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는 뜨거운 했살이 도로를 달구고 잇었다.
중동을 향해 한발 다가선 것은 사실이지만 이웃나라 카자흐스탄에서 만년설을 바라본 필자의 입장에선 실로 당혹스러운 광경이 아닐수 없다. 좁은 땅덩어리에 갇혀살다 '대륙'이라는 거대한 시간대를 바꿔가면서 이동 하는데 익숙치 못한데 기인한 것 이었다.

그래도 마음한켠 푸근한 것은 도로가 한국차들로 뒤덮여 잇다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독립 10주년인 오는 9월1일 아디잔 공장에서 마티즈 1호차를 내놓을 예정이다. 한국차 생산을 독립기념 행사 이벤트로 삼는다는데 이유야 어�든 어렵게 개척한 이 시장이 송두리째 넘어간다하니 국가적 손실이 아닐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타슈켄트는 예나 지금이나 중앙아시아의 교통요충지로 확고히 자리하고 잇다.
옛 실크로드는 이곳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를 거쳐 키르기스탄 아제르바이젠. 이란 등지로 빠져나갔고 지금도 국제공항 노선과 철도의 중요기착지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타슈켄트가 유럽-카프카즈-아시아를 잇는 육상의 '북송복로'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잇다. 특히 철도를 중심으로 주변 10여개국과 운송협정을 맺어 각종유인책을 쓰고 잇으나 불안 한 환율이 문제이다. 100달러를 환전하면 큰 비닐봉지 가득 돈을 담아 줄정도로 화페가치가 형편 없고 공식환율과 암시장환율이 2가지나 존재하며 그 차이가 3배이상난다. 무역은 물론 물류에있어 결정적 장애가 아닐수 없다.


집단 농장의 고려인들===============

철의 실크로드를 쫓다보면 우리역사를 종종 만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져사는 고려인의 모습은 가슴아픈 단편이 아닐수 없다. 타슈켄트시외곽 10KM지점 두스트릭크 집단농잔을 갔다. 뽕나무가 밭의 경계를 이루며 줄지어 있고 집집마다 짚단이 마당가득 쌓여잇는 모습이 낯설지않다. 러시아어로 친선을 뜻하는 '두스트릭크'집단농장은 1937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집단 이주해온 고려인 12가구가 만든 것 이다. 그러나 지그이곳엔 1천600여명의 농장원중 고려인은 100여명 뿐이고 특히 이주 1세대는 5� 밖에 남아 잇지않았다.

이들의 이주는 소수민족 분리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 이주 했을 대는 갈대밭뿐이었습니다. 당장 비 바람을 피할공간이 없어 구덩이를 파고 갈대를 꺽어 집을 대신햇어요 정말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집단농장에서만난 한인 이주1세대 정희선(80)세는 한국말로 당시 상황을 거침없이 했다. 이주전 그 가살던곳은 블라디볼스토크에서 80KM떨어진 파시에트라는 작은 마을 이엇는데 두만강을 끼고 있었다고한다. '이곳까지 오는데 한달이상 걸렸습니다. 40량 정도되는 화물여차엿는데 한칸에 4가족씩 20여명이 탔는데 제데로 먹지못해 아이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열차가 멈추면 죽은아이들을 묻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하바로프스크를 떠나기전 곡간에 잇던 곡식을 꺼내 떡을 만들고 가축도 잡아 준비햇으니 망정이지 자칫 모두 굶어 죽을 뻔 했습니다. 배급이 있긴 했지만 형편 없었습니다. '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소련당국이 집을 지어�고 이듬해부터 황무지를 개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 남자들은 모두 군수공장으로 끌려가고 말앗다. 이 바람에 30세가 넘어서 결혼 햇다는 정씨는 지금 아들 2과함께 이곳에 살고잇다.

이 농장에 사는 이주1세 고려인중 최고령자는 98세 하지만 한국에 가본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한다. 정씨는 취재팀을 붙잡고 서울에 살고잇을 친척을 �을길을 물었다. 집단농장 자혼길 무푸치자데 부회장은 '최초 우주베키스탄에는 집단농장이 50여개 잇었는데 지금은 15개만 남았다'면서 '특히 이주 1세대인 고 박경조는 1960년대초 '경조미란 품종을 개발했는데 아직도 우즈베키스탄에서 최고의 쌀로 평가받고잇다'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 - 사마르칸트=============

타슈켄트에서 철길로 300여KM 떨어진 사마르칸트는 흔히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로 불린다.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돔을 갖은 수많은 모스크(이슬람사원)가 도시전체를 화려하게 수 놓고 잇지만 서민들이 사는 집은 여전히 흙으로 지어지고 비록 스카프가 차도르를 대신했지만 얼굴을 반쯤가린 여인들이 종종 눈에 띈다. 양의 엉덩이에 붙은 지방덩어리를 무썰듯 사각으로 짤라 날것으로 먹는 식습관 역시 옛모습 그대로이다.

