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개관-

몽골의 겨울은 가장 길고 추우며 혹독한 날씨를 보인다.
몽골은 무지개의 나라입니다.

1. 몽골의 위치, 자연환경

1.1. 위치와 영토
몽골은 아시아의 중앙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에 위치하며, 북위 41°35´~ 52°09′, 동경 87°44′~ 119°56′에 걸쳐있다. 같은 위도 대에 있는 나라로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이탈리아, 불가리아, 프랑스, 미국, 캐나다, 일본 등 20개 가량의 나라이다. 한국과는 약 1시간의 시차를 갖는데, 춘분이 있는 주간의 토요일과 추분까지 서머타임을 실시하여 이때는 한국과 시간이 같아진다. 영토의 크기는 한반도의 7배에 해당하는 1,566,500㎢에 달하며, 서고동저형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몽골 영토의 거리는 서쪽 알타이 산에서 동쪽까지 2,392km, 남북의 거리는 1,259km의 넓은 지역을 아우른다.

영토의 크기는 세계 200여 나라 가운데 17번째에 속한다. 몽골 국경의 전체 길이는 8,216km이며, 총 길이 가운데 3,543km는 러시아 연방에 4,673km는 중국에 접해 있다. 몽골의 평균 해발 고도는 1,587m이며, 이는 우리나라 오대산의 1,563m보다 24m나 높고, 금강산의 1,638m보다 약 50m 정도 낮은 고도이다. 전 국토의 6% 가량은 해발 800m, 13%는 800~ 1,000m, 40%가 1,000 ~ 1,600m, 32%는 1,600m 이상의 고지대에 속한다. 울란바타르 시는 평균 해발 1,351m에 위치해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은 서부 알타이 산맥(Алтай нуруу)의 위쪽 끝에 있는 타웅버그드 산의 주봉 후이�으로 해발 4,374m, 다음으로 높은 산은 알타이 산맥의 멍흐하이르흥으로 해발 4,204m이며, 가장 낮은 곳은 동부 더르너드 지방의 허흐 호수의 저지대로 553m이다. 알타이 산맥에는 만년설로 덮여 있는 산이 20개 이상 있다.

주요 3대 산맥으로는 알타이, 항가이, 헹티산맥이다. 알타이 산맥은 서쪽 끝에서 동남쪽으로 900km 이상 뻗어 있으며, 고비-알타이 산맥으로 연결되어 700km이상 계속된다. 산맥의 높이는 해발 3,500~4,374m이다. 항가이 산맥은 해발 3,000~ 4,021m의 높이로 서쪽에서 동남쪽으로 뻗쳐져 있으며, 중앙 지역으로 800km 정도 계속된다. 헨티 산맥은 해발 2,000~2,800m의 높이로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300km정도 뻗어 있으며, 그 끝은 항가이 산맥의 동쪽 끝에 접해있다.

몽골에는 3,800가량의 크고 작은 강과 내 그리고 1,200개 가량의 호수가 있으며,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이다. 주요 5대 강은 셀렝게 어능, 어르흥, 헤르렝, 토올강이며, 강줄기가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여러 강줄기가 셀렝게 강으로 흘러들어, 북쪽의 바이칼 호수로 모여든다. 3대 호수로는 옵스, 헙스걸, 햐르가스 호수이며, 이들 호수는 모두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호수는 옵스로 3,350㎢, 호수의 전체 둘레 길이는 450km이며 소금기 있는 염수이다. 옵스란 “쓴 물을 가졌다”는 돌궐어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흡스글의 아침 : 흡스글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호수입니다.

헙스걸 호수는 옵스 다음으로 큰 호수로 평균 수심 139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262m로 아시아에서 가장 깊다. 물이 맑아 투명도가 24m나 되며,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울란바타르에서 약 650km에 위치해 있다. 물의 용량은 아시아에서 2번째, 세계에서 14번째에 속한다. 소금기가 없는 담수이기 때문에 5월말까지 얼음이 있다. 남북 길이는 133km, 폭 39km로 바다가 없는 몽골에서는 이 호수를‘바다’라고 부른다. 해발 1,645m에 위치한 헙스걸 호수는 크고 작은 46개의 강과 하천이 합류하고, 또 에깅 강의 남쪽으로 흐르는 셀렝게 상에 합류하여 바이칼 호수로 흘러든다.

이 호수에는 청어, 곤들배기, 농어, 연어 류, 쏨뱅이, 모캐(대구의 일종) 등의 9가지 물고기가 서식한다. 영양, 노루, 야생염소, 순록, 곰, 시라소니, 담비 등 68 종의 포유동물, 244 종의 조류 등이 서식하며, 750가지 식물류가 있으며 이 가운데 60가지는 약용식물로 생태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 지역의 차강 호수 부근과 몇몇 고산 지대에 차�족*이라고 불리는 순록을 키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가조르트 : 서지연 선교사 기념관 앞으로 전망

몽골의 지형은 자연 생태계에 따라 크게 3가지 지형으로 나누는데, 즉 서부의 알타이, 항가이-헨티의 산악지대, 동부 더르너드의 초원지대, 남부의 고비 반사막지대로 구분하며, 이를 다시 중서 고원 및 산지, 삼림 초원지대, 초원 지대, 반사막 지대, 사막 지대의 5가지 지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산지가 7%, 삼림 초원 지대 25%, 초원 지대 26%, 반사막 지대 27%, 사막 지대 15%에 해당한다. 남부의 고비지역은 주로 풀과 모래가 뒤섞인 반사막 지대로 목축이 가능한 곳이다. 이로 보면 몽골에는 초원 지대가 70% 정도를 차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지형을 보면 산악 지대는 주로 서부, (삼림)초원 지대는 중북부와 동부, 사막 지대는 중남부에 걸쳐 있다.

몽골에는 화산이 폭발해 남아 있는 지역도 있다. 아르항가이 아이막에 있는 허르럭이라는 화산 폭발 지역은 1965년부터 자연보호 구역으로 삼아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화구의 너비는 200m, 깊이는 100m 정도에 이르며 주변에는 낙엽송들이 자라나 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화산은 약 8,000년 전에 폭발하였다고 하며, 현재 휴화산으로 주변에는 많은 현무암이 널려 있다. 이 지역의 남쪽으로 몇 개의 휴화산이 있으며 이 지역에서 유용한 광석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또 어워르항가이 아이막에는 올랑 초트갈릉이라는 폭포가 있다. 폭포가 있다고 하여 가보니 폭포가 있을 만한 지역도 아닌 초원지역이었으며 폭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 폭포는 땅 밑으로 꺼진 함몰구로 떨어지기 때문에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 폭포 물은 어르흥 강의 서쪽에 합류하는 올랑 강에서 발원해 흐르는 물이 24m 정도 높이에서 10m 정도의 폭으로 장대하게 떨어진다. 지금으로부터 2~3만 전에 화산이 폭발하여 생긴 폭포라 하는데, 지금도 주변에는 현무암이 적지 않게 널려 있다.

몽골은 21개 아이막과 330개 솜의 행정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울란바타르, 다르항(Дархан), 에르데네트의 3개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다.

