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절기와 달력"

    달력은 우리모두 인정하는 필수적인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최초의 달력은 농부의 1년 4계절과 그 절기들에 얽힌 종교의식들 주변에서 발전되었다.

    이러한 연관으로 인하여, 또 그 전체 주제의 복잡성으로 인하여 제사장들은 달력을 취급함에 있어서 전문가들이 되었다.
    교역과 통치는 정확한 날짜와 연대 계산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유역의 큰 제국들은 고도로 정확성을 가진 여러가지 연대 계산 체계를 발전시켰다.

종교력

민간력

바벨론식 새이름

가나안식 옛이름

양 력

절 기

제 7월

제 1월

디스리월

에다님월(왕상 8:2)

9-10월

나팔절, 초막절

제 8월

제 2월

말케스반월

불월(왕상 6:38)

10-11월


제 9월

제 3월

기슬르월(느 1:1)


11-12월

수전절

제10월

제 4월

데벳월(에 2:16)


12-1월


제11월

제 5월

스밧월(슥 1:7)


1-2월


제12월

제 6월

아달월(에 3:7, 스 6:15)


2-3월

부림절

제 1월

제 7월

니산월(느 2:1, 에 3:7)

아빕월(출 13:4, 23:15)

3-4월

유월절, 무교절

제 2월

제 8월

이야르월

시브월(왕상 6:1, 37)

4-5월


제 3월

제 9월

시완월(에 8:9)


5-6월

칠칠절(오순절)

제 4월

제10월

담무스월


6-7월


제 5월

제11월

압월


7-8월


제 6월

제12월

엘룰월(느 6:15)


8-9월


    기본적으로 모든 달력은 해와 달과 별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태양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하루 혹은 날의 단위와 한 해의 계절들의 단위를 제공해 준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은 한 해를 대략 29 / 30일의 단위로 나누어 놓는다.

    큰 절기들은 만월과 때를 같이 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구름이 없는 팔레스타인 에서는 실제로 초생달이 처음 나타나는 날부터 계산하는 것 - 절기의 날까지. 14일 내지 15일 그리고 그 다음 초생달이 나타날 때까지 14일 내지 15일 - 이 더 쉬웠다.

    문명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또한 밤하늘에 나타나는 별자리의 모양이 한 해의 계절들에 따라서 주기적으로 변하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목자들은 자주 해보다는 별을 보고 계절을 더 쉽게 알아 맞출 수가 있었다.

    월력의 열두달은 태양력의 열두달보다 약 11일이 부족하다. 바벨론 사람들과 헬라 사람들은 마침내 태양력의 19년 = 월력의 235달(현대의 천문학적 계산에 의해서 입증된 사실)임을 알아내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언제 어떻게 윤달을 삽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초창기부터 실제적인 조정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는 달들에 이름과 숫자가 붙여져 이었고 또 해마다 절기들이 정하여진 혹은 계산된 날에 지켰기 때문이다.
    12번째의 달이 지난 다음 새달이 춘분보다 14일 이상 먼저 나타날 때에는 태양의 1년 주기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12번째의 달(제2의 아달월) 을 한번 더 보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밀과 과실의 추수와 연관된 주요 절기들을 가능한 한 정확히 농작물의 성장시기에 맞출 수가 있었다.

성경시대의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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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파와 교단


기독교에 많은 교파가 있지만 이단이 아닌 이상 기독교로서의 공통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간이 되는 교리는 삼위일체론, 처녀잉태, 구속, 부활, 재림 등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들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예배의 형식이나, 성만찬에 대한 견해, 교권체제, 신조,
신학적 바탕 등에서 조금씩 다릅니다.


장로교 (長老敎 Presbyterian)
칼뱅의 신학(神學)과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성립한 그리스도교의 개신교 교파.

장로란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감독(bishop)·장로(elder) 등과 같은 의미로, 장로교는 이러한 장로들에 의해
치리(治理)되는 교회를 말한다.
창시자는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뱅(Jean Calvin)으로, 그는 16세기 중엽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회제도를 확립하였다.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해 1559년에는 프랑스에서만 2,000여 교회가 장로제도를 채택하였고, 이어
네덜란드·스코틀랜드에서도 많은 장로교회가 생겨났다.

특히 스코틀랜드는 1560년 이후 장로교회를 국교회로 지정해 이후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660년 청교도혁명이 끝나고 왕정 복고가 이루어진 뒤 잉글랜드에서는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세계 장로교의
규범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헌법·예배지침 등을 청교도혁명 기간에 마련했다는 점에서
장로교 역사상 중요한 시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1706년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노회가 조직되고, 1789년에는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노예문제·신학·전도방법 등의 이견으로 여러 교단이 출현하였는데, 신학·교리 등에는 차이가 없었다.
18세기 이후 미국 장로교회는 아시아·아프리카 등 해외선교에 앞장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함으로써 장로교의
세계화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선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1882년(고종 19) 《누가복음》《요한복음》이 번역
출간되고, 1907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1912년에 총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행정조직으로 운영되던 한국 장로교회는 광복 이후 신앙과 신학노선 등 여러 갈등 요인으로 인해
분열되기 시작해 2002년 현재 40개가 넘는 교단이 활동하고 있다.
세계적인 장로교 연합단체로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이 있고, 세계 장로교 총 교인수는 약 50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측 http://www.yejang.or.kr/, 개혁측 http://www.reformed.or.kr,
통합측
http://www.pck.or.kr/, 고신측 http://kpm.org/, 대신측, 고려http://www.coramdeo.net,
재건
http://www.jaegun.or.kr/  등 270여개의 파)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기장 http://knp.or.kr/)가 있습니다.

1953년 김재준 목사 등의 신학적 입장을 이유로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로 나뉘었고, 1959년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한 이념 갈등 때문에 통합과 합동으로 분리되었습니다.

