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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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읽기] 함태경
국민일보 종교부 기자 
북경대학교 정치학 박사 
차이나네트워크연구소(CNI) 실행이사
[2006.07.19] 
 
▣오프닝
현재 중국정부는 삼자교회에 대해 ‘지도와 감독’, 가정교회에 대해 ‘단속과 탄압’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국 기독교는 지역별로 현지 상황과 정부의 세부정책에 따라 삼자교회와 가정교회가 공존하는 곳, 서로 경원하는 곳,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곳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하나의 잣대로 중국교회를 진단할 때 혼선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본론
삼자교회는 중국정부의 통일전선에 의해 당의 일원화된 지도를 받는 전국적인 형태로 세워졌습니다. 이를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1949년 가을 베이징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개최됐는데 이 때 종교계인사 8명, 기독교 5명, 불교 2명, 이슬람교 1명이 참여해 종교정책에 관해 토론을 벌였습니다. 회의 결과로 나온 공동강령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이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종교 내면에 숨겨진 부패와 악습, 그리고 제국주의 요소를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공산당과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저우 총리와 좌담회를 마치고 상하이로 돌아온 중국기독교 대표단은 여덟 차례에 걸친 수정 끝에 40여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서명을 받아 ‘신중국 건설에 있어서 중국 기독교의 노력의 길’이라는 문건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침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중국 교회 및 단체는 반드시 최대한의 노력과 유효한 방법을 통해 신도들에게 제국주의의 죄악상을 알리고 제국주의와 그들의 음모를 경계시켜야 한다. 동시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정부의 토지개혁정책을 철저히 숙지하도록 교육한다.

둘째, 중국 교회와 단체는 반드시 유효한 방법으로 일반 신도들에게 애국민주정신과 자존의 심리를 배양시켜준다. 중국기독교가 제창한 삼자애국운동의 원리를 성취해야 한다.

국가는 공식적으로 종교자유를 인정하고 종교집단을 제도권 안에 공인해주면서 교회로 하여금 중국 공산당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적극 선전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서 활동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중국기독교는 한국전쟁기간에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지원하는 것)의 지지활동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1950년 12월 미국의 경제지원을 받는 문화교육 구제 기관과 종교단체에 대한 처리방법을 밝히고 미국과 관계를 끊는 한편 중국과 외국인 선교사의 여행 및 선교문제에 대한 지시를 발표했습니다. 모든 외국인 선교사의 중국내 여행과 선교가 불허됐으며 공산당은 1951년 3월 ‘종교혁신운동의 적극적 추진에 대한 지침’을 공포하고 기독교와 가톨릭의 자립혁신운동은 하나의 중요한 정치의식을 가진 군중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기독교 인사들은 1951년 4월 베이징에서 정무원 종교사무처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기관을 처리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이 회의에 전국 기독교 종파와 기독교 단체에 속한 대표가 참석했는데 이때 기독교 인사들은 삼자선언의 임무와 기본방침을 재확인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애국정신을 재확인했습니다. 아울러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이용해 중국을 침략하려는 음모에 대해 공소대회를 열기로 결의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국기독교협진회는 천인공소대회와 만인공소대회를 가졌습니다. 공소대회는 1952년 전국에서 169차례나 열렸고 이어 1952년 화동지역의 신학원을 합병, 딩광쉰 주교를 원장으로 하는 남경금릉협화신학원이 설립됐습니다. 이듬해 4월엔 화북지역의 7개 신학원을 통해 연경협화신학원을 설립했고 그 후 중국기독교항미원조삼자혁신운동준비위원회가 베이징에서 중국기독교전국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우야오종은 중국교회의 7대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294명의 대표들은 ‘전국동포에게 고함’을 채택하고 삼자혁신운동이란 이름을 삼자애국운동으로 바꾸고 중국기독교삼자애국 운동으로 확정했습니다. 이 정신에 따라 13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중국기독교삼자 애국운동위원회(삼자회)가 설립됐습니다.

1922년 각 교파와 기독교 기구대표들로 설립된 중화기독교협진회가 삼자회로 인해 전국 교회를 연결하던 기능을 상실해 1955년 문을 닫게 됐습니다. 삼자교회는 그러나 1958년부터 전개된 인민공사운동, 대약진운동 실패와 당권을 둘러싼 중국 공산당내 권력투쟁 등으로 인해 정부의 강력한 관리와 통제를 받았습니다. 1961년에는 교회 주일학교가 금지됐는데 제국주의 사상으로 아동을 해치고 문화의 침략 도구가 된다는 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각 부서활동도 폐지됐습니다. 교역자와 교인의 노인개조와 정치학습 등으로 정상적인 종교활동이 점차 어렵게 됐습니다. 특히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삼자애국운동에 동참한 삼자교회 소속 목회자들조차 6개월간 정치학급을 받았고 자신들이 착취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자인하며 공장 농장 등에서 노동개조를 받아야 했습니다. 교회당은 파괴되고 성경은 불태워졌습니다. 그러던 중 개혁개방정책이 시행되면서 삼자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85년 ‘애덕기금회’를 설립하면서 해외교류를 통해 신학교 확충, 신학서적 보급, 교회지도자 양성 등 삼자교회의 긍정적인 면을 대외에 천명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교회에서도 리더십 교체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습니다. 중국정부가 공인한 기독교인민단체인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삼자회)’와 ‘중국기독교협회(기협)’는 2002년 베이징에서 제7차 중국기독교전국회의를 갖고 지젠홍 장로(70)를 삼자회 주석에, 차오성제 목사(71)를 기협 회장에 임명하는 등 대폭적인 인사 개편에 나섰습니다. 이 대회는 특히 중국교회가 전체적으로 젊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참석자들의 평균연령은 49.6세로 지난 대회에 비해 3세가 낮아졌고 여성의 참여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체 참석자의 230%가량이 여성이었으며 이는 지난 대회에 비해 1.1%가 늘어난 것입니다. 앞으로 목회자의 연령은 더욱 젊어질 것입니다. 노목회자들의 은퇴는 가시화되고 40∼50대 소장파로 세대교체가 되고 있습니다. 베이징지역 교회의 주임목사는 60대 이하로 모두 바뀌었습니다. 물론 잡음 또한 있습니다. 즉, 중국기독교협회와 성급 기독교협회가 지방화를 추진하면서 인사·교회운영 등을 둘러싼 중앙과 지방의 갈등, 지방 삼자교회 지도자들의 개인주의 배금주의 대두 등이 불거져 나오고 있습니다.


▣클로징
삼자교회는 계속해서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일 것입니다. 중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삼자교회성도는 1600만명이고 현재 일시에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교회가 등장할 정도입니다. 5000여명이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는 곳은 지난해 5월 새롭게 건축된 저장성 항저우시 기독교 충이탕(崇一堂)으로 삼자교회(정부공인교회) 가운데 최대 규모입니다.
충이탕은 원래 1866년 항저우시 칭타이가에 처음 세워졌지만 1958년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 등으로 인해 주변 토지와 교회당이 병원 및 일반 민가로 사용됐었습니다.
무조건 삼자교회는 관변교회라면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내부자적인 관점을 갖고 삼자교회가 형성 발전하게 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는 한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삼자교회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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