다르항 시는 울란바타르에서 북쪽으로 포장도로로 230km에 위치한다. 1961년 시로 승격되었으며 공장지대이다. 여러 나라의 도움과 사람들의 참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르항 시를 ‘내람달 다르항’(친선 도시 다르항)이라고 부른다. 발전소, 노천 석탄 채석지, 시멘트 가공공장, 분필 공장, 고기 가공공장, 직조 공장, 식품 공장 등이 있다. 다르항은 몽골 생산 경제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1980년 대에 다르항 인구는 약 6만 명 정도 되었으며, 현재 8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사는 것으로 추산된다.

에르데네트 시는 어르헝 아이막의 중심지로 울란바타르에서 371km 떨어져 있다. 이곳은 지하자원 풍부한 광산지역으로 아시아 최대의 구리 광산이 있다.


1.2. 수도 울란바타르
울란바타르 시의 약사
울란바타르는 36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몽골의 수도로 정치, 경제, 상업, 문화의 중심지이다. 몽골의 수도는 올란바타르라고 명명하기 전에 <어르거> <이흐 후레> <니이스렐 후레> 등으로 불리웠다.

올란바타르는 처음에는 지금의 위치가 아닌 쉬레트 차강 노오르(지금의 어워르 항가이 아이막의 부르드 솜)에 1639년 어르거(‘궁전’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이 도시는 칭기스칸의 황금 가문이며, 할하 족장인 투셰에트 항 검버도르찌가 그의 아들 자나바자르를 위해 세웠다. 검버도르찌는 만주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 나라의 주권에 손에 넣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였는데, 그 방법으로 그의 아들 자나바자르를 다섯 살 때 불교계 지도자인 버그드로 삼고, 그의 궁전을 지어 준 것이 어르거이다. 그 이후 셀렝게, 어르흥, 톨 강의 유역을 30번 이상 옮겨 다니다가, 1778년 지금의 버그드 산과 톨 강 유역에 수도 자리를 정하고, 그 이름을 <이흐 후레>라 하였다. 초기에 이 지역은 불교의 중심지로 자리잡았으나, 19C부터는 외국 상인이 들어와 상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11년 만주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찾은 몽골은 제8대 버그드 짜브장담바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이흐 후레>를 몽골 정부의 중심지로 삼고 그 명칭을 <니이스렐 후레>라고 하였다. 다시 1924년 인민혁명이 달성된 후 혁명 영웅인 ‘수흐바타르’를 기념하여 수도명을 ‘붉은 영웅’이란 뜻의 <울란바타르>라고 개칭하였다.
울란바타르는 해발 1,351m에 위치하며, 이 산의 가장 봉우리인 체체궁은 해발 2,257m에 이른다. 인구는 2003년에 869,912명으로 집계되어 있으며, 35세 미만이 68%를 점하고 있으며, 16세 미만이 인구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헨티 산맥의 마지막 지산이자 자연보호구역인 버그드 항 산의 남쪽, 톨 강, 셀베 강, 돈드 강의 교차점에 위치한다. 연평균 기온은 -2.2도, 1월에는 평균 기온은 -26도, 가장 더운 7월은 17도이다. 가장 추웠을 때의 기온은 -49도, 가장 더웠던 기온은 38.5도로 몽골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심한 연교차를 보인다. 연평균 강수량 242.7mm, 연평균 습도 69%이다. 행정구역은 9개 구와 117동이 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시는 한국의 수도 서울과 1995년 10월 6일 우호 협력을 다지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양국의 수도는 역사적 관계를 시작했다. 1996년 울란바타르 시 중심부에 총 길이 2.1km의 ‘서울의 거리’가 만들어졌다.


1.3. 기후 조건
몽골은 북반구의 건냉 지역에 속해 있으며, 아시아 4대 건조 지역에 하나이다. 사계절이 분명하며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덥다. 그러나 한냉 건조 지대에 속하는 몽골의 기후는 하강 온도에 비해 체감온도가 그리 낮지 않은 편이다. 몽골은 세계에서 맑은 하늘(연 평균 250일)과 일조량(연 2,600~3,300시간)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평균 강수량은 230㎜ 정도이며, 6~9월 사이에 90%가 내린다. 북쪽 지방은 연평균 250~400㎜ 정도의 비가 온다면, 남쪽 지방은 100~150㎜ 정도의 적은 비가 내린다. 7월이 가장 더운 달이라면 1월은 가장 추운 달이다. 몽골은 연중 건조한 편이며 또 연교차도 심해 90。정도의 교차를 보일 때도 있다. 연평균 기온은 서북쪽의 산악지대는 -5。, 초원 지대는 5。정도의 기온을 보인다.

봄은 음력으로 1월, 양력으로는 대개 3월부터를 시작되며,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깨어나고, 얼음이 녹으면서 점차 기온이 풀리지만, 연중 가장 건조한 때이며 바람이 심하게 불고, 바람에 먼지가 날려 거리가 온통 먼지로 뒤덮이는 때가 많다. 이때는 추운 겨울보다 오히려 지내기가 힘들며, 몽골 생활 가운데 가장 어려운 계절이다. 봄에는 일정한 기온을 보이지 않으며, 때로 덥다가도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불면서 추워지기도 하고, 때 아닌 눈이 오기도 한다. 그래서 변덕스러운 사람을 이러한 봄 날씨에 비유해 “봄 하늘 같다”고 표현한다.

이때는 겨우내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가축들이 조드(자연 재해)로 인해 떼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자연재해는 겨울 기후와 관계가 있다. 눈이 자주 그리고 많이 내리면서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면 풀이 부족하여 가축들이 고통을 겪는다. 이로 인해 자연환경을 이길 힘이 부족한 많은 가축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눈과 추위가 겹친 이러한 조드를 ‘흰 조드’(차강 조드)라고 한다. 눈이 내리지 않지만 매서운 추위로 가축들의 먹을 풀과 마실 것이 부족해져 일어나는 재해를 ‘검은 조드’(하르 조드)라고 한다. 두 가지 조드는 모두 가축과 시골의 목민들, 더 나가 국가 경제에 대단한 손실을 주는 자연재해이기 때문에 조드와 싸우기 위해서는 여름, 가을에 건초를 준비하고 가축이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가축 우리를 손보고, 우물을 잘 건사하고 준비하는 등 시기를 놓치지 않고 많은 일들을 대비해야 한다.

몽골인들은 원숭이해에 반드시 조드가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60년에 한 번 오는 갑신년에 대단히 심한 조드가 있다고 한다. 가장 최근의 갑신년인 1944~45년 겨울, 몽골 전역에 대단한 조드가 발생하여 전국의 가축들의 상당수가 해를 입었다. 그러나 1999년부터는 원숭이해만이 아니라 해마다 큰 규모의 조드가 발생하여 많은 가축들이 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런 자연재해는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가축들이 저항력이 약해져 생겨난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대개 봄에는 고기값이 턱없이 많이 오르게 된다.

여름은 5월 말부터 9월까지 계속된다. 이 시기는 비교적 비가 많이 내린다. 고기압에 드는 날이 많고 청명하고 하늘이 드높고 맑다. 30°이상의 높은 기온을 나타내지만 건조한 대기로 인해 불쾌지수가 높지 않으며, 그늘에 들어가면 더위를 금방 식힐 수 있다. 7월이 가장 더운 때로 지역에 따라 15°~40°까지의 분포를 보인다. 산악지대가 시원한 편이라면, 고비지역은 매우 높은 기온을 보인다.

