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
그의 직함에는 이 말 외에도 ‘탈북‘이라는 말이 덧붙는다.
탈북 피아니스트라는 이력을 가진 그는 피아노가 좋아,
피아노를 자유롭게 치기위해 목숨을 건 탈북을 결심했다.
그는 피아노를 위해 탈북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피아노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는다. 이제 그 목숨과도 같은
피아노를 하나님을 위해 연주하기 때문이다.
피아노 연주가 목적이 아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삶의 이유가 된 김철웅 교수. 촉망받는 북한 피아니스트에서
탈북까지 영화 같은 스토리와 그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북한의 촉망받는 음악가로...
북한에서 클래식 음악가가 되는 일은 말 그대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 만큼 힘든 일이다. 음악적 재능은
물론이고 출신성분까지 좋아야 한다.
당 간부의 아들로 8살 때, 북한 전역에서 단 두 명을 뽑는
예비 피아니스트 자격에 합격한 그는 이 후 초등학교부터
철저히 전문교육을 하는 영재교육기관인 평양 음악무용대학에서
14년간 피아노를 전공한 수재였다.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보통 6천여명이 응시하는데 이중 9명이 선발될 뿐이었다.
이런 교육을 거쳐 정부의 배려로 외국 유학까지 다녀온
북한의 대표적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 김철웅 교수다.
하지만 그는 이런 피아노 영재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 또한
그치지 않았다. 하루에 3시간 이상 잠을 잔 기억이 없을 만큼
피아노에 열중했으며, 연습만으로도 하루 12시간을 족히 넘겼을
정도였다. 또한 차이코프스키 콩쿨대회에서 74년에 정명훈 씨가
2등으로 입상을 한 이후 20년간 아시아에서는 입상자가 나오지
않던 가운데 김철웅 교수가 95년 이 대회에 참가해 4등으로
입상할 만큼 실력을 갖춘 북한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자유를 찾아 탈북을 결심
이렇듯 촉망받던 그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러시아 유학시절이었다.
북한에서는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
유학시절 체제 찬양과 완전 별개인 진정한 클래식을 접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음악가들은 음악에 죽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러시아 유학시절 카페에 갔다가 흘러나오는 리차드 클라이드만의
가을의 속삭임이란 곡을 듣고 세상에 피아노로 이런 음악을 연주할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그동안의 음악생활에 큰 혼란을 느껴 탈북을
결심했습니다“고 고백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목숨을 건 탈북을
결심하게 만들었고, 그는 2002년 9월 15일 탈북 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을 만나다
중국으로 탈북을 하게 된 그는 목재소에서 통나무를 지고,
머슴 일까지 하며 숨어지내는등 그동안의 생활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음악과는 전혀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탈북을 하기전까지
그는 자신이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과
피아노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쌓여 있으면서
그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난 다음부터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더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매일 중국 공안과 북한의 눈을 피하기에 바빴다.
매일 같이 힘겨운 노동을 하며 지내던 그는 북한에서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 겨우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었던 극동방송의 찬양을
흥얼거리며 힘든 노동을 이겨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가
예수님을 믿기 전이었고, 교회라는 곳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때였다.
그저 찬송가 음이 좋아 그냥 따라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진정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계기가 생겼다. 탈북을 하기는 했지만 그가
진정한 음악을 하기 위해 탈북을 결심한 것과는 달리 그가 놓인 현실은
음악도 피아노도 전혀 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선교단체를 알게 되었고, 김 교수는 그곳에 피아노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김 교수의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지금 한국에 서 있기까지 그는 생사의 길목에 서는 일을 수없이 겪어야 했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하나님을 영접하게 됐지만 자신이 자만하였을 때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 이송 되는등 죽을 고비를 겪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 아버지 후배 수사관을 만나 풀려나는등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똑똑히 보고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연주와 간증 통해 하나님 전해
음악을 통해 자유를 찾았지만 이제 그는 음악으로 자유를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현재까지 전국 132개의 교회를 다니며 피아노 연주와 함께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간증하며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선율과
그의 간증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극동방송의 홍보대사로 지난 1월 위촉돼 더욱더 하나님을
전하기에 열심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높이신 것을 믿고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하나님을 전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연주하겠다“고
고백했다.
현실에 부딪혀 힘들어하는 탈북자들에게...
많은 탈북자들이 남북한의 격차로 인해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를 힘들어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하지만 김철웅 교수는 지난 2003년 4월 한국에 들어와
서울대 음악대학원에 진학하는등 적극적으로 사회에 부딪혔기 때문에
오히려 적응이 빨랐다. 그리고 현재는 한세대 교수로 후진들을 양성하며
피아니스르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탈북자라는 꼬리표가 항상 그를
따라다녀 처음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자신부터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 당당히 자신이 탈북자인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소원하던 피아노와 하나님을 마음껏
만나며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현실에 부딪혀 힘들어하는 탈북자들에게
김 교수는 “누군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것이 가장 빠른 적응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그의 소망...