* 교권체
제 : 총회-노회-교회

*
학교: 총신대학교(합동), 총회신학교(개혁), 장로회신학대학(통합), 고려신학대학(고신) 안양대학교(대신)
고려신학교(고려) 한신대학교(기장)

 

  

감리회 (監理會 Methodist Church)
1729년 영국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하여 시작된 그리스도교 교파.

옥스퍼드대학교를 중심으로 존 웨슬리(John Wesley)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그리고 G.휘필드
등의 대학생 그룹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데 규칙적이면서도 조직적으로 행동하여
메서디스트(Methodist:格式主義者)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들은 성경 및 신학 연구 등에 힘쓰고, 빈민과 병자, 감옥의 죄수들의 전도에 힘썼다.

1738년 5월 24일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이 모인 올더스케이트 거리의 집회소에 참석하여 오후 8시 45분경
인도자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로마서(書) 서문을 읽을 때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한다.
이 회심의 사건은 존 웨슬리의 생애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고, 감리회의 구원·신앙·성결의 교리를 설명해 주는 산
증거가 되었다.
원래 존 웨슬리는 고교회파(高敎會派)로서 영국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독자적인 운동을 하였는데, 영국교회에서는
그의 교회 내 설교를 금하였으므로 야외설교의 방법을 택하여 그 운동은 점차 확대되었다.

1744년 존 웨슬리는 메서디스트파 신자들을 런던에 모아놓고 전도사업 방침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이것이 곧
감리회의 최초의 연회(年會)이다.
이때까지도 존 웨슬리는 영국교회와 분리하려는 뜻은 없었고 교회에 속한 채 전도하려 했지만, 1784년 런던 감독에게
미국으로 파견할 선교사를 안수하여 주도록 청하자 감독이 거절하므로 그 자신이 안수를 베풀어 T.코크 박사를
미국의 총감독으로 삼고 그 밖에도 몇 사람에게 안수를 주어 목사로 세우니 이때부터 감리교회는 실제적인 한 교파를
이루게 되었다.

감리회의 발전은 교구제도와 경건한 신앙을 고수하는 데 있었다.
존 웨슬리의 인격 ·조직력 ·지도력, 그리고 야외설교 ·평신도설교 등 꾸준한 복음활동 및 엄격하고 규율적인 생활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1791년 존 웨슬리가 서거하였을 때의 교세는 영국 전역에 확장, 잉글랜드를 본거지로 하였던 감리회 부흥운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이르렀고 미국에서는 휘필드의 주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조직의 기본단위는 구역이며, 그것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교회로 조직된다.
구역들은 지역적으로 지방회를 조직, 감리사가 피차 협동하여 교회조직과 사업발전에 힘을 기울이고 지방회는
다시 더 큰 집단을 형성하여 연회를 조직하며, 연회는 감독이 관할한다. 그리고 최고기관인 총회가 있다.

감리회 교리는 사도신경 속에 제시된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한다.
감리회의 특색은 교리보다도 실제적인 생활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라 하겠다.
사랑에 의하여 구현되는 신앙과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며 이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신학적 이론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 것도 특색의 하나이다.

감리회에는 모든 신도가 각기 행하지 않으면 안될 규율, 곧 규범이 있고, 25개조의 종교강령이 있으며, 이것은
감리회의 헌법정신이기도 하다.
감리회 전도방법의 특색은 부흥설교를 통한 전도와 평신도를 통한 개인전도 및 심방전도이다.
감리회의 신앙과 교리는 존 웨슬리가 발표한 25개조의 종교강령과 그의 53개의 ‘표준설교’, 그리고 그가 지은
신약성서 주석에 잘 나타나 있다.

감리교도 몇개의 교파가 있는데 기독교 대한 감리회(http://kmcweb.or.kr/), 예수교 대한 감리회,
기독교 대한 자유감리교회 등이 있는데 이들의 신학적입장은 같습니다.


*
 교권체제 : 감독회장-연회감독-감리사-목사
* 학교: 감리교신학대학

 

 

성결교 (聖潔敎 Holiness Church)
1901년(광무 5) 2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OMS) 소속 선교사인

C.E.카우만과 E.A.킬보른(한국명 吉寶倫)에 의해 세워진 프로테스탄트의 교파.

장로교·감리교와 함께 한국에서는 3대 프로테스탄트 교단의 하나이다.
감리교 목사인 이들 선교사는 일본의 도쿄[東京] 간다구[神田區]에 동양선교회 전도관을 세우고

일본인 목사 나카다[中田]의 후원 아래 동양일원의 선교를 시작하였다.


교육에 힘쓰라는 선교회 본부의 지시도 있었으므로

전도관 1층에 성서학원을 개설, 성경 ·신학 등을 가르쳤다.

한국인 유학생 김상준(金相濬) ·정빈(鄭斌) 등이 이 학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귀국하자

1907년 염곡(鹽谷:현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마련한 것이 한국성결교의 효시이다.
1911년 이명직(李明稙)·이명헌(李明憲) 등 5명이 동경성서학원을 마치고 귀국,

안수를 받고 장로사(長老師:순회목사)가 되어 선교사들의 후원 아래

아현동 고개 위에 새로이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을 열면서

본격적인 목회자 양성과 노방전도(路傍傳道) 등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21년 9월 중생(重生)·성결(聖潔)·신유(神愈)·재림(再臨)의 사중교리를 내세운

‘기독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탄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문제로 수백 명의 성직자 ·신도들이 수난을 겪고,

교단이 강제 해체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 한국 교계를 휩쓴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를 둘러싸고

교단이 분열되기 시작, 현재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http://www.kehc.org/) ·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및 중도파 등 몇 개파로 나뉘어져 있다.


