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 내몽고지구  -  허 저 족(赫 哲 族)


허저족이라는 이름은 허저인(赫哲人)들이 자신들을 "허즌(赫眞)"이라 칭한 데서 비롯된다. "허즌"이라는 말은 하류(또는 동방)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외에도 "헤이진(黑斤)"·"허진(赫金)"·"헤이저(黑哲)" 등의 명칭이 있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 "허저"라는 명칭으로 통일되었다. 그들은 대대로 동북의 송화강 흑룡강과 우수리강 연안에 살면서 중국 북방에서는 유일하게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고 개썰매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삼은 소수민족이다. 역사적으로 허저족은 일찍이 물고기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길들인 개를 부리며 생활했기 때문에 "어피부(魚皮部)" 또는 "사견부(使犬部)라 칭해지기도 했다.

과거에는 제국주의와 역대 통치 계층의 잔혹한 억압과 착취에다 자신들의 낙후된 문명 수준으로 인하여 그들은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며 어렵게 생활했기 때문에 인구사망율이 매우 높았다. 통계에 의하면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직전에 허저족은 이미 멸족의 위기에 이르러 전체 인구가 3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 중국 정부는 허저족에 대하여 대대적인 지원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허저족은 다른 소수민족과 동일한 대우를 받으면서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허저족은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고 인구도 급격히 증가하여 1990년 제4차 인구조사 때에 허저족의 총인구는 4245명에 달하게 되었다.

허저족은 주로 흑룡강성의 동강시(同江市)와 무원현(撫遠縣) 요하(饒河縣)의 강안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일부 소수는 화천현(樺川縣) 의란현(依蘭縣) 부금현(富錦縣) 지역과 가목사시(佳木斯市)에 흩어져 살고 있다.

허저족은 알타이어계 만주퉁구스어족 만주어 갈래에 속하는 그들의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문자는 없다. 오랫동안 한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류를 가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어와 중국문자를 잘 알고 있다.




( 1 )

허저족은 오르죤족(鄂倫春族) 에벵크족(鄂溫克族) 만족과 흑룡강 유역의 토착민족 및 허저족 분포 지역으로 이주한 몽고족 한족 등의 다양한 민족들과 융화되어 청대 초기에 형성된 새로운 민족 공동체이다. 그들은 중국 동북의 고대민족이던 "숙신(肅愼)" "읍루(揖婁)" "물길(勿吉)" "흑수말갈(黑水靺鞨)" "야인여진(野人女眞)" 등과 밀접한 연원 관계를 가지고 있다.


허저족은 역대로 당대에는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 요대에는 오국부절도사(五國部節度使), 금대에는 호리개로(胡里改路), 원대에는 장강달달로(長江達達路), 명대에는 노이간도사(奴爾干都司)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청대 초기에는 영고탑매륵장(寧古塔梅勒章) 관할 구역에 속해 있었다.

청 강희(康熙) 54년(1716년) 허저족 지구의 관리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송화강 하류의 3개 허저 씨족 거주 지역인 노엽갈륵(努葉葛勒) 의극륵(依克勒) 호서리(湖西里)에 삼성성(三姓城, 지금의 흑룡강성 依蘭縣 경내)을 세웠으며, 옹정(雍正) 7년(1733년)에는 부도통(副都統)을 설립하여 직접 관리하였다. 일찍이 청대 초기에 허저족은 팔기(八旗)에 편입되었다. 광서(光緖) 6년(1882년)에 조정에서는 갈이당( 爾當)에 협령아문(協領衙門)을 설립하고 그 아래에 4개의 좌(佐)를 두었으며, 좌령(佐領) 아래에는 "영최(領催)" 등을 설치하여 씨족장에게 관직을 주고 회유하면서 체계적인 통치를 하였다. 청왕조의 봉건통치가 강화되고 민족간에 교류가 증대되면서 허저족 내부에도 봉건제도의 추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청대 말기부터 민국 초기 사이에는 주현제(州縣制)가 부금(富錦) 동강(同江) 무원( 遠) 요하(饒河) 등지에 확립되면서 현관(縣官)이 과거의 협령(協領)과 좌령(佐領)을 직위를 대신하였다.

