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과 가상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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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주간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 또는 수난주간이라 하며, 이 주간은 수난절의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주간임을 말합니다. 고난주간은 종려주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종려주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축하하는 주일(마21:1-11,막11:1-10, 눅19:28-40, 요12:12-19)이며, 고난 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 주간에는 더욱 뜻 있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합니다.

    종려주일은 사순절의 여섯 번째 주일이 됩니다. 한때 이 주일은 "호산나 주일"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 주일이 종려주일과 관련되기 이전에 고대 교회에서는 "세례 지원자 주일" 이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 위하여 행하는 지원자들의 준비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례 지원자들은 이 주일에 처음으로 기독교 신조와 주님의 기도를 배웠고 그것을 비밀로서 간직하였습니다. 이날은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며 또한 예수님의 고난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결하게 일주일을 시작해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의 행적

    요 일

    주 제

    내 용

    성경 본문

    일요일

    개선의 날 1.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2. 무리의 반응과 예수님 우심
    눅19:28-40
    눅19:41-44

    월요일

    권위의 날 1.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2. 두 번째 성전을 깨끗이 하심
    마21:18-19, 막11:12-14
    마21:12-17, 눅19:45-48

    화요일

    변론의 날 1.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
    2. 경고의 세 가지 비유
    (두 아들, 악한농부, 혼인잔치)
    3. 지도자들과 논쟁
    4.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경고
    5. 유다의 반역
    마21:23-27, 눅20:1-8
    마21:28-32, 마21:33-46, 마22:1-14

    마22:41, 눅20:41-44
    마24:25, 막13장, 눅21:5-38
    마26:14-16, 막14:10-11

    수요일

    음모의 날 1.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 마26:3-5, 막14:1-2, 눅22:1-2

    목요일

    준비의 날 1. 유월절 식사
    2. 최후의 성만찬
    3. 예수님의 고별설교와 중보기도
    마26:17-25, 요13:1-7
    마26:26-29, 막14:22-25
    요17장, 요13:31-35

    금요일

    수난의 날 1. 배반당하고 잡히신 예수님
    2. 공회앞에 서신 예수님
    3.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심
    4. 십자가의 죽으심
    마26:3036-56, 막14:2632-52
    마26:57-58, 눅22:54-55
    마27:21-31, 눅23:1-25
    마27:31-50, 막15:20-46, 눅23:26-54

    토요일

    예비의 날 1. 로마병정 예수님의 무덤을 지킴 마27:62-66

    가상칠언이란?
    A.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제 1언의 말씀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863] ajfivhmi
    발음 : 압히에미 aphiemi {af-ee'-ay-mee}
    어근 : *575 히에미(보내다) 에서 유래
    어의 : 울부짖다, 용서하다, 버리다, 곁에 두다, 떠나다, 생략하다, 따로 내놓다, 면제하다, 고생하다,포기하다.
    문법 : 동사

     from 575 and hiemi (to send, an intens. form of eimi, to go); TDNT - 1:509,88
     AV - leave 52, forgive 47, suffer 14, let 8, forsake 6, let alone 6, misc 13; 146
     1) to send away
        1a) to bid going away or depart
            1a1) of a husband divorcing his wife
        1b) to send forth, yield up, to expire
        1c) to let go, let alone, let be
            1c1) to disregard
    1c2) to leave, not to discuss now, (a topic) 1c21) of teachers, writers and speakers 1c3) to omit, neglect 1d) to let go, give up a debt, forgive, to remit 1e) to give up, keep no longer 2) to permit, allow, not to hinder, to give up a thing to a person 3) to leave, go way from one 3a) in order to go to another place 3b) to depart from any one 3c) to depart from one and leave him to himself so that all mutual claims are abandoned 3d) to desert wrongfully 3e) to go away leaving something behind 3f) to leave one by not taking him as a companion 3g) to leave on dying, leave behind one 3h) to leave so that what is left may remain, leave remaining 3i) abandon, leave destitute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는 아버지가 두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①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속죄하여 주실 때

       그는 구원을 받고 평안히 돌아갔습니다. ---------------- (눅7:36-50)

    ② 중풍병자의 죄를 사죄하여 주실 때 곧

       건강하여 졌습니다. ----------------------------------- (마9:1-8, 요5:14)

    ③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속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 (마26:28)

    2. 예수님은 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모든 인간들을 위한 죽음 이셨습니다.

    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 (눅23:34)

    ②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 (요19:6-23)

    ③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 (마26:15-69)

    3. 우리에게도 용서하라고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①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 (골3:13)

    ② 주기도문에서 명령 하셨습니다. ------------------------ (마6:12)

    ③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 (마18:21-22)



    제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3857] paravdeiso
    발음 : 파라데이소스 paradeisos {par-ad'-i-sos}
    어근 : 기원은 외래어
    어의 : 공원, 낙원
    문법 : 남성형 명사

     of Oriental origin cf 06508; TDNT - 5:765,777
     AV - paradise 3; 3
     1) among the Persians a grand enclosure or preserve, hunting ground, park, 
        shady and well watered, in which wild animals, were kept for the hunt; it was enclosed by walls 
        and furnished with towers for the hunters
     2) a garden, pleasure ground
        2a) grove, park
     3) the part of Hades which was thought by the later Jews to be the abode of the souls of pious until 
        the resurrection: but some understand this to be a heavenly paradise
     4) the upper regions of the heavens. According to the early church Fathers, the paradise in which our 
        first parents dwelt before the fall still exists, neither on the earth or in the heavens, but above 
        and beyond the world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리고서도 그 죄를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1. 예수님은 낙원의 주인이심을 의미합니다.

    ① 낙원을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 (요14:1-6)

    ② 영원한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 (계22:1-6)

    ③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세상의 집과는 다릅니다. -------------- (고후5:1-3)

    2. 낙원에 제일 먼저 간 사람은 강도입니다.

    ① 회개와 기도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 (눅23:41-42)

    ②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눅23:40)

    ③ 예수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 (눅23:42)

    3. 주님이 가시고 우리가 갈 낙원입니다.

    ① 거기서 세세토록 왕노릇 합니다. ---------------------------- (계22:5)

    ② 세상 끝까지 함께 계십니다. -------------------------------- (마28:20)

    ③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 (요14:3)



    제 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3384] mhvthr
    발음 : 메텔 meter {may'-tare}
    어근 : 기본어
    어의 : 어머니
    문법 : 여성형 명사

     apparently a primary word; TDNT - 4:642,592
     AV - mother 85; 85
     1) a mother
     2) metaph. the source of something, the motherland
    

    세 번째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것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친히 효도의 계명을 지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어려서는 부모님과 함께 성전에 예배하러 갔습니다. ----------- (눅2:41-51)

    ② 예수님이 효도를 가르치셨습니다. ---------------------------- (엡6:1)

    ③ 십자가상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셨습니다. -------------------- (요19:26-27)

    2.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① 십계명 중에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이 효도입니다. ------------ (출20:12)

    ② 고르반의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 (막7:11)

    ③ 효도하는 자에게 장수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 (신5:16)

    3. 가상칠언중에 3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산 교훈입니다.

