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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만의 귀향 ( mbc 8
 

 

 

베체르니비쉬캑 신문사
 

[피플]‘장군의 손자’는 트럭운전사 허 블라디슬라브
[경향신문 2005-06-26 16:11]    

‘조국’(祖國). 이 땅의 우리보다 해외에 사는 한민족의 가슴에 더욱 진하게 울리는 단어이다. 조국 땅을 한 번 밟아보지 못한 동포들에겐 더 그렇다. 때론 태극기만 보거나 애국가만 듣더라도 눈가에 물기가 비친다.

키르기스스탄에 살고 있는 허 블라디슬라브(54)에게도 조국은 가슴에 박인 ‘옹이’같다. 단지 한민족이란

이유로 3대가 고난을 받았지만 한민족의 후예란 사실이 그에겐 자랑스러운 훈장이다.

그는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1854~1908)의 손자다. 구한말 항일 의병활동을 하다 순국한 허위 선생을 두고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는 추모했다.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만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얼마전 키르기스스탄의 마나스(Manas)공항에서 만난 그는 책에서 본 왕산 선생을 영락없이 빼닮았다. 붉은 새벽노을에 비친 그의 젖은 눈동자. 독립투사의 후손답게 거센 세파를 이겨온 강단이 보였다. 우리말은 어눌했지만 또박또박했다.

금광 발굴에 참여하는 지질학자였지만 지금은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잃고 트럭운전을 한다. 비쉬켁 시내에 있는 그의 아파트는 철거전 서울 청계천의 아파트보다 더 낡아 보였다. 아파트가 지은 지 오래되어 보인다는 말에 빙긋이 웃었다. 10평도 채 안되는 아파트는 생활의 군색함을 숨기지 못했다. 가재도구로 가득 차 있어 한 사람이 들어서기에 벅차 보이는 부엌. 부인이 차를 준비해 왔다. 홍차를 들고 거실로 들어 온 그의 부인은 러시아인. 놀라는 눈빛에 그는 대뜸 부인 자랑을 늘어 놓았다. “집사람이 이번에 김치를 10포기나 담갔는데 아들 녀석이 너무 맛있다고 때마다 먹는 바람에 또 담가야 할 지경입니다.”

차를 함께 마시던 거실 벽에 한글을 가득 적어 놓은 달력의 뒷면이 액자처럼 걸려 있다. ‘공주병’ ‘왕자병’ ‘순국’ ‘약속하다’ ‘고향’이란 단어들이 눈에 먼저 들어 왔다. 우리글을 한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 그가 적어 놓은 것이다. 요즘은 시내에 있는 한국문화원에 틈틈이 다니며 둘째아들과 함께 한글을 배우고 있단다.

언제부터 키르기스스탄에 살게 되었을까?

항일운동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일본의 압박에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9살때 만주로 쫓기듯 도망쳤다고 했다. 만주에서 연해주로 연해주에서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바람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다 고려인 어머니와 결혼해 키르기스스탄에 정착했다. 그가 19살 되던 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중앙아시아의 한민족은 바람처럼 살아왔다. 일제의 수탈과 압박을 피해 중앙아시아까지 떠밀려온 우리 민족의 후예들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고, 다시 바람처럼 돌아오고 있다.


얼굴도 본적 없는 할아버지를 혹시라도 원망한 적은 없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대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너의 할아버지는 항일운동을 펼친 큰 장군이셨다. 너도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장군이 되어야 한다.’

허씨는 자신의 이름보다 의병장 허위의 손자라고 불리는 것이 더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하나 꺼내 들었다. 수첩에는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가 한글로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수첩을 차례로 넘기며 그는 더 늦기 전에 할아버지의 고향에 꼭 가보겠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조국에서 훈장까지 추서 받고 고향인 대구에 동상까지 세워졌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애통하다고 했다.

다행히 그 사정을 전해들은 다큐멘터리 감독 윤덕호씨의 도움으로 오는 7월 한국에 올 수 있게 됐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고향땅을 밟아 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의 동상과 묘소 앞에서 굵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러워 하는 꿈까지 꿉니다.”

그의 아버지도 평생 한국에 가기를 원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진 못했다. 결국 아버지의 넋은 바람이 되어 ‘바람의 땅’ 중앙아시아를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조국에서 찾아온 나를 현관에서 떠나보내며 그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할아버지의 업적이 적힌 색바랜 수첩을 보물처럼 주머니에 다시 집어 넣었다.


하룻동안의 짧은 만남. 그와 며칠을 같이 보낸 듯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미국, 일본 교포는 재미동포, 재일교포라 부르고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에 사는 교포는 고려인, 조선족이라고 하니 죽어서도 유랑할 수밖에요.”

광복 60년이 됐지만 동포란 이름조차 얻지 못하고 고려인으로 사는 중앙아시아의 한인들. 그들이 조국을 향해 외치는 눈물편지에 마른 피가 배어있다.

〈키르기스스탄|사진·글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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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글 때문에 묻혀가는 3331.3332.3333.에 올린 글을 정리 하는 내용 입니다

 

"100년만의 귀향" 제작을 마치고 글을 올려 봅니다

 

1991년, 카자흐스탄 알마띠를 방문 하였을 때이다.

그 곳에서 나는 우연치 않게 고려인 김 콘슨탄틴씨(당시78세)를 만날 수 있었다.