여름이 되면 도시의 사람들은 고향이나 가까운 도시 외곽으로 나가 주로 1달 정도의 휴가를 보낸다. 도시의 많은 가정들은 도시 외곽에 조스랑이라는 여름집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춥고 길었던 겨울과 변덕스러웠던 봄을 지내느라 지친 심신의 피로를 푼다. 몽골 사람들은 여름집에 가면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유유히 1달 정도를 쉬는데, 이것은 몽골의 변화가 심한 날씨 때문에 누적된 심신의 피로를 풀어 주기 위한 건강법의 하나이다. 여름에는 주로 고기(올랑이데)보다는 가축의 젖이나 유제품을 주로 먹으며, 가축을 보호하고 육식 위주의 생활에서 생긴 노폐물을 제거하여 신체조건을 조절한다.

몽골의 가을은 겨울로 이동해 가는 과도기적인 계절로 비교적 짧다. 9월 초부터 11월 초까지로 보며, 몇 년 전만 해도 10월 정도만 되어도 겨울이라 할 정도로 추웠으나 최근에는 기후 변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보통 몽골 사람들은 나담(몽골의 국가적 축제)이 끝나는 7월 중순부터 가을이 서서히 시작된다고 본다. 가을은 가축의 젖이 풍부하여 이것으로 유제품인 차강이데를 만들고, 말이나 낙타의 젖으로는 젖술을 만들어 겨울을 대비한다. 또 양고기나 쇠고기를 말리거나 저장을 시작하며 가축에게 먹일 건초를 준비한다.

몽골의 겨울은 가장 길고 추우며 혹독한 날씨를 보인다. 보통 11월부터 3월까지의 긴 기간을 이른다. 보통 1월이 가장 춥다. 몽골의 겨울 평균 기온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산지는 -45。~ -35°정도, 고비 지역은 -15。그밖의 지역은 -20°~-25°정도의 기온을 보이는데, 최근 들어 온난화 현상으로 이전에 비해 점차 평균 기온이 올라가고 있다고 말한다. 겨울에는 눈이 간헐적으로 자주 오기는 하나 그렇게 많은 눈이 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추운 날씨로 인해 눈이 오면 곧 얼어붙어 몽골의 겨울 풍경은 대개 하얀색으로 뒤덮인다.

일반적으로 -20°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놀라곤 하는데, 이곳의 기온은 건조한 대기로 인해 체감 온도가 그렇게 낮은 편이 아니며 특히, 겨울에는 바람이 적기 때문에 지내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울란바타르 시 같은 경우 외곽의 게르촌(몽골의 전통 가옥인 게르로 형성된 지역)을 제외한 시 전체가 중앙난방을 하며, 일반적으로 실내 온도가 20°정도는 되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처음에 몽골에 온 사람들은 날씨가 추워서라기보다 실내와 바깥의 심한 온도 차이로 인해, 체온 적응이 잘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몽골의 겨울을 잘 지내기 위해서는 옷을 입는 요령이 필요하다. 즉 속옷은 가볍게 입고, 겉옷인 외투를 두툼하고 따뜻하게 입는 방법이다. 몽골의 대기는 매우 건조하기 때문에 겉옷만 따뜻하게 잘 입으면, 차가운 공기가 몸속으로 스며들지 않기 때문에 그런 대로 견딜 수가 있다. 그밖에 자가용을 타고 다니지 않을 경우, 모자나 구두에 신경을 써야 한다.

몽골 사람들은 외투와 모자, 신발에 매우 신경을 쓰며 이런 겨울 필수품을 사는데 드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이 겨울에 입는 외투와 신발 등을 보면 생활수준을 넘는 고가품이 많아 매우 놀라게 되는데, 이것은 몽골 사람들이 단순히 사치스러워서라기보다 추운 자연 조건에 기인한 생활 태도라 볼 수 있다. 즉 외투나 신발, 모자는 ‘움직이는 집’과 같은 개념으로 보면 적당하다.

겨울에는 매우 건조한 공기로 인해 심한 정전기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물체를 만지거나 잡을 때 흔히 발생하며, 악수를 할 때도 정전기가 일어나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건조하기 때문에 자주 목욕을 하면 피부 건조증이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점에 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몽골에는 9?9 추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한겨울부터 시작하여 추위가 9일을 단위로 9번 지나야 겨울이 지나간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9?9 추위는 동지(冬至)인 12월 22일부터 계산하여 81일 동안의 기간을 이른다. 9?9추위를 인생의 흐름으로 비유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즉, 처음의 3?9를 어린아이 추위, 다음의 3?9를 젊은이 추위, 마지막 3?9를 노인 추위라고 단계지어 이른다. 이렇게 추위의 단위를 27일로 잡는 것은 점성술에서 한 달을 평균 27일로 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

9?9 추위 기간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9일에는 소주가 언다. 가축이 떨지 않게 옷을 입혀 주는 것이 필요하다.
두 번째 9일에는 양의 우리가 언다.
세 번째 9일에는 3살배기 소뿔이 언다.
네 번째 9일에는 4살배기 소뿔이 언다.
다섯 번째 9일에는 놓아 둔 곡물이 얼지 않으며,
여섯 번째 9일에는 길을 가다가 노숙을 하여도 동사하지 않는다.
일곱 번째 9일에는 언덕 마루에 눈이 녹아 길이 나고,
여덟 번째 9일에는 햇볕에 나뭇잎과 꽃이 피고,
아홉 번째 9일에는 따뜻해지며 행복이 찾아든다.

어떤 지역에서는 9?9 더위라고 하여 하지(夏至)부터 81동안의 더위를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9?9 추위만큼 그렇게 널리 퍼져있지 않아, 일반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많다.



1.4. 인구
몽골은 넓은 영토에 비해 인구가 극히 적은 국가이다. 1995년에는 2,317,000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2002년 조사에 의하며 2,475,400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가정 수는 535,000(평균 가족 수 4.4인)이며 현재는 이보다 약간 증가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13C의 몽골의 인구는 200만 가량 되었다고 보는데, 현재 인구는 그 당시보다 크게 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인구가 증가하지 못한 이유는 만주 지배기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만주 지배기인 1900대 초에는 만주 정부에 동참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상당수의 사람들을 중국으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는 등의 요인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 몽골 인구수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던 또 하나 주된 요인은 만주 정부가 몽골에 황교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불교를 장려하고 원조하였다는 데 있다. 이렇게 황교가 크게 퍼지면서 인구 절반에 가까운 많은 남자들이 승려가 되었고, 여자들의 거의 반수 정도가 절에서 살면서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이 인구 감소의 큰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성병이 크게 퍼졌던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1918년 외몽골 전체 인구는 647,500명으로 인구 증가가 거의 멈추 상태가 되었다. 13C 칭기스칸 시대에 200만 이상의 인구에 비한다면 3분의 1이상이 감소한 수이다. 인구 문제는 몽골의 경제 성장을 막는 1차적인 요인으로 분석되어, 정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인구 증가 정책을 썼으며, 그 정책의 하나로 네 명의 자녀를 가질 때까지 낙태를 금지시켰고, 다섯 자녀 이상 나을 경우 훈장을 주는 등 다산을 장려하였다. 이런 정부의 인구 정책에 힘입어 60년대 이후에는 2.0% 이상의 증가율을 보이며 어느 정도 인구가 증가했으나, 95년 이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직업여성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핵가족 제도로 인해 자녀 양육이 어려워 인구 증가 정책에도 불구하고 인구 성장률이 크게 높아지지 않고 있다. 인구가 경제에 중요한 성장 요인인데도 불구하고 인구 증가율이 하락하자 몽골 정부에서는 2004년 인구 상황과 인구 증가를 저해하는 요인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인구 증가를 위한 국가 정책안’을 내놓았다.

