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전래

 
불국사에서 십자가가 나온 까닭은…
 
▲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십자가 (24.5×24×9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흔히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200년쯤으로 잡는다. 그것은 카톨릭이 처음 들어온 때부터이고, 다수파인 개신교로 말하면 겨우 100년 남짓하다. 이웃 중국의 1300여 년이나, 일본의 약 400년에 비하면 짧은 역사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 한때 파도처럼 밀려온 기독교의 동방전파, 즉 동전(東傳) 물결이 한반도의 문턱에서 막혀버렸던 것일까 ? 아니면 비켜간 것일까 ? 이때까지 의혹만이 부풀려져왔을 뿐, 별로 밝혀진 바는 없다.

7∼8세기 성모상등 경주 출토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출현한 후 1000여 년이 지나서 동서기독교로 나눠졌는데, 이 분열되기 이전의 기독교를 고대 동방기독교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고대 동방기독교는 넓은 의미에서는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초기의 기독교와 동전된 기독교를 통틀어 말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동전된 기독교만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고대 동방기독교라고 하면 후자인 동전된 기독교를 뜻한다. 이 기독교의 동방전파는 5세기 중엽에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파의 주도에 의해 페르시아와 인도, 중앙아시아를 거쳐 7세기 중엽에 중국까지 이른다. 중국에서 경교(景敎)라고 불리운 이 고대 동방기독교는 635년 당 태종 때 처음 중국에 들어오는데, 그 특유의 매력 때문에 일시에 정식 공허(公許)를 얻어 250년간 몇 만명의 신도를 포섭할 정도로 흥성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기독교 동전의 제1차 파고이다. 그러나 경교는 ‘회창법란’(845)과 ‘황소의 난’(878) 등 일련의 배타적 소요에 휘말려 중국 본토에서는 거의 멸적되고 잔존세력이 몽골과 한반도의 인접지역인 만주 등 변방지역으로 흩어졌다.
 
▲ 경주에서 출토된 성모 마리아 소상. 앞면과 뒷면 (7.2×3.8×2.8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바다든 강이든 물결은 어느 지점에서 수직적으로 딱 멈춰서지 않고 잔잔한 여파를 남기면서 서서히 가라앉는다. 종교의 전파도 마찬가지다. 고대 동방기독교의 동전 물결은 중국에서 중단되지 않고 멀리 한반도에까지 그 여파를 몰고 왔다. 아직은 사료와 연구의 부족으로 전파 시기와 내용, 성격, 영향 등 실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그 개연성을 넘어 초전(初傳)단계의 유입으로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근거는 우선, 관련유물이다. 가장 유력한 증거 유물로 꼽히는 것이 196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출토된 돌십자가와 역시 경주에서 발굴된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과 성모 소상이다. 이 4점의 유물은 모두 7~8세기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들이다. 돌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적이어서 십자가의 5형 중 초기 십자가형인 그리스형에 속한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부착용 장식품으로, 그리고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 마리아상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유물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널리 유행하던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나, 간혹 유행하지 않았던 증여품이나 소장품이 포함되어 있기도 한다. 따라서 몇 점의 유물을 특정 시대의 어떤 사회상 증거물로 삼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이럴 경우에는 다른 방증적인 유물이나 기록을 첨가하여 증거를 보완해야 한다.
 
당태종때 종국에 첫 전파
 
고대 기독교의 한반도 초전을 시사하는 증거로는 이상의 유물말고도 몇 가지 관련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7세기 말의 고승 혜통(慧通)에 관한 글이 있는데, 그 속에 그가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여기서의 ‘외도’란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뜻하는데, 당시 새롭게 접한 다른 종교란 경교일 가능성이 높다. 혜통은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밀교의 조사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의 천거로 고종 딸의 병을 주술로 치유해준 덕분에 고종과 가까웠다고 전한다. 그런데 고종은 경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인 태종에 이어 당에서 경교를 중흥시킨 장본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주에 경교사를 짓도록할 정도로 경교에 경도된 군왕이었다. 이러한 고종과 친분관계를 맺고있는 혜통으로서는 당에 공전된 경교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 그 내막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외도’란 곧 이 경교를 지칭하는 것이며, 그러한 외도를 ‘서울에서 멀리했다’는 것은 경교가 신라 안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좌로부터) 경주에서 출토된 철제 십자문장식 2점(좌: 5.8×5.6cm, 우: 2.4×3.2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출토된 십자가
 
