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추방당한 선교사의 증언
한국교회의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선교가 이제 10년이 되어간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자 중국정부에 의해 추방당하는 선교사들이 나오고 있다. 추방당한 선교사에 대해 어떤 대책이 필요함에도 이제까지 어떤 조사도 없었다. 점점 추방당하는 선교사들이 늘어가는 추세인데 그대로 둔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주제가 비록 민감한 문제이긴 하지만 한번은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바로 지금이 그 때라고 생각된다. 이 글의 내용에 대하여 공개해도 좋다는 본인들의 동의를 받았음을 밝힌다.
1. 가,선교사의 경우
1991년 6월 김창인 목사가 주도한 (사)북한선교통일훔련원(18명의 전임선교사를 파송하고 1,000불씩 후원했는데 지금은 단 한 명도 없다)에서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어 요녕, 길림, 흑룡강성을 중심으로 조선족 사역을 하면서 압록강, 두만강을 중심한 북한사역에 관심을 갖고 사역을 하였다.
91년부터 94년 8월까지 동북삼성을 순회하면서 변방을 향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그곳에서 움직이는 북한동포들의 움직임과 조선족교회들의 신앙성숙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94년 9월부터 장춘에 거주하면서 조선족교회 사역자 양성을 위하여 장춘신학원을 세웠고 청소년 양육을 위한 청소년반, 어린이 신앙지도를 위한 어린이신학교 교사양성반 등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97년 7월 김일성 사망이후 급격히 증가하는 탈북자들을 섬기게 되었다. 97년부터 추방당한 때까지 2년 여 탈북자 30여명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하여 농장 7만평을 준비하여 같이 일하며 예배드리고 생활하였다.
가선교사는 9년 동안 중국에서 사역하면서 여러 차레 중국 공안국으로부터 조사와 감시를 받으며 사역해 왔다. 특히 99년 3-4월 공안국의 조사를 받았다. 공안국은 선교사가 9년동안 사역을 너무 크게 한다. 너무 오래 되었다. 이제 자제하라. 북한 사역에 대해 낌새를 알고 이제 귀국하라고 하였다. 장춘에서도 싸인을 다 해 주었다. 연길, 흑룡강, 요령성의 지역교회 사역자들을 한 사람씩 불러 가선교사가 어떤 사람인가, 장춘에서 무엇을 하는가 등을 조사하였다.
피하는 것은 도망가는 것이라 생각되어 지혜롭게 빠져나가는 것이 잘 안되었다. 이 때 귀국했다면 5년 정도 후에 다시 중국에 갈 수 있었을 것이고, 재산과 집기들도 압수 당하지 않고, 투옥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하여 어려움이 올 것을 알고도 계속 사역을 하였다. 그는 교회를 돕는 일, 교회사역자를 양육하는 일, 탈북자와 함께 사는 이 등 모두가 중국의 법에 위배되는 불법이며 잘못임을 시인한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고 추방된 근본적인 이유는 종교활동보다도 탈북자와 함께 했다는 죄로 간첩죄가 적용되어 구속되고 추방당하게 된 것이다.
99년 8월 21일 오전 9시 200여명의 무장병력이 들어 닥쳤다. 장춘 센터에 60명 이상의 무장병력이 총을 겨누며 들이 닥쳤고, ㅇㅇ벧엘동산에도 70명 이상의 병력이 총을 들고 포위하며 가족을 체포했고, 친구의 공장에도 30여명, 목용탕에도 30여명의 무장병력이 동시에 들이닥쳐 가족 72명을 수갑을 채워 연행하였다. 가선교사에게는 부모, 아내, 두 아들(12,13세) 등 3대가 동시에 수갑차고 연행되었다.
