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전문인선교사의 짧은 몽골선교 경험, 그 기대와 현실

선교 사역지에서 볼 때, 몽골은 창의적 접근지역임이 틀림없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사야 42:1~4)

전문인 선교사는 선교적인 소명을 가지고, 어떤 특정 분야에 전문가로서, 혹은 신분상 전문가 형태를 띠고 타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2003년 한국선교연구원(KRIM)에서 69개 단체를 대상으로 한 한국선교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2002년 말에 파송된 선교사는 10,422명이었다고 한다. 그 중 목회자는 31.9%(3,324명), 평신도는 68.1%(7,097명)인데, 평신도사역자 중에서 일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1,525(21,5%)명이었다.

이 자료가 한국교회의 파송선교사를 다 포함하지는 않겠지만, 세계선교에서 목회자보다 평신도 참여비율이 크다는 것과 전문 직업으로 사역하는 이들의 수가 적지는 않지만, 그의 두 배 이상은 전문인 선교사이면서 전통적인 형태로 선교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평신도 선교사들이 자신의 전문성이 있는 전문인 선교사임과 동시에 후원자들과 공동 사역을 하는 것이다. 이는 선교의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으되,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 세 부류가 동시에 관계하여 연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보낸 자나 보냄을 받는 자, 그리고 현지에서 동역을 이루는 자들이 함께 참 동역을 이루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음을 상기시켜 본다.

현대의 선교사는 소명과 함께 선교사로서의 외부적 환경-후원과 관리-를 확보하면서 사역에 임한다. 이는 이미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이 땅의 구원을 감당하실 때에 성부와 성령이 함께 동역하심으로 증명된 바 있다. 이처럼 선교적 수행은 하나님의 예정에서부터 비롯되되, 후원자들로부터 선교사로 파송 받아 선교 현지에서 사역자들과 함께 동역을 실천하며 원만히 이루어 나아갈 때에 달성된다. 이 가운데 특히 전문인 선교는 이 세 구조로서 이행되는 데에 선교를 보다 완전하게 하는 필요충분조건 요소로서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몽골의 울란바타르대학교에서 전문인 선교사로서 정착해 가는 과정에 있다. 이 3년의 경험에서 결론이라 내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잠정적이나마 그 무엇도 없지만, 적어도 경험한 사역의 그림자들을 돌아볼 때에 위의 세 가지가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확인해 가고 있는 즈음이다. 이에 전문인선교사로서의 처지를 돌아보며, 후원과 동역으로 얻어질 협력 사역의 향방을 내다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늠해 본다.

많은 선교 인력이 전문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전문인선교사는 자신의 전문 달란트로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요소를 인식하여 선교의 접촉점 기능을 한다. 현지의 실리적인 기능으로 그 사회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환영을 받는다. 물론 이에는 질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을 만큼의 전문성을 전제로 한다. 특히 몽골은 공산주의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로 이양되면서 이에 알맞은 지적 자산을 늘리려고 전문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전문적인 인력의 수급을 매우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개방 초기부터 전문인선교 형태로서 선교를 열어 놓은 셈이 되었다. 이는 마치 선교의 출구를 몽골 스스로 열어놓아 선교의 기회를 자발적으로 불러들인 듯한데, 선교의 질적 수행을 위해서 자본의 지식만 전달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도하는 어린이


