사람을 지칭하면서 장차 태어나게 될 신자라는 의미로 즉 태안에 들어 있는 신자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전도해서 꼭 신자를 만들겠다고 속으로 작정한 어떤 특정한 사람을 ‘태신자’라고 하고 있다.


임산부의 태 안에 들어 있는 생명체를 태아라 부르는 것에 연유하여 태안에 들어 있는 신자라는 뜻으로 ‘태신자’가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부적합한 용어이다.
태아가 임산부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생명체일진대 그러면 ‘태신자’는 과연 누구의 뱃속에 들어 있다는 말인가.


만일 ‘태신자’를 용납한다면 장차 목사나 장로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그 사람을 ‘태목사’, ‘태장로’ 라 해도 괜찮다는 무리한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태신자’라는 용어대신 ‘전도 대상자’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제87회 / 2002년)


16. 안집(‘안수집사’의 줄임말) ⇒ 사용불가

집사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안수하여 임직한 이들을 가리키는 직분인데, 서리집사와 구별하기 위하여 안수집사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그 명칭을 줄여 ‘안집’이라는 생소한 말로 부르거나 기록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이는 사회에서 유행을 타고 있는 두문자어(acronym) 사용이 교회에 스며들어온 결과라 하겠다. 신문과 같은 활자매체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되도록 줄여 쓰기 위한 목적으로
무리한 약어를 만들어낸다. 이런 현상이 간결한 것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의 성향과 맞아 떨어져, 단체이름 줄여 말하기(예, 나라사랑실천본부 → 나사본),
일상어 재미있게 줄이기(예, 바라보고 싶은 사람과 천하에 재미없는 사람 → 바보와 천재) 등 언어생활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에서도 직분의 호칭을 줄여 말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것이 부목사를 ‘부목’이라고 부르는 경우인데 이는 교목, 군목, 경목 같은 준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의미가 통하고 있다. 그러나 안수집사를 ‘안집’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무리한 줄임말이다.
만약 이런 두 문자어를 받아들인다면 원로목사를 ‘원목’, 은퇴장로를 ‘은장’이라 부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동의어가 양산되고, 어감이 이상해지며,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의 위화감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 줄임말의 폐단이다.
교회 공동체의 순수성을 해칠 우려가 있는 ‘안집’ 같은 생소한 두 문자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제87회 / 2002년)


17.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 주님 안에서 문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

‘이름’은 누구를 대신하여 부르는 말 또는 누구를 대신하여 지시하는 말이므로, 그 사람의 권위와 인격의 임재를 동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의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고 말할 때,
그 서술어는 권위와 위엄과 인격의 동반을 의미요소로 하는 용어이어야 한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이름은 더할 수 없는
권위와 위엄과 인격과 능력을 동반하는 것이므로 단순히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는 뜻인 ‘문안’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것은 어색하다.
다시 말하자면, ‘문안’이라는 행위는 ‘예수님 이름을 대신하여’ 혹은 ‘예수님 이름을 빌어서’ 비로소 성립되는 것일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또한, ‘이름으로’에 쓰인 격조사 ‘-으로’는 ‘수단, 방법, 도구, 기구’ 등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누구의 이름으로 문안드리다’라는 표현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대안으로, ‘주님의 이름으로’는 ‘주님 안에서’ 또는 ‘주 예수님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등으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다. 성경에는 문안이나 감사나 부탁을 할 경우 거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로 기록되어 있다.(롬 16:10, 고전 1:4, 딛 3:15) (제87회 / 2002년)


18. 일요일(공일) ⇒ 주일

그리스도인은 일요일(공일)을 ‘주의 날’(계1:10)을 뜻하는 주일이라고 해야 한다.

현재 총회 헌법의 예배와 예식에 주일이 안식일과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별도의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제87회 / 2002년)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 바람직하지 못한 용어


현재 우리 생활 속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말들 중에 다음과 같은 말들은 무속, 토속신앙, 도교, 불교 등의 사상이나 교리가 담겨져 있는 말들로 우리 기독교 신앙과는 맞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용어 사용을 피하는 것이 좋다.

1. 도로 아미타불


고생만 하고 아무 소득이 없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본래는 중이 평생을 두고 아미타불을 외우지만 아무 효과도 없다는 뜻에서 왔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는 바람직하지 않다.