선교사는 1시간 후 수갑을 차고 권총이 눈앞에 보이며 양옆에 건장한 수사관의 감시 속에 떠나 중국 국가안전부 안가인 호텔에 도착하였다. 그 호텔은 전문적으로 외국인을 조사하는 곳으로 환경이 좋았으며 이곳 독방에서 28일간 조사를 받았다. 28일간 가족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침대, 화장실, 거실이 있는 멋있는 독방에서 4명의 수사관과 국가 안전부 요원들, 6명의 감시원, 공안국 직원들의 감시와 조사가 바로 시작되었다. 90도의 나무의자에서 24시간 지내야 하는 고통이 시작되었고, 10일 이상의 잠을 재우지 아니하는 견이기 힘든 고통을 주었다.
잠이 오는 것 같으면 벽을 바라보고 몇 시간이고 부동자세로 서 있게 하였고, 서 있는 중에도 계속 움직이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다. 28일간 옷을(속옷까지도) 한번도 갈아입지 못하게 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면 수갑을 채우고 머리부터 온 몸에 더러운 이불을 씌워 무릎을 꿇고 몇 시간을 있게 하는 등 가혹행위로 괴롭혔다.
이렇게 가혹행위를 하는 것은 선교사가 종교행위를 한 것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북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정보활동을 한 간첩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정보를 수집하여 한국 안기부에 전달했는가를 계속해서 강요하며 사실대로 토설할 것을 강요했고, 모른다고 할 때 마다 계속해서 육체적인 가혹행위를 하였다. 15일쯤 지나서 집중적으로 북한에 관한 정보 활동에 대하여 물었다.
심문은 주로 밤 11시부터 새벽 6시까지 가장 힘들 때 하였다. 심문할 때 그들은 정확한 자료를 갖고 접근한다. 한 번은 5년 전에 한 일을 갖고 심문하였다. 자신도 기억이 안 나는 일을 그들은 집요하게 심문하였다. 만난 사람, 신체 조건, 나이, 성, 이름 등 이야기하다보면 생각이 나는 식이었다.
25일째가 되어서야 선교사 가족들이 주중 대사관에 신고하여 영사가 면회를 했지만 다른 도움은 전혀 주지 못했다.
선교사는 조사결과 간첩형의로 모든 재산(현찰까지)을 압수 당하였고 시가 한화 3억 이상(친구 재산까지 합하면 10억)의 피해를 보았고 모든 집기를 압수 당하였다. 5일 이내에 중국에서 강제 출국을 당하였고, 15년의 구형으로 15년간 중국에 다시 들어올 수 없는 형을 선고받았고, 가족은 10년 이내에 중국에 들어올 수 없는 형을 받았다. 주변의 조선족교회와 사역자들도 수 없이 고생을 하고 조사를 받았으며 길게는 28일간 옥에 갇힌 형제도 있었다. 그러나 한 달 고생 후 자기 처소로 돌아가 사역을 하고 있다.
탈북자 13명은 모두 강제로 북한에 송환되었다. 북한에 간 사람들은 거의 다 다시 나와서 동역자들이 돌봐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북한에 가서 신앙을 고백한 사람은 모두 중국에 다시 나왔고, 신앙을 버리고 A선교사를 고자질한 두 가족은 지금도 북한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다.
선교사는 이러한 어려움이 올 것을 예측은 했다. 모르고 당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선교사에게는 없었다. 선교사는 배고파하는 자에게 먹을 것을, 추워하는 자에게 옷을, 쉼이 필요한 자에게 집을, 아픈 자에게 약을 주었고 목사로서 성경을 가르치며 예배하게 한 일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가선교사는 자신이 추방당한 핵심 원인은 종교문제보다도 북한에서 지령이 내려온 것 때문이라고 간파하고 있다. 당시 <난민청원운동>와 한국에서 중국에 탈북자 문제로 항의해서 중국정부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시점에 A선교사의 문제가 불거져 <시범케이스>의 타켓이 되었다.
