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는 조선족 만나본다(1)

머리말: 2008년 10월 4일부터 19일까지 15일간 한국방문했다.15일간은 짧지만 많은것을 보고 듣고 느꼈다. 특히 한국에 나가 돈벌이 하는 친척이나 친구들을 통해 중국조선족들의 한국에서의 삶을 느껴보았다.

많은 중국조선족들이 다녀갔고 또 지금 살고있는 한국, 한국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환률이 자꾸 떨어져 한국로무도 돈벌이가 안된다고 아우성을 치는 오늘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한국행 막차라도 타지 못해 안달이고 이미 한국에 간 근 40만명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 분주히 살아가고있다.

나의 한국방문인상기는 내가 짧은 시간동안 한국에 체류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것을 그대로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부족한 글이다. 그러나 나의 한국방문인상기가 애독자들이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들의 생활실태와 현황을 료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수 있다면 좋겠다.

 

2008년 10월 4일 오전 9시발 심양―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내 옆좌석에 앉은 료녕 안산에 산다는 조선족들은 한국에서 이미 3년간 일을 했고 재입국절차로 다시 한국에 돈벌이 나가는 사람들이였다.

한국에서 건설현지 등에서 일당을 뛰였다는 50대의 안산남자는 하루에 6~7만원가량의 일당을 벌었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한국돈이 자꾸 환률이 급락하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환률이 떨어진다 해도 아직까지는 한국에서 돈버는것이 중국에서 돈버는것보다 낫다는 신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돈이 100만원당 중국돈 5700원가량의 환률에서 5000원이하로 떨어지면 한국에서 고생스럽게 일하는 재미는 없을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이맘때처럼 한국돈 100만원당 7000원이상의 환률로 다시 돌아올가 하면서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오전 10시 30분, 한국시간으로는 11시 30분가량 됐을 때 비행기는 한국상공을 날아왔다. 심양에서 출발해서 꼭 1시간 30분가량 날아온것 같다. 인천 앞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 바다우로 길게 늘어서있는 해상다리가 보였다.

이 곳이 바로 한국이구나, 중국내 그렇게 많은 조선족들이 오지 못해 안달아하고 코리아 꿈을 꾸게 했던 땅, 기실 한국은 너무나도 가까운 지척에 있었다. 비행기로 한시간 반, 그것도 령공을 에돌아와서  그렇지 직선거리로 날아오면 1시간 거리밖에 안된다.

출구로 빠져나오니 지난해 방취제로 한국에 나온 매형과 친구 광호가 기다리며 손짓한다.

서울로 올라오는 공항리무진을 탔다. 공항에서 누나가 살고있는 양재까지 뻐스를 타고 올라오는데 인당 9000원이란다. 인민페로 치면 50원이 넘는다.

양재동에 내려서 육교를 넘어오니 길옆에  남새들을 펴놓고 파는 행상들이 심심찮게 보여 연길의 서시장부근 행상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서울도심속에 이런 싸구려난전들이 펼쳐져있다는것이 신기, 지나가고 다가오는 사람들마다 억양과 톤이 다른 한국말을 하고있고 허다한 간판들이 한글로만 즐비한곳, 이게 바로 한국이였다. 그리고 한국은 중국에서 보는 금전의 천당이 아닌, 그 곳에서도 오이며 감자며 도마도 같은 작은 로천행상을 펼쳐놓고 어렵게 생을 유지해나가고있는 년로한 할머니도 있고 이제 막 앳된 모습을 벗는 사춘기소녀애들이 흘리고가는 까르르 웃음소리도 있고 정장에 넥타이를 맨 아저씨가 어데론가 급급히 걸어가는 삶의 냄새와 풍경이 있는 곳이였다.

누나와 녀동생이 들어있는 양재동세방에 들어가면서 길목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삶은 돼지고기와 순대 등 술안주들을 샀다. 2만3000원이 나왔다. 슈퍼에서 또 백세주며 맥주 등 술을 샀는데 2만원이 넘는다. 아마 어림잡아도 5만원은 넘는것 같다. 5만원이면 중국돈으로는 300원이 넘는다. 중국돈 300원이면 중국에서는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고 잘 먹을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기에도 초라한 술상이 차려질수밖에 없다.