* 교권체제:
총회-지역총회-지방회-개 교회
* 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성결대학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基督敎大韓聖潔敎會 The Korea Evangelical Church)


한국 기독교 교파의 하나. 그 중심교리는 중생(重生)·성결·신유(神癒)·재림(再臨)의 4중복음, 즉 중생하게 하는 그리스도, 성결하게 하는 그리스도, 치료하게 하는 그리스도, 재림하는 그리스도이다.
한국 기독교 교파의 하나. 그 중심교리는 중생(重生)·성결·신유(神癒)·재림(再臨)의 4중복음, 즉 중생하게 하는 그리스도, 성결하게 하는 그리스도, 치료하게 하는 그리스도, 재림하는 그리스도이다. 이는 감리교의 창시자인 W. 웨즐리의 사상의 일부이기도 하며 복음주의사상의 계승이기도 하다.

연혁
한국의 성결교회는 일본 도쿄[東京(동경)]에서 동양선교회 소즉 선교학원을 졸업한 정빈(鄭彬)과 김상준(金相濬)이 귀국하여 1907년 서울 종로에 복음전도관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모체인 동양선교회 (東洋宣敎會;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는 미국의 C.E. 카우던과 E.A. 킬버른이 극동지방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하여 1901년 일본 도쿄에 복음전도관을 창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1910년 영국인 J. 토머스가 한국 동양선교회에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1911년에는 현재의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 성서학원을 설립하여 교역자를 양성하였으며 1913년에는 아현전도관이 설립되었다. 1921년에는 충정로에 성결교회 본부 및 성서학원 준공을 계기로 그 명칭을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하여 전도와 목회의 양면적 선교활동을 시행하는 획기적 발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어 교세의 성장에 따라 1924년 교역자회를 조직, 최초의 해외선교사로 이원근(李元根)전도사를 간도의 용정(龍井)에 파견하였다.

1929년에는 제1회 연회(年會)를 개최하여 교회헌법을 발표함으로써 정식교단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1933년에는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박현명(朴炫明)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러 교회에 대한 탄압정책이 심해지면서 1943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성결교회 복음이 일본 국체(國體)에 배치(背馳)된다는 이유로 강제해산되었으며 많은 신도들이 순교 및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1945년 11월 재건총회를 개최하여 그 명칭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변경하여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독립·자주권을 선포하였다. 이후 교회는 다시 성장의 궤도에 올랐으나 6·25로 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최석모(崔錫模)·박현명·이건(李鍵)·김유연(金有淵)·박형규(朴亨圭) 등이 납북되었다.

뒤이어 불어닥친 교회분열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렸다가 몇번의 합동작업 끝에 재연합되어 1989년 현재 82주년의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침례교 (浸禮敎 Baptists)
자각적인 신앙고백에 기초한 침례를 시행하는 그리스도교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특히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서원리(聖書原理) ·침례 ·만인사제(萬人司祭),

각 교회의 독립,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강조한다.
영국의 청교도(퓨리턴)의 여러 파 가운데 하나로 생겨났으며,

창시자는 J.스미스(1554?∼1612)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교직자로 1608년 국교회의 압박을 피하여 동지들과 함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는데,

그 중 T.헬위스와 몇몇 동지들이 영국으로 돌아가 1612년 침례교회를 창설하였다.

아르미니우스파(派)의 입장을 취한 일반침례파와 칼뱅적 입장에 선 특수침례파의 구별이 있다.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도 크게 퍼져서, 현재 미국 최대의 교파를 이루고,

대소 27개의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다.
한국에는 1890년 캐나다의 M.위크 선교사가 입국하여

함남 원산(元山)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것을 효시로 하여,
1905년 제1회 총회를 가지면서 보급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총회'의 두 그룹이 있었다.

두 그룹은 1959년 '한국침례회연맹'으로 통합하였고,

1969년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유지재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 (http://www.koreabaptist.org/)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침례교는 미국에서 카톨릭 다음으로 큰 교단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목사, 안수집사, 교사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침례교회는  독립적, 자율적인 면을 중요시 하여 총회나, 연회 등을 두지 않고

 '친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 학교: 침례신학대학교

 

 

루터교
마르틴 루터에 의해 창립된 가장 오래된 기독 교회

16세기 카톨릭에 반대하여 마틴 루터의

신앙적, 신학적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루터의 대소교리 문담(1529),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1530),

슈말칼트 신앙개조(1580),

콘코드의 신조(1580)를 신조로 삼았습니다.
루터교는 이들 신조들 외에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안 신조를 고백합니다.


교리적 특징은
1) 이신득의 강조
2) 성찬은 은혜의 방도가 된다.
3) 세례에 의한 중생
4)유아세례는 정당하며 합당하다
5)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에 부여된 것
6) 하나님의 은총에서 타락할 수 있지만 구원은 만민에게 보편적

   
한국에서 루터 교회는 문서선교를 통해 확산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수학하고 들어온 지원상 목사를 중심으로

컨콜디아사를 통해 문서선교를 하고 방송(루터란 아워)을 통해 선교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루터교회는 그리 큰 교단은 아니지만

 베델성서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기독교 한국 루터회(
http://www.lck.or.kr/) 입니다.
오늘날 독일과 북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는 루터교를 국교로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회중주의이며, 행정과 결의에 있어서는 대의정치를 추구합니다.

* 학교: 루터신학대학교

 

 

성공회 (聖公會 The Anglican Domain) 
영국의 국교회.

영국에서 출발한 성공회는
앵글리칸 처치, 성공회, 에피스코팔처치, 등으로도 불리웁니다. 
1536년 로마감독의 교권을 폐지하고 1570년 교황 피오 5세가

영국왕 엘리자벳을 파문함으로써 로마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신앙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발생하였고

교회의 신학은 개혁파에 가깝지만 교회 및 예배의식은 카톨릭에 가깝습니다.