<삼국유사> 중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전설이나 신화와 유사한 내용들이 발견된다. 예컨대,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는 전설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내용과 비슷하며, 태종대왕 때 청개구리 수만마리가 나무 위에 나타나자 놀란 서울시민들이 달아나다가 100여 명이 죽고 많은 재물을 잃었다는 기사는 ‘출애급기’에 나오는 개구리 소동과 흡사한 점이 있다. 문명현상에서 상사성이 곧 상관성은 아니지만, 서로 비교하여 상관관계를 추론하는 것은 유효한 연구방법이다. 문명간의 상사성은 수용에 의한 모방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보편성이란 문명의 속성에 기인하기도 한다. 즉 같은 환경이나 여건 하에서는 물론, 때로는 다른 환경이나 여건 속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내용과 형태에서 유사한 문명이 창조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문명의 한 속성으로서의 보편성이다. 이러한 점에 유의할 때, <삼국유사>와 <구약성서>에 나오는 전설들간에 어떤 상사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되나, 아직은 연구의 미흡으로 인해 그 상관성 여부는 가늠할 수가 없다.
 
“마귀·외도 서라벌서 멀리했다”
 
이상의 국내 유물과 기록 외에도 한반도 주변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기사들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초전을 일정하게 방증하고 있다. 우리 민족사의 한 구성부분으로서 통일신라와 같은 시대에 남북국 관계를 유지해오면서 교류가 빈번했던 발해에서는 기독교 유물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출토되고, 한때 수도였던 동경 용원부(현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1926년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 만주지방의 안산(鞍山) 부근에서 요대(遼代) 성종 때(11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로 만든 7점의 십자가가 출토되고,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경배도를 방불케 하는 암각화도 발견되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이곳에는 상당수의 경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때가 고려 초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이 지역에는 그 이전에 이미 경교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삼국유사엔 구약성서 내용도
 
이와 더불어 불교의 기독교적 요소도 기독교의 초전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 불교미술인 간다라 미술은 고대 그리스문화에 바탕한 헬레니즘문화의 영향을 받은 데서 비롯된 것이며, 극락정토사상이나 미래(내세)와의 관계에서 현재를 파악하는 미륵불사상 같은 것은 원시불교에 기독교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이름으로 들어온 이러한 사상과 문화를 기독교적 사상과 문화의 간접적 유입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 속의 기독교적 요소는 어디까지나 불교 유입의 수반물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종교로서 기독교 자체의 직접적인 유입이나 전파라고는 볼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초전 현상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비문(정수일 저, <고대문명교류사 연구>, 사계절, 2002, 108쪽)
기독교 동전사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은 일찍이 한국에 4년간 머무르면서 전국의 사찰을 돌아본 후 마지막 1년은 금강산 장안사에 체류했는데, 이때(1917년) 그녀는 절 안에 당나라 때 중국에서 경교가 유행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781년 건립)의 모조비를 세웠다. 고대 동방기독교(경교)의 한반도 전파를 상징하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이와같이 비록 증빙사료는 아직 불충분하지만, 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초전만큼은 그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언제 초전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한반도 전파시원 문제이기도 하다. 비교적 명확한 증빙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국사(751년 건립)에서 출토된 돌십자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초전 시기를 8세기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경교가 중국에 초전(635년)된지 100여 년 후의 일이다. 물론 아직은 고증에서 불확실성이 적지 않고, 개연성의 범위를 크게 벗아나지 못하는 면도 없지는 않으며, 공식적 허가에 의한 공전(公傳)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지만, 그나마 초전의 증빙으로는 볼 수 있다고 판단된다. 앞으로 더 많은 사료와 유물을 발굴하여 초전의 확실도를 더욱 높여야 하겠지만, 이만큼의 논증으로도 이제 한국과 기독교문명간 만남의 역사는 200년이 아니라 그 6배인 1200여 년으로 잡아봄직하다.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기독교의 상징물인 돌십자가가 발견된 사실, 즉 불교와 기독교가 한곳에서 어우러진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불상과 예수상이 한곳에 모셔졌다면 청천벽력이 일어날 오늘의 현실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선이 악으로 변한 세상에서 다시 선으로 돌아가기에는 인간의 지혜가 아직 너무 부족한 현실이고 보면, 그저 그 선을 염불처럼 되뇔 수밖에 없다. 불교와 기독교의 어울림이라는 ‘선’ 앞에서 말이다. 이것이 현대의 퇴행이자 고민이다.
 