    ① 부모님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 (마21:28-31)

    ② 부모는 타락과 실패의 자식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 (눅15:11-24)

    ③ 스승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요, 성도는 주 안에서

       한 형제요, 부모입니다. ------------------------------------- (막3:31)


    제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4518] sabacqaniv
    발음 : 사박다니 sabachthani {sab-akh-than-ee'}
    어근 : 기원은 외래어
    어의 : 당신이 나를 버렸나이다, 절망의 외침
    문법 : 아람어를 고쳐씀, 음역

     of Aramaic or 07662 with pronominal suffix;
     AV - sabachthani 2; 2
     1) thou hast forsaken me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

    1. 예수님의 이 순간은

    ① 흑암의 권세가 잠깐 이기는 모습입니다. ------------------------ (마27:46)

    ② 하나님이 얼굴을 돌이키신 순간입니다. ------------------------- (시22:1)

    ③ 하나님과 인간의 담을 허시는 순간입니다. ---------------------- (엡2:14-18)

    2. 4언의 산 교훈

    ①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십자가의 최고봉의 순간입니다. --- (딤전2:4)

    ② 죄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산 교훈입니다. --------------- (계21:8)

    ③ 예수님이 인간 대신 버림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 (사53:4-6)

    3.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 (요8:29)

    ② 예수님의 전폭을 하나님께 맡기시는 고백입니다. ---------------- (대하20:20)

    ③ 충성과 봉사의 순종으로 끝까지 맡기시는 모습입니다. ----------- (사53:7)


    제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19:28)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1372] diyavw
    발음 : 딥사오 dipsao {dip-sah'-o}
    어근 : 딥사(목마름) 에서 유래
    어의 : 목마르다, 갈망하다 to thirst, 갈급해하다
    문법 : 동사

     from a variation of 1373; TDNT - 2:226,177
     AV - thirst 10, be thirsty 3, be athirst 3; 16
     1) to suffer thirst, suffer from thirst
        1a) figuratively, those who are said to thirst who painfully feel their want of, and eagerly long for, 
            those things by which the soul is refreshed, supported, strengthened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 : 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1. 목마른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목말라 주셨습니다.

    ① 우리의 심령이 목마릅니다. --------------------------- (사55:1)

    ② 우리의 애정이 목마르고 있습니다. -------------------- (요일3:16)

    ③ 경제적으로 목마르고 있습니다. ----------------------- (신28:15-19)

    2. 목마름을 해갈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 (사55:1-3)

    ② 예수님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 (요4:14)

    ③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 (행2:1-4)

    3. 세상엔 목마른 사람이 많습니다.

    ① 생명수를 주어야 합니다. ----------------------------- (마10:40-42)

    ② 사모하게 해야 합니다. ------------------------------- (마5:6)

    ③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 (요7:37-38)


    제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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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55] televw
    발음 : 텔레오 teleo {tel-eh'-o}
    어근 : *5056 에서 유래
    어의 : 완수하다, 결론짓다, 완전히 하다, 청산하다, 결론짓다, 실행하다
    문법 : 동사

     
     from 5056; TDNT - 8:57,1161
     AV - finish 8, fulfil 7, accomplish 4, pay 2, perform 1, expire 1, misc 3; 26
     1) to bring to a close, to finish, to end
        1a) passed, finished
     2) to perform, execute, complete, fulfil, (so that the thing done corresponds to what 
        has been said, the order, command etc.)
        2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subject matter, to carry out the contents of a command
        2b) with reference also to the form, to do just as commanded, and generally involving 
            the notion of time, to perform the last act which completes a process, to accomplish, fulfil
     3) to pay
        3a) of tribute
     ----------
     "It is finished or paid" John 19:30  Christ satisfied God's justice by dying for all to pay for 
      the sins of the elect. These sins can never be punished again since that would violate God's justice. 
      Sins can only be punished once, either by a substitute or by yourself.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완성자 이십니다.

    ① 순종을 완성하셨습니다. ----------------------------- (빌2:6)

    ②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 (마5:44)

    ③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 (요19:30)

    2. 인간은 다 이루고 갈 수가 없습니다.

    ① 자기의 계획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② 자녀나 부부가 가진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③ 교회나 국가의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3. 못다 이루는 우리 인생은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가야 합니다.(벧전2:24)

    ① 마귀는 우리의 완성을 방해합니다. ------------------- (마4:1-10)

    ②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다 이루셨습니다. ----------------------------------- (요16:33)

    ③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와 확신의 말씀이 됩니다. ----------------------- (계20:1-3)


    제 7언의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원어 주요단어 스트롱코드 설명
    [*3908] parativqhmi
    발음 : 파라티데미 paratithemi {par-at-ith'-ay-mee}
    어근 : *3844 *5087 에서 유래
    어의 : 나란히 놓다, 제시하다, 저축하다, 진술하다, 명령하다, 위임하다, 제안하다, 제시하다, 옆에 놓다, 앞에 놓다
    문법 : 동사

     from 3844 and 5087; TDNT - 8:162,1176
     AV - set before 9, commit 3, commend 3, put forth 2, commit the keeping of 1, allege 1; 19
     1) to place beside or near or set before
        1a) food, i.e. food placed on a table
        1b) to set before (one) in teaching
        1c) to set forth (from one's self), to explain
     2) to place down (from one's self or for one's self) with any one
        2a) to deposit
        2b) to intrust, commit to one's charge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으니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1. 사람은 세 가지 형태로 창조되었습니다(육, 혼, 영).

    ① 육으로 지어진 몸은 물질과 교제하고

       세상 것만 좋아합니다. ------------------------------------ (갈5:19-21)

    ② 혼은 사람의 정신으로 자기를 담고

       있습니다. ------------------------------------------------ (살전5:23)

    ③ 영은 하나님이 임하시매 신령한 세계에서만이

       통합니다. ------------------------------------------------ (롬8:10-11)

    2.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①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 (눅23:46)

    ②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 (엡1:3)

    ③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 (롬8:15-17)

    3.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① 천하보다 귀한 것은 생명(영혼)입니다. ---------------------- (마16:26)

    ②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 (요1:12)

    ③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 (요14:6)

(이영제목사, 한국컴퓨터선교회 제공 / Copyrightⓒ 2002 K.C.M All webmaster@k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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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어원(四旬節, The Lent)
 
사순절(40일)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한다. 이는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이다.
40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심, 40일간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한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비교적 긴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날은 재의 수요일, 성회 수요일, 속죄일 등으로 불리워진다.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며,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은 이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두 주간의 준비기를 두고 금식과 기도로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해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되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다.

                         


사순절의 풍습
        
종려나무의 재로 이마에 십자가 그리기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속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풀과 꽃이 잠깐 후면 마르고 시들 듯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지고, 한 줌의 흙에서 왔던 우리도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정비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금식 기도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그 엄격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고 하늘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금식 기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졌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이 변형되어 절식(節食) 기도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구제와 선행 베풀기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의 동참, 불의한 자신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본받아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이다.  