인구 연령층은 1995년의 상황으로 보면 20세 이하의 유아?청소년층이 50%를 차지하고, 20~40세 이하 장년층이 약 33%, 40세 이상의 장?노년층이 17% 정도를 차지하여, 인구 비례 당 유아?청소년층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1979년에는 20~39세까지의 비율이 23.6%에서 95년 33%로 약 10%가 증가하여, 인구 정책의 결과 점차 청장년층의 인구비율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비는 남자가 49.6%, 여자가 50.4%로 여성 인구가 약간 많은 편이다.

몽골은 방대한 영토를 가진데 비해 인구가 매우 적기 때문에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한다. 1950년 인구밀도 조사 결과 1㎢당 0.5명, 1970년에는 1㎢ 당 1명, 현재는 1.6명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도시는 인구 밀집지역으로 비교적 높은 인구 밀도를 보인다. 인구 밀집 지역은 터브와 셀렝게 아이막으로 1㎢ 당 2~3명이라면, 인구 희소 지역은 고비지역으로 1㎢당 0.2~0.3명 정도 살고 있다. 울란바타르 시의 경우 1979년에는 전체 인구의 1/4정도가 살았고, 지금은 1/3 정도인 869,912명(남자 422316, 여자 447596)의 인구가 몰려 살고 있다.


1.5. 부족
몽골 민족은 여러 부족들이 공존하면서 각각의 독특한 생활과 풍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16C에는 3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즉, 북쪽 지역에 외몽골 이는 할하를 중심으로 하며, 중국 영내에 있는 내몽골 이들은 차하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에 오이라드를 이른다. 이들 부족들은 300여 년 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대적 관계가 되어 전쟁을 하기도 하며 공존해 왔다. 현재는 외몽골(몽골), 내몽골, 부랴트 몽골, 할리막, 토와 등 많은 몽골족 사람들이 몽골 본토 이외에 중국이나 러시아 영토에 포함된 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일반적으로 몽골이라 할 때는 외몽골을 이른다.

현재 몽골의 부족은 할하, 하삭그(카자흐) 더르워드, 부랴트, 바야드, 다리강가, 오량해, 자흐칭, 다르하드, 터르고오드, 얼어드, 허�, 먕가드, 바르가, 우젬칭, 차하르, 허트거이드 등의 부족이 있다. 2000년의 통계로 보면 할하 부족이 전체 인구의 81.5%, 카자흐 4.4%, 더르워드 2.8%, 바야드 2.1%, 부랴트가 1.7%을 차지하며 7.6%는 그밖의 부족이 차지한다.

이 가운데 할하 부족이 지배적인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 부족은 몽골 민족의 근간이 되는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르워드와 바야드는 몽골의 동부에 흩어져 살며, 다리강가 부족은 서쪽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남쪽 지역에 산다. 하삭그 부족은 동부의 헙드와 옵스 등지에서 살며 조상은 돌궐계로 생활 풍습이 할하와 다르다. 1991년 이후 6만 명의 하삭그 족의 사람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 갔으며 주로 러시아에 편입되어 살고 있다.

부랴트 부족은 몽골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생활하였으며, 지금은 더르더드, 헹티, 셀렝게, 헙스걸 아이막의 10개 가량의 솜에 흩어져 살고 있다. 13C 대몽골 시기에는 바이칼 호수의 주변에서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어 있다. 부랴트 가운데 호리 부랴트 부족은 신화나 샤먼의 유풍을 통해 볼 때 우리 민족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가졌던 부족으로 추측된다.


2. 몽골의 유목생활
2.1. 유목생활
동북 아시아인들은 고대로부터 중앙아시아의 넓은 초지를 이동하며 유목생활을 해왔다. 유목생활이란 일정한 주거지를 갖지 않고, 가축을 몰고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생활하는 방식을 이른다. 이는 처해진 자연 조건에 적합한 생활 방식을 찾으며 형성된 오랜 전통을 가진 생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동에는 대이동과 소이동이 있으며, 대이동은 자연재해를 피하거나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고향에서 멀리 이주하는 것을 말한다. 몽골인들은 일반적으로 소이동을 하는데, 이것은 계절마다 일정한 지역을 돌며 가까운 거리에서 거주지를 바꾸는 형태를 말한다.

몽골은 지대가 높고 추운 날씨가 오래 지속되며,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농사를 짓기에는 적합한 자연 조건을 갖지 못한 나라이다. 그러나 스텝 지역(초지)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어 가축들을 기르는 데는 천혜 조건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 할 수 있다. 북쪽 삼림 지역의 수림민들은 주로 사냥을 하며 살고, 저지대의 기온이 비교적 온난한 곳에서는 농사도 짓지만, 몽골의 주된 생산 방식이자 생활 방식을 말할 때 유목생활을 빼놓고 말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유목생활은 몽골인들의 삶의 보편적인 형태이자 정치, 문화, 경제, 풍습의 전반을 지배하는 생활 방식이기도 하다.

몽골의 유목민들은 초지를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 계절마다 정기적으로 이동을 하며 생활을 한다. 즉 어월쩌(겨울 영지), 하워르짜(봄 영지), 조스랑(여름 영지, 여름집), 나마르짜(가을 영지)라고 하여 사계를 따라 영지를 바꾸어 생활을 한다. 초원길을 지나가다 보면 흔히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구릉의 중턱쯤에 돌이 둥글게 놓여 있거나 가축우리가 지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주로 겨울 영지일 경우가 많다. 겨울 영지는 바람을 피하기 좋고, 눈이 덜 쌓이는 구릉의 남사면에 터를 잡는다. 봄 영지는 가축이 새끼를 낳아 성장하기 좋은 지대가 높지 않은 곳으로, 겨울 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물과 초지가 풍부하게 형성된 곳을 잡는다.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횟수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북쪽의 부랴트 부족의 경우 겨울과 여름에 두 번 이동하는데 비해, 중부 항가이 지역에서는 물과 초지가 좋기 때문에 4~6번 정도 이동한다. 그러나 남부의 반사막 지역인 고비 지역은 오히려 물과 초지가 좋지 않기 때문에 초지와 물을 찾아 10회 이상을 이동하기도 한다. 이동을 할 때는 말, 뱀, 개 일, 일요일에는 이동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수, 목, 금요일, 24, 25, 26일에 이동한다.