이제 한국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통일이 되면 남북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통일 한국의 음악방향을 잡아나가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껏 체험한 하나님을 전하며,
자신의 연주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그는 어쩌면 아주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탈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분단이라는 현 시점에서 나눠진 우리에게 복음이 담긴
음악을 전해줌으로써 그 벌어진 틈 사이를 매꿔 줄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세상에 보내실 때 각 사람마다 특별한 사명을 주셨다고 하셨다.
김철웅 교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계획하고 계시고, 이루어 가실지...
곧 이루어주실 통일된 조국에서의 그의 활약이 궁금해진다.
<손진화 기자>
오직 피아노 때문에 탈북을 결심한 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
북한에서 당 간부로 일했던 아버지와 대학교수인 어머니 밑에서
풍족하게 자란 그는 8살의 나이로 출신성분, 부모 직위 등을 합쳐
상위계급 1% 내에 들어야 입학가능한 평양음악무용대에 3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다. 그 후 1995년 러시아로 4년간 유학을 가게 된 그는
클래식 재즈 피아니스트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곡을 들으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에 전율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재즈라는 음악이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죽기 살기로 연주해 보고 안 되면 탈북이다!’.
1999년 평양 국립교향악단의 단원으로 러시아에서 외운 클레이더만의 곡을
연주하던 그는 결국 상부의 검열에 걸려 시말서를 10번이나 썼다.
당시 북한에서는 클래식 음악의 경우 1899년까지 작품만 연주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20년 이상 음악을 해 오면서 하고 싶은 음악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던 그는 결국 음악의 자유를 위해 2001년 중국으로 탈북하게 되었다.
탈북 후 피아노를 칠 수 없었던 그는 교회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어느 탈북자의 말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피아노로 연주하며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한국으로 오던 중 중국에서 붙잡혀 14시간 동안 매를 맞은 그는 북송되는
기차 안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한 후 탈출에 성공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전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다.
1년 만에 한국으로 오게 되면서 북한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현재 한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으며 좀 더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오는 3월부터
극동문제연구소 북한대학원에서 북한문화예술 수업도 듣는 김철웅 교수.
지금부터 그의 삶과 신앙 속으로 들어가보자.
김철웅 형제의 간증은 2월 3일 금요일 밤 9시, 2월 6일 월요일 낮 1시에 방송된다.
재즈에 미쳐 사선(死線)을 넘다
영재교육 받은 북한 상류층 출신... 러시아 유학서 재즈음악 접한 후 탈북 결심
|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달랐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피아노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도 몰랐다. 흑룡강성의 벌목장에 가서 두께 2m, 길이 18m 되는 나무들을 운반했다. 빵 두 조각과 죽 한 그릇만 먹고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했다. 피아노만 쳐봤던 곱디고운 손은 막노동하는 사람의 투박한 손으로 바뀌었다.
‘무엇이 아쉬워 이런 고난의 길에 들어선 걸까’ ‘부모님은 어떻게 됐을까’…. 마음만 춥고 시린 게 아니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은 고드름으로 변할 만큼 추웠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연주하고 싶었던 음악들을 떠올리면 그렇게 죽을 순 없었다.
|
점점 더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자유롭게 음악을 하려면 한국으로 가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두 번이나 중국 공안에게 붙잡혔다. 한번은 기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쳤고, 북한으로 호송됐을 땐 감옥에서 지인을 만난 덕에 풀려나 다시 도망칠 수 있었다. 기적 같은 일들이었다. 2003년 봄 결국 그는 한국으로 왔다.
지난 1월 4일 오후 서울여대 대강당에서 만난 김철웅씨는 옷차림이나 말투가 여느 탈북자와 좀 달랐다. 180㎝가 넘는다는 훤칠한 키에 옷차림도 꽤 신경쓴 듯했다.
그는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자마자 프랑스 팝피아니스트인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했다. 러시아 유학 시절, 그에게 재즈 음악의 충격을 안겨줬고 결국 탈북의 결심까지 하게 한 곡이었다. 그가 편곡했다는 ‘아리랑’을 듣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사뭇 진지해졌다.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추듯 뛰어다녔다. 시작할 땐 클래식풍이더니 곡 중간엔 민요풍으로 바뀌었다. 조금 후엔 엉덩이까지 들썩거릴 정도로 온 힘을 다해 쾅쾅 피아노를 쳤다.
“북한에선 아이들이 줄넘기할 때 정겹게 ‘아리랑’을 불러요. 남한 노래방에서 젊은이가 이 노래를 부르면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걸요? 유럽에서도 ‘아리랑’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우리 음악을 지켜야죠.”