 

종려주일


  종  려  나  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부른 사건 때문에 (요 12:12, 13)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종려나무 (히브리어 '타마르' 영어 'Date Palm'
)에 호감을 가지는 듯하다. 목재가 귀했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나 간단한 가구를 만드는데 종려나무를 이용했으나 현대는 그 열매만을 사용한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기후가 상대적으로 더운 요르단 계곡, 사해 주변, 아라바 계곡 등에서 종려나무를 많이 기르고 있다 (사해 가까이 여리고가 종려의 성읍으로 불리웠다. 신 34:3 대하 28:15). 종려나무는 그 키가 곧고 크고, 또 여름을 지나면서 그 열매가 아주 탐스러워지는데, 아가서 7장 7절은 바로 이런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신부의 키가 종려나무 같고 그 아름다운 가슴이 종려나무의 열매 송이와 같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종려나무는 우아함이나 축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유대 여자들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다윗의 아들 암논에 의해 추행을 당한 압살롬의 누이 동생 이름이 바로 '종려' (다말=타마르)였다. 유대인들은 매년 가을의 초막절에 일주일 동안 초막을 치는데(모든 사람들이 초막을 치는 것은 아니며, 또 나주 그럴 듯하게 초막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 초막의 지붕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사용한다. 종려나무는 암나무, 수나무가 있으며 암나무는 5~6년 생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50여 년 정도까지는 매년 30 Cm 정도 자라다가 그 이후는 성장이 둔화 되는데, 그 키가 약 20m 정도 되는 종려나무는 수령이 약 100년 된 것이라고 한다.      

  호   산  나    
히브리어 '호시안나'(Hosianna)라는 말을 헬라적 표현으로 발음한 것인데, 본 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또는 "아무쪼록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시 118 : 25, 삼하 14 : 4, 시 20 : 9, 마 21 : 9, 막 11 : 9, 요 12 : 13). 이 말의 기원은 시편 118편 25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곧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구약 후기와 초대교회에 와서 메시야 소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사람을 메시야로 이해했습니다. 이때에 '호산나'라는 말은 남을 칭송하며 존경심을 가지고 인사하는 말이나, 환희를 나타내는 감탄사로 잘못 쓰게 되었습니다.
신약성서 가운데 여섯 번 사용하였는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 : 9, 막 11 : 10)라고 하였으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요 12 : 13, 막 11 : 9)라고 하여 역시 환호의 소리로 사용하였습니다. 민중들이 호산나를 외친 것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불러 내려오시게 하는 것입니다(시 20 : 9). 메시야를 통하여 "우리 아버지 다윗의 왕국이 임한다"(마가)고 했고,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다"(요한)라고 했으며, 또한 성찬식에 성결하기에 앞서서 세 번 "거룩"과 연결해서 쓰였으나, 떡을 땐 후에는 별로 쓰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문이 아니라 환호의 소리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상크투스와 베네덱투스의 끝 부분에 이 말이 있는데 '만수무강 하소서' '만수무강'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혀 원래의 뜻에서 멀어진 말입니다.

 

종려주일 시기


 
종려 주일은 십자가 수난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공식 입성(入城)을 축하하는 날로, 사순절의 6번째 주일이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하다. 그리이스의 일부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날로 보아 고난 주간에서 제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만왕의 왕이신 성자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한 인간의 모습으로 입성하심으로 낮아지심을 보이셨으며, 이는 또한 마지막 주간에 당하실 시련의 시작이란 의미를 지니므로 일반적으로 동,서로마 교회는 종려 주일도 고난 주간에 포함시켰다.


종려주일 의미


 
성경에서 종려나무(the Palm)는 의, 아름다움, 승리등을 상징했다. 그런데 고난 주간의 첫날이 종려 주일로 불리는 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메시야로 개선하는 왕처럼 오시는 예수를 환영하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한때 이주일을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시 그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친 데서 유래된 말이다. 종려 주일은 그 옛날 서로마 교회에서는 이날 그리스도의 수난사(受難史)를 낭독했기 때문에 '고난의 주일' (Dominica Passionis)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종려 주일은 이외에도 '꽃의 날' 이란 뜻에서 Floridum, Dominica Florum 등으로 불리워졌으며, 부활절날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세례 지원자들과 과련하여 '세례 지원자 주일'(Dominica Competentium)이라 불리기도 했다. 우리는 이 날을 맞을 때마다, 지금 당장은 당신께 환호하는 무리들이 곧 당신을 못박으라고 돌변할 자들임을 아시면서도, 즉 며칠 후 당신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다만 그들 죄인의 죄값을 대신 치루사 구원을 주시려는 뜨거운 사랑으로 백성들의 환호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주님의 심정을 다시금 헤아려 보아야 하겠다. 그리하여 바로 나를 위해 주가 당하신 노고와 고난이 그 얼마나 크고 감사한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새로이 깨달아야 하겠다. 더욱이 본래 제 2위 성자요 메시야이시면서도 초라하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속주요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에 대해서 묵상하여야 할 것이다.     

 

                      
                 

                                                                                                   

종려주일 유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주께서 자신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메사야로 오셨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일주일 후에 있을 부활의 승리를 예견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백성들이 이날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기 위해 종려 나뭇가지를 흔든 것은 종려 나무가 승리의 상징이었고 그리스도를 승리의 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려주일과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자료는 385년경의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이다. 이에 따르면 동로마 교회 중의 하나인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로 종려 행렬 등이 행해졌다고 한다(3. 풍습 참조). 물론 서로마 교회들도 부활 주일 전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간을 갖기는 했지만 종려 행렬과 같은 축하 행사는 없었고, 그 성격도 축하 분위기를 지닌 동로마 교회의 행사와는 달리 애도의 성격을 띠었다.  이 밖에도 6세기경 스페인의 의식서(儀式書)인 서고트 교회의 Liber ordinum에서도 종려 주일 행사에 대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의식서에는 종려 행진과 더불어 동로마의 교회에서 행하던 풍습들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는 5세기 경 동로마 교회의 종려 주일 풍습이 서로마 교회에 유입되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내용이다. 따라서 고난 주간, 특히 종려 주일의 행사는 대부분 동로마 교회로부터 서로마 교회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려 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의 축성의식(祝聖儀式)만은 그 기원을 서로마 교회에 두고 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에 행하는 축성의식은 초기에는 행해지지 않았으나, 후대에 와서는 종려나무 뿐 아니라 종려 행렬에 사용하는 꽃들에도 행해졌다(3. 풍습 참조).  중세 로마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에 종려나무의 축성의식, 종려 행렬, 그리고 완전한 애도의 성격을 띤 미사를 행하였다. 그러나 희랍 정교회에서는 이 주일을 고난 주간에서 독립된 주일로 정해 '환희의 날'로 기념하였다. 오늘날 희랍 정교회에서는 종려 행진을 하지는 않지만 종려나무 축성의식만은 계속해서 지키고 있다.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고난 주간 의식으로서의 종려 주일 행사들이 폐지 또는 간소화되어 오늘날에는 과거의 풍습과 행사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종려 주일의 의미는 잊지 않고 교회의 한 절기로 기념하고 있다.  

