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의 개종
1882년 신사유림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성서번역과 선교사 초빙 및 유학생교회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진은 1883년 5월 개최된 일본 전국기독교대친목회에 참석한 이수정(가운데 한복입은 이)의 모습을 모여주고 있다.

 

정동제일교회 /한국최초의 감리교회로 1887년 창립되었다.

 

 

최초의 견미 사절단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비로소 기독교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 셈이다.

1883년 민영익(앞줄 가운데)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감리회의 가우쳐와 만나게 되어 한국선교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한국교회사(60)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4) 선교지 분할

19세기 말까지 한국에서는 개신교만 8개 이상의 교단이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호주 선교부가 부산을 중심으로 선교 거점을 확보한 경우 외에는 대부분 서울에 먼저 들어왔다. 외국의 공관들이 서울에 있었고 선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서울에 먼저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각 교단 선교부끼리의 선교지 조정등이 필요하게 되었다. 서울이나 대도시에서는 선교부들이 중첩적으로 포진하여 불편한 관계가 조성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복음의 소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교 지역을 분할해야 한다는 의견은 아펜젤러의 제안에 의해 1888년에 이미 미 북감리회와 미 북장로회 사이에 거론되었는데, 본격적으로 계약이 이뤄진 것은 1892년이다. 1892년 1월 처음으로 장로교 선교지 분할 위원회가 결성되어 남장로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했을 때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사이에 선교지 분할 협정이 체결되었고, 그해 5월 하순 감리교 대표들과 2,3차례 협의를 거쳐 6월 11일 장·감 대표들 사이에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선교지 분할 협정 초안이 작성되었다.

① 일반적으로 소도시들과 그 주변 지역들에 대한 공통적 점유는 우리의 각 선교회에 유익한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5,000명이 넘는 항구 도시와 읍들은 공통으로 점유되어야 한다.

② 5,000명 미만의 읍에 그 지역을 담당하는 선교사에 의해 하나의 선교구가 설치될 때 그곳은 해당 선교회에 의해 점유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다른 선교회가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권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역의 공백 기간이 6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그곳은 다른 선교회의 선교가 가능한 개방된 선교지로 간주된다.

③ 사역을 시작하거나 확장시키고 싶어 하는 선교회는 모든 선교지에 신속히 세력을 미치기 위해 점유되지 않은 지역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하는 바이다.

④ 우리는 각 교회의 신도들이 다른 교단으로 옮길 고유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 교회에 교인 혹은 후보자로 이름을 등록한 사람은 그 교회 담당자의 이명서가 없이는 다른 교회로 영입될 수 없다.

⑤ 여러 교회의 권징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호 존중하기로 가결한다.

⑥ 섬기고 있는 당사자의 이명서가 없을 경우 다른 선교회는 모든 사역 분야의 조사, 학생, 교사, 조력자들을 영입해서는 안된다.

⑦ 일반적으로 서적들은 무료로 주지 않고 팔아야 하며 가격이 균일해야 한다.

장로교 선교회는 감리교 대표들과 선교지 분할 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1893년 1월 23일 선교지분할위원회 위원으로 기포드(D. L. Gifford), 스왈른(W. L. Swallen), 무어(S. F. Moore)를 임명하였고, 그 해 한국에 파송된 전체 장로교 선교회와 감리교 선교회는 한국 내에서의 불필요한 선교 경쟁을 피하고 선교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교계예양이라는 선교지 분할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감리교 포스터(R. S. Foster) 감독이 한국에 왔을 때 이 협정에 찬성하지 않아 공식적으로 발효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안은 추후의 선교 사업에 골격 노릇을 하였다. 마땅한 다른 규범이 제시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잠정적인 협정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장·감은 오랫동안 이 협정을 존중하고 하나의 관례처럼 실천했던 것이다.

선교지 분할 협정에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온 것은 장로교 선교회였다. 그 후 장로교 선교회는 감리교와의 선교지 분할 협정을 타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고, 1897년 한국 선교 현장을 방문한 스피어 박사는 선교지 분할을 이루기 위해 애써 노력하였으나 감리교 선교회의 소극적인 자세로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비록 협정이 조인되지는 않았지만 그 후 장·감 선교회는 오랫동안 교계예양을 존중했다.

그러다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결성되면서 선교지 분할 협정은 더욱 활발해져 1905년에 평안북도 지역에서 북감리교와 북장로교가 선교지 분할 협정을 통해 영변 지역을 북감리교 선교회에 이양하고, 북감리교는 안주 지역을 북장로교 선교회에 이양했다. 그러다 한국이 일련의 대부흥운동을 지나면서 선교지 마찰을 피하기 위해 효율적인 선교를 추진할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1909년 9월 16일, 17일 서울 YMCA 회관에서 모인 지역 분할 협정위
원회에서 장·감이 역사적인 선교지 분할 협정을 공식적으로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한국 침략으로 인한 위기의식은 장·감연합운동을 더욱 촉진시켰다. 1909년에 채택된 선교지 분할 협정은 전혀 새로운 협정이 아니라 1893년 이후 장·감이 상호 지켜 온 분할 정책을 구체적으로 인준한 것이었다.

이 선교지 분할 협정은 재정의 낭비, 선교 시 마찰을 극복해 선교의 효율을 가져다 주었다는 면에서 상당히 의의가 있다.

반면 몇 가지 폐단을 가져왔는데, 그 하나는 한 선교지에 한 신학만을 오랫동안 심어 주어서 그 신학이 그 지역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1930년대 진보주의자들이 등장해 보수주의에 도전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진보적인 캐나다 선교회가 담당했던 함경도 지역 출신들이었다. 북장로교 선교회 담당 지역이었던 평안도와 경상북도, 남장로교 선교회가 담당했던 전라도 그리고 호주 장로교가 담당했던 부산 지역 등은 모두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이렇듯이 한 신학사상을 오랫동안 가르쳐 오면서 그 신학이 그 지역을 지배하는 현상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고, 지역마다 다른 신앙적 특성으로 나타나 지역적 골을 깊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또 하나는 한국인이 어느 교파의 기독교인이 되느냐는 신자 자신의 자유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교지 분할의 산물로써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는 폐단을 안고 있다. 공동 구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 지역에 한 선교회만 독점적으로 전도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선교지 분할에 의해 결정되어진 대로 감리교인이 되거나 장로교인이 되었으며, 같은 장로교라도 청교도적인 장로교인이 되거나 다소 자유스러운 장로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선교지 분할에 의해 서로 선교지역을 주고받는 바람에 몇 천 명의 감리교인이 하루아침에 장로교인이 되었고, 같은 수의 장로교인이 감리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협정은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 사이에 이루어져 다른 군소 교단(침례교, 성결교, 구세군 등)에 대한 배려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한국교회사(61)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5) 네비우스 선교 정책

(1) 선교 정책의 필요성과 네비우스의 방한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선교를 위한 총체적인 선교전략(the overall strategy)으로 1890년 채택한 것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Methods)이다. 초기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브라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 뛰어난 잠재력은 있었지만 모두가 20대의 젊은이들로 선교 경험이 없었다. 게일이 25세, 언더우드
가 26세, 아펜젤러가 27세, 알렌 의사가 27세 그리고 그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던 스크랜턴 선교사도 29세에 불과했다. 그래서 패기와 복음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지만 전혀 선교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처녀지와 같은 이 한반도에서 선교 방향을 정립할 수 있도록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었다. 이때에 한국에 와서 젊은 선교사들에게 선교방법에 대한 도전을 준 사람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네비우스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1890년 6월 중국 산동반도에서 1854년 이래 30년 이상 선교 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 네비우스(John L. Nevius) 목사 부처를 초빙하여 2주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한국 선교사들이 앞으로 명심하고 실천할 선교방법의 원칙을 제공받았다. 주로 재한(在韓) 북장로회 선교사들 십여 명은 그의 강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가 쓴 선교 정책에 관한 저술들을 탐독하며 그의 선교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언더우드와 그의 선교회는“비록 우리 사업이 좀 더 느리게 시작되고, 여러 해 동안 눈에 보이는 열매를 크게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결국에는 다른 방법보다 이 계획을 조심스럽게 따르면 더 확실하게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결정”했다. 그 시점부터 네비우스 선교 방법은 북장로교뿐만 아니라 전체 장로교 선교회의 중요한 선교 정책이 되었다.

이들은 한국선교 정책의 통일과 후에 도착하는 선교사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1년 후인 1891년에, 네비우스의 원리를 선교 현장에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일련의‘규범과 세칙’(Rules and By-laws)을 채택했다. 이 원리를 채택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울에 있는 미션스쿨 학생들의 부모들이 학비 일부를 부담하도록 하는 것과 방학 동안에는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정책을 변화시킨 일이었다. 한국에 새로 파송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은 누구나 도착한 후“네비우스 선교정책에 관한 책을 한 부 받아 첫 해 말에는 언어에 대한 시험을 합격해야 함과 아울러 이 원리를 완전히 터득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 시험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습득은 적어도 한국에 입국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고, 따라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선교 정책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2)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내용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여 전도한다.
②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게 한다.
③ 자전: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모든 개인과 집단(소수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휘묻이 법에 의해 사역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한다.
④ 자치:모든 그룹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교구들은 나중에 목사가 될 유급 조사들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집회 시에는 교인들을 훈련시켜 훗날 구역, 지방, 전국의 지도자가 되게 한다.
⑤ 자립: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한다. 각 그룹은 창립되자마자 순회 조사의 봉급을 지불하기 시작한다. 학교조차도 부분적인 보조금을 받도록 한다. 이것은 설립될 당시에만 필요하다. 개 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⑥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 공부를 한다. 그리고 모든 영수와 조사는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
⑦ 성경적 권징을 통해 엄격한 징계를 실시한다.
⑧ 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한다. 아니면 최소한 영역이라도 분리한다.
⑨ 법정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⑩ 민중의 경제 문제에서 가능한 경우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3)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

지금까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은 자립(Self-Support), 자 치 (Self-Government), 자 전 (Self-Propagation)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시카고 대학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한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곽안련
(Allen D. Clark) 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이 성경공부에 있었고, 이것이 자립, 자치, 자전의 실현을 가져다 주었다고 지적했다. 성경의 구체적인 연구와 삶 속에서의 실천이 결국 자립, 자치, 자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비 칸 선교사 역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근간이 성경연구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해서 하비는“네비우스 방법의 중심은 자립이 아니며 자치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모든 기독교 사역의 기초로 강조한 것과 성경공부 모임을 통한 훈련에 있다. 이것에 의해 성경은 연구되고 신자들의 마음에 적용되었다.”고 하였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성경 중심의 선교 정책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그 중심 되는 원칙은 성경공부를 장려하여 모든 교인으로 하여금 성경지식을 얻어 어떠한 사람을 상대해서든지 자신 있게 전도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선교사들은 각 지방의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했고, “배출된 지도자들은 각기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성경을 가르쳤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신자나 불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먼저 자신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권위 있는 성경의 토대 위에 구축된 윤곽이 뚜렷한 신뢰할 수 있는 진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곽안련 선교사가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경공부 제도가 없었다면 네비우스 선교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강조하는 성경공부는 단순한 성경공부가 아니라 오늘날 소위 말하는 제자훈련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 여섯 번째 항이 말해 주듯이 모든 신자들은 그룹의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실시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공부가 아니라 일종의 신앙양육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조사들과 영수들은 선교사들로부터 사경회나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그들이 현장에 가서 다시 그룹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던 것이다. 리더가 먼저 훈련을 받고 훈련받은 대로 현장에 가서 조원들을 모아 놓고 훈련시키는 오늘날의 제자훈련 공부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성경공부 방식이 모든 교회 현장에서 실천에 옮겨져 초기 한국교회는 설교보다 말씀 공부를 더 중시했다.

이 네비우스 방법은 단순히 네비우스의 선교 경험에서 우러나온 선교 정책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선교 전략을 세운 것이었다. 네비우스는 고린도전서 7장 20절의「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선교이론을 발전시켰고 적용하였다. 이는 성경적인 방법이었고, 초대교회의 발자취를 따라 행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교회가 세워진 후,「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고 했다. 그리고「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고 했다.

사도들은‘백성을 가르치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행 4:2)고 전했으며, 그「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행 4:4)고 하였다.

사도들은「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행 6:4)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에 집사들을 세우게 되었고, 업무를 분담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져서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는 환난을 당했다. 이때 핍박을 피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여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헬라인(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였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보냈고, 바나바는 사울
(바울)을 데리고 와서 일 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큰 무리들을 가르쳤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으며, 저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고 저들을 후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처음 교회들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고, 그 가르침을 따라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으며,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고, 집사를 세워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워 나갔으며, 지도자(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여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립, 자치, 자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 원리는 선교지의 신생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독립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적인 방법을 통해 제시해 주었으며, 이 원리를 채택하여 한국교회에 적용한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및 다른 장로교 선교부는 이 원리를 택하지 않은 다른 선교부보다 더 많은 성장을 가져 왔다.

한국교회사(62)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5) 네비우스 선교 정책

(4)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사경회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한국교회에 가져다 준 큰 결실은 사경회 운동이었다. 1909년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은 한국선교 25년을 회고하면서“그(네비우스)로부터 우리 선교사역의 두 개의 위대한 원리-사경회(the Bible training class system)와 자립-의 사상적 씨가 나왔다.”며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사경회와의 관련성을 언급했다.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솔직히 말해, 모
든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위대한 성장의 가장 큰 비밀은 사경회 제도였다고 믿고 있었다.”사경회는 한국교회에 요구되는 교회 지도자들을 육성 발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경회를 통해 영수와 조사와 권사를 발굴할 수 있었다.

사경회의 시작

사경회의 기원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채택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8년 새문안교회 주일예배에 50명이 참석할 정도로 성장하고 한국의 전역에서 복음이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언더우드는 한 해가 지나기 전 몇몇 한국인 사역자들을 집중적으로 양육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1889년 10월호‘미셔너리 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의하면“막 한 해(1888년)가 끝나기 직전에 8명의 한국인 사역자들이 자신들의 고향과 사역으로 돌아가기 전 교육을 받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도록 기도하기 위해 서울에 모여 함께 한 달을 보냈다.”고 하였다. 언더우드는 자신의 집에서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한국인 사역자들을 교육시켰다. 이것이 후대 사경회의 모체가 되었다.

하지만 사경회가 하나의 중요 선교 정책으로 정착한 것은 1890년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채택하면서부터이다. 1890년 언더우드는 서울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여 한국인 7명을 한 달 동안 훈련시켰다.“ 언더우드의 집 남서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열린 첫 사경회에 참석한 이들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서울 출신이 세 명이었고, 북부 출신과 황해도 출신이 각각 두 사람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사경회 참석자가 전 해보다 배 이상이 늘어난 18명이었다. 그 중에서 경성의 서상윤, 홍정후, 의주의 한석진, 송석준, 구성의 김권근, 양순백, 문화의 우종서, 해주의 최명오, 장연의 서경조, 비성의 김병갑 등 한국교회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경회의 정착

초기에는 전국에서 선택된 이들을 대상으로 중앙의 한 지역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였으나 1894년 이후부터는 여러 지역에서 사경회를 열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들을 훈련하는 기간도 대폭 조정되어 훈련생들을 1, 2개월 동안 신학 교육을 시키는 대신 2주 동안 전교인을 대상으로 훈련시키는 방식으로 수정되었다. 그때부터 전국 주요도시에서 사경회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그 후 사경회가 보편화되면서 도(都) 사경회의 경우 500명에서 1,000명이 참석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평양, 선천 그리고 재령 등 교세가 놀랍게 확장되고 있던 이들 주요 서북지역에서는 1,100명, 1,300명 그리고 1,800명이 참석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지나고 백만인구령운동이 한창 일고 있던 1909년에는 이들 세 개 선교부에서만 600개 이상의 사경회가 열렸으며, 총 41,000명이 참석했다. 그 해에 전국에 흩어진 8개 선교지부 중 여섯 개 선교지부에서 열린 사경회에 32,000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숫자는 여섯 개 선교부의 전체 교인의 39%에 해당한다. 사경회 참석자들이 쓴 1909년 한 해 동안의 비용만도 2만 5천 달러가 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인들의 성경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1893년부터 1901년까지는 전 교인이 사경회에 참석하다가 1901년 정규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좀 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교회 지도자를 위한 상급반과 일반 교인들을 위한 하급반으로 분리되어 운영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경회는 크게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사경회와 교회 지도자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사경회로 구분되어 실시되었다. 초창기 사경회는 대개 선교사들이 순회하면서 열흘 동안이나 두 주일 동안씩 지도하고 가르쳤다.