특히 묘지문화는 우리와 너무다르다 혐오시설이아니라 선조가 안식하는 성스러운곳으로 받들어 지고잇다. 사마르 트인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교회나 절을 찾는 것 이아니라 바로 이 묘지로 달려가 무릎을 꿇는다. 그 중에서도 아무르 티무르의 묘가있는'귀르 에미르'는 사마르칸트인 에게는 영혼의 안식처로 천국의 통로로 인식되고 잇다. 그래서 출입구 우물가에선 지금도 양을 WQ아 그 피를 뿌리고 티무르묘에 이르는 100여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 수를 세어 두 개가 일치하면 큰 행운이 따른다고 �는 사람들이많다. 티무르는 14세기 칭기스칸의 말발굽아래 페허가된 지금의 자리에 사마르칸트를 세운 인물로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의 묘에 가까워 질수록 천국의 문은 활짝 열린다고 사마르칸트인은 믿고 있다. 그래서 집을 팔아서라도 가까운 자리에 위치한 묘지를 구하러든다. 이미'명당'들은 부자와 권력자가 독차지했지만. 그러나 이곳에서 놀라운 것은 시람들의 치아였다. 한 두 개도 아니고 아래위 치아 거의 전부를 황금으로 씌어놓았는데 치료를 위해서가아니고 일종의 푸습이자 부의 상징으로 보였다.

장사하는 젊은 여인도 그랬고 역장도 웃을때는 누런 황금치아를 유난히 드러냈다. 그런데 사마르칸트가 외국인에 대해서는 유난히 배타적이라고 현지 고려인 들은 말한다.타지크족, 우즈벡족. 이란족, 아랍족, 독일족 등 무려 96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뒤섞여 살고 잇는데,관광객들이야 별문제 없지만 이곳에 진출해사업을 하자면 상황이 달라진다. 버률상 조세등의 혜택이 없습은 물론이고 인식 자체가 외국인 들에게 배타적이라고 한다. 구체적이유는 알수 없지만 알렉산더 대왕이나 아랍족, 징기스칸 등 수 많은 이민족에의해 짓밞힌 가슴아픈 상처가 그들의 마음에 잠재해 잇는 까닭인지모른다. 실제로 외국간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뜻밖한 많은 식당에서 우리나라 김치와 국수,보신탕을 팔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시원한 육수에 말아먹는 국수는 그맛이 우리 입맛에 딱 맞을 뿐 아니라 이름까지도'국시'라 불리고 잇엇다. 알고보니 이들음식은 1937년 스탈린에의해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전파한 것이다. 사마르칸트는 과거 소고인들이 대상을 하며 일으킨 국제무역도시로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다. 지금의 철도는 그 노선이 상당부분 과거의 실크로드와 일치한다. 사마르칸트역을 중심으로 부하라-투르크메니스탄 차르조우를 잇는 노선과 카르키우바크-카자흐스탄 우아시즈로 연결되는 2개의 노선축이 옛실크로드의 발자취를 상당부분 쫓고 있다. 다만 열차의 속도는 화물40km, 여객65km로 더디기 그지없다. 열차도 몹시 낡아 냉난방이 안되고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줄기가 쏟아진다. 그래도 철도는 물류의 중심이라 하루4천500-5천톤이 사마르칸트역을 통과 한다고 한다.


사마르칸트 역사 박물관===========

사마르칸트 초입에는 특별한 전시공간이잇는 역사박물관이 잇다.
다른 전시관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잇지만 1층은 안내원이 문을 열어 줘야만 들어갈수 있다. 반 지하구조인 이곳에는 7세기 소고드왕조의 아프라시아브 왕때 만들어진 궁전 벽화 3개 벽면에 전시되어있다. 당시 각나라의 조공사절들을 그린 벽화 이다. 1965년 발굴된 높이2m의 이 벽화들은 그러나 상당부분 훼손되 일반인들은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 취재팀이 사마르칸트의 첫 방문지로 이곳을 택한데는 벽화중에 '고구려 '이 잇다고 국내에서 들엇기 때문이다.

문제의 벽화는 서쪽 벽면에 잇었다. 鳥羽冠,즉 깃털2개가 달린 모자를 쓰고 허리에 큰칼을 찬 두사람의 형상이벽화 오른쪽 귀퉁이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벽화를 보는 순간 이들이 고구려인 이라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엇다. 안내원은 이에대해 전혀 설명을 못했고 벽화와 함께 발견�다는 대형 비문에도 다른 그림에 대해서는 설명이 잇었지만 유독 고구려인 이라는 그림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엇다, 박물관측이 제작한 안내 책자에도 korean이라는 단어 한 개가 전부였다.

'나당 연합군에 고구려가 패한게 668년 아닙니까.고구려가 과연 중국과 카자흐스탄을 지나여기까지와서 파병을 요청 햇을까요? 더구나 조공사절을 보낼이유는 더욱 없엇지요'. 우즈베키스탄 인문과학연구소의 주앙아시아 역사과정의 한국유학생 최모씨 설명이다. '조우관은 기마유족 민족인 스키타이의 대표적인 복장이며 특히 티벳지역에서는 무속인들이 지금도 이 모자를 쓰고잇다고, 오히려 중앙아시아 대륙의 한민족일 가능성이 더 SHV다고했다.

사마르칸트 박물관 고대 예술품수리소 책임자 마라나 한데시씨는 '아즈라일레비치 알바움이라는 러시아 학자가 가올리(GAOLI-KOREA)사람들이 깃털모자를 썼다는 전설을 근거로 그같이 추정한 것으로 알고 잇다고 말했다. 결국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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