영국에서는 영국 왕이 교회의 정점이고  국회가 교회법을 제정합니다.
그렇지만 켄터베리 대교구, 요크 대교구, 웨일스 대교구 로 나눠져 있으며

한국 성공회는 켄터베리 대교구에 속해 있습니다.
영국교회의 교리의 표준은 39신앙개조와 기도문입니다.


한국에 성공회가 전래 된 것은 1890년 코프감독에 의해서였습니다.

정식 명칭은 대한 성공회(http://anck.peacenet.or.kr/)입니다.

조직은 주교, 신부, 부제라고 일컷는 종신직 신품이 있습니다.

* 학교: 성공회대학

 

 

구세군 (救世軍 Salvation Army)

그리스도교 교파로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창설한 교파

구세군은 1858년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구세군(salvation army)이란 명칭은 1878.5에 정식으로 명명되었고

1880년 처음 사관학교를 세웠습니다.
구세군의 특징은 사회봉사에 있습니다.
구세군의 정치는 개인의 자유와 기회균등의 인정하에 군대 조직을 차용합니다.

세계의 모든 구세군은 한 대장 아래 통솔을 받습니다.
구세군에서는 목사는 사관 평신도는 병사라고 지칭합니다.

구세군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08년 10.8 명동에서

영국인 호가드 정령에 의해 옥외집회를 한데서 출발합니다.
구세군의 사회사업은 선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며

남녀평등을 중요시 여겨 사관학교는 반드시 부부가 함께
입교토록 하고 있습니다.


구세군(
http://salvationarmy.or.kr/)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기하성), 순복음
프로테스탄트 오순절계(五旬節系)의 한 교파.

보통 순복음교회(純福音敎會)라고도 한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 삼위일체(三位一體)인 하나님을 믿으며,

중생(重生)·성령충만·신유(神癒)·재림(再臨) 등을 주요교리로 삼고 있다.
1928년 개인 자격으로 M.C.럼시가 오순절적 신앙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하여 당시 구세군에 근무하던 청년
허홍(許弘)과 함께 정동(貞洞)에 선교본부를 둔 것이 이 교회의 효시가 된다.

1959년 미국의 아시아 선교부장 케참 목사가 내한하여 2만 달러를 투자,

신학교를 신축하고 서대문에 중앙회관을 설립하는 등 전국복음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복음(Pure Gospel)' 운동의 주동이 되어

교회 명칭에도 순복음이 들어가게 되었고,
1972년에는 분열되었던 교단이 다시 합쳐 선교부와 협력관계를 맺고 조직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2001년 현재 교회수 1,417개, 목사수 3,534명, 교인수 110만 6712명이며, 교육기관으로 한세대학교가 있다.
이 밖에 5개의 농아교회, 경기도 파주시의 오산리 기도원과 2곳의 수양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본부 소재지는 한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222번지이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http://www.ag.or.kr/)

이 계열의 교회들은 성령운동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오순절파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신학적 바탕은 뚜렷하게 어느 것이다 라고 할 수 없지만 대략 웨슬레안에 가깝습니니다.
한국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이란 것을 중시합니다. 
학교는 순신대학교(순복음), 한영신학대학 등이 있습니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 신앙노선의 차이로 갈라져 나온 보수적 복음신앙의 성격을 가진 성결교단.

약칭 예성.

본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행촌동(杏村洞)에 있다.

1901년(고종 38) J. 웨즐리의 성경적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설립한 동양선교회가 교회의 기원이다.

1907년 한국선교가 시작되어

1921년에는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라는 명칭으로 교단이 조직되었다.

1943년 재림사상의 불온성을 이유로 해산당하였다가 광복 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개칭, 재건하였으며,

1961년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회(NCC)와 복음동지협의회(NAE)에 가입한 일로 인하여

교단 내의 분열이 시작되어 1962년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1963년 기관지 《성결》을 발행하였으며, 성결교신학교를 개교하였다.

1984년에는 이탈한 혁신측 50개 교회가 복귀하여 성결교신학교를 확장하였으며,

1988년에는 예성연합측과 재결합하였다.

교리는 중생·성결·신유(神癒)·재림의 4중복음과 7개항목을 지도원리로 삼고,

사도신경을 신앙의 밑바탕으로 한다.

교단조직은 개교회의 당회를 기본으로 하여 감찰회, 지방회, 교단, 총회의 순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세는 1990년 현재 교회수 642개, 교직자수 1192명, 신도수 31만 708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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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사랑
http://blog.daum.net/smmission/9571336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인생의 여정"
 
 
 
 
 

다빈치 코드 깨기

 

 

"다빈치 코드가 정말 사실이예요?"

"예수님이 정말 결혼 하셨어요?"

 

책이 나온지 꽤 되었건만 사그러들지 않는 문의를 받았었다.  사실 이런 아류의 저작물들은 늘상 그 내용이 뻔해서 새삼 읽는 데 시간 투자하는 것이 여간 아깝지 않은 터, 그래서 그동안 애써 외면을 해왔는데, 올 년초 "정말 예수님의 자손이 있었나요?" 라는 한 통의 문자 메시지에 그만 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결국 이 책을 잡아 들게 되었다.   책 읽을 시간이 저녁 밖에 없으므로 이틀에 나눠서 상,하권을 모두 정독했다.  짧은 시간에 가볍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이 책은 편집이 잘된 책이다.  또한 시나리오적 측면이 대단히 뛰어난 책이다.  아니 아예 저술 자체가 시나리오를 겨냥해서 출발된 책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단지 그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 전략적인 기획과 마케팅

 

이 책은 한 마디로 시나리오다. 여기서 시나리오라 함은 문학적 쟝르상의 시나리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구상에서 저술, 출판, 홍보, 판매에 이르기 까지 하나의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이제 앞으로 영화 제작까지 바라보는 고도의 상업적 시나리오 패키지 세트라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판매 마케팅을 보면 마치 소설이 아닌 다큐 혹은 히스토리물인 것 같은 홍보 전략이었음을 되뇌어 본다.   그런가 하면 내용면에서는 거의 실사 처리를 하고 있으면서도 소설이라는 쟝르에 교묘히 태워서 어떠한 민형사 상의 책임도 비껴나가고자 한 발상마저 엿보이는 지능적인 면도 있다.