 

 

고난주간 








  고 난 주 간 유 래  
고난 주간은 사순절 절기 내에 포함된 절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겪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주간이다. 이러한 고난 주간이 언제부터 지켜지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롬 6:3-5, 고전 11:23-26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난 주간이 전교인의 공식적인 절기로 공개적으로 지켜진 것은
A.D.313년 콘스타티누스 대제의 신앙 자유령이 포고된 이후였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종려 주일로부터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부활 주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수난의 노고와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가 바로 고난 주간이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었던 이 고난 주간에는 예루살렘 입성, 성전 숙청, 감람산 강화,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십자가 처형과 장사 등 그야말로 예수 공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요, 전 우주적 사건이기도 했던 대사건들이 숨막히게 전개 되었다. 이에 성도들은 주님의 사역의 모든 것이 응축적으로 담겨 있는 이 주간의 각 요일마다 그 요일에 있었던
사건들을 각각 기억하여 한 주간을 내내 엄숙한 절기로 보내게 된다.

'고난 주간'(Passion week) 또는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등으로 불리는 고난 주간의 원래 명칭은 큰 주간, 즉 하나의 큰 일주일이라는 뜻의 '대주간'(Great week)이었다. 이 명칭은 동로마 교회의 고난 주간 행사를 기록한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 속에 언급되어 있으며, 서로마 교회에서도 이 주일을 대주간이라고 불렀다. 로마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주간의 공식 명칭으로, 대주간을 의미하는 'Hebdomada Magna)' 또는 'Hebdomada Major' 등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한 의로운 인간의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워진 구속(救贖)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구속주가 당하신 전 우주적 고난이었다.

태초에 인간은 선악과를 두고 맺은 언약을 어기고 범죄했다. 그리하여 원래의 규정대로 죽어 영벌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이 세운 법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Love)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공의의 원칙대로 처벌하시면서도 구원받을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법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대속 희생으로서의 고난을 겪으셨던 것이다. 주님은 이런 구속의 법을 가장 처절한 사형수단이었던 십자가(the Cross)위에서 마침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영육간의 처절한 고난을 통하여 성취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본래 제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주권을 버리고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수난을 당하신 주님의 사역에 담긴 공의와 사랑을 마음 속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창 3:15; 사 53:1-12).                                

 
고난주간의 전통
          

  종 려 주 일
 
종려 주일은 십자가 수난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공식 입성(入城)을 축하하는 날로, 사순절의 6번째 주일이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종려나무(the Palm)는 의,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했다. 그런데 고난 주간의 첫날이 종려 주일로 불리는 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메시야로 개선하는 왕처럼 오시는 예수를 환영하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한 때 이 날을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시 그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친 데서 유래된 말이다.

그리스의 일부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날로 보아 고난 주간에서 제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만왕의 왕이신 성자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한 인간의 모습으로 입성하심으로 낮아지심을 보이셨으며, 마지막 주간에 당하실 시련의 시작이란 의미를 지니므로 동, 서로마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종려 주일도 고난 주간에 포함시켰다.
             

    월요일~수요일
 고난 주간의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은 특별 집회의 형식으로 모였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고난 주간 화요일에 철야 집회를 갖는데, 이때 주교는 감람산에 올라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마 24:4이하의 성경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요일에는 마 26:14-16의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부분의 말씀이 낭독되었으며, 이때 회중은 큰소리로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한편 로마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앞둔 이날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는 엄숙한 미사를 드렸다.
               

   세족목요일(Maundy Thursday)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의 Maundy는 율법을 뜻하는 라틴어 Mandatum에서 말로, 수난을 당하기 전 목요일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심을 기념하는 데서 유래하였다(요 13:24).
이날에는 과거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과 마가의 다락방에서 드셨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여 성만찬이 행해진다. 그리고 이날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처럼 자기 죄를 회개한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예식을 행하는 것은 회중이 회개한 자와 화해함으로써 그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이날 밤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기도하며 다음날 있게 될 십자가 지심을 대비했던 것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다.
                  

  성 금요일(Holy Friday)
 성 금요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고 인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신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을 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는 의미에서 이날을 Good Friday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날은 역시 모든 성도들에게 슬픈 날임에 틀림없다. 즉 성 금요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기리는 날이기 때문에 새벽부터 밤까지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또 이날에는 가장 엄격한 금식과 철야가 행하여 졌으며, 교회의 집회도 가능한 한 제한 되었다.

3세기 중엽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에 금식이 행해졌고, 7세기 스페인의 일부 지방에서는 성 금요일에 아예 교회 문을 열지 않았으며, 성도들은 이날 철저히 기도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들은 이날 성경 낭독, 중보기도, 십자가의 베일 벗기기, 찬양 등의 내용으로 간소화된 예배 형식의 애도 예식을 거행했다. 또한 중세에는
   이날 엄숙한 장례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성 토요일(Holy Saturday)
 대 안식일, 즉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머무셨던 동안인 성 토요일은 성 금요일보다도 더 엄숙한 날로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경건한 분위기 아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기념되었다. 따라서 이날은 교회력 가운데 가장 엄격한 금식의 날이기도 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날 새로운 불, 부활절 촛불,
   물 등을 성별하는 의식과 참회와 애도의 미사가 드려졌다.
     

                                                                






 

부활절


  부활절의 이해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의 금요일에 죽어 장사되신 주님은 삼일만인 일요일, 곧 주일날 스스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셨다. 부활절은 이를 기념하는 주일날을 가리킨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을 '파스카'(Psacha)로 불렀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Passover)을 뜻하는 히브리어 '페사흐'( j s p )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구약의 초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유월절 양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구속 희생을 당한 사실에 근거하여 구약의 유월절을 예수의 부활 기념일로 변용시켜 기념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한편 부활절을 의미하는 영어 '이스터'(Easter)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인 Eastre와 Ostara가 합성된 말로, 유럽의 튜튼족이 숭배한 새벽과 봄의 여신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새벽은 어둠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봄은 새 생명이 겨울을 이기고 나온다는 의미에서 각각 부활절의 의미와 관련이 있는바 두 단어를 합성하여 부활절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던 것이다.

