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수민족 복음화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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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 : 왕 유(중국 선교사)
진 행 : 석은혜(선교사/본지 편집장)
장 소 : 중국어문선교회 회의실
일 시 : 1999년 7월 2일

중국에는 55개 소수민족이 있습니다. 먼저 어떤 민족들이 얼마나, 어떻게 복음화되었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55개 소수민족 중 복음이 들어가 교회가 세워져서 자력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민족은 일반적으로 6개 민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조선족, 리쑤족, 먀오족, 이족, 징포족, 두롱족입니다. 조선족을 제외하고는 주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복음화 비율을 살펴보면, 리쑤족은 70% 이상 복음화 되었고, 먀오족과 이족은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어떤 지역은 97~98%의 복음화율을 보이고 어떤 지역은 0%의 복음화율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같은 민족이라도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소수민족 전체의 복음화율을 말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리쑤족, 이족, 징포족의 복음화율은 최소한 7%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선족의 복음화율은 잘 모르겠습니다. 두롱족은 정확한 통계가 나와있지 않은 상태이고, 샤머니즘적 요소가 강하며 리쑤족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자생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스스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민족은 리쑤족, 먀오족, 징포족, 이족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이족, 하니족, 라후족, 다이족 등은 한족과 함께 모임을 갖고 있으며 예배 중 한어(중국어)를 사용하거나 민족 언어로 동시통역하기도 합니다. 다이족의 경우, 자신들의 민족 교회를 세운 지역이 있으며 장로가 세워지는 등 지도자도 존재합니다. 누족은 리쑤어로 드리는 리쑤족 예배에 함께 참석하고 있습니다. 누족은 생존을 위해 많은 부분을 리쑤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이들 민족의 대부분은 공산당 집권 이전에 활동했던 서양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리쑤족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리쑤족 자체적으로 신학교를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먀오족 역시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자신들의 선교역사를 말합니다. 이족과 먀오족이 함께 공부하는 성경학교 역시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반면 다이족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중국 내에서 복음을 접하여 자생적으로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는 극히 드문 경우입니다.

복음화된 소수민족들이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같은 소수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전하고 있지 않다면 어떤 이유입니까?

현재 가장 활발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민족은 리쑤족과 다이족입니다. 리쑤족은 두롱족, 징포족, 누족과 같은 타민족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리쑤족은 이들 세 민족에게 신앙뿐만 아니라 생활 면에서도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다이족 역시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어 기독교 성장속도가 굉장히 빠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기 전, 선교사들이 다이족 문자로 신약성경을 번역하기도 했지만, 선교사가 철수하고 나서 신자가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도시에 나갔다가 복음을 듣거나, 다이족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 의해 복음을 접하면서 자생적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두 민족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다른 지역에 있는 같은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문화적 요인과 지리적 요인을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족의 경우,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문화나 언어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먀오족의 경우는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먼 거리를 이동하여 복음을 전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아직 이들 민족은 장애를 뛰어넘어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소명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화된 소수민족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소개해 주십시오.

보통 한족(중국인)들은 일주일에 한번 주일 오전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소수민족 대부분은 주일 낮, 저녁, 수요일 저녁에 모두 집회를 갖습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 교회가 열려있어서 특별한 모임이 아니더라도 하루 일을 마친 사람들이 저녁에 교회에 모여 찬양하고 교제를 나눕니다. 왜냐하면 달리 즐길만한 문화나 오락시설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녁마다 모여 찬양으로 시간을 보내다보니, 먀오족의 찬양 솜씨는 인근에 소문이 나서 한족 교회에 초청을 받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잦아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공연행사가 되어가는 것 같아 조금 염려가 됩니다. 리쑤족 역시 찬양을 잘합니다. 어떤 지역을 방문하여 리쑤족 교회의 수요 저녁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30여 명이 모였는데, 성가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4부 화음으로 나누어 리쑤어로 찬양하는데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소수민족들은 한족의 찬양곡을 선별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자기 민족 고유의 곡조로 만들어진 찬양을 부르기도 합니다.

