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전도방법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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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갱신(敎會更新)의 방향'
교회갱신(敎會更新)의 방향 ― 한국교회지도자들에 대한 고언(苦言) ― 1. 신앙과 종교성(宗敎性) (1) 주전 8세기의 대표적 문서예언가(文書預言家)인 아모스와 호세아 그리고 이사야의 주된 관심사는 '공의'와 '인애' 및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신실한 순종'이었다(아모스 5 : 24, 호세아 6 : 6, 이사야 53 : 4). 이것은 한 세대 뒤의 선지자인 미가에 의하여 구약의 중심 메시지로 훌륭히 요약되고 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오직 공의를 행하고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 : 8). 아모스가 말하는 공의는 선악(善惡)의 윤리적 분별에 기초한 이성적·의지적인 판단작(judgement)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서 전우주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과의 사이에 '바른 관계성'을 정립하는 것(righteousness)이며, 호세아의 인애(仁愛)는 휴머니즘으로서의 자비나 박애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전인격적인 긍정(肯定)의 태도(하나님 쪽에서의 무한한 긍휼, 인간 쪽에서의 전적인 신뢰와 의존)을 나타내는 '헤쎄드'( )로서, 이것은 일반적으로 지순(至純)한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의 '아가페'보다도 더욱 포괄적이며 심화된 의미를 지닌 말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사야의 겸손과 신실함 역시 어떤 윤리적 덕목으로서의 고결한 품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온전한 소망과 그것에 기초하는 전적인 헌신'을 뜻한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Coram Deo) 바른 가치를 가진다. 나아가, 율법에 의한 의로움이 부정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만을 복음의 본체로 하는 신약에 있어서도,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대로 '율법의 보다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신앙의 근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된다(마태복음 23 : 23). 이와 같이, 구약의 공의, 인애, 신실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내면(內面)의 빛을 얻는다.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의, 인애, 신실함 ―― 이것은 실로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그 삶의 실제적인 자리에서 부단히 추구해야 할 행동양식이요 목표이며, 그것에 비추어 늘 자신을 성찰해야 할 신앙의 진실이다. (2)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와 같은 신앙의 진실보다는 그것을 싸안고 있는 종교적인 틀과 형식, 그리고 여러 율법적 규율들에 더 집착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배와 성례전(聖禮典)의 거룩한 의식(儀式)들, 헌금과 전도 등 종교적으로 정형화(定型化)된 특정행위들, 고백문의 암송과 습관적인 기도들, 구원의 약속과 축복에만 크게 경도(傾倒)되어 있는 설교들, 그리고 저 무수한 축원(祝願)과 강복(降福)들.... 또, 거대한 교단(敎團)과 크나큰 교회당들, 교회 직제(職制)의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그러나 싸늘한 관료적 조직들, 예산과 신도관리의 경영학적인 시스템들, 호화로운 호텔 안에서 밴드의 연주와 고급요리로 치뤄지는 '누구 누구를 위한 조찬기도회'들..., 물론 이러한 것들은 기본적인 신앙행위들에 속하거나 혹은 교회공동체의 현실적인 보존·유지수단들일 수 있겠지만, 그와 같은 종교적인 틀과 제도 또는 행위들이 만약 신앙의 진실과 핵심내용을 가리고 압도한다면, 이것은 '정죄된 인류를 구원하시고 그의 자녀로 불러 신의 성품에 참예케 하시려는'(베드로후서 1 : 4) 초월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니라, 다만 문화의 사회적 존재양식의 하나인 여러 종교현상들 가운데의 어떤 것에로떨어지는 슬픈 계기가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신앙의 영역에서 모든 형식과 규범을 축출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입장만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신앙의 내용과 실질을 추구하면서 모든 종교적 형식과 규범들을 타파하려는 것이야말로 인간 영혼이 지니는 본성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내용과 실질은 형식이나 규범으로부터 독립해 있지 않다. 형식으로부터 분리된 실질은 그 자체로서의 인식이 불가능하다. 형식과 규범은 내용과 실질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필수조건이다. 교회의 역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正體性)을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가르치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어져 왔다. 그 일은 정당한 틀과 형식을 제대로 세우는 작업 없이는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노력을 집어던진 자유방임적 입장으로부터 많은 오류와 이단들이 발생되어 왔다. 우리는 성찬과 세례가 그리스도에 의해 창시되었거나 유지된 것을 알고 있으며, 교회의 설립과 선교사역이 그분께로부터 연유하였고, 교회의 조직과 예배의식 등이 거룩한 초대교회의 전승에 기초하고 있음을 성서 안에서밝히 보는 터이다. 신앙은 그 내용과 함께 그것을 담을 정결한 그릇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선생과 인도자 없이는 홀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유한자(有限者)들이기 때문이다(사도행전 8 : 31). 교회공동체와 신령한 예배는 그리스도교신앙의 확고한 두 기둥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교회와 예배의식 등일체의 종교적 틀을 거부하는 퀘이커(Quaker) 교도들의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나,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단독자(der Einzelner)의 실존적 구도(實存的 求道)만을 중시하면서 공동체신앙을 외면하는 키엘케골류(類)의 종교적 실존주의 등은 인간 영혼의 본성을 파악함에 있어 모두 교만의 오류를 범한 것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독적으로 다가가서 실존적으로 찾아내야만(to find out) 하는 어떤 객관적인 규범이나 체계가 아니고, 실존을 향해 스스로 찾아와 '자기 백성들 안에서' 그 자녀를 만나시는(to meet) 인격적 주체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공동체의식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신앙 안에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마태복음 22 : 37∼40). 이처럼 이웃과의 관계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설정되고 유지되는 데 있어서는 공동체를 위한 적절한 틀과 형식이 필요불가결하다. (3)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러한 종교적 틀과 규범들이 신앙의 진실을 상실하고 복음을 다시금 의식적이고 율법적인 바리새적 신앙형태로 꾸준히 변질시켜 감으로써, 중세의 로마 카톨릭과 같이 형해화(形骸化)되어 경건의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외형적 거대종교(巨大宗敎)를 지향하게 한다는 데 있다. 더욱이, 이러한 '종교의 의식화(儀式化)'와 '생활의 규범화(規範化)'는 '대상의 우상화(偶像化)'와 더불어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종교적 본능의 경향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과 성찰 없이는 진정한 신앙의 갱신을 기대할 수 없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한국교회가 이러한 종교적 틀과 형식에 안주하게 된 데에는 오히려 '복음적이라고 주장되는' 어떤 이유가 그 밑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곧,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의 구원 앞에서 아무런 공로도 내세울 것이 없는 신앙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열정적인 예배와 감각적 체험의 간증으로써 그에 보답해 드리는 일 뿐인 것으로 치부되어 온 면이 적지 않다. 신앙은 교회의 집회와 예배의식 그리고 신비현상 같은 가시적(可視的)이거나 체험적인 종교의 틀로써만 확인될 수 있는 일로 보아 왔기 때문이다. 지난 날 한국교회를 크게 뒤흔들었고 아직도 그 영향이 상당 부분 남아있는 각종 부흥회와 전도집회를 통한 방언, 신유 등의 이른바 '성령운동'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보답행위가 아니다. 구원은 우리가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초월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과 구원 그리고 신앙의 의미를 더욱 심화된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는 한,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의, 인애, 신실함'이라고 하는 신앙의 핵심에 나아갈 수 없다. 구원의 심화는 그 제2차적인 영역,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구원(제1차적 영역)에 대하여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반응(response)으로서, 이 반응은 곧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책임(responsibility)을 감당하는 일이다(빌립보서 2 : 12). 이것은 말씀에 의하여 날카로운 영혼의 도전을 받고 십자가를 진 긴장된 생명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며, 모든 삶의 자리(SitzimLeben)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에 순종하는 삶의 길을 말한다.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성화는 일반적으로 구원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이는 오히려 구원의 심층면(深層面)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화는 푯대를 잡으려고 부단히 달음박질하는 일이요, 가나안을 향해 거친 광야를 건너는 힘겨운 일이다. 이 일을 한국교회는 얼마나 자각하고 있으며 이것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또는, 무엇 때문에 한국교회는 이 구원의 심층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종교적 틀의 언저리만을 헤매고 있는가? (4)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오늘 한국교회가 시급히 극복해야 할 과제는, 첫째 팽배한 물량적 성장주의, 둘째 신비주의적 무속신앙의 오류, 셋째 경직된 근본주의와 정치적 참여주의의 갈등, 넷째 극심한 분파현상 등으로 집약되고 있다. 다행히, 이러한 병리현상들에 대하여 최근 교계의 일각에서 여러 고무적인 갱신운동들이 전개되어 오고 있기는 하지만, 만약 그 갱신의 방향 속에 다시금 불신앙적인 오류가 개재해 들어온다면 이것은 앞의 병폐들보다 더욱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오히려 갱신의 이름을 내걸고 광명한 천사로 가장(假裝)하여 다가오는 악령의 유혹이 아닌가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종교의 틀과 형식이 아니라 신앙의 진실과 그 핵을 바로 붙들기 위하여, 우리는 교회갱신의 방향을 새로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물량적 성장주의(物量的 成長主義)의 폐해 (1) 개신교 전래(傳來) 이후 불과 100여 년 만에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하게 성장한 모습으로 이 시대 앞에 우뚝 나섰다. 외부로부터의 많은 찬사와 내부로부터의 크나큰 감사가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바른 일일까? 바티칸의 웅장한 성베드로 성당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초대교회의 한 작은 지하묘지(catacomb)를 안내하던 중년의 신부가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당신은 방금 지상(地上)의 가장 화려한 성전인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을 보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하(地下)의 가장 순결한 성전, 순교자들의 핏자욱 위에 세워진 진정한 교회에 오셨습니다." 물론 그 안내 신부는 바티칸 소속이었다. 