일 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상급반 사경회는 대개 모이기 편리한 큰 도시에서 개최되었고, 사경회를 마친 후에는 각기 교회로 돌아가서는‘교인들을 위한 사경회를 열거나 성경반을 조직하여 배운 것을 가르치게 했다.’지도자 육성을 목적으로 한 사경회는 각 지방의 형편에 따라 보통 10일간씩 개최되어 올바른 성경지식을 심어 주었고, 참석자들은 교회로 돌아가서 자신들이 배운 것을 가르치고 그대로 설교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경회는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평신도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개 교회에서는 봄이나 겨울 농한기를 이용해 사경회가 열렸는데 주로 개 교회 사경회는 한국인 목회자들이 담당했다. 이와 함께 각 지방에는 정월이나 2월 혹은 7월 농한기를 이용해 15일에서 1개월 동안 모든 교인들을 대상으로 단기간 성경학교가 개설되어 평신도 지도자들을 육성했다.

연중 2주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사경회는 당시 90퍼센트가 농민들이었던 직업 분포 상으로 볼 때도 매우 적절한 방식이었다. 추수를 하고 난 후 겨울철은 농한기라 농부들에게는 시간을 내기가 용이했고, 봄철 농번기가 끝나고 전답에서 제초 작업을 한 직후인 7월에도 두 주 동안은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이 기간을 이용하여 사경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특히 신정이나 구정이 시작되는 2주간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연휴 기간이었기 때문에 사경회 기간으로 가장 적합했다. 평양대부흥운동 수년 전부터 한국교회는 신년 초 두 주간을 사경회 기간으로 지켜 오기 시작해 오랫동안 장·감을 초월해 한국교회의 중요한 행사로 이어져 왔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의 겨울 남자 사경회가 1907년 1월 2일부터 14일까지 개최되었던 것도 그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사경회 경비의 자립

1901년부터는 사경회에 참석하는 이들이 자비로 경비를 부담하도록 하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책과 소책자를 무료로 나누어주는 대신 소정의 금액을 받고 판매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것은 학교 교육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학비의 일부는 학생이나 부모가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 후 입학을 허용했다. 1899년 설립된 평양숭실중학교의 경우 어느 정도 선교회의 지원이 있었지만, 모든 학생들을 자립시킨다
는 원칙하에‘각 학생은 매일 한나절 동안 노무과에서 일하고 그 대가로 양식을’제공받았고, 모든 학생들은 방과 후‘길 닦기, 새끼 꼬기와 신발 만들기, 문지기 일, 책 제본하기, 인쇄소에서 일하기 등’과 같은 노무를 통해 자신들의 학비와 식비는 물론 ‘의복과 서적 등도 학생이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사경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왕복 여비는 물론 사경회 기간 동안 체재비 일체를 본인들이 감당해야 했다. 1910년 곽안련 선교사가 인도한 서울의 한 사경회에는 14명이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신들이 왕복 여행비용과 체재비용을 부담하면서 강원도 동해안에서 200마일을 걸어 왔고, 세 사람은 130마일을, 그리고 80명이 평균 20마일을 걸어서 왔다.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며 매년 도처에서 이러한 일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사경회 프로그램

보통 2주 혹은 1주간 계속되는 사경회 프로그램은 오전, 오후 그리고 저녁 세 부분으로 나뉘어 오전에는 성경공부를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오후에는 전도를 나가 사람들을 저녁 전도 집회에 초청하고, 저녁에는 전도 대상자들은 물론 원근 각처에서 모인 사경회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 집회가 열렸다. 이것은 일종의 부흥회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기성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새롭게 다질 수 있는 기회였고, 초신자들에게는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저녁 집회는 보통 300명, 500명, 혹은 1,000명 또는 그 이상 모인 가운데 지명도있는 부흥사를 모시고 열렸기 때문에 기성 신자이든 교회에 처음 참석한 이들이든 일단 참석만 하면 영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더구나 참석자들 모두가 말씀을 사모하여 원근 각처에서 모인 이들이었기 때문에 사경회 저녁 집회는 개 교회에서는 보기 힘든 영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러한 부흥집회와 그 결과들은 교회와 교인들의 전 삶에 계속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경회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훈련의 수단으로 뿌리 내렸다. 때문에 사경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배우고 그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배려되었다.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중에서 우러난 것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권위가 그들의 삶을 지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조사나 선교사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일찍부터 그리스도인의‘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되었다.

사경회를 통한 생활 교육

사경회는 체계적인 말씀 교육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의 구체적인 말씀의 실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한국교회를 한단계 도약시키는 역할을 했다. 사경회는 단순히 성경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교회 치리법, 주일학교 운영법, 교수법, 불교와 다른 종교, 위생 문제, 안식교와 같은 타 교단, 아동 교육, 건강법 그리고 기독교 문화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이것은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
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줘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경회는 단순히 말씀을 공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에 실천할 수 있도록 주일학교, 금연, 금주, 청결, 결혼관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종교적 소양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바른 신앙생활의 출발은 주일성수에서 시작된다는 확신 때문에 처음부터 주일성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때문에 학습과 세례문답의 자격 조건 가운데 주일성수는 가장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만약 교회 임직을 맡은 자나 입교인이 특별한 이유없이 주일을 범했을 때는 권징조례에 의해 엄격히 권징에 처해졌다. 마펫은 오늘날의 학습교인에 해당하는 원입교인과 세례교인으로 교인을 대별하고 원입교인은 3개월의 훈련과정을 거치도록 하였고, 우상숭배, 조상제사금지, 성수주일, 부모효경, 축첩금지, 여자에 대한 처우개선, 음주, 거짓말, 도둑질, 잡기, 간음 등 악습관을 버릴 것 등 신자의 규범을 준수하는 이들에 한해 문답을 거쳐 세례를 베풀었다. 이외에도 술 취하거나 노름, 포도주와 아편을 만들거나 파는 행위, 도박을 하거나 도박 집을 개설하는 것도 금했다.

브라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엄격한 주일성수, 교리주의 신앙, 반자유주의 신앙관을 한국교회에 뿌리내려 주었다. 객관적인 말씀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태동시키게 되었고, 따라서 엄격히 주일을 성수하게 만들며, 교리주의적인 보수신앙을 심어 주어 말씀을 이질화시키는 어떠한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국교회사(63)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5) 네비우스 선교 정책

(4)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주일학교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주일학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고, 주일학교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가장 큰 실천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채택되던 1890년에 시작된 주일학교 사업은 곧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보완하는 질적 성장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아 갔고, 그 수도 놀랍게 신장되었다. 1897년 평양에만 5개의 주일학교가 운영되었고, 교재를 인쇄하여 사용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시작된 성경 중심의 주일학교는 장로교뿐만 아니라 감리교 안에도 견고하게 자리 잡아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복음에 기초한 교회로 출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주었다.

감리교는 선교 초부터 주일학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1888년 스크랜톤 여사에 의해 주일학교가 처음 시작되었고, 1892년 10월 노블 선교사의 아내 노블 여사에 의해 정동교회 청년주일학교가 시작되었으며, 유년주일학교는 노블 선교사가 1893년 9월 아현교회로 옮겨 가면서 시작되었다. 1893년 감리교는 주일학교 연합회를 조직하였는데,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 趙元時)가 위원장을 맡으면서 주일학교가 상당히 발전했다. 1893년에는 5개의 주일학교가 있었는데, 1930년에는 359개로 급성장했으며, 주일학교 학생 수도 1893년 133명에서 1930년 13,303명으로 급증했다.

감리교 중 가장 주일학교가 잘된 곳은 평양 남산현교회였다. 1896년 부임한 노블 선교사 부부의 노력에 힘입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등급별 유년주일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공과는 미국교회에서 사용한 만국통일공과를 번역 등사해서 사용하고 매주 금요일 저녁에 교사들을 모아 놓고 예습을 시켜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1903년 1백 75명이 모이는 주일학교가 얼마 후에는 평균 500명이 모이는 주일학교로 발전했다. 1911년 100명으로 처음 조직된 영아부도 이듬해엔 500명이 모이는 영아부로 성장했다. 1910년대에 이르러 남산현교회 주일학교는 영아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청년부, 장년부로 세분화되어 운영했다.

선교회가 이렇게 주일학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어느 교회나 주일학교를 잘 육성하면 아이들이 심히 많아 한 학교로 발전할 수 있고, 또 이들이 장차 중요한 교회 일꾼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주일학교는 곧‘장래 교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감리교회는 이와 같은 안목을 갖고 주일학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1888년 주일학교가 조직된 후에는 바로 배재학당 안에 설치된 인쇄소를 통해 여러 종의 주일학교 교재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알렌 클락(Allen D. Clark)이 지적한 대로‘1905년부터 1911년까지 주일학교가 급속히 성장’했는데, 이것은 부흥운동이 발흥하면서 장·감이 연합으로 주일학교 사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조직된 후 그 첫 사업으로 주일학교 공과위원회를 조직했다. 1907년 장·감연합공회는 세계 주일학교 연합회에 한국 주일학교 발전을 위해 사역할 사람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전국 주일학교 공과를 통일하고, 장·감 선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공과를 출판할 기금 확보에 들어가는 한편 전국 주일학교 사업을 총괄할 총무를 세웠다. 1910년에 처음으로 세계 통일공과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1911년에는 주일학교 사업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장·감연합공회 산하에 13인으로 구성된 종교교육위원회를 설치했다. 1913년에는 세계 주일학교 대표자 한 명이 스위스 취리히(Zurich)에서 열린 세계 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 한국에 들러 한국의 주일학교 현장을 시찰하였고, 이때 한국주일학교를 위해 기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 해 4월 19일에는 서울 경복궁에서 세계 주일학교 대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에서 14,700명이 모여 처음으로 주일학교 대회를 열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주일학교 수가 급증했고, 주일학교는 곧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블레어 선교사의 노력에 힘입어 1920년 한 해에만 주일학교는 1만 개에서 1만 4천 개로 증가했다. 그 해 일본에서 열린 세계 주일학교 대회는 한국의 주일학교 사업의 발전을 위해 향후 3년 동안 세계 주일학교 지도자를 파견하여 해마다 6개월 동안 전국의 주일학교를 방문 지도하고 전국 각처에서 주일학교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1921년 제1회 전국 주일학교 대회가 열렸고, 1925년 제2회, 그리고 1930년 제3회 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이와 같은 놀라운 주일학교의 성장 이면에는 블레어와 1920년부터 주일학교 총무로 일해 온 홀드크로프트(J. H. Holdcroft, 許大殿) 그리고 부총무로 일해 온 정인과(鄭仁果)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주일학교 교육이 교회의 성장에만 기여한 것은 아니었다. 주일학교 교육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그들의 의식과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복음이 개인의 의식변화와 영적 각성을 촉발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 줌으로써 민족과 사회 앞에서 부끄럼이 없는 일원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복음이 문화 변혁으로 이어지고, 애국, 애족으로 이어졌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5)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영향 및 평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한국교회를 주목받는 선교지로 올려놓는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에서 선교를 개시한 지 불과 25년 만에 세계가 주목할 만큼 놀라운 결실을 맺었던 것은 성경 중심의 선교 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매년 세례를 받은 교인의 수도 1890년 약 40명에서 1900년에는 1,986명, 1910년에는 10,082명으로 급증했다. 그 결과
1886년에 9명이었던 세례교인의 숫자가 1900년에는 7,500명, 1910년에는 119,273명, 1920년에는 144,062명, 1930년에는 194,678명 그리고 1936년에는 341,700명으로 급증했다. 1884년에는 단 한 명에 불과하던 장로교 선교사가 1910년에는 206명이라는 엄청난 숫자로 증가했고, 1920년에는 269명으로 그리고 1927년에는 323명으로 급증했다. 1901년 199개에 불과했던 교회의 수는 1910년에 1,157개, 1920년에 1,738개, 1930년에 2,335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분명 하나로 획일화 시킬 수는 없지만 수많은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 한국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한 가장 근본적인 요인을 성경중심의 선교 정책에서 찾고 있다.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가 지적한 것처럼 북부지역의 놀라운 교회성장, 장·감이 거의 동시에 북부지역 선교를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50년이 지난 1930년대에는 이 지역 장로교 교세가 감리교에 비해 약 6배나 높았던 것도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말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촉진시킨 다른 부차적인 요인들이 없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리차드 베어드는‘네비우스 선교 정책’외에 다른 부차적인 요인으로 서북지역의 특별한 사회 경제적인 상태, 초기 서상륜, 서경조 형제의 활발한 리더십 그리고 이 지역에의 장로교 선교사들의 대거 유입을 들었는데, 이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성장 요인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은혜였고,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 한국의 국내·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사상적 환경을 조성하시고 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확장될 수 있도록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셨으며, 그 중심에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있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선교 현장에 접목시켰던 언더우드, 마포삼열, 아담스, 리, 위트모어, 헌트, 스왈른, 블레어 등 1세대 선교사들 모두가 한국선교의 놀라운 결심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깊은 연계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하나같이 공감하고 있었다.

곽안련 선교사는 그의 시카고대학 논문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오늘날의 한국선교의 기적은 그 배후에 의심할 바 없이 전통적인 종교들, 한국인의 유순성, 리더십에 잘 따르는 한국인의 국민성, 평안함에 대한 한국인의 갈구, 국왕의 호의, 여성의 지위향상, 한국인의 애국심, 참되고 신비한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종교심성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지만, 가장 큰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성경중심의 선교 정책을 통해 처음부터 한국교회를 성경중심의 교회로 구축하면서도 단순히 성경공부로 끝나지 않고 소위 사경회를 통해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모임, 곧 부흥 사경회로 연결되어 한국교회에 부흥운동을 촉진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복음을 배우고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고 그리고 그것을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도록 훈련시킴으로써 한국교회의 질적 성장을 가져다 주었다.

이와 같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감리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감리교는 속회제도, 전도부인, 순회 사경반, 신학회 등을 도입하여 실천에 옮겼는데, 이들 제도의 근간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정신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근간을 이룬 사경회가 감리교 안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렸다. 감리교는 감리교 본연의 속회제도를 도입하여 도시의 교인들을 몇 개의 속회로 나누어 각기 지도자를 하나씩 정하여 속회를 인도하게 했으며, 새신자들을 관리하도록 만들었다. 그와 함께 비록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지방 전도사, 권사, 전도부인을 임명하여 교역자가 해야 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부여했다.

감리교는 장로교 사경회 제도와 유사한 순회 사경반을 조직하여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방 교회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사경반을 조직하여 목사가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이들이 교회로 돌아가 교인들을 가르치도록 하는 일종의 지도자 사경회였다. 지방 교회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과정을 가르치고 그것을 졸업하고 장래 교역자가 되기를 원하면 신학반으로 보내 완전한 감리교 교역자로 교육시켰다.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사경반도 운영했다. 지방 교회는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모이기 편리한 중심 도시에서 1주에서 2주 동안 사경회를 개최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사경회 때에 성경 가운데 한 권을 택하여 가르치거나 적당한 종교서적, 교회사 개관, 성경인물 전기, 감리교회의 규례, 때로는 음악이나 위생도 가르쳤다. 장로교의 사경회 제도를 그대로 본 딴 것으로 이 제도는 곧 감리교의 중요한 연중행사로 정착되었다.

신학 교육, 사경회 제도, 주일학교, 전도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중심 원리였고, 이것은 적어도 장로교 내에서는 더욱 철저하게 지켜졌다.

한국교회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입각하여 처음부터 사경회와 다른 신학 훈련의 제도를 통해 평신도 지도자들을 육성하여 이들을 사역에 동참시켰다. 성경 중심의 평신도 지도자 육성은 독립정신을 앙양하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자립과 자전과 자치를 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제공해 주었으며,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를 육성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형성해 주었다. 또한 한국의 개신교는 한국인에게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쳐 복음을 통한 문화 변혁의 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이능화는‘조선기독교 및 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에서“한국 개신교는 재래의 악습관을 개변시켰고 민족정신을 개조시켰는데 그 주요한 것을 예거하면 음사(淫祀)의 폐기, 계급의 파제(破除), 여성의 지위향상, 근로정신, 혼상례(婚喪禮)의 종간(從簡), 민주주의 사상의 도입 등이다.”라고 했다.

한국교회사(64)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Ⅳ. 복음의 확산

한국의 개신교는 금교령과 영아소동 등 예기치 않은 여러 가지 복음 전파의 장애 가운데서도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였다. 이에 한국에 파송된 개척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에 고무되어 기왕에 중시되었던 순회전도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당시 전도여행은 결코 낭만적인 여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때로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참으로 힘겹고 고된 여행이었다. 하지만 전도여행만큼 중요한 교회사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해리 로즈(Harry A. Rhodes)가 지적한 것처럼 첫 선교사들이 수행한 긴 순회 전도여행이 중요한 선교사역 정책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장·감 선교사들의 순회 전도 노력에 힘입어 1880년대 말 복음은 전국적으로 놀랍게 확산되어 나갔다.