실제 선교 사역지에서 볼 때, 몽골은 창의적 접근지역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같은 범주에 속하는 다른 지역에 비하면 몽골은 선교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지만, 외국인으로서는 교회이든 학교이든 종교적인 활동이 통제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몽골법으로 재어보면 선교사는 위법자에 해당된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국가이면서도 몽골정부로부터 기독교 증가의 억제 혹은 지역까지 조정 당하므로 여기에 선교적으로 접근하려면 조심스러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 사역을 하더라도 목회자 선교사도 전문인으로서 선교적인 접촉점을 확보하면서 선교적인 실마리를 찾고, 이것이 선교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것인가를 놓고, 복음의 성품이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함으로 부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반드시 선교적인 대상이 있고, 또 그곳에서 언제든지 예외적인 문제가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이를 전문인 선교사로서 선교를 내다볼 때, 대학이 교육으로서 앞으로의 사회를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는 관문임을 알고 진지한 접근과 대안이 필요하다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에서 선교의 다양한 가능성이 개발되기도, 저하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도 그 지적 수준을 어느 정도 확보하되, 영적인 추진력 또한 동시에 있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임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전문인 선교사들은 전문인이기에 성경적인 지식으로서 선교대상자에게 복음을 직접 들려주는 혹은 그 이상으로 사회의 욕구를 해소해 주는 데에 절대 시간을 보낸다. 이는 바울이 말한 바, 더 많은 이를 얻기 위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과 같이, 먼 장래를 바라보고 더 많은 이를 얻기 위한 선교의 문을 여는, 사회적인 필요와 선교적 소명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효율적인 기능성의 요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문성과 영적 실행 능력이 동시에 필요하며, 그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실행방법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충실함으로서 얻어야 할 열매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헌신을 넘어서서 외국인으로서 겪는 문화적인 이질감을 소화하고 현장에 맞는 방법을 찾는 데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여 지구력과 창의성을 요구한다. 이 원동력은 물론 그리스도의 사랑일 것이다. 그러면 이를 어떻게 현실화 할 것인가.
선교사는 상황 중심의 사고로서 주어진 환경에 충실했을 때 그 일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선교지란 예측불허의 상황이 늘 잠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을 어느 정도는 실효성 있게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인의 경우에도 일의 성취는 학습자들의 실력 향상이나 적어도 학습에서 동기유발 기능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다. 특히 지식에 대한 욕구가 비교적 낮은 편의 학습자들에게 학습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교수자의 가장 큰 역할임에도 그러하다. 교육은 교실에서 뿐만 아니라 학습자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도록 그들의 견고한 습관,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만연된 정서의 이해를 전제로 하여 서로 소통되지 않은 부분까지 해소할 수 있도록 학습자들에게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연장으로서의 그들의 학습 진도를 체크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소모하여야 비로소 교육의 효율성을 완수할 수 있다. 여기에서 업무량과 시간은 서로 관련이 없다. 다만 주어진 환경에 따른 관리 능력이 작용할 뿐이다.

한편으로 많은 전문인선교사들이 그러하듯이 본인도 교육 행위 가운데에 복음적인 의미를 담거나,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덕목을 실천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그러므로 선교대상자인 학습자들과 평소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심겨지도록 돕는 데에 고심한다. 교육 사역의 결과가 무엇이라는 점은 이미 밝혀진 바며, 하나님께서도 이를 사용해 가고 있음을 익히 아는 바가 아닌가. 이는 궁극적으로 기독교적인 마인드로 가르치며 본을 이루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본인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가 자문한다. 이는 학습자들에게서 발생하는 모든 경우를 의식하면서 그것에 수업 이상으로 충실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부담 때문에 오히려 세상 속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고 자신은 물론 학습자들에게 경찰 같은 훈계자가 되어 버리고는 한다. 학습자들의 지적 환경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바로 사역의 근거지로서 오지임을 완전히 소화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곧 방법의 미숙함 때문에 세상의 유전을 전달할 위험한 가능성에 선교자 본인이 놓여 있는 것이다. 선교사로서 학습자들에게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업 속에 오래 할당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오류로 남는다. 이는 선교사 자신이 소외의 한 자리에 놓여 있으므로 하여 책임감이나 주의를 집중하는 정도로는 역부족인 데서 오류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절대적인 시간 속에서 탈진된 교육자가 무슨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교육자에게 선교지는 바로 교육 현장이 아닌가. 교육전문직 선교사들의 타문화권 현장은 바로 교실인 것이다.

전문인 선교사는 사역의 한 요소자로서 소명에 충실하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어느 정도 끝내놓고서야 비로소 그 일에서 자유를 얻는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일의 속성상, 못해 내거나 남아 있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결국 그 일을 던져버리듯 일에서 손을 떼어 놓고는 한다. 그럴 때 당사자는 갑자기 일 속에 묻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본인의 정체성을 의식한다. 본인이 하는 일에서 선교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자문하는 것이다. 전체 속에서만 기능하는 작은 한 부분으로서의 자신을 볼 때, 선교적인 가치라는 일 속에 제대로 묻혀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며 자신의 소재지에 당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어진 일에 얼마나 충실했느냐 혹은 선교적 가치는 물론 일의 대가가 충분한가 하는 문제와는 별도의 문제로서 공의와는 상관없이 영적 공백의 순간에 던져져 있는 본인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일상 과정 속에서 선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전문인으로서 제 기능을 제대로 다하고 있는지 묻는 정체성 물음에 당면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교육 사역은 전인격적인 사람이라는 열매를 얻는 대의명분 대가가 있다. 교육적인 활동은 백년지대계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은가. 선교사로서 행위에서 갖는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준 인간 사랑의 아주 작은 보답이 아니던가. 그 만큼 하루의 일상 시간 그대로 선교의 절대적 가치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기대감과 충족감도 크고, 또한 때에 따라서 상실감 또한 작지 않다. 언제나 기대와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관점에 따라서는 본인의 편견일 수도 있는 기대와 현실의 간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선교지란 모국의 문화와 비교하면 안되는 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문화적인 차이를 안다고 할지라도 일에서 금방 빠져 나온 듯한 순간에는 주어진 현실을 정죄하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대와 현실 양쪽에 다 있다. 전문가로서의 기대는 고국에 두고, 현실만 절실하게 안고 살아야 하는 선교인가 하는 혼란을 의식한 채 말이다.