목자들이 이동을 할 때는 먼저 날씨를 관찰하고, 맑은 날을 예견하여 날을 잡는다. 몽골인들은 이동을 하거나 길을 떠날 때 화요일을 대체로 피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은 어느 쪽으로 이동할 것이며 어떤 지역에 머물 것인지 주변의 경험 많은 연장자와 상의를 하여 정하고,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준비한다. 이동하는 사람들이 자기 집 쪽으로 이동하게 되면 정성껏 차를 끓여 먹을 것과 함께 대접한다. 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새 차를 끓여 주는 풍습이 있는데, 만약 끓여 놓았던 차를 덥혀서 주면 이동하는 가정이 새 영지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는 속신이 있다. 차를 마신 다음 주인은 이동하는 가정이 새로운 영지에 도착하여 잘 지내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을 한 후 떠나보낸다. 가는 길에 사람들을 만나면 오른쪽 방향으로 비켜가고 나이든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 이렇게 사람을 만날 때는 말의 발걸이에게 발을 빼고 인사를 나누고 지나가는데, 이러한 예로 인사하는 것은 사람이 길에 내려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이동민들이 정착할 곳에 도착하면 근처의 이웃은 차와 음식으로 그들을 맞이하고 대접하며 집 짓는 일을 도와준다. 몽골인들은 이동하는 것을 번거롭고 불편한 것으로 생각지 않으며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소나 낙타에 짐을 싣고 이동을 했는데 최근에는 트럭으로 이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동 생활의 특징 중 하나에 사아할트 아일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둔 두 이웃 부락을 말하는 것으로 두, 세 이웃이 보통 1~ 3km안에 살면서, 가축을 칠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도울 수 있도록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이른다.‘사아할트’라는 단어는 사아일즉 젖이나 유제품을 이르는 말에서 생겨났다. 이것은 젖을 짤 때 양이나 염소새끼들을 다른 이웃에 서로 교차하여 보내 어미에게서 젖을 짜는 일을 쉽게 한다든가 물과 초지를 함께 이용하는 등 이웃이 서로 도우며 노동을 수월하기 위한 유목 생활의 한 방법이다.


2.2. 오축
몽골인들은 청동기 시대부터 야생의 동물들을 집짐승으로 길들여 왔으며, 흉노시대에는 목축이 상당히 발전하였다고 한다. 주로 말, 소, 양, 염소, 낙타를 길렀으며 이를 특별히 오축이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 양이나 염소를 ‘벅그 말(몸집이 작은 가축)’이라 하고 말, 소, 낙타를 ‘버드 말(몸집이 큰 가축)이라 하는데, 보통 몸집이 큰 가축은 젖이 진하고 발효 젖술을 만들 때 양질의 젖술을 얻을 수 있다.

몽골에서는 돼지나 닭도 기르고 헙스골의 차�족은 순록을 치며 살지만, 돼지나 순록 등은 오축에 포함되지 않는다. 몽골인에게 부의 개념은, 도시 문화가 발달하면서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얼마나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부의 정도를 평가했으며, 결혼을 할 때 가축으로 예물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도 시골에서는 가축의 정도로 부를 평가한다. 몽골의 가축 수는 1998년 말엽 가축 현황 조사에 의하면 약 3,200만 마리의 가축이 있으며, 이 가운데 양이 1,470만 두로 가장 많고, 염소가 1,100만 두, 소가 370만 두, 말이 300만 두, 낙타가 35만 6천 두 정도이며, 몽골 1인당 가축 소유 수는 13마리 정도이다. 목축업에 종사하는 가정 수는 1988년 184,000 가량으로 1977년에 비해 2배 정도 증가했다.

2000년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전국에서 가축의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바양헝거르의 2백 4십만 두, 가장 많은 가축을 가지고 있는 목자는 중앙 아이막의 헨메데르가 3,000마리 이상의 가축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몽골 사람들은 가축의 나이를 그 이빨이 난 상태를 보고 아는데, 말경주를 할 때 나이 별 로 말의 이빨을 살펴 나이의 진위를 확인하기도 한다. 가축의 연령을 나타내는 용어는 150가지에 이른다. 그 가운데 말에 관한 것은 54가지, 낙타는 34가지, 소는 32가지, 양은 22가지, 염소에 관한 것은 16가지이다. 몽골에는 색깔 수가 매우 많은데, 그것은 다양한 가축의 털 색깔 때문이다. 말의 경우 기본적으로 16가지 정도의 색깔로 지칭하지만 더 세밀하게 나타낸 색깔 수는 160가지 이상이 되며, 방언을 포함하면 300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몽골에서는 종자에 필요한 수컷의 가축을 남겨두고 거세하는 전통이 있다. 집집마다 거세에 필요한 칼과 집게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거세에 관련된 엄격한 규칙과 금기가 있다. 가축마다 서로 다른 계절에 거세를 하며 대개는 개나 뱀날에 거세를 행한다. 양과 염소, 소는 5월 15일 전에 거세를 하고, 낙타는 10월 초 따뜻하고 맑은 날을 잡아 거세한다. 양과 염소는 1세, 낙타와 소는 2세, 말은 2~3세에 거세를 한다. 가축을 거세하고 3일 동안은 가축의 젖이나 유제품, 술 등을 밖으로 내가지 않는다. 거세한 고환은 삶아서 어린 아이들에게 준다.


2.3. 가축과 생활
몽골 생활의 전반적 형태는 오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선 가축으로부터 젖을 얻고, 그것으로 차와 먹거리를 만든다. 현대 도시의 음식 문화는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일반 시골 생활의 먹거리는 대부분 가축의 젖으로 만든다.

젖을 이용해 만든 음식을 차강이데라 하는데, 이것은 ‘젖으로 만든 흰색의 음식’이라는 뜻이다. 차강이데에는 아아롤, 아아르츠, 에에즈기, 타륵(요구르트) 뱌스락(치즈), 우름, 처츠기, 차가아, 터스(버터) 등이 있다.
몽골의 시골이나 도시 사람들이 간단하게 요기를 할 때 아아롤을 먹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아아롤은 두 가지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술을 증류하고 남은 찌끼미(이것을‘아아르츠’라고 한다.)에서 누런 물(샤르 오스)를 빼고 남은 찌꺼기를 칼이나 줄로 베어서 모양을 만들어 말린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발효시킨 요구르트(타락)를 솥에 넣고 끓여 이것을 천천히 식힌 다음 얇은 천으로 받쳐 누런 물을 분리시킨다. 이렇게 해서 걸러 낸 아아르츠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 햇볕에 말리는 방법이 있다. 아아롤은 건조시킨 것이라 몇 년간 보관해도 상하지 않으며, 겨울 비상 양식으로도 좋다. 소화기관을 튼튼하게 해주며 두통, 고혈압에도 효능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 칭기스칸은 병사들이 전쟁을 나갈 때 아아롤을 한 부대씩 가져가도록 했다고 한다. 아아롤은 시큼한 맛이 있어 갈증 해소에 좋고 물을 갈아먹어 생기는 배탈에도 효능이 있으며, 영양도 풍부한 식품이기 때문에 먼 길을 떠날 때 가져가면 식량과 약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롤에는 비타민 A, C, E 등 이 많아 괴혈병이나 구강의 병을 예방하는 데 좋다.

터스는 일종의 버터로 여기에는 차강터스(흰색 버터)와 샤르터스(노란색 버터)가 있으며, 노란색 버터는 매우 귀하게 여겨져 신앙 의례 때 부처나 종교적 대상물에 문질러 바치는 예법이 있다. 노란색 버터인 샤르터스는 의학치료에 있어 최상의 식품으로 친다. 새벽에 상식을 하면 폐의 기능이 좋아지고 약한 폐를 개선시킨다. 또 머리털과 얼굴에 윤기가 나고 눈이 밝아지며, 추위에 잘 견디고 더위에 갈증을 이길 수 있게 해 준다. 몽골인들은 먼 길을 떠날 때 갈증을 해소하고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샤르터스 한 사발을 마시고 간다고 한다.
몽골의 대표적인 차는 수테채(우유로 만든 차)이다. 이것은 물에 잎차를 넣고 끓인 후 가축의 젖을 넣어 위로 퍼올렸다 쏟아부으며 젖이 잘 섞이도록 한 후 한소끔 끓여 낸 차를 이른다. 몽골에는 가축의 젖을 존숭하는 풍습이 있으며, 젖에 물을 붓는 것을 금기시한다. 수테채는 몽골 사람들이 사계절 즐겨 마시는 차이다. 몽골 사람들은 기름기 많은 양고기를 상식하기 때문에, 식사 후 찬물을 마시지 않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뜨거운 수테채를 마신다.

