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축복과 저주

1. 축복<祝福>

1) 축복의 정의.

축복<히- 바락 ???> <헬- 율로게오 ευλοϒεω> <영-Bless, Blessing> 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린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복을 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면에 한국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축복<祝福> 이라는 단어는 순전히 어떤 존재로부터 복이 내려질 것을 원하고 부탁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인간이 피차에 하나님의 은혜 또는 하나님의 복이 하사되어지기를 기원 할 때에는 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 또는 복<福>을 하사하시는 것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강복<降福>으로 표현해야 한다.

2) 축복의 오류.

한국기독교는 하나님의 강복<降福>을 하나님의 축복<祝福>이라는 용어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강복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용되면 다음과 같은 뜻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를 향하여 <복을 내려주소서>하고 빌었다.
<하나님께 축복 받았다.>.....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를 향하여 <복을 빌어 주셨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소서>.....하나님 우리에게 <복이 내려지도록 빌어 주시옵소서.>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무서운 문제를 발생시킨다.

첫째 :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강판시키게 된다. 하나님이 강복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되신다면 하나님은 복을 비는 존재로서 복을 주시는 어떤 지고의 존재보다 열등함을 스스로 증거 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자리를 거부하고 강판 시키는 망령된 언어이다.

둘째 :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되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타의 추종이나 이의 같은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을 주지 못하고 복을 비는 정도의 하나님이라면 그러한 하나님에게 절대적 주권이라는 것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서 기만이요 사기인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망령된 언어이다.

이러한 논증에 대하여<비록 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당연히 강복인 것이며 따라서 용어 하나를 가지고 너무 비약하는 것이다.>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의는 당연히 그리고 단호하게 야단맞아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과연 아무렇게나 함부로 불려져도 되는 분이신가? 그 분의 이름이 인간의 말이나 인간의 글로 불려지고 씌어진다고 해서 그렇게 간단하게 그렇게 대충, 불려지고 씌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자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는 최상, 최고, 최대의 예를 갖추어 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해석만 바로 하면 된다는 자세는 하나님께 참으로 무례하고 무엄한 악행이다.

2. 저주<詛呪>

1) 저주의 정의.

저주<詛呪-히-מר?-cherem-히-הללק-qlalah-헬-αναθεμα-anathema>는 축복에 대한 반대 용어로서 상대방에게 불행이 닥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저주.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저주와 무관하시다.

(1) 하나님께서는 신분상 저주와 무관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서 최고, 최상, 최대의 존재이시다. 아니 그러한 용어로 표현한다 해도 부족한 것이 하나님의 신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저주와 같은 저속한 것과는 전혀 무관하시다.

(2) 하나님께서는 주권주로서 저주와 무관하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로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권주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세계를 저주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는 속성상서 저주와 무관하다.

하나님의 속성<거룩, 자비, 긍휼, 사랑,>은 저주와 전혀 무관하시다.

(4) 하나님께서는 섭리주로서 저주와 무관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진행하시는 섭리주로서 당신의 섭리 역사 하에 있는 것들을 저주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저주와 무관하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실 수 없다는 표현은 하나님께 어떤 제약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주와 무관하시다는 것이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주를 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3) 기독교와 저주.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저주와 무관하다.

(1) 하나님께서 저주와 무관하시다.

하나님께서 저주와 무관하시므로 하나님의 기독교도 당연히 저주와 무관하다.

(2) 하나님께서 저주를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싫어하시므로 하나님의 기독교는 저주를 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 저주를 금지하셨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금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기독교는 저주를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피차에 축복할 것을 명령하신 대신에 저주를 금지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하는 자들에게는 그 저주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고 선포하셨다<창12:3><출21:17>.

(4) 기독교인들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의 저주 하에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사면 받은 자이기 때문에 저주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도 저주아래 있었던 자들로서 용서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5)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인격, 거룩, 자비, 긍휼, 사랑> 등등의 하나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로서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6)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상 저주와 무관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저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저주한다면 그는 하나님 자녀의 품위와 인격을 스스로 손상시키는 것이다.

(7)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자들로서 어떤 경우에도 저주할 수 없다. 특히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것을 하나님의 종이 저주할 수 없다.

4) 저주에 대한 성경해석.

(1)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해석.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저주의 관계를 근거로 할 때에 하나님의 저주란 곧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2) 사도들의 저주에 대한 해석.

사도 바울은 저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8-9>

바울의 말은 자신이 저주를 한다거나 또는 성도들에게 저주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롬9:3>은 동포의 구원을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희생도 불사하겠다는 열정의 표현이며, <갈1:8-9>은 비 진리를 전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이다.

(3) 사람의 저주에 대한 해석.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저주를 금지하셨으며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을 선포하신다<창12:3><출21:17>. 따라서 모든 사람, 특히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저주할 수 없다. 인간은 다만 용서와 관용, 사랑과 긍휼, 자비와 축복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비 진리가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심란하게 한다. 대부분 기도원을 차려놓고 무당 노릇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괴이한 비 진리들을 남발하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조상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가 가문에 내려진다>는 것이다. 저들은 그러한 주장을 하면서 괴상한 주문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저들이 이러한 비 진리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로서 하나는 아담의 죄가 온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요 다른 또 하나는 <출34:6-7>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6-7>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조상의 죄를 가문에 대대로 내리실 이유가 없다. 성경은 이와 같은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18: 19-20>

따라서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된 것과 <출34:6-7>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1)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된 것.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며 다른 또 하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이 혈통을 따라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원죄로 인한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징계 받으며 또한 부패한 본성에 의하여 범죄하는 일상죄에 대한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징계받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없이 다만 아담의 범죄를 연대적으로 저주<징계>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들의 죄에 대한 징계를 받는 것이다.

(2) <출34:6-7>

<출34:6-7>의 말씀은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대대로 내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는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 한다는 말씀에서 증명된다. 반면에 <겔18:19-20>은 분명히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 전가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따라서 <출34:6-7>의 말씀은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대대로 내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 분명하다. 따라서 성도들은 기독교를 빙자한 3류 무당들의 비 진리에 속아 심란할 필요 없다. 기독교에 저주란 허용되지 않으며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절대 보호하심 하에 있으므로 사단조차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침노할 수 없다. 따라서 3류 무당들의 저주와 주문 따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혀 해당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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