그 당시 개인적으로 탈북자 사역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심하게 한 것이 문제였다. 북한에 들어간 탈북자들이 자백하는 가운데 A선교사 일을 토설하여 북한이 중국정부에 항의해서 중앙정부가 길림성 장춘에 지시를 내리는 등으로 국가안전부가 나서게 된 것이었다. 공안국에서 일을 다루었다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국가안전부로 일이 넘어가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가선교사는 비록 선교지 중국에서 추방당하였지만 후희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중국 공안국이 모르겠지 하는 것은 잘못이다. 91년부터 94년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그들이 다 아는구나 하고 간파하였다. 그래서 장춘에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쌍양에도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로서 엄청나게 움직이며 일 한 것도 사실이다. 아웃리치를 통해 한국교회에서 30팀이 와서 지역교회를 방문하여 전도를 하였고, 한국교회 청년들이 중국선교와 북한선교에 동기부여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사무실을 갖은 것도 사실이다. 5년동안 조선족교회 사역자 100명을 양육하였고, 그들이 바로 서서 사역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청소년들을 양육하고 3년간 공동체 생활을 한 탈북자가 한국에 와 있는 사람도 있다.
중국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중국과 북한을 사랑한다. 러시아에서 북한과 중국 조선족, 곤경에 처한 고려인들을 섬기기를 원한다.
가선교사는 중국선교사들과 한국교회에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였다.
1) 동북삼성 등 한쪽에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길에 선교사가 너무 많다. 언어가 되고, 생활습관이 비슷하고 싸우나 등 편리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연길에 가려 한다. 옛날 장춘에는 선교사가 3명 뿐이었는데 95년부터 선교사가 많이 모여들었다. 그 당시에도 연길에 선교사가 100명 이상 있었다.
동북삼성에 선교사가 너무 많았다. 중국어가 안 되고, 한족을 모르니 조선족에 치중하게 되고 삼자에 치중하게 되었다. 연길, 도문, 용정 교회 등을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건축하여 주었다. 심지어 용정교회는 서울의 어느 교회가 건축설계부터 감리와 완공까지 해 준 경우도 있다. 연길교회의 유두봉 목사는 김성하 목사가 살아 계실 때 만났다. 그 당시만 해도 밥 한끼만 사줘도 감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왠만한 목사가 찾아가면 만나지도 못한다.
동북삼성에 거주하는 선교사가 언어가 안 되면 2-3년만 있고 한족으로 사역의 대상을 전환하라. 쓸데없이 한 지역에 30-40명씩 있을 필요가 없다. 머물렀으면 떠나야 한다. 빨리 어려운 지역으로 퍼져야 한다.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면 어렵더라도 소외된 지역으로 가라. 도시에 살더라도 사역은 어려운 지역으로 가서 하라. 선교사를 필요로하는 지역이 많다.
2) 선교사들이 담대했으면 좋겠다. 거짓말하지 말고 주어진 기회에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담대하게 일하라.
3) 잘못된 한국식 사고방식을 버리라. "내가 해야 한다"는 고집을 버리라.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기 때문에 별 것도 아닌 정보도 나눠주지 않는다. 정보가 돌지 않는다.
4) 조선족을 섬기려면 그들이 조선족, 한족, 북한선교르 하도록 지도하고, 세계선교에 헌신하도록 비전을 심어주어야 한다.
5) 한국 교회와 교계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 파송개념을 한국식 교회상황으로 파송하는 것이 문제다. 내 교회, 내 교단, 내 선교단체 사람이니까 보내서는 안 된다. 중복되는 줄 알면서도 효과적이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어 중국교회는 지역이름으로 교회이름을 삼는데 한국교회 이름을 중국교회 이름에 붙이게 강요한다.
2. 나선교사의 사례
원래 나선교사는 현지인 사역자들을 훈련하며 조용히 사역하려고 하였는데 사모가 "우리 삼자교회에 들어갑시다"고 제안하여 면박을 주었으나 아내의 제언이기에 기도를 하였다. 당시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었고 사역을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어서 사모의 제안대로 삼자교회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선교사 가족이 다니기로 한 삼자교회는 남부지역의 어느 성도에 있는 교회로 삼자회의 성 본부가 있었고 세례교인만 5,000명 정도 되었다.
