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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리봉동에 가면 이국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생소한 중국음식점에 낯선 말투를 쓰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가 이어지는 것. 이런 독특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이유는 가리봉동이 중국교포들의 밀집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거리의 가운데 자리한 한 사무실에는 연일 상담을 받는 중국교포로 분주하다. 이 사무실은 중국교포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마련된 중국동포타운센터로 몇 달간 임금이 밀려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조차 버거운 교포, 일터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다쳤지만 산재처리를 해주지 않아 고통을 받는 교포 등이 상담을 받으러 오고 있다. 같은 동포임에도 외국인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어렵게 살아가는 교포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중국교포 30만시대, 30만가지 애환들 “들어 보라”
지난달 22일 중국동포타운센터에 한 중년의 여인이 비지땀을 쏟으며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찾아왔다. 이 여인은 한국에 온지 1년 반이 지났다는 45세의 김모씨로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여위고 지쳐보였다.
김씨는 작은 삼계탕식당에서 일을 하다 다친 후 몇 개월을 집안에서만 지내다 산재처리가 되는지 여부를 상담하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집을 나섰다고 했다.
김씨가 사고를 당한 것은 두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해 2월 한국에 들어와 신촌에 있는 한 식당에서 일을 하던 김씨는 식당주인이 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는 바람에 지난 6월 가리봉에 위치한 한 식당에 취업을 했다.
사고를 당한 날은 유난히 손님이 많아 퇴근시간이 다 되도록 일이 끝날 줄을 몰랐고 맘이 급해진 김씨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급히 테이블을 치우던 김씨는 주방으로 가는 도중 사기로 만든 컵을 떨어뜨렸고 그 파편을 발로 밟았다.
그 바람에 손가락 한마디만한 컵 조각이 그녀의 발목을 파고들었고 김씨는 자신의 손으로 사기조각을 빼냈다. 이 모습을 보던 식당주인은 뒤늦게 약국에 가 소염제와 진통제 등을 사왔고 대충 응급처지를 한 김씨는 절뚝거리며 식당을 나왔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사고라 여기며 주인의 무심함을 애써 참았던 김씨. 그러나 부축을 해 택시를 잡아 주기는 커녕 문밖에 나와 보지도 않는 주인의 모습에 김씨는 큰 실망을 느꼈다고 한다. 김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사람들에게 나쁜 감정은 없었는데 그날 이후 한국사람은 참 모질다는 걸 느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홀로 택시를 잡고 살던 4평 남짓한 쪽방까지 어렵사리 온 김씨는 자고 나면 괜찮겠거니 하는 생각에 고통과 싸우며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병원을 찾은 김씨에게 의사는 인대가 끊어졌다며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보험증도, 수술비도 없던 김씨는 중국동포교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어렵사리 수술을 했다. 그러나 사고 후 상당시간이 지나서야 수술을 한데다 물리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발가락 두 개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발목을 돌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걷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몸이 아파 식당일도 하지 못해 두 달 동안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을 안고 있다.
김씨는 “아는 교포동생이 아니었다면 벌써 굶어 죽었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김씨는 산재로 인한 보상을 받을 것은 꿈도 안 꿨다고 한다. 자신의 과실로 일어난 사고인데다 불법취업을 한 탓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한국에 들어왔을 때 교육을 받으며 받았던 약정서를 보게 됐다. 그것은 업무상 일어난 사고는 무조건 산재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본 김씨는 사고를 당하고 두 달이 지나서야 중국동포타운센터에서 노무사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상담해 준다는 것을 떠올리고 어렵게 사무실을 찾아 온 것이다.
김씨의 이야기를 들은 노무사는 자신의 잘못이든 아니든 일을 하는 도중 다쳤기 때문에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단호히 이야기했다.
이에 큰 힘을 얻은 김씨는 노무사가 요구한 목격자진술서와 진단서를 준비해 올 것을 약속하고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사무실을 떠났다.
이처럼 많은 중국교포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자신의 처지가 떳떳치 못하다는 이유로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날 사무실을 찾은 또 다른 중국교포 김모(48·남)씨는 경남 양산에서 바닥타일회사인 K업체에서 노동일을 했지만 임금을 받지 못한 사연을 가졌다. 김씨와 함께 일하던 동료교포 3명이 받지 못한 임금은 총 7백70여만원. 김씨가 더 억울해하는 것은 당시 자신들과 일하던 한국인들은 밀린 급여를 모두 받았지만 중국교포들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건설현장에서 노동일을 하다 임금이 밀리는 것은 중국교포들에겐 비일비재한 일이라고. 실제로 상담사례 중 70%가량이 건설현장에서 일어나는 속칭 ‘오야지사건’이라고 한다.