선교사는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이 책임 의식은 본인의 위치를 경각시켜 주기도 함과 동시에 실제 예상 외로 때로는 복잡한 마음의 경로는 지나게 한다. 전문인 선교사로서 삶 혹은 그 일상 자체로 복음 전도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여 떠맡게 되는 상실감으로 인하여 낙심되는 처지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러할 때는 오히려 본인 스스로에게 좀 더 투명할 필요를 느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연약함까지 보게 하는 편이 낳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일들에서 멀어져 있는 자신이 아닌지 하고. 이는 한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으로 다른 무엇으로 해소하려는 욕구를 만든다. 죄가 죄를 부르듯이. 이를 이기는 데에 영적인 회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늘 탈진할 수밖에 없는 자가 전문인선교사가 아닌가 한다. 선교사 본인의 함량과 동역자, 선교 대상을 포함시키고 있는 선교 현장의 특성과도 관계되지 않을까. 이는 함께 현장에서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풀어가야 할 과제로서 늘 남아 있는 듯하다.

앞서 제기했듯이 표면적으로는 전문인 선교사가 복음의 선포자로서의 복음 제시의 기회를 적게 가진다는 점에서 자칫하면 스스로도 복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생활을 하기가 쉽다. 게다가 이러한 복음의 전파라는 시급한 측면을 고려할 때, 전문인 선교사는 반복음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칠 수 있다. 복음을 나누는, 그것으로 인하여 힘을 얻는 시간이 불규칙하므로 선교사 자신이 간혹 정체성을 잃고 자존감마저 낮아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타인에 의해서는 물론 자기 스스로 복음에 빚진 자임을 망각하고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함으로서 갖는 죄의식에 눌려 있기 쉽다. 선교사로서 정체성을 모호하게 가짐으로써 직업 기능에 따른 자신감까지 눌림을 당하여, 자신에 대한 기대-종이며 기술자-와 현실이 맞지 않는 경험을 쉽게 갖는다. 복음조차 낯설 만큼 업무로 제한된 환경 속에서 이미 여러 가지로 포기된 사람으로서 일상을 견디어 가고 있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주께로부터도 소외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경험을 얻게 한다.
이렇듯 전문인 선교사는 선교적인 과제를 안고 있는 바에야 철저하게 소명감에 충실할 만큼 훈련되고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충족시킬 만한 여과 과정이 현장의 시간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업의 준비와 이를 여유 있게 전달할 만한 정서의 안정감은 물론 선교사로서의 그리스도의 심성이 결합되어 있어야 함이 교육의 최우선 조건이 아닌가. 이에서 전문인으로서 영적 순수성을 병행시킬 수 있는 준비된 능력, 이를 직업으로서도 선교의 기능을 다할 수 있는가 하는 점검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철저하게 선교적으로 자기검증을 통과한 훈련됨이 있었는가를 묻게 된다.

