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의 역사 음양오행 사암오행침 정통사암침의 특징 |
동양 의학의 고전 유물인 돌침으로, 1923년 8월 9일 한국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리에서 폄석(貶石)과 골침(骨鍼)이 발견되어,
각각 유물 번호 석침 제 9199번과 골침 제 8420번으로 부여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른 쪽 사진:
충북 음성군 대소면 한독 약품 공장 한독 의약 사료실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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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구학의 발생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의 2/3가 우리 나라에 있다는 사실과 이 돌침의 발굴은 우연이 아닙니다. 원시 사회에서 토테미즘으로 질병을 치유하고 원시 사회를 다스렸었으리라고 믿어진 시대에 이미 직접적으로 질환을 치료했던 최초의 의술 도구가 발굴되었음은 우리 나라 원시 사회를 다시 평가해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질병과 통증을 개선 시키고자 도구를 만들었다면 그 도구가 단순하다고 해서 사용 방법과 효능도 그러한 것일 수만은 없습니다. 그 것이 돌침과 침술인 것이다. 따라서 침술은 인류 최초의 의술입니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우리 나라는 이미 적어도 5,000여년 전에 고대 사회부터 침술을 행해 왔었으며 독립적인 의술로서 활용한 근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명맥은 우리 나라 민간 의술에까지 면면히 깊숙히 뿌리내려 온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명맥은 우리 나라 역사상 동아시아 대륙을 지배해온 단군 시대와 삼국 시대에 주변 국가와 교류를 통하여 점차 세련된 의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런 근거는 우선 한 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려면 군사력이 왕성해야 하며, 그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의료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민족인 고구려는 이런 의술을 토대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으며, 동이족(東夷族)으로서의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동이족이라고 하면 동쪽의 오랑캐라고 알고 있는 이가 많으나 이(夷)는 활(弓)을 잘 쏘는 큰 사람(大人)이라는 뜻의 상형 문자입니다. 이런 사실을 치욕스러운 왜의 강점 시대에 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 실시로 인하여,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오랑캐라고 인식하도록 역사를 왜곡시킨 것입니다.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는 중국 대륙에서 황해를 동쪽으로 두고 지금의 중국 땅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는 중국 땅 전체를 호령하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전라남북도의 사람들을 두고 호남(湖南)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호남이라고 하면 전라남북도 북쪽에 호수가 있어야 하는데, 호수는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 호수는 지금의 중국 땅에 있는 것입니다. 만주는 물론, 중국 본토가 우리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을 보면 高氏之山 其上多玉 其下多箴石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高氏之山이란 고구려의 태조 고주몽으로 고구려의 山인 백두산을 가리킵니다. 즉 백두산에는 옥과 잠석(箴石=돌침)이 많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 내용은 중국이 침 도구를 수입한 기록이며 돌침의 재질이 단단하고 다른 돌과 같지 않다는 것으로, 잠석은 신석기 시대의 폄석(돌침)이 발전한 것으로 청동기 시대 이후의 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밖에 중국 의학서 "명의별록"에는 약제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그 중에는 "세신(細辛)은 동양 임해의 것을 사용하는데, 그 신열(辛烈)함이 고구려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오공(蜈蚣=지네)은 고구려 산 속 썩은 풀섶 속에 있다. 발이 붉은 것이 많은데, 상하지 않게 말려서 사용하되 누른 것은 쓰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중국 문헌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활발하게 주변 국가와 무역을 하였고 의술의 수준 또한 매우 발전한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문무왕 12년(672년)에 당나라에 침 400대를 수출하였고, 신문왕 12년(692년)에는 의학교를 설치하여 의학 박사 2명이 소문경(素問經), 침경(鍼經), 맥경(脈經), 난경(難經), 명당경(明堂經)을 교재로 의사를 양성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으며, 1093년 고려는 당시 침구학의 경전인 침구경(鍼灸經)을 송나라에 준 사실이 중국 송조 실록 17권중 철종본기(哲宗本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중국이 그렇게도 자랑하는 황제내경의 뿌리임은 아래에 설명합니다.