  부활절의 유래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기록들이 비교적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에 관련된 것이며 부활절의 기념과 그 행사에 대한 것은 유월절과 관련되어 잠깐 언급될 뿐이다(고전 5:7).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의 종교력으로 1월인 니산월 14일, 즉 유월절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였다. 이렇게 유월절이 부활절로 변용되어 기념된 것은, 예수의 부활이 유월절기에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출애굽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심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속과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이 그 의미에 있어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출 12:13) 전통적으로 소아시아 지역의 동로마 교회들의 성도들은 부활절에 양고기를 먹으면서 승리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일부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다. 또한 부활 주일 이전의 월요일로부터 토요일까지 고난 주간 행사로 금식이 행해졌고,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주일에는 함께 애찬과 성찬을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마 교회들은 어떻게 부활절을 기념했는지, 또 그 시기는 언제였는지 확실히 알려진 것은 없다. 서로마 교회에서는 유월절에 기초해서 부활절을 기념하는 동로마 교회와는 달리 유대 전승에 근거한 부활절을 거부하고 보다 성경의 기록에 근거한, 로마 전승을 반영한 부활절을 기념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이유로 동, 서로마 교회는 부활절 시기 문제에서 합의를 보지는 못했으나, 이날을 성대하게 기념한 것은 동일했다. A.D.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부활절 시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이후부터, 이들 교회들은 부활절과 관련한 보다 다양한 행사를 갖게 되었다. 각 교회들은 부활절 전날 촛불을 밝히며 부활절 전야제 등을 거행하였다. 또한 이날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모세 오경과 주님의 수난 설화 등을 낭독하였으며, 성유를 바르는 의식 및 성찬을 행하였다.
 
  부활에 대한 실제적 증거    
(1) 첫째 증거 :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예언되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눅 18 31-33).

(2) 둘째 증거 ; 부활은 그의 빈 무덤에 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 : 2-6).

(3) 셋째 증거 : 오직 부활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가장 합리적인 증거이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 37 - 39).

(4) 넷째 증거 : 부활은 교회창설의 유일한 합리적인 설명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 : 38-42)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기록   

1)
막달라 마리아에게(막 16 : 9).
2)
여인들에게(마 28 : 9).
3)
베드로에게 (고전 15 : 5).
4)
두 제자에게(눅 24 : 15-31).
5)
열 제자에게(요 20: 19).
6)
도마에게(요 20 : 26-28).
7)
일곱 제자에게(요 21 : 1-24).
8)
열 한 제자에게(마 28 : 16-17).
9)
500명에게 (고전 15 : 6).
10)
열 한 사도에게(행 1 : 2-9).
11)
야고보에게(고전 15. 7).
12)
바울에게(행 9 : 1-5, 고전 15 : 8).

 
  
예수님 부활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우리의 구원 또한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피흘려 죽으신 주님은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은 것처럼 보이거나 기절한 것 같은 가사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머리는 가시면류관에, 손과 발은 대못에, 허리는 로마 군병의 창에 찔려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더 이상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해가 져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덤 속에서 그의 생애를 끝마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 : 17-18)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이 예언하고 그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실 때 인생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에 대해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마 16 : 21).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첫째로,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범한 종교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병 고침도 요술로 취급되었을 것이고, 그의 죽음도 하나의 비극적인 순교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고, 예수님의 병 고침이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이 인류를 구속하는 대속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죄를 속함 ,즉 구원의 보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인류의 죄값인 사망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함인데,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죄값을 치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살아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모든 죄 값이 다 청산되고 우리는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에 대한 확증이 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 라" (고전 15 : 13).
 넷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역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죄와, 죽음과,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차 다가올 부활은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소망이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요, 우리 죄속함의 보증이 되며,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이라는 확증이 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반대설    
부활에 대한 반대설이 많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1) 가사설(假死說)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실신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하는 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6시간이나 십자가 위에 계셨고 운명 후 로마 군인이 옆구리에 창을 절러 물과 피를 나오게 하여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제자이지만 죽은 것이 확인되니 무덤에 장사했을 것입니다. 로마 병정도 죽은 것이 확인되니 시체를 내어 주었고 제자들도 확인되니 흩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2) 도거설(盜去說)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해 가고는 돈을 주고 예수가 살아났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훔쳐 갔으면 무엇 때문에 여자들과 베드로가 무덤에까지 찾아갔겠습니까? 로마 병정들이 인봉을 하고 지키는데 어떻게 접근했겠습니까? 나아가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순교하기까지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겠습니까? 도리어 대제사장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훔쳐 갔다고 거짓 증거하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 외에 환상설도 있으며 유령설
도 있으며 가지가지 거짓 증거가 많이 있지만.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가 베드로, 야고보 외에도 500명이나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기독교회가 세상에 끼친 영향으로도 증거하고도 남으며, 교회확장과 박해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로 변하며, 현재의 역사를 통해서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불란서의 볼테르는 50년 후에는 교회가 다 없어진다고 하면서 무신론과 성경을 반박하는 책을 많이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50년 후에 교회는 없어지기는커녕, 신기하게도 그 무신론의 책을 출판하던 출판소가 성경을 찍어내는 인쇄소가 되어서 마루에서 천정까지 성경책으로 꽉 찼다고 합니다.
                                             
                                                                                  

  
부활한 육신은 어떤 모습일까   
썩지않고 영원한 "생명의 형상"
살과 뼈 가진점에서 이전의 몸과 연관성
시간과 공간 제약 안받고 영광으로 빛나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14:14)하는 질문은 수천년 동안 내려오는 인간의 질문이다. 죽으면 그만이고 특히 몸이 썩으면 없어져 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산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15:23)"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라고 신자들의 부활을 보증하셨다. 그 이후로부터 사람들은"죽은 자들이…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15:35)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 살펴본다.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사르밧 땅의 과부아들
(왕상17:17-24),수넴 여인의 아들(왕하4:17-27), 유대 관원인 야이로의 딸(막5:22-43),나인성의 청년(눅7:11-17),나사로(요11:17-44),여제자 다비다(행9:36-43),졸다가 떨어져 죽었던 유두고(행20:7-12) 등이 죽었다가 살았으나 신학적인 의미의 부활은 아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었다가 소생했을 뿐 부활의 몸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부활의 몸이란 예수님 경우처럼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나 살과 뼈를 가진 몸이다(눅24:2940).어떤 불신앙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같이 예수님의 출현이 영의 출현이거나,단순한 환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못자국을 보이시며 손가락을 내밀어 창으로 찔렸던 옆구리 상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요20:2527).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다고 선언하고 있다(마28:9).

부활한 몸은 부활체를 가졌기에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셨다(눅24:41-45).영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어릴때의 경험에서 이것을 생각해 본다. 유교의 관습대로 조상의 영에게 제사를 드릴 때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한 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꽂아놓고 음식을 잡수시도록 자손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한참 후에 방으로 들어와 호기심어린 눈으로 없어진 음식이 있는가 살펴보아도 밥이나 국이 없어지지 않아 안심하던 기억이 있다.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와 동일하지는 않으나 깊은 연관성이 있다. 도토리가 자라서 참나무가 되고 갓난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될때 동일한 물질에서 발전하지만 그 형태가 같지 않다.

도토리와 나무, 아이와 어른 사이에 차이가 있으나 계속성이 있음을 의심할 수 없는 것 같이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몸은 계속성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가까이서 예수님을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생각한 일이나(요20:1415),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길에서 동행하게된 예수님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6). 제자들이 무서워하며 모여있던 다락방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영으로 생각할 정도로(눅24: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변해있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는 흙으로부터 온 것이나 부활 때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될 것이다(고전15:49).지금 우리의 몸은 썩고 욕된 약한 몸이지만 부활 때에 갖게될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한 몸이 될 것이니 곧 신령한 몸이다(고전15:42-44).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의 비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후에 가지시게될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변화산사건이라 부른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고 전하고 있다.