1. 순회전도

1) 북부지역의 복음 전파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이후 북부지역에서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전 조용히 복음이 확산되고 있었다.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복음을 전해 놀라운 선교의 결실을 맺었고, 다시 언더우드와 다른 초기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조사가 되어 한국교회의 설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해서 한국의 복음화는 주로 한국인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것은 1893년 제1회 선교사 공의회가 한국선교의 지침으로 삼기 위해 채택한 10개의 선교 정책 가운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선교 정책은 노동자계급에 우선 전도할 것, 가정주부의 개종을 중요시할 것, 지방도시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교육을 실시할 것,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유의할 것, 성서 역간에 힘쓸 것, 모든 종교 서적을 한글로 출판할 것, 자급·자치의 교회를 만들 것, 신자
는 누구나 전도자가 되게 할 것, 의료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료하여 환자를 감화시킬 것, 그리고 지방 환자의 경우 왕진의 기회를 만들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케 할 것 등 민중을 대상으로 한 선교 정책이었다.

처음부터 복음이 한국인에 의해 저변 확대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있던 선교사들은 신학적인 훈련을 먼저 마친 후 임명하는 과정을 취하지 않고 임명한 후 훈련시키는 과정을 밟았다. 이와 같은 순서는 본래 전통적인 장로교의 입장은 아니었다. 미국 제2차 대각성운동의 과정에서 감리교가 사용했던 순회전도사 제도를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도입한 것
이었다. 북장로교 선교회는 1892년 전도구역을 세분하여 의주 전도사 김관근에게 평안북도 일대를 그리고 평양 한석진에게는 평안남도 일대를 관할하도록 맡겼다. 이들은 초기 한국교회의 설립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도를 충실하게 실행한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를 실시한 것은 감리교도 마찬가지였다. 감리교는
1888년 강재성, 조한규를 전도사로 임명하여 조한규에게는 배재학당의 파견근무를 맡겼고 강재성에게는 지방 전도사업을 맡겼다. 특히 강재성은 1892년 인천 전도사로 파견되어 인천교회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역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복음은 한반도 전역에 놀랍게 저변 확대되어 나갔다. 선교지 분할 협정이 비교적 충실하게 수행되어 남·북감리교가 서울을 거점으로 제물포, 수원, 송도, 원산, 원주 등 경기 중부와 충청남북 지역으로 선교를 확대해 나간 반면, 남·북, 호주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는 서울, 대구, 부산, 전주를 비롯한 남부 전역과 소래, 의주, 평양, 원산을 거점으로 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북부 전역에 널리 복음을 전했다.

(1) 북부지역의 복음 전파

한반도의 북부에 복음의 확장이 급속히 진행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에 의한 복음의 준비와 그 결실 때문이었다. 또한 북부지역의 복음의 확장을 가져다준 두 번째 이유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소래와 평양을 비롯한 상당수의 관서 지방에서 그 전쟁의 피해는 대단히 컸다. 일본과 청나라,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의 격전지가 주로 북부지역이었고, 때문에 이들 지역에는 전쟁의 상처가 깊게 패여 있었다. 전쟁의 공포와 상처는 지역 주민들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 복음의 문을 여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더구나 전쟁의 피해 속에서도 민중들과 호흡을 같이했던 선교사들로 인해 민중은 더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북지역에 복음을 확산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이들 지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국내의 어느 다른 지역에서보다 부흥운동을 간절히 사모하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장로교와 감리교 모두 마찬가지였다. 개척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물론 평양, 의주, 선천, 재령에 정착한 맥코믹신학교 북장로교 선교사들, 원산에 거점을 마련한 로버트 하디와 저다인 그리고 개성에서 사역하던 남감리교 크램, 스톡스, 갬블, 리드 모두 뜨거운 부흥운동의 열정을 소유한 이들이었다. 원산에서 활동하는 한국침례교의 아버지 펜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후에 입국한 동양선교회도 부흥운동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우리는 이 지역의 복음의 확장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고, 친히 역사를 이끌어 가셨는가를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① 의주 지역 순회전도

의주와 평양과 소래는 타 지역에 비해 선교사들의 순회가 잦고 비교적 두드러진 성장을 이룩한 지역이었다. 의주는 조선과 중국이 통하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조선과 청국의 밀접한 관계상 청국에 인접한 의주는 오랫동안 중요한 국경도시로 자리잡아 왔다. 따라서 어느 정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던 중국과 접촉이 많았고, 그 중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과 오랫동안 접촉한 이들도 있었다. 의주 출신 이응찬이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난 후 같은 의주 출신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를 포함한 네 사람이 1876년 만주 우장에서 로스의 동료 존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1883년 백홍준이 자신의 고향 의주로 돌아와 권서인 겸 전도인으로 활동하면서 의주에는 일찍이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1888년 11월에는 아펜젤러가 북부지역을 순회전도하면서 평양을 거쳐 의주로 가서 백홍준에게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된 박상모, 송상하 두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때 아펜젤러는 의주에서 1명의 세례교인과 14명의 학습교인을 얻어 감리교회를 창립하고 그곳에 교회 건물로 사용할 집도 구입했다. 이들 외에도 당시 의주에는 여섯 명의 장로교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 의주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심은 어느 지역보다도 높았다. 1888년 11월 25일에는 감리교가 지방 전도사로 두 명을 임명했다.

1889년 봄에는 언더우드 부부가 신혼여행의 일환으로 송도, 소래, 평양, 강계, 의주를 여행하면서 2개월 동안 600명의 환자들을 돌보았다. 비록 이 여행은 동료들도 반대할 정도로 위험한 여행이었지만 다행히 언더우드 부부는 한국 정부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행 허가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언더우드 부인은 1889년 4월 27일 신혼여행 중 의주에서 세례받기를 지원하는 자들 백여 명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언더우드
는 한국 안에서는 세례를 베풀 수 없다는 여행증명서에 기록된 규칙대로 국내에서 이들에게 세례예식을 시행하지 않고, 세례 지원자 100여 명 가운데 김이련, 김관근 부자를 비롯 33명을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데리고 가 그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도 거행했다. 언더우드에게 100여 명이 세례를 지원했고, 그 중에서 무려 33명이나 한 번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 그리고 이성하, 백홍준이 뿌린 복음의 씨가 얼마나 놀랍게 성장하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선교사들이 그곳을 방문하지 못하다가 1891년 5월 마펫이 동료 선교사 게일과 전도인 정공빈, 최명오를 동반하고 관서를 순행하면서 송천을 거쳐 8월에 평양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고, 의주에 도착하여 지방을 시찰하고 복음을 전하였으며, 압록강을 넘어 봉천에 이르는 1,400마일의 긴 전도여행을 강행했다.

이 여행에서 마펫과 게일은 1889년 언더우드가 33명에게 세례를 주었던 의주에서 2년 동안 선교사의 지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공동체가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했고, 또한 봉천에 가서 한국선교의 개척자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나 깊은 교제를 나누며 서로 간의 깊은 공감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한국 선교사들의 놀라운 복음의 열정, 선교적인 잠재력을 확인한 로스는 1892년 의주 청년들을 통해 이미 많은 결실로 이어진 자신의 한국인 선교사역을 한국 북장로교 선교회로 이첩시켰다.

이처럼 1891년의 전도여행은 북부지역 선교 확장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되었다. 마펫과 게일은 만주의 봉천에서 다시 동만주까지 전도여행을 계속해 한국인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고려촌을 순방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함흥에 들렀다. 서북 각 도와 만주 각 현까지 순찰하고 지방 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등 그 여행은 기대 이상의 성적을 얻은 전도여행이었다.

의주 지역에 복음이 놀랍게 확장되자 북장로교 선교회는 1891년 의주에 작은 집 한 채를 사서 전도인의 주택 겸 본부로 쓰면서 순회하는 선교사들의 임시 숙소로도 사용했다. 1892년 빈톤(C. C. Vinton)과 함께 의주를 방문했을 때 마펫은 한석진, 김정현, 김석례 3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평양에 새 선교부를 개설할 계획 하에 이 중 한석진을 평양에 거주하도록 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주시켰다. 1896년까지 마펫이 평양에 거주하면서 의주를 순회하다 휘트모어(N. C. Whittemore) 선교사가 이 지역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후 의주는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자주 순방하는 북장로교 선교회의 거점이 되었다.

 

성서번역자들

1893년 한국성서번역자회가 구성된후 1900년에 신약성서가,1910년에 구약성서가 각각 번역 완료되었다.

사진은 1904년에 당시의 번역자들이다.

 

텬로력뎡
1895년 게일과 이창직이 번역 출판한 것으로 가장 많이 읽힌 기독교 문서의 하나가 되었다.

 

이수정역 성서
이수정이 일본에서 한문성서에 이두(吏讀)토를 달아 펴낸 <신약성서 마가전>(1884)이다.

 이수정은 이 외에도 마태, 마가, 요한복음 및 사도행전을 같은 식으로 펴냈으며 한글성서로 <신약마가젼복음서>를 냈다.

 

 

경산학당 교사와 학생들
서울에 1886년 설립된 구세학당 학생들로 1893년 경의 교사와 학생들이다.


선교사들의 순회 전도
1891년경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서북지방 순회전도광경이다. 마펫, 게일, 베어드 등의 모습이 보인다


죠션크리스도인의회보
1891년 아펜젤러가 창간한 것을 한국 기독교 신문의 효시가 되었다.


소민필지
헐버트선교사가 1892년 지은것으로 초기 모든 학교의 교과서로 신문의 효시가 되었다

 

한국교회사(55)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4) 구약성경 번역

신약성경의 출간은 구약성경의 출간을 재촉하는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다. 1900년 신약성경 번역이 완성되어 그 공인본 출판을 위해 개정 작업을 추진키로 결정하는 동시에 번역자들은 구약성경의 번역에 들어갔다. 조속한 구약성경의 완성을 위해 구약 부분을 나누어 아펜젤러가 창세기를, 언더우드가 시편을, 게일이 잠언과 사무엘서를, 스크랜톤이 이사야서를, 레이놀즈가 여호수아서를 각각 맡아 번역에 착수했다. 성경번역자회는 신약성경 번역의 개정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구약성경을 번역하는 이중적인 짐을 떠안게 된 셈이다. 때문에 구약 번역을 착수하고 3년 동안은 거의 신약의 개정 작업에 전념하느라 구약의 번역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헨리 루미스에 의해 성서매서인으로 파송받아 한국에 입국한 피터스(Alexander A. Pieters, 彼得)가 1898년 시편 중 저주시를 제외한 62편의 시편을 번역해‘시편촬요’를 출판하고, 이것을 저본 삼아 언더우드가 시편의 번역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구약의 번역은 1907년 봄까지 거의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1906년에 창세기와 시편, 1907년에 잠언과 출애굽기, 사무엘상·하, 말라기 그리고 1908년에 열왕기상·하와 이사야가 출판되기는 했지만 다른 구약성경의 출간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부 구약의 번역 책임을 맡았던 아펜젤러가 세상을 떠나 번역에 차질이 생긴 데다, 건강 악화로 언더우드가 병가를 얻어 본국으로 잠시 귀환하고, 1902년 스크랜톤이 그리고 이어 그 이듬해 게일도 안식년으로 한국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추가로 임명받은 북감리교 존스, 남감리교 하디(R. A. Hardie), 북감리교 노블(W. A. Noble), 북장로교 마펫(Samuel A. Moffett),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 그리어슨(R. Grierson)이 선교회 및 개인 사정으로 이 일에 전념할 수 없어 구약성경의 번역은 자연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감리교 선교사 그램(W. G. Gram, 奇義男)이 추가되었고, 기대를 모았던 피터스도 번역진에 참여했으나 이들 역시 몇 개월 만에 사임하는 바람에 더 이상 구약성경의 번역 추진은 진행되지 않았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구체적인 실천, 사경회운동의 활발한 전개 그리고 1903년부터 일기 시작한 한국의 영적 각성운동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도 신약성경은 물론 구약선경의 번역 작업은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한글 성경 출판에 관심을 갖고 있는 미국 성서공회와 대영 성서공회에서도 속히 신구약 성경이 한글로 번역 출간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1907년 봄, 평양대부흥운동이 한창 한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던 그때, 미국 성서공회의 팍스(Fox)와 영국 성서공회의 릿슨(Ritson)이 내한하여 한국의 성서실행위원회와 만나 한글 구약성경의 조속한 완성을 위해 레이놀즈와 두 명의 한국인 조사 이승두와 김정삼에게 구약성경의 번역을 일임하기로 결정하고, 두 명의 한국인 조사를 정식 번역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라틴어뿐 아니라 헬라어, 히브리어에 대한 조예가 깊고, 체계적인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교육을 받은 레이놀즈의 책임 하에 구약성경의 번역 작업은 놀라운 진전을 보였다. 전킨의 사망으로 레이놀즈가 불가불 1908년에 전주로 거처를 옮긴 이후에도 번역에 전념해 1910년 4월에 번역을 완료했다.

번역 완료 이듬해인 1911년 3월 완성된 구약성경이 2책 혹은 3책으로 나누어 전체가 인쇄되었고, 5월‘성서주일’에 출판 감사예배가 드려졌다. 1906년 신약성경 공인본이 출판된 지 5년 후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이 출판됨으로써 1911년까지는 신구약성경 번역이 모두 완료된 셈이다. 첫해 무려 8,000권이 팔릴 정도로 구약성경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이때 완성된 신
구약 역본을 구역이라고 하고, 그 후 개정 작업을 거쳐 1937년에 나온 역본을 개역이라고 한다.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전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성경 보급이 더욱 활기를 띠었고, 오랫동안 기대를 모았던 구약 번역이라 출판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구매했기 때문이다.

(5) 신구약 개역성경(1911-1937)

구약성경의 번역이 완성되자 그 해(1911)에 곧바로 구약성경 개역을 위한 개역자회(The Board of Revisers)가 구성되었다. 구약성경의 개역자회가 먼저 구성된 것은 신약은 한 번 개역과정을 거쳤으므로 신약보다는 구약의 개역 작업이 보다 시급하다는 일반적인 의견 때문이었다. 고도의 집중력과 경험과 실력을 요구하는 개정 작업을 위한 개정위원에는 15년 이상을 성경번역에 시간과 정열을 쏟으며 전념해 온 레이놀즈와 언더우드, 게일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헌신적으로 이 일을 맡아 수고해 온 레이놀즈가 위원직을 사임하고, 위원장직을 맡아 성경 번역에 처음부터 주도적인 일을 감당해 온 언더우드가 1916년 세상을 떠난 데다,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위원장직을 맡아 수고하던 게일마저 다른 개역위원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위원장직을 사임하면서 구약성경의 개역작업은 큰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다른
위원들은 원어의 문법적인 구조에 충실하려 했던 반면, 게일은 한국적 스타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게일의 접근 벙법은 과거 신구약 번역 과정에서 레이놀즈가 사용했던 접근 방법과 달랐다.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게일은 한국적 스타일의 번역을 추구했고, 반면 언어학자며 신학자인 레이놀즈는 원문과 신학에 충실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1921년 구약 개역위원회에서 게일이 번역한 창세기 시범 본문을 놓고 선교사들 간에 격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1922년 이원모 장로와 함께 구약 개역위원회를 탈퇴한 게일은 그동안 한국어 풍에 맞게 정성스럽게 번역한 원고를 정리하여 1925년 신구약전서를 기독교 창문사에서 출간했다. 이 번역의 의의는“한국어 풍을 어기지 아니하기로 노력하였다.”고 서문에 밝힌 대로 성경의 원어 사고 형태에서 정확한 저자의 의미를 제시하기보다“원어의 의미를 취해 한국인의 언어와 문법을 따르도록”시도하였다는 점이다.