2. 공염불(空念佛)

본래 불교와 관계된 말로 신심(信心)이 없이 입으로만 외는 헛된 염불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급적 이 말을 피하는 것이 좋다.

3. 보살 같다.

보살의 뜻은 ‘위로 부처를 따르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버금이 되는 성인’이라 되어있는데 아주 성품이 좋은 사람을 일컬어 ‘보살 같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는 적합한 말이 못된다.

4.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음흉하거나 요사스러운 마음이 전혀 없고 마음이 지나치게 어질고 순한 사람을 가리켜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피해야 할 말이다.

5. 신선놀음

신선이란 도를 닦아서 인간 세상을 떠나 자연과 벗하여 늙지 않고 죽지도 않고 오래 오래 산다고 하는 초월적인 상상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편안한 삶을 가리켜
‘신선놀음이다’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쓰기에 적합한 말이 못된다.

6. 도사(道士)

어떤 일에 도가 트여서 능숙하게 해 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이 도사란 본래 도교에서 도를 갈고 닦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성직자나 직분자에게
이 말을 비유하여 쓰는 것은 삼가야 한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길 찾는 데는 도사야’와 같은 말은 해서는 안 된다.

7. 신주(神主)모시듯 한다.

신주란 사당 등에 모시어 두는 죽은 사람의 위패를 말하는데 글자 그대로 죽은 사람을 신으로 받드는 민간 신앙에서 온 말로 몹시 귀하게 여기어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다루거나 간직하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신주 모시듯 한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가급적 이런 말은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8. 명당(明堂) 자리

명당이란 민간 신앙의 풍수지리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후손에게 장차 큰 복을 가져다 준다는 묏자리나 집터를 말하는데 이는 우리 기독교 신앙과 어긋남으로 쓰지 않아야 된다.
예를 들어 ‘여기는 정말 명당자리다’와 같은 말을 쓰는 것은 피해야 한다.

9. 넋두리

민간 신앙에서 굿을 할 때 무당이나 가족의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의 넋을 힘입어 그 넋을 대신하여 말을 하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불만이나 신세타령을 길게 늘어놓으며
하소연하는 말을 가리켜 넋두리라 하는데 이런 말은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10. 도깨비 장난

민간 신앙에서 도깨비란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인데 이 도깨비는 비상한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을 홀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심술궂은 짓을 많이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 도깨비와 관련된 ‘도깨비 장난’, ‘도깨비 짓’, ‘도깨비 불’과 같은 허무 맹랑한 술어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

11. 일진(日辰)

날의 간지(干支)를 말하는데 이에 따라 그 날 그 날의 운세가 있다고 믿고 있다. 용례로 ‘일진이 나빠서’, ‘일진이 사나워서’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피해야 될 말이다.

12. 살(煞)

민간 신앙에서 살이란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을 말한다. ‘살이 낀다’, ‘살을 푼다’, ‘살이 내린다’ 와 같은 말들을 우리는 쓰지 말아야 한다.

13. 귀신같다(이다).

귀신을 미화해서 어떤 일을 잘 알고 있다든지 또는 아주 잘 할 경우 이를 ‘귀신같다’, ‘귀신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피해야 될 말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을
이 귀신에 비유하는 것 즉 ‘김 장로님이 귀신같이 알아 맞추시네’와 같은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

14. 액(厄)

액이란 ‘모질고 사나운 운수’라는 뜻인데 ‘액이 닥친다’, ‘액을 물리친다’, ‘액땜을 한다’와 같은 말은 우리가 피해야 될 말이다.

15. 운수(運數), 운(運), 수(數), 재수(財數)

운수, 운, 수는 같은 말로 사전적인 풀이는 ‘이미 정하여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天運)과 기수(基數)’를 뜻하며, 재수란 ‘재물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있을 운수’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가급적 이런 말들을 피해야 한다. ‘운이 나쁘다’,
‘운이 없다’, ‘운수 사납다’, ‘재수 있다’, ‘재수 없다’ 등과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6. 사주팔자(四柱八字)

사주팔자란 ‘사람이 타고난 한 평생의 운수’를 말하며 이를 줄여 ‘팔자’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는 우리는 이와 같은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사주팔자를 잘 타고났다’, ‘팔자가 기구하다’와 같은 말을 우리는 쓸 수 없다.