때로는 임금체불 사건이 폭력사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 임금체불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일을 하고도 돈을 받지 못하면 사용자의 다리를 부러뜨려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중국의 문화.
김씨는 상담을 하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깡패들을 시켜서라도 십장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는 말을 하며 주먹을 쥐기도 했다.
이날 상담을 맡은 에이스 노무법인의 이종현 공인노무사는 “중국과 한국은 임금체불에 대한 인식 자체가 틀리다”며 “이 문제를 방치한다면 더 큰 폭력사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왜 중국교포를 상대로 한 임금체불이 이렇게 자행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중국동포신문의 김용필 국장은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불협화음이 큰 몫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이 또한 중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한다. 중국의 경우 아무리 일이 많이 남았다 해도 퇴근시간은 칼처럼 지키는 것이 상식인데 한국의 경우 시간외 근무를 당연시 하다 보니 여기에서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 김국장은 “교포들의 경우 중국에서는 해본 적이 없는 고된 노동을 하는 것에도 불만이 쌓인 데다 수당도 주지 않고 시간외 근무를 시키니 계약기간을 지키지 않고 뛰쳐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계약기간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금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런 경우에는 무조건 사용자의 잘못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고 김국장은 말했다.
결국 1백%피해를 입힌 사람도, 1백% 피해를 입은 사람도 없는, 모두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비극이라는 것.
물론 고의적으로 임금을 체불하는 한국인사용자도 많다. 한 예로 5천만원 상당의 고급 승용차를 몰고 번듯한 식당을 4개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달 임금 1백70만원을 주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며 전화번호와 팩스번호까지 바꾸는 악덕 고용주도 있다.
이종현 노무사는 “그나마 중국교포들의 처우가 개선됐다고 하나 애초에 악한 마음을 먹고 중국교포를 쓰는 고용주들이 있어 상담건수는 줄어들 줄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노무사는 한권의 두툼한 종이묶음을 보여줬다. 그것은 이 노무사가 두 달간 상담한 카드를 모아둔 파일로 족히 몇 백장은 돼 보였다.
이 노무사는 “일요일이면 교포들이 문밖까지 줄을 지어 상담을 기다린다”는 말로 중국교포들의 실상을 대신했다.
불법체류자와 합법체류자를 합해 중국교포는 30만에 이르고 있고 이 수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중국 및 구소련동포들에게 입국문호 및 취업확대 등을 해준다는 목적으로 지난 3월부터 시작된 방문취업제의 도입으로 중국교포들에 대한 처우는 상당 부분 개선됐다.
그러나 같은 동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이질감에서 기인된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중국교포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일요시사 김봄내 기자 │스포츠서울닷컴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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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회사서 일하는 조선족들의 희와 비
2007-11-23 10:38 출처: 길림신문
조선족 근로자들이 집중해 살고있는 집거지의 하나인 서울 대림동 일각. / 한정일 기자
한국에서의 조선족들의 회사취직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한국에 입국하여 우선 일당으로 노가다판을 전전하면서 사처에 일자리를 부탁하고있었다.
회사취직은 일반적으로 친척, 친구, 아는 사람 등 조선족끼리 서로 부탁하고 소개하며 이뤄지고있었다. 조선족들은 자기가 있는 회사에서 누가 나가거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면 자기가 아는 조선족을 소개해 주군 했다.
하루 11―13시간 로동
회사거나 음식점 종업원 대부분이 11시간―13시간씩 일을 하고있었고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때문에 변비가 생기는 사람도 있었다.
도문시에서 간 한 조선족은 토산품가공회사에 취직, 평소 11시간 일을 하는데 하루에 도토리 5톤씩 들어올려 기계에 쏟아붓는다. 그렇게 중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힘든 일을 하면서 한달 월급이 110만원이였다. 주숙은 회사에서 제공해 주고 식사는 자취, 회사에서 식비 따로 20만원씩 내주고있었다. 요즘은 제품주문이 많아 석달간 하루 16시간씩 일하며 월급 40만원을 더 받는단다. 그러다나니 하루 수면시간은 5시간이 되나마나 하다.