소수민족은 문맹률이 높다고 하던데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요?
샤머니즘적 요소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문맹률이 0%에 가까운 우리나라에도 기복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신앙요소가 있는데, 문맹률이 높은 소수민족에게는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민족들의 문맹률이 높다고 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글을 읽을 줄 압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문자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민족에게도 자기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자기 민족의 문자는 모르지만 이웃 민족의 문자는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지 문자를 안다고 해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읽기는 읽어도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복음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지,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재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복음이 전해지려면 성경이 꼭 필요합니다. 현재 리쑤족과 징포족은 신, 구약이 번역되었고 먀오족, 이족, 다이족은 신약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니족, 라후족, 와족은 일부만이 번역되어 있고, 누족은 리쑤족의 성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소수민족들이 기복적이고 샤머니즘적 신앙요소를 갖고 있는 이유는 높은 문맹률 탓도 있지만, 성경을 제대로 가르쳐줄 지도자가 없는 이유도 크다고 봅니다.

소수민족 내에 목사안수를 받은 지도자가 있습니까?그들은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습니까?

삼자교회를 통해 안수 받은 목사가 있지만, 극히 소수입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목사 한 사람이 200여 개의 교회를 돌보고 있어, 목사가 아주 부족한 상태입니다. 목사가 없는 교회의 경우, 평신도 중에서 신앙연륜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예배를 인도합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 수학능력이 있는 사람은 신학교에 가서 한족들과 함께 공부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운 소수민족 신학교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공부합니다.

소수민족 교회도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로 나뉘어져 있습니까?

소수민족 내에서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를 구분하기란 어렵습니다. 한족처럼 종교국 관할이 아니라 소수민족 종교로 처리하기 때문에, 삼자에 등록은 시키지만 삼자의 간섭은 그리 많이 받지 않습니다. 반(半)삼자라고 부를 수 있겠죠. 물론 삼자에 등록하지 않은 교회도 있습니다. 삼자에 등록한다고 해도 별 간섭은 받지 않지만, 당이 세운 제도권 안에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 삼자에 등록하지 않습니다.

소수민족 젊은이들에 대한 복음화율은 높은 반면, 나이든 분이나 노인들은 예수를 잘 믿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젊은이들에 대한 복음화율이 높은 지역도 있고, 노년층의 복음화율이 높은 지역도 있습니다. 교회에 주일 예배만 있는 곳은 노년층이 많고, 평상시에 교회 안에 교제와 찬양의 분위기가 있는 곳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입니다. 청년부라고 이름지어지지는 않았지만, 젊은이들이 저녁에 교회에 모여 한쪽에서는 찬양을 하고 한쪽에서는 교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교회가 문화공간으로 활용되는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양과 위생교육, 성경공부 등 말입니다. 그러나 외국인이 장기적으로 거주하기에는 신분노출 등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선교사로부터 개인적으로 훈련을 받은 현지인이 이 사역을 감당한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소수민족 선교에 있어서 한족을 통해서 선교할 때의 장, 단점과 한국인이 직접 선교할 때의 장, 단점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현재 한족이 소수민족 선교를 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족과 소수민족 간에 존재하는 민족 감정입니다. 신장 위구르자치구에서 사역할 때, 선교사가 한족과 관계된 것을 알면 위구르 신자들이 그 선교사와 관계를 끊을 정도입니다. 한족 스스로도 민족우월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반면 한족이 소수민족 선교를 할 경우의 장점은 외국인보다 언어와 문화적 장벽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인이 소수민족에게 접근할 때, 그들처럼 소수민족인 조선족과 혈통이 같다는 점은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인이 언어와 문화와 교통의 불편함을 극복하고 그들에게 갈 수만 있다면 환영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와주러 왔다■, ■가르쳐주러 왔다■는 등의 접근 보다는 겸손한 태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장벽은 언어와 문화입니다. 소수민족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중국어와 소수민족 언어를 모두 습득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소수민족 지역의 낙후된 사회와 문화는, 자신이 살던 곳의 문화적 혜택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요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 선교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면을 준비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조급하게 열매를 기대하는 요구가 없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는 성급하게 열매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선교사 자신도 조급하게 사역하다보면 대상 소수민족을 이해하기도 전에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한국 교회가 빠른 열매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선교사 자신이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재정 후원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범위 내에서만 사역하고 조급하게 열매를 기대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언어가 철저히 준비되어야 합니다. 소수민족 언어 구사만으로는 사실상 선교가 불가능합니다. 중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중국어를 반드시 구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국어와 소수민족 언어, 두 가지를 모두 습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민족학과 문화인류학 등을 공부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요즘 점점 많은 단기선교팀들이 중국의 소수민족 지역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소수민족 선교를 할 때 유의할 점은 무엇입니까?