그 삼자교회를 방문하여 담임목사에게 "나는 한국교회 성도인데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원합니다. 찬양대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하니까 목사는 환영하였다. 그래서 당장 삼자교회에 등록하고 찬양대에 참여하였고, 마침 그 교회에는 고정적인 반주자가 없어서 딸은 반주자로 봉사하게 되었다. 가족이 성가대를 성실하게 하니까 그 교회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삼자교회 목사와 3년간이나 형제같이 지내게 되었다.
나선교사는 학교기숙사에서 살다가 학교당국의 묵인 아래 학교 바깥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는 절대로 믿는 사람들은 전도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갖고 처음부터 불신자 위주로 전도를 하였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어느 시점이 되자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주로 30대 부부와 형제, 자매들을 전도했다. 그들을 중심으로 성경공부와 예배를 드렸는데 불이 붙으니까 가족을 전도하게 되었고,
교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2명에서 50명으로 교인이 늘어나게 되었고 70-80명까지 모이게 되었다. 세례를 받은 신자들도 5,17,5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순수하게 예수를 믿었고, 나선교사의 신앙을 본받아 기탄없이 신앙생활을 하였다. 교인들은 친척과 친구들로 구성되어 있어 결집력이 강하였다.
나선교사가 전도하여 믿게된 사람들은 비록 초신자였지만 삼자교회를 별로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선교사는 한편 삼자교회에 다니면서 다른 한편으로 가정에서 2명의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3년 후 삼자교회의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성가대에도 문제가 생겨 삼자교회에 계속 나가기가 멋적었고, 시작한 가정교회가 부흥되어 설교 준비 등으로 시간도 없어서 삼자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나선교사는 삼자교회에 다닐 때 담임목사의 허락을 얻어 성가대에서부터 성경통독반을 시작하였다. 담임목사는 예배시간에 세 번이나 성경통독반에 대해 좋게 광고르 해 주었다. 그래서 날자를 정해 성경을 읽고 배경을 소개하고 강해를 하였다. 그리고 북경출신의 젊은 부목사가 강해도 하고 신자를 양육하기도 하였다.
나선교사를 따르는 신자들이 교회가 내분이 생겼을 때 삼자교회를 뛰쳐나왔다. 자기들은 가정교회를 하며 선교의 소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담대하게 공원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등 전도에 힘썼다. 그 중의 한 신자가 내 준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 교회는 복건성과 호북성에서 온 가정교회 사역자가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 교회는 주도권쟁탈로 인해 말이 많았다. 교회에서 주도권을 잡는 신앙력 3-4년의 남자 신자 때문에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 하였다.
나선교사는 외국인이 중국인교회를 사역하는 것이 불법임을 알아 꺼림칙하여 합법적으로 종교국의 허락을 받아 집회소를 하라고 교인들에게 제안하자 교인들 대부분이 찬성하고 한, 두명만 반대하였다. 삼자회에서 나눠 준 수첩에서 집회소를 신청하는 절차를 알아보고 한 사람을 삼자회에 보내어 비준을 받으려 하였다. 그래서 양회의 간부인 어느 목사(그 지역신학교의 교수로 금전문제, 여자문제로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회개하여 공산당적 갖고 회계를 보다가 공산당적을 버렸다)에게 물어보니까 "가정교회 있다는 것을 양회에 알리고 6개월 정도 지나면 묵인하게 된다.
집회소가 있다면 중국 성도의 이름으로 집회소를 열고 다른 삼자교회 목사를 통해 구두신고하라. 신고하면 가정교회를 구역으로 인정하는 정책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서면으로 법에 따라 6가지 조항을 지킬 것을 싸인하고 양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군대 주둔 지하 벙커를 저렴하게 임대하여 목회를 하였다. 그런데 정치사상교육위원회에서 교회가 군대에 들어와 있고 군인도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지장이 크다고 하여 이사하기를 요구하여 2층으로 이전하였다. 교회는 중국 성도들의 헌금으로 세웠는데 2만원 가까이 쓰고도 24,000원 남았다. 삼자교회 5,000명의 세례교인이 한 달 헌금이 10,000 원이 안 되는 상황에서 대단한 헌신이었다. 신자들은 500-600원 월급을 받으면서 2,000원 헌금한 사람도 있고, 만원 헌금한 이도 있다.