김 콘슨탄틴씨는 나를 마주하는 순간,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덥석 내 두 손을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우리 아버지가 왜놈들과 쌈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 따라

영문 없이 이곳저곳을 한없이 떠돌아 다녀야만 하였다.” 고 하셨다. 오랫동안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아 더듬거리는 말을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그 그리움은 절절하게

전해져 왔다. 그리고 불과 몇일 뒤, 다큐 제작을 마치고 한국으로 출발하려는 아침에

그 분이 운명을 달리 하셨다는 전갈을 받았다. 여덟 살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한 번

떠나온 고향에 끝내 돌아가 보지 못하고...

“감독님, 내가 죽거든 작은 뼈 한 조각만이라도 가져다 조국 산하에 묻어 줄 수는 없겠소?”

지금도 김 콘슨탄틴씨가 하던 말의 느낌이 생생히 잊혀 지지 않는다.

“내 뼈 한 조각을...” 이 말은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모든 고려인들 한 맺힌 삶의 마지막

말이라 했다.


그렇게 김 콘슨탄틴씨를 만났던 때문일까...

그 후로 나는 러시아를 방문하게 되면 달력이나 한국의 정서가 묻어나는 물품들을 힘닿는 대로

준비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전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리고 가능하면 독립투사와 그 후손들도 찾아보려고 수소문도 해 보았다.

그러나, 넓고 넓은 러시아에서 독립투사나 후손들을 찾는다는 일이 그리 용의하진 않아서,

마치 모래 속의 사금파리를 찾듯, 거듭되는 시행착오로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일쑤였다.

하지만, 다큐 제작이 여러 차례 거듭되며, 입소문 덕분인지, 출발 할 적마다 고려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물품이 조금씩 늘어났고, 급기야는 너무 많은 양 때문에 몇 번이나 세관 검색에

걸려 고초를 겪는 해프닝도 발생하곤 하였다.

특히, 2001년에는 MBC의 “아주 특별한 아침 『키르키스탄 기행』”에서 초라한 한복을 입고

아리랑을 부르는 고려인들의 모습이 방영된 뒤에, 한 시청자의 도움으로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한복 950벌이 순식간에 모아졌다. 그리고 덕분에, 그렇게 모인 한복과 월드컵 캘린더 15000부 등을

항공편을 통해 고려인들에게 전달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MBC에서 “8ㆍ15 특집 심야스페셜 『100년만의 귀향』” 이란 제목으로 다큐가

방영되었다. 막상 작품이 완성되어 방영되고 있는 화면을 보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하고 가는 곳마다 음식물이 맞지 않아 오랫동안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던

최PD의 모습과, 수많은 제지로 촬영이 힘겨웠던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의 난민촌, 그리고

허 게오르기씨가 농사짓는 사라토프에서 벌떼같이 달라붙던 모기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는 것은, 물이 없어 늦게 파종하는 바람에 수확시기를

놓쳐버리고 동분서주하는 허 블라디슬라씨의 형, 허 게오르기씨의 처절한 모습이었다.

철을 놓친 농사는 아무리 애써본들 건질 것이 없으리란 사실을 불 보듯 뻔히 알면서도, 행여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사람들. 그 가슴 아픈 모습들...


드디어 허 블라디슬라씨가 우리 일행과 귀국하려던 날, 세대를 지나 100년 만에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동생을 배웅하며, 허 게오르기 형은 동생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뒤돌아서서 연신 눈을 쓰다듬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매사 조심하여, 할아버지를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라는 말을 끝으로

손을 흔들며 점점 멀어져 가는 허 게오르기씨의 모습에, 필자 역시 60평생 처음으로 가슴이

뻐근하며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억제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여러 기회를 통하여, 국내 언론과 매스컴에서 고려인들의 아픔을 수차례 알려 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다 할 가시적 성과가 보이지 않았던 시점에서, 금번 방영된 ‘100년 만의

귀향’ 은 시청자들에게 고려인들의 애환을 피부에 닿도록 크게 부각 시키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

그 한 예로 ‘100년 만의 귀향’을 시청한 지인들이 허 블라디슬라씨의 형 허 게오르기씨를 돕자는

모임을 결성, 12월 말에 허 게오르기씨와 그의 큰 아들, 그리고 부인을 한국으로 초청하려고

준비 중이다. 또한 그 밖에도, 많은 관심 어린 문의들이 다각도로 쇄도 하고 있다.


다만, 이번 방송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은, 심야 시간이라 방청을 놓친 시청자들에 대한 배려가

한 번 더 있었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욱 많은 국민들에게 한 핏줄을 나눈 고려인들의 실상과 애환을 폭 넓게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더불어, 고려인을 돕는 단체들이 예산부족으로 미처 홍보도 하지

못하는 실정에서, 의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다소의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다시 한 번 재방영의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며.


“100년만에 찾은 행복”을 현재 제작중이어 많은 격려를 부탁 드리고 


  수고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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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만의 귀향" ..... 고려인들 돕는 사이트입니다....

http://www.koreis.com/

 

" 키르키스탄과 나의사랑 " 블러그 즐겨찾기에 보이는..카자크님의 작품이다

 

EBS에서도 8월13 ,20일..토요일에 2부 했고 ㅡ위의 사진 비석 앞...허 블라디슬라브

20일에는 러시아 증손자들과 장군의 후손들이 나온다

위의 mbc프로까지 ....

 

광복 60주년이라 허위장군이 집중조명받는 것이 늦게나마 다행이다

 

블러그에서 본 내용을 TV에서 직접 보니 생생한 현장감이  새롭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출처 : 비오는 바다,,,
글쓴이 : rain0719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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