우선 중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는 개방된 지역과 미개방 지역이 있는데 이에 따라 선교전략이 세워져야 합니다. 개방된 지역에서는 공개적으로 전도할 수 있지만, 미개방된 지역에서는 신분을 감춰야 하고 전도의 열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단기선교는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전도 역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나게 될 상대방에 대한 이해 없이 짧은 언어나 전도지 하나 주는 것으로 전도하는 것은 그 민족을 위한 전체 선교전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 민족을 향한 전체적인 전략을 생각하고, 내가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직까지 복음화 되지 않은 소수민족이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복음 전하기 어려운 민족은 어느 민족입니까?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티벳의 짱족입니다. 그들이 믿는 라마불교는 신앙이라기 보다 그들의 생활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방법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회교권에 속해 있는 민족으로서 주로 서북쪽에 있는 위구르족, 회족, 어원커족 등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인구가 극히 적은 민족으로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아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난 민족들입니다. 지눠족, 어룬춘족 등이 이에 속합니다.

한국에서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중보기도, 단기선교를 통한 민족 리서치와 그 자료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안내하고 소개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소수민족 선교를 위해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한족 선교에 있어서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지도자 양육입니다. 이것은 이미 사역자가 그 지역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소수민족에게 있어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민족을 향해 가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가지 않고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의 일들도 있을 수 없습니다. 가야만 그 민족에 대한 연구도 할 수 있고, 교회개척도 할 수 있고, 성경번역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는 것■연구, 조사■교회개척■성경번역■지도자 양육의 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항간에 소수민족 지역에 사역자가 너무 많이 몰려있다고 염려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네이멍구, 신장, 시짱(티벳), 윈난, 쓰촨, 구이저우, 광시, 동북 등을 소수민족 지역으로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사역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윈난과 쓰촨을 합쳐서 40가정이 들어와 있는데, 이것은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 사역자들 모두가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선교하기 위해 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족을 대상으로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윈난성의 65%는 한족이며, 쓰촨성 인구의 대부분도 한족이기 때문입니다.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여전히 더 많은 사역자를 필요로 합니다.

장시간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중국 소수민족 선교가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정리/ 박선경■자원봉사자
출  처 : <중국을주께로> 1999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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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부동산 사랑
글쓴이 : 나누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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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56개 소수민족:전통의상모음
 




커얼커즈족




라후족




무라오족




서족




동족




어워커족




미아오족




누족




塔吉克族




마오나족




징족




후이족




仡佬族




傈僳族




징포족




撒拉族




아창족




창족




다우얼족




위그르족




이족




여러쓰족




동향족




고산족




루어빠족




허저족




어루춘족




바오안족




布朗族




수이족




야오족




리족




두롱족




조선족




하니족




타타얼족




우즈베키족




바이족




경파족




투족




위꾸루족




다이족




먼빠족




더앙족




지누어족




한족




투지아족




몽고족




하사커족




장족




와족




뿌이족




푸미족




만족




나씨족




창족

 출처: http://jkshin.idomz.net

                         -중국의 소수민족-

1. 소수민족의 기원

(1) 중국국경의 역사와 완성(소수민족의 형성배경)