또 가축의 젖으로 탁주와 청주를 만드는데, 탁주(濁酒)로는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마유주(айраг-아이락)가 있다. 아이락은 인체에 요구되는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과 여러 가지 비타민 B1, B2, B12, C 및 광물질이 풍부하게 들어 있으며, 신체에 열을 주고 활동력을 개선시킨다. 마유주는 인체 조직 안의 활동 즉, 심장의 혈관, 중앙 신경계를 활성화시키고 피의 순환을 좋게 하여 폐, 기도의 여러 질병, 폐결핵을 치료하는데 사용되고 소화기나 신경에 관련된 병 또는 비타민 결핍증 치료, 고질적인 간 질환에 탁월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마유주를 공장에서 생산하는 방식과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마유주는 한국의 막걸리 맛과 비슷하여 마시기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으나, 뒷맛에 약간 젖 누린내가 난다. 마유주를 만들 때는 하루에 약 4~5천 번 내지 만 번 정도 나무 막대(불루우르)로 치고 저어 주어야 잘 발효가 되어 양질의 아이락이 된다. 발효가 잘 된 아이락은 젖비린내가 나지 않으며 톡 쏘는 맛이 나는데, 물이 좋은 곳에서 방목하는 말의 젖으로 만든 아이락은 일반 아이락에 비해 월등히 맛이 좋다. 일반적으로 볼강, 터브, 아르항가이, 어워르항가이, 돈드고비, 어믄고비 아이막의 아이락은 소화를 도우며 특별히 맛이 좋다고 한다.
마유주는 일반적으로 몽골 사람들의 여름과 가을에 상식하는 음료일 뿐만 아니라, 잔치나 모든 종류의 행사에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음료이다. 고대로부터 몽골인들은 왕이나 귀족의 귀한 방문 시나 먼 여행을 떠날 때, 전쟁, 혼인, 잔치, 산천제나 수호신에게 제의를 드릴 때, 병을 치료를 할 때 등 다양한 의례에 마유주를 사용했다.

청주(淸酒)로는 주로 염소, 소 등의 젖을 증류시켜 만든 쉬밍 애리히(애리히’는 ‘술’이라는 뜻)가 있다. 쉬밍 애리히는 네르멜 애리히(증류주)라고도 하는데, 신경통에 좋은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여성들도 약으로 마신다. 몸집이 큰 가축의 젖은 진하여 아이락이나 청주를 만들 때, 작은 가축의 젖으로 만든 것보다 맛도 좋고 소화에도 좋은 양질의 술이 된다고 한다.

가축의 고기는 올랑이데라 하여 몽골인들의 주식이 된다. 올랑은 ‘붉다’는 의미인데 고기의 붉은색을 가리키는 말이다. 몽골인들은 주로 양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그밖에 소고기와 염소고기를 먹는다. 말고기나 낙타고기도 더러 먹지만 많이 먹는 편은 아니다. 몸을 따뜻하게 한다는 말고기는 하롱 이데(따뜻한 음식-양고기와 말고기를 이른다.)라 하여 겨울에 주로 먹는데, 말고기를 먹으면 감기에 쉽게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고기는 육포(버르츠)로 말려서 겨울 양식으로 대비하기도 한다. 주로 소고기와 낙타고기를 이용하며 내장도 말려서 사용한다. 보통 12월~ 2월 사이에 말리면 적당하다. 3년 동안 보관한 소고기 육포는 약의 성질을 지니며, 일사병에 걸린 사람에게 염소 육포로 국을 끓여 마시게 하면 효과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육포는 국물있는 음식에 넣기도 하며 빻아서 야채와 함께 음식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예로부터 몽골인들이 먼 여행길이나 전쟁시에 육포를 만들어 양식으로 사용했던 사실이 역사서나 문학서에 많이 나타난다. 말린 육포를 분말로 만들어 보관할 때는 그 동물의 심장막이나 방광에 담아 보관하거나 가지고 다녔다.

소와 말똥은 시골에서 연료로 쓰인다. 소똥을 아르갈이라 하고 말똥을 허머얼이라 하는데, 시골에 가면 난로 옆에 항상 마른 소똥이 준비되어 있다. 말똥도 연료로 쓸 수 있으나 빨리 타버리기 때문에 많이 사용하지 않으며 주로 소똥을 사용한다. 몽골의 가축들은 풀을 먹고 살기 때문에 똥은 거의 다 섬유질이며, 건조한 기후조건으로 인해 쉽게 말라 땔감으로 아주 적당하다. 여름에 모기를 쫓기 위해서 소똥을 태우기도 한다. 똥은 땔감으로만 사용되지 않고, 겨울에 가축우리의 보온을 위해 우리의 벽면을 똥으로 두껍게 발라 추위를 막아 준다.
가축의 털은 다양하게 이용된다. 털을 가공하여 만든 두꺼운 털제품인 펠트(에스기)는 깔개나 겔의 외벽을 두르고 덮는데 사용되며, 신발이나 다양한 수공예품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또 털은 가공하여 옷을 만들거나 양탄자 만드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된다.

몽골 사람들은 가축 가운데서도 말을 가장 존중하고 사랑하여, 예전에는 주인이 죽으면 말을 함께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어워제 때 말은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를 ‘세테르’라 한다.)로 삼아 다른 동물로 구별하는 풍습이 있으며, 준마가 죽으면 말대가리를 높은 산이나 돌무지인 어워에 올리고 제의를 드린다. 어떤 경우 당목에 하득으로 묶어 올려놓기도 했다. 또 특출한 경주마의 대가리에 하득(존경의 의미로 사용되는 의식용 얇은 천)과 천에 둘러 집안에 소중히 간직하는 풍습이 있다. 또 시골의 일반 가정을 가보면 환기구 쪽에 말털을 묶어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느데, 이것은 말털에는 히모리(행운)가 깃들여 있다고 생각하여, 말털을 달아놓으면 말털을 타고 집안에 복이 깃든다고 믿는다. 말 특히 종마의 갈기나 꼬리털은 군대의 정기 혹은, 수호의 상징인 기(톡그)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으며, 모링호오르(마두금)라는 악기의 현을 만들 때 말 꼬리털(말총)이 사용되기도 한다.

양의 견갑골은 점을 치는데 사용되며, 정강이뼈는 전통 혼례식 때 의식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견갑골은 인간의 신체 가운데 상당히 중요한 것에 위치해 있다. 견갑골은 인간의 길흉과 앞날을 점치기는 도구이기 때문에 상당히 존귀한 것으로 여겨진다. 견갑골를 태워서 그 위에 나타나는 선의 형태로 점을 친다. 견갑골인 어깨뼈 부분의 고기는 가장 존경하는 남자 연장자에게 드린다. 일반적으로 어깨뼈는 손아랫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어깨뼈 부분의 고기는 이로 뜯어 먹지 않으며 칼로 베어 먹는다.

