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의 땅에 버려진 식민지 조선인들
700만 동포 아리랑-러시아편①] 그들이 영주 귀국을 못하는 사연
제3회 재외동포NGO대회가 오는 24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장충동 성베네딕도회 피정의 집 등에서 열립니다. 지구촌동포연대(KIN)가 주최하고 <오마이뉴스>가 후원하는 이번 행사에서는 역사와 인권의 관점에서 각국 재외동포의 삶과 역사, 그리고 미래상을 한국정부와 시민사회가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고, 각국 재외동포 사회의 현안에 대한 문제해결의 청사진을 제시할 예정입니다. 이번 기사는 손동주 '지구촌동포연대' 집행위원이 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불모의 땅이었던 사할린은 19세기 들어서면서 지리적 중요성과 자원 개발의 보고로 인식되면서 러시아와 일본의 중요 관심지역으로 부상했다. 양국은 각자의 자료를 근거로 사할린 지역에 대한 영유권 다툼을 벌였으며 한때 러시아와 일본의 양국민 공동 거주 형태로 유지되기도 했다. 지속적인 분쟁과 협상을 거듭하다가 1875년 사할린을 러시아 영토로 하는 대신 쿠릴열도를 일본 땅으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북위 50도 이남의 남부 사할린을 양도받게 된 일본은 본격적인 식민지 개발에 착수했다. 해방 후에도 버림받은 조선인들 사할린을 이야기할 때 흔히 떠오르는 이야기는 유형(流刑)과 기민(棄民)이다. 이같은 배경은 제정 러시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할린은 기후적인 어려움과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인 탓에 사람이 살기 힘들었다. 러시아는 극동 지역의 사할린을 개발하려고 죄수들과 그 가족을 유배하고 정착시켰다. 이 유형자들의 생활과 옛 사할린의 모습은 안톤 체홉의 여행기와 그의 작품 '사할린 섬'에서 볼 수 있다. 이렇듯 죄수들의 강제 노역 유형지였던 사할린에 강제 동원된 식민지 조선인이 유입됐다. 그리고 해방된 후에 이 땅은 계속 버림받았다. 사할린에 조선인이 처음으로 유입된 것은 1870~80년대로 추정된다. 1897년 제1차 전체 러시아 인구조사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은 67명이다.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를 거쳐 사할린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1920년대 초반에는 러시아령인 북부사할린에 1400여 명, 일본령인 남부사할린에 1000여 명이었다. 이 때만 해도 사할린의 조선인들은 식민지 조선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일자리를 찾아 온 자발적 이주민이었다. 이후에도 조선인 이주자는 조금씩 늘어났는데, 북부사할린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소련 정부에 의해 1937년에 1150여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기도 했다. 사할린의 석탄과 목재 확보를 위한 일제의 조선인 강제 징용이 본격화된 시점은 1938년 국가 총동원령이 발표된 이후이다. 1939년부터 45년 종전까지 조선인들의 사할린 강제 이주와 관련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해방 당시 소련 정부의 출국금지 조치에 따라 사할린에 남은 조선인 숫자를 4만5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납치당한 자식'을 모른 척해서야
'소련지구 귀환 미·소 협정'은 일본군 포로와 일본국적을 가진 자를 소련 점령지에서의 귀환자로 규정했다. 협정을 감안하고 당시 상황을 보면 이들은 일본국적자 자격으로 귀환 조치되어야 했다. 그러나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의 한일병합으로 조선인은 일본국적자였음에도 일본정부는 귀환 대상 명단에서 4만5천여 명의 조선인을 제외한 채 귀환 조치를 실시했다. 2차 대전 후, 사할린한인이 귀환에서 빠진 상태로 6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은 일본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한국정부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해방 후 국내정세의 불안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해외의 자국민 귀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정부의 행태는 납치당한 자식을 버려둔 것과 같다. 또한 구소련 정부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귀환을 방해했다는 정황도 나타난다. 사할린은 천연자원의 보고로 개발의 여지가 많았다. 소련 정부로서는 사할린의 노동력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었을테고, 조선인 귀환에 협조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구소련 정부는 자국 국적법을 들어 잔류 조선인들을 무국적자로 규정하고 귀환을 막았다. 이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던 한인들이 다시 사할린으로 이주했고, 북한 지역의 노동자가 새로 유입되면서 오늘날 사할린한인사회가 형성됐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살아남기 위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던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자손들의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사할린 한인들의 현실적인 요구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희망자에 대한 한국으로의 영주귀국조치 ▲둘째, 사할린 현지 정착 지원 ▲셋째, 강제동원 피해 보상 및 노역 당시의 저축금·연금 등의 지급을 위한 일본정부의 배상이 그것이다. 이같은 요구들은 사할린으로 강제동원한 일본정부의 책임 인정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긴 세월 방치해 왔던 한국정부가 사할린한인들의 역사성을 인식하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같은 요구는 역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또한 국제법적으로도 지극히 당연한 권리이다. 자식 버리고 재혼해야 영구귀국? 아직도 영주귀국을 희망하는 1세 분들이 3천여 명 남아있다. 현재 일본 적십자사는 한국 적십자사를 통해서 사할린 한인에 대한 영주귀국사업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 영주귀국사업은 사할린 한인들의 가슴에 또다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있다. 현재의 사업은 영주귀국 대상자를 1945년 이전 출생의 1세 동포로 한정하고 있다. 자식·손자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이산가족을 양산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이 사업은 "혼자서 귀국한 고령의 노인들을 돌볼 수 없다"는 이유로 배우자가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새롭게 부부로 결합하여 귀국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낯모르는 사람과 한 집에서, 그것도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인도적일 수 없다. 게다가 시설과 재원이 부족해 영구귀국 희망자들은 이미 한국에 영주귀국하신 분들이 돌아가셔야만 그 빈 공간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아직 남아있는 영주귀국 희망자들은 먼저 한국에 영주귀국한 사람들이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영주귀국사업은 사할린한인들의 소망을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지만 현지 정착이나 미지급 임금 환수와 강제동원 피해 보상은 여전히 요원한 일로 남아있다. 또한 이들에겐 '이중징용' 피해라는 아픔이 있다. 1944년 이후 일본을 둘러싼 바다와 하늘을 미군이 장악하자, 사할린 해안가의 탄광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일본 본토로 재징용해 간 것이다. 1944년 8~9월에 걸쳐 이중징용된 3200여 명의 조선인들의 생사는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사할린에서는 피해자 가족들이 생사 확인을 포함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활동하고 있다. 60년 사할린 한인의 아픔 치유될까 2005년 10월과 12월에 각각 '사할린동포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장경수 의원 대표발의) '사할린동포 영주귀국 및 정착지원에 관한 특별법안'(한명숙 의원 대표발의)이 국회에 제출됐다. 사할린한인을 위한 지원 법률 외에도 현재 국회에는 10여 개의 재외동포 관련 법률안이 계류 중이다. 그나마 17대 국회 들어서서 관심의 폭이 넓어지면서 일어난 이같은 관련 법률의 제정 움직임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의 관심과 노력이다. 현실적인 논리에 쫓겨 물질적 보상에 급급하면 자칫 재외동포가 갖고 있는 역사성을 소홀히 하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사할린한인들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제대로 인식하면서 전국민적인 관심과 애정을 가질 때 비로소 60년 사할린 한인의 한과 눈물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 ■한반도의 비밀■
글쓴이 : ■한반도의비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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