한국 사는 조선족들을 만나본다(2)

누나와 동생 춘옥이는 저녁10시가 넘어서야 돌아온다. 그들이 기거하고있는 집은 양재동에 있는 반지하 단칸방, 반지하라서 습했고 10월중순이 지나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도 지났건만 모기가 극성이고 밖에서는 풀벌레소리가 귀따갑게 들끓는다.

8, 9월 한여름에는 이보다 더 극심했다고 한다.

처음 누나와 녀동생이 살아가고있다는 반지하 단칸방에 들어섰을때는 연길에서 그나마 집이라도 쓰고 살고있는 자신이 부끄럽도록 가슴이 무거워났다.

한국에 와서 돈벌어 잘살아보려고 지하 단칸방에서 모기와 습기에 뜯기면서 한국사회의 하층생활을 하고있는 내 혈육이 안타깝고 안스러워서였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맨처음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5만원짜리 이 세집을 맡았을 때까지만 해도 집안에는 아무런 가구도 가장집물도 없었단다.

그러다가 어느날 밤인가 운좋게도 문뜩 이웃집에서 쓸만한 침대와 가구를 버린것을 발견하고 녀자 둘이서 그걸 혼신의 힘을 다해 겨우 집에 들여놨다고 한다.

랭장고도 하나 들여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세방은 비록 작지만 아담하고 따뜻해보였다. 누나 말로는 한국에 온지  9달이 되여 이제 겨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자리를 잡고 일에도 애착을 느껴가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한심하게도 한화가 밑도 끝도 없이 내리곤두박질하면서 환률이 한국돈 100만원당 인민페 5700원선에서 5400원, 10월6일이후에는 5000원선아래까지 내려갔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한국돈벌이의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간걸가?

환률이 5000원선아래로 떨어지면 한국에서 돈벌이가 재미없다는게 많은 중국조선족로무자들의 생각이다. 많은 조선족들은 요즘 들어 환률이 급추락하는 바람에 돈을 중국에 부치지 않고 한화환률이 오르기만을 학수고대하고있었다. 더우기 한국에서 돈을 중국에 부쳐주어야 집식구들이 생계를 유지할수있는 조선족로무자들의 경우, 한없이 떨어진 한화약세에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집으로 부쳐야 하니 참으로 안타깝고 안스러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이와 함께 한화약세에 따라 작년과 비해볼 때 월급이 40%가량 줄어든 셈으로 된다는 통계도 있다. 현재 한국에 머무르고있는 중국조선족은 약37만 8300여명으로 전체 외국인 체류자의 42%에 이른다.

 

한국 사는 조선족 만나본다 (3)

 

 

10월6일 아침이였다. 누나가 들어있는 반지하세방 창너머로 한 한국젊은이가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뭐라 하고있었다.

누나가 다가갔더니 《생선을 구우세요?》 한다.

《고등어를 구웠다》고 했다.

그랬더니 《창을 닫고 구우면 안돼요? 냄새가 진동하는데요》한다.

생선굽는 냄새가 싫은 이웃인 모양인데 그렇다고 생선을 냄새 안나게 구울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대로 창문을 닫아주었더니 얼마 안지나 이젠 출입문을 노크한다.

요즘 생선굽는 냄새가 자주 나서 그런다면서 생선을 굽지 말든지하면 안되냐고 항의해왔다. 생선을 먹지 말라는 무언의 강요처럼 느껴졌다.

《생선냄새가 싫으면 자기 집 창문을 잠간 닫아걸고 냄새를 맡지 않으면 될거 아니냐?》 하고 면박을 주려다가 누나와 동생 두 녀자가 세들어사는 동네에서 시끄러운 눈총과 불리익을 받을것 같아 치미는 분을 참는수밖에 없었다.

음식냄새가 난다는 리유때문에 이마빡에 피도 안말랐을것 같은 애숭이 젊은이한테까지 수모받는것 같아서 기분잡쳤다.

중국조선족들의 위상은 그만큼 한국사회에서는 없고 차하고 약한 존재로 많이들 인식되여지고있는것이 현실이다. 같은 언어를 구사하되 언어에서 이질감이 있고 사유나 생활습관에서 오는 차이나 격세지감 역시 홀시할수 없다.

한국에서 일한지 1년이 막 되여오는 친구녀석도 일하는 회사의 한국인들하고 자주 얼굴을 붉히군 한다는데 함께 일하는 한국사람들 말만 나오면 고개를 가로 젓는다.