교회의 성장 그 자체를 타기(唾棄)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성장이 내적 성숙을 얼마만큼 동반한 것이냐 하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기 위한 신앙의 실질은 게을리하면서, 현세적인 성취의 욕구에 이끌려 종교적 침전물(沈澱物)들만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외형적 팽창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데에 한국교회의 슬픔이 있다. 교회들이 도대체 왜 이렇게 큰가? 하나의 신앙공동체가 말씀에 의하여 전인격적인 충격을 받고 경건의 훈련에 힘쓰며 개개의 영혼들이 영적 교류를 심화해 나가는 일이, 수천 수만의 신도를 가진 초대형교회 안에서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비록 가능하다 한들,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 것인가? 물질적으로 부요해진 교회와 사회적 성취를 거머쥔 목회자들이 '가난한 자의 축복'을 온당하게 가르칠 수 있는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이들과 지극히 작은 이들이 대리석과 현란한 스테인드 글래스(staind glass)로 치장된 교회당 안에서 '고난과 시련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어떻게 깨달으며, 온유와 절제와 겸손을 무엇으로 바르게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목회자에 대한 접대가 곧 하나님께 대한 섬김'이라는 강변(强辯)들이 계속되는 한, 오늘의 신자들이 경건과 겸손을 갈망하는 대신 오직 폭포처럼 쏟아지는 다양한 축원과 강복만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교회가 현세적인 융성기에 접어들 때 반드시 신앙의 타락이 스며든다는 연면(連綿)한 기독교역사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번영으로 쇠망한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다"(Kierkegaard). (2) 더욱 무서운 일은, 물량주의의 병폐에 대하여 일부 대형교회들이 취하고 있는 접근방법들이다. 그것은 대체로, 부(富)의 분배 --- 즉, 막대한 교회재정의 일부를 내부적인 것(교회의 유지·관리·확장에 필요한 비용)에서 부적인 것(자선·구제·선교비용)에로 전환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수재의연금이나 불우이웃 돕기 같은 각종 자선기금의 출연자(出捐者)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당회장의 사진을 들고 언론사 접수대 앞에 줄을 서는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자선과 구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교회의 중요사역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부의 축적에 익숙해진 교회들이 '물량적 대형화에로의 진로(進路)' 그 자체를 버리지 않은 채, 풍족한 재화를 가지고 자선사업에 나섬으로써 물량주의의 병폐를 시정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며, 재물이라고 하는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끈질긴' 우상숭배(열왕기하 10 : 28, 29)가 그 형태를 달리 하여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극한 가난 속에서' 풍성한 구제를 행했던 마케도니아 교회의 사랑의 모범(고린도후서 8 : 1∼5)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하여 비교우위(比較優位)의 지위에서 나타내는 동정(同情)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자신의 우위를 버리고 그 대상의 열등한 삶의 자리에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지만, 동정은 자신의 우월한 자리와 그 대상의 열등한 자리의 구별을 계속 유지하고 더욱 분명히 하는 것이다. 교만과 동정은 모두 비교우위의 관념에 서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가 여유있는 재정으로 사회에 물질적 구제를 시행함으로써 교회 스스로의 사회적 성가(聲價)를 높여가기 보다는, 각개의 신자들이 나날의 삶의 자리에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는 가운데 봉사할 수 있도록 신앙의 바탕을 가르치는 일이 복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에 있어서 금과 은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가 전면에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위대한 복음전승(福音傳承)에 부합하는 일이다 (사도행전 3 : 6). 교회의 못토는 '가난한 자에게 재물을 주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는 것'이며, 재물은 동정의 표현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사랑의 표현수단이 되어야 한다. 물량주의가 가진 병폐의 본질은 '재물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 즉 '재물의 용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물량주의는 '재물에 의존하는 삶의 태도', 즉 우리의 삶에 있어서 '재물이 발휘하는 힘에 대한 신뢰'에 그 본래의 우상숭배적 요소가 있으며, 이는 재물 그 자체에 내재(內在)하는 본질문제에 속하는 것이다. 물질적 구제는 그 대상의 현실적 삶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으며 또한 구제하는 자의 의를 쌓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이웃의 소외된 삶의 자리에 스스로 참여해 들어가는 믿음의 살아있는 실천으로서, 결국 재물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인 것이다. 교회 스스로가 재물의존적이고 기복적인 대형화(大型化)에로의 넓은 길을 버리고 '가난한 교회, 작은 교회'에로의 좁은 문을 지향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겸손한 자리(고린도후서 1 : 9)에 돌아오지 않는 한, 진정한 갱신은 기대할 수 없다. 부요한 교회 라오디게아는 갱신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자신이 갱신의 대상일 뿐이다(요한계시록 3 : 17). 3. 신비주의적 무속신앙(巫俗信仰)의 오류 (1) 신비한 체험과 환상에 경도(傾倒)된 무속신앙의 출현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책임에 속한다. 교회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의 신앙적 핵심을 확고히 붙들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진리'를 신실하게 가르쳐 왔다면 무속적 신비주의는 오늘날처럼 만연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구원파, 축신파(逐神派), 휴거파(携擧派) 등 그 어떤 신비주의의 오류에 대해서도 교회의 책임은 면제되지 못한다. 신비주의의 폐해는 자못 심각하다. 신자들의 일상적 삶의 영위가 혼란에 빠지고(디모데전서 4 : 1∼3), 영혼의 긴장이 이완(弛緩)되며, 하나님의 은총은 그분의 섭리를 떠나 광기서린 영매(靈媒)들의 주술(呪術)에 맡겨진다. 신앙의 초월성은 물론 신비스런 체험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월적 경험에의 의존이 깊어지고 그것만을 간절히 고대하며, 드디어 그것 없이는 신앙의 호흡을 계속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 신앙이 아니다. 성서에 기록된 모든 기적과 신비한 사건들은 어느 것이나 하나님의 현존과 그 섭리를 계시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지, 그 기적을 맛본 자들의 현실적인 형통을 위해 나타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적을 시행한 적이 한번도 없다. 신비주의는 우주와 삶의 오묘한 질서(시편 19 : 1 ∼4, 로마서 1 : 20) 속에서는 하나님의 현존을 보지 못하고, 그 질서의 변형과 파괴 속에서만 하나님의 능력을 비로소 확인하는 영적 새디즘(spiritual sadism)의 사시(斜視)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뿐이며, 기적과 신비는 다만 하나님 그 분의 선택에 속하는 것이다. 신비주의의 오류는 하나님의 섭리의 방향(하나님의 나라)과 내용(하나님의 의)이 아니라 그 '방법의 초월성'에만 집착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하여 초월적 방법만을 쓰실 것을, 그것도 마치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처럼(마태복음 6 : 31∼34)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사용해 줄 것을 감히 요구하는 데 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초월적 사건도 능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뿐 아니라 '그 분이 원하시지 않는다면 어떤 신비한 현상도 결코 발생될 수 없다'는 것까지를 함께 믿어야 한다. 신비주의는 그 앞 부분만을 믿는 것이며, 이는 그것을 전혀 믿지 않는 합리적 이성주의의 신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신앙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다. (2) 신비주의적 체험신앙에 있어서 더욱 경계할 일은, 우리 민족이 지녀온 오랜 무속신앙의 종교적 정서(情緖)를 그리스도 신앙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라고 하겠다. 이 일은 최근에 신앙의 토착화 또는 타종교와의 대화라는 큰 범주 속에서 여러 갈래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오고 있는 터이다. 신앙의 토착화에 관하여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일은, 신앙의 틀과 형식은 토착화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신앙의 진실과 그 핵심은 토착화의 대상도 내용도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배방식의 개선에 있어서 민족적 관습을 고려한다든지, 종교적 절기들을 민속에 부합시킨다든지, 또는 신앙생활의 규범을 동시대나 당해 사회의 요청에 부응케 한다든지 하는 일들은 이미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 중의 곳곳에서 모범을 보인 바이며(사도행전 21 : 17∼26, 고린도전서 9 : 19∼23), 이는 오늘에도 선교의 프로그램 속에 적절히 담아내야 할 토착화의 주요한 내용들이다. 토착화시도의 불행은, 신앙의 틀과 형식이 아니라 그 핵심을 가지고 토속종교들과 타협하려는 데 있다. 민족정기(民族精氣)의 확립이나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다른 종교과의 협력을 모색하는 것은 종교의 사회적 책임에 비추어 적극 수용할 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의 실현을 민족종교들의 테마(예컨대 弘益人間, 人乃天의 사상들)나 시대정신(Zeitgeist, 예컨대 社會民主的 正義의 구현)와 동일시한다든지, 카톨릭의 수녀들과 비구니 및 원불교의 정녀(貞女)들이 한 자리에서 하나님과 불타(佛陀)를 함께 찬양한다든지 하는 일들은 온당한 토착화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일들은 사회적·문화적으로는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 신앙은 이미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 뒤에 그곳의 토속종교인 바알이나 아세라의 부족신앙들을 받아들인 결과는 우상숭배에로의 타락이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엄중한 질책과 재앙에 직면하는 데에 이르렀다. 유일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 그 자체는 무엇과도 뒤섞을 수 없다. 정통신학에서 멀리 벗어난 불트만(R. Bultmann)까지도 그리스도 신앙의 절대적 성격을 '거룩한 비관용'(die heilige Unnachsicht)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편협성이나 포용력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생명과 죽음, 진리와 허무, 빛과 어둠의 대조되는 영역들 사이의 문제이다. 인간의 본성적 종교심을 진정한 신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토착화의 방법들이 진지하게 모색될 필요가 있으나, 그것의 인본적·범신론적·기복적(人本的·汎神論的·祈福的) 요소들까지 함께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성서 안의 모든 우상숭배가 야훼 하나님과 기복적 물신(物神)을 뒤섞어 섬긴 혼합종교(混合宗敎)들이었다(출애굽기 32 : 4, 열왕기상 12 : 28).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항구도시 고린도는 여러 종교·습속들의 집산지로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자마자 그 지역적 특성에 따라 방언·신유·환상과 같은 신비한 은사들이 넘쳐났고 이로 인하여 교회 안에 많은 폐단이 발생되었는데, 이 때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다.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의 말(預言)을 하라"(고린도전서 14 : 1, 19). 여기의 예언은 앞날을 미리 내다보는 묵시적 선견(默示的 先見)으로서의 예언(豫言, prophecy)이 아니고, 교회와 시대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인애를 신실하게 선포하는 지혜로운 강론(intelligible words)을 가리킨다. 