17. 터줏대감

민간 신앙에서 터주란 ‘집터를 지키는 지신, 또는 그 자리’를 말하는데 가마니 같은 것 안에 베 석자와 짚신 따위를 넣어서 달아 두고 위한다.
이 터주에 관련된 말로 집단이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람을 가리켜 ‘터주대감’이라 하는데 이 말은 우리가 가급적 쓰지 않는 것이 좋다.

18. 손

민간 신앙에서 손이란 날짜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여 따라 다니면서 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을 뜻하며 초하루와 이틀은 동쪽, 사흘과 나흗날은 남쪽에 있다고 하며,
9일과 10일에는 손이 없는 날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날짜를 따져서 ‘내일은 손이 없는 날이니 이사를 하자’,
‘내일을 손이 있는 날이니 이사하지 말자’와 같은 말들을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말들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를 따르는 것도 안 된다.

19. 운명

운명이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말하는데 우리는 이런 뜻을 가진 ‘운명’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운명에 맡기다’, ‘모든 것이 운명에 달려 있다’ 와 같은 말을 우리는 쓰지 않아야겠다.


1. 천당(天堂) ⇒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늘나라 === 교회생활

2. 입신(入神) ⇒ 사용불가 === 교회생활

3.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 사용불가 === 기도

4.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 룻기, 욥기, 잠언, 아가 === 성경 呼稱

5. 시편 ○장 ○절 ⇒ 시편 ○편 ○절 === 성경 呼稱

6. 하나님의 몸 된 교회 ⇒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 교회생활

7.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설교용어)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배, 사랑하시는 하나님(기도용어) ⇒ 사랑하는 하나님

8.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 ⇒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겠습니다.

9. 중보기도 ⇒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 기도

10. 제사, 제단, 제물 ⇒ 예배, 성단, 예물 === 예배

11. 영시(0시)예배, 자정예배 ⇒ 송구영신예배 === 예배

12. 수양회 ⇒ 신앙수련회 === 교회생활

13. ...... 기도로 폐회합니다 ⇒ ......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기도로 기도회를 마칩니다. = 기도

14.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 ⇒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 예배

15. 태신자 ⇒ 전도 대상자 === 교회생활

16. 안집(‘안수집사’의 줄임말) ⇒ 사용불가 === 교회생활

17.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 주님 안에서 문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교회생활

18. 일요일(공일) ⇒ 주일 === 교회생활

                                                   <영상출처 : 파이오니아>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었던 이 고난 주간에는 예루살렘 입성, 성전 숙청, 감람산 강화,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십자가 처형과 장사 등의 대사건들이 숨 막히게 전개 되었습니다.


예수가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 본문성경 마 21 : 1 - 11
1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절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절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절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절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7절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절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 본문과 함께 묵상할 성경 / 막 11 : 1 - 11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본문성경 마 21: 18 - 19
18절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절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 본문과 함께 묵상할 성경 / 막 11 : 12 - 14
성전 청결케 함 본문성경 마 21 : 12 - 13
12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 본문과 함께 묵상할 성경 / 막 11 : 15 - 19


무화과나무 마름 본문성경 마 21 : 19 - 22
19절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절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 본문과 함께 묵상할 성경 / 막 11 : 20 - 25
제사장 바리새인의 질문 본문성경 막 11 : 27 - 33
27절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절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31절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것이니
32절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33절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본문과 함께 묵상할 성경 / 눅 20 : 1 - 8


예수님께서 밤마다 베다니에 나가시니 이 날은 거기서 기도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경에 수요일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최후 성만찬, 예수 그리스도의 고별사 본문성경 마 26 : 31 - 35
31절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절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35절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 본문과 함께 묵상할 성경 / 막 14 : 12 - 26, 눅 22 : 31 - 38


십자가의 고난 본문성경 마 27 : 32 - 56
32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33절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절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35절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절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절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절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절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절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42절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43절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절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45절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46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절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절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49절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하더라
50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절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절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절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절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 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 본문과 함께 묵상할 성경 / 눅 23 : 26 - 45