참고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대주의를 바탕으로 역사를 많이 왜곡하면서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사료가 나온다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의 우리 의술이 매우 뛰어났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상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발해와 백제는 왜에까지 우리 나라 의술을 전수하였으며, 5세기 중엽의 약 300년간 백제 의학이 왜 의술의 종주로서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해상 무역을 이어받은 해군 출신 고려 왕건은 적극적인 해상 무역을 통하여 문화와 기술, 경제를 키워 강성한 무역 국가로 자리를 잡았으며, 의술 또한 완성 단계를 이루었습니다. 그 예로 신라 설총의 후손인 설경성(薛景成)은 1,285년에 원나라까지 이름이 알려져서 원나라 세조와 성종의 고질병을 치료하여 찬성사(贊成事)의 직위까지 받았는데, 그 당시 중국에는 위생보감을 저술한 의학자 나겸보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설경성의 개인 의학 실력이 높은 것도 있었지만, 당시 고려 의학의 수준이 이미 높은 완성의 단계로서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려는 당시 봉건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실학과 자연 과학을 권장하여 많은 분야가 다양하게 발전하였으며, 그 중 의술 역시 독자적인 계통을 형성하였고 중국과 다른 고려 의학을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2. 한민족의 침술을 토대로 한 가장 오래된 의학서 황제내경
동양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황제내경(黃帝內經)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동양 의학의 경전으로서 자연 과학, 자연 철학까지 근본 이론을 제시하는 의학서로서 황제내경은 아직까지도 현존하는 최고의 경전입니다.
그런 황제내경이 만들어진 배경과 저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황제내경의 적어도 반은 우리 나라 "침구경"으로 구성된 것이고, 최초 저술된 역사적 배경은 춘추전국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황제내경은 중국 고대 의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춘추 전국시대(기원전 475-221)에서 秦, 漢시기(기원전221-기원후 220년)를 거치면서 중국의 각 의학계파 중에서 내경파 의학자들이 여러 의학 문헌을 기초로 완성한 것입니다. 후에 東漢, 隋, 唐 시기의 의학자들이 수정과 보완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황제내경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한서 예문지(漢書 藝文志)의 기록 중 황제내경 십팔권... (黃帝內經 十八卷...)이라는 기록과 진 (晉)나라 시대 황보밀(皇甫謐)의 "침구갑을경" 서문에 소문 구권, 침경 구권, 합기위 십팔권 (素問 九卷, 鍼經 九卷, 合起爲 十八卷)이라고 기록된 것을 토대로 초기 황제내경은 소문경 9권과 침경 9권으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것을 후대에 와서 소문경 9권을 81편으로 나누었으며, 그 당시 나누어진 문헌은 유실되었습니다. 素問은 당대(唐代)에 이르러 제 7권의 9편이 소실되어 총 8권 밖에 남지 않았으나, 비본을 찾아 7편을 보충하였으며, 나머지 2편도 송대(宋代)에 이르러 보충되었습니다.