바울은 신앙의 핵심을 가지고 고린도의 토착화시도와 타협하지 않았다. (3) 한국교회가 정신적으로 간고(艱苦)해질 대로 간고해진 이 시대에 처하여 예언자의 소명을 받들지 못하고 방언이나 신유, 환상과 같은 내밀한 은사들을 외형화, 체계화, 규범화하는 일에 열중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과 십자가를 통한 성령의 사역은 가려지게 될 것이며, 십자가보다는 기적이, 말씀보다는 환상이, 순종보다는 은사가 판을 치는 기괴한 우상숭배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경험적 확인을 요구하는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약속과 말씀 위에 굳게 서는 믿음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자신의 부활을 영광스러운 승리자의 모습으로 증명하지 않고 오히려 동산지기 같은 모습으로(요한복음 20 : 15), 아니 손과 발의 못자국으로써(요한복음 20 : 24 ~ 28) 증명했다. 기적이 아니라 상처였던 것이다. 오직 성서를 통한 말씀으로만(Sola Scriptura) 신비주의의 오류를 막을 수 있다. 제사장은 무엇보다 먼저 말씀의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말라기 2 : 27).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말씀보다는 전통이나 교리적 규범이 더 중시되는 현상들을 너무도 빈번히 만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생명력은 화석화(化石化)한 교리(dog0ma)나 근본주의적 규범들 속에 있지 않고 성서를 통하여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으며, 예수의 가르침은 신화나 체험 속에 있지 않고 어두운 삶의 자리들을 생생히 조명하는 저 훌륭한 비유들 속에, 그리고 예수 자신의 비유적인 삶과 죽음 속에 있다(마태복음 13 : 34, 35). 예수의 삶과 죽음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인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살아있는 비유이다. 4. 근본주의와 참여주의의 갈등 (1) 오늘의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 하나는, 신앙의 진실인 공의와 인애가 서로 분리된 채 갈등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있어서 사랑과 정의는 항상 일치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며, 대부분의 시대와 상황 속에서 이 둘은 심각한 긴장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마도, 이 두 진실 사이의 갈등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만 온전히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갈등에 대한 이해, 긴장 속에 있는 실존적 삶의 자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신앙의 입장에 따라 늘 서로 달랐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점에서, 사랑과 정의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해와 인식은 마땅히 새로워져야 한다고 본다. 이른바 정통신학 쪽에서는 하나님의 인애를 강조하면서 불의와 악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를 잃어버렸고, 참여주의 쪽에서는 불같은 정의의 열정 때문에 인간실존의 불행에 대한 사랑을 지워버렸다. 정통교단의 인애는 불의에 대한 관용 위에, 참여주의의 정의는 증오의 감정 위에 서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통(Orthodox)이라는 말은 뜻밖에도 '완고함'이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것은 전적으로 한국개신교의 주종을 이루는 이른바 정통교단들의 율법주의적 편협성에 기인한다. 일부 완강한 보수교단들의 신조를 그대로 따른다면, 아마 예수조차도 이단으로 몰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예수께서 당시의 바리새인들로부터 이단시되었던 것처럼. 안식일과 십일조에 대한 축자적(逐字的)인 규범주의, 영혼과 세속 및 교회와 사회를 단세포적으로 구분하는 피상적인 경건성, 세대주의(世代主義)의 환상적 종말관, 실제의 삶과 일치되지 않는 공허한 선포, 그리고 이런 모든 오류들의 바탕이 되고 있는 '문장 속의 신앙고백'....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는 타계적(他界的) 내세관과 고백문을 암송하는 습관적인 예배의식으로써 신앙의 모든 것을 대체하고 있는 근본주의의 오류야말로, 역설적으로 말해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의 하나다. 내세를 향한 소망이 오늘의 삶과 유리(遊離)되어 있는 고백제일주의(告白第一主義)는 하나님의 성육신과 정반대의 길을 달리는 것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이 땅을 지으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며, 이 땅의 인간들을 위하여 이 땅에서 죽으셨고 다시금 이 땅에 오시는 분이다. 이 땅 위의 우리에게 있어서 삶과 신앙의 영역은 이 땅 외의 다른 어느 곳에도 없다. 믿음이 고백의 문장 속에 잠겨 있는 한 그 믿음은 야고보의 지적처럼 이미 죽은 것이며(야고보서 2 : 17), 고백에서 삶으로(a Credo ad Vitae) 옮겨지지 않은 신앙은 사회의 정체(停滯)된 문화양식으로서의 한 종교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엄청난 교세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이 사회에 대하여 영적인 영향력을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의로운 삶의 모범이 없이 사회와 권력의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더 나아가 그에 대한 무분별한 관용을 외치고 있는 정통교단들의 신앙적 오류 때문이다. 그들이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관용을 주장하는 것은 '사랑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침묵이나 관용의 주장으로 사회와 권력자들의 불의를 가려줌으로써 그것과 함께 자신들의 불의도 동시에 가리고자 하는 '공범자(共犯者)적 유대감'에서 나온 것이다. (2) 이러한 근본주의적 오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사회참여의 슬로건을 내건 진보적 종파들 (예컨대 民衆神學)인데, 이것 역시 하나의 반명제(AntiThese)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정통의 본류를 대신할 수 있는 성서적 명제(Biblical These)는 아니다. 정통은 세상으로부터의 후퇴(根本主義)도, 세상을 향한 돌진(參與主義)도 아니다. 성서적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으로부터 밀어내지도(根本主義)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과 동일시하지도(參與主義)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속에 있되 그것을 초월한다. 그것은 밭에 뿌려진 겨자씨와 같은 것이다(마태복음 13 : 31).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속에 숨겨져 있으나(Rex Absconditus) 종내는 그것을 뚫고 나와 전혀 새로운 삶으로 전개될 것이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역사 속의 현재'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요한복음 3 : 16)을 믿는 것이다. 천국은 '지금 여기에'(hic et nunc) 있다(누가복음 17 : 2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가르쳤다. 뱀은 온 몸으로 땅을 기는 동물이다. 그 삶의 기반은 철저히 땅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터전도 오늘의 이 땅에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삶의 현실에서 뱀처럼 지혜롭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속의 오늘의 법칙, 이 땅의 법칙을 그대로 따르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위의 오늘에 있지만 '이 땅에 속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8 : 36). 하늘에 삶의 기반을 둔 비둘기의 순결이 다시 요구되는 것은 이 까닭이다. 현실의 개혁이나 그 개선을 위해 봉사하는 신앙은 예수가 도무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의 신앙은 '오늘의 삶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 곧 종말론적인 오늘(eschatological present)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으로부터 도망하는(根本主義) 것도, 권력의 힘을 붙잡기 위해 투쟁하는 (參與主義) 것도 모두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강력한 힘을 무시하지 않으나(로마서 13 : 1∼7) 그것에 종국적인 소망을 두지도 않는다. 현실에 대한 내세론적 무관심(根本主義)이나 현실에 대한 궁극적인 기대(參與主義)는 모두 성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3) 이 땅은 우리에게 유토피아가 아니다. 유토피아는 '아무 데도 없다'라는 뜻의 합성어(u+topos)이다. 이 땅 위에 이상향(理想鄕)은 없다. 그러나 이 땅은 또한 가상(假想)의 현실이거나 우회(迂廻)하여 벗어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가지고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광야이며,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 숨쉬는 곳이다. 마치 식물이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저 태양을 향하여 삶의 영역을 활짝 열어놓고 있듯이, 우리의 삶은 이 세상 속에서 영원을 지향해야 한다. 근본주의는 영원을 지향하는 현실의 터전을 망각함으로써 그 영원을 환상(幻想)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반면에, 참여주의는 현실의 터전에만 집착한 나머지 거기서 지향해야 할 영원을 관념화(觀念化)하고 말았다. 교회는 그가 처한 세계와 사회에 대하여 예언자적 통찰을 가지고 진리의 경고와 삶의 모범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책임이 있다. 내세적 소망을 강조하며 오늘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보수적 자세는, 실은 내세적 소망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매우 능란한 처세술로 현실과의 타협을 적당히 즐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을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제한할 권한이 없으며, 오히려 그 울타리를 깨고 밖으로 나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사회참여라고 한다면 교회는 마땅히 이러한 참여의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참여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과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시대와 사회에 대하여 진리의 경고와 삶의 모범을 제시하지 못하는 교회는 이미 그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진리의 경고는 때때로 권력담당자나 지배계층에 대한 엄중한 질책으로 나타날 수 있고, 그것은 많은 경우에 '반대의 목소리'로 전달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의 태도는 타도나 혁명의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적 사명'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앙인들 자신이 도덕적 충격과 윤리적 도전으로 모범을 세우는 '제사장적인 삶'으로써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지, 스스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권력을 지원하거나 또는 권력을 타도하여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으로 실현하려는 신정정치(神政政治)로 나타나서는 안된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이미 분명하게 반대한 일이요(요한복음 6 : 15) 중세의 카톨릭이 실패한 정치적 모험이며, 현대의 모든 기독교민주주의 정치운동(예컨대, 유럽 각국의 基督敎民主社會政黨들)이 직면해 있는 딜레마이다. 정의는 어느 일방이 타방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지향해야 하고 또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정의야말로 '요구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주는 것' --- 곧 사랑이어야 한다. 동시대의 사회에 대하여 불의를 경고하고 하수(河水)처럼 흐르는 정의를 촉구했던 아모스는 불의의 세력들에 대한 적대적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공의를 요구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다 함께 공의의 길로 나아갈 것을 거룩한 분노와 간곡한 호소로써 탄원한 것이었다. 그는 불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동조자들을 규합하지 않았다. (4) 근본주의와 참여주의의 갈등의 문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올바른 삶의 모범을 갖추지 못한 데서 오는 자아파괴(自我破壞) 현상이다. 