1930년대 초기에 중국 동북의 광활한 영토가 일제의 수중에 들어가자 동북의 각 민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일제는 허저족에 대해서 비참한 말살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들은 허저족들에게 아편을 흡연하도록 강요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를 가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허저족과 외부 항일단체의 연계를 막기 위하여 1942년에는 부금 무원 등지의 허저족들을 깊은 산중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들을 "일부락(一部落)" "이부락(二部落)" "삼부락(三部落)"으로 구분하여 "집가병둔(集家幷屯: 집단부락식 관리라고도 함)"을 시행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일거일동을 감시받으면서 사냥으로 잡은 그들의 생산물을 모두 바쳐야만 했다. 그들은 음습한 지하실에 살면서 배급으로 주는 상수리 가루와 야채를 버무린 것(橡子面 野菜)을 먹고 포피( 皮)나 마대조각을 입은채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였다. 더욱이 극도로 열악한 위생 환경 속에서 각종 질병과 전염병이 만연하여 사망율이 매우 높았다.







( 2 )

허저족은 빛나는 혁명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명대 말기에 만족 정권이 흥기하였을 때, 허저족은 만족 통치 계층의 잔혹한 억압과 착취에 반항하여 다양한 형식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 최대 규모의 항쟁은 1608년 9월에 일어난 것이다. 당시에 허저족들은 천여명이 영고탑(寧古塔, 지금의 흑룡강 寧安縣城)을 포위 공격하여 당시의 여진족 통치자의 기세를 꺾고 그로 하여금 완화 정책을 취하도록 하였다.

17세기의 제정러시아는 중국의 최전방인 흑룡강 유역을 노리고 있었다. 이에 허저족들은 동북의 다른 민족과 함께 제정러시아의 침입에 대항하였다. 1643년 제정러시아의 한 정찰부대가 송화강 지구로 잠입해오자 그 지역의 허저족들은 침입자들을 용감하게 물리쳤다.

1651년에 그들이 다시 중국 경내로 잠입하여 온갖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자 우잘라(烏 拉)촌의 허저족들은 주변의 다른 민족 천여명과 연합하여 반격을 가하였다. 1658년 청왕조는 원정군을 파견하여 의란현(依蘭縣) 부근의 상견오리(尙堅烏里)를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를 공격하였는데, 이 때에 그 지역의 허저족들도 전심전력으로 원정군을 지원하여 러시아군을 섬멸시켰다.

1682년과 1854년에 허저족들은 불굴의 정신으로 두 차례에 걸쳐 흑룡강 유역을 침입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1860년 흑하구(黑河口, 지금의 흑룡강성 同江市)의 허저족들은 자발적으로 순찰대를 조직하여 중요한 강나루터를 경비하면서 러시아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1931년 9 18사변 이후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간 허저족들은 민족의 대의를 끝까지 굽히지 않고 일제에 완강하게 저항했다. 당시에 많은 허저족 젊은이들은 항일의용군에 가담하여 호림(虎林) 요하(饒河) 밀산(密山) 등지를 옮겨다니면서 공방전을 벌이고 일본군을 물리쳤다. 유명한 동북항일연합군이 설립된 후에, 허저족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봉쇄를 뚫고 동북항일연합군에 투신하였다. 그들은 전장으로 달려가 직접 일본군과 싸웠을 뿐만 아니라 부상자 구호나 식량 탄약수송 임무도 맡으면서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모든 역량을 다바쳤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험난한 세월을 보낸 허저족들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1947년 가을, 허저족들은 인민해방군과 긴밀히 협력하여 우덕영(尤德英, 허저족 불순분자) 잔당을 숙청하였다. 착취와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던 허저족들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을 재건하고 인민민주정권을 세워 사회주의 사회로 진입하였다.
자료출처:http://shanghai365.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