 

[2] 시나리오 테크닉

 

두 권이나 되는 이 책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산문 소설이면서도 스킬에 있어서는 시나리오 보다도 더 빠른 템포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설 전체가 단막 씬(scene)의 집합 구성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게다가 그 씬의 이동은 소단위의 잦은 클라이막스 주기를 활용하여 종횡무진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지루함을 못느끼는 착시를 동반한다.   씬의 이동시에는 반드시 의문과 미결을 지렛대로 삼기 때문에 책 전체에는 실제적인 내용이 없으면서도 다양한 것 같은 효과의 극대화를 꾀한다.  게다가 주오브젝트로서는 인간 뇌신경의 (단막적인) 무조건 반사에만 의존할 뿐인 '기호학'이라는 편협한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픽션과 논픽션을 교란시키는 것도 특기할 만한 테크닉이라면 테크닉이라 하겠다.

 

[3] 최후의 만찬

 

이 책이 무게 중심의 포스트로 활용하고 있는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독자들로 하여금 저자의 반전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대형 그리드를 제공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독자는 의외로 단순하다.   처음 신뢰가 어렵지 일단 그 신뢰의 관문만 획득 당하고 나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이끌려 다니는데 이 책에서 그 신뢰에 한풀을 꺾이고 들어가는 주매개물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라는 얘기이다.   설명이 어렵나?   다시 한번 더 풀어서 말하면, 저자가 만약 레오나르도 대신 야코포 바싸노의 작품(Jacopo Bassano's Last Supper)을 싸들고 나왔어도 이렇듯 독자들이 집단 최면에 걸려들다시피 되었겠느냐는 말이다.   바싸노의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요한이 여자 모습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놀라줄건가?  

바싸노의 최후의 만찬에 V자형 에너그램이 숨겨져 있어도 그렇게 몰입해줄 것이냐는 거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것은 회중에게 편만한 상식을 가지고 장난치는 게쉬탈트 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게쉬탈트' 참고 사설-「911테러에서 악마가 보였다는데」(2001.10.2)

 

[4]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가 책에서 말하는 비밀조직의 수장이었다는 신빙성은 그 어느 정설에도 없다.   저자가 말하는 (레오나르도 이름이 적힌)연판장 등의 증거는, 성경으로 비유를 하면, 하나의 오/위경과 같은 자료일 뿐이다.   예수님이 결혼을 했는지 등 따위의 논제는 책 「 다빈치 코드」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기자료들이 존재해왔다.  고대 중세를 거쳐서 이미 폐기처분 된 허구와 위서들이 하찮은 소설 따위에서 이렇게 재생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코드 장난'이 아닐 수 없다.  레오나르도 자화상의 눈과 모나리자의 눈을 매칭해 놓고서 여장한 레오나르도가 바로 모나리자라는 부분에서는 마치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했다.

 

[5] 다빈치 작품으로 다빈치 코드 깨기

 

두 권씩이나 되는 책의 내용들을 일일이 이 지면에서 설명해 나갈 시간은 없고 앞서 말한 바 이 책의 주 그리드로 활용되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 최후의 만찬」만을 이용해서 이 책이 가지는 코드의 허구를 알아볼까 한다.

# 그림에 대한 기술적인 부분은 대부분 영문서 원문을 번역해서 인용했으며 아울러 해당 원문도 첨부한다.

    (1) 초기 복원

     

    많은 사람들이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액자로 봐서 그런지 이것을 하나의 캔바스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원래 벽화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 수도원의 식당 벽에 1493년부터1497년가지 약 4년에 걸쳐, 그러니깐 제1밀라노 시대에 그려진 벽화이다.   벽화이다보니 그 보존이 만만치가 않았다.   자연적인 풍화및 탈색 등으로 인해서 거듭 손상에 직면하다가 18세기 들어서 처음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당시 복원작업은 후일에 계속해서 거듭되는 복원작업들의 잘못된 밑그림이 되고 말았다.   예컨대 1726년 Michelangelo Bellotti는 부식화 용제로 그 벽화를 닦아낸 후에 오일과 니스로 덮어버렸는가 하면 1770년대의 Giusseppe Mazza는 전임자들이 해놓은 것을 다 지우고는 다시 오일을 사용하여 원화보다 더 재채색을 하기도 했다.

EARLY RESTORATION

Althought Leonardo's Last Supper had faced progressive deterioration since it had been completed, the earliest recorded restorations are in the eighteenth century. These restorations were based on the false premise that the painting was executed in an oil medium. Thus, Michelangelo Bellotti, in 1726, after cleaning the mural with caustic solvents, covered it with layers of oil and varnish. While in 1770, Giusseppe Mazza removed his predecessor's work and repainted much of the original again in oil.

Understandably these treatments came under much fire and following restorers intervened by also repainting and trying to recreate Leonardo's original, rather than preserving it. A new stage in the Last Supper's history was reached in 1853 when Stefano Barezzi first tried to detach the painting from the wall. After failing to do so, he attempted to consolidate the painting by gluing the paint fragments to the base. Additionally, scientific studies of the mural were initiated at this time. However, the era of inept restorations ended only in the twentieth century, when a more responsible attitude developed.

In 1903 Luigi Cavengahi began a careful study of the Last Supper using large-scale, detailed photographs as an aid. He established for the first time that the painting was executed in tempera, not oil. Between 1906 and 1908 he cleaned the paint surface and retouched missing areas. Although he removed grime and glue, he left a considerable amount of the repaint untouched. In 1924, restorer, Oreste Silvestri, further removed grime from the painting.

