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고려인 강제 이주지에 가다
올린시간: 2007-5-16 16:07 | 작가: webmaster | 출처: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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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쉬토베에 있는 1937년 고려인들의 최초 정착지 기념비. |
ⓒ 장훈 |
필자는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한민족정보화지원단의 봉사단원으로 카자흐스탄에 파견되어 활동했다. 석 달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이 소설의 제목만큼이나 고려인들의 지난한 삶에 대해 연민과 슬픔을 느꼈다.
내년, 2007년이 되어 이주 70주년을 맞이하기까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이들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삶의 투쟁을 해왔을까. 조상들이 살아온 곳에서 강제로 떠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돼 버린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서러웠을까. 서포 김만중이 떠나던 귀양길처럼 수많은 고려인들의 이주와 정착의 모습이 마치 꿈결 같다.
어디에선가 잊혀진다는 것은...
1937년 8월 21일 스탈린은 강제이주 정책을 결정하고 이듬해인 1938년 첫날까지 이주 완료를 명했다.
이에 따라 원동(遠東, 블라디보스토크 등 극동 지역)의 척박한 땅에서 농인(農人)으로 살던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운명에 놓였다.
일본의 침략으로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이래 어려운 환경과 싸우며 블라디보스토크의 얼어붙은 땅을 조금씩 비옥하게 만들어가던 고려인들은 1937년 겨울, 메마른 대륙의 잔인한 추위 속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의 몇몇 국가로 이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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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 집단 거주지역인 예스길드 마을. |
ⓒ 장훈 |
기나긴 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추위와 배고픔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첫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 이미 많은 고려인들이 희생됐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메마른 대륙에 닿은 후, 끝없는 대지 위 칠흑 속에 선 고려인들은 지구 밖 어두운 허공에 던져진 느낌으로 새 삶을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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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쉬토베에 있는 최초 정착지의 토굴 흔적. |
ⓒ 장훈 |
봉사단원으로 머무는 동안, 이주 초기의 삶을 보다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카라탈 구역의 한 마을에 살고 계시는 이주 1세대 중 최고령인 할머니를 찾았다.
이 노인에 따르면 이주 후 많은 사람들이 추위 때문에 죽고 배고픔에 신음했다고 한다. 또 강제이주를 단행할 때 신분증명서류와 간단한 소지품만 지니게 했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물품을 다 두고 와야 했고, 이 때문에 정착 초기에 어려움이 더 컸다고 한다. 노인은 그렇게 하루하루 눈물겨운 삶을 연명했다고 했다. 단 24시간 만에 최소한의 짐만 꾸리고 기차로 한 달을 내달린 끝에 얼어붙은 허허벌판에 던져진 고려인들. 이들의 강제이주는 홀로코스트에 못지 않았다.
혹독한 자연환경과 싸운 고려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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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쉬토베에 있는 최초 정착지 토굴 맞은편에 있는 고려인 공동묘지. |
ⓒ 장훈 |
최초정착지를 표시하는 기념비와 토굴 터 앞쪽에 있던 수많은 묘지는 고향을 잃은 이들의 아픔을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은 기념비와 묘지만 남아 슬픈 역사를 소리없이 전하고 있지만, 한민족의 한은 여기에도 구슬프게 어려 있었다.
서러운 역사였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한국의 반공이데올로기 등 때문에 고려인들은 한국을 비롯한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강제 이주된 이래 외롭고 힘든 삶을 또다시 일구는 과정에서 고려인들은 새로운 것을 많이 얻었지만, 그와 동시에 오랜 전통도 많이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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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쉬토베에서 열린 카라탈 구역 콩쿠르에 학교 대표로 참가한 고려인 학생들. |
ⓒ 장훈 |
그러나 처절한 생존 노력 덕분에 고려인들은 굶주림에서 서서히 벗어났고 자손도 점차 늘었다. 어느덧 이주 4세대가 자라나고 있고 이들은 필자를 포함한 봉사단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 정보통신(IT) 수업을 받고 있다. 척박한 자연과의 싸움에서 고려인들은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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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 생일잔치 축하 무대에서 사물놀이를 공연한 고려인 학생들. |
ⓒ 장훈 |
한국 사람들은 점차 국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동포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간 잊고 지내온, 아니 잊으려 노력했을지도 모르는 고려인들의 존재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지켜주지 못했고 오히려 버리다시피 했던 과오를 보상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야했다. 내게도, 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은 봉사단으로 활동하는 내내 고스란히 슬픔으로 다가왔다.
카자흐스탄에 파견된 후 고려인 가족의 저녁식사에 초대돼 그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는 그 집 식구들뿐 아니라 이웃들도 함께했다. 그 이웃 중에는 노령의 이주 1세대 할머니를 비롯한 몇 명의 노인들도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동포사업'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노인들께 자세히 말씀드리고 한국의 노력을 설명했다. 고려인 동포들을 잊고 살아온 한국인의 모습을 해명해야 했다. 어느 틈엔가 자신도 모르게 변명만 늘어놓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한국도 그동안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고, 하지만 이제 여유가 생겼기에 앞으로 우리 동포들을 한국이 나서서 챙길 것이라고 바람 섞인 말을 내뱉고 있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구슬픔이 전해졌다. 식사가 끝날 무렵 노령의 할머니는 한국에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며 나지막이 웅얼거림 비슷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함께 성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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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사단이 활동한 제르진스키 슈꼴라 전경. |
ⓒ 장훈 |
대부분의 2세대와 3세대의 경우 우리말을 사용해 직접 말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부모들이 사용하는 우리말을 들으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이 정도의 대화가 가능하다. 물론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노력한다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우리말이 전해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한민족의 흔적이자 동포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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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노는 아이들. |
ⓒ 장훈 |
개인적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지내는 동안 동포들에게 '고려말'이라는 표현보다 '우리말'이라는 표현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하나의 말과 글을 쓰는(비록 그것이 과거일지라도) 한민족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고려인들이 한국에 대한 동질성을 회복하고 친근감을 배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카자흐스탄을 비롯해 한민족이 살고 있는 여러 국가들에 지원하는 방식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동반자적인 접근이다. 현재의 경제 상황만 놓고 우월과 열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한국의 이미지에 커다란 손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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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한 속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과 물건을 고르는 손님들. |
ⓒ 장훈 |
더욱이 카자흐스탄과 한국은 좋은 교역 파트너로서 상대방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때 고려인들의 존재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사는 고려인들에 대한 지원을 더 다양하고 폭넓게 해야 한다.
동포를 보듬으며 양국이 동반성장할 수 있는 첫걸음은 봉사단 파견을 비롯한 한국의 지원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촌에서 동포를 기억하고 더불어 사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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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벽화가 그려져 있는 우쉬토베의 한 카페 화장실. |
ⓒ 장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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