여기에서 복음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절대 시간을 확보하면 매일 매일의 패배를 감소시킬 수 있으리라. 복음의 공로는 역시 생명을 살리는 쪽에 있음을 그날의 성경말씀 속에서 실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학교 동역자들과 함께 하는 이른 아침의 성경묵상 시간은 전문인 선교사들에게 공헌한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성경에 비친 자신의 형편을 나누며 그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상기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함께 참여하는 모든 선교사가 복음을 새로 듣는 듯이 자신의 영적 허실이라든가 복음에 반사된 선교지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서로 나누게 된다. 이렇게 성경을 통하여 독특한 환경에 놓인 자신을 비로소 돌아보고 또한 옛날과 다르게 선교적 도구로 자라고 있는 새로운 각 사람들을 대면하고는 한다. 일의 성과와는 별개로 복음에 빚진 자임도 잊을 만큼 일속에 파묻혀 있는 자신을 건강하게 감각한 듯이. 이에서 불균형적인 삶을 사는 자신을 교정하며 자신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 당면해 있는 세계에 어떻게 진입해야 하는지를 다시 확인하며 본인의 의지로도 더 변화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성경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가는 별도로 전문인 선교사로서 하나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에 이를 때, 형식적으로는 ‘아니다’라는 대답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겪는 결핍감을 해소해 주기도 하다. 이것은 교회개혁 시기에 있었을 법한 영적 자유의 해방감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파송 안수를 받기는 했지만, 통상적으로는 전문인 선교사가 목회자 선교사와 구별되어 하나님과 친밀감이 없는 사람처럼 비쳐지고는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끝내 이러한 비교감정을 갖고 느끼는 것은 한편으로 본인이 선교적인 삶에 적합한 전도자로서 살고 있는가에 늘 의문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제기한 문제적 상황에 전문인 선교사가 놓여 있어서 선교사 자신도 나아갈 바의 방향이라든가 정체성에 긴장을 잃고 다소 장황한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미혹의 영이 이미 선교사 자신의 일상생활에 잠복하고 있지 않은가. 재주나 실력, 혹은 지적 허영과 성공, 비교 등등까지. 이것이 기대이며 그것을 낙심케 하는 것이 현실 곧 선교지의 환경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는 전문인 선교사로서 초기일수록 더 심하게 겪는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 일차 사역인 목회자 선교사들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자신을 지속적으로 피드백 할 수 있는 데 반하여, 전문인 선교사는 현지적응의 과정 속에 언어 습득과 관계 조직 속의 일을 함께 하기 때문에 성경과 친밀하기에도 역부족이다. 중요한 일보다 급한 일 뒤에 놓여 있는 성경과 기도, 언어 소통이 제한된 상태에서도 일을 질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교육현장. 이들이 현지 적응기에 동시에 주어져 있는 것이기에 경험상으로 아무리 미숙하다고 하여도 이들을 원만하게 소화해야 한다. 이는 전문인 선교사들이 정착 초기에 노동의 시간적인 한계까지 느끼며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를 생각하게 한다.

선교지에서는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받고, 이것이 선행된 후에야 1차 검증이 끝난다고 한다. 적응 정도는 개인의 실행능력으로서 평가되며, 표면적인 관계 형성을 어떻게 이루어 내었느냐가 중요한 관건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즉 일의 성취 여부가 적응 여부와 동일시되는 상황인 것이다. 또한 이는 자율적인 방법으로서의 개인 적응뿐만 아니라 관계로서의 평가 기반을 얻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적관리에 무엇이 필요한지도, 자기만의 알맞은 생활 리듬을 갖추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관리하여야 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 관계 상황을 움직일 수 있을 만한 정신적 혹은 영적 역량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전문인 선교사는 자신을 꾸준히 캐어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떠한 모양이든지 확보해야 한다. 꾸준한 자기 영성관리와 함께 폭넓은 시각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안정된 정서를 누리는 법,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해 낼 수 있는 침착한 행동 등이 무엇인지 배우는 일 등 말이다. 철저히 일의 균형을 가질 만큼의 영성으로만 비로소 사역의 안정감을 얻기 때문이 아닐까. 이는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만 느낄 수 있는, 부활의 생명을 경험한 심령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일 듯하다. 이처럼 선교자로서 삶을 사는 이는 자신이 현지 사람들과 동역자들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어느 정도 온전한 성품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로마서 12:29)

위에서 제기한 본인의 문제적인 경향이 모든 사역의 열심을 제한하는 구실로서 작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수습과정에 놓여 있는 신임선교사로서 현지에 적응하면서 여러 관계를 적절하게 수용하고 감당하여 제대로 방향을 찾았는지 스스로 묻고 있다. 소명이나 훈련됨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사람과 관계 혹은 상황이 문제임을 일부분이나마 감지했을 뿐이다. 사역자들끼리 사역에서 나타나는 시행착오를 나누는 기회는 가끔이라도 있으나, 사역자로서 당하는 정서의 교감 혹은 공감을 객관적으로 나누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실적 위주를 중요시하는 선교지 특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나눔을 장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안식년에서야 비로소 가질 것이 아니라 평소의 잦은 휴식처럼 누려야 할 것이다.