On August 15, 1943, a bomb nearly destroyed the refectory, but the northern wall where the painting resides was braced and sandbagged as a precaution, and thus survived. However, for one year the painting had to face harsh conditions since the refectory was not repaired immediately.

In 1947-1949, Mauro Pelliccioli proceeded to give the painting another cleaning and reintegration necessitated by its mildewed condition. The restorer anchored the paint using a shellac as a fixative, rather than dirt-collecting, water-soluble glue. He then cleaned the painting and lightened the tonality of the mural. Without his efforts, even less of the Last Supper would remain today.

RECENT RESTORATION

The most recent restoration of Leonardo's Last Supper was completed in May 1999. Work on this most recent restoration began in 1979 to repair areas where paint had flaked away, and quickly expanded to uncover fragments of the original painting covered by repainting from the above "early restorations."

Pinin Brambilla Barcilon has conducted this latest restoration of Leonardo's Last Supper under the auspices of Milan's Superintendent for Artistic and Historic Heritage. She is a renowned restoration artist who made use of various new technologies to bring life back into Leonardo's masterpiece.

Brambilla's task was first and foremost to stop further deterioration. Chemical analysis suggested that the over-painting which remained, was still eating away at Leonardo's original paint, and areas that were flaking away were taking parts of Leonardo's work with it as well. So, she decided the most pressing project was to remove everything that had been added after Leonardo finished the painting in 1498.

The restoration therefore demanded accuracy at the micron level, and attention to the smallest details. Microscopic pictures were utilized to magnify most areas of the painting. Such pictures demonstrated how mold, glue, repaint, and smog collected on the painting while infrared reflectoscopy enabled restorers to see the artist's original painting under layers of paint. Small diameter coring surveys also were performed. Samples taken from the corings were analyzed in laboratories to provide information on colors and materials utilized by Da Vinci. Miniature TV cameras inserted in the boreholes also provided information on the cracks and cavities. Sonar and radar surveys were also taken to provide information about the elastic and stru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masonry and base that the painting resides upon.

Therefore using the above technologically advanced techniques for analysis and employing the use of solvents to remove multiple layers, Pinin Brambilla faced an extremely slow and meticulous process. Often, only an area the size of a postage stamp was cleaned each day. The twenty year project has proved to be quite successful however.

Once referring to Leonardo's Last Supper as a sick patient, Brambilla has proclaimed that she and her colleagues have been able to give back a reading of the dimensions, "of the expressive and chromatic intensity that we thought was lost forever." Brambilla, besides letting the original colors come through, added some basic color to blank areas in a way that the addition cannot be confused by the viewer with the original color. In certain areas, blank spots were left and not even painted over. Most importantly, the restorer believes that the luminosity of the original painting has been regained.

Leonardo's Last Supper was reopened to the public in May 1999. The painting is now preserved by a sophisticated air filtration system, moistured monitored environment, and dust-filtering chambers. Visitors must make reservations and groups are limited to 25 people for viewing times of only 15 minutes.

CONTROVERSY

The most recent restoration, which took more than five times as long as Leonardo's execution of the painting, has been trumpeted by many but also condemned by many in the art world.

Critics, chiefly American and English, call Brambilla's removal of earlier restorations unnecessary and destructive, erasing fragments that might have been faithful to the original. James Beck, Art History Professor at Columbia University in New York, has been a prominent critic of the restoration. He has called it 18 to 20 percent Leonardo, and 80% the work of the restorer. Beck maintains that the areas that have been painted by Brambilla's watercolor essentially repaints the masterpiece. He asserts that the painting does not represent a conservation of what remains of Da Vinci's original, but represents a repaiting of a work that doesn't even have an echo of the past. Even Martin Kemp, Professor of History at Oxford and world expert on Leonardo, questions Brambilla's decision to fill in some of the gaps of the painting with similar tones of water-colors.

Although there are a number of critics, many have praised Brambilla's work. This is a topic to be debated in years and decades to come since it will never be certain as to whether the current state of the painting remains faithful to Leonardo Da Vinci's masterpiece or not.


    이후의 복원가들은 레오나르도의 원화를 그대로 보존하기 보다는 재채색과 재창조하려 함으로써 이 작품에 오히려 위해를 가했다.

    초기 복원작업이 오일미디엄 방식이었던 것에 반해 기법상의 새로운 장은 Stefano Barezzi가 벽으로부터 그 그림을(페인트 부분) 떼어내는 첫 시도로써 1853년에 도래됐다.   그러나 그 작업이 실패한 이후에 그는 바닥에 페인트 조각을 접착시키는 병합법을 시도했는데, 벽화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는 이때로부터 처음 시도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서투른 방법의 복원 시대는 더 신뢰할만한 방식이 개발된 20세기로써 끝이 난다.

    1903년 Luigi Cavengahi은 최후의 만찬을 큰 사진으로 확대하여 참조함으로써 주의 깊은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오일이 아닌 템페라로 처리하는 기술을 최초로 확립했다.   1906년과 1908년 사이 그는 그림 표면을 닦아내고 누락된 면들을 덧칠했다.   그는 이물질과 접착제를 제거함으로써 꽤 많은 양의 본래 형태를 남겼다.   1924년 복원가 Oreste Silvestr는 벽화로부터 이물질을 한층 더 제거했다.

    여기에다가 설상 가상으로,

    1943년 8월 15일, 폭탄 한발이 그 수도원 근방에 떨어졌다.   그러나 북쪽 벽은 미리 준비된 보호용 모래주머니들에 의해 지탱 되어, 어쨌든 그 벽화는 살아남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수도원이 즉시로 수리되지 않은 채 약 1년 동안의 좋지 않은 환경에 방치되는 바람에 원화의 손상은 극심해졌던 것이다.

