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레이스키. 가만히 그 이름을 되뇌어본다.
러시아를 비롯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 까레이스키. 고려족, 또는 고려사람이란 뜻이다.
‘까레이스키’라는 이름 아래 서울에서 뜻 깊은 전시가 열린다.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벌판으로 강제이주됐던 고려인 화가의 그림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유럽인들 사이에 ‘아시아의 피카소’라 불렸던 고 신순남(1928-2006ㆍ신니콜라이)화백을 비롯,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화가 7명의 작품 120점이 서울에 왔다.
한국사립미술관협회(공동대표 노준의,이명옥)는 문화관광부 지원 아래 7월3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에서 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70주년을 기념하는 ‘까레이스키’전(展)을 연다.
연해주 일대에 살던 고려인들은 1937년 러시아 정부의 갑작스런 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으로 내쫓겨졌다. 낯선 불모의 땅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같은 노력은 예술에도 오롯이 스며들었다.
고려인의 애환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고 신순남 화백의 대작들이 나온다. 8살 때 강제이주를 겪은 그는 타계 직전까지 입체파와 초현실주의를 접목시키며 고려인의 유민사를 그렸다. 신화백의 대작 ‘진혼제, 소리없는 절규, 페스트’(가로 12m,1990년)는 장엄한 구도로 고려인 강제이주를 증언한 대표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또 최초로 공개되는 ‘승리’는 가로 22m의 화면에 유민의 고통과 새로운 희망을 파노라마처럼 장대하게 펼쳐보인 역작이다. 신화백과 동시대 작가인 안일(78ㆍ안블라디미르)화백은 독립운동가와 성공한 고려인들의 모습을 초상화 속에 담아냈다.
한편 신순남 화백의 큰 며느리인 신이스크라와 손녀 신스베틀라나는 환상적인 꽃그림을, 동명이인 화가인 2명의 김블라디미르, 박니콜라이는 추상적이면서도 장식적인 회화를 선보인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방송PD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상물과 한인 이민의 역사를 담은 사진 50여점도 함께 전시된다. 7월5일에는 한국외국어대 임영상 교수 등의 주도 아래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세미나도 개최된다.
임영상 교수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이 구소련에서 독립한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선조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며 “작품을 통해서나마 그들의 애환이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7월19일까지. 무료관람. 02-735-4032
▶까레이스키는?=러시아어(語)로 고려족 또는 고려사람을 가리킨다. 러시아 외에 우크라이나ㆍ벨로루시ㆍ몰도바ㆍ카자흐스탄ㆍ우즈베키스탄ㆍ투르크메니스탄ㆍ 키르기즈스탄ㆍ아르메니아ㆍ아제르바이잔ㆍ그루지야 등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철종 14년). 불과 13세대의 농민이 한겨울밤에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하며 이주사는 시작된다. 이어 1865년(고종 2년)에 60가구, 그 다음해에 100여 가구 등으로 늘어나 1869년에는 4500여명의 한인이 이주했다. 이후에도 이주는 계속됐고,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이민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연해주지역 한인들은 유대인ㆍ체첸인 등 소수민족들과 함께 가혹한 분리ㆍ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내팽개졌는데,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5000여명이었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황무지를 개척하고 한인집단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 소수민족 중 가장 잘 사는 민족으로 뿌리내렸다.
그러다 1992년 1월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외에 11개 독립국가로 분리되면서 또다시 배타적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돼 고려인들은 직장에서 추방당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다시 연해지방으로 모여들었다. 현재 연해지방 거주 한인들을 중심으로 자치회가 형성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에 사는 고려인은 총 46만여명. 국가별로는 러시아에 10만여명, 우즈베키스탄에 22만명, 키르키즈스탄에 2만명 등이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헤럴드경제 2007년6월 29일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7/06/29/200706290021.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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