쌍양에서 간 한 조선족은 기자가 밤 9시 반에 전화했을 때 그때까지 계속 일하고있었다. 밤 10시에라야 일이 끝난단다. 집에 도착하면 10시 반이 넘는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혼신을 다 해 일하고있는것은 모든 재한 조선족들의 공통점이였다.
기자가 서울 지하철 2호선 4번출구를 나와 만났던 한 조선족녀성, 사평사범학원 중문학부를 졸업하고 교직에 종사하다가 한국 경상대학교에 류학가서 석사학위를 딴 후 서울에서 외국어학원 중국어강사로 취직했다.
그녀는 아침 6시 반(한국 공무원의 출근시간은 오전 9시임)부터 밤 10시 반까지 이 학원, 저 학원에 다니며 강의를 하는데 하루 강의시간 스케줄을 맞추어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며 기자와 만났을 때 《저 강의시간이 돼 이만 실례합니다》라며 냅다 뛰는것이였다.
원고를 쓰는 이 시각도 기자의 눈에는 지하철에서 나와 정신없이 뛰여가던 그녀의 뒤모습이 선연하다.
회사일 위험하고 힘들고 환경오염 심해
조선족을 채용하는 회사 대부분은 중소기업으로서 일이 힘들고 위험하고 환경오염이 심하다. 플라스틱 색상조합을 하는 일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사치한 일 같지만 독성이 있었으며 분쇄를 하는 일은 기계에 손이 잘릴 위험성이 있을 뿐더러 먼지가 심하고 로라를 돌리는 일은 연기가 심해 기관지, 페가 손상받을 위험이 컸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한여름 무더위에도 마스크를 끼다나니 얼굴에 땀띠가 돋는 일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들은 회사에로의 취직을 갈망한다. 일자리걱정이 없어 좋고 주숙과 쉬는 날 이외의 식사를 걱정 안해서 좋다.
회사에서의 조선족들의 대우
회사일은 흔히 전문기술을 필요로 하고있었고 기술이 높을수록 월급을 많이 받았으며 일반적으로 석달이 지나면 월급을 올려주었다. 연길시의 한 조선족은 1997년에 한국으로 간 후 9년간 비닐가공회사 한곳에서 일했는데 후에는 색상조합 기술을 익혀 다른 조선족들이 평균 120만원씩 받을 때 170만원을 받았고 2005년 자진귀국을 했다가 1년 반만인 2007년 3월 한국에 재입국을 했을 때 다른 회사에서 그에게 180만원을 내걸고 오라고 하자 그가 원래 근무하던 회사에서 190만원으로 그를 청해갔다.
회사에서 일하는 조선족의 경우 대부분 처음에 120만원, 130만원을 받았고 석달후 140만원, 150만원으로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음식점들에서 조선족들이 한국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것과는 달리 회사에서의 조선족들의 월급은 한국인과 차별이 있었다. 로라기계를 다루는 경우 조선족의 월급은 150만원인데 비해 같은 일을 하는 한국인의 월급은 200만원이였다.
이 문제를 두고 한 조선족은 기자에게 《우리들의 수준과 기술이 제고되면 이같은 편견과 차별이 점차 없어질것입니다. 10년전 제가 처음 왔을 땐 참으로 편견과 차별시가 심했고 일이 고되고 습관이 안되며 일할줄도 몰라 힘들었습니다. 헌데 몇년 지나니 일도 알고 능력도 인정받아 한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있어요》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대형기업은 이미 토, 일 쌍휴일제를 실시했고 중소기업은 지금 실시단계에 있었다. 일주일에 이틀 쉬는건 좋은데 조선족남자들의 경우 토, 일 이틀간 자체로 식사를 해결할 일이 걱정아닌 걱정이라고 했다.
월급 받지 못하는 일 지금도 있어
회사에서 일하고는 몇달씩 월급을 받지 못하는 일이 한국에서의 조선족들의 지위 향상에 따라 몇년전보다는 덜 하지만 지금도 종종 발생하고있다.
왕청에서 간 한 조선족은 인테리어기술이 있어 안산시에서 사장님밑에서 인테리어 일을 한달간 했다. 일이 끝났는데 사장이 자기는 승용차를 몰고다니며 술놀이를 계속하면서도 돈이 없다며 일한 보수를 주지 않는다. 후에 주겠다며.
며칠간 쫓아다니며 달라다 못해 방법없이 서울에 가 일하다가 한달후 다시 찾아왔다. 암만 돈을 달라고 사정을 해도 안되니 조선족은 《남에게 일 시켰으면 돈을 줘야지 않겠소. 정 이러면 가만놔두지 않겠소!》 하며 사장의 멱살을 잡고 위협했다. 그러면 주려니 했다.
