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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보는 한국기독교회사
자료도움; http://kcm.co.kr/
-아펜젤러(H.G. Appenzeller)
한국도착 보고서 중에서(1885.4.5)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적을 증명한다
한국기독교박물관소장. 24.5 *24*9cm
임진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사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니시에 끌려 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 소재.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방문시 꼭 들려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초기 서학(천주교)의 신앙화의 주역이었던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악종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촌리 소재.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교회(특히 조합교회)는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한국침략과 병합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사진은 해방전까지
일본인교회로 사용되다가 해방후 덕수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서울 정동에 소재.
일제는 민족운동지도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였다.
사진은 철도를 파괴한 독립투사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장면이다
781년(당 건중2년)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교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관(숭실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88.8*177.8cm
1831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상륙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1855년 충북 제천군 배론에 솔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교로 1866년 병안교난으로 폐쇄되기까지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공헌하였다.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F. Verbiest)가 제작(1674년)한지로도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重刊)되었다. 8폭 병풍.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405*173.3cm
1882년 신사유림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성서번역과 선교사 초빙 및 유학생교회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진은 1883년 5월 개최된 일본 전국기독교대친목회에 참석한 이수정(가운데 한복입은 이)의 모습을 모여주고 있다.
스콜틀랜드연합 장로교회의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만주 봉천에 머물면서 한국선교에
관심을 두었다.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의 협력을 얻어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사진은 1882년 간행된 최초의 한글성서<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이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비로소 기독교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 셈이다.
1883년 민영익(앞줄 가운데)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감리회의 가우쳐와 만나게 되어 한국선교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수정이 일본에서 한문성서에 이두(吏讀)토를 달아 펴낸 <신약성서 마가전>(1884)이다.
이수정은 이 외에도 마태, 마가, 요한복음 및 사도행전을 같은 식으로 펴냈으며 한글성서로 <신약마가젼복음서>를 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최초로 내한(1884년 9월)한 알렌이 고종의 윤허를 얻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오늘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이 되었다.
한국교회 초기의 자발적 전도자요, 권서인이었던 의주 출신 서상륜과 서경조 등 그의 가족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비롯되었다. 이는 세계 선교사상 유래가 없는 자발적 자전에 의한 복음의 토착, 수용사 였다.
곧 선교사 입국 이전에 한국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미국 감리회 선교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가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 및 의료 선교 윤허를 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1934년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배재학당에서 공인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
아펜젤러(좌)와 언더우드(우) : 1885년 4월 5일 함께 내한한 두 선교사는 한국 개척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으로 1885년 8월에 설립되었다. 1887년에 건축된 교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벽돌 건물이기도 했다.
성경과 전도지를 파는 매서인(권서인)들의 활약으로 한국교회는 크게 발전하였다.
1890년경 서울 지방에서 활약하는 매서인
1890년 한국선교를 시작한 영국 성공회는 서울 정동에 대성당을 설립(1891)하고 로마네스크식 건물을
마련(1926)하여 성공회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1890년 창설된 한국성교서회는 예수교서회로 개칭되었다가 현 대한기독교서회로 발전하였다.
사진은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사용되었던 사회건물이다.
1893년부터 시작된 성공회의 강화 선교 결과로 1900년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채용한 성당을 건축하였다.
기독교 토착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1893년 한국성서번역자회가 구성된후 1900년에 신약성서가,1910년에 구약성서가 각각 번역 완료되었다.
사진은 1904년에 당시의 번역자들이다.
1897년 평양에 설립된 숭실중학교의 졸업장(1912년)으로 졸업장의 주인공은
후에 감리교 및 그리스도교회의 목사가 된 최상현이다.
1898년 러시아 공사관 안에서 암브로시 신부에 의해 교회가 시작되었으나 노일전쟁(1904-5)이후 교세가 악해졌다.
사진은 1896년경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 경내를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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