이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경험에 의한 권위를 가진 선배들의 온유한 지혜가 후배 선교사들에게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일면 선교의 자문을 구하기가 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한국인 선교사의 사역 경험이 서양권의 그것에 비해 짧은 것도 한 요인이 아닐까. 선교사들이 사례를 해석할 때에 자신의 지각력이나 경험만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다양한 시각에서 객관적인 분별력을 얻을 수 있고 이에서 오는 오류도 줄일 수 있으리라. 사역이 의외로 개별적인 경험과 그것으로 형성되는 관점에 따라 굴절되어 다르게 이해되고 평가되는 관계의 역학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복합적인 관계 조직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현지라는 이국의 광야, 그 얼음 벌판 위에 있는 선교사들이기 아닌가.

본인은 선교현장의 동역 관계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숨 쉬지 않으면, 하나님의 치리가 있지 않으면 그 안에서 선교사 본인이 넘어지는 것을 이따금 보았다. 이는 선교지에 더 많은 이들을 넘어뜨릴 수 있는 무서운 방해자로서 바로 선교사가 서 있다는 증거다. 더욱이 전문인 선교사 스스로가 소명감이 약하거나 훈련에 의한 안정된 정서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선교지에서 불안한 존재로서 혹은 한 소외인으로서 선교 대상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물론 이는 관계를 이루는 모든 동역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례이다. 전문인 선교사 자신이 정체성의 불균형과 복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안고 있기에 선교를 방해하는 사단의 공범자가 된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사역 과정에서 서로 힘을 실어주지 못할 때, 사역의 성공이라는 것도 인간의 그것으로 전락하지 않던가. 사단의 공략이 동역자들 상호관계 속에서 훼방자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깊은 주의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전문인 선교사는 선교지에서도 잘못 사용되면 하늘의 권세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권세에 붙잡힐 수도 있지 않은가.
이는 신임 전문인선교사로서 경험한 몽골 전문인선교현장의 한 단면이다. 현대선교가 선교사와 후원자, 현지의 동역자가 연합의 형태로서 원만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주목한 결과이다. 다만 전문성이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이를 선교의 접촉점으로 사용되고, 몽골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크므로 환영을 받는다는 편리성이 있는 반면에, 전문성과 복음전도자의 입장을 동시에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고, 오히려 선교사 본인이 복음에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처럼 소외를 겪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각해 본 것이다. 전문인 선교사는 적응초기부터 언어습득과 전문인 역할, 선교적 소명을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정은 건강한 선교 마인드를 확보하거나 선교 효과를 거두는 데에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선교사 자신이 먼저 불안, 초조, 두려움 등으로 인하여 비교됨과 포기, 미래 상실감, 자신감 저하 등을 겪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랜 시간을 함께 마주 대하는 선교 대상자들에게 선교의 표정으로 잘못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을까 하는 점에서 더욱 주의를 요한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복음의 왜곡된 이미지들을 선교대상자들에게 보일 수도 있게 된다. 이는 관계 속에서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영적 싸움터이기도 한 현장에서는 그것마저도 이루기가 쉽지 않다. 모든 것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있기 때문이다. “소명에 충실하라”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 선교현실이 아닌가. 이 문제의 원인은 기대와 현실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전문인 선교사의 기대가 선교의 바쁜 현장, 관계 속에서는 가치를 못 가질 뿐만 아니라 필요 없는 가치이며, 개인의 사소한 기대로 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선교사는 거절된 감정을 느끼면서 투명하지 못한 정서를 겪는다. 여기에는 기대의 수정이 있어야만 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가 유일한 회복의 방법이라고 귀결되고는 한다. 상황은 언제든지 현실의 충분한 데이터로써 성과를 지향하고, 영혼구원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일도 주어진 일을 충족시킨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에 전문인 선교사는 이 문제적인 상황을 건강하게 해소할 수 있도록 스스로 캐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풍토를 극복하도록 도움을 주는 동력자들이 있다면 매우 의로울 일이다. 그 누구보다도 선교 현장에서 전문인 선교사라는 존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에 이룬 구원을 날마다 경험하며,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입고 사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말씀으로 혹은 나눔으로, 상호이해가 전제된 관계로서 이룰 수 있음을 결국 되새겨 본다.

전문인 선교사는 현장의 요구에 따른 사역의 질적 전문성과 파송 이유를 충족시킬 수 있는 선교적 활동을 함께 이루어야 하는 이중 사명을 갖고 있기에 보다 여유 있는 계획과 유연한 관계 속에서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있어야 한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본인의 준비됨은 물론 후원자와 현지 동역자라는 동역의 관계에서 해소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각자 자기의 책임에 얼마나 충실할 것인가가 다음 시기의 과제로 남았다.
“내가 산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여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편 27:13~14)

몽골 울란바타르대학교 이소리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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