ⓒ정수일 교수

[중국 현장 보고서] 제 1부: 중국 기독교 역사 (1)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17세기초를 정설로 보고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한국에 수용된 것은 천주교로서, 일부 양반과 중인계층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을 통하여 마테오릿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천주실의』와 그의 '중국화(본토화)' 선교전략을 계승한 '예수회'의 교리를 수용하게 되었다. 신교는 19세기말에 이르러서야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직접 한국에 전해졌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기독교역사는 천주교(구교)와 기독교(신교)를 모두 합쳐서 겨우 400년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하여 중국의 기독교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온 것은 635년(당태종 9년)으로, 약 136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당대에 처음 중국에 전래된 이래 몇 차례의 수용과 소멸을 거듭하는데, 통설에 의하면 기독교는 4차례에 걸친 전래가 있었다.

기독교의 여러 교파 중에 가장 먼저 중국에 들어온 것은 네스토리우스파(635-845, 斯托利派)로서, 페르시아에 의해 전래되었다. '경교(景敎)'라고도 불리는 기독교는 635년부터 210년간 당조의 수도인 장안, 낙양, 섬서성, 사천성과 양주이남을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845년에 당무종에 의해 금교 되었다.

제2차 전래(1280-1353)는 원대인 13세기로서 400여 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가 다시 중국에 들어오고, 한편으로 로마천주교인 프란체스코회(方濟各會 혹은 法蘭西斯會)가 몬테코르비노(J. Montecorvino, 約翰?孟高維諾, 1247-1328) 선교사에 의해 원의 수도인 캄발럭(지금의 북경, 汗八里)에 전래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기독교는 주로 몽고인에게 수용되고 한인에게는 거의 전파되지 않았으므로,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하다가 1368년 원조의 멸망을 따라 자연히 소멸되었다.

세 번 째 전래는 명말청초(1552-1724)에 이루어졌는데, 예수회 소속의 신부인 사비어(Xavier, 方濟各, 1506-1552)가 1552년에 광동성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어서 마테오릿치, 아담 샬(Adam von Schall, 湯若望), 회르비스트(F. Verbiest, 南懷仁)를 대표로 하는 예수회 신부들이 북경에 도착하여 그들이 지닌 우수한 과학지식으로 황제의 우대와 총애를 받으며 교세를 확장하게 된다. 이때 마테오릿치는 선교전략으로써 기독교의 '중국화'를 시도하여 정기적으로 공묘에 가서 제사하고, 입교한 중국인들에게도 예법에 따라 계속 공자와 조상에게 제사지낼 것을 허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 경전 중의 '天'과 '上帝'로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억지로 비유하였는데, 마테오릿치와 예수회의 이러한 선교방법은 후에 우상숭배 문제로 '전례논쟁'을 일으켜 급기야 중국황제와 교황 사이의 권위의 충돌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충돌은 강희황제로 하여금 1720년에 금교를 결정하게 하고, 옹정제와 건륭제도 그의 뜻을 이어 서양선교사에 대해 엄격한 조치를 취하게 하였는데, 1724년에는 황제의 칙령이 공포되어 천문학자를 제외한 모든 서양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현재 '하나님'을 중국어에서는 '上帝'와 '神' 두 가지로 다 사용하고 있는데, 대륙에서는 '神'을 대만, 홍콩과 동남아국가의 화교들은 '上帝'를 사용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上帝'는 중국의 우상문화 속에서 생겨난 단어로서,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는 영어의 'God'과는 내포하는 문화적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神'이 'God(하나님)'에 대한 바른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중국대륙에서 만든 성경에서는 '神'자 앞에 반드시 한 칸을 비워둠으로써 유일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공간적인 의미가 강한 하늘에 계신 '하느님' 혹은 하늘을 다스리는 '옥황상제'와 변별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아닌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인 창조주이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유일신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는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네 번 째(1807-현재)로 기독교(특히 신교)가 대규모로 북경, 상해, 광주 등지로 전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1807년 영국런던기독교의 신교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羅伯特?馬禮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성경번역자로서, 중국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중국어사전을 편찬하고 성경을 완역해내었다. 런던선교회 소속의 다른 선교사들도 그의 뒤를 이어 언어연구와 문서보급에 주력하였다. 이로부터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 성립까지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각국 교파의 선교사들이 계속 중국으로 들어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이들은 문화교육사업, 의료사업과 출판사업을 복음전하는 주요수단으로 삼아서 선교사역에 훌륭한 효과를 거두었으며, 중국의 전통우상문화를 기독교문화로 바꾸는데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서구제국주의 열강의 사주를 받은 일부 거짓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반기독교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의화단에 의해 수많은 선교사와 중국의 성도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하였고, 중국정부와 일부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배척하고 비판하는 데 빌미를 제공하였다.
 