당대 이후 송대부터 소문을 보충하면서 "침경(鍼經)"을 합본하고 각각 81편으로 나누어 침경의 이름을 "영추(靈樞)"라고 개칭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부터는 "침경"의 명칭이 사라지고 황제내경은 소문과 영추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즉, 중국에서 그렇게 자랑하고 있는 황제내경의 최소한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영추경이 바로 고려로부터 수입한 침구경인 것입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고려의 침구경이 황제내경의 뿌리
황제내경의 내용상 문체와 문장의 길이 등이 크게 차이가 나고, 소문과 영추의 이론 역시 다른 내용이며, 전체 내용을 보아도 앞뒤 내용을 해석한 것도 섞여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아 황제내경은 한 사람이 한 시대에 저술한 것이 아님이 명백하고, 중국 의학자 용백견(1900-1983)이 저술한 "황제내경개론"에 송나라 철종 8년에 고려가 준 "침구경" 9권을 사숭이 개편하여 "영추"라고 명명하였다고 고려의 침경 원조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漢書·藝文志" 중에 "黃帝內經", "黃帝外經"의 목록과 편작내경(扁鵲內經), 편작외경(扁鵲外經)등의 기록을 보아 황제는 당시의 학술적 유파로서 병가, 도가, 의가들이 부르는 하나의 큰 계파라고 볼 수 있으며, 진한 (秦漢)시대에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학설이 성행하였고 이것을 "黃老"라고 하였다. 황제는 중국의 11황제 중 민족의 수령으로서 존재이며, 춘추전국시대에 "百家言黃帝", 즉 제자백가들이 자기들의 학설을 높이 평가하기 위하여 권위적인 단어로서 "황제"를 서로 도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경"은 음양 오행을 중심으로 한 학설로서, 인체는 오장육부에 의하여 생로병사를 겪는다라고 주장하는 학파가 내경파이고, "외경"은 주로 음식 섭생과 기공 등의 수련으로 질병을 다스린다는 학파가 외경파였습니다. 이 것이 醫家의 학파로서 존립하다 내경의 학설에 밀려 황제내경이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漢書·藝文志"을 보면 "言陰陽五行, 以爲黃帝之道也"라고 명시 한 것을 보면 황제의 주류 학파가 내경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렇게 황제내경은 많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이루어진 동양 의학의 경전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한의학은 이론적 근거를 황제내경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 황제내경의 소문 제12편 "이법방의론"을 보면 "동방은 천지가 시작되는 곳이다. 지역이 바다로 둘러싸여 그 백성들은 짠 음식과 물고기를 즐겨 먹게 되고 물고기로 인한 더운 기운과 혈이 뭉쳐 피부가 흑색이고 종양의 질병이 많아 일찍부터 그 치료를 폄석(돌침)으로 했다. 그러므로 폄석은 동방에서 들어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것은 우리나라에서 "폄석"이 출토 된 것과 더불어 문헌적인 고증으로 침구학의 발상지가 대한민국이라는 증거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입니다.
3. 우리 나라와 중국
이러한 침구학의 종주국으로서 동아시아를 지배해 온 찬란한 문화의 동이족이 과거 역사부터 개인의 사리 사욕과 권력욕으로 물들은 일부 지배층으로 말미암아 수탈과 반란, 매국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동안, 중국은 독보적인 기술을 축적하고 많은 의학서와 의학자를 배출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금에 와서는 동양 의학이 중국에서 발생하여 주변 국가에 전수시켰다는 착각 속에 오만을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것을 반증하기는 커녕 오히려 치욕적인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물들어, 당연지사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한 예로 고구려 평원왕(562년)에 중국 오나라 지총(知聰)이라는 사람이 우리 나라에 의술을 전수시켰다는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총은 중국의 당대 의학자들 중에는 없는 이름 그대로, 지혜와 총명한 사람을 뜻하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역사적으로 나타나 있지도 않은 인물을 왜가 억지로 만들어 우리 나라 문화를 사대주의에 물들게 하고 우리 것은 없는 것으로 인식시키려 했던 것을, 아직도 우리는 버젓이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불쌍한 일입니까... 이 것을 중국은 그대로 이용하여 지금 중국의 중의과 대학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 문헌에도 없는 인물이 우리 나라에 의학을 전수 시켜 아시아의 의학은 중국이 파급시켰다고...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어떤 나라가 있을 때 그 사회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써 구성됩니다. 그리고 고대에서의 의술은 왕성한 병력을 구축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중국 삼국지를 보아도 명의 화타는 어떤 나라가 망해도 의술이 뛰어나기 때문에 화타에게는 국경이 없었습니다. 나라는 망해도 기술은 전수됩니다. 우리 나라는 10,000여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고구려 평원왕까지 2,000여년 동안에 중국 의술만 발전했고 우리 의술 수준은 민간 의술 차원에만 머물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원광대 한의대 정우열 교수는 "고구려의 한 의사가 중국 위나라에 가서 침을 놓았는데, 한 치 되는 머리카락을 10개로 동강을 내고 침으로 꿰뚫어 보고 머리털 안이 비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들어 이는 우리 조상들의 침 놓는 실력이 비범했던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지금도 일부 한의사 및 일반인은 침구학의 종주국은 중국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은 시급히 개선되어야 하며, 우리 것을 더욱 더 발전시키고 세계 만방에 널리 보급해야 합니다.