중국국경의 완성이 곧 소수민족의 형성기원이다. 중국은 대국(大國)답게 국경을 대다수의 한(漢)족만이 사는 곳을 지정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지역까지 중국의 땅으로 지정하게 된다. 그로 인해 주변국가의 민족들이 자의든 타의든 중국에 살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소수민족들의 대부분이 국경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漢)족은 화하족의 후예인데, 이 민족은 진나라로 중원을 통일한 이래 한, 삼구, 진, 남북조, 수, 당, 송, 명대를 지배하였고, 지금은 중국과대만을 통치하고 있는 중화민족의 골간이다. 중국은 화친책·이이제이·원교근공책등을 사용하여 중국 중심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 중심적 세계관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투 앞에 그 무력함을 드러낸다. 중국역사에서 나타난 민족의 수는 무려 140여 족에 달하지만, 수천 년동안의 동화과정 속에서 현재까지 남아 생존하고 있는 민족은 한족 이외에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지금의 국경은 청시대부터 확고해 지는데, 1881년 청·러의 페테르부르크조약(일리조약)을 비준하였다. 82∼84년에 걸쳐 7개의 국경조약이 체결되어 현재 중국 북서부의중소국경이 거의 확정되었다. 이리하여 이때까지 국제적으로 승인되지 않았던 중앙아시아 국경의 중요부분이 확정되었다. 청조의 강희·옹정·건류의 시기에는 소수 민족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가 한층 강화되었고 중국의 통일 민족국가의 출현에 따른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건륭대의 관할 영토는 18개 행성과 순천부, 성경(盛京 길림·흑룡간 지역 포함) 이외에도 내몽고, 청해 몽고, 티베트, 신강 등지가 포함되었다. 84년 청조는 신강지방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감숙신강 순무라는 관직을 신설하여 우루무치에 주재시키고, 좌종당 등의 강한 요청을 실행에 옮긴다. 이리하여 위구르·카자흐·몽고·키르기즈·타지크·시보·타타르·다홀·滿(만)·漢(한) 등 제 민족이 거주하는 천산 남북로가 청조의 직접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만주국의 붕괴, 대만, 팽조도(澎潮島)가 반환되어 국민당정부는 외몽고, 제2차대전 중부터 잠시 독립경향을 강하게 보인 신강, 와전한 자치를 실행한 티벳을 제외하고 거의 청조 말기의 영토를 회복한다. 1949년 신중국이 계승한 영토는 국민당시대의 바로 그것이었다. 외몽고는 1921년의 독립선언 이후, 사실상의 독립국인 몽고인민공화국이었다. 소련과 국민정부의 관계는 한때 외몽고 때문에 복잡한 양상을 보였지만 46년 장개석은 당분간 독립국가로서 인정하기로 하였다. 신중국도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외몽고 서북부의 탄누토바지방은 몽고국의 영토로 보여지는데 44년 소련령으로 편입되었다. 내몽고의 독립운동은 일본 군부가 이용했었는데 중일전쟁 종결과 함께 비극적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후 내·외몽고 통일을 지향하는 운동도 발흥했으나 중민정부와 소련 틈에서 눈치만 보면서 방향을 잃다가 1947년 중국 당원 계통을 중심으로 하여 내몽고 자치정부가 성립하였다. 이것이 신중국 성립에 의해 내몽고 자치주로 변동되었다.

신강에서는 터어키계 주민을 중심으로 하는 반란이 44년에 일어나 "동터어키공화국"을 선언했다(중국도 한때는 "三區革命"이라 하여 높이 평가함). 신강에서는 그 후 분열상태가 생겼는데, 49년 2개의 정권이 똑같이 중국의 제안에 따라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했다.

티벳의 다라이 라마 정권은 중국이 자기들의 종교를 억압할까 두려워하였는데 티벳이 신중국의 한 영토로서 지역자치를 행하라는 중국의 제안에 응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중국은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1951년 「티벳평화해방협정」을 체결하여 신중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중·인 양국이 주도하는 평화외교가 아시아에서 빛을 발하던 시절에는 심각한 국경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50년대말에 이르러 티벳에 반란이 일어나 독립을 주창하는 집단이 다라이 라마를 옹립하고 인도에 망명하게되자 중·인 국경은 돌연 긴장하였다. 인도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국이었기 때문에 영국이 마음대로 국경선을 그어 놓은 것을 그대로 계승했던 것이다. 신중국 56년 3월에서 57년 10월까지의 사이에 신강과 티벳 중심을 연결하는 신강공로 (新藏公路)를 건설했다. 국경분쟁은 59년부터 3년간 계속되었는데 대규모 충돌은 62년 여름에서 가을에 결쳐 있었다. 62년 11월에 중국은 일방적 정전과 철수를 선언하고 쌍방이 종래 지배했던 영역으로 환원할 것을 주장했다. 찐은 중국이 지배하고 부탄 동쪽의 히말라야 남쪽은 인도에게 양보한다는 것이었다.

1960년 버어마와의 국경조약에서 중국은 북부국경에서의 맥마혼 라인을 인정하고 동부에서도 과거 국제연맹 알제리위원회가 권고했던 내용을 인정, 대폭 양보를 하였다. 1961년 네팔과의 국경조약에서 네팔은 새로운 지역을 얻었지만 상호의 주민이 국경을 넘어 농경과 목축을 하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1962년 몽고와의 국경조약에서도현안의 대부분을 몽고에게 유리하도록 해결했다. 1963년 파키스탄과의 교섭에서도 파키스탄은 경제적으로 유용한 지역을 얻었다. 65년 아프카니스탄과의 국경은 대체로1895년의 英·路 파미르조약을 답습하여 결정되었다. 북한과의 국경은 지도를 개정하면서(1954) 종래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그리고 천진조약에 의하여 프랑스와 국경을 확정했던 베트남·라오스 양국과 같이 국경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64년부터 시작된 중·소국경 교섭은 소련측이 "중·소국경은 이미 명확히 결정되어 있다"라는 태도를 견지하여 진전이 없었다. 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중국이 급진적 자세로 강하게 나오자 처음의 국지적 불화는 대규모적인 전투로 발전했다. 기금까지도 동북지방에서의 중·소국경에는 아직 미확정 부분이 많고 파미르고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몽고 서부에서 파미르에 이르는 국경도 확정되었지만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2. 소수민족의 개관

중국민족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소수민족들과 중원에 기반을 둔 화하족 간에 끊임없는 갈등과 동화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통일을 형성하여 오늘의 중화민족을 이루었다.