신문화운동 기간에는 과학과 민주만을 신봉하는 청년들에게 미신으로 간주되어 1922년 3월에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났으며, 국민당과 공산당사이의 국공합작 기간인 1924-1927년 동안에는 기독교와 교회가 서구제국주의의 문화적 침략의 도구라는 이름으로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중국의 교회들은 자구책으로써 외국선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적인 교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80년대의 경제개방 이전까지 중국교회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대 환난 속에서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의 형태로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개방 후 지금까지 꾸준히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있다. 중국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중국을 향한 복음화의 계획을 볼 수가 있다.

 

 

 [중국 현장 보고서]제 1부: 중국 기독교 역사 (2)

<중국 젊은이들의 성(性) 윤리 현장>

20세기 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공산주의도 국가생존의 문제 앞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고, 이제는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데올로기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려하고 있다. 지금 전 세계인의 관심은 오직 자본주의의 본질인 돈에만 쏠려 있다. 현대인은 바로 돈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20세기 80년대부터 경제개방을 통한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데, 이미 곳곳에서 자본주의의 부작용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性) 윤리는 가장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다. 캠퍼스나 공원 같은 공공장소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낯 뜨겁게 진행되는 진한 애정표현 같은 것들이야 이미 중국에 사는 이들에게 익숙한 장면들이 되었고, 이제는 이러한 일들이 중?????고등학교 교실 안에서도 발생한다니, 중국인에게 원래 이러한 정열이 숨겨져 있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주요한 원인으로는 사회주의체제하에 억눌려 있던 본성이 자유분방한 성을 추구하는 서양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 젊은이들에게 무분별하게 수용되고 있는 미국영화라는 대중문화의 영향 하에 자신의 의지로 선택이 가장 쉬운 성개방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 이것은 억눌린 본성의 자유로운 표현과 함께 막연한 미국문화에 대한 동경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금 중국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으며, 돈에 의해 인성이 마비된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중국인들은 돈이 생긴다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돈을 위해 자신의 몸 같은 것이야 얼마든지 팔아버릴 수 있다. 개방이후, 중국인들의 성에 대한 유교적 윤리 관념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이다.