삼국지에 보면 심한 두통을 앓고 있던 조조가 천하의 명의인 화타를 불러 치료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 때 화타가 조조에게 머리를 도끼로 쪼개 머리속에 있는것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하자,
그러자 조조는 속으로 생각하길 `화타가 자기를 죽이려는 것`으로 의심을 하게 되고 결국은 화타가 죽게 되었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당시 중국의 의술이나 세기의 명의라고 불리웠던 화타의 의술은 매우 저급한 상태였슴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ㄱ. 편두통의 원인이 머리에 있다는 진단이나 머리를 까봐야 치료를 할 수 있다는 화타의 의술은, 자신이 없었기에 거부할 것을 알고 핑계를 댄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으며,
ㄴ. 정통사암침으로써 치료를 했다고 하면 10회 이내의 치료로써 충분히 완치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질병이었기 때문입니다.
4. 우리 나라와 세계
지금 서구 여러 나라들은 동양 의학을 "전통 의학" 또는 "대체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 발전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는 너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니, 왜보다 한 발 앞서서 세계 최고의 자랑스러운 의술을 오히려 멸시하고 말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경맥과 경혈의 실체를 김봉한 선생께서 세계 최초로 발견하셨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실체를 발견하고 이용한 것은 5천년 이상 오래 된 우리 조상들이었습니다. 다만 그 역사와 진실이 단절되고 왜곡되었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뛰어난 우리 한민족의 의술인 정통사암침을 이제 전세계적으로 파급시켜 단군의 후예로서 다시 한 번 영광을 되찾는 것이 21세기 우리의 과제들 중의 하나입니다.
정통사암오행침구학회가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우수성을 전세계 만방에 알리는 선봉에 섰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전 세계를 지배했던 10,000여년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왜가 5,000년을 우리 나라 역사로부터 떼어다가 자기네 나라 역사에 날조해서 집어 넣고, 그 나머지 반만을 우리 나라에 남겨 두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나마 단군도 신화 속의 인물이라고 역사를 왜곡시켰습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환단고기" 또는 "한단고기"라고 검색하시면 무궁무진하게 많은 가슴 벅차게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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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 오행
우주는 음양오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우주의 구성원인 모든 생물은 그 우주의 정보를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수많은 DNA중 하나만을 갖고도 우리를 재생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몸에는 우주의 정보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사람과 쥐의 DNA중 90% 이상이 같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주의 정보를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음양오행으로써만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동양의 모든 학문은 음양오행에 의거하여 체계되어 있으며 의학도 또한 음양오행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탕약은 물론 침술도 음양오행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진수를 알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축소 우주체, 즉 음양오행의 합성물이라고 정의하고, 장부(腸腑)도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오행성이 있는데,
육기(六氣), 즉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에 의한 외인(外因)
또는 칠정(七情), 즉 희노우사비공경(喜怒憂思悲恐驚)에 의한 내인(內因)
또는 기타 사고 또는 특정 부위의 무리한 사용에 따른 부내외인(不內外因)으로 인하여
장부의 기능에 허실(虛實)이 생기면 병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이러스, 박테리아, 공해 물질, 또는 화학 물질의 과부족 등에 의한 질병도 우리 몸 자체의 면역, 방어, 자체 치료 기능을 회복시켜서 치료가 가능하므로 거의 모든 병을 고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병을 고친다는 것은
허(虛)한 경맥(經脈)은 보(補)하고 실(實)한 경맥은 사(瀉)하여 태과불급(太寡不及)이 없도록 즉,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도록 형평(衡平)을 조정하는 것이며,
또 환자의 증상과 원인에 따라 오장육부의 한열을 조절하는 등,
오장육부의 균형잡힌 건강을 꾀함으로써 건강해진 오장육부가 스스로 몸을 치료함으로써 병은 자연적으로 치료가 됩니다.