게일이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이원모가 개역위원회에서 떠난 후 그동안 위원직을 사임하고 자문 역할만 하던 레이놀즈가 1924년 위원회에 다시 합류하고, 1926년 히브리어에 능통하고 ‘시편촬요’를 출판했던 유태인계 개신교 선교사 피터스,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취임한 남궁혁, 프리스톤에서 구약을 전공하고 돌아온 김관식 그리고 베어드의 조수 김인준이 위원으로 추가 임명되면서 구약성경의 개역 작업은 놀라운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평양신학교와 숭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레이놀즈, 남궁혁, 엥겔, 베어드를 축으로 한 평양 지역에 거주하는 번역위원들이 구약의 개역 작업을 주도했다. 특히 베어드가 1925-1926년의 안식년 동안 프린스톤신학교와 시카고대학에서 히브리어를 연구하고 돌아와 번역 작업을 추진하면서 개역 작업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926년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개역 작업이 끝났고, 1930년에는 구약 39권 중 17권의 개역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수년 사이에 놀라운 진전이 있었던 이면에는 베어드의 숨은 노력이 컸다. 그러나 그가 서울로 옮기고 얼마 후인 1931년 11월 28일, 갑자기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개역 작업은 또 다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베어드가 세상을 떠난 후 개역 작업은 피터스와 레이놀즈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다. 히브리어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던 피터스가 개역이 미완료된 나머지 구약성경을 개인적으로 개정을 한 후 이것을 다른 위원들이 교열,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일은 1934-1935년 겨울, 레이놀즈와 게이블이 시편, 레이놀즈가 전도서와 스바냐, 엥겔이 아모스를 맡아 집중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위원들의 노력에 힘입어 1935년에는 전도서와 시편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안식년에서 돌아온 피터스, 레이놀즈 그리고 1935년에 위원으로 다시 영입된 이원모 등 세 명은 서울, 지리산, 평양 등지를 옮기며 개역 작업에 몰두해 1936년 봄, 구약 개역 작업을 완료하고, 구약전서 개역을 출간했다. 선교사 11명, 한국인 4명이 참여한 구약성경개역 작업은 1911년에 시작해 1936년에 완료되었으니 무려 4반세기의 작업과정을 거친 셈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 일에 생명을 걸었던 레이놀즈와 1926년부터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혼신을 다했던 베어드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개인적인 역본을 만들어 준 피터스 세 사람의 숨은 노력과 남궁혁, 김관식, 김인준 그리고 이원모 등 네 명의 한국인 위원들의 희생과 협력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신약개역이 완료된 것은 구약이 완료된 이듬해인 1937년이었다. 1926년 신약개역자회가 조직된 이래 구약개역 작업에 비해 그 기간이 단축된 것은 내용의 분량이 적은 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신약의 경우 이수정, 존 로스 역 그리고 여러 번의 수정 작업을 거쳐 시험 역본을 만든 다음 출판했기 때문이다.

신약개역자회는 남감리교 스톡스, 남장로교 윈(S. D. Winn, 韋仁仕), 호주 장로교 커닝험(F. W. Cunningham, 權任咸), 북장로교 로스(C. Ross, 盧世永), 북장로교 베어드 2세(W. M. Baird Jr. 裵義林), 남장로교 크레인(J. C. Crane, 具禮仁) 그리고 남궁혁이었으며, 1934년 여름 레이놀즈가 이 일을 지원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37년 신약개역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해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인쇄되었고, 1938년 개역된 신약전서와 신구약 합본 성경개역이 발행되어 개역 작업을 착수한 지 26년 만에 신구약 개역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외에도‘원산번역’으로 알려진 1919년에 출간된 펜윅의 사역(私譯) ‘신약전서’와 게일이 1923년 개역위원직을 사임하고 그의 조수 이원모와 함께 1925년 기독교창문사에서 발행한 ‘신역신구약전서’가 있으며, 유성준의‘신약전서’(1906년, 국한문성경의 효시), 동양선교회(성결교) 카우만의‘부표관주신약전서’(1910년, 최초의 한글 관주성경) 등이 출판되었으며, 1925년에는 한국맹인선교의 창시자인 홀 부인이 점자신약성서를 출판했다.

한국교회사(56)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6) 한글 성경 번역의 의의

복음을 받아들인 지 4반세기 만에 신구약성경의 번역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중국과 일본 같은 국외에서 한글 성경이 출간된 데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어떤 사역보다도 성경 번역에 전념했던 결과였다. 1909년‘전환기의 한국’에서 게일(J. S. Gale)은 한글 성경 번역의 중요성을 그 필요성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개척 선교사들이 한 일 가운데는 성경 번역하는 작업이 있었는데,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그것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뉴욕의 60층짜리 생명보험 빌딩을 짓는 일도 이 일만큼 큰 작업은 못 된다. 그 일을 하는 데는 약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를 놓기 위해 땅을 파야 하듯 문장들을 골라내고 단어들의 의미를 파헤치며 엄습해 오는 말라리아와 피곤과 싸우면서 선택하고 재어보고 판단하고 기록하는 모든 과정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우리에게 파나마운하 파는 것을 연상시킨다. 말 그대로 파나마운하인 이 신약성경은 두 거대한 대양, 즉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양과 인간 필요의 측량할 수 없는 대해를 연결시키는 운하이다.”라고 하였다.

성경 번역의 완성의 뒤안길에는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깊숙이 깔려 있었다. 언더우드는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일생 동안 위원장직을 맡아 이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성경번역 사업을 추진하였고, 아펜젤러도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모이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다 배가 난파당하는 바람에 생명을 잃었고, 언더우드는 1915년 여름 동안 한글 성경의 개정 작업에 몰두하다 결국 건강을 잃은 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때의 상황을 그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915년 여름은 소래 해변에서 보냈다. 이 무렵에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곳에 여름 오두막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의 몸이 완전히 긴장을 풀고 편안한 휴식을 필요로 하는 때라 가족들이 크게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는 레이놀즈 박사와 함께 구약성서 중의 한 권을 최종 개역하기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성경 번역을 하는 데 수반되는 긴장감과 강한 정신집중은 그가 피해야만 할 것이었다. 따라서 비록 여름을 소래 해변에서 보냈지만 예전에 심신을 푹 쉬어 건강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별로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희생이 불가피했던 것은 성경 번역의 과정이 성경 원문의 정확한 이해는 물론 한글에 대한 정확한 식견도 겸비해야 하므로 어떤 선교사역보다도 고도의 집중력, 인내 그리고 지혜가 동시에 요구되는 힘든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번역자들이 만난 난관은 한글에서 정확하고 명료한 개념을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때로 한글에는 이러한 추상적이고 영적인 진리를 담은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내거나 설명을 하거나 예시를 하는 등 우회적인 방법으로 이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또한 정확한 개념이 파악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과업은‘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딱딱하고 고전적인 말로 표현하지 않도록’평이한 언어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위원회는 고상한 문체와 상스러운 문체
의 두 암초 사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 애써야 했으며,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체이면서도 동시에 학문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정숙하고도 깔끔한 문체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으로 정규 번역위원에 참여한 김정삼, 이원모, 이승두는 좀 더 우리의 정서에 맞게 번역을 다듬었고, 상급 번역자 게일과 레이놀즈는 원문의 의미를 살려 번역의 질을 한 단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고전어에 능통했던 레이놀즈는 구약성경 상당부분을 맡아 번역하고, 다른 선교사들이 번역한 것을 좀 더 원문의 의미에 가깝게 수정하는 일을 감당함으로써 한글 성경의 완역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성서번역위원회 위원들이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의 지혜였다. 언더우드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은…기도하는 일이었다. 각 사람들은 이 일을 맡은 것에 대해 큰 책임감을 절감하고 있었으며, 성령의 도움 없이는 자신이 이 일에 부적격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함께 혹은 개인적으로 필요한 지혜를 간구했다. 이 지혜 없이는 일을 완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글 성경은 한국에 파송된 번역위원회 소속 선교사들의 탁월함, 지치지 않는 끈기와 인내 그리고 훌륭한 한국 번역위원회의 헌신적인 협력이 어우러진 걸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모든 번역 작업이 주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이룩될 수 없었다며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한글 성경 출간은 역사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번역의 우수성이다.

번역위원회는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고전어 성경뿐만 아니라 현재 사용되고 있는 외국 성경을 참고했다. 모든 성경 번역이 그렇듯이 그 성경을 번역한 번역진과 참고한 역본은 번역의 질을 판단하는 데 매우 중요한데, 번역과정에서 성서번역위원회가 참고한 역본은 고전어로는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이고 현대 역본으로는 영어, 독일어, 불어, 중국어 그리고 일본어 성경이었다. 이렇게 성경 원문에 기초하면서 현대 외국성경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을 진행했기 때문에 한글 성경은 그 번역에 있어서 매우 우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둘째, 한글 성경이 복음주의적 시각으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글은 그 글을 쓴 사람의 사상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성경 번역 역시 번역과정에서 번역자의 신학적 입장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점에서 한글 성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레이놀즈, 스크랜턴 등 한글 성경 번역에 참여한 번역진들 모두가 성경의 권위와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을 존중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을 지닌 이들이었기 때문에 자
연히 한글 성경에는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반영되어 번역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한글 성경 번역진에 끝까지 남아 한글 성경을 완성했던 인물들 대부분이 보수적인 장로교인들이었다. 한글 성경에 복음주의적이고 장로교 색깔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글 성경이 신학적으로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신의 개념을 표현하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성경의 유일신 개념을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이 일은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었고,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절대자 개념,‘ 하나님’을 성경 히브리인들의 유일신 개념으로 채택함으로써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흔히 다신론 백성들이 갖기 쉬운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유일신 개념을 바르게 심어 줄 수 있었다.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는 한글 성경을 번역하면서‘하나님’을 사용했으나, 1894년 출간된 한글 복음서에서는‘텬쥬’와‘하나님’을 동시에 사용한 후‘텬쥬’,‘ 하나님’,‘ 샹뎨’,‘ 참신’등을 혼용하다 1906년 신약성경 공인본에서‘하나님’으로 통일시켰
다.

셋째, 한글 성경이 민중 사이에 널리 보급되면서 한국의 민족복음화와 한글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민중 사이에 복음이 놀랍게 저변 확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민중의 언어인 한글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반계층이 주로 사용하던 한문에 밀려서 한글은 아녀자나 어린이들 그리고 천민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글로 인식되어져서 한글 자체가 천시되고 있었다. 이런 한글을 역사의 장으로 끌어들여 민중의 언어로 대중화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 바로 선교사들이었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복음을 전파하자 식자나 무식자나 양반이나 천민이나 남녀노유(男女老
幼) 할 것 없이 복음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연히 한글 성경은 한글의 저변 확대를 통해 한글 문화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1934년 해리 로즈가 언급한 것처럼 사장된 언어를 민중의 언어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글 성경이 감당한 것이며, 민경배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한글 가치의 발견이나 그 보급에서 교회가 끼쳤던 공헌은 실로 절대적”인 것이었다.

넷째, 성경이 민중들 사이에 저변 확대될 수 있었던 배후에는 권서인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이다.

1882년 10월 존 로스에 의해 영국 성서공회 권서가 되어 의주와 서울에서 성서를 보급하면서 이 제도는 널리 보급되었고, 후에 예수교서회에서도 1915년부터 전임 권서제도를 도입해 기독교 문서를 보급하는 데 활용했다. 1916년 염재로, 박화연, 김성삼, 남기원 등 네 사람의 권서가 마산, 목포, 안동, 경기도에서 맥래(F. J. L. Macrae), 맥칼리(H. D. McCallie), 앤더슨
(W. J. Anderson) 및 본윅(G. Bonwick)의 감독 아래 기독교문서를 보급했다.

권서는 유급과 무급 권서로 나뉘며 유급 권서는 성서공회에 소속되어 일정액의 월급과 여비를 받는 전문권서들을 말하고 무급 권서는 성서공회로부터 성경을 할인받아 정액으로 팔아 마진을 남기는 자들로 매서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무급 권서중에는 서포라 하여 서점이나 선교부에 설치된 보급소에서 성경을 보급하는 자들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성경을 보급하거나 갑지(대도시), 을지(중소도시), 병지(시골)를 다니며 성경을 보급하는 이들도 있었다.

권서인들은 주로 성서공회나 선교회 혹은 개인 선교사와 교회에 의해 파송을 받아‘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어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했다. 성서공회 총무 벡크(S. A. Beck)가 지적한 대로‘권서는 복음의 능력을 증언하는 설교자며, 개척자요, 선구자’였다.

성경보급의 확대는 곧 복음의 저변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20년 3월 코리아 미션 필드는 1900년과 1918년 사이에 대영 성서공회에서 6백 2십만 부의 한글 성경을 보급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다 밀러(Hugh Miller)의 통계가 제시한 1908년과 1925년 사이 18년간 보급된 970만 부의 한글 성경을 합친다면 한국인들에게 보급된 성경은 참으로 경이적인 숫자라 아니할 수 없다. 놀라운 일은 대영 성서공회의 경우 전체 반포 성경 중 85.3%, 미국 성서공회의 경우 97.79%가 권서에 의해 반포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통해 한국 전역에 복음이 편만하여감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한국교회사(57)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7) 찬송가 발간

선교 초기 한국에는 찬송가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로스 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를 통해 전도를 받은 한국인들이 중국 찬송을 배워서 한국에 들여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백홍준이 즐겨 불렀다는‘주 예수 애워’(主耶蘇愛我, 현행 찬송가 411장, 예수 사랑하심은)가 있다.

이후 찬송가가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1886년 이후 배재, 이화, 경신, 정신 등의 학교가 세워지고 나서부터이다. 당시 배재 학당의 교과목을 보면 성경, 영어 등과 더불어 창가라는 이름의 음악과목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음악수업은 1887년부터 시행되었고, 교재는 서양의 찬송가였다. 당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서는 처음에는 영어 찬송을 그대로 가르치다가 점차 한두 줄씩 번역하여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렇게 번역된 찬송가들을 편집 출판하여 사용하였다.

① 한국 최초의 번역찬송가 모음집인 감리교의 찬미가

한국 최초의 찬송가집은 1892년 감리교의 존스(George H. Jones)와 로 스 와 일 러 (Louise C. Rothweiler)가 발행한‘찬미가’인데, 여기에는 모두 27곡의 번역 찬송가가 악보 없이 가사만 실려 있고, 감리교 전용으로 제작되었다. 1895년 감리교는 찬미가를 수정 증보하여 81편을 수록하고, 곡명과 운율을 표시하고 곡이 수록된 원찬송가의 명칭과 수록된 장수나 쪽수를 표시한 ‘찬미가’를 출판하였다. 이 찬송가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사용하던 감리교 교파 찬송가에서 57곡의 예배 찬송이 왔고, 19세기 미국의 부흥집회 노래인 복음찬송들이 복음찬송가집에서 14곡이 왔다. 그 후 1897년에 9편의 찬송을 더 수록하여 찬미가 제3판을 발행했다. 이 찬미가에는 십계명과 주기도문 그리고 사도신경이 수록되어 있는데, 사도신경에 하나님 대신에 천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독특하다. 이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한국어 어학교사였던 조성규가 천주교인이었으므로 감리교에서 천주라는 천주교의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

② 한국 최초의 악보찬송가인 장로교의 찬양가

1894년 언더우드는 존스 목사에게 의뢰하여 장·감 선교부에서 공동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악보를 삽입한‘찬양가’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감리교 선교사들은 언더우드가 원번역자의 허가도 없이 다른 사람의 번역을 포함시켰고, ‘신’의 호칭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여호와’로 대치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번역을 마음대로 고쳤다는 이유를 들어 찬양가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거절하였다. 이 일로 초기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에 약간의 불화가 있었다.

찬양가는 한국 최초의 악보 찬송가로 117편의 찬송을 4성부 악보와 같이 찬송가로서의 규모를 갖춘 것으로, 역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찬송가이다. 찬양가는 한국인이 창작한 9편의 찬송과 108편의 번역찬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③ 초기 장로교 찬송가인 찬셩시

언더우드의 찬양가를 채택하지 않은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는 1895년 선교사 리(Graham Lee)와 기포드(M. H. Gifford) 부인의 공편으로‘찬셩시’를 발간하였다. 이것은 가사판으로 54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영어가사 첫줄과 곡명과 운율만 표시되어 있다. 찬셩시는 영문 서문에 한국인들이 뜻을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번역찬송을 선택했으며, 번역자는 언더우드, 존스, 로스와일러 그리고 베어드 부인이라고 썼다. 이후 찬셩시는 1898년에 가사판 84편으로 증보되어 북장로회 선교부 편집위원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1905년까지 계속 증보되어 11판이 발간되었다.