나선교사는 교인들에게 "당신들이 헌금해서 교회를 세우라"고 도전하였고, 중국 신자들이 철저히 각성하고 헌신하였다. 교회의 경리장부를 철저하고 투명하게 관리하여 나중에 공안원들도 경악해 마지 않았다. 나선교사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며 성경을 가르쳤다. 다른 교회와 집회소에서 오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나선교사가 선교사인줄 모르게 철저히 중국식으로 하였다.
선교대회에 참석 차 귀국하여 전화를 해 보니 교회가 비준을 받지 못하였다. 교회를 임대할 때 교회를 할 것임을 주인에게 알리고 빌렸다. 주인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괜찮다고 하였다. 건물 주인이 공안국에 보고하였는데 비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공안국에서 종교국에 문의하니 비준을 내준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공안국에서 집주인에게 빨리 내 보내라고 하여 교회를 철수하였다.
그래서 옛날처럼 구역별로 순회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당시 월드 비젼에서 7명이 비젼트립을 와서 선교사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준비해 온 것을 공연하고 묘족촌에 보내주려고 하였는데 그 날밤 공안원 30명이 급습하였다. 밀고자가 있었다. 삼자에서 나온 교인 중에서 가장 신임하던 신자로 그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나선교사가 고발당한 것은 삼자교회 내분과도 관계가 있었다. 삼자교회가 내분을 겪는 원인은 예배당을 헐고 3년간 예배당을 건축하지 못하였다. 10억 정도가 필요한데 시와 성정부의 보조를 받아 80% 정도의 건축비를 확보하고도 건축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나선교사를 도와준 신학교수가 그 교회 건축위원이고, 그 교수가 나선교사의 교회를 도와준 것을 알고 고발한 것이었다.
전 교인이 공안국에 잡혀가 범죄인 사진을 찍었으나 벌금을 물지 않고 나왔다. 나선교사는 몇일간 심문을 받았고, 연도별로 행적을 조사하였으며 조사결과가 나오기까지 2개월 반이 소요되었다. 8시간 철야 심문을 하였다. 처음엔 공갈, 협박을 하였으나 공안원을 상대로 설교만 했다. 설교만 하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답변하니 공안원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사모는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나선교사만 5년형을 언도 받고 추방당하였다. 성종교부국장은 나선교사가 중국교회와 한국교회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를 원하여 추방하고 싶지 않지만 중앙에 까지 알려져서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불행 중에도 주님의 은혜로 전 교인들이 벌금을 물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 광동성과 안휘성 사건의 경우 신자 1인당 인민폐 3,000원, 선교사는 몇십만원의 벌금을 물은 것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추방당 한 후 중국통인 친구를통해 불랙리스트를 지우려 하였으나 최고위층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최고위층 인사는 "이 사람은 강택민이 와도 안 된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5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대안 사역을 모색하고 있다.
나선교사는 자신이 추방된 원인을 공안국의 실체와 중국의 사상과 종교정책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찾았다. 선교현지에 가보니 선교사들이 보안문제 때문에 사역이 위축되어 있었다. 조심할 것은 최대한 조심하지만 불안과 공포 때문에 사역에 지장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고, 선교사들을 만나도 그렇게 권면하였다. 그리고 담대하게 사역하다 추방당하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초신자들이라서 종교법을 몰라 가정교회를 비준해 줄 것으로 안 것이 탈이었다.
삼자교회에 3년 다니다 보니까 경계의식이 적었던 것 같다. 삼자교회 목사는 가정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다. 북경출신의 40대 부목사는 지하교회 교인들과 교통하였지만 후에 주동적으로 가정교회를 공안국에 고발하였다.