총면적 959만 평방km의 광대한 대륙에는 약 13억의 인구가 있다. 이 인구의 92%가 한족(漢族)이며 나머지8% 정도가 소수민족에 해당한다. 한족에 비해 인구가 소수인 까닭에 총칭하여 소수민족이라 부르고 있다. 중국 당국은 한족 이외의 소수민족을 55개 민족으로 확정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미확인 상태에 있는 인구 1000명 미만의 소수민족은 포함하지 않은 숫자이다.

각 소수민족 수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 중에서 100만 명이 넘는 소수민족은 장족, 만주족, 회족, 위구루족, 묘족, 이족, 조선족 등 15개 민족이고, 10만에서 100만명 사이는 13개 민족이며, 나머지 소수민족은 10만 명 이하에 머무르고 있다.

소수민족들은 비록 인구수에 있어서는 당대적으로 열세이지만, 전국토의 약 60%에 걸쳐 넓게 분포되어 있고 특히 변강(邊疆)지역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시되고 있다. 주로 내몽고자치구, 신강위구루자치구, 서장자치구, 감숙성, 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녕하회족자치구, 귀주성, 칭해성, 운남성, 사천성, 광서성 및 동복지방 등에 살고 있다. 또한 이들이 사는 대부분의 지역은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다시 말해 소수민족들이 사는 이들 지역은 풍부한 경제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산업화와 현대화정책을 추진해감에 따라 중국 경제에 없어서는 안될 핵심적인 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고, 동시에 이 지역들은 대부분 러시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베트남등 많은 국가들과 접경하고 있는 특수성 때문에 특히 소수민족들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다.

따라서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의 경제적 잠재력과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동질성을 저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경제수준을 높이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1) 소수민족 생활과 문화

1948년 제정한 중화인민공화국민족구역자치법안(中華人民共和國民族區域自治法案)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다민족 국가로 형성된 중국은 민족구역자치를 실행함으로써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의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소수민족의 문화적 특징을 다음 세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 한 민족의 발전과정 중 생산에 유리한 것은 계속 유지하고 더욱 활용한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남녀분업, 공동노동, 근면검소 등이다. 둘째, 한 민족의 발전과정 중 생산활동에 있어서 그다지 큰 장애를 주지 않거나 그 영향이 그다지 크지 않은 것은 계속 유지하거나 또는 개혁한다. 예를 들면 음식의 취향, 복장형태, 얼굴 문신 등이다. 셋째, 한 민족의 발전과정 중 생산에 유해한 것은 마땅히 개혁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부모에 의한 독단적인 혼인, 금기(禁忌), 미신, 남존여비 등이다. 1956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이런 여러 가지 풍속습관의 분류를 기준으로 끊임없이 개혁을 추진하여 왔으며 이풍역속(移風易俗)을 통해서 소수민족이 공통된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해 나가길 희망하고 있다.

북부지방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강인 후앙허(huang he)가 가로지르고 있다. 비옥한 황토 고원 지대가 이 지역의 서쪽 부분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강우량이 부족하고기후를 예측할 수 없어서 이 지방의 땅은 매우 척박하다. 이 지방의 동쪽은 중국 북부의 평야 지대로서 중국 문명이 처음으로 발생한 곳이다. 이곳은 기름진 농업 지대로서 오랫동안 중국의 문화적 중시지가 되어오고 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은 이곳 중국 북부의 평야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베이징의 동쪽 해안에 자리잡은 천진(Tianjin)은 발달된 산업과 성장하는 상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이 지역의 주요 도시들은 잘 발달되어 있어서 중국의 기술 부흥의 중요한 경제적인 기반이 되고 있다. 최근에 소수민족들이 도시로 많이 이주해서 살아가고있다.