한국어로 ‘영계’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연계(軟鷄)’에서 온 말로, 어리고 연한 닭을 가리키는데, 곧 아주 젊은 여자를 뜻한다. 예전에는 20대 초반의 아가씨를 가리키다가 이제는 여고생 정도의 10대를 가리키고 있다. 그 영계의 나이가 날이 갈수록 어려지고 있으니, 배 불룩한 중년아저씨들이 젊은 아가씨로도 만족을 못하여 이제는 성숙되지 않은 중?고등학교 학생을 그 성희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20대 후반의 나이가 든 아가씨에 대해서는 ‘老鷄’라는 한자어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여자를 왜 닭으로 비유하여 쓰는 것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기생을 ‘妓女’(지뉘)라고 불렀는데, 닭을 뜻하는 ‘鷄’(지)의 발음이 기녀를 뜻하는 ‘妓’(지)의 발음과 같기 때문에, 홍콩에서는 몸 파는 여자를 가리켜 ‘鷄’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鷄’는 원래 중국대륙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바로 개방과 홍콩의 중국반환과 함께 홍콩의 대중문화가 대륙으로 들어오면서 함께 수입된 것이다. 지금 대륙에서 통용되는 많은 신조어들이 있는데, 홍콩이나 대만으로부터 수입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요즈음 중국에 유행하는 속어에 ‘做鷄’(쭈어지)라는 말이 있다. ‘닭이 되다 혹은 닭 노릇을 하다’는 말로, ‘기녀가 되다’는 뜻인데, 즉 돈을 벌기 위하여 돈 많은 중년남자의 정부노릇을 하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젊은 여자들뿐만이 아니라 근래에는 돈 많은 중년여자의 섹스파트너를 하는 젊고 잘생긴 남자들도 있는데, 이들을 가리켜 ‘做鴨子’(쭈어야즈)라고 한다. 그 뜻은 바로 ‘거위가 되다’는 뜻인데, ‘鷄’에 대해 상대적으로 쓰기 위하여 생겨난 말이다. 이렇게 돈을 위하여 몸을 파는 젊은이들 중에 상당수의 대학생들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외국으로 유학가려는 목적을 띠고서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몸 파는 역할을 하는데, 북경영화대학이나 외국어대학에 그 수가 가장 많고 간혹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 같은 최고수준의 대학에도 이러한 대학생이 있다고 한다.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같은 때면 각 대학문 앞에 최고급의 외제승용차들이 줄을 대고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중에 상당수가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젊은 정부들은 돈 많은 중년인들을 가리켜 ‘乾?’(깐띠에-수양아버지) 혹은 ‘乾娘’(깐냥-수양어머니)라고 부르는데, 나이 든 돈 많은 남자와 젊고 아름다운 여자, 나이 든 돈 많은 중년여자와 젊고 잘생긴 남자들 사이에 이런 호칭이 오고간다면, 이런 유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들 젊은이들은 또 ‘무녀(舞女)’와 ‘무남(舞男)’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대부분 댄스파트너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중에서도 특히 북경 제2외국어대학(二外)과 광주외국어대학(廣外)은 이 방면에서 악명(?)이 높은데, 중국인들 사이에는 ‘好女不進二外,好男不進廣外’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 뜻은 훌륭한 여자는 북경 제2외국어대학에 들어가지 않고, 훌륭한 남자는 광주외국어대학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로, 그만큼 이 두 대학의 대학생들이 이런 방법으로 돈을 벌고 유학을 간다는 것일 게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한국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미래가 보장된 일류대학 학생들에게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대체적으로 학력수준은 높지 않고 미모만을 갖춘 젊은이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인데 반해, 중국은 날이 갈수록 이러한 현상이 상층화 되고 지식인들 사이로 급속도로 파고든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두뇌마저 받쳐주기 때문에 돈 많은 이들에게 잠시 잠깐 섹스를 제공하고 끝나버리는 숨겨지고 어두운 인생이 아니라 이 기회를 적절히 이용하여 자신의 출세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의 많은 여류명사들 중에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신이 원하는 성공을 거머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돈이 모든 가치에 우선되고 있는 중국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나가게 될 방향은 어디인지? 하나님께서는 중국복음화를 가슴에 품고 중국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할 일꾼을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세우신 절대가치, 절대도덕, 절대윤리가 없이 흑암에 이끌려 유리방황하는 이 중국의 젊은이들을 향하여 가서 복음전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중국 현장 보고서]제 1부: 중국 기독교 역사 (3)

중국의 "삼자교회"

중국의 교회 하면 떠오르는 것이 '삼자교회(三自敎會)'이다. 그리고 삼자교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성도들일지라도 "삼자교회는 정부의 엄격한 통제하에 운영되기 때문에 복음이 없다"라고 서슴없이 이야기들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삼자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거의 없다. 심지어 '삼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국교회는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나고 중국대륙이 공산화된 후, 애국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는 종교조직인 '삼자애국운동위원회(三自愛國運動委員會)'가 1954년 조직되면서 중국정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중국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중국정부는 기독교와 교회가 서구자본주의의 침략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이유로 들어 중국내의 교회들을 외국 기독교 선교단체 혹은 외국 교회조직들과 분리시키는 종교정책을 단행하였다. 이를 위하여 중국정부는 중국의 자유주의적 기독교지도자들을 앞세워 '삼자개혁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삼자(三自)'는 바로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을 의미하고 있다.

당시 중국내의 모든 교회들은 공산당에 대한 지지와 애국심의 증거로써 삼자애국운동위원회에 가입할 것을 강요받았으며,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반혁명분자로 분리되어 심한 핍박을 받아야 했다. 1958년에 이르러 거의 모든 중국교회가 정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삼자애국운동에 대해 지지를 선언한 교회지도자들조차도 자신들이 착취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6개월간의 정치학습과 노동을 통하여 정신개조를 받아야 했다.