부활의 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 부활체가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않을 것은 하늘의 천사들이 죽을 수 없음과 같다(마22:30).닫힌 방안에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으며(요20:19),동행하던 일행중에서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눅24:31) 몸이 부활의 몸이다. 가고싶은 곳에 갑자기 나타났다가,원할 때 즉시 사라지는 부활체는 현재 우리 육체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과 다르다.

출근길에 또는 중요한 약속의 자리에 시간을 대기 어려워 조바심하며 차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일도 부활한 몸을 가질 때는 없어질것이다. 고칠 수없는 병에 걸려 고통하는 일도,늙는 것을 두려워하지도,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뺏기고 통곡하는 일도 부활 이후엔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죽은 자들이 다시살고, 살아있는 성도들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를 받을 것이니(고전15:5152) 성도들의 몸이 구속을 받는 복되고 소망스런 날이 될 것이다(롬8:23).<성결교신대 성기호총장>               
                                                 

  세계의 부활절 행사   

독일
3일간의 카니발 후 긴 사순시기를 보내고 부활축일을 맞아 곳곳에선 전통 퍼레이드와 축제가 열린다. 성목요일에는 온가족이 모여 초록색으로 달걀을 칠하고, 어머니들은 바구니를 만들어 아이들이 자는 동안 머리맡에 두곤 한다. 성금요일에는 성당의 종이 울리지 않기 때문에 복사단들이 마을을 다니며 미사시간을 알린다.
부활성야에는 모든 크리스마스 트리를 한 곳에 모아 태운다. 이것은 겨울을 정리하고 새봄을 준비하는 의식이다. 독일의 부활은 가족의 날이다. 점심식사 때 함께 색칠한 달걀과 양모양이 케이크 등을 먹고, 아이들은 정원에 숨겨진 달걀과 초콜렛 토끼를 찾는 게임을 즐겨 한다. 부활 후 월요일에는 아이에르레젠이라는 부활달걀 굴리기 시합을 한다. 이 시합의 우승자는 101개의 부활달걀을 상으로 받는다.

불가리아
전통적으로 부활빵을 만드는데, 빨간달걀을 빵 안에 집어넣는다. 부활빵과 달걀을 토요일 저녁 성당에 가져가 축성을 받고 가져와 다음날 먹는다. 이전에는 달걀을 붉게 칠해 터키 친구들이나 대부모, 친척,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요즘은 이 전통은 아이들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남아있다.
또 집안의 최고 여자연장자가 아이들의 얼굴에 붉은 달걀을 문지른다. 이것은 흰얼굴에 붉은 뺨으로 행복과 건강을 바라는 의식이다. 또 불가리아에서 부활절날 즐겨 행하는 것으로 달걀깨기가 있다. 상대방의 달걀을 깨는 시합인데, 마지막까지 깨어지지 않는 달걀은 한 해의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을 상징한다.

미국
토착민이 아니고 이주자들이라 지방마다 풍습이 다르다. 어떤 도시에선 재의 수요일 전 화요일을 팬케이크의 날이라 정해 영국의 풍습에 따라 축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것은 일종의 카니발이다.
부활절 아침에는 새벽기도회나 야외미사가 봉헌된다. 허리우드나 캘리포니아 하와이의 호놀룰루같은 야외 원형 경기장에서 미사가 봉헌되기도 한다. 어떤 곳에선 성가대들이 동트기 전에 노래를 부르며 집집마다 다니기도 한다. 가족들이 함께 양노원이나 가난한 이웃들을 찾아 부활음식을 함께 나눈다. 특히 빵에 흰설탕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한다. 또 일부 도시에선 꽃축제가 열린다.

폴란드
부활 하루 전인 성토요일 각 가정에서 축복 바구니에 부활달걀과 빵, 소금, 흰 소세지를 넣어 축성을 받는다. 이 음식들을 할로우페어(신에게 바친 음식)라고 불린다. 붉은 달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빵과 소금은 건강과 성공을, 흰소세지는 새봄의 풍년을 의미한다. 또 부활절 다음 월요일에 물뿌리기라는 특별한 관례가 있다. 서로의 건강을 바라며 물을 뿌리곤 한다.

스페인
전국 각지에서 성금요일에 수난행렬을 거행한다. 행진을 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마지막 한 주간의 행적을 재현해 보인다. 부활절이 되면 성모마리아께 꽃을 봉헌하는 퍼레이드를 벌인다.
이것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오기도 한다. 특히 스페인에서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대단하다. 또 투우경기 전에 길거리에 소를 풀어서 경기장으로 몰아넣는 풍습이 있다. 이때 소에 밟혀 다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부활절 행사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핀란드
부활절 이전에 아이들은 작은 화분에 독보리를 심는다. 푸르른 새순은 봄을 상징한다. 요즘은 튤립, 백합, 수선화 등을 대신 심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부활풍습은 달걀과 관련돼 있으며, 특히 달걀 숨기고 찾기 놀이가 인기다. 또 부활절 아침이 되면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춤추는 태양이라는 시간을 갖는다.

프랑스
성금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성당의 종이 울리지 않는다. 프랑스에는 교회의 종이 로마로 날아간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전설을 믿고, 부활절 아침 일찍 종이 집으로 날아오는 것을 보러 달려나간다. 이때 부모들은 초콜렛 달걀을 숨기고, 돌아온 아이들은 초콜렛을 찾아다닌다.

이태리
이태리의 부활절은 성당에서는 물론 일반사회에까지 종교적 축제 분위기로 들뜬다. 저녁에 훈제된 어린 양고기를 먹으며,아이들은 왕관 모양의 빵과 부활달걀 만들기를 즐겨한다.

네덜란드
성토요일밤 마을사람들이 모여 촛불행렬을 갖고 함께 노래하며 춤을 추며 보낸다. 아이들은 성주간동안 집집마다 다니며 계란을 얻어 모은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아름답게 장식한 부활화환을 문앞에 달아둔다. 또 집안은 노란 봄꽃들로 장식하고, 부활달걀을 정원에 있는 나무에 달아놓기도 한다.

스웨덴
성목요일 전날 메시지를 담은 쪽지를 사람들의 등에 붙이는 오래된 풍습이 있다. 이것을 행하는 목적은 쪽지를 붙인 사람들이 자신이 �희생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걸어다녀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는 데 있다.
                                                       

  한국의 부활절 행사   

(1) 부활절 철야제
부활절 철야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기 위한 부활절 주요 의식으로 성 토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에 거행되었다. 히폴리투스가 지은 '사도 전승'(Apostolic Tradition)에 의하면 이때 교회에서는 세례식이 베풀어지고 성찬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나 4세기 이후에는 교회력의 발달로 그리스도께서 수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성 금요일을 이날과 명확히 분리시켜 준수하게 되어, 성찬 등의 의식은 주로 그 이전에 행하고 부활절 철야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중점을 두어 지켜지게 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철야 예배가 토요일 오후, 토요일 아침 등으로 그 시간대가 변경되면서 사실상 철야제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51년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부활절 철야제가 부활되어 다시 지켜지고 있다.