동북 지방은 "만주"로 알려져있다. 그것은 17세기에 중국을 정복하고 청조를 세운 만주족에게서 유래된 이름이다. 해를 거듭하면서 만주족은 그들의 고유한 민족적인 특성을 상실하고 한문화에 동화되었다. 이 지방은 급속히 산업화되어 가고 있다. 풍부한 광물을 채굴하고 개발하기 위해 많은 광산이 설치되었다. 안산(Anshan)의 철 광산 따징(Dajing)의 유전 및 푸산(Fushan)에 있는 "석탄자본"(coal capital)이 가장 주요한 산업의 중심지들이다. 북동 지역의 평야에서는 밀이 생산되며 광대한 산림지대에서는 목재와 모피가 산출된다.

서북 지방의 신지앙-몽골 지역은 내몽골의 몽골족, 신지앙의 위구르족, 터키족, 카자크족, 키르기즈족, 회족과 같은 다양한 종족 그룹의 본고장이다. 이 민족들은 역사 속에서 비교적 최근에 중국에 통합된 민족들이다. 그들 중 다수가 회교도이다. 1960년 이래로 많은 수의 한족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오고 있다. 간혹 오아시스가 있어 가축 사육과 멜론, 포도, 대추, 야자 등과 같은 과실을 재배할 수 있다. 전통적인 유목민들은 현재 큰 방목장에서 말과 양을 기르고 있다. 그리고 풍부한 광물과 석유가 풍부하게매장되어 있는 지역으로 유명하며, 소련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신지앙과 내몽골은 둘 다 자치구이다.

서쪽 티벳고원 역시 자치구를 형성하고 있다. 티벳은 역사적으로 속국이었지만 1949년 공산주의의 승리에 잇따라 중국에서 없어선 안될 부분이 되었다. 티벳족은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다. 불교의 한 형태인 그들의 종교는 그들의 사회를 통합해주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남부 지방의 언어 형태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한족이 계속해서 남부 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그 지역의 원주민들이었던 소수 민족들은 밀려나거나 그들에게 흡수 되어버렸다. 방언으로는 상하이어, 아모이어, 민난어, 커이아어(客家), 광동어 등이 있다.

남서 지방은 쓰츠우안 분지와 원꾸이 고원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이 풍부하다. 이러한 좋은 기후로 인해 四川省 - "하늘나라"- 은 중국에서 생산량이 가장 많은 지역 중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대부분의 한족 주민들이 비옥하고 관개가 잘된 계곡에서 쌀, 콩 등의 농작물을 경작한다.

원꾸이 고원은 지형이 험한 지역이다. 경작지는 10% 정도로 제한되어 있다. 이 지역에는 한족의 영향력이 별로 미치지 않았다. 아열대의 산악 지방이라 토착민들이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큰 소수 민족인 주앙족, 미아오족, 위구르족, 야요족, 뿌이족과 함께 이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태국과 미얀마와 국경을 이루는 지역에 다른 많은 인종 그룹들이 거주한다.

(2) 소수민족의 언어(方言)

전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漢)민족이 사용하는 한어를 일반적으로 가르킨다. 1920년대부터 "보통화"라고 할 수 있는 國語를 소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광대한 땅과 유구한 역사를 가진 중국에서는 한(漢)민족 사이에서도 수많은 방언이 사용되어 국어-표준어로 北京語-의 보급은 어려운 문제이다.

그런중에도 매스미디어 등을 통하여 "북경어" 보급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으며 도시 청소년의 많은 수는 보통화를 듣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21세기에는 한자를폐지하고 로마 方式으로 표기할 목표를 세웠는데 전도는 매우 어렵다.

50개가 넘는 소수민족의 언어문자에 대해서는 보호 정책이 취해져 옛날부터 고유문자와 문헌을 가지고 있는 몽고족, 티벳족 등은 종래의 문자 표기를 답습하고 있다. 문자를 가지지 못한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1956년 이후 로마자 표기를 행하도록 했지만 제 민족간에 문자 선정을 둘러싸고 유동적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3) 소수민족의 인구정책과 이동

중국은 소수민족에 대한 인구문제에 있어서 한족의 가정인 경우에는 산아제한 정책으로 1명으로 제한하고, 소수민족인 경우에 2명(단 3년 이상의 차이를 두고)까지 허용하는 정책을 펴고있다. 또한 소수민족이 주로 살고 있는 농촌 인구구조를 보면 1949년 이전에 농촌인구는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였고, 그 이후에 도시인구는 급속히 증가했다. 특히 1978년부터 개혁 개방정책을 실시한 십여 연내에 도시의 노동시장이 급속히 증가 확대됨으로 인하여 많은 농촌인구를 도시로 흡수시켰고, 동시에 중소도시와 새로운 도시가 형성 발전됨에 따라 많은 농촌인구가 도시인구로 편입되었다. 1992년 말 현재 도시가 507개로 증가하고 도시인구는 3억 7,254만 명, 전체 인구의 32.33%를 차지하였고, 농촌인구는 67.67%를 차지하였다. 이런 현상은 상공업이 점점 발달함에 따라 도시인구의 비중이 갈수록 증가한 반면에, 농촌인구는 점점 축소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3.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