중국조선족들을 업수이보고 마구 다루려하고 듣기에도 거북한 쌍욕을 퍼붓기를 잘한다는것이다. 물론 모든 한국사람들이 다 그런거는 아니지만 한국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중국조선족들의 노력을 가상히 받아주고 관심과 도움을 베풀어주는 한국사회의 선진국다운 분위기와 국민매너가 요청된다.

친구 광호가 지금 하고있는 포천 제분공장일을 마무리짓고 인차 의정부 양말공장에 일자리를 옮기겠다고 말했다. 제분공장일은 자유도 어느 정도 있고 일도 덜 힘들지만 로임이 잘 나오지 않아서 일은 힘들지만 로임이 잘 나오는 양말공장에 취직하기로 결정했다는것이다.

제분공장에서 여러 달 일했으나 아직 200만원을 못받았다고 하는데 그냥 죽치고 앉아서 돈도 못받는 일을 계속할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실제로 적잖은 조선족들이 로임이 깔리기 시작하면 차일피일 미루는 한국사장의 불투명한 꼬임에 넘어가 죽게 일하고도 나중에는 로임을 못받는 일들을 많이 보았다.

특히 과거에는 중국조선족들이 불법체류하고있는 약점을 틀어쥐고 신고하지 못할거란 계산을 앞세우고 선량한 중국조선족들을 사기쳐먹은 악덕 한국인기업체들과 얌치 사장님들도 적잖다.

요즘은 방취제의 정상적인 취업조건으로 한국에 들어왔지만 취업신고를 하지 않는 방취자들이 많은데 이런 조건하에서는 한국취업가운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분규에 대해 정상적인 법적 대응과 보상을 요구할수 없기 때문에 방취제관련 한국의 적법절차를 따르는것이 바람직하다는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한국에서 나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취업했다

한국산업인력공단 주최로 9월 11일 오후 공단본부 10층 강당에서 열린 《외국국적 동포를 위한 2008 취업박람회》에서 박람회장을 찾은 조선족들이 업체를 찾아 상담을 하고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조상이 누워계시는 한국 땅을 밟아보는것이 소원이였는데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지난해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오게 되였고 또 조상의 묘소를 참배하여 오매에도 그리던 소원을 풀게 되였으며 지금은 한 회사에 취직하여 출근하면서 돈도 벌고있다.

하지만 중국에 있을 때는 한국만 가면 당장 일자리를 찾아 많은 돈을 벌것처럼 생각하였는데 정작 와보니 처음에는 한국생활에 적응되지 않아 생각처럼 그렇게 순탄하게 되지 않았다.

취업교육을 받고 나는 처음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상일동의 한 채소농장으로 갔다. 숙식을 해결해준다고 하기에 찾아갔는데 쌀만 대여 주고 그외의것은 모두 자체로 해결하며 기숙사는 바로 채소 하우스 안이였다. 너무나도 인격이 손상되는 일이였다.

중국에서 책상머리에 앉아서 사업하던 내가 어찌 이런 곳에서 먹고 자고 한단 말인가?

또 다시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이번에는 건설현장에 가보라는것이였다. 나는 또 행장을 메고 건설현장으로 갔다.

건설현장은 중국에서 본 노가다 판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건설현장에 들어서는 순간, 어쩌면 나도 이런 노가다행렬에 들어섰는가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교원과 노가다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신분과 직업이였다.

나같은것은 기술이 없는 잡부나 하는 일이라 폼, 세멘트포대, 철물 등 전부 무거운것을 나르는것이였다.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중국조선족들이였는데 대부분 농사일을 하다 온 사람들이여서 어지간히 무거운것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는데 나에게는 정말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을 하나 요령이 있게 하지만 나는 요령 없이 하다 보니 힘은 남보다 곱절 더 썼지만 로동효률은 남보다 많이 떨어졌다. 결국 10여일 하고 잘리고 말았다.

돈 벌러 왔다는것이 이렇게 하다가는 왔다가는 경비도 벌것 같지 못했다. 어떻게 할것인가?

이번에는 일자리 찾기에 급급해한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국사회에 적응하여 한곳에서 장기적으로 일할수 있겠는가는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한곳에서 몇년씩 일한다고 하는데 나는 왜 가는 곳마다 일자리나 고용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돌아오고 또 고용주의 마음에 들지 않아 해고당하여 돌아오게 되는가?