김씨는 “정치도 경제도 할 수 없는 일을 음악은 할 수 있다”며 “동족간에 싸움없이 손 잡고 이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했다.
김씨는 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대학교수였던 어머니 밑에서 풍족하게 살았다. 8세 때부터 평양 음악무용대에서 음악 영재교육을 받았다. 우리나라 초·중·고에 해당하는 과정을 이 대학의 인민반, 예비반, 전문반에서 마쳤다. “1980년대 초 북한에서 예술인이 갑자기 대우를 받기 시작했거든요. 아들을 잘 키우려는 부모님 욕심 때문에 음악을 시작하게 된 거죠.”(웃음)
김씨는 3000 대 1의 경쟁을 뚫고 평양 음악무용대학의 피아노 부문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95년엔 러시아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으로 유학갔다. 여기서 그의 인생이 뒤바뀌었다.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곡을 들었는데 충격 그 자체였어요. 몸에 전율이 쫘악 흐르더군요. 이런 음악도 있었구나 싶데요.”
알고 싶은 음악, 해보고 싶은 음악에 대한 욕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북한에선 클래식곡 중에서도 20세기 현대음악은 사상이 자유스럽다는 이유로 금지돼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자즈’라고 발음한다는 재즈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사악한 음악’으로 금지돼 있다. “북한에선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주의 때문에 안되고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미국에 망명한 사람의 곡이라 연주할 수 없어요.”
재즈는 음악에 대한 그의 욕구만 건드린 게 아니었다. 김씨가 살아온 30년 안되는 삶 자체를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내가 아는 것, 내가 누려온 것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됐어요. ‘난 그동안 기계나 다름없는 연주가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사실 그때까지 김씨는 무엇에 대해 절실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평양시민의 1%만 갈 수 있다는 고려호텔 지하식당에 가서 왕제산 경음악단의 기쁨조 공연도 허구한날 즐기며 지냈고 ‘창광원’이라는 고급 수영장 겸 사우나도 외국인에게만 개방한다는 주말에만 갔었다. 주머니 속엔 늘 달러가 잔뜩 있었다. “잘나가는 친구들과 최진희, 주현미의 트로트와 이용의 ‘잊혀진 계절’ 같은 한국 곡이 담긴 테이프를 얻어서 들었죠. 참, 제가 처음 본 한국 영화가 ‘무릎과 무릎 사이’였는데….”(웃음) 김씨에게 “혹시 북한의 오렌지족 아니었느냐”고 농을 했더니 웃으면서 “네, 조금이요”라며 답했다.
김씨는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1999년 북한으로 돌아와 평양 국립교향악단의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하루는 연습실에서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곡을 연주했다. 한데 보위부 지도원에게 발각돼 시말서를 10장이나 써야 했다. “예전엔 김일성 어록을 읽고 자아비판을 하는 것들이 모두 자연스러웠어요. 그런데 러시아 유학을 마친 뒤에 그런 걸 못 참겠더라고요. 여기는 있을 곳이 못되는구나 싶었죠.”
라이브 카페 연주자에서 대학 교수로
그러다가 결국 2년 뒤 탈북한 것이다. 2003년 봄 한국에 온 뒤로 그는 서울 화곡동의 라이브 카페에서 밤새워 연주했고 일원동의 피아노 학원에서 강사로도 일해봤다. 탈북자 중심으로 모인 ‘평양 예술단’을 만들어 전국의 구청과 시청을 다니며 공연하기도 했다.
요즘 그는 서울여대, 이화여대, 명지대, 숙명여대, 포항공대 등 대학교 채플 강의에 초청돼 ‘아리랑’을 연주하고 자신의 경험담을 전한다. 2004년 9월부턴 한세대에서 음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제가 원래 자유분방한 사람이에요. 누굴 잘 믿지도 않고 종교도 없었고요. 한데 피아노나 음악에 관해서라면 달라져요. 교회는 피아노 치려고 탈북한 제게 피아노를 치도록 해준 곳이었어요.” 마음 둘 곳 없는 그는 종교에 의지한 덕에 남한 생활에 적응을 해가고 있다고 했다.