허르칭 부족 사람들은 남자의 두 견갑골이 있는 어깨에 각각 등불이 있다고 말한다. 밤에 밖에 나갈 때 이 등불 빛이 나기 때문에 어떤 사악한 것도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몽골인들의 견갑골과 관계된 풍속들은 고대 몽골인들의 뼈신앙과 관계가 있으며, 몽골인의 유목생활의 특수성에서 생겨난 인체기관에 관련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견갑골은 매우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 뼈로 함부로 버리지 않으며 버릴 때는 반드시 흠집을 내서 버리는데, 이것은 뼈에 혼이 깃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오축의 복사뼈는 길흉을 예측하는데 쓰이기도 하며, 시골 아이들의 좋은 놀이감이 된다. 샤기이의 사면을 각각 양, 염소, 말, 낙타라고 이름하며, 샤가이로 점을 칠 때 말이 나오는지 아닌지로 앞날을 예측하기도 했는데, 말이 나오면 길한 것으로 생각한다. 초원에 가다 샤가이를 보면 길하게 여기며, 반드시 말 쪽으로 세워놓고 간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샤가이가 불만을 품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샤가이가 살아 있다고 믿는 뼈신앙의 일종이다. 주거지를 이동할 때 복사뼈를 집터에 그냥 놓고 가지 않고 반드시 가져간다.

또 샤가이는 아이들 목에 걸어주어 부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늑대 복사뼈는 나쁜 사귀로부터 보호해주며, 운에 좋다고 하여 차의 열쇠고리로 이용하거나 옷에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친구나 의형제 끼리 복사뼈를 교환하기도 한다. 몽골비사 116절을 보면 칭기스칸이 어린 시절 자모해와 의형제를 맺고 복사뼈를 교환했던 역사적 사건이 나온다.

그밖의 뼈 등은 태워 남은 재는 세척제로 쓴다. 가축의 가죽은 목축에 필요한 끈을 만들고, 옷이나 자루, 가방, 구두 등 각종 생필품 등을 만든다. 이렇듯 가축은 몽골 생활과 풍속의 전반적인 부분에 관련되며, 가축이 없는 몽골의 생활은 상상하기 어렵다.


3. 사냥
몽골은 많은 야생동물들이 서식하는 나라이며, 사냥은 고대로부터 몽골 사람들의 생산의 중요한 수단이자, 생활의 존재 방식이 되었다. 처음 부족 형성 시에는 생산의 주요 수단이 되었던 사냥이, 점차 사람들이 목축 일에 종사하게 되면서 사냥은 부족한 양식을 보충해 주는 생활의 보조 수단이 되었다. 사냥을 통해 얻은 고기와 가죽, 털과 뿔, 사향 등은 먹거리와 옷, 모자 등 생활 용품을 만드는 주재료가 되었다.

사냥은 몽골의 전역에서 행해졌지만 주로 몽골의 북부, 서북부의 삼림지역에 살고 있는 다르하드 사람들이 사냥을 하여 생활했다. 역사서에는 사냥을 주 생활방식으로 삼아 생활했으며 털제품으로 세금을 바치는 “북쪽 사냥꾼”이라는 일군의 수림민들이 있었던 것에 관한 기록이 있다.

몽골은 높은 산, 무성한 숲, 넓은 초원, 반사막 지역, 크고 작은 호수가 어우러진 광대한 나라로, 여러 가지 야생 동물이 서식하는데 매우 좋은 자연 조건을 가진 나라이다. 몽골 아카데미 생물학 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현재 몽골에는 140여 가지의 포유동물과 415종의 조류, 28가지 이상의 파충류와 70가지 이상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냥하는 야생 동물로는 곰, 이리, 사슴, 순록, 영양, 노루, 산양, 산염소, 멧돼지, 여우, 살쾡이, 담비, 토끼, 족제비, 야생 다람쥐, 타르바간 등이다.

사냥은 단순히 사냥감을 목표로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집단적 사냥은 군사 훈련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 즉 대규모 집단 사냥은 그 형태나 작전 등이 일종의 전술의 모의 훈련과 같은 성질을 가졌다. 사냥은 현실적인 요구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왕족이나 귀족의 오락거리 또는 스포츠를 목적으로 행해지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개인 또는 소규모 집단이 함께 하는 사냥을 ‘하이득 아브’라고 한다면, 왕이 참가하는 대규모 사냥이나 집단으로 하는 사냥을 ‘아브 허머륵’라고 한다. 예전에 할하의 네 아이막의 왕들과 지역의 지도자, 귀족들은 아이막과 호쇼를 포괄하는 대규모 사냥을 조직하였다. 칭기스칸도 필요에 따라 대규모 집단 수렵을 실시하였는데 그것은 병사들의 전투훈련과 동시에 식량조달을 목적으로 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대규모 사냥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쿠빌라이칸의 무사들 중에 바양과 밍간이라는 형제의 휘하에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사냥을 할 때는 한쪽에는 붉은색, 다른 한쪽은 푸른색 사냥복을 입었다고 한다. 칸이 사냥을 갈 때 이 두 형제는 양쪽에 만 명의 부하와 5천 마리의 사냥개를 이끌고 칸을 양쪽에서 수행하고 갔다고 한다. 이들은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 약 하루 길 정도의 상당히 넓은 지역을 포위하여 그 안에 든 짐승들을 잡았다고 한다. 나중에 만주 지배기에도 이러한 집단적 사냥은 계속되었으며 지역 명을 따서 ‘올리아스테 사냥’,‘이흐 후레(현재 울란바타르) 사냥’이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사냥의 방법은 올무나 그물, 덫 등의 도구를 이용하거나 화살이나 총 등의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 독수리, 매, 개 등을 놓아 사냥하는 방법, 말을 달려 추격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잘 훈련된 독수리는 한 번 걸리면 절대로 도망칠 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컸으며 힘이 대단했다고 한다. 쿠빌라이 칸은 사냥을 하는데 이용하기 위해 잘 훈련된 표범, 사자를 사육했으며, 수렵용 살쾡이도 상당수 사육했다고 한다.

사냥은 보통 동물들이 살이 오르는 가을과 초겨울에 하게 되는데, 봄과 여름에는 동물들이 새끼를 낳고 성장하는 기간이므로 잡지 않는다. 옛날부터 몽골 사람들은 자연을 적절히 이용했지만 자연의 질서를 파괴시키고, 손상시키는 것을 매우 금기시해 왔다. 유명한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해마다 토끼, 사슴, 노루, 영양 등의 동물이 번식하는 3월부터 10월까지 왕, 대신, 신하 등 어떤 사람도 사냥할 권리가 없다는 규정이 몽골에 있다.”고 기록했다. 1640년에는 <몽골 오이라드의 법>으로 수달, 담비 등 털이 있는 동물을 무단으로 사냥하는 것을 금했으며, 1720년에도 이흐 후레의 주변 야생동물 사냥을 법으로 금지하여 보호했다. 이러한 야생동물 보호 전통은 수백 동안 관습화되었으며 전승되었다. 현재 야생마(홀랑), 희귀종 야생마(타히), 사슴, 순록, 옐크(큰사슴), 야생낙타, 영양, 야생염소, 산양, 사향노루, 표범, 해리, 수달, 담비 등의 포유동물과 30여종의 조류 즉, 3종의 백조, 콘도르, 펠리컨, 허이럭, 꿩 이외에 콘도르, 4종의 매, 부엉이, 올빼미, 딱따구리 등을 법으로 보호하고 있다.