신앙과 삶이 하나로 모아진다면,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나 세상에 대한 집착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빛은 어두움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어두움을 찾아가 그것을 밝힌다. 이것이 어두움에 대한 빛의 '역설적인 사랑' (paradoxical love)이다. 사랑을 안고 어두움에게 다가가되, 어두움을 어두움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빛으로 밝혀내고야 마는 역설 --- 그 역설적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이 어두운 땅에 오셨다. 근본주의는 어두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고, 참여주의는 그 사랑의 '역설적인'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역설적인 사랑, 이것이 신앙과 삶의 변증법(辨證法)적 관계이며,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지켜야 할 역설적인 삶의 자리다. 이 신앙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제3의 합(SynThese)을 추구하지 않는다. 빛과 어두움의 합은 오직 빛일 뿐이지, 빛도 어두움도 아닌 제3의 길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역사철학의 변증법과 성서의 변증법이 서로 다른 점이다. 따라서 신앙의 입장은 매우 단호하다. 어두움과의 절충이나 타협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빛은 그 발원체(發源體)를 떠나 어두움 속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그 소임을 다 할 수 있다. 이것은 소금이 소금 그대로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썩을 것 속에 들어가야만 제 구실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두움 밖에서 어두움을 비판하고 있는 한, 그것은 참 빛이 아니다. 빛은 그 '반대의 실체'인 어두움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래서 빛의 자리는 매우 곤고하고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 곤고한 자리야말로 교회가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성육(成肉)의 자리이며, 이 역설이야말로 신앙인의 삶이 깊이 뿌리내려야 할 신령과 진정의 산 제단(祭壇)이다. 배는 포구를 떠나 바다 위를 항해해야 한다. 근본주의는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가지 못하고 항상 포구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배와도 같다. 그것은 모양만 배일 뿐, 실상은 배가 아니다. 그러나, 배가 바다를 항해할 때에도 바닷물이 배 안에까지 밀려들어오게 해서는 안된다. 참여주의는 갑판이 바닷물로 가득 채워져 바다 한 가운데로 난파해 가는 배와도 같다. 마치 빛이 어두움에 삼켜진 꼴이다. 교회는 이 세상의 한 가운데에(in the Midst of the World)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세상을 대하여(against the World) 서 있는 것이지 세상과 더불어(짝하여)(along with the World) 서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권력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세속의 가치들이 교회 안에 삼투(渗透)해 들어와 힘을 발휘 하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된다. 세상을 사랑하되 그 역설적인 본질을 잃지 않는, 신앙의 확고한 변증법적 정체성만이 이 세상 안에서의 교회의 자리를 든든히 붙잡아 줄 수 있다. 역사와 사회 안에서의 삶이 공의와 인애와 신실함으로 충만한 교회, 즉 자신의 선포가 나날의 삶 속에서 실천으로 성육(成肉)하는 교회는, 이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도망하지도(根本主義) 않으며 또한 그 속에서 투쟁의 무기를 들지도(參與主義) 않는다. 오직 주의 십자가와 그 빛으로 가득 찬 자신의 삶으로써 세상의 어두운 자리들을 분명하게 밝히며 그 쇄신(刷新)을 촉구할 뿐이다. 역설적인 사랑 ―― 이 신앙의 변증법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잊어버린 역사적 과제다. 5. 교권적 분파주의(敎權的分派主義)의 위험 (1) 개혁교회는 신앙의 다양한 양태(樣態)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일성을 추구한다. 획일적 경직성과 일사불란한 관료체제는 개신교의 이상에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신앙의 자유는 실로 프로테스탄트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다양성은 개혁신앙 그 자체의 본질로부터 연유되는 것이지, 종교적 체제나 교단들의 이해관계로써 좌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출발부터 만인제사장론(萬人祭司長論)을 근거로 하는 개신교는 교단이나 종교적 체제의 문제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를 수장(首長)으로 하는 신령한 교회들의 일치와 신앙인들의 영적 교류, 및 경건의 훈련을 위하여 '신도들의 대표'에 의한 공동체의 관리가 요구될 뿐이다. 실제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 여러 개신교 종파들의 생성은 교리적 차이보다는 교회정치적 입장의 차이(신자들의 대표를 어떻게 선임하며 공동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거기에는 원래부터 사제(司祭)의 개념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개신교의 분열은 이러한 개혁신앙의 다양성에 터잡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개혁적이고 교권적(敎權的)인 사제주의(司祭主義)에 사로잡힌 것이기 때문에 개혁신앙의 고수(固守)를 위하여 매우 심각한 현안의 문제로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교파분열의 외형상 이유가 되었던 많은 교리적 논쟁들은 대부분 이러한 교권적 사제주의의 실체를 호도(糊塗)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실상은 교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어두운 종교적 욕망들이 그 진정한 원인이었음을 고백하여야 한다. 총회의 임원선거에 수억 원의 선거자금이 동원되는 일, 교회당의 십자가가 이미 시장의 간판들처럼 널려 있는 지역에 굳이 자기 교단의 개척교회를 새로이 여는 일, 그러면서도 빈곤하고 소외된 곳에서는 어느 교단도 교회개척에 선뜻 나서지 않는 일, 형제 목사가 각기 별도의 교단을 차리고 앉아 서로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는 일, 대형교회의 풍요로운 당회장 자리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 목회세습의 일, 교단마다 성직자들을 무제한적으로 배출하는 일, 신학교마다 목회자들에게 손쉬운 학위를 남발하여 그들의 허영심과 교단의 재정을 편리하게 충족시키는 일, 교단마다 경쟁적으로 열고 있는 대형집회들, 방송매체의 장악을 둘러싼 보기에도 민망한 반목과 음해, 법정마다 수북히 쌓여 있는 교단과 교회들끼리의 재산권분쟁 사건기록들, 목양(牧羊)의 직분보다 무슨 교단이나 단체의 임원, 어떤 자격 또는 학위의 명칭을 더 좋아하는 목회자들.... 이것은 개혁신앙의 다양한 모습이 아니라 더러운 종교적 부패이며, 개혁신앙이 아니라 개혁을 모독하는 이기적 죄악들이다. 통합과 합동의 이름으로 실제로는 분열을 일삼고 있는 한국 개신교의 교파주의는 교단의 모자라는 감투 수를 늘리는 편리한 방법이었으며, 함량미달의 종교인들을 위한 변칙적 명예충족의 수단들에 다름 아니었다. 통합의 이름으로 서로 분열하고 합동의 이름으로 서로 나뉘는 것이 한국교회의 정체다. 개신교의 교파분열은 관용의 한계를 넘은지 이미 오래다. (2) 그러나 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교권적 교파분열의 본질을 외면하고, 그 반신앙적 실체를 피상적인 노력으로 덮으려 하는 기성교단들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교계의 일부에서는 교파분열의 해결책으로서 각 교단이 연합하는 여러 프로그램들을 구상·추진하고 있다. 예컨대, 범교단적인 대규모집회의 공동개최라든지 찬송가의 공동편찬이라든지 사회적 잇슈에 대한 공동성명의 발표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도기적 방안의 하나일 따름이지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방법들은 아니다. 어느 교단도 자신의 기득권을 허물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구호와 슬로건으로만 교회일치를 주장한다는 점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것이다. 교계의 분열상은 마침내 성서마저도 따로따로 발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성서번역의 원칙이나 전통적 교리 또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그 원인이라고들 강변하지만, 오히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교단의 이해(利害)와 자존심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전의 통일찬송가의 편찬·보급문제만 하더라도 각 교단의 이해득실이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한국개신교의 교리적 차별성은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개개의 구체적 문제에 대하여 견해를 달리한다고 해서 그 때마다 새로운 교파를 만들어야 한다면, 개신교는 도대체 몇백, 몇천 개의 종파로 분열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한국교회에 있어서 교파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여러 이유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성립과 발전에 있어서의 역사적 산물들인 전통적 교단들(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 자체 안에서 폭넓은 다양성과 이해력을 가지고 얼마든지 수용해낼 수 있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수용해내야 했던 것들이다. 장로교 안에서 예수교와 기독교가 분리되고, 예수교 장로회가 다시 통합과 합동으로, 합동이 또 무슨 정통이니 아니니 하며 세포분열하듯 끝없이 나뉘어야 할 무슨 정당한 이유들이 있었던가? 이 '통합'이나 '합동' 또는 '정통'의 명칭들은 진정한 통합도 합동도 또 정통도 아니다. 다만 그 죄악스런 분열상을 교단의 이름으로나마 가려보려고 하는 것으로서, 오직 오늘의 한국교회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기망(欺罔)의 언어요 모순(矛盾)의 단어들에 불과하다. 바리새인들의 특성이었던 이기적이고 폐쇄적이며 타산적인 이해의 저울질이 교회분열의 원인이었음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회개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허물 수 있을 때에만' 한국교회는 이 시대와 사회 앞에서, 아니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바른 교회로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3) 최근에 일부 교단이나 교회들은 개신교 자체의 교파적 분열은 덮어둔 채 카톨릭과의 연대(連帶)나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 쪽으로 사회의 눈을 돌림으로써 그 에큐메니칼(ecumenical)한 의지를 과시하려 하고 있다. 다른 종교들과의 연대는 교회의 사회적 성격이나 선교의 차원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 필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이 개신교 자체의 분열이 지닌 죄악상을 면제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에큐메니칼의 문제는 우선적으로 교회공동체 자신의 것이지, 다른 종교들과 더불어 사회윤리적인 보편종교를 수립하거나 종교다원화를 통한 자연신앙(自然信仰)의 실현에 그 초점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의 관심은 먼저 교회 자체 안에서 시작되고, 교회와 교회들 간의 관계를 거쳐,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로 진전되어야 하며, 마침내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결되어져야 한다. 개신교의 분열은 먼저 교회 자신의 불화요 사회와의 단절이며, 아울러 하나님과의 불일치임을 자각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일치의 핵심이 '서로가 서로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에 있다는 최근의 새로운 인식은 문제의 본질을 바로 짚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교회 자체의 에큐메니칼의 과제는 우선적으로 목회자와 평신도들 사이의 일치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개신교에서는 목회의 직분과 신도의 직분은 그 맡은 바 일의 내용이 서로 구별될 뿐이지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신분적 구별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분열이나 불화 또는 불신이 매우 깊어져 가고 있다. 