중국의 역사는 한족의 팽창과 소수민족의 저항으로 점철되었다. 한(漢)족은 중원지역을 중심으로 제국의 창건, 다양한 문화와 경제의 발전을 통하여 사방으로 확장하면서 여러 소수민족을 복속시켜 나갔다. 따라서 이미 주(周)대에 이르러 주(周)의 직접적인 정치적, 군사적 지배를 받는 지역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소수민족 지역까지 망라한 "천하"의 개념을 성립시켰고, 진(秦)과 한(漢)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직접적인 통치 지역인 내신(內臣)지역과 문화적인 지배를 받는 외신지역으로 구분하면서 한족 중심의 세계관과 세계질서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이 언제나 통용되지는 않았다. 당시의 군사적, 정치적 세력관계에 따라서 때로는 친화정책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소수민족에 의하여 굴욕적인 침략과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중국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소수민족정책은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수소민족의 동화를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것이었다. 한족과 소수민족의 대등한 관계에서 출발하여 소수민족과 한족을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 한족 중심의 위계적인 천하 속에 소수민족을 포함하게 하는, 소수민족들의 일방적인 동화를 요구하였다.

국민당 정부도 소수민족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국민당 정부가 비록 헌법에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교육, 문화,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였지만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못했다. 손문이나 장개석 같은 국민당 지도자들도 전통적이고, 의례적인 오족공화(五族共和)만을 주장했다. 그것도 한족을 중심으로 나머지 4개 민족이 한족에 동화하는 형태로 대한족(大漢族)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전통적인 중화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초기 소수민족정책은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제시된 민족자결권의 인정과 소비에이트 연방공화국의 건설이란 슬로건에 영향을 받는다. 중국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회의(1922년 7월)의 선언문은 몽고, 서장, 신강의 해방과 자치를 요구하고 진정한 자유연방제의 바탕에서 중화연방공화국을 건립함으로서 중국의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초기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정책도 구체적인 형태를 띤 것은 아니고 상징적인 것에 급급했다. 그러나 국공합작의 결렬과 국민당 정권의 탄압으로 공산당의 거점이 강서와 호남의 산간 밀림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보다 혁명적인 소수민족정책을 표명하게 되었다. 소수민족의 완전한 자결권, 특히 분리와 독립까지도 인정하는 혁명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경향을 보였으나 소수민족에 대한 현실적 경험이 쌓이고 소수민족 지역에 근거지를 건설하면서 점차로 자결권보다는 자치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입장은 소수민족의 분리와 독립까지도 인정했던 초기의 혁명적인 정책노선으로부터 점차로 통일정부의 수립과 민족자치의 실시라는 차원으로 수정, 정리되었다. 대약진운동 이후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 소수민족정책은 좌파와 실용주의의 격렬한 노선투쟁의 대상이 되어 왔고, 이같은 지도층의 대립과 갈등으로 말미암아 소수민족의 자치 영역이 확대되고, 좌파적 정권하에서는 소수민족의 자치 영역은 위축되고 소수민족의 다양성과 자율성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모택동의 이론이 가미된 중국의 민족정책은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의 계급투쟁으로 전체 사회발전을 이룬다는 주지로 처음부터 정치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소수민족의 사회, 경제, 문화 발전이 무시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한족의 노동자 계급이 주체가 되어 사회주의 사회로 넘어가도록 유도하는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분으로 본 것이다.

중국에서의 소수민족조사는 1950년에 서남민족 방문단·서북민족 방문단이 파견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민족의 대표적 인물과 민중의 동의를 얻어서 11개의 소수 민족을 밝히게 되었고 그 후 39개의 소수민족이 밝혀졌다. 1979년에 이르러 비로소 밝혀진 민족은 운남의 지노족이다. 중국에서는 대체로 스스로를 타민족과는 구별되는 집단으로 인정하고 주변민족도 그 집단을 하나의 독립된 그룹으로서 인정할 때 이를 소수민족으로 간주하고 있다. 중국의 민족정책은 1949년의 공동강령 이래 거의 일관되고 있다.