비둘기 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하였는데 그렇지를 못하였다. 열심히 지나쳐서 지식과 지혜를 간과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목사의 입장에서만 중국을 보면 안 된다. 공산당의 실체를 바로 보아야 한다. 선교사의 입장이 아닌 중국인의 입장에서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3. 다선교사의 사례
다선교사는 일찍이 해외에서 사업에 종사하다 소명을 받고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파송받았다. 중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중국어를 거의 한 마디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90년대 초였던 당시에는 중국에 한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선교사님은 처음부터 주님을 의지하였고 1개월간의 첫 방문에서 주님의 기적적인 인도하심으로 비자와 거류증문제를 해결하였다.
다선교사의 사역은 주로 조선족 사역자들을 양육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다 선교사의 사역으로 양육을 받은 조선족 사역자들만도 700-8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들이 동북삼성의 조선족교회들에서 이모저모로 섬기고 있다. 그래서 다선교사는 소신껏 사역을 하였기 때문에 비록 추방을 당하였지만 후회는 없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에 최대한 노력하였다. 잘돼도, 잘못돼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선교사는 다만 하나님께 쓰임받는 도구일 뿐이다.
다선교사는 자기 인생에 대해 전반부는 "내 마음대로 산 인생"이었고, 후반부는 "주님의 인생"으로 살았다. 목사로 안수를 받으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되 크게 드리기를 소원하였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가장하기 힘든 사역을 택하였다. 그래서 추방당한 지금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환경이 허락하는 한 사역을 할 것이다. 다선교사는 비록 중국에서 추방당하였지만 사역을 원하는 대로 크게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하던 사역이 유지되고 있음을 감사드린다.
다선교사는 세 번에 걸쳐 추방을 당하였다. 다선교사가 여러 해 같은 장소에 거주하면서 큰 규모로 사역을 하였음에도 그동안은 무사하였다. 다선교사는 20-30명 정도의 학생들로 구성된 학습반을 10개 정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선교사라는 것은 그 지방공안국이나 종교국이 알고 있었고, 그가 사역하는 것도 알만한 당국자들은 알고 있었다. 추방당했으면 벌써 당하였지 왜 그제야 추방을 당하게 되었을까?
1) 한국인 선교사들이 다선교사에 대한 정보를 공안국에 흘려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선교사가 공안국에 체포되어 갔을 때 줏대가 없으면 빨리 회유에 빨려 들어간다. 정보를 흘려 준 선교사는 다선교사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다선교사와 가까우면 되는 줄 알고 너무나 정확하게 불어버렸다. 동료 선교사가 잡히기 2개월 전에 정확하게 불었다. 이는 그 선교사가 현실에 대한 상황판단부족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간주한다.
한국인 이단들의 참소도 일조를 하였다. 다선교사는 30개 조선족 교회에서 한국인 이단의 검은 마수를 물리쳤다. 그래서 조선족 사역을 하는 한국인 이단들은 다선교사를 아주 미워한다. 그래서 그들이 붙잡혔을 때 "왜 나만 체포하느냐? 다선교사도 사역을 하는데 왜 그는 내버려두느냐?"고 항의를 한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여러번 그러니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2) 지방정부의 권력교체 때문이었다. 중국지방정부에서는 책임자가 갈리면 그 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갈린다. 그래서 종교국장이 갈리면 양회간부도 갈린다. oo시 종교국 간부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교회들도 보여주는 등 자유롭게 보고 느끼게 하였다. 그들이 귀국하여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었다. 그래서 그들과 친밀 관계가 돈독하여졌다. 그런데 그들이 물러가고 다른 사람이 종교국장에 부임하였다. 아마도 그래서 그 안에 알력이 있었고, 권력교체에 따른 제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3) 잘 아는 조선족 가운데 한 사람이 고발하였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발전하여 추방당하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보안관리에 대한 시행착오가 가져온 결과라고 본다. 다선교사는 나름대로 보안관리를 하였다. 그가 다녔던 삼자교회 교인들도 그의 집을 알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어딘가에 허점이 있었던 것 같다.