목회세습이나 재정의 전횡(專橫)으로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된 대형교회들의 분열상은 물론이고, 그밖에 상당수의 교회들이 목회자와 신도들 간의 반목으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다. 이러한 개교회의 분열상은, 단언컨대 목회자들 쪽에서의 삶의 모범으로써만 비로소 해소될 수 있으며, 종교적 권위나 인습적인 질서에 의하여 해소될 수는 없다. 신앙윤리의 파탄은 산상수훈의 설교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많은 설교대로 살아가는 삶의 모범적 자리들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언제나 '말로 들려주는 설교'에 그치고 '삶으로 제시하는 설교'에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교회분열의 제1차적 원인이다. 그러나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분열에는 또 다른 중요한 국면이 있다. 그것은 목회자를 신도들로부터 성별(聖別)함으로써 신도들이 그들의 목회자를 구약적 제사장이나 증세 카톨릭의 사제와 같은 중보자로 인식하게 하는 반(反)프로테스탄트적 풍조이다. 이 경우에는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표면적인 불화나 반목은 있지 않고 오히려 목회자를 외경(畏敬)과 예절로써 대할 것이지만, 거기에는 깊은 '인격적 유대'와 '삶의 신뢰'가 결여되어 있음으로 해서 그 관계가 실질적으로는 분열되어 있고 또 그 분열의 내용은 더욱 본질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모든 이단들의 공통적 특징이 그들의 목회자를 신성시(神聖視)하거나 우상화하는 데 있다. 목회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평신도들과 함께 한 가난한 영혼으로 설 수 밖에 없는 죄인이요 피조물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자'가 아니다. 개혁신앙에 있어서 사람과 하나님과의 중보는 오직 그리스도일 따름이며, 목회자는 중보적 제사장이 아니라 삶의 모범적 향도(嚮導)이어야 한다. 이것이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본질적 균열을 극복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근엄한 예복(gown)과 자애로운 축원(祝願)으로 자신의 울타리를 둘러치고, 신도들과의 사이에 일정한 계급적 차이를 유지하면서 그들로부터 현실적인 섬김을 받고 있는 오늘의 목회자들은 모름지기 섬기는 자의 삶으로, 가난한 삶의 자리에로 즐겨 나아가야 한다. 청빈(淸貧)의 모범을 세우지 않고 도리어 여유와 호사(豪奢)에 익숙하며, 세금을 면탈하며, 기초생활의 공과금마저 교회의 부담으로 돌리며, 신도들의 헌금과 촌지(寸志)로 불필요한 여가생활까지 즐기는 '무절제'가 계속된다면, 교회 안에 인격적 신뢰와 공동체적 일체감의 유대는 결코 형성될 수 없다. 목회자와 신도들 사이에 신뢰와 일체감이 형상되지 않으면 신도들끼리의 영적 교제도 올바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인격적 신뢰와 영적 교류가 깨어진 곳에 어떻게 신앙의 바른 공동체가 태어날 수 있겠는가? 또 그렇게 공동체성이 깨어진 개개의 교회들이 어떻게 교단적 연합을 이루며 범교회적인 일치운동에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5) 교회일치는 계획의 수립이나 대화의 노력으로 시작되기 전에, 먼저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 및 신자와 신자들 사이에 신앙적 일체감과 인격적 신뢰, 그리고 영적 친교를 심화해 가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교회와 교파의 분열을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치유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시급한 과제이다. 서로의 중간 거리에서 만나는 어설픈 절충(折衷)의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나는 '신앙의 연대'만이 올바른 교회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교회지도자들에 대하여 가지는 기대임과 동시에 그 맹성(猛省)을 촉구하는 소이(所以)이기도 하다. 6. 글을 맺으며 이제껏 더듬어 온 논의를 돌아볼 때, 한국교회갱신의 과제는 결국 '삶의 자리'에 귀착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교회의 삶, 목회자의 삶, 그리고 신자들의 삶이 신앙의 바른 자리를 향하고 있다면 교회의 갱신은 이미 성공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신자들의 신앙고백과 그 하루하루의 삶이, 목회자들의 설교와 그 삶의 구체적인 행실이, 교회의 선포와 그 사회적 사역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경우에만 교회는 진정한 갱신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목회자들의 삶의 모범이다. 많이 맡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많이 달라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2 : 48).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행하고, 또 자신이 행하는 그것으로써 가르치는 것 --- 곧 '말로 들려주는 설교'에서 '삶으로 보여주고 제시하는 설교'에로 나아가는 것이 교회갱신의 요체다. 이것이야말로 말의 종교(religion of talking)로 전락한 오늘의 그리스도 신앙을 다시금 말씀의 신앙(Faith of the Word)으로 바르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유일한 첩경이다.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태복음 5 : 19) '행하지 않고 가르치기만 하는' 목회자들이라면, 그들은 이 말씀을 선포할 자격이 없다. 목회자들의 모범적인 삶은 신도들로 하여금 영적 감화와 인격적 신뢰 속에서 삶의 성화(聖化)를 추구하게 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개개의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회복하며, 이런 교회들이 교단을 쇄신하고 모든 그리스도 신앙의 주체들을 하나의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참된 에큐메니칼의 이상을 사회에 제시할 뿐 아니라 그 구체적인 시현(示顯)을 이 땅에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 : 20) 몸으로, 삶으로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늘 입술과 습관적 종교의식으로만 영광을 돌리는 우리들이 바울의 이 간곡한 권면 속에서 교회갱신의 참된 과제를 새롭게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우근 (李宇根) lwk@scourt.go.kr 現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前 사법연수원 수석교수 극동방송 매주 금요일 오전 7:30 에 방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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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용어 개정안 해설(통합측, 86회 2001년)
Ⅰ. 기도와 관련된 용어 1. 당신 -->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은총으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세우신 이 교회를…". 이와 같이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만일 어느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당신이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말은 의당 다음과 같이 고쳐서 말해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이다. 우리말 2인칭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당신'은 다만 3인칭에서는 극존대어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3인칭이 될 수 없고 우리 간구를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에 해당되므로 '당신'이란 호칭은 안 된다.(제86회 / 2001년) 2. 기도 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 --> 기도 드립니다(기도합니다)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같이 동사 '기도하다'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써야 하는데 요즈음 이를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드렸습니다'와 같이 과거형을 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5분이나 10분전에 기도를 시작했으므로 간구 한 모든 말들은 문법적으로는 이미 과거 또는 현재완료가 되므로 동사 '기도하다'의 과거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 기도(祈禱)는 글자 그대로 그 핵심이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간구다. 간구의 내용은 소원이며 소원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러한 미래 지향적인 소원을, 즉 우리의 바람을 '기도하였습니다'로 끝낼 수는 없다.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로 끝내는 것이 옳다.(제86회 / 2001년) 3.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 주님.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라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법상의 문제가 있다. 즉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지 못한다. 2인칭에는 존칭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 호격 조사 '-아'나 '-야'가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친구 사이나 아랫사람에게는 "복동아.", "철수야."와 같이 부를 수 있지만 손윗사람에게는 호격 조사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버님이시여.", "할아버님이시여."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 이미 사어가 된 '-이여', '-이시여'를 붙여서는 안되고 그저 '주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로 해야 옳다.(제86회 / 2001년) 4. 우리 성도님들이 -->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국어 존대법에서는 청자(聽者)가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은 바른 표현이 못된다. "할아버지. 형님이 가셨어요.", "아버지. 누님이 오셨어요." 첫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할아버지'와 주어인 '형님' 및 화자(話者)인 손자 '나'다. 여기서 청자인 '할아버지'가 최상위자이므로 '형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 없다. 둘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아버지'와 주어인 '누님'과 화자인 '나'다. 여기서도 청자인 '아버지'가 최상위자이기 때문에 '누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할아버지. 형이 갔어요.", "아버지. 누나가 왔어요." 공중기도에서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일한 입장,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즉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격이다. 그러므로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회중을 가리켜 '우리 성도님들'이라 존대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저희들', '교회의 권속들'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제86회 / 2001년) 5. 대표 기도 --> 기도 인도 예배 순서 가운데 기도 시간이 되면 예배 인도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님이 대표 기도를 하시겠습니다."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못된다. 온 회중이 머리를 숙여 무언의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할 경우 우리는 이를 '기도 인도'라 부르는 것이 좋다. 기도 인도자는 기도의 대표자가 아니다. 이 기도 인도자는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다른 사람들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는 생각까지도 그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기도 인도자는 대표로 뽑힌 어느 운동 선수와는 다르다. 그는 대표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며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온 회중의 생각을, 즉 그들의 소원을 보다 깊게, 보다 하나님 뜻에 맞게, 아울러 그 절차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기도 인도자가 기도할 때 회중은 결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없다. 