'삼자교회'는 삼자애국운동위원회에 소속된 정부가 공인한 '공인교회(Open Church)'이며, 종교사무국과 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통해 중국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또 '삼자교회'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에 해당하는 '가정교회'가 있는데, 가정교회는 정부에 의해 공인 받지 못한 그야말로 정부의 감시를 피하여 불법으로 개인가정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지하교회'인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10년(1966-1976)기간은 이렇게 정부의 통제를 받는 삼자교회 조차도 미쳐 날뛰는 어린 홍위병들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였는데, 삼자애국운동위원회 지도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구타를 당했고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심지어 맞아죽기도 하였다. 이 기간동안 중국에는 사실상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1979년 중국공산당은 경제원조를 서구로부터 얻어내기 위한 일종의 유화정책으로 종교를 부분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삼자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이로부터 삼자애국운동위원회는 1986년까지 2년 과정의 지방신학교 9개와 4년 과정의 남경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매년 약 각25,000권의 성경책과 찬송가를 배포하였다. 지방정부도 이전의 교회건물들을 지역의 삼자교회 지도자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삼자교회'에 소속된 지도자들과 그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성격을 띄고 있는데, 대략 여섯 가지로 분류해 볼 수가 있다.
 
첫째, 삼자애국운동위원회 관리들이다. 이들은 당에서 임명된 간부들로서 교회업무를 통제하고 정부의 종교정책과 반대되는 이들을 색출하며 당국에서 필요로 하는 종교정보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거의 철저하게 당에 충성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복음보다 당의 이익을 우선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옷을 입고 당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가짜 목회자들이라고 볼 수가 있다.
 
셋째, 복음주의적 목회자들이다. 이들은 가슴속에는 복음을 품고 있고 복음전파를 갈망하면서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양떼를 돌보는 목회자들이다.
이들은 가정교회의 형태로 신앙의 양심을 지키려는 교회지도자들과는 달리 정부와 직접 대립하지 않고 그들의 통제를 받는 척 하면서 교회를 지키고 기도로 양들을 돌보는 신앙인들이다.
 
넷째, 믿음 없이 그저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로서 대부분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기복신앙'의 형태를 띄고 있다.
 
다섯째, 호기심으로 혹은 구경 삼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로서, 겨울을 제외한 봄, 여름, 가을에 삼자교회를 가보면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고 밖에서 돌아다니거나 둘이서 혹은 셋이서 앉아 잡담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거의 이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여섯째,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참 신앙인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시대 시대마다 이 땅에 언약의 백성인 그루터기를 남기실 것을 약속하셨다. 천년이 넘는 긴 세월의 중세교회 암흑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숨겨놓으셨던 그루터기들을 통하여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셨다. 지금 이 중국 땅에도, 말씀이 메말라 있는 '삼자교회'에도 그루터기는 남아있고 또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인도하시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중국복음화를 이루어나가실 것이다. <예은>

 

                                     

 

                               중국과 기독교    

 

자료출처: CGN TV  http://news.cgntv.net/index.asp?vid=25769 

                            

▣ 중국 기독교 역사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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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읽기] 함태경
북경대 정치학 박사, 
국민일보 종교부기자, 
차이나네트워크연구소(CNI) 실행이사
[200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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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가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면밀히 알기 위해서는
중국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수적이다!

이 시간,
기독교에 대해
‘제국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는
외래종교‘라 여겼던 중국정부의
역사적 관점을 들여다보자.

▣오프닝
오늘부터 2차례로 나눠 중국의 기독교 역사, 즉 1949년 이전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중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시기는 현재까지 기록상으로 당태종 9년인 서기 635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기독교협회 상임위원이었던 왕웨이판(汪維藩) 교수가 재미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예술관에 소장돼 있는 한대 화상석을 연구하던 중 성경이야기와 초기 기독교 도안 등 천지창조에 관한 내용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왕 교수는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을 제시하고 중국 기독교 역사를 86년까지 소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이들 한대 화상석 위에 새겨진 도안들은 중동 일대의 초기 기독교 예술품과 동한대의 예술 특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화상석은 한대 분묘의 가장 중요한 수장품이며 쉬저우는 한대 화상석이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는 중국 내 4개 지역 중 한 곳입니다. 이전에도 일부 전문가들이 기독교의 동한대 전래 가능성을 제기한 적은 있었지만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부족해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 같은 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이 공인하는 기독교 전파 연대는 아직도 635년입니다.