    1947~1949년, Mauro Pelliccioli은 그 벽화에 또 한번의 클리닝 처리를 했고 곰팡이 같은 악조건으로 인해 재복원이 불가피 했다.   그 복원가는 먼지수집과 용해접착제를 사용하기 보다는 쉘락(니스의 원료)을 픽사티브(고정제)로 사용하여 접착을 시켰다.   그런 다음 페인트를 깨끗이 하고 벽화의 색조를 밝게 했다.   그의 수고 없이는 최후의 만찬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2) 최근 복원

    레오나르도가 그린 최후의 만찬의 가장 최근 복원은 1999년 5월에 완료된 바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이 복원에서는 떨어진 조각 부분을 고치는 작업을 1979년에 시작하였고, 그리고는 ‘초기 복원 시대‘ 이래로부터 덮혀 온 페인팅 조각들을 벗기는 작업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Pinin Brambilla Barcilon은 ‘예술,역사 유산 승계 프로젝트‘를 위한 밀라노 감독의 주도 아래 이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 최종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그녀는 레오나르도의 이 걸작을 소생시킬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한 명성있는 복원 예술가로 손꼽힌다.

    Brambilla의 기술은 더 이상의 원화 탈색을 중단 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화학 분석가들은 남아있는 덧칠은 레오나르도의 원화를 먹어들어간 것까지였고 그리고 파편으로 떨어져 나간 부분들이 레오나르도가 작업한 부분에 속한다는 분석을 제공했다.   그래서 그녀는 레오나르도가 작업을 끝마친 1498년 이후로 추가된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모스트 프레싱프로젝트를 결정했다.

    그 복원은 아주 미세한 단위의 정밀도와 극히 작은 상세한 것들에 대한 주의가 요구 되었다.   현미경으로 확대된 상들은 그림 대부분의 부위를 확대되는 데 이용되었다.   적외선 반사 장치로 복원가들이 칠 밑 겹의 원화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벽화위에 붙은 주형, 접착제, 재칠 그리고 기체 부분까지 모두 드러났다.   작은 지름의 구경을 파내는 작업(coring)이 수행되었다.   그곳에서 채취된 샘플은 다빈치 재료 색채 정보 실험소에서 분석되었다.   시추공 안에 넣은 소형 TV카메라는 균열과 구경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음파 탐지와 레이더 조사는 석조의 탄력 및 구조적 특성과 페인트가 붙은 바닥에 관한 정보도 주었다.

    분석에 있어서는 가장 진보적인 기술을 사용하였고 여러 겹을 지우는데 솔벤트 사용 기법이 활용되었는데...Pinin Brambilla 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지극꼼하게 작업에 임했다.   하루 작업이라고 해봐야 우표 크기만한 정도만 작업했을 정도로 세밀하게 복원에 임했다고 한다.   그 20년간의 프로젝트는 어쨌든 아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아픈 환자처럼,.. Brambilla 와 그녀의 팀들이 벽화의 체적 내용, 곧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원화의 표현과 색채 강도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단언했다.   Brambilla 는 오리지날 컬러를 볼 수 있는 뷰어 장치로써 공백 부분에 기본 컬러를 메우는 방법을 통해 오리지날 컬러를 복원하기로 결정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공백 부분이 남겨졌는가 하면 그 이외 부분도 칠해졌다.

    여기서 대단히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오리지날 페인팅이 복구되는 발광 부위로 믿었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1999년 5월에 일반인들에게 다시 공개됐다. 그 벽화는 현재 정교한 공기 청정기 및 습기 감지 장치 그리고 방 내부의 먼지-필터링 시스템에 의해 보존되어 지켜지고 있다.   방문객들은 최대 25명이 한 그룹을 지어 단 15분씩만을 관람하게 되어 있다.

    (3) 논란

    다섯 번 이상 있었던 최근의 복원은 미술계에서 레오나르도의 그 작품 자체 만큼이나 많은 찬사와 비난을 받고 있다.

    미국과 영국에서 저명한 비평가들은 Brambilla 의 초기 복원의 제거 작업은 오리지날에 해당할지도 모르는 프러그까지 지워버린 무익하고 파괴적인 것이다라고 평한다.   제임스 벡이라는 뉴욕 컬럼비아대 미술사 교수는 복원 비평의 탁월한 사람이다.   그는 네오나르도 부분은 18~20%뿐이고 나머지 80%는 복원가들 것이라고 말한다.

    Beck은 Brambilla 의 watercolor 에 의해 그려진 그 부분들은 본질적으로 그 마스터피스에 재칠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 페인팅은 다빈치의 원작을 남기는 보존 작업으로써 묘사한 게 아니라, 원화 자체와는 관계없는 리페인팅으로써의 묘사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옥스퍼드대 교수이자 세계적인 레오나르도 전문가 Martin Kemp조차 Brambilla의 결정은 워터컬러 톤에 근사한 페인팅으로 몇몇 갭들을 채운 것에 의문을 가졌다.

    많은 평론가들에 의하여 Brambilla 작업이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으로 손색없는 그림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제로서 확실시 되지 않은 체 10여년에 걸쳐 논쟁이 되고 있다.

[6] 최후의 만찬이란 없다.

 

이상 벽화의 기술 자료 원문에서 살핀 바와 같이 고작해야 원작자의 10여 퍼센트만 남은 그림을 가지고서 '코드'를 운운한다는 것은 실로 웃음꺼리요, 사기극이 아닐 수 없다.  「다빈치 코드」가 주장하는 '익명의 손'이나 '여성으로서의 요한'도 아래 이미지 비교에서 계속 밝히겠지만,  우선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은 '리페인팅(repainting)'이냐 '리스토어링(restoring)'이냐의 차이다.