④ 최초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 찬송가인‘찬숑가’

언더우드의 찬양가(1894년)를 장로교와 감리교가 같이 쓰기 위해 만들었으나 선교사들 간의 불일치로 감리교는 찬미가를 장로교는 찬셩시를 따로 만들어 사용해 왔다. 그러다 1905년 9월 재한 복음주의 선교 단체들이 교파연합운동의 일환으로 복음주의 공의회를 조직할 때에 장·감 공용 찬송가의 편성과 간행을 결의하였으며, 이를 위해 통합공의회 찬송가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통합공의회의 합동 원칙은 이미 사용하던 찬송가를 토대로 새 찬송가도 첨가하되‘말은 존경어로 구조가 명확하며 의사가 정당하고 교리에 덕절한 것’만 쓰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1908년에‘찬숑가’라는 이름으로 발
간되었다. 찬숑가에는 곡조 이름과 그 곡조가 수록되었던 원자료집의 명칭과 장을 수록해 주고 있어 그 출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찬숑가에 수록된
262곡 중 삼분의 일이 19세기 미국의 부흥회 노래가 차지하고 있고, 찬셩시나 찬미가보다 소위 복음찬송이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찬숑가에서 주목할 점은‘Korean Music’이라 하여 한국 고유의 곡조로 부르게 한 찬송 5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제10장(높은 일흠 찬양하고), 제11장(하나님이 텬대내고), 제12장(해가 가난 길과 갖치), 제13장(전능하신 아버지의), 제40장(하나님 내 목쟈시니)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한국 고유의 곡을 붙인 찬송들은 인도자가 먼저 한 줄을 부르면 회중이 그것을 따라 부를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곡조가 10장에만 나와 있고 나머지는 10장과 모두 같은 운률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10장 곡조를 사용하든지 아니면
인도자의 재량에 따라 다른 한국 가락으로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고유의 가락이라는 제10장의 노래는 4분의 2박자의 사장조로서 점8분음표와 16분음표의 반복인 당시 전형적인 창가 형태의 노래이며, 한국 창가가 일본 노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5음음계의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상으로는 한국 고유의 맛이 없다. 또한 곡 도중에 숨을 쉴 만한 여유가 없이 계속 같은 리듬이 반복되고 있고, 마지막 부분도 종지(終止)의 느낌이 들지 않는 불완전하고 전통 가락적이지 못한 노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찬숑가’는 우리나라 찬송가 역사상 최초의 한국 가락의 출현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가사적인 측면에서도
이전 찬송가집과는 달리 우리말의 억양을 잘 살려 거의 완벽하게 번역되었으므로 현행 찬송가 가사의 초석이 되었다.

찬숑가는 최초의 통일 찬송가로, 1930년대에 와서 다시 감리교의 신정찬송가와 장로교의 신편찬송가로 갈라지기까지 20여 년 동안 한국 교회의 부흥기에 사용한 찬송가였으며, 신정찬송가에 180편, 신편찬송가에 220여 편, 현행 통일찬송가에 178편이 수록되어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핵심을 이루어
온 찬송가라 할 수 있다.

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합동찬송가’

조국의 해방과 함께 장·감·성 세 교파에서는 위원 각 2인씩을 파송하여 1946년 찬송가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찬송가를 하나로 합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49년에 ‘찬송가’란 명칭으로 통칭‘합동찬송가’를 출간하게 되었다. 이 찬송가는 한국인의 손으로 편집된 최초의 찬송가란 점에
서 의의가 컸다. 그러나 새로운 편찬이 아니라 세 가지 찬송가를 합한 것이었기 때문에 곡과 가사의 중복이 많고, 처음부터 불리던 미국의 부흥회 노래인 복음 찬송이 성결교의 부흥성가와 합해져서 더욱 증가되어 한국 찬송가의 중심이 되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찬송가에는 총 586장의 찬송가와 38편의 교독문이 실렸으며, 한국인 작사의 찬송은 모두 6곡으로(171, 195, 205, 363, 459, 486장) ‘신정찬송가’의 7곡 중‘예수난 우리의 생명되고’를 뺀 나머지 곡들이 그대로 실려 있다. 이 찬송가는 새찬송가와 개편찬송가가 나오기까지 한국교회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찬송가가 되었다.

⑥ 새찬송가와 개편찬송가

1960년대 교단이 분열되면서 찬송가도 분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고려파 총회는 1935년 장로교 단독으로 만든‘신편찬송가’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또한 예장 통합과 합동이 분열하면서 합동 측은‘합동찬송가’의 사용을 거부하고 별도의 찬송가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60년 12월 합동 측과 고
려파가 새 총회를 구성하면서 합동 기념사업으로 새찬송가의 출판을 결의하고, 1962년 12월‘새찬송가’란 명칭으로 생명의 말씀사에서 발간하였다.

이어서 감리교·기장·예장·성결교 등 기독교연합회가 합하여 찬송가 개편 작업에 착수하여 1963년 3월 5일에는 찬송가 개편 8개 원칙에 합의하고 4년 동안 노력한 끝에 1967년 12월‘개편 찬송가’를 출간하였다. 이 찬송가에는 한국인 창작 찬송 27편을 포함한 600편의 찬송이 수록되었고, 성결
교단의 특색있는 복음 찬송 20곡을 후에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개편찬송가는 종래의 한국 찬송가가 선교사들이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했던 복음가, 부흥가들로 주축을 이루고 있었음에 비하여, 예배 찬송과 교회의 의식에 관계된 찬송을 보강함으로 부흥회 중심의 경향에서 예배 중심의 찬송가로 변화
를 시도하였다.

⑦ 한국찬송가공회의‘통일찬송가’

개신교의 찬송가 통일 작업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다가 1981년에 와서야‘한국찬송가 공회’가 발족되어 통일찬송가의 편집, 간행, 관리를 주관하게 됨으로써 박차를 가하게 되어 1983년 11월 9일에 한국 교회가 염원하던 통일찬송가의 출간을 보게 되었다. 명
칭은‘찬송가’로 그 동안 한국 개신교회가 사용해 오던 세 가지 찬송가인‘합동찬송가’(1949년), ‘새찬송가’(1962년), ‘개편찬송가’(1967년)를 하나로 통일한 것이었다.

통일 찬송가는 선교 100주년에 이룩한 교회 연합 사업의 결실이며, 세 종류의 찬송가를 사용하던 불편함을 해소하고, 한 가지 찬송가를 같이 부르는 기쁨과 감격을 한국 교회에 안겨 주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공적 찬송가로서 내용과 편집 면에서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표기방법, 작사자, 작곡자 표시에 오류가 있다는 점, 예배를 위한 찬송이 부족하다는 점 등의 아쉬운 점들이 지적되기도 한다.

선교사들에 의해 한글로 번역되어 보급된 찬송가는 한국인들의 신앙 성장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찬송가 보급은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음악 장르인 교회음악(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한국에 교회음악과 서양음악이 정착 발전하는 데 한국교회 성도들이 일조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찬송가 보급은 한글을 저변 확대시키는 중요한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사(58)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8) 문서 선교

① 조선셩교셔회(대한기독교서회) 창립

선교사들은 선교 사업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그리고 기독교문화를 한국문화 속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기독교 문서를 보급하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 일은 1888년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기독교문서 출판을 위한‘삼문사’(한글, 한문, 영문을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라 하여 삼문사라 이름하였음)를 설립하고, 배재학당 지하실에‘미이미활판소’를 설치한 데서 출발되었다. 이후 1889년 미이미활판소 운영을 위해 중국에서 올링거(F. Ohlinger) 목사가 내한을 하였고, 장로교 의료선교사 헤론(J. W. Heron)의 제안에 의해 서울 정동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택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독교문서 출판사 설립을 위한 비공식 회합을 가졌다. 그 결과 1890년 6월 25일‘조선셩교셔회’(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가 창립되었으며, 초대회장에 올링거 목사, 창립위원에 언더우드, 스크랜튼, 아펜젤러, 게일, 헐버트, 레이놀즈, 기포드가 되었고, 임시 사무소는 빈톤(C. C. Vinton)의 집에 설치되어 문서 보급의 새 장을 열었다.

② 신앙서적의 출간

1890년 언더우드의 셩교촬리(聖敎撮理)를 시작으로 1903년까지 25만 권의 종교서적을 출판했다. 1892년 장로교선교공의회에서는‘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모든 문서 활동에 있어서 한자의 구속을 벗어나서 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기독교 문서의 한글 전용 원칙을 확립하여 실행하였다. 여기서 출간된 마펫의 장원양우상론(長袁兩友相論), 게일의 천로역정(天路歷程), 헐버트의 사민필지(士民必知)와 같은 서적은 교인뿐만 아니라 온 한국 백성들에게 널리 읽혀 복음의 접촉점이 되었다. 장원양우상론은 1893년에 간행된 기독교 전도문서로 밀른(W. Milne)이 저술하고, 마펫이 번역한 것인데, 본래 중국에서 한문으로 간행된 것을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기독교 선교 초기에 가장 널리 읽혀진 전도책자였다. 형식은 친구 사이인 장씨와 원씨 두 사람이 대담하는 소설체로 엮여졌으며 내용은 보유론(補儒論) 입장에서 유교와 비교하여 기독교 진리를 변증한 것이었다.

1895년에는 최초의 번역소설인‘천로역정’이 기독교인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어 기독교 신앙의 저변 확대를 가져다 주었고, 한국 신문학의 효시가 되었다. 1897년에는 노병선의 저술로 기독교 전도문서인 파혹진션론(破惑進善論)이 간행되었다. 당시 배재학당 출신 감리교 전도사였던 노병선은 기독교를‘서양의 종교’라고 하여 배척하는 기독교 반대자
들을 향해“기독교는 동양의 종교도, 서양의 종교도 아닌 하늘의 종교다.”라는 논리로 기독교를 변증했다. 이것은 문장이 부드럽고 평이하여 구어체 한글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1900년에는 병인사주(病人事主)라는 전도문서가 간행되었는데, 날 때부터 반신불수였던 톰이 죽음을 앞두고 성경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 종이에 성경구절을 적어 집 근처에 매일 던져 놓았는데 그것을 주워 읽은 교인이 감동하여 선교회를 조직하고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소설식으로 적은 것이다.

1904년에는 길선주 저술의‘해타론’(게으름을 피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에 임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과 로스가 저술한 ‘원입교인규조’를 스크랜튼 부인이 번역한 기독교 안내서가 출판되었다.

1906년에는 노블(W. A. Noble) 부인이 저술한‘아모권면’이 기독교 계몽도서로 출판되었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선교사 노블 부인이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녀자들을 위해 저술한 것으로, 아이를 대하는 신앙적 자세에서부터 아동 음식, 목욕법, 아동 질병, 아동 위생 등 다양한 분야의 상식을 소개하고 있으며, 부녀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씌어져 있다.

③ 사전 편찬

언더우드에 의해 1890년에 한영문법과 한어자전<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한영부(Korean-English)와 영한부(English-Korean)로 나뉘어져있음, 1890)>이 출판되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어 연구를 통해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후 송덕조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며, 이 땅에 온 첫 선교사로서 후임 선교사들을 위해서도 한국어 사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으며, 천주교의 프란치스칸 신부들에 의해 이미 편찬 간행된 한불자전이 그를 더욱 자극하여 사전 편찬에 열심을 내게 했다. 해서 그는 1887년경부터 사전 출판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1889년 8월에는 출판할 수준에 다다랐다.

이때의 상황을 언더우드는 선교부의 보고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는 또한 한국어 사전과 편람에 관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제가 매우 철저하게 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수년이 걸리는 작업이 되겠지만, 후자는 제가 1년 전 경에 말씀드린 것과 같은 내용이고, 그때 이후로 많이 진척되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계속해서 제게
그것을 출판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저는 그 일을 맡을 여유가 없습니다.… 만약 선교부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내년 봄에 저로 하여금 이것을 출판하는 일을 처리하도록 하기 위해 저를 일본에 보낼 것이고, 저는 그것을 출판하기 위해 노력하고 돈을 빌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출판 준비가 거의 끝난 한국어 사전의 출판 예상비용은 약 600-700달러나 되는 큰 금액이었지만, 이 경비를 선교부에서 부담하려 하지 않을 경우 언더우드는 자신만의 특유한 배짱으로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1889년 8월 말에서 9월 초에는 인쇄를 끝낼 예정을 가지고 있었다. 언더우드가 당시에 발행하고자 했던 사전은 포켓형 사전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인쇄 및 제본이 불가능해서 부득불 일본에서 출판해야만했다. 언더우드는 사전을 출판하기 위해 1889년 11월에 도일하여 한영문법, 한어자전을 출판했는데, 한어자전의 편찬에는 게일과 헐버트, 송순용의 도움이 있었다.

언더우드가 출판을 위해 도일(渡日)하여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사전 편찬에 대한 언더우드의 열정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아직도 출판을 하느라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저는 기계적인 교정 작업이 굉장히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특히 한국어와 같은 언어에는 너무나도 엄격한 적용을 요구합니다. 비트는 소리(twisting sound)나 문자를 거꾸로 돌리는 경우에는 큰 차이가 납니다. 물론 제게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교사가 있고, 그가 우선 전체적으로 훑어보지만, 그가 지나쳐 버린 오류를 발견한 이후부터는 그가 훑어본 모든 것을 제가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3개 국어로 되어 있는 책의 절반을 교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사전을 거의 마무리짓게 되어 기쁘고, 만약 모든 일이 잘 된다면 화요일에는 문법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 문법책에는 영어가 더 많으므로, 일본인 인쇄공이 더 빨리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언더우드가 편찬한 한어자전의 한영부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한 한불자전에 이은 중요한 성과로서 그 뒤 게일의 한영자전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어자전의 영한부는 한국의 영한사전 편찬에 효시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는데, 그의 후예들은 이를 영한자전으로 증보 발전시켜 나갔다.

이후 게일에 의해 사과지남(辭課指南, Korean Grammatical Forms, 1893)과 한영대자전(Korean-English Dictionary, 1897)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언더우드가 출판한 한어자전과 함께 천주교 선교사들에 의해 간행된 한불자전(1880), 한불문전(1881) 못지않게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 언더우드에 의해 한국어회화입문(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 이 1890년에 출판되어 널리 사용되다 1914년에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언더우드의 영한자전은 언더우드가 죽기 전에 개정 작업이 진행되어 그의 아들 원한경(H. H. Underwood)에 의해 1916년에 완성되어 192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그 외에도 1897년에는 베어드 여사(Mrs. Annie L. baird)에 의해 초보자를 위한 한국어 회화 50문형(Fifty Helps for Beginners in the Use of the Korean Language) 이 출판되었고, 1921년에는 원한경에 의해 한국어일상회화(Every-Day Korean)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교본이 출판되었으며, 1924년에는 게일이 오늘의 영한사전(Present Day English-Korean)이라는 제목으로 3,000단어로 구성된 작은 영한사전을 출판했고, 1928년에는 베어드가 영한-한영 회의, 종교, 그리고 기타 용어집(An English-Korean and Korean-English List of Parliamentary, Ecclesiastical, and some other terms)이라는 제목으로 작은 책을 출간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은 성경 번역과 전도문서의 번역 및 출판과 함께 이루어졌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도 한국 문화 발전에 일정하게 독자적인 업적을 남긴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사(59)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8) 문서 선교

④ 학술서적 편찬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한 수많은 한글 작품의 번역, 외국 작품의 한글 번역, 그리고 한국의 역사와 언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어로 된 한국에 관한 수많은 서적들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도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통해서이다. 알렌이 1889년에 코리안 테일스(Korean Tales)를 출간했고, 1901년에는 그의 연대기(Chronological Index)가 간행되었고, 2년 후인 1903년에는 부록이 출판되었다. 1904년에는 이들 세 권을 합쳐 코리아 팩트 앤 팬시(Korea, Fact and Fancy)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1898년에는 기포드(D. L. Gifford)의 한국의 일상생활(Everyday Life in Korea)과 그
동안 코리안 리파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에 기고된 원고들을 정리 보완한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의 코리안 스케치(Korean Sketches)가 간행되어 한국의 풍물과 환경과 역사를 단편적이지만 서양에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4년에는 선교사역이 수행되고 있는 환경, 주변여건 그리고 조건들을 제시하려고 한 뱅가드(The Vanguard)를 출간했다. 그해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선교 초기부터 선교사역의 역사를 제시한 상투쟁이와 보낸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과 극동에서 한 미국 어린아이의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 낸 한국의 토미 톰킨스(Tommy Tompkins in Korea)가 출판되었다.

그 외에도 아담스(J. E. Adams)의 한국 대구에서의 10년간의 하나님의 역사(A Decade of God''s Doing at Taeku, Korea, 1908)와 동아시아 종교(The Religions of Eastern Asia, 1910), 블레어의 한국의 오순절(The Korea Pentecost, 1908), 블레어 여사의 한국의 새벽(Daybreak in Korea, 1909)
과 선교사 삶의 내면(Inside View of Missionary Life, 1913),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의 전환기의 한국(Korea in Transition, 1909), 한국의 민화(Korean Folk-Tales, 1913), 구운몽(The Cloud Dream of the Nine, 1922), 그리고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코리아 미션 필드(KMF)에 게재한 원고를 단행본으로 모은 한국 민족사(The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릴리아스(Mrs. L. H. Underwood)의 한국의 언더우드(Underwood of Korea, 1918), 곽안련(Charles Allen Clark)의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The Korean Church and the Nevius Methods, 1930), 고대 한국의 종교
(Religions of Old Korea, 1931), 소열도(T. S. Soltau)의 한국, 은둔의 나라와 기독교에 대한 반응(Korea, The Hermit Nation and Its Response to Christianity, 1932)이 있다. 위에서 언급된 것들은 출판된 저술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출판되어 한국의 역사, 문학, 민족, 문화, 사회, 종교 전반을 학적으로 정리, 한국 근대화에 적지 않게 공헌했다. 또한 에비슨(O. R. Avison)에 의해 의학에 관한 서적들이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하였다.