추방당한 후 다시 중국에 갔다. 그때는 일부러 자신을 노출하여 지방정부당국과 협상을 하였다. 그 지방 시장과 종교국이 나서서 공안국과 다선교사를 화해시키려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렇게 협상이 안 되어 추방당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 추방은 원인도 모른다. 역에 내렸을 때 공안국에서 차에 태워 갔다가 집까지 태워다 주어서 되돌아 왔다. 네 번째는 한국에서도, 홍콩에서도 비자를 내주지 않아서 중국에 가지 못하였다. 당분간 들어가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다선교사는 귀국 후에 조선족 모임을 갖다가 장소가 마련되어 oo시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다선교사가 가르친 조선족 사역자들 중에 다수가 방한하여 개척한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중국선교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선교회를 만들어 현지 사역이 지속되고 확장되도록 후원하고 있다. 물질적인 후원뿐만 아니라 교육과 지도까지도 여러모로 시행하고 있다. 한국교회를 통해서 선교사 돕는 일을 계속하려고 한다.
다선교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북한선교를 하는 소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북한선교사 100명을 파송하는 것이 비전이다. 그가 공부시키고 훈련한 조선족 사역자들을 하나님이 쓰시리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이 북한 땅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가정교회를 세우려 하신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역사하실 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변방이 아닌 내륙 깊은 곳에 가서 사역하게 하려고 한다. 아직 시원하게 길이 열리지 않고 있지만 기다릴 것이다.
다선교사는 내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자기 사역을 기록하여 이름을 남기려하지 않았고, 씨앗을 뿌려 열매를 맺는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그는 보안문제에 대해 조심해야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어 사역을 하지 못한다면 선교사로서 중국에 거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위선일 수 있다.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고 하면서 위험을 피한다면 사역은 언제 할 것인가? 자기 안전을 위해 뱀같이 지혜로워지지 말고 사역을 하는데 뱀같이 지혜로워져야 할 것이다.
선교를 잘 하려면 선교의 의미와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복음으로 영혼 구원하는 것이 선교의 핵이다. 선교사의 동기가 분명해야 한다. 선교사에게 헌신의 의미가 정확해야 한다. 선교사가 많지만 선교동기가 확실한 사람은 많지 않다. 선교의 목표가 분명하고 선교의 전략이 확실해야 한다. 선교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으면 선교의 목표가 분명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분명한 선교의 푯대가 있어야 한다. 말슴으로 사역하는 것이 선교의 목표여야 한다. 구제는 필요하나 그 자체가 선교의 목표는 아니다. 구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다선교사가 조선족 사역자들을 교육할 때 교회 건축해 주지 않고, 공부하러 오가는 교통비, 볼팬 하나도 안 주었더니 좋은 것을 바라는 자나 돈을 바라는 자는 다 도태되었다. 앞으로 북한선교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갖고 선교하는 것이 중국선교에서 가장 큰 문제이다. 선교지인들의 마음 밭을 오염시키면 때가 되었을 때, 기회가 올 때 사역을 하지 못한다. 한국에 IMF가 다시 와야 그런 짓을 못한다. 현재 한국교회가 중국변방에서 하는 북한선교는 드라마틱하다. 한국교인들의 감정에 호소해야 돈이 나온다. 북한선교에서 물질사역을 선의로 잘하면 좋으나 오염, 변질시키면 겉잡을 수 없다.
물질과 말씀사역을 접목하는 것은 중국 현실에 비추어보면 위험률이 높다. 한국교회의 자원은 한계가 있다. 성도들이 진심으로 낸 헌금이 오용, 남용되는 것은 목사의 책임이다. 선교의 이름으로 헌금이 함부로 쓰여지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교회 목사들이 선교여행하면서 갖고 온 선교비를 쓸데가 없어 애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목사들이 가져온 선교비를 구제에 다 쓴다면 잘못이다.
예수님은 쌀 한 톨 가져다 주지 않으셨다. 여름에는 한국목사들과 교인들이 하루에도 200-300명이 와서 길에다 돈을 뿌리고 갖다 주는 돈도 엄청나다. 다 돈 자랑하는 것이다. 중국 수준에 맞는 교회를 건축해야 한다. 무조건 예배당을 건축해 주면 분쟁만 생긴다. 조선족교회가 초가집에서 예배드렸을 때 더 은혜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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