(2) 부활절 연합 예배
우리 나라의 교회들은 새벽에 연합 예배를 드리고 있다. 제 1회 부활절 예배는 1947년 서울 남산의 조선 신궁터에서 거행됐는데, 이때 모인 신도는 1만 5천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부활절 연합 예배가 드려졌던 남산의 조선 신궁터는 과거 일제시대 때 신사 참배가 행해졌던 곳으로 해방 후 이곳에서 드린 부활절 연합 예배는 종교의 자유를 되찾았다는 실로 감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때 설교는 자로 교회의 한경직 목사가 맡았었다.
4회까지는 계속 남산에서 예배가 개최되었으나 6.25사변으로 인해 제 5회 연합 예배는 부산의 보수 공원에서, 제 7회 부활절 연합 예배는 부산 사범학교 뜰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1960년 이후에는 진보파와 보수파의 분열로, 또다시 예방측 합동 교단이 별도로 예배를 드리게 되어 부활절 예배가 같은 날 세 장소에서 드려지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1978년에 와서야 재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서울 뿐 아니라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별로 부활절 연합 예배가 거행되고 있다. 한편 서울에서는 1975년부터 연합 예배의 장소가 여의도 광장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계속적으로 그곳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다.
평소 교파를 달리하던 각 교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지체 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함께 모여 화목 제물이 되셨던 그리스도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것도 뜻있는 부활절 예배가 될 것이다.

자료도움: 내이플스한인교회 www.nckorean.org

    

 SJSCH(기독교종합자료홈) http://sjs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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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자료에 도움을 주신 미국 내이플스한인교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 고난주간 묵상자료(십자가 상의 예수님) ◈
 

1. 고난주간에 예수의 생활 일람(1)

    일요일

    • 예수가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마 21 : 1 - 11, 막 11 : 1 - 11).

    월요일

    •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마 21. 18 - 19, 막 11 : 12 - 14).
    • (세금의 질문에 설명) 성전 청결케 함(마 21 : 12 - 13, 막 11 : 15 - 19).

    화요일

    • 무화과나무 마름(마 21 : 19 - 22, 막 11 : 20 - 25).
    • 제사장 바리새인의 질문(막 11 : 27 - 33, 눅 20 : 1 - 8).
    • 경고의 세 가지 비유, 포도원 비유(마 21 : 28 - 22 : 14, 막 12 : 1 - 12).
    • 바리새인과 헤롯 왕이 예수께 질문(마 22 : 15 - 40).
    • 메시야에 대한 예수의 질문(눅 20 : 41 - 44).
    •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책망(막 12 : 38 - 40).
    • 과부연보에 대하여 칭찬함(막 12 : 41 - 44, 눅 21 : 1 - 4)
    • 유대인이 예수를 배척함. 예루살렘 멸망과 말세를 예언함(눅 21 : 5 - 38, 요 12 : 37 - 50).

    수요일

    • 예수가 밤마다 베다니에 나가시니 이 날은 거기서 기도했을 것임.(성경에 수요일은 기록이 없음.)

    목요일

    • 최후 성만찬, 예수 그리스도의 고별사(마 26 : 31 - 35, 막 14 : 12 - 26, 눅 22 : 31 - 38).

    금요일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반역과 예수의 포박(마 26 : 36 - 47, 막 14 : 32 - 52).
    •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막 14 : 53 - 72, 요 18 : 13 - 27).
    • 빌라도의 심문(마 27 : 2 - 11, 31, 요 18 : 13 - 29).
    • 십자가의 고난(마 27 : 32 - 56, 눅 23 : 26 - 45).
    •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장사함(마27 : 57 - 61, 막 15 : 43-47).

    토요일

    • 무덤을 파수군이 굳게 지킴(마 27 : 62 - 66).

    일요일

    • 부활의 새벽(마 28 : 1 - 10, 막 16 : 1 - 17).
    • 파수군이 부활의 사건을 제사장에게 보고(마 28 : 11 - 15, 눅 24 : 13 - 35).
    • 엠마오 도상의 예수(눅 24 : 13 - 35).
    • 도마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 나타남(막 16 : 14, 요 20 : 19 - 25).

2. 고난주간에 예수의 생활 일람(2)

 

일자

요일

일명

사건명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첫째날

개선의날

예수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

21:1-11

11:1-11

14:27-44

12:12-19

둘째날

권위의날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성전을 청결케 하심.

21:18-19
21:12-17 

11:12-14
11:15-19 

19:45-48

 

셋째날

논쟁의날

무화과 나무가 마름

21:20:22

11:20-25

 

 

예수의 권위에 대한 질문. 경고의 세가지 비유(두아들, 악한농부.혼인잔치)

21:23-27
21:28-
22:14 

11:19-33
12:1-12 

20:1-8
12:1-12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수께 질문, 메시야에 대한 예수의 질문

22:15-40
22:41-46 

12:13-39
12:35-39 

20:26-40
20:41-44 

 

바리새인을 책망하심 과부의 연보에 대하여 칭찬하심

23:

12:38-40
12:41-44 

20:45-49
21:1-4 

 

헬라인이 예수잡을 것과 죽일 것을 예언함 (밀알의 비유)

 

 

 

12:20-36

유대인이 예수를 배척함,
예루살렘의 멸망과 말세를
예언함

24:1-14

13:

21:5-38

12:39-50

막 14:1-11은 화요일 설도 있고 수요일이라고
하는 이도 있어 잘 알 수 없다. 수요일은 예수께서
조용히 하루를 보낸 날인가도 하고 막 14:1-11 이라고도 한다.

넷째날

A은퇴일
B 기도일

가롯유다의 반역(문둥이 시몬집 초대)26:17 화요일
예수 죽이기로 함으로 은퇴일이라 함.
예수가 밤마다 베다니에 나가시니 이 날은
거기서 조용히 겟세마네서 기도했을 것임

다섯째 날

최후 성찬의 날

최후의 성만찬. 예수그리스도의 고별사. 중보의 기도(요 17:1-23)

26:17-30
26:31-35

14:12-26
14:27-31 

22:7-30
22:31-38 

13:1-30
13:31-
16:33
17 

여섯째 날

고난의 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반여과 예수의 포박

26:30-40
26:47-50 

14:26-32 -43
14:43-52 

22:39-46
22:47-53 

18:1-
18:1-11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

26:50
27:10 

14:53-72
15:1- 

23:54-71

18:12-27

빌라도의 심문

27:2,11- 31

15:1-20

23:

18:28-29

십자가의 고난

27:32-56

15:21-41

23:26-45

19:16-37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장사함

27:52-62

15:34-47

23:50-56

19:38-42

일곱째 날

무덤의 날

무덤을 파수군이 굳게 지킴

27:62-66

 

 

 

여덟재 날

부활의 날

부활의 새벽

28:1-10

16:1-17

24:12
29:56 

 

파수군이 부활의 사건을 제사장께 보고, 엠마오 도상의 예수

28:11-15

16:12-13

24:13-35

 