▣본론
먼저 경교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당태종의 환대를 받으며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간 알로펜은 경교, 즉 네스토리안교를 전파합니다. 이 네스토리안교는 그리스도의 이성이위론을 주장, 서기 435년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가 창시한 교파입니다. 네스토리안들은 612년경 아랍지역에서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세력의 위협을 피해 동방으로 건너갔고 당시 당나라의 문호 개방정책으로 쉽게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알로펜은 638년 7월에 황제의 윤허를 받아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이후 경교는 841년까지 12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발전해 나가다가 무즉천의 숭불정책으로 잠시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 현종에 이르기까지 황실의 보호를 받고 확장됐습니다. 하지만 당 무종이 도교숭상정책을 실시하며 845년에 불교말살정책과 다른 종교에 대한 배척운동을 전개하면서 경교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경교의 선교전략은 상층부 전도였습니다. 그들은 당나라 조정과 친밀한 관계유지에 힘썼으며 중국인들에게 자기들의 신앙을 이해시키기에 열심이었습니다. 또한 중국 사회의 종교문화 환경에 적응하려고 불교, 도교의 종교언어 더 나아가 유교의 이론 도덕에 기독교 문화를 접목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인들은 기독교를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로 취급했고 심지어는 외국에서 들어온 불교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당무종에 의해 불교와 함께 경교가 쇄락하게 됐는데 불교는 훗날 흥왕하였고 경교는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13세기 말 중국에 들어간 몽고인 중 귀족과 평민이 섞여 있었는데 거기에 경교 신자가 있었습니다. 이 때 경교는 야리가온교로 불렸습니다. 1279년 몽고인들이 완전히 중국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야리가온교(경교)가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몽고인들은 중국에서 엄격한 등급 제도를 적용했고 한족 사람들은 지위가 낮아 원하지 않는 외래 통치자들의 신앙에도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 가톨릭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고 1265년 원의 세조인 쿠빌라이칸이 베니스 상인 폴로 형제를 통해 교황에게 칙서를 보내면서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 프란스시코회 수도사인 몬테코르비노의 요한이 베이징 총주교로 활동한 1305년 6000여명의 기독인들이 세례를 받았고 베이징에 3개의 성당을 세웠습니다. 가톨릭의 선교대상은 상층부에 있는 몽고인과 중동 아시아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한족이 다시 정권을 장악할 때 사라지게 됐습니다. 1368년에 건립한 명 왕조시대는 대부분 쇄국정책을 사용해서 외국인이 중국에 들어오기 어려웠고 선교활동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한 예수회 신부는 중국의 변방에서 “반석아, 반석아, 언제서야 깨어지겠느냐!”고 탄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국에 대해 침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579년 마이클 루게리가 거주승인을 받고 광저우에서 거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1582년 마태오 리치가 중국 마카오에 입국했습니다. 그는 중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양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고 자신을 서양의 승려, 혹은 유학자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회 선교사들은 점차 많아지게 됐습니다. 그들의 선교전략은 중국전통을 존경하고, 중국문화에 접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서양 유교’ 혹은‘서양으로부터 온 공자’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와 중국의 전통문화 사이의 모순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유교화 된 기독교’를 추구한 것입니다.

1643년엔 가톨릭과 중국 전통 문화가 충돌합니다. 천주(天主)와 중국 상제의 혼용, 공자제례와 조상 숭배 등에 대한 중국예의지쟁(中國禮儀之爭)이 발생한 것입니다. 여기서 강희황제와 중국 조정이 교황에게 그들의 전통의식과 전통문화에 대해 제시한 의견은 중국인에 있어 상제란 개념은 범신론적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참 하나님을 의미하고, 중국인이 고대부터 하늘을 경배한 사상(경천사상)은 그저 물질적인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중국 전통사상이고 공자제례는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중국 전통문화와 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1723년 왕위에 오른 옹정황제는 1692년 강희 황제가 발령한 보교령(保敎令)을 폐지하고 모든 교회를 폐쇄했습니다. 또 6개월 내에 모든 선교사들이 중국을 떠날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것은 가톨릭 활동의 공식적 금지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청도 이에 지지 않았습니다.
1742년 교황청은 1715년의 금지령보다 더 엄격한 결의를 함으로써 조정과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습니다. 1757년 건륭 황제는 중국의 제례에 반대하는 모든 선교사들을 쫓아내도록 했고 이로 인해 1775년 예수회는 해산됐습니다. 이후 가톨릭의 선교활동은 지하로 숨어 비밀리에 가정교회를 건립하고 성직자들을 배양하게 되었고 선교대상도 상층부에서 하층민들을 위주로 바뀌었습니다.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본격화되기 전에는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 활동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명나라 말엽에는 궁중에만 500여명의 신자가 있었고 전국적으로 20만 명에 달했습니다. 19세기말엽에는 라후족 이족 등 소수민족도 가톨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중국 전통문화와의 모순과 충돌로 일어난 예의지쟁, 청나라 조정의 장기적인 금교정책, 예수회의 교황청에 의한 강제 해산 등으로 카톨릭 선교는 몰락하게 됐습니다.