⑤ 교과서 및 신학서적, 경건서적 출판

1889년에 헐버트(H. B. Hulbert)에 의해 간행된 천문지리서인‘사민필지’(士民必知)는 초보 단계의 천문과 세계지리에 관한 교과서로 국립학교인 육영공원 초빙 교사로 온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저술한 것이었다. 이 책은 서구 근대 과학과 지리, 천문지식을 한국에 소개한 것으로 근대 한국인의 세계관과 우주관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 책이 교과서 출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06년에는 밀러 부인이 저술한‘초학지리’(初學地理)가 기독교계 초등학교 교과서로 사용되기 위해 출판되었는데, 세계 각국의 지리를 서술형식으로 위치, 풍토, 정세, 역사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8종류의 천연색 지도가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대한지도’에서 두만강 이북, 장백산 남쪽 동만주 지역을 우리나라 영토로 표시한 것이 눈에 띈다.

1908년에는‘진리편독삼자경’(眞理便讀三字經)이라는 기독교 계몽 도서를 간행하였다. 이 책의 원저자는 존(G. John)인데, 마펫(S. A. Moffett)이 번역하여 대한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하였으며, 줄여서‘삼자경’이라고도 하는데, 기독교의 주요한 교리를 한자 3음절로 짓고 다시 문장을 구성하였으며, 그 전체의 내용을 다시 장별로 구분해서 한글 해설을 덧붙였다. 천자
문식으로 되어 있어 초등학교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한자와 한글을 배우며 기독교 도리를 깨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베어드(W. M. Baird)와 베어드 여사(Mrs. Annie L. Baird), 피터스여사(Mrs. Eva Field-Pieters), 밀러(E. H. Miller)부부, 번하이셀(C.
F. Bernheisel)이 일반 미션스쿨에서 사용할 교과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고, 클락(C. A. Clark), 스왈른, 베어드, 게일과 많은 다른 이들이 신학교재를 출간했다.

신학교재 출간 중 눈에 띄는 것은 1908년에‘예수천주양교변론’(耶蘇天主兩敎辯論)이라고 하는 기독교 변증서가 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본을 대본으로 최병헌 목사가 역술한 것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상세히 논술하였다. 이 책은 천주교 측에서 개신교 비판용으로 펴낸‘예수진교사패’에 대항하는 성격으로 출판된 것인데 선교 초기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논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27년에는 레이놀즈(W. D. Reynolds)의 편집으로‘성경 사전’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영국기독교서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들이 영문 사전들을 참조하여 편집한 것으로 당시 가장 방대한 성경 사전이었다. 4,500여 항목을 수록하였는데, 이것으로 성경 어휘의 한글 표기 원칙이 확립되었다. 본문 첫 면 하단에 한글 자모를 표기한 것이 눈에 띈다.

마펫, 베어드, 스왈른, 언더우드 그리고 릴리아스는 경건 서적을 출판하였으며, 베어드 여사, 스왈른, 게일, 밀러(E. H. Miller와 F. S. Miller), 헌트 그리고 로즈 등은 성경공부 관련 서적을 출판했으며, 스왈른과 곽안련은 신학서적을, 스왈른, 곽안련, 밀러는 설교와 설교 재료와 교회사를 출판하였으며, 게일, 베어드, 언더우드 부부는 성경강해를, 캐더린 매큔(Catherine McCune)양, 릴리아스, 게일 여사, 램프(H. W. Lampe), 크로터스(Crothers), 윈(Winn)은 개인 전기를, 게일, 홀드크로프트, 베어드, 피터스는 주일학교에 필요한 책과 어린이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⑥ 신문 및 회보 발행

선교회가 발행하는 신문은 교회통신, 신앙강좌, 성경연구, 교계 소개가 주목적이었지만, 새로운 서양 문화와 과학을 소개하고 해외 교계의 소식을 전해 주어 한국 민족이 세계 속에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아펜젤러가 발행한 죠션크리스도인회보(1897), 이를 이어 발행된 대한크리스도인회보(1897), 언더우드에 의해 간행된 그리스도신문(1897), 이 두 신문이 합쳐져 간행된 그리스도신문(1905), 이후 감리교가 발행한 예수교신보(1907), 예수교회보(1910) 그리고 장·감이 합동으로 연합하여 출판한 기독
신보(1915) 모두 장·감을 대변하는 교단지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한국 속에 기독교 문화를 창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게일, 헐버트, 알렌, 호레이스 언더우드, 곽안련 등 수많은 이들이 한국의 역사, 언어, 문화 전반에 걸친 심도 있는 연구서를 출간하였고, 이와 같은 연구들은 코리안 리파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 1892-1898),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 1901-1906), 코리아 매거진(The Korea Magazine, 1917-1919), 코리아 미션필드(The Korea Mission Field, 1905-1942), 아시아왕립학회 한국지부회지(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에 상당히 나타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문 잡지로는 코리아 미션 필드를 들 수 있다. 이것은 1901년 빈톤에 의해 첫 출판된 코리아 필드(The Korea Field)와 거의 같은 기간에 존스(J. H. Jones)에 의해 시작된 코리아 메쏘디스트(The Korea Methodist)가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결성되면서 연합운동의 일환에 따라 통합되어 코리아 미션필드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 선교지는 자주 다른 정기간행물 편집인들과 해외 선교부 총무들에 의해 탁월하다는 예찬을 받아 왔다. 이 선교지의 편집인으로 수년 동안 릴리아스(L. H. Underwood)가 수고하였고, 1913년에는 디캠프(A. F. DeCamp)가 그 뒤를 이어 1927년까지 봉사하였고, 이어 수년 간 윌리엄 커(William C. Kerr)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와그너(Ellasue Wagner) 양이 편집 책임자로 봉사했다.

한국 초기 교회가 전한 복음은 단순히 사람을 구원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시대적 정황 속에서 기독교 이상과 정신으로 문화를 변혁시키며 문화 전반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이 실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감당했는데, 그 주요한 도구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문서 선교였다.

선교사들은 성경을 포함한 기독교 문서를 통해 신자들의 전도와 양육을 담당했으며, 교과서 및 기타 문서를 통해서는 한국인의 의식을 개혁하고, 문화를 변혁시켜서 애국, 애족, 애민하는 의식을 가지고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도록 일깨워 주었다. 또한 더 나아가 선교지(宣敎誌)들을 통해 한국을 세계에 소개하여 선교에 관심을 가진 많은 이들이 한국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였고,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나 한국을 방문한 이들, 혹은 외국에 있는 이들이 한국의 풍물, 관습, 전통, 문화, 역사, 문학, 언어 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서 선교의 효과는 직접 선교 못지않게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광혜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최초로 내한(1884년 9월)한 알렌이 고종의 윤허를 얻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오늘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이 되었다.

 


순회의료전도반
의료선교사들은 자동차로 지방을 순회하며 진료와 함께 전도에 종사하였다.

 

 


아펜젤러(좌)와 언더우드(우) : 1885년 4월 5일 함께 내한한 두 선교사는

한국 개척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배재학당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으로 1885년 8월에 설립되었다.

1887년에 건축된 교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벽돌 건물이기도 했다.


이화학당
1886년 스크랜톤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대구동산기독교병원
1893년 대구에서 시작된 동산병원은 1931년 현대식 건물을 마련하여 의료선교에 큰 공을 남겼다

 

 

 

 

한국교회사(50)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선교 정책은 의료 및 교육 선교, 문서 및 성경 번역 선교, 선교지 분할 정책 그리고 성경중심의 네비우스 선교 정책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1) 의료 선교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이 사용한 선교 정책 중의 하나는 의료 선교와 교육 선교였다. 의료 선교는 복음이 한국의 황실과 민중의 심령 속에 파고드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제공했다. 그것은 단순히 병든 환자를 고친다는 차원이 아니라 ‘왕과 왕비로부터 걸인, 나환자, 모든 계층의 민중들’에게 의술을 통해 복음을 전하며 섬기는‘치료 사역’이었다. 1884년 12월 4일에 있었던 갑신정변 사건으로 인한 민영익의 치명적인 상처의 치료가 계기가 되어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이 개설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의 의료 선교는 놀랍게 꽃을 피우게 되었다. 돌이켜 볼 때 이것은 이 민족에게 복음을 여시려는 깊으신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언더우드는 해석하였다.

(1) 광혜원의 설립

현재 재동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위치하였던 광혜원은 1885년 4월 10일 공식적으로 개원하였다.‘ 광혜원’이라는 병원의 명칭은 4월 26일‘제중원’으로 개칭되었다. 광혜원의 설립은 의료를 통한 선교활동의 강화라는 미국 선교부의 이해관계와 서양의학의 수입을 통한 근대화의 달성이라는 한국정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1894년 재정문제를 비롯한 여러 난관에 부딪힌 한국정부에 의해 미국선교부로 완전히 이관된 제중원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혜원의 설립은 한국 선교사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놀라운 공헌을 세웠다. 하나는 광혜원이 초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준비할 수 있는 전초기지 역할을 함으로써 후에 한국선교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광혜원이 서양의술의 보급을 통
해 왕실과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한국인들에게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2) 왕실과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의료선교

광혜원이나 감리교에서 설립한 상동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래서 의료 선교는 민중과 왕실 양쪽의 마음을 사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사무엘 마펫(Samuel Hugh Moffett)이 지적한 것처럼‘한국인들의 마음에 외국인의 이미지로 지배하
고 있는 공포의 분위기가 일소되기 시작한 것은 알렌의 기적적인 치료의 덕분이었다.’알렌 선교사가 미국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광혜원이 개설되고 1년 동안 그곳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20,529명이었다. 휴일과 공휴일을 제외하면 하루에 평균 100여 명을 치료했다는 결론이다. 당시 한국의 인구가 약 1,500만이었고, 한양(서울)의 인구가 30만으로 추산되는데, 광혜원에서 1년 동안 혜택받은 약 2만 명의 숫자는 대단한 숫자다.

전택부는 한국교회발전사에서‘이 중 10,460명의 환자를 병명별로 살펴보면 발진티푸스 등 고열병 환자 1,147명, 소화불량 등 소화기 계통 2,032명, 동맥경화 등 혈액순환 계통 114명, 호흡기 질환자 476명, 성병 등 생식기 환자가 1,902명, 임파선 214명, 신경계 질환자 833명, 안질 환자 629명,
귓병 환자 318명, 암 등 악성종양이 145명, 골격 및 건(腱) 환자 105명, 기형 37명, 부인병 67명 그리고 피부 질환자 814명이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많은 환자를 보는 가운데서도 의료 선교사들은 왕실의 왕자나 고관들의 연락을 받고 새벽 1시에 갑자기 왕진을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저들의 부단한 노력과 희생의 결과로 의료 선교는 기적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모든 외국인들에 대한 전반적인 호의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반면 알렌은 과중한 업무로 심신이 피곤함을 느끼게 되었고, 동료 선교사들과의 마찰로 인해 더 이상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없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887년 8월 주미 한국 공사관 참찬관으로 적을 옮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헤론이 그 책임을 이어 받았으나 1890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헤론 역시도“자신의 일에 대한 강력한 헌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고 언더우드는 회고했다. 그 후 하디(R. A. Hardie), 빈
톤(C. C. Vinton)이 사역하였고, 토론토 의대 교수를 하다가 한국 선교
사로 온 에비슨(O. R. Avison)이 1893년 11월 제중원의 책임을 맡으면서 한국의 의료 선교는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았다. 1893년 선교회는 의료 사업을 선교사업의 하나로 결정하고 부산, 평양, 대구, 선천, 재령, 청주, 강계, 전주, 공주, 해주, 안동, 원산, 군산, 목포, 개성, 춘천, 진주, 성진, 함흥 등에 병원을 설립하고 한국 선교를 전국적으로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에비슨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미 명문 토론토 의과 대학에서 서양 의술을 가르치다 온 에비슨 선교사는 1895년 정부로부터 경영권을 이양받은
후 병원을 새롭게 정비했다. 1899년 세브란스로부터 15,000불의 헌금을 지원받아 남대문 밖에 병원을 신축하여 1904년 9월 60개 침대를 갖춘 최초의 현대식 서양종합병원을 준공했으며, 이름도 제중원에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칭하였다. 이어 14개 분과로 확장하고, 세브란스 의학교와 간호학교를 설
립하고, 1908년에 7인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의 의료 선교는 환자를 치료하는 단순한 의료 사역만이 아니라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를 양육하여 한국인들 스스로 장차 한국의 의료계를 이끌어가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아서 1931년까지 155명의 의전 졸업생을 배출했다.

(3) 스크랜턴의 상동병원을 통한 선교

한편 제중원이 왕립인 데 반해 한국 최초의 민간설립 병원인 정동병원도 선교사에 의해 건립되었다. 제중원 설립 꼭 5개월 후인 9월 10일, 초기 제중원에서 일하던 북감리교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은 자신의 정동(구 배재고등학교 정문 건너편) 주택을 개조해 병원을 개원하고(개원 8개월 만에 522명의 환자를 치료했고, 그 다음 1년 동안에는 2,000명의 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그 이듬해 상동에 병원을 건축하여 옮겨갔다. 고종은 이 병원에 시병원(施病院)이란 이름을 하사했는데, 이는 스크랜턴의 한국 이름인‘시란돈’에서 따온 것이었다.

스크랜턴이 상동에 병원을 세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유는, 정동은 외국인들의 거주지역이어서 한국인들이 드나들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그는 처음부터 서울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병원과 같은 병원 겸 수용소같은 병원건설을 원했다. 한국인들의 병은 대부분 영양실조 때문에 오는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조금만 미리 손을 쓰면 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도 주고 또 무료로 또는 싼 값으로 가난하고 버림받은 병자들을 따뜻하게 재워 주고 입혀 주고 먹여 주는 수용소 시설을 갖춘 병원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자면 역시 정동을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좋은 장소를 그는 상동지
역에서 발견한 것이다. 셋째 이유는, 지금의 정동병원은 원래 한옥을 수리하여 세운 병원이지 처음부터 병원용으로 세운 건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어차피 새로 큰 병원을 병원답게 세울 바에는 지금 있는 건물을 헐고 짓는 것보다는 딴 곳에 새로 제대로 지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광혜원이 왕실 병원이라 정부 관리들과 그 가족 그리고 양반계급들이 몰려든 것과는 대조적으로 상동병원에는 스크랜턴의 생각처럼 시내의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광혜원과 마찬가지로 상동병원도 치료비는 받지 않았다. 병원 앞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떤 병이든지 아침 10시에 오시오.
올 때는 빈 약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라는 안내문을 써 붙이고 환자들의 협조를 구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스크랜턴의 의료 활동은 1888년 영아 소동으로 모든 선교 사업이 일시 중단되었을 때조차도 단 하루도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성난 군중도 시병원만은 습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1887년에 ''여성을 위한 여성들에 의한’의료 사역이 감리교 선교부의 여성분과 메타 하워드(Meta Howard)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해 12월에는 현재의 아현동에 시약소를 개설하여 3년 동안 환자들에게 약을 공급했다. 1886년 가을 감리교 여선교사 하워드가 한국 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保救旅館)을 개설하고, 셔우드(Rosetta Sherwood)와 함께 3년간 약 5,500명의 가난한 여인들을 치료해 주었다. 한국교회 여성 사역의 가장 아름다운 모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로제타 셔우드 홀은 남편 제임스 홀과 더불어 평양 지역에 의료 선교를 개척하였고, 박 에스더를 발굴하여 그녀를 훈련시키고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감리교 선교회는 서울에 부인병원을 계속 운영하는 한편, 인천, 평양, 원산, 공주에도 병원을 개설하여 가난한 민중들에게 서양의 뛰어난 의술을 베풀며 선교에 동참했다.

의료 사역은 한국선교가 진행되는 동안 1930년대까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서양의술의 보급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선교를 위한 전초기지, 의술의 혜택을 통한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호감을 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보건 및 사회사상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서양병원은 한국인들에게 전염병의 예방과 공중위생의 관념을 불어넣었다. 병의 발병을 음양오행, 풍수, 잡귀와 관련 있는 것으로 믿어 오던 한국인들은 서양 의술이 보급됨에 따라 비위생적인 환경이 발병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공중위생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1895년 호열자병이 발생하자 정부는 여기에 대한 방역책을 세울 아무런 선지식이 없어 속수무책이었으나 다행히 에비슨의 지원을 받아 예방, 소독 주의사항 등을 포고할 수 있었다.