의자(醫者)는 망문문절진(望聞問切診)의 사진법(四診法)중 절진인 촌관척맥(寸關尺脈) 부위를 비교맥진(比較脈診)을 해서 제일 허(虛)한 맥과 제일 실(實)한 맥을 색출하고 그 중 양자택일을 해야되는데, 허증(虛症)을 주증(主症)으로 할 것인가 실증(實症)을 주증으로 할 것인가에 관하여는 병증을 참조하여 결정합니다.
여기에서 양자택일을 하는 이유는, 만일 허증과 실증을 동시에 시술한다면, 동일 경혈(經穴)에 보법과 사법을 해야할 모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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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 오행침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고도 독보적인 사암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국보적인 침술인 동시에 세계인의 유산입니다.
사암 도인(舍岩 道人)께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전 임진왜란때 허준 선생과 같은 시대에 사셨던 분으로, 13년간 동굴속에서 참선하며 창안하신 오행침술로써 그 시대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신묘하게 치료하셨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허즉보기모와 실즉사기자라고 해서 허할 때는 그 경맥의 모에 해당되는 경맥을 보하고, 실할 때엔 그 경맥의 자에 해당되는 경맥을 사한다고는 되어 있었으나,
관(官)의 경맥(즉, 문제가 되는 경맥을 극하는 경맥)을 보 또는 사하는 것을 함께 하는 것은 수천년 역사의 침술에서 또 한 단계의 차원을 높이는 것이었으며, 사암 도인과 한민족의 자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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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사암침의 특징
- 누구든지 배우고 쓸 수 있는 정확한 진맥을 이용하여 5장6부의 허, 실, 한 그리고 열을 판단하여 정확한 진단을 합니다.
- 진단만 정확하면 치료 방법은 사옥 보사법을 이용하게 되므로 기대했던 효과를 빠르게 봅니다.
- 주로 사관절(四關節) 내에 있는 오행혈(五行穴)을 이용합니다.
즉, 주로 팔꿈치와 손가락 끝 사이 또는 무릎과 발가락 끝 사이에 침을 놓습니다.
- 침(針)이 짧습니다.
침이 피부 속에 들어가는 깊이가 매우 얕으므로, 매우 안전합니다.
- 취혈(取穴)하는 수(數)가 적습니다.
-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건측(健側)에 자침(刺針)합니다.
즉 좌병우치(左病右治), 우병좌치(右病左治), 상병하치(上病下治), 하병상치(下病上治)
- 많은 경우 단 한 곳만에 시술하는 것으로도 나아집니다
병의 통처(痛處)가 동일한 경우라도, 한증인가 열증인가 허증인가 실증인가에 따라서 임기응변을하여 보사혈위(補瀉穴位)가 달라집니다.
- 강력하여 효과가 빠릅니다.
많은 경우 짧은 경우엔 5초 이내에, 또는 30분 전후에 효과가 나타납니다.
빠르면 치료를 하는 도중에, 늦어도 수일 안에 맥이 건강하게 변화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 환자에게 무리를 주지 않습니다.
다른 침술은 매일 맞게 되면 무리를 줄 수가 있지만, 사암 오행침은 매일은 물론, 경우에 따라 하루에 두 번 또는 더 많이 침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침은 낫게 하기 위해서 놓게 되는 것이며, 당연히 맞으면 맞을수록 건강이 좋아져야 그리고 힘이 나야 합니다.
또 대부분의 경우에 그 즉시 효과가 나기 때문에 효과를 즉시 보지 못하면 진단 또는 치료 방법이 잘못되었슴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 알기쉬운 학문입니다.
오행의 상생상극(相生相克)의 원리와 음양허실이 작용하는 이치를 공부하면, 수많은 질병에 따르는 주요 혈명을 암기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즉, 원리 원칙에 의한 공식대로 하시면 됩니다.
- 모든 질병과 증상에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원리와 원칙만 이해하시면, 어떠한 환자라도 자신있게 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 모든 증상을 그 자리에서 치료할 수 있습니다.
침을 맞게 되는 환자들의 대부분의 경우 단 한 가지 증상만으로 침을 맞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경우에 따라 스무 가지 이상의 증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모든 증상을 함께 치료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해야지 더욱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 병명이 없는 질병이라고 할지라도 진맥과 증상만으로써도 정확한 진단과 그에 따른 치료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