헌데 사장이 《너 이놈, 교포주제에 감히 누구한테 손찌검이냐!》 하며 조선족의 귀쌈을 들이친다. 이에 화가 날대로 난 조선족은 옆에 있는 벽돌장을 들어 사장의 머리를 냅다 갈겼다. 사장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다행히 옆에 있던 한국인이 급히 차로 사장을 병원에 호송해 구급했다.
사장이 병원에 있는 기간 조선족은 그만두지 않고 이번엔 사장댁에 찾아가 사장부인을 보고 《내가 이집 남편의 머리통을 깬 사람이요. 돈을 주지 않으면 가만놔두지 않겠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부인이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어느때까지 기한을 주면 그때엔 꼭 갚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조선족은 시간이 없는데다가 찾아갔다가 또 헛탕을 칠가봐 오늘까지 더는 찾아가지 않고있다. 언젠가는 꼭 받아낸다며 그는 지금도 벼르고있었다.
《불법체류자》 음영속에서
재한 조선족들속에는 아직까지 불법체류자가 적잖은데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최대의 《약점》이였고 그 신분때문데 마음대로 나다니는것도 자제하고있었다.
한 회사에서 지난해 년말에 있은 일이다. 이 회사에는 조선족일군 9명이 있었는데 7명의 비자는 정상체류지만 한국 법무부 인력고용센터에 등록을 하지 않은만큼 일하는데 있어서는 사실상의 불법, 잡히면 강제추방은 아니여도 엄청 벌금을 안게 된다. 그외 2명은 완전 불법체류였다.
법무부에서 불법체류자 색출 전면전을 펼치면서 이 회사에 불법체류자를 잡으러 올 때면 이 회사 사장님은 법무부에 있는 친척관계를 통해 미리 정보를 알고는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을 일 안시키고 대피시키군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법무부 인력고용센터에 등록한 조선족 2명이 이 회사에 배치를 받아왔다. 인력고용센터로부터 배치받아온 사람들의 월급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적었다.
그 2명중 1명은 먼지 많은 분쇄일을 하게 됐는데 옷의 먼지를 터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보다 많았고 꾀를 부려 힘든 일을 피하며 빈들거렸다. 하여 함께 일하는 조선족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눈에도 나 결국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였다.
헌데 그가 보복으로 이 회사에 불법체류자 9명이 있다고 법무부에 전화로 고발할 줄이야!
그가 떠나간 며칠후, 법무부일군 10여명을 실은 뻐스가 불시에 이 회사에 들이닥쳐 회사를 포위, 누군가 이 회사에 불법체류자 9명이 있다고 고소를 해서 잡으러 왔다는것이였다.
마스크를 끼고 직장에서 일하다가 밖으로 나오던 한 조선족(화룡출신) 불법체류자가 공장 울안에서 마주오는 법무부일군과 정면으로 맞띄우게 됐다.
《당신, 외국인이죠?》 법무부일군의 물음에 조선족은 《아닌데요. 한국인이예요》라고 대답. 《외국인인것 같은데…》 법무부일군은 수상한듯 아래우를 �는다. 다급해 난 조선족불법체류자는 저 앞에 한국인공장장이 지나가는것을 보고 《저 사람이 외국인이예요. 저 사람한테 가 보세요》 라고 가리켰다.
법무부일군이 공장장한테로 발걸음을 옮기자 조선족은 태연자약하게 그 곳을 벗어났고 아직도 직장에서 일하고있는 다른 한 불법체류자한테 달려가 다짜고짜 그를 잡고 공장 뒤담장을 뛰여넘어 도망을 쳤다가 몇시간후 돌아왔다.
기자가 서울에 있는 외국인전용병원에 찾아갔을 때 그 곳에는 그 전날 강원도에 있는 회사에 법무부에서 신고를 받고 불법체류자 잡으러 오자 다급한 김에 2층에서 뛰여내려 허리와 다리가 부러져 실려온 한 중국인 불법체류자가 있었다.
이날 회사 사장님이 《내 식구가 다쳤는데》라며 찾아와 문안을 하고있었다.
이 회사에는 불법체류 중국인 5명이 있었다. 그전엔 조선족도 있었다고 했다. 회사 사장님은 조선족이든 《중국인(한족)》이든 모두가 일을 잘 한다고 엄지를 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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