천주교가 직접적인 선교를 한 것에 반해 한국의 개신교는 직접 선교와 간접 선교의 병행을 통해서 민중과 왕실 모두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것은 선교의 방법론적인 면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의료 사역은 교육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선교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교회사(51)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2) 교육 선교

의료 선교 못지않게 한국개신교 선교사들이 정성을 기울인 것은 교육을 통한 선교였다. 선교사들은 모든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종교적인 훈련을 수행하여 기독교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교육 선교를 선교 정책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때문에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이어 중등학교,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언더우드는 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였으며, 스크랜턴여사는 이화학당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션스쿨의 입학생을 신자들로만 국한시킨 것은 아니었다. 미션스쿨을 불신자와의 접촉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강했다. 해서 실제로 미션스쿨에 믿지 않는 자들을 입학시킨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믿은 자를 입학시키든 아니면 아직 믿지 않는 자를 입학시켜 믿게하든지 간에 학교는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한국인들에게 더 나은 삶, 풍요로운 삶, 민주적인 삶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1) 한국 정부 주도하에 시작된 육영공원

한국 정부는 일찍부터 청과 일본을 통해 서양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외국과의 조약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양의 신문명을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881년 박정양, 어윤중 등 10여 명의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송해 새로운 문물제도를 시찰하도록 한 것과 김윤식을 단장으로 한 69명의 청년학도를 신식기계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도록 청국 천진
으로 보낸 것도 그때문이었다. 정부는 1883년 10월 1일, 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그해 8월 묄렌도르프에 의해 설립된 육영공원(育英公院)의 책임을 일단 영국인 헬리팍스(T. E. Halifax)에게 맡기고, 1885년 봄 미국에 교육법무관 3명을 파송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는 1885년 9월 23일 귀족 자녀 35명의 소년들로 문을 연 육영공원을 육성하기 위해 미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요청에 따라 뉴욕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한
세 명의 유능한 젊은이,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 벙커(D. A. Bunker) 그리고 호머 헐버트(Homer B.Hulbert)를 파송했다. 이들이 육영공원에 합류하면서 1886년 9월 23일부터 교육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좌우 2개의 반으로 나누어 좌원은 젊은 문무관리 가운데서, 우원은 15~20세의 고관 자제 또는 고관이 추천한 젊은 선비 가운데서 학생을 뽑았다. 폐교될 때까지의 총 입학생은 107명이었다. 공원 운영에 필요한 비용은 처음에는 호조와 선혜청에서 부담했으나, 1887년부터는 인천항의 해관세(海關稅)에서 충당했다. 교과내용은 영어 외에 수학·자연과학·역사·정치학 등이 있었으며, 3년마다 치르는 대고(大考)에 합격하면 졸업을 시켰다. 정부고관이나 그 자제만을 수용하는 신분적 한계와 공원 관리들의 운영비 유용, 정부의 재정핍박 등으로 1894년 폐교되어 영어학교로 바뀌었다.

(2) 스크랜턴 여사에 의해 설립된 이화학당

이화학당이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 선교사의 모친 메리 스크랜턴에 의해 1886년 5월에 설립되었다. 1886년 5월 31일 서울 정동 스크랜턴 여사의 집 사랑방에서 단 한 명으로 시작된 이화학당은 그 이듬해인 1887년 10월 22일 명성황후로부터 황실을 상징하는 순결한 배꽃과 여성의 순결성과 명랑함을 상징하는‘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한국의 여성들을 위한 서양교육의 장을 열었다.

스크랜턴 여사가 처음 이 학교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이 나라 부녀자들에게 행복한 삶을 제공하고 싶은 열망에서였다.

“그해 10월 정동의 초가집 9채와 나대지 6천여 평을 매입했다.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위해 무슨 사업을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달 9일 아펜젤러 부인이 애기를 낳았다. 이 애기는 훗날 이화여전의 교장이 된 앨리스 아펜젤러인데, 그날 밤은 어찌나 추웠던지 애기를 자리에 눕히지 못하고 밤새 스
크랜턴 부인이 안고 재웠다. 이때 부인은 이렇듯 추운 방에서 고생하는 한국의 어머니들과 애기들을 위해 이 나라 여성을 가르칠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던 것이다."라고 『이화 70년사』는 밝히고 있다. 이 땅에 근대 여성교육의 싹이 트는 순간이었다.

설립자 스크랜턴 여사는 처음 학교가 시작되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우리 학교 사업은 이 새로 지은 학교로 옮겨가기 여섯 달 전에 스크랜턴 박사 집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학생이 한 사람뿐이었다. 그 학생은 어떤 정부관리의 첩이었는데, 그 남편은 자기 첩이 영어를 배워 후일 왕비의 통역이 되기를 바랐다. 그 여자는 우리와 약 석 달 동안만 같이 지냈다. 제일 처음 재학생으로 입학한 생도는 김생여보다 한 달 늦게 1886년 6월에 왔다. 그 색시는 집안 살림이 몹시 구차하여 우리에게 온 것이 분명했다. 허나 한 달도 못 되어 그의 어머니는 제 딸을 외국 사람에게 맡기느니보다는 가난을 참고 견디는 게 낫다고 느꼈다. 고약한 이웃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나무라며, 이 여인이 어머니답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딸을 노부인에게 맡겼을 것이라고 시비했다. 잘 먹고 잘 입고 살고 있으니 얼마 동안은 좋겠지만 조금 있다가 미국으로 끌려가서 그 신세가 어찌될는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아이들을 절대로 이 나라 밖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 보냈더니 이것이 효과를 얻어 한동안 그의 어머니를 안심시킬 수 있었고, 몇 달이 지나서야 완전히 안심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들어온 생도는 조그만 어린 거지 아이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병자였는데 스크랜턴 박사가 성문 밖에서 발견하여 병원에 데려다가 치료해주던 여인이었다. 한인들은 이 아이들을 경계의 눈으로 주목했다. 그들은 이 아이들이 불행하지도 않고 천대받지도 않는 것을 보았다. 이리하
여 다른 어머니들도 차츰 우리를 믿기 시작하여 언덕 위의 새 집으로 이사 갈 무렵에는 학생이 넷이 되고 이듬해 1월에는 일곱 명을 셀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근대 서양교육은 화려하게 시작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화학당은 1888년에는 재학생이 18명으로 불어나 학교로서의 틀을 다지게 되었다.

당시 여성 교육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유난히 남녀유별을 주장하는 한국의 관습이었다. 때문에 남자 교사는 강단에 설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외국 선교사들이 강단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학부모들은 한문 교육을 요구했는데, 여자들 가운데서는 교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화학당은 한문을 가르칠 남자 교사를 초빙하게 되었다. 그나마 남녀유별을 지키느라 할아버지 선생을 고용하였고, 학생과 선생 사이에는 휘장을 치거나 병풍을 쳤다. 조금 발전해서는 교사가 교실에 들어오기 전에 헛기침을 하면 학생들은 얼굴을 돌리고, 수업이 시작되면 교사는 등을 돌리고 칠판만 바라보고
수업을 진행하였다.

학생이 늘자 1897년, 12년간 공부하던 기와집 교사를 헐고 그 자리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하였다. 이 메인 홀은 당시로서는 서구식 시설에다 규모도 웅장하여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해서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부녀자들의 나들이 날인 초파일이나 단오가 되면, 양국관에 대한 호기심으로 수백 명의 여인들이 이화학당을 구경오곤 했다. 그러나 이 메인 홀은 6·25때 소실되었다.

당시의 교과과정은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있지는 않았고 교사에 따라 가능한 과목을 첨가시키는 형태였으나 성경은 그 자체로도 그리고 국어 독본으로도 줄곧 채택되었고, 생활교육, 가사, 자수, 음악 등을 가르쳤다. 학생들이 만든 수예품 바자회를 통해 학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이경
숙이라는 최초의 한국인 교사를 채용하여 언문(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이화학당은 표면적으로는 교육 사업이었으나 이화의 교육은 곧 선교였다. 극심한 내외법으로 아펜젤러나 스크랜턴목사가 할 수 없었던 여성 전도를 도맡아 한 이가 스크랜턴 부인이었고, 사실 정동제일교회의 초대 여성 교인은 거의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스크랜턴 여사는 수원, 오산, 이천 등 여러 곳에서 전도를 하여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09년 10월 8일 소천하여 양화진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교회사(52)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2) 교육 선교

(3)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배재학당

배재학당 설립

아펜젤러가 교육 사업을 시작한 것은 서울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아펜젤러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교육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국 공사관의 무관이었으며 대리공사를 맡고 있던 폴크(George Foulk) 씨가 고종에게, 아펜젤러가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고, 고종이 이를 허락하자 그 내용을 아펜젤러에게 다음과 같이 빨리 전했기 때문이다.

“① 나는 당신이 교육하기 위하여 여기 왔다는 것을 국왕에게 아뢰었다. ② 나는 당신에게 학교와 생도를 모아 주라고 정부에 청구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이렇게 요청한다면 오래 전부터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부탁해 온 선생들이 오는 것을 반대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③ 당
신은 당신이 책임지고 가르칠 생각을 하고 있으나, 정부나 일반 대중의 의향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의로 생도의 경험자로서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아뢰었다. 국왕께서는 당신이 한인들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갸륵한 일이며, 당신이 한인들을 가르쳐 준다면 참말로 훌륭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국왕께서는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더 보태지도 않으며, 더 깎지도 않고 그대로 말한다. 국왕께 아뢴 대로 또한 국왕께서 분부하신 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이는 곧 당신이 학생들을 모으고 학교를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니 소신대로
하여 보시오.”라고 하였다.

1885년 8월 3일 아펜젤러는 서울 정동 자신의 집 사랑에서 두 명의 학생으로 배재학당을 시작했고, 이 학교는 그 다음해 6월 8일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공인을 받아 한국의 기독교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아펜젤러는 1886년의 연례보고서에서 당시 학교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우려는 열기는 언제나 대단합니다. 이 새로운 언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디딤돌이 되는 것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영어를 공부하려고 합니까?’라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벼슬을 얻으려고’라고 대답합니다. 일종의 전초전으로 우리 선교부는 6월 8일 학교를 시작해서 7월 2일 첫 학기를 끝냈는데, 이 동안에 등록한 학생은 6명입니다. 오래지 않아 한 사람은 이 나라의 상투적 핑계인‘시골에 볼일이 있어서’나가 버렸고, 또 한 명은 가족 중에 초상이 나서 등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는 1886년 9월 1일 단 한 명이 등교한 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빈 자리는 자원하여 오겠다는 학생들로 일부가 채워졌습니다. 10월 6일 현재, 20명 재적에 18명이 출석하고 있으며, 거의 매일 입학 신청을 내는 학생들로 끊이지 않습니다. 최소한 연말까지는 학교가 붐빌 것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펜젤러가 세운 이 학교는 놀랍게 발전하여 1887년에는 정식으로 정부의 인가도 받았고 고종황제는 이 학교의 이름을 인재를 배양하는 학당이라는 의미에서 배재학당이라고 친히 지어주고, 사액간판(賜額看板)까지 하사했다. 처음부터 이 학교는 기독교 이상을 분명히 하고 시작했다. 배재학당은 이승만을 비롯한 수많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겨레의 지식의 보고가 되었고, 민족정신의 중추가 되었으며 신문화의 선도자가 되었다.”아펜젤러는“감리교가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이 나라 720만의 사람들을 위한 최고 수준의 교양과 대학과정 그리고 신학을 수업할 수 있는 학교를 세워야한다.”는 평소의 이상을 배재학당을 통해 구현하기를 원했다.

배재학당의 교육 방침

1887년 그는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교사를 짓기 시작했다. 벽돌 건물로서 76×52피트의 크기의 르네상스식 1층 건물이었다. 이 건물에는 예배실, 강의실 4개, 도서관 및 산업부를 위한 반 지하실도 있었다. 산업부를두려는 것은 한국인들이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경멸하기 때문에 노동의 숭고함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아펜젤러는 1886년 연례보고서에서 재학생이 63명이며, 평균 최고 출석수가 40명 그리고 보고서를 쓰는 날까지 37명의 어른과 소년들이 입학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는 이해에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학생들이 나오게 된 것을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복음 선교사로서의 아펜젤러가 선교 교육의 진정한 목표를 바로 여기에 두었다고 할 정도로, 유용한 인재는 구원받은 인간이어야 함을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지난 한 해(1887년) 동안 2명의 학생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현재 우리 교회 예배교인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내가 최초로 세례를 준 한국인들이다. 나는 또한 우리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 가운데서 한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처럼 개교 첫 해 동안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학생들 가운데서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다.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유용한 인재’는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주의 피로써 구원받지 않고는 ‘양육될’수 없다. 다른 학생들은 길을 묻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기도와 심령의 소원이 이 학교를 특별한 영적인 힘이 넘치는 학교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새 교사의 준공식은 1887년 9월에 워렌(Warren) 감독을 모신 자리에서 행하고, 그 해 11월 1일에 새 교사로 이전했지만 교사가 완공된 것은 1888년이었다. 이 해 가을에 아펜젤러는 학교에 산업부를 설치했는데, 일을 하는 학생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캠퍼스를 돌보고 교사를 청소하고 불을 피우는 일 등을 학생들에게 맡겨, 가난한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이무렵‘출판 일을 시작하게 되면 더 많은 학생을 고용할 수 있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1885년 후반기부터 시작된 그의 교육 활동은 1889년경에 이르면서 차차 그 틀을 잡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학교의 평판은 서울 시내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알려졌다. 정부에서는 비록 선교사에 의해 경영되는 것이지만, 국왕이 교명을 하사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거기서 공부한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새 교사가 완공됨에 따라 구 교사를 기숙사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1888년에 들어서서 1월에 올린저(Franklin Ohlinger) 목사가 중국의 선교 임지에서 한국으로 왔고, 다음 해 5월에는 미국으로부터 존스(George H. Jones) 목사가 내한하여 아펜젤러의 선교·교육 진용이 보강되었다.

아펜젤러는 학생들에게 자조(自助, self-support)적 훈련을 시키려고 하였다.

“우리는 시작 초기부터 가능한 한 자조를 도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약간의 외부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조 정책의 목적은 생도들로 하여금 대가를 낼 줄 모르는 자에게는 도움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계약을 다 이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에게 주어지는 도움을 즉시 중단합니다.”라고 1886년 미 감리회 선교부에 보낸 연례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훈련은 학생들에게 자조 정신을 길러주었고, 이 자조 정신은 자주, 독립의 정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자조하는 정신뿐만 아니라 자기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는 데 헌신해야 할 숭고한 마음의 자세를 갖도록 하였다. 자기 사회와 나라에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섬기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도성 인신하여 인간으로 오신 것이, 남을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함이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바치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이 진리를 한국 젊은이들의 훈련에 적용하였다.

해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당훈(堂訓)을‘욕위대자 당위인역’(慾爲大者當爲人役), 즉‘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부림을 받아야 한다.’로 정하고, 이를 실행하도록 교육하고자 애썼다. 이 당훈은「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는 말씀의 정신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배재학당의 신앙 교육

아펜젤러는“만약 배재가 철저히 기독교적이지 못하다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배재학당을 운영하였다. 그 결과 학교와 학생들 간에는 몇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는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의 증가된 영적 분위기와 기독교 지식에 대한 열망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둘째는 이러한 영적 분위기가 배재학당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명감을 갖도록 했는데, 그것은 크리스천 사역자, 즉 지방의 전임 교역자를 훈련시키는‘숭고한 기회’와‘숭고한 사업’을 갖는 것이었다.

셋째는 위의 교역자 양성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1896년 2월에 신학부를 개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은 1개월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 일을 통해 아펜젤러가 얼마나 강렬하게 신앙 교육을 열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교회사(53)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2) 교육 선교

(4)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된 언더우드 학당

언더우드는 입국 초기 제중원에서 운영하던 의학교를 맡아 운영하였다. 알렌은 어의, 공의 그리고 시료에 바빴고, 또 한국말이 서툴러 초창기 의학 교육에서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한 언더우드만큼 학생들과 접촉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언더우드는 외과 수술 때에 피를 보고는 졸도한 일이 두 번씩이나 있어서, 직접적인 의료 활동보다는 진료소에서 조제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되어 학생들의 영어 교육에 힘쓸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물리학과 화학 강의를 한국말로 하였다.