그 원인을 찾아보면 째로는 자기의 신분을 낮추는것이였다. 중국에서의 신분대로 자신을 자기 스스로 높이 보고 남더러 자기를 높이 봐줄것을 바라면 누가 나를 높이 봐주겠는가? 중국에 있을 때의 신분이 어떠하든 돈을 벌려고 일하러 온것만큼 일반 근로자의 신분으로 나서야 한다.

둘째로 로동적극성을 높이는것이다. 내가 남의 일을 해준다는 태도로 일할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자세로 회사가 바로 나의 집이고 회사의 일이 곧바로 나의 일이라는 관점을 수립하여 무슨 일에서나 진심으로 열심히 일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면 고용주의 마음에 들수 있다.

셋째로는 요령을 장악하고 일하는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요령을 장악해야지 마구잡이로 일하면 힘은 들어도 로동효률은 낮아지게 되여 당연히 회사의 마음에 들수가 없게 된다.

넷째로는 속도를 강조하는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든지 속도를 대단히 강조한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이 경쟁사회에서 장기간 내려온 습관이다. 한국에 와서 중국사람은 느릿느릿(國人慢慢地)식으로 하면 그 어떤 고용주도 요구하지 않을것이다.

이상의 몇가지로 찾아보니 나자신의 문제가 많았다는것이 확인되였다. 나 자신이 한국사회에 적응하여야지 한국사회를 내 뜻에 맞추라고 하면 그것은 닭알로 돌을 치는 격으로밖에 되지 않는다.

이상의 원인들을 찾은 다음 이번에는 꼭 한곳에서 장기적으로 일하기로 작심하고 다시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다. 직업소개소에서는 모 판촉물회사 생산직장을 소개해 주었다. 그래도 직업소개소가 좋았다.

한국 로동부 고용지원쎈터에서는 정규적회사만 알선해 주고 정규적회사는 고령구직자들을 요구하지 않기에 우리 같은 고령구직자들은 고용지원쎈터를 통해 일자리를 해결할수 없다.

직업소개소는 정규적회사 외에도 전국 각지의 어떠한 일자리도 다 소개해 주기에 고령구직자들에게는 원칙을  지키기보다 원칙을 어기고 조선족들의 일자리를 해결하여 주는 직업소개소가 그래도 좋았다.

이번에는 새로운 일터에서 이전의 일들을 교훈으로 삼아 처음부터 회사사원들과 어울리면서 잘하여 보리라 작심하고 출근 첫날부터 우에서 찾은 원인들을 명기하면서 일하였다.

일반 근로자의 신분으로, 회사가 나의 집이고 회사의 일이 곧바로 나의 일이라는 주인공의 자세로 일하니 회사의 사원들과 서로 어울릴수 있었다.

이 두가지는 나의 주관의사대로 할수 있었지만 요령을 봐가면서 일하는것과 속도를 다그친다는것은 나의 주관념원대로 되지 않았다. 회사사원들과 어울린다고는 하지만 일을 요령이 없이 하고 속도가 느리니 가끔 핀잔을 들을 때도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이런 핀잔을 들을 때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반발심이 생겼으련만 이것은 나의 잘못이고 내가 꼭 이 회사의 일에 적응되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런 반발심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제가 아직 회사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여 그러니 앞으로 잘 가르쳐 주세요》 라고 너스레까지 떠니 그들도 나를 리해하여 주었다.

이런 일이 거의 두달가량 반복되였으나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허심하게 접수하고 그들을 따라 배워 눈치 빠르게 손을 맞추어 일을 잽싸게 해나가니 나와 동료들간의 거리도 더욱 가까워졌고 일도 점차 숙련되여갔다.

한국에 와서 처음 몇달은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이곳저곳 다니면서 일하다나니 한곳에서 한달을 채워본적이 없었다. 이 회사에 온지 8개월이 되지만 나 본인도 다른 일자리로 옮길 생각이 없고 회사에서 해고당할 위기감도 없이 마음 편안히 일하고있다. 이러고 보면 이것은 성공적인 취업이라고 할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앞으로 더욱더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열심히 일을 잘하여 한국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며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중국에 돌아가 행복한 생활을 하련다.

/ 주청룡 http://www.200man.com/?action-viewnews-itemid-68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