사냥에는 일정한 금기 내지 불문율이 존재한다. 즉, 털이 완전히 자라지 않은 것, 살이 아직 오르지 않은 동물, 새끼를 배고 있는 동물 등은 사냥하지 않았다. 또 새끼나 새끼를 데리고 가는 어미 동물, 어린 동물을 사냥하지 않으며, 이런 동물들을 놀라게 하거나 추격하는 것을 금했다. 동면하는 동물을 동면 상태로 사냥한다든지, 사냥을 할 때 동물을 매우 괴롭히는 행위, 총을 쏘아 상처를 입히는 행위 등을 금하며 특히 떼로 사냥하여 대량 살생하는 행위를 금했다. 사냥을 하는 도중 동물의 보금자리인 구멍과 새집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눈보라, 강풍, 한발, 홍수 등 자연 재해에 처해 있거나 강이나 흙탕에 빠져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수 없는 동물을 사냥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몽골 사람들은 사냥을 하기 전 여러 가지 금기와 의례가 있었다. 앞서 사냥하는 날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며, 집안에서 사냥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그 이유는 불의 신이 말하는 것을 좋아하여 초원의 동물들에게 알려 사냥감을 얻지 못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냥하는 날이 가까워지면 서로 손에서 손으로 말똥을 전달하여 사냥을 떠날 날이 되었음을 알린다. 사냥을 떠나는 날이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 천신과 동물의 주인인 차강 어브겅(백발 노인), 지신, 산신께 차와 제수를 올리고 복을 빈다. 사냥에 필요한 도구인 총과 활, 화살, 칼 그밖에 것들을 불과 향을 쐬며 정화시킨다. 모든 준비를 갖춘 다음 <천신>께서 분명히 사냥감을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출발한다.

또 사냥을 할 때는 사냥할 동물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무덤 주위에서 사냥하지 않으며, 늑대를 죽였거나 보금자리를 파고 건드렸으면 발자국의 흔적을 다른 쪽으로 낸다. 사냥을 할 때는 목적하는 동물 이외에 동물을 공격하지 않으며, 가다가 어떤 동물과 마주치면 운이 좋거나 혹은 나쁜 쪽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늑대를 만나면 길조로 생각하고, 여우를 만나면 나쁜 징조로 여긴다. 그러나 늑대에 대한 몽골인들의 관념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로 토템으로서의 길한 동물로 여기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축을 무자비하게 해치는 잔인한 야수로 생각한다. 사냥꾼이 늑대를 사냥하면 그 가죽을 벗겨서 8부분으로 잘라 벽에 걸어놓는다고 한다. 그렇게 근육을 끊지 않으면 총알에도 죽지 않는 위험한 동물이 되어 되살아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몽골인들의 늑대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관념을 잘 보여준다.

늑대는 보통 겨울과 봄에 사냥을 하는데, 겨울에는 많은 사냥꾼들이 늑대 울음소리를 내어 유혹한 후 사냥을 한다. 그때 몇 마리 늑대가 나타나면 먼저 암컷을 죽이거나 상처를 낸 다음 수컷을 죽인다. 수컷은 어떤 경우라도 암컷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몽골 사람들 사이에는 야생 동물 가운데 곰, 사슴, 고라니 등의 동물을 죽이는 것을 매우 신중히 하였으며, 사냥을 할 때 여러 가지 예를 행했다. 부랴트족들은 곰을 죽일 때 곰제의라는 것을 행했다. 두 눈(‘별’이라고 했다.)을 빼내서 풀에 싸서 나무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곰 대가리는 식도, 심장, 폐와 함께 전신에서 분리해 낸 후 자작나무 가지로 나무에 단단히 묶어 말렸다. 그리고 곰의 구운 고기와 비계를 불에 올릴 때는 “우리가 너를 죽이지 않았다. 너를 죽인 것은 오량해, 퉁구스 사람들이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의례는 시베리아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민들 사이에서 행해진 곰 신앙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다르하드사람들 가운데는 사슴을 사냥하면 뿔을 손상시키지 않고, 땅에 닿지 않게 가져다가 높은 곳에 올려두고, 그 가죽을 벗겨 나무에 걸고 3번 절하는 풍습이 있었다. 홉드 아이막에 살고 있는 자흐칭 부족은 이러한 전통 이외에 사슴을 사냥하고 난 뒤 사슴의 가죽을 벗겨서 반쪽의 가죽은 사냥꾼 자신이 갖고, 다른 쪽의 가죽은 가늘게 잘라 사냥에 따라온 사람들에게 안장에 부착하는 가죽 끈이나 고삐를 만들라고 주는데, 사슴가죽으로 끈을 만들어 쓰면 청결할 뿐만 아니라 행운이 깃들게 된다고 생각했다.

사냥감을 나눌 때에는 그 동물을 죽인 사냥꾼에게는 줄드라 하여 대가리, 턱, 혀와 식도, 허파, 심장 등을 준다. 이 줄드는 무속적 관념으로 보면 동물의 혼이 깃드는 곳이라 하여 매우 중히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줄드는 신에게 드려 사냥감을 얻게 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밖에 고기나 가죽은 사냥한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며 사냥꾼의 우두머리를 존중하는 예가 있었다.

몽골에 살다보면 타르바간을 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타르바간은 초원, 산악지대, 숲지대 등 몽골의 어느 지역에서나 풍부하게 서식하는 동물이며, 타르바간에 대한 신화도 풍부하다. 원래 타르바간은 명궁수 메르겡이 변한 동물이라 그 몸에 사람고기 부분이 있다는 설화도 있다. 타르바간은 구멍을 파고 무리지어 모여 사는 특징이 있다. 계절에 따라 털 색깔을 바꾸며, 누런 갈색과 엷은 푸른색을 갖는다. 보통 9월 말경이 되면 살이 오르고 매우 기름지게 된다. 알타이 산악지대에 서식하는 타르바간은 몸집이 크고 털끝이 검은 갈색을 띠며, 털이 무성하고 길며 부드럽기 때문에 좀더 값이 나간다. 특히 8~9월에 사냥한 타르바간의 가죽은 매우 질이 좋고 질기기 때문에 겨울용 델과 모자, 깃을 만드는 데 적당하다. 사냥한 타르바간은 삶아서 먹기도 하지만, 달군 돌을 몸에 넣어 익히는 버어득이라는 요리를 해 먹기도 한다.

타르바간의 내장은 여러 가지 치료제로 쓰이기도 하지만, 전염병을 퍼뜨리기 때문에 해마다 여름이면 주의하라는 보도를 한다. 전염병 때문에 먹기가 께름할 수는 있으나 사냥꾼들은 병든 타르왁과 건강한 타르왁을 쉽게 구별하기 때문에 먹는데 큰 위험은 없다고 한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사냥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것은 외국과의 교역 증가와 관련이 있다. 사냥한 야생동물의 가죽과 털을 외국에 팔 수 있는 시장이 열려, 자체적인 소비 목적뿐 아니라 상업적인 면에서 사냥은 매우 관심을 끄는 분야가 되었다. 현재 타르바간의 가죽은 세계 시장에서 고가품의 하나가 되었다. 20세기 중반부터 산염소와 염소, 산양, 여우, 타르바간, 늑대, 야생돼지, 곰, 담비, 해리 등 다양한 종류의 사냥감을 사냥하여 국내, 해외 시장의 수요를 충당해왔기 때문에 야생동물이 수적으로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출처 : 이안난 "몽골인의 생활과 풍습" 한눈에, 2004
사진 : 몽골한인선교사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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