무덤을 파수군이 굳게 지킴 본문성경 마 27 : 62 - 66
62절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63절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기억하노니
64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하나이다 하니
65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66절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부활의 새벽 본문성경 마 28 : 1 - 10

1절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보려고 왔더니
2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절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절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절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줄을 내가 아노라
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7절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절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쌔
9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보리라 하시니라

※ 본문과 함께 묵상할 성경 / 막 16 : 1 - 17

 

마가복음 16장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Index Previous chapter, Next chapter, Previous Book, Next Book, KJV

살아나시다(마 28:1-10; 눅 24:1-12; 요 20:1-18)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막 16:2) 1)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마28:1, 요20:1
(막 16: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마27:66, 요11:38, 요11:39
(막 16: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마27:60
(막 16: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눅24:4, 요20:12
(막 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막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요20:6
(막 16: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28:8, 눅24:9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다(마 28:9-10; 요 20:11-18)

(막 16:9) 2)[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눅8:2
(막 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막 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눅24:11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눅 24:13-35)

(막 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눅24:15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 28:16-20; 눅 24:36-49; 요 20:19-23; 행 1:6-8)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3)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눅24:36, 요20:19, 고전15:5
(막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4)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6) 믿고 5)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6)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눅10:19, 행28:5

하늘로 올려지시다(눅 24:50-53; 행 1:9-11)

(막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6)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행5:12, 히2:4

1. 헬, 그 주간의 2. 어떤 사본에는, 9-20절까지 없음 3. 헬, 기대어 누워(유대인이 음식 먹을 때에 가지는 자세) 4. 헬, 온 창조세계에 5. 헬, 또는 침례 6. 또는 이적

16:1-8 예수께서 부활하심
마28:1-8, 눅24:1-12, 요20:1-10 비교하라
주일새벽 미명이었다(눅24:1). 길고 힘들었던 안식일이 끝나고 두 마리아는 예수의 시체에 향유을 넣기 위해 일찍 길을 떠났다. 그들의 마음은 무거웠을 것이며 착잡한 심정으로 땅을 쳐다보고 무덤입구까지 와서 무덤을 4절 눈을 들어 ajnablevyasai(아나불�사사이) 본즉 qewrou'sin(데오루신) 놀라움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큰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5절 두 마리아는 또 한번 더 놀랐다. 그것은 예수의 시체는 없고 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천사는 분명한데 네 복음서들이 표현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마태는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마28:3),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눅24:4), 요한은 "힌 옷 입은 두 천사가"(요20:12)라고 묘사한다. 이런 차이점은 초자연적인 부활에 대해 그들이 전해들은 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에 대해 이상근은 억지로 조화를 시킬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차이가 있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6절 살아나셨고 hjgevrqh(에게르테)는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말한다(행3:15, 행4:10, 롬4:24, 롬8:11, 고전6:14, 고전15:15, 고후4:14, 벧전1:21).

16:9-20 마가의 긴 맺음말
마28:9-20, 눅24:13-53 , 요20:11-23 비교하라
마가의 긴 맺음말은 요한복음 20장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와, 누가복음 24장에 있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와, 마태복음 28장에 있는 지상명령을 함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의심을 받고 있는 부분이다. 말씀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마가가 기록한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9절은 1절과 아무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마가는 다른 기자들과 달리 자신의 자료로만 기록해 나갔기 때문에 사건의 연속성이 긴박하면서도 연결이 잘 이루어져 있는데 유독 마지막의 이 부분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의 저자가 마가이든 아니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성경은 때로는 한 장을 혼자 다 기록한 것도 있지만 한 권을 여러 사람이 기록하거나 편집되어진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우리에게 성경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부활 후 예수님의 출현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보여졌다. 그녀는 누가복음 8:2에서 일곱 귀신에게 구원을 받은 여인이다. 이 여인은 낙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지만 믿지 못했다.
두 번째 실의와 좌절에 빠져 패잔병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눅24:13). 그리고 세 번째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눅24:25).

마가복음의 결론은
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전하라, 전파하라" khruvxate(케룩사테)는 선교에 대한 명령이다(마3:2, 마28:16-20, 눅24:46-48, 요20:21, 행1:8).
19절 하늘로 올리우사 부활 후 40일이 되어서(행1:3) 베다니 부근(눅24:50)의 감람산(행1:12)에서 승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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