만인제사장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사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기도에 있어서 '대표', '대신'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대표기도', '대신하여 기도…'는 '기도 인도'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제86회 / 2001년) 6. 사랑의 예수님 --> 사랑의 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예수님', '고마우신 예수님' 등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을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뢴 후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되어 있다. 역시 이 속에도 성부 하나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본임을 알아야 한다.(제86회 / 2001년) 7. 참 좋으신 하나님 --> 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요즈음 '참 좋으신'과 같은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재고를 요하는 말이라 하겠다. 즉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인 말들을 보면 '거룩하신', '만유의', '생명의', '신실하신', '의로우신', '자비하신', '영원하신', '위에 계신', '능력이신', '진실하신', '구원하시는', '하늘에 계신', '사유하시는', '은혜로우신', '보수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홀로 하나이신', '천지를 지으신'… 등과 같이 대부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들이 수식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참 좋으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가 된다. 즉 '참 좋으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 정서로 느끼는 바대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얄팍한 주관적인 감정으로 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를 과장하여 발전시킨다면 '사랑스러운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과는 판이한 뜻이 된다.), '미운 하나님', '야속한 하나님', '귀찮은 하나님'… 등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제86회 / 2001년) Ⅱ. 예배, 예식과 관련된 용어 8. 사회자 --> 인도자(예배시)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사회자라고 하면 마땅히 일반 회의의 진행자를 의미한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예배가 아닌 결혼예식이나 임직식 같은 인간 중심의 의식에서는 진행을 맡은 사람을 사회자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현장에서 사회자라는 명칭은 경건성의 결여를 느끼게 하므로 단순한 사회자(presider)의 개념을 넘어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로 부름이 타당하다. 인도(引導)의 사전적 의미는 "알려주며 이끄는 일"이므로 예배 인도라는 말을 회의에서의 사회와 구분지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본 교단 1998년 총회에서 통과된 표준 예식서에는 모든 예배의 진행자는 인도자(引導者)로, 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로 표기하였음을 밝힌다.(제86회 / 2001년) 9. 성가대 --> 찬양대 우리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전담한 찬양대를 최근에 '성가대'로 많이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출판사들이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르는데서 보편화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 우리 한국 교회는 찬양대라는 이름이 통용되었고 성가대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세이카다이―성가대(聖歌隊)'가 그대로 직수입되면서 성경에도 없는 '성가대'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성가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이며, 우리의 '찬양'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성가대'라는 용어는 성경의 정신과 우리의 고유한 이름인 '찬양대'로 바꾸어 부름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10.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용불가(설교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한 인간이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위하여 어떤 사실이나 바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빌고 원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표현이 설교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 타당한가를 연구 검토시킨 바 있는 본 교단 총회는 1981년 65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 첫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에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설교는 설교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축도는 축도대로 하는 것이 좋다. 셋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의 사용은 회중에게 자극을 주고 흥분시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고는 안 되게 만들어 설교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미신적 기복 사상을 키워 줄 우려가 있다. 넷째, 설교의 근본 목적이 흐려지고 회중들에게는 설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아멘"을 하게 하는 식으로 유혹되기 쉽다. 연구위원회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설교시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를 하지 않도록 건의하였고 총회는 이를 아무 이의 없이 통과시킨 바 있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서 한국교회의 설교 사역을 바로잡는 일이라 보아 설교시에 이 말의 사용을 억제함이 타당하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11. 대예배 --> 주일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큰 예배가 있고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가 예배일진대, 거기에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를 지칭하여 대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교회들이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 때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대예배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대예배가 있다면 소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소예배일 수가 없다.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한에 있어서, 어떤 예배도 소예배일 수가 없다. 다만 예배일뿐이다. 물론 시간별로 예배를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라든지, 주일 저녁(오후) 찬양 예배라든지, 혹은 시간에 따라 1부 예배, 2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예배"라는 용어는 합당한 말이 아니다.(제86회 / 2001년) 12. 열린 예배 --> 열린 집회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1990년대 이후에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예배는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로 알려진 집회의 형태로,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통하여 소개되면서 한국 교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본래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구도자"라는 부자연스러운 번역 대신에 1990년대 초에 유행하던 "열린"이라는 단어로 의역한 것으로 "구도자의 집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열린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구도자의 집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보다는 "전도집회"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 혹은 구도자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예배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응답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배의 기본 정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받거나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열린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의 행위여야 하지,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예배가 회중지향적이 되고,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이 드림에 있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그 예배를 통해서 얻어내는데 목적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영혼구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위한 집회이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차라리 "열린 집회"로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많은 교회에서는 불신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한 "구도자의 집회"와는 별도로 신자 중심의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즉 구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 집회로서의 열린 예배의 개념보다는 기존 신자들에게 새로운 생동감을 주는 예배로서의 열린 예배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예배는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전통적인 예배를 벗어나서 잔치적이고 시각적이며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많이 격려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인데, 이를 가리켜서 "열린 예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 자체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능하면 "열린 예배"라는 용어의 사용은 삼가는 좋겠다. 의미상으로도 "열린 예배"가 있다면 "닫힌 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무엇이 열린 예배이고, 무엇이 닫힌 예배인가? 또 무엇에 대해서 열려있고, 무엇에 대해서 닫혀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굳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활기 있는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열린" 이라는 용어보다는 "젊은이 예배" 혹은 "찬양 예배" 등으로 사용하고,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13. 예배봐준다 --> 사용불가 흔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업예배를 봐준다" "구역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 행위이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내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이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드리거나 봐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점을 봐준다"는 미신적인 용어를 상기케 하는 "예배봐준다"는 표현은 예배 신학적으로 볼 때에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용어이다. (제86회 / 2001년) 14. 