이러한 제중원에서의 교육 사업 이외에도 1885년 7월부터는 언더우드에게 영어를 배우고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영어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들 학생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이들을 위한 교육이 매주일 주일학교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 사실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매일 아침 아이들 서너 명이 찾아옵니다. 저는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학교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만 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해도 상당수 학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내 존재가 그다지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 중에 열두 명 정도 사내아이들
을 뽑아 가르친다면 제가 어학을 배우는 데 실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들을 키우는 동시에 한국어를 직접 공부하는 데 소비되는 시간도 보충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 시점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인 헐버트(H. B. Helbert)에게 언젠가는 한국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자신의 희망을 털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에서 언더우드는 내한 직후부터 이미 교육선교의 비전을 긴 안목으로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6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오늘의 학교 형태는 아니지만 우선 거리의 고아들을 데려다 먹이고 입혀 주며 가르치는 고아학교의 설립을 구상하고, 이 뜻을 미국공사 폴크를 통해 한국 정부의 외부에 전하자, 그 해 2월에 외부 김윤식의 이름으로 학교 설립 허가를 통보해 왔다. 김윤식이 이때 미국공사관 앞으로 보낸 공문 내용을 보면, 당시 한국 정부는 적어도 이와 같은 종교 활동이 아닌 고아나 극빈 아동을 위한 사회사업에 대해서는 매우 협조적이었던 것을 알수 있다. 이때의 상황은 언더우드가 1886년 1월 20일에 본국 선교부에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부에서 학교 사업을 허락해 줄 것 같으니 기도를 부탁합니다. 우선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잠자리까지 마련하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100달러가 미국에서 오게 되어 그 돈을 갖고 헌 집을 수리하여 건물로 사용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1886년 5월 11일에 서울 정동 자신의 집에 붙어 있는 건물을 이용하여 교육과정을 담은 학교로서의 고아원을 개원하였다. 이 고아원은 그 후 새문안교회 내에서 운영되었는데 초기에는‘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구세학당’등으로 불리다가 1893년에는‘민노아학당’으로, 그 후에는‘영신학당’으로, 1901년 미국 북장로교의 목사인 J. S. 게일이 교장으로 부임한 뒤인 1905년부터는‘경신학교’로 발전하였다. 다음의 글은 이 고아원의 설립 경위를 밝히는 내용이다.

“언더우드가 접촉하게 된 일부의 남아들이 처하여 있는 실정으로 보아 그는 고아원 설립의 필요를 느끼게 되고 이 계획을 한국 사람들을 통하여 알게 된 국왕은 이를 승낙하였다.…처음에 들어온 이는 모두 남아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관에서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게 된 어린이의 수효가 40명 이상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언더우드가 신경을 쓴 것은 학생을 모집하는 일이었는데 그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당시 외국 선교사들과 관련된 괴이한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잘 먹여 살찌워 잡아먹는다느니, 미국으로 데려가 노예로 판다느니, 심지어 남색을 즐기기 위하여 사내아이들을 데려가려고 한다는 등 좋지 못한 소문이 돌고 있던 때라 학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고아나 길가에 버려진 걸인들 중에서 학생을 구해야만 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초기 학교가 하나같이 고아 내지는 가난한 학생들로 시작되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어학 선생이 추천한 천주교인 한 명을 특별히 고용해 서울 시내 고아나 걸인 형편을 조사하게 했다. 그 천주교인은 나흘 만에 당장 구호가 필요한 고아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이 고아 한 명으로 고아원이 시작되었다. 감리교의 아펜젤러도 그날 개원 예배에 함께 참여했는데, 언더우드는
고아원 설립 1년 후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고아원 설립 당시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약 1년 전 고아원을 개설했습니다. 1886년 5월 11일에 한 아이를 데리고 그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한 명만의 입학 허가를 받아 낸 상태고, 다른 세 명은 입학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날 저녁 이곳에 있는 선교사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고, 그 사업을 하나님께서 축복하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가르쳐 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사택과 바로 붙어 있는 꽤 넓은 한옥 한 채를 사서 약간 수리했는데 집값은 아주 적당했고 수리비까지 포함해서 약 500달러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고아원 형식의 이 학교는 비록 정식 학교와 같은 기관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교육을 시켰다는 데에서 학교의 성격을 찾을 수 있다. 이후 고아원에 수용되는 아이들은 숫적으로 약간 늘어갔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언더우드는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옥을 구입해 교실로 사용하였다. 당시의 어려운 경제사정과 고아원에서 교수한 교육내용을 언더우드 여사는 1890년 9월 1일에 피어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 고아원에는 약 25명의 남아가 수용되어 있다. 그들은 방을 치우기도 하고 자기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도 하면서 학교운영에 필요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몸차림과 방을 잘 정돈해 놓고 8시까지 한문을 공부하고 외국인 선생들과 같이 아침예배를 보고 나서 조반을 먹
는다.…조반 후에 영어공부를 조금하고 또 성경공부를 하였다. 이러한 수업시간 사이에 쉬는 시간을 넣었다. 오후에는 놀기도 하고 복습도 하고 한문 공부도 하게 하였는데, 한문 공부는 한국인 교육에 요긴한 과목이다. 선교본부에서는 이 학교에 대한 예산을 대폭 삭감할 수밖에 없게 되어 학교유지
가 큰 문제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언더우드는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 일을 너무나 재미있어 했다. 언더우드는 의사 헤론의 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헤론 부인은 그의 청을 쾌히 승낙하여 한동안 그의 일을 도왔다.

“헤론 부인, 제가 하는 일을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하였는데 바로 이 일이 예수의 정신을 닮아 가는 일이라고 믿습니다.”라고 하였고, 헤론 부인은 “네, 잘 알았습니다. 저의 부군도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 의과대학 교수들이 조수로 남아 있으면 교수로 채용하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가난한 조선 사람, 병들고 죽어 가는 그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왔는데 제가 협력 안하면 누가 합니까?” 라고 하였다. 헤론 부인의 협력은 언더우드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 고아원 학당의 출신으로는 우사(尤史) 김규식과 도산(島山) 안창호 등이 있다. 언더우드는 고아가 된 어린 규식을 고아원으로 데려와 자신의 양자처럼 극진히 돌보며 영어를 가르쳤다. 규식 역시 고아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익히 알려진대로 훗날 한국교계와 민족의 지도자로서 성장 활동하였다. 도산 안창호도 1894년부터 2년간 고아원이 영신학당으로 바뀌어 새문안교회 내에 있던 때에 이곳에서 학생과 접장으로 지낸 바 있다. 안창호는 1894년에 청일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평양성전투를 겪으며 깨달은 바 있어 단신 상경했다가 경희궁(구 서울고등학교 자리) 고갯길을 지나가던 중 우연히 만난 밀러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언더우드 학당에 첫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 후 학당을 다니며 신학문과 기독교에 눈을 뜬 그는, 1896년 11월 서재필의 지도로 배재학당 안에 조직된 협성회에 참여하였으며, 1898년 봄 그곳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회를 조직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청년지사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1905년 경신으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는 그리스도교 전도자와 교원을 양성할 목적으로 국어, 영어, 과학 등 일반 교과목 외에도 성경, 교회사, 미국사 등을 가르쳤다. 1915년 4월 언더우드는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하였으며, 이 대학부를 모체로 2년 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선교 초기부터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인 언더우드의 노력의 결과 1910년대까지 장로교 산하에서 개척 설립한 학교들이 크게 늘어났다. 북장로교 8개, 남장로교 9개, 캐나다장로교 5개, 호주장로교 3개, 미감리교 8개, 남감리교 4개 등 37개였다.

한국교회사(54)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1) 한국성교서회 설립

언더우드의 한국어 실력은 그의 한국어 공부에 대한 열정에 힘입어 그가 입국한 지 2년이 지난 1887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불편함이 없이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렇듯 한국어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언더우드는 곧 한글성경과 외국인을 위한 사전 편찬 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좀 더 본격적인 교육사업과 선교를 위해서였다. 1888년 언더우드는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토론토 전도문서회, 미국 전도문서회 그리고 런던 전도문서회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

선교부로부터 어느 정도 재정지원을 받는 데 성공한 언더우드는 헤론의 제의로 1889년 10월 자신의 집에서 한국성교서회(Korean Religious Track Society, 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하기 위한 준비 모임을 가졌고, 그 후 헤론이 죽기 한 달 전 1890년 6월 25일에‘규칙을 채택하고’정식으로 한국성교서회를 결성했다. 한국성교서회는 1895년 알렌 켄뮤어(Allen Kenmure)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 문서는 문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희생을 통해 개인, 사회 그리고 백성의 삶을 고양하고, 정화하고, 그리고 영성화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언더우드와 뜻을 같이하는 올링거(F. Ohlinger)가 회장을 맡았고, 헐버트(H. B. Hulbert)가 부회장에, 연락 간사는 언더우드가, 서기는 스크랜톤(W. B. Scranton)이 그리고 회계는 말콤 펜윅(Malcolm Fenwick)이 맡았다. 구성원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성교서회는 처음부터 문서 선교를 통한 한국의 복음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파 개념을 넘어서 있었다.
비록 수년 동안 건물도 없고 간사들에게 사례도 지급하지 못했지만,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이들의 협력을 통해 한국성교서회는 날로 번창하였다. 1897년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자 서회 명칭도‘대한성교서회’로 바뀌었고, 1915년 대한성교서회는 다시‘조선예수교서회’로 명칭을 바꾸고, 그 해 출판위원회를 조직했다. 1890년에 창립된 한국예수성교서회는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두 개의 감리교 선교회의 적극적인 협력과 참여를 통해 한국교회 선교 초기는 물론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는 기간 동안 문서를 통해 한국교회의 복음의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2) 한국성서번역위원회 구성

1887년 당시 존 로스 역이나 이수정 역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번역, 표준 용어 채택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선교의 실정에 맞는 번역 작업이 추진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887년, 한국에 도착한 지 불과 2년 만에 한국개신교 선교를 대변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초에 출판된 이수정의『신약마가젼복음셔언히. 』를 대폭 개정해 『마가의 젼한 복음셔언히. 』를 출판한 것도 그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이들이“번역 저본(底本)을 로스 역(1884년)이 아닌 이수정 역으로 한 것은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를 담은 지방색 짙은 성서라는 단점을 가지고”있었기 때문이었고, 이수정의 번역본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은 번역상의 오류 때문이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 역에서“예수 그리스도가 귀신의 아들이라는 인상을 한인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오해를 비롯한“몇 가지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 이를 염두에 두고 “이수정의 번역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을”시작했던 것이다.

성서번역을 관장하기 위해 1887년 2월 7일에 구성된 한국상임성서번역위원회는 1887년 4월 11일 제3차 모임에서 그 명칭을 한국상임성서위원회(The Permanent Bible Committee in Korea)로 개정하고 그 밑에 번역위원회와 개정위원회라는 분과위원회를 두기로 결정하고 성경 번역 및 개정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런 개정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 만주, 두 번역판은 사투리가 많고 한자말을 풀어쓴 언해식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번역상의 오류도 발견되어 위원회는 말과 글이 일치하며 또 표준어로 된 새 번역판을 만들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해서 기존 번역을 고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새로 번역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3) 신약성경 번역

성서번역위원회는 2년 내에 신약성서번역사업을 끝내기 위해 1890년 6월 11일에 언더우드와 스크랜톤을 특별히 성서번역에 전념하도록 배려해 주었고, 이들은 이 일에 혼신을 다했다. 1891년 2월 가족들의 건강문제로 귀국한 언더우드와 스크랜턴 대신 아펜젤러와 게일이 작업을 대신하는 변화에 따라 성서번역 사업이 예상보다 늦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번역 사업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장로교 공의회가 조직된 1893년 5월, 기존의 상임성서위원회를 해체하고, 상임성서실행위원회(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가 결성되어 번역 사업을 지도하고 통제하면서 성서번역 사업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번역의 과정은 선교사들이 한국인 조사의 도움을 받아 개인역을 만들면, 다른 번역자들의 의견과 비판을 참고하여 수정역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모든 번역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표결로 통과시켜 ‘성서번역자회 시험역본’(Tentative Edition of the Board)을 만들었다. 해서 초기 한글 성경 번역은 개인역-수정역-시험역본이라는 세 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완성된 시험역
본을 발행해 3년 동안 사용하면서 문제가 발견되면 이것을 번역자회의에서 개정하여 최종적으로 공인역본을 만든다는 것이다. 실행위원회는 한글 성경이 시급히 요청됨에 따라 공인역본이 완성되기까지 시험역본을 발행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단계를 거치는 이유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더라도 좀 더 완전한 한글 성경을 만들겠다는 목적에서였다. 실제로 1893년 성서상임실행위원회가 결성되고 1898년까지 4년 동안 번역자회가 31회나 모였고, 이 중 10회는 마태복음의 시험 번역을 위한 회의로 나머지 10여 회는 사도서신 번역문을 토론하기 위해 모인 회의였다. 1895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각 1,500부가 간행되었으며, 이 중에 시험역본은 마태복음뿐이었고, 다른 성경은 개인역이나 수정역 단계에서 출판한 것들이었다. 마태복음은 아펜젤러가 만든 개인역을 수정역 과정과 토의를 거쳐 시험역본으로 확정한 것이고, 그 외 마가복음은 아펜젤러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은 게일이, 그리고 누가복음은 언더우드가 개인역으로 만든 것이었다. 시험역본인 마태복음을 제외한 다른 역본들이 개인 역본임에도 출판을 하게 된 것은 선교단체 및 한국인 교인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못 이겨서였는데, 그 반응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각 1,500부씩 인쇄된 성경은 인쇄되자마자 모두 매진되고 말았다. 당시의 교세로 볼 때나 성경이 무료로 보급된 것이 아니라 판매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와 같은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 성경의 필요성과 놀라운 반응을 체험한 실행위원회는 개인역과 수정역을 시험역본으로 만드는 작업보다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다른 성경의 번역에 착수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하고 번역자회를 통해 나머지 부분의 번역 착수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1897년부터 1900년 사이에 신약성경의 번역은 가속도가 붙어 1900년에 신약성경 번역을 완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출판되던 1900년에는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출판되었던 모든 성경을 하나로 묶어 한 권의 신약성경으로 출판했다.

1900년 9월 9일 완역된 신약성경 첫판이 출판되어 한국인들과 외국인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정동교회에서 출판감사예배를 거행하였다. 이날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열린 기념 예배 때 사무엘 마펫이 사회를 보고,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 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 언더우드, 그리고 알렌이 연사(演士)로 수고하고, 스크랜톤이 영어로 답사했다. 알렌이 세 성서공회 이름으로 번역위원회 위원들과 한국인 조사들에게 신약성경을 선물했다. 1900년 9월 완역된 신약성경 첫판은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는 번역자회의 공식적인 의결을 거친 시험역본이었고, 나머지는 개인역이었다. 1900년부터 신약성경의 완전 시험역본의 출판을 위해 아펜젤러, 레이놀즈, 게일에
게 이 일을 맡겨 추진토록 했으나 1902년 6월 아펜젤러가 목포에서 열리는 번역자회의에 참석키 위해 제물포에서 목포로 가던 중 목포 앞바다에서 조난 당해 그의 조사 조성규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성경번역의 효율적인 진행과 추진을 위해 1902년 9월 남장로교 선교부는 레이놀즈가 성경번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서울로 파송했고, 북장로교에서도 게일과 언더우드가 이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성경 번역이 완료되기까지 이들 세 사람의 노력과 헌신은 특별했다. 처음부터 성경번역에 전념하고 한국어 사전을 출판할만큼 한글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언더우드, 입국 얼마 후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 출판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대단한 데다 오랫동안 한국문화와 역사를 연구하여 역사와 문학적인 재능을 인정받던 게일, 그리고 한국에 오기 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에서 라틴어 교수를 하다 올 정도로 고전어 지식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레이놀즈, 이 세 사람은 한글 성경 번역이 완성될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개역 작업을 여러 차례 거쳐 좀 더 다듬어진 새로운 번역본을 출판했으며, 다시 이것을 수정하여 1906년에는 한국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를 출간했다. 이 공인역본 ‘신약전서’출간에 세 선교사와 함께 협력한 조사들이 있는데, 언더우드의 조사 김명준(金明濬), 게일의 조사 이창직(李昌稙), 정동명(鄭東鳴), 레이놀즈의 조사 김정삼(金鼎三), 이승두(李承斗)의 헌신은 특별했으며, 이외에도 존스의 조사 문경호(文慶浩), 아펜젤러의 조사 조한규, 그리고 최병헌(崔炳憲), 홍준(洪俊), 송덕조(宋德祚), 송순용(宋淳容)이 성경 번역 과정에서 선교사들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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