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blog/157DAD0D49917949EC)
십자가의 삶... 하나님께서는 자기자녀가 위로만 받는다면 기꺼이 고통을 당하고, 기쁨만 주어진다면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고통을 당하는지 아니면 위로 받기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는지, 또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지, 아니면 그러함으로써 어떤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순종하는지, 즉 무슨 동기로 성도가 주님을 따르는지 알고 싶어 하신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고통과 순종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기쁨과 위로를 잠시 거두어 가시기도 하신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지 못하고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외적으로 고통을 받으며 내적으로 비통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는 자기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 조금도 없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된다.
그에게 있어서 실로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다.
이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무엇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신다.
너는 나의 위로를 보상으로 받지 않더라도 견뎌낼 마음이 있는가?
너는 나를 위해서만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너에게 조금도 흥미 없는 일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너는 그 일이 단지 나의 뜻이라는 이유만으로 행할 수 있겠는가?
너는 침체되고 무미건조할 때에도 나를 위해 일할 수 있는가?
너는 단순히 그것이 나의 일이기 때문에 행할 수 있겠는가?
너는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아무런 보상이 없는데도 기꺼이 육신적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가?
너는 그것이 내가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받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실제적인 십자가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느낌으로 우리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지 여부를 계시해 주신다.
종종 사람들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삽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많은 성도들은 자기가 주님을 위해 일을 하거나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위해, 주님의 이익을 위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활에는 자아를 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즉 자신의 위안이나 자신의 기쁨이나 자신을 영광을 위한 배려가 조금도 없다.
기쁨이나 위로 때문에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엄격히 금지 되어 있다.
실의나 낙망이나 좌절감 때문에 순종하는 일을 뒤로 미루거나 주저하는 것은 전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육신적 고통만으로도 주님을 위해 인내로써 견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한데 몸이 고통을 당하는 수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만일 실제로 주님을 위해 고통을 당한다면, 우리의 몸은 물론 마음도 고통을 느낄 것이다.
기쁠 것이 조금도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만 한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자아를 위해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고 자아를 기꺼이 죽음에 넘기는 것임을 기억하자.
주님으로부터 어둠과 냉랭함과 단조로움과 외로움을 포함한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아를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이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 : 23) (중국 출신의 신학자 /워치만 니, 의 글중에서...)
![](https://t1.daumcdn.net/cfile/blog/11041B0F49917867F9)
워치만니 / 위트니스리 / 한국복음서원 / 지방교회(들)
워치만니 - 일보다 생명을 더 중요시 함
화수은 자매의 본
일보다 생명을 더 중요시하는 데 있어서 화수은 교사는 니 형제님에게 아주 중요한 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의 행함보다 우리의 어떠함을 더 중요시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모든 일은 이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화수은 교사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생명을 강조하고 그녀의 일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가를 보았다. 때때로 화수은 교사와 함께 기독교에 있는 사람들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는 언제나 전파하는 이의 구변과 지식과 열심과 재간 혹은 천연적인 설득력을 감상했다. 그럴 때마다 화수은 교사는 그가 경탄해하는 그것이 생명이나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지적해 주었다. 그가 경탄해하는 것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어떤 일들을 하도록 자극할 수 있지만, 결코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적인 일의 진단을 통해 그는 가르침을 받아 생명과 일의 차이점을 분별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대다수의 전도자와 기독교 교사들의 설교가 생명의 씨앗이 아닌 쭉정이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대다수의 기독교의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나 그 안에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 매우 적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주 예수님의 발자취
니 형제님은 동역자들에게, 사복음서에 따르면 주님은 사역하실 때 사람의 환영을 주의하지 않으셨으며 도리어 군중들이 그분을 찾을 때 그분이 자주 피하셨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자주 주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씨로 뿌리셨고(마 13:3),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그분의 속에 있는 생명을 해방하여 많은 열매를 맺으셨다고 말했다(요 12:24).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것의 위험성
그는 나에게, 자기보다 다섯 살 위인 동역자가 두루 다니면서 전도회를 열 때 화수은 교사가 사람의 환영을 받는 것의 위험성을 알고서 그에게, 『만일 네가 곳곳을 다니며 전도의 일을 한다면 나는 더 이상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겠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이러한 일이 그의 영적 생명을 해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 그의 그 동역자는 영적인 생명에서 사람의 환영을 받는 일에 빠지게 되었다.