이제 개신교의 중국선교를 살펴보겠습니다. 1807년 로버트 모리슨이 중국
에 간 첫 번째 선교사입니다. 그는 중국 선교의 개척자로서 사전을 만들고
성경을 번역했으며 7년 만에 중국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1840년 아편전쟁이후 런던회 화란전도회 미국침례회 미국성공회 영국 해외성경회 등이 중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그들은 마카오, 광저우지역에서 사역했습니다. 1842년 난징조약을 통해 연해주가 개발되면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대거 중국에 입국, 해안 지역 선교를 시작했으나 중국인들은 아편전쟁과 기독교 선교사와의 관계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게 됐습니다. 갖가지 불평등 조약 뒤에는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의 수모를 받아 온 중국인들에게는 적대심과 서양인에 대한 증오의 마음이 동시에 싹트게 됐습니다.
그 이유를 들자면 첫째, 선교사들이 아편을 수출하는 회사의 직원 혹은 통역관으로 일하며 아편 무역과 특수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선교사들은 아편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중국 정부에 대해 강력한 정책을 펴서 문호를 개방시켜야 한다고 했으며 직접 모국에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셋째, 일부 선교사들은 아편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중국의 해안과 연해주 또는 정부의 사정을 살펴 전쟁수행과 전략 수립을 도왔으며 전쟁에서도 통역이나 의료 활동으로 전쟁을 도왔습니다.
넷째, 선교사들은 불평등 조약의 주요한 수혜자였습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선교사들은 특권을 갖고 거주하게 됐으며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면서 선교활동에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렇게 1900년 초까지 기독교가 연해지구에서 점차적으로 내륙 안으로 확산되어가면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상당히 많은 지식인들과 관원들이 배후에서 선동하고 백성들을 조직해 외국인 배척과 기독교 반대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840년부터 1900년까지,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400여 개에 달했습니다. 대부분이 1860-90년대에 이뤄졌습니다. 중국에서 비기독인들은 기독인이 한 명 더 있으면 중국인이 한 명 적어진다고 인식했습니다. 불평등조약으로 외국인들은 여러 가지 특권을 가졌고 민간종교와의 충돌가운데서 언제나 교회는 최종적으로 이겼습니다. 교회의 신자들과 관원들은 악독과 훼방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하면서 명목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불량자들이 교회에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고 거짓으로 예수를 믿고 사람들을 모욕하며 자신의 사욕을 채웠습니다. 그리하여 적대감은 쌓이게 됐고 그 결과 1900년 세상을 놀라게 한 의화단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반세기동안 마음에 쌓인 적개심과 분노들이 쌓여 일어난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에 개신교의 선교전략이 눈에 띕니다. 내지선교회를 창립한 허드슨 테일러가 복음을 전하며 교육선교사업에 힘쓰면서 출판을 시작한 것입니다.

의화단운동은 수많은 선교사와 중국교회 사역자들에게 반성의 목소리를 내게 한 촉매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불평등조약이 선교의 문을 열어 주기는 했지만 중국인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907년 상하이에서 세 번째 선교대회가 열린 때는 모리슨 선교사가 중국에 온 지 100주년이 된 시기였습니다. 이 때 각 종파에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수는 3833명, 그 중 세 번째 선교대회에 출석한 사람은 1179명이었습니다.

▣칼럼포인트
-초창기 천주교의 선교전략 - 중국전통을 존중하며, 중국문화에 접근.
-1643년 가톨릭과 중국 전통 문화의 충돌로 예수회 해산.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개신교의 선교활동 본격화.
-1807년 중국에 간 첫 번째 선교사 - 로버트 모리슨
-1900년 아편전쟁과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의화단 사건 발생
-중국 내지선교회를 창립한 허드슨 테일러

▣클로징
중국인들은 서방을 이해하는데 있어 두 가지 틀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서방국가를 적으로 보는 것, 즉 ‘우리 민족이 아니면 마음이 반드시 우리와 다르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우리를 죽이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진보적인 것을 따라 배우고 본 받아 온전히 서방 화하여 중국을 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국인의 기독교에 대한 입장이기도 합니다. 전자는 기독교가 침략자의 도구라는 것이며 후자는 기독교가 문화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중국 근대사에서 기독교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에 걸친 모든 영역에서 역할을 감당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앞으로 어떻게 선교활동을 펼쳐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중국은 이후로 보다 더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얼마나 준비됐느냐가 우리의 행로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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