오는 2월엔 자신의 스토리를 책으로 펴내고 3월부터는 한세대 임미정 교수와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제목의 듀오 콘서트를 전국 각지에서 열 계획이다. “재즈에 미쳐서 모든 걸 버리겠다는 각오를 했는데 막상 절실하게 원하던 걸 얻고 보니 또 달라지네요. 요즘 들어선 다시 클래식 음악이 더 좋아져요.”(웃음)
그는 “어려웠던 시절들을 다 지우고 음악만 좋아하던, 과거의 나를 다시 찾고 싶다”며 “2~3년 후엔 피아노를 메고 산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북한 있을땐 꿈도 못꾸던 독주회" |
북한에서도 체르니로 피아노를 배울까요. 현대 음악은 맘껏 들을 수 있을까요.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다가 혹시 퇴행적 낭만주의자로 비판 받지는 않을까요. 북에서 떠나 한국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와의 만남을 앞두고 궁금증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북에서 엘리트 음악 교육을 받고 자라나, 중국에서는 탈북 노동자로 살았고, 이제 한국에서 다시 음악인으로 자리 잡는 과정 자체가 제게는 무척 이채로웠습니다. 처음에는 '탈북'이라는 수식어가 싫어서 "그냥 피아니스트로 불러달라"고 주문한 적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수식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때로는 수식어가 한 사람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식어만으로 사람의 모든 걸 설명하기에 수식어는 너무나 짧고 단순하며, 세상은 너무나 복잡한 것 같습니다.
---------------------------------------
북한 평양에서 태어나 음악 교육을 받고 연주자로 활동하다 탈북(脫北)한 피아니스트가 서울에서 첫 피아노 독주회를 연다. 피아니스트 김철웅(33)씨는 다음달 13일 장천아트홀에서 리사이틀 ‘평화를 위한 기도’를 갖는다.
피아노를 20년 이상 연주해온 김씨지만 개인 독주회를 갖는 건 생전 처음이다. 그는 “북한에서는 간혹 세계적 콩쿠르에서 입상한 사람들이나 리사이틀을 가질 뿐 보통 연주 활동은 단체 위주로 하기 때문에 개인 독주회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평양에서 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 교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여섯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2년 뒤엔 평양 음악무용대(현 김원균 명칭 음악대학)에서 영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의 초·중·고 과정에 해당하는 인민반, 예비반, 전문반을 이 대학에서 마치고 학부에서 피아노를 전공할 때만 해도 자신의 삶이 이처럼 파란만장할 줄 몰랐다고 했다. “북한에서도 체르니로 공부하고 베토벤 소나타와 쇼팽을 연습하는 건 똑같아요. 자체적으로 만든 연습곡을 함께 공부하고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요.”
- ▲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씨
대학을 마친 뒤 1995년 유학을 떠난 러시아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음악원에서 그의 삶이 달라졌다. 소련 붕괴 이후 서방 문물이 물밀듯 쏟아졌고, 당시 20대의 청년 유학생이던 그도 그 물결에 휩싸였다. “마침 수업이 휴강이라 학교 건너편 찻집에 갔는데, 평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던 그곳에서 낯선 피아노 음악이 흘러나왔어요. 주인에게 물어보니 팝 피아니스트인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음악이라고 하더군요. 예쁜 선율과 화성에 무척이나 놀랐어요.” 그렇게 유학 시절 그는 재즈와 록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그 음악에서 자유를 느꼈다고 했다.
1999년 북한으로 돌아와 평양 국립 교향악단의 피아니스트로 근무했다. 하지만 연습실에서 클레이더만의 곡을 연주하다가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고 시말서만 10장을 썼다. “그 뒤부터 주변 사람들도 저를 조금씩 피하기 시작했어요. 예전 한국에서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에서 조사받는 것을 떠올리면 짐작하실 수 있을까요.”
그는 2년 뒤인 2001년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볜으로 향했다. 북한에서는 음악 전문 학교와 러시아 유학까지 마친 음악 엘리트였지만, 옌볜에서는 길이 18m의 나무를 운반하는 노동자일 뿐이었다.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교회에서 한국 선교사들을 만났고, 두 차례 중국 공안 당국에 붙들릴 뻔한 위기 끝에 2003년 봄 한국으로 건너 왔다. 북한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뇌출혈 끝에 숨졌지만 어머니는 이듬해 한국으로 모셔 왔다고 했다. 지금 김씨는 한세대 강사로 음악을 가르치면서 북한 인권 단체의 홍보대사로 일하고,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석사 과정도 밟고 있다.
처음에는 탈북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 “탈북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그냥 피아니스트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했지만 지금은 “제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이번 리사이틀에서도 모차르트의 소나타 14번 등과 함께 ‘돈돌라리’ ‘환희의 노래’ 같은 북한 곡을 함께 연주한다. 그는 “제 정체성에서 북한을 떼어놓을 수 없다면 당당하게 인정하고 그 음악들을 소개하면서 남북 교류의 자산(資産)으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글=김성현 기자 /사진=최순호 기자
'† NORTH KOREA > 탈북동포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탈북생활 현장 (0) | 2008.03.07 |
---|---|
탈북동포 실화영화 ; "크로싱" 자료모음(예고편 동영상첨부) (0) | 2008.03.04 |
중국: 탈북지원 한국인 선교사 4명 중형 위기 (0) | 2008.01.15 |
제3국을 떠도는 탈북자들 (0) | 2008.01.13 |
"중국에서의 삶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었습니다." (0) | 2007.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