니 형제님은 사람의 환영 받기를 두려워했다. 그는 명성을 얻기를 두려워했고 사람의 칭찬과 높임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사람의 이러한 환영이 주님을 따르는 일에서 젊은 동역자로 하여금 생명의 올바른 노선에서 빗나가게 하는 시험의 도구임을 보았다. 그는 한 번도 사람의 멸시와 반대와 거절과 참소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것들을 그를 생명 안에서 보호하고 주 안에서 더 자라게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여겼다. 이러한 이상은 그로 하여금 주님의 일에 있어서 더욱 주님과 하나 되게 하였고, 주님의 인도를 더 쉽게 따르게 하였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얻은 이상을 일의 방식이 아닌 생명의 방식으로 실행했다.
양이 아닌 질(質)을 중요시함
니 형제님은 고린도 전서 3장 12절부터 15절을 통해 우리의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닌 질임을 보았다. 금과 은과 보석은 언제나 양이 적고 질이 높은 반면에, 나무와 풀과 짚은 언제나 양은 많으나 질이 낮다. 나무와 풀과 짚은 불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나 금과 은과 보석은 불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 우리는 장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일의 양에 따른 것이 아닌 우리의 일의 질에 따른 것이다.
생명의 넘쳐흐름
어느 전도자가 성공적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거나 어느 기독교 사역자가 방대한 일을 했다는 것을 들을 때, 그는 항상 그의 훈련을 받는 우리들에게 참된 일은 생명의 넘쳐흐름임을 알려주었다. 니 형제님의 지식과 은사와 재능에 의하면, 그는 아주 용이하게 기독교 안의 많은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면에서 그의 은사와 지식을 남용하지 않았다. 은사와 지식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그는 언제나 그의 일이 온전히 생명 안에 있고 생명에 속하고 생명으로 말미암으며 그의 일이 곧 생명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속박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역이 생명의 넘쳐흐름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에만 만족하였다.
그의 사역은 192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의 사역 아래서 산출된 상해 교회는 1927년에 일으켜졌다. 1933년 말 내가 처음 상해에 그를 보러 갔을 때, 그곳 주의 회복 안의 모임의 성도 인수는 백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1928년 2월, 그가 상해에서 이기는 자 집회를 인도했는데, 참석자는 전국의 모든 동역자와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참석 인수는 삼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육년 이상 사역을 했지만 주의 회복의 성도 인수는 여전히 아주 적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도리어 큰 격려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 적은 숫자는 그의 사역의 열매였기 때문이다.
주님을 찬미한다! 니 형제님이 외면적인 일을 관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역의 생명의 결과는 이미 온 땅에 퍼졌다. 오늘날 그의 책을 통해 기독교계에 범람하고 있는 그의 사역의 일부는 그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일로부터 나온 생명이다. 그에게 있어서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오직 생명만이 모든 것이었다. 내 일생에 걸쳐 알아온 사람들 중에 그만이 유일하게 일보다 생명을 더 중요시했던 사람이다.
다음은 1928년 7월 부흥보 제4기에 실린 그가 쓴 공개 서신에서 발췌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어떤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진동시킬 만한 큰 일을 하라고 하지 않으셨음을 깊이 믿는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관심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근시안적인 분이 아니시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 무언가 보고하는 일을 신뢰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하나님이 흥분 가운데 계시지 않음을 모르고 그러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듣기 좋은 말이 다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실로 오늘이야말로 전무후무하게 영적인 일과 혼적인 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 때라고 느낀다."
워치만 니 저
[금세기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 "일보다 생명을 더 중요시 함", 한국복음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