중국은 漢민족국가가 아니고 多민족국가이다.

각 민족은 상호 평등하며 차별 압박이 있어서는 안된다.

소수민족의 언어·문자·풍속·습관은 존중된다.

소수민족은 지역적인 자치를 실시하며 각 민족자치구역은 모두 중국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지방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민족 우월감에 기초한 大漢민족주의와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지방민족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정책의 중심은 문화적 민족자치를 인정하는 한편 그 분리독립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의 민족이론에서는 분리하여 실제로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민족에게는 독립권을 인정해야 한다. 주은래는 이 모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민족은 서로 뒤얽혀서 잡거(雜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혁명전쟁중 소수민족도 한민족과 공동으로 싸우면서 결합을 밀접하게 해 왔다.

소수민족 지역의 지하자원을 개발하는 것은 족구의 공업화에 있어서 그 지주이다. 상호 원조하고 결합하지 않으면 향상은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서 독립이 아니고 중화민족이라는 대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1957년 청島에서의 민족공작좌담회에서의 강화(講話)라고 말한다.

그러나 에 대해서 티벳·신강, 본래의 몽고민족 중심지에서는 사실과 다르다. 에 관해서는 예를 들면 중일전쟁의 절정기에 국경주변의 소수민족의 분리경향은 강력했던 것으로 "결합을 밀접하게 해왔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여기에서 주은래의 설명으로 중국정부의 의도는 명확히 나타나지만 소수민족의 독립지향을 부정하기에는 근거가 약하다.

실제로는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높아감에 따라 민족고유의 풍속·습관이 억압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종교에 대해서는 "문화대혁명"기에 공격이 집중되었고, 목축생활도 농경의 강제에 의하여 목야(牧野)가 파괴되어 독자산업의 지위를 위협받았다.

한(漢)족이 소수민족의 지역으로 진출형식은 관료로서 대량 부임이다. 이를 통한 중앙집권적인 한족중심의 정책 및 인구의 이동이 진행되어진다. 1979년의 지방행정 간부를 보면 성급(省級)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과 부주임 그리고 성급 인민정부의 주석과 부주석 등의 수준에서 한민족 출신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티벳 43%, 청해77%, 신강 50%, 내몽고 50%로 되어 있다. 한민족 간부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더구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당의 고급간부는 대부분 중앙에서 파견된 한(漢)족 이기 때문에 특히 행정에 관한 한 소수민족의 지역자치가 성립하고 있다고는 결론지을 수 없는 것이다.

4. 중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의 문제점

소수민족 집단의 전통성과 역사성을 단절시켜 사회주의 사회로 유도하는 데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 조사를 통해 얻은 각지의 소수민족의 실태와 문제점을 파악하여 민족사업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모든 계획이 문화대혁명으로 무산되어 버리고, 문화대혁명 이후 지금까지 별다른 계획 없이 소수민족사회를 이끌고 있으며 문제가 발생하면 임시방편 식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진정한 민족화의 구역자치가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반좌파정풍(反左派整風)이니 사회주의 교육운동 등의 구호 아래 각종 개혁조치를 반대했던 민족간부와 지방민족간부를 숙청하는 등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자치를 저해하고 있는 요소들이 많다.

또한 중국의 일방적인 동화를 강요하는 것이 사회적인 현실이다. 연변은 조선족 자치주이지만 지배 민족인 한족이 정치조직의 요직을 점하고 소수민족인 조선족이 그 저변에 배치되어 있다. 조선족 자치주 조례에는 소수민족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고, 조선족 자치주이기 때문에 조선족이 관리직, 전문적 직업, 사무직에 종사하는 자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지만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겪는 장애가 있다.
행정기관, 기업, 학교, 상점 등에서도 중국어가 기본이고, 외교, 군사 등의 중요한 국가 의사 결정권이 조선족에게는 없다. 그리고 한족에 동화되어야만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생활할 수 있다.

중앙 정부가 소수민족에게 민족보다 국가를 앞세우도록 강요한다. 예를 들어 중국은 조선족이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식만을 갖는 것을 원치 않는다. 중국이 각 민족의 교육, 문화의 특성을 인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중국)국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는 한계 안에서이다. 이러한 민족의식과 갈등은 문화혁명기와 같은 격동과 시련의 시기에 민족과 사회주의 계급동맹을 강조하는 자들간의 분열을 통해서 명확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중국은 어디까지나 민족보다는 국가를 앞세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족과 한족이 민족갈등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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