준비찬송 --> 사용불가 찬송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곡조가 있는 시이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 곡을 붙인 성도들의 경배의 표현이며, 기도이며, 때로는 성도들의 신앙고백과 결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이면 열심히 찬송 부르는 것을 성도의 바른 자세로 알고 찬송을 열심히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찬송의 생활이 습관화 되다보니 때때로 찬송의 목적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준비찬송"이라는 말에서 찾아보게 된다. 교회에서 "다같이 준비 찬송을 부르면서 앞자리부터 채우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찬송을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런 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송을 시간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나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준비찬송"이라는 용어는 마땅히 사용해서는 안 된다.(제86회 / 2001년) 15. 예배 / 예식 / 기도회 --> 구별사용 한국교회는 어느 나라의 교회보다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이다. 그래서 예배와 각종 기도회로 한 주일에 여러 차례 모인다. 주일 낮을 비롯하여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밤, 그리고 매일 새벽 등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열심은 세계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모임에 예배라는 명칭을 붙여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돌, 회갑, 추모 등의 모임에도 예배라는 명칭을 붙임으로써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배와 예식과 기도회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신 창조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결코 인간을 위한 모임이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배와 예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돌, 회갑, 추도, 입학, 졸업, 결혼, 입당,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를 할 경우에는 예식으로 표현하고, 예배와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목적으로 모이는 수요 저녁 모임과 금요 철야 혹은 심야 모임 그리고 매일 새벽 모임 등은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으로 명시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를 통과한 「표준예식서」의 정신을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주일예배, 주일저녁 찬양예배, 교회학교(주일학교)예배,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 경건회(각종 회의 시작 전)(제86회 / 2001년) 16. 헌금 --> 봉헌 한국 교회의 예배 순서 가운데 "헌금"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 순서는 원래 봉헌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 속에서 봉헌의 순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봉헌의 의미는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즉 봉헌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정성을 다하여 경청한 무리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내어놓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순서를 "헌금"이라는 용어로, 즉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로 지칭하는 것은 봉헌의 의미를 아주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헌금"이라는 용어보다는 "봉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마땅하다.(제86회 / 2001년) 17. 축제 --> 잔치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축제'를 "축하하고 제사지냄"이라고 단순하게 풀이하여 실어 놓았으나 이가원과 임창순의 {東亞漢韓中辭典}에서는 "축제란 제사 이름이니, 묘문(廟門) 안과 밖에서 이틀에 걸쳐서 드리는 묘문제로서 조상을 사당 안에서 제사지내고, 그 다음날 사당 밖에서 지내는 제사이다"라고 정의해 놓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마을 제사를 영어의 Celebration 과 Festival 같은 축하행사를 보면서 자신들이 제사에서 마음놓고 떠들고 소리지르면서 춤추는 고유한 행사와 모양새가 비슷함을 알고, 1928년에 '축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그들의 사전에 도입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은 축제의 문제점을 보면서 이제는 성경대로 잔치, 또는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등으로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예를 들어 성령 축제→성령 잔치, 부활절 축제→부활절 절기 행사, 성탄 축제→성탄 축하 행사 등이다. 참고로 공동번역에서는 57회, 표준 새번역에서는 13회에 걸쳐 무분별하게 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나 개역 성경과 개역 개정판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힌다.(제86회 / 2001년) 18. 하나님의 축복 -->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복에 관한 표현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축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상과 같은 표현들을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복을 비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다음의 성구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비는[祝福]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降福] 분임을 잘 밝히고 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지라."(개역 한글판 창 12:3) "그가(멜기세덱)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개역 한글판 창 14:19)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또는 "복 내려(베풀어) 주시옵소서."로 바로잡음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Ⅲ. 장례와 관련된 용어 19. 소천(召天)하셨다. -->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숨을 거두었다. 최근에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의 죽음을 알리는 광고에서 "고 ○○○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셨다."는 문장을 보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교회에서 발표한 이러한 광고는 매우 부끄러운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 "나는 소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비록 사전에도 없는 어휘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소천을 받았다."로 해야 한다. 그러나 이토록 실수가 많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불러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경우는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20.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용어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하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어느 장례예식에서 목사가 "이제 침묵으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립시다." 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문객이 문상을 하면서 유족들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나 '명복(冥福)'이라는 용어는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 말은 불교의 전용어로서 불교 신자가 죽은 후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거기서 받게 되는 복을 가리킨 말이다. 곧, 죽은 자들이 복된 심판을 받아 극락에 가게 되기를 바란다는 불교의 내세관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가 지금껏 교회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용어 대신 순수하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든지, 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와 같은 말로 유족을 위로함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21. 미망인 --> 고인의 부인, 고인의 유족 미망인(未亡人)이라는 용어는 순장(殉葬)제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순장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음을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먼저 죽은 시신과 함께 묻는 장례 풍속을 말한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와 이집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특히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분신 자살하여 순장되는 '사티’라는 풍습이 1829년 법으로써 금지되기까지 존속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22대 지증왕 3년(주후 502년)에 왕명에 의하여 순장 금지되기까지 이러한 제도가 존속되었다. 이런 순장제도가 성행할 때나 쓰일 수 있었던 '미망인' 이라는 용어의 뜻을 풀어 보면 "남편이 죽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인데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용어의 뜻을 알았을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임을 깨닫게 된다.(제86회 / 2001년) 22. 칠성판(七星板) --> 고정판 또는 시정판 우리의 장례문화에 변화가 일고 있으나 아직껏 가정에서 죽음을 맞은 경우가 많으며 그 때마다 목회자가 직접 시신을 다루는 일이 많다. 이때 시신이 반듯하게 굳어지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널빤지를 시신 밑에 깔고 손발의 위치를 반듯이 잡아 준다. 여기에 사용되는 널빤지 사용의 전통적인 관례가 이 널빤지에 북두칠성을 본 따서 일곱 개의 구멍을 뚫었다 하여 '칠성판'이라 부른다. 흔히 우리 교회에서도 적당한 이름을 못 찾아 '칠성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유래는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토속 신앙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신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기에 순수하게 '고정판(固定板)' 또는 '시정판(屍定板)'으로 부름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23. 영결식, 고별식 --> 장례예식 인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행하는 예식을 칭하는 용어로서 '영결식', '고별식', '발인식'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우리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결식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며 고별식은 '작별을 고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교리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표현은 적당하지 못하다. 그리고 발인식은 시신을 담은 상여가 집에서 떠남을 뜻하기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 이러한 용어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에서는 표준예식서를 통하여 이미 장례예식으로 정리하였기에 이제는 모두가 '장례예식'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해야 한다.(제86회 / 2001년) 24. 