 

후자는 원래 있던 자리에 새것을 채우는 것에 불과하지만, 전자의 리페인팅은 완전히 아예 싹 다시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제아무리 좋은 기술 제아무리 섬세한 기술과 과학을 동원했다 하더라도 현재의 최후의 만찬이 레오나르도의 원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탈리아 국가적으로 보나 미술 학계 자체로 보나 그 그림을 매개로 하는 상술에 불과할 따름이다.

 

[7] 이미지 대조

가장 심하게 변형된 부위는 예수님 부위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의 풍체뿐만 아니라 입술, 식탁 위의 메뉴까지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성(性)의 바뀜이라든가 전체적인 색감의 변조는 「최후의 만찬」를 다빈치의 마스터피스 자리에서 끌어내린 결과를 초래했다고 본다.

 

「다빈치 코드」는 이 복원으로써 본래의 레오나르도의 원화를 찾았다고 주장 하지만 어떠한 신빙성도 없다.  이미 위의 기술적인 원문에서 공정하게 언급되었다시피 작금 현세에 와서 레오나르도의 진짜 본래 원화는 사실상 찾을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설령, 첨단 기구를 이용해서 평면적인 라인은 투사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그 투사 장치가 요한의 가슴 볼륨까지 투사했겠느냐는 얘기다.   가슴의 볼륨은 평면 투사로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성질의 표현 부위가 결코 아니다.

 

여러분이 당대의 복원가라고 가정해보자 원화의 라인을 추적해가다보면 명백한 원화 라인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이 100이면 100다 찾아지겠냐는 것이다.   가령 한 두 부분에서 이 라인이 다빈치의 것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부위를 맞닥뜨리면 어쩔텐가.   무엇이든 한 라인은 택일을 해야하는 데, 또 그들이 실제로 택일을 해낸 그림이 오늘날의 이 그림인데,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신빙성이 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독자들의 신뢰를 따고 들어가는 이 포스트에 대해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이거다!'라는 반전에 우선 성공을 하고 아울러 그 드라이브에 난잡한 오/위경을 태우는 절묘함의 극치인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밝혔듯이 1493년 초기 원화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전세계가 레오나르도의 벽화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원화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찾을 길이 없건만 한낱 위경이나 비밀문서 따위일까 보냐!  이미 지난 사설「트루먼쇼와 매트릭스」(2002.3.3)에서 언급했다시피 이런 류의 저작물들은 고도의 매체 전술에 불과하다.

 

 

 
복원 전
 
복원 후
- 예수님의 다문 입술
-전체적으로 풍체가 넓다.
-접시에 음식이 있다.
-예수님 입이 열려있다.
-전체적으로 풍체가 날씬하다.
-접시의 음식이 없어졌다.
-복원전 요한은 남자
-복원 후 性이 바뀌어 여자가 돼버린 요한
-얼굴만 변한 게 아니라, 가슴도 부풀어 오름
복원 전 컬러 톤
복원 후 완전히 달라진 컬러 톤

바돌로매
야고보2
안드레
유다
베드로
요한
예수님
도마
야고보
빌립
마태
다대오
시몬


 

 

[8] 결론

 

트루먼쇼나 메트릭스 이후에 거듭 생산되는 이러한 방식의 접근은 이젠 어엿한 쟝르화로 자리잡은 듯하다.

특히 one이 니오(Neo)의, AMON LISA가 모나리자(Monalisa)의 숨겨진 코드라는 등의 병적일 정도로 에너그램에 집착하는 이들 쟝르의 생리적 특성은 「다빈치 코드」나 「메트릭스」 모두 동일하다.

 

「다빈치 코드」에서 예수의 후손으로 나오는 '메로빙거' 는 「메트릭스」에서 '메로빈지언' 으로 탈바꿈 해서 등장하고(둘다 프랑스인이며 메시야 계보로 등장) 그런가하면 또 다빈치 코드가 '예수는 죽은 후 부활하지 않고 대신 후손을 남겼다' 라는 고대 이단의 색채를 마치 정설인양 그대로 인용하고 있듯이 메트릭스 상에서의 메시야인 니오(Neo)는 죽음으로써 끝을 맺는다.   다시 부활해서 살만도 한데 죽음으로써 끝을 맺는다.   게다가 흥행 미국 영화는 전례상 반드시 해피엔딩이 아니면 흥행에 실패할 위험이 있는데도 유독 메시야 Neo를 죽임으로써 끝을 맺는다.

 

무엇이 무엇을 카피했는지 아니면 그들 모두가 하나 같이 특정 고대 이단적 색채관을 그대로 추종하는 크리티브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새삼 새로울 것이 없는 80여권에 달하는 복음 위경들이 현대에 와서 마치 새로운 발굴인양 '문화'라는 중무장을 하고 복원 돼 쏟아져 나오는 현상은 범상치가 않음에 틀림이 없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오늘날의 복음서는 단 4권으로 전해내려 오지만 1~2세기 언저리에는 80권 아니, 80권만 되었겠는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예수의 전기서들이 쏟아져 나왔을 텐데, 그게 오늘 날까지 전해내려 왔다면?,   그리스도교의 판도는 아마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책 「다빈치 코드」가 스스로 자인 하듯이 카톨릭이라는 하나님의 역사적 장치는 이것들을 모두 죽이고 소각했다.   당대 神正의 의미로 봤을 때 어쩌면 의인도 죽어나갔을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의인들뿐만 아니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사악한 오/위경들도 모두 죽임 당하고 불태워졌다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 경륜 아래서의 역사적 사실 구도이다.

 

神正,  그렇다고 하나님의 의에 손상이 오는가?  그런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단지, 그분의 섭리와 경륜의 경계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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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edful

 

출처 : http://paper.cyworld.nate.com/needful/570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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