삼우제(三虞祭) --> 첫 성묘(省墓) 우제(虞祭)란 장례를 마친 뒤에 지내는 제사로서 우리의 장례문화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이 때의 제사는 세 번 갖게 되는데 그것을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라 한다. 이 중에 아직도 삼우제라는 이름은 교회 안팎에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최근의 삼우제는 장사 지낸 뒤 3일 만에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관례로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성묘란 시체를 묻고 뫼를 만드는 일, 즉 산역(山役)이 잘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다. 아직도 매장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는 가족들이 3일만에 성묘를 하는 일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본 교단의 표준예식서에는 삼우제라는 이름을 '첫 성묘'로 부르도록 하였는데 매우 적절한 용어라고 본다.(제86회 / 2001년) Ⅳ. 회의와 관련된 용어 25. 고퇴 --> 고퇴 또는 의사봉 한국의 장로교회는 정규 회의에 사용하는 의사봉(議事棒)을 '고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 용어는 국가나 사회 기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며, 한국 교회 가운데서도 장로교회에서만 제한적으로 쓰고 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는 회의가 열렸던 때의 일이다. 절차위원장이 은으로 십자를 면에 새기고 청홍으로 태극을 머리에 그리고 광채 있는 은으로 띠를 띤 견고한 '마치'를 마삼열 회장에게 전달했다. 회장은 이 물건이 영원토록 대한장로교 노회의 마치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마치'란 이름이 속되다는 의견이 있어 회장은 기 일, 한석진 두 사람에게 이름을 개정하도록 임무를 맡겼다. 두 위원은 이틀 후 회의에서 '나무마치 퇴(槌)'자와 '고두'라 할 때 쓰는 '두드릴 고(叩)'자를 합하여 '고퇴'라 정했음을 보고하였고, 이것을 길선주 회원의 동의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고퇴'라는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에서 작명되어 결의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공식적 효력을 가진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노회 창설 때 제작된 의사봉에 대한 개별 명칭으로 지어졌고, 기독교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은 이름이며, 장로교회 밖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특수용어임을 고려하여, 장로회 총회의 상징적 의사봉 만을 '고퇴'라 부르고 그 외에는 '의사봉'이나 '사회봉(司會棒)'이라는 현대적 용어로 바꾸어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제86회 / 2001년) 26. 자벽 --> 지명, 임명 교회 회의록에 종종 '회장 자벽'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심지어 '자백'이라고 잘못 써 놓은 사례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고어에 유래를 두고 있어 현대에 와서 거의 세력을 잃어버린 말을 교회가 고수하다보니 이처럼 생소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자벽(自 )이란, 장관이 자기 뜻대로 관원을 추천하여 벼슬을 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이는 <수교집록(受敎輯錄)> <조선철종실록(朝鮮哲宗實錄)>에서 용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벽 행위는 각 관아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기준도 없이 자기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에 대거 기용함으로써 심각한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미나 정서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이 말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의장이 임의로 어떤 임원을 임명하는 일'로 바뀌었으나 어감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각종 회의에서 굳이 이 용어를 고집하고 있다. 대체로 회의 벽두에 특별위원을 선정하는 경우에 국한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회장의 자의임명이 불가피한 형편이라면 '회장 자벽'이라는 용어 대신에 '회장 임명' 또는 '회장 지명'으로 고쳐 쓰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27. 증경 --> 전(前) '증경(曾經)'이란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의 고대시가에 기원을 둔 특수한 말이다. 증(曾)은 '일찍이'라는 뜻이고, 경(經)은 '지내다'라는 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찍이 지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노조린(盧照隣)이라는 사람의 작품 <장안고의(長安古意)>에서 '증경'이라는 시어가 나오는데, '증경학무도방년(曾經學舞度芳年)' ―일찍이 춤 배우느라고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네― 정도이므로 그다지 심오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한자어를 전통적으로 존중하며 차용하기 좋아했던 선비들이 이런 희귀한 용어를 우리나라에 들여왔고, 한국 교회도 교단을 위하여 일한 경력이 있는 분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자 이 단어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는 이 용어를 전혀 쓰지 않고 있어 '증경대통령' '증경총장' '증경사장'이라는 호칭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교회에서만 '증경총회장' '증경노회장'으로 부르며 심지어 '증경청년회장'이라고까지 하여 이 단어를 남용하는 실정이다. 신분을 존중하기 위해 중국의 고대어를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총회장'이라고 하여 존대의 정도가 손상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제86회 / 2001년) 28. 휘장 분배 --> 꽃 증정 총회나 노회에서 개회를 선포한 직후 '휘장 분배'라는 순서를 갖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점차 이를 생략하는 추세이지만, 역대 회장들과 주요 임원들이 일제히 단상으로 올라가 도열하면 이어서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등장하여 임원들의 가슴에 꽃을 꽂아 드리는 모습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휘장(徽章)'이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모자나 의복에 붙이는 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표지(標識)'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 익숙해진 영어 단어로 '배지(badge)'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회의 초반에 원로회원에게 상징적인 지위를 부여하고자 배지 대신 가슴에 꽂아 드리는 꽃은 결코 휘장이라 할 수 없으며, 이 순서 또한 매우 형식적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분배(分配)'라는 용어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분배는 고르게 나누어준다는 뜻이므로, 원로들에게 표지를 고루 나누어주는 순서라는 의미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굳이 이 순서를 사용하려 한다면 '꽃 증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가장 타당하리라 본다.(제86회 / 2001년) Ⅴ. 교회생활과 관련된 용어 29. 당회장 --> 담임목사. 당회장(당회 회의 때) 많은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당회장으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예배순서를 실은 주보나 교회 게시판에 당회장 ○○○ 목사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원래 당회장이란 영어의 Moderator로서 토론이나 회의의 사회자 또는 중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래서 당회 회의를 주관하는 목사를 비롯하여 노회와 총회의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을 모두 '모더레이터'라고 부른다. 그러기 때문에 당회를 주관하는 순간에는 목사를 '당회장'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그 외의 시간이나 장소에서는 '목사' 또는 '담임목사'로 부름이 타당하다. 이 호칭이 바로잡아지지 않으면 장로를 언제 어디서나 '당회원'으로 불러야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제86회 / 2001년) 30. 예수 --> 예수님, 성령 → 성령님 우리의 언어문화는 윗분들을 호칭할 때 '님'자의 사용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특히 자신이 섬기는 신의 존재를 호칭할 때는 '님'자 또는 그 이상의 존칭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신도들은 '부처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이 철저히 '님'자를 사용하여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그 위(位)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하게 되어있다. 성삼위가 동격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한동안 논쟁이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325년 니케야 공회의에서는 제2 위격 예수님의 신성문제가 확정되었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제3 위이신 성령님의 신성문제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에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성삼위는 동격이신데 어느 위에는 '님'자를 붙여 호칭을 하고, 어느 위에는 그렇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호칭할 때도 '님'자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 '성령님의 역사'로 언어의 순화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31. 전야제 --> 전야 축하행사 이 용어는 '축제'라는 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부활절 축제' '성탄 축제'라는 용어를 '부활절 절기행사' '성탄 축하행사' 등으로 바꾸어 써야 할 필요성을 밝혔으므로, 부활절 전날 밤에 갖는 행사도 당연히 '부활절 전야제' 대신 '부활절 전야 축하행사'라고 불러야 한다. 전야제는 전날 밤에 여는 축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종 제사가 새벽에 열리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앞날의 밤은 이것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보름이나 중추절 같은 명절의 전날은 밝은 달을 바라보며 축하의 행사를 펼치기에 적절했었다. 성경에는 어떤 행사에서 전야에 모여 축하 자리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에서는 부활이나 성탄처럼 새벽에 이루어진 일을 축하하기 위한 전야 행사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행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전야제' 대신 '전야 축하행사'라고 하여 제사의 성격을 배제하고, 밤 깊은 시간까지 축하한다는 순수한 의미를 담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32. 사모 --> 사모님 예로부터 스승을 높여 사부님이라 했으며 이에 걸맞게 스승의 부인을 높이어서 사모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서는 목사 부인도 사모님이라 부르고 있다. 선생이 자신을 사부라 부를 수 없듯이 선생이나 목사도 자기 부인을 사모라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느 목사가 자기 부인을 가리켜 사모라고 한 다음과 같은 표현은 잘못 된 것이다. "우리 집 사모는 다녀왔지요." 또한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들도 자신을 사모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최근 목사 부인들이 모여서 "사모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사모회"는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목사 부인들이 자신을 사모라 지칭했기 때문이다. 이 "사모"는 주로 제자나 평신도들이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을 높여 불러 주는 말이기 때문에 실제 사용 될 때는 "사모님"이 될 수밖에 없다.(제86회 /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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