도마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 나타남

 

16:14

24:36-43

20:19-25

 

3. 십자가의 사실로 이루어진 구약의 예언

    (1) 제자에게 배척 당하심(시 41 : 9, 눅 22 : 48).
    (2) 은 삼십에 팔리심(슥 11 : 12, 마 26 : 15).
    (3) 심문 당하실 때 잠잠하심(사 53: 7, 마 26 : 63).
    (4) 강도와 함께 못 박히심(시 22. 16,사 53 : 12,눅 23 : 39-43).
    (5) 옆구리 창 맞음(요 19: 34-39, 슥 12 : 10).
    (6) 신 포도주를 드림(시 69; 21, 요 19; .29).
    (7) 의복을 제비 뽑음(시 22 : 18, 요 19 : 24).
    (8) 다리뼈를 꺾지 않음(시 34 : 20, 요 19 : 31-37).
    (9) 부자의 무덤에 장사됨(사 53; 9, 마 27 : 57-60)

4. 십자가 사후에 일어 난 사실들

 

    (1) 지진으로 성전 휘장이 찢어짐(마 27 : 51).
    (2) 무덤이 열림(마 27 : 52).
    (3) 백부장의 증거(마 27; 54).
    (4) 무리들의 확신(눅 23; 48).
    (5) 도적의 다리를 꺾음(요 19 : 31-32).
    (6) 옆구리 찌름(요 19 : 34).
    (7) 장사 지냄(요 19 : 38-42).
    (8) 무덤 봉하고 파수꾼 세움(마 27 : 66).

 

5. 고난에 관한 금언 ·격언 ·속담

 

    (1) "고난은 축복을 갖다 주는 지름길이다. " -M. 루터-
    (2)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살려고 하는 이는 고통을 보석으로 삼는다. " -하천풍언-
    (3) "고난은 성공의 축대를 쌓는 것과 같다. " -M.NL. 영안-
    (4) "고생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 " -지스레지-
    (5) "고난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다. " -도미트 아쓰 -
    (6)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 " -M. T시세로
    (7) 초년 고생은 말년 낙의 근본이라. 네가 자라면 오복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리라." -이광수 -
    (8) "대부분의 생의 고난은 우리 자신이 햇빛에 서 있기 때문에 생긴다" -에머슨-
    (9) "고난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어려움이 우리에게 찾아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써 하나님의 신임의 증거 라고 간주해야 한다. " -비쳐(H.W. Beecher)-

    (10) 고난이란? 좋은 것이다.

    • 고난은 좋은 훈련이다.
    • 고난은 사람이 살기에 귀찮을 정도다.
    • 고난은 여행하는 것과 같다.
    • 고난은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이다.
    • 고난은 나쁜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이다.
    • 고난은 한 성도가 받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고통을 겪게 된다.
    • 고난은 하나의 체험이다.
    • 고문을 받는 것도 심한 고난이다.

6. 참혹한 십자가

십자가(Cross)는 라틴어 '크룩스(crux)'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고문대(拷問臺)'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고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이미 통용되어 왔던 사형법 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왕도 그가 점령한 지역에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즐겨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드로 사람 일 천명을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합니다. 에스라 6 : 11에는 파사의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리는데 자기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 매어 죽이라고 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에 와서는 노예만을 십자가에 죽였으나 때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도 중죄(로류)를 범한 경우 이를 적용시켰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참혹했기 때문에 로마 본국 내에서는 가급적 십자가 형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틴 황제가 십자가 형벌 금지령을 내렸고, 그 후 이 사형법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릴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표로 알려진 것과 같이,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은 죽지 않으리라는 그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구원이란 신학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 : 6-7)

 

7.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일곱마디 말씀 (가상칠언)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오전 9시이고, 운명한 것이 오후3시니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생명이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빨리 죽지 않고 모든 고통을 겪으며 서서히 죽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은 가장 고통스러운 처형 방법인 것입니다.
    이 6시간 동안에 예수는 일곱 마디 밖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4복음서에 나타난 것을 종합해서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 첫째말-"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 : 34). 이것은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 둘째말-"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 : 43). 이 것은 파라다이스(낙원)의 약속이었습니다.
    • 셋째말-"어머니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 "보라, 네 어머니다"(요 19 : 26-27). 이것은 아들로서의 효도였습니다.
    • 넷째말-"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 . 46). 이것은 영적인 고민이 었습니다.
    • 다섯째말-"목 마르다"(요 19 : 28). 이것은 육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 여섯째말-"다 이루었다"(요 19 : 30). 이것은 승리의 선언이었습니다.
    • 일곱째말-"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 : 46), 이것은 최후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상 일곱 마디 중 처음 세 마디는 9시부터 12시 사이에 말씀하셨고, 12시부터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갑자기 온 땅이 어두워졌습니다. 그 세 시간 동안 예수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후 3시에 예수께서는 나머지 네 마디 말씀을 연거푸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고난주간 : 십자가의 길◈

     

    고난주간은 부활절 전 한 주간으로,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크리스챤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지냅니다. 이 자료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주님께서 행하신 최후의 한 주간 동안의 일을 살피면서 오늘의 고난주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고난주간 동안 해당되는 날의 자료를 자녀들과 함께 읽으시며 주님이 우리 위해 당하신 그 큰 고난을 생각하고 자신과 자녀들을 복된 십자가의 그 고난 현장에 참여시키는 기회로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처음 나오는 성경구절을 성경에서 직접 찾아서 함께 봉독하고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제1일(주일) 예루살렘 입성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마가복음 11:1-11)


    예수께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성으로 공공연히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셨습니다. 그리고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속에서 인간의 위선, 탐욕, 가증스러움, 이기주의 등의 죄악이 가득 차 있음을 보셨습니다.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케 하기 위해 채찍을 드셔야 했습니다.


    묵 상


    1. 고난과 죽음을 미리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용기를 생각해 봅시다.

    2. 오늘 내 마음 속을, 우리 교회를 예수님께서 오셔서 둘러보신다면 무엇을 느끼실 까요?

       우리 자신과 교회를 살피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제2일(월요일) 성전을 청결케 하심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마가복음 11:15-19)


    당시 성전 안에서는 명절 때 희생의 제물로 쓸 짐승과 향유, 그밖에 필요한 물품을 매매하였고, 성전 안에서만 쓰는 유대 화폐를 교환하여 주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인들, 돈 바꾸는 자들과 결탁한 제사장들은 막대한 부당 이익을 취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완전히 시장과 같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내어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11:17)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제사장의 자격으로 더러워진 성전에 대해 격분하시고 이를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뿐 아니라 온 세계를 성결케 하시려는 하나의 표징이 됩니다.


    묵 상


    1. 오늘의 교회는 혹시 이기주의, 상업주의 정신에 젖어 있지 않나요?

    2. 하나님의 성전을 참으로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제3일(화요일) 과부의 두 렙돈 교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마가복음 12:41-44)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셔서 그들의 연보 넣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한 과부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이때 예수께서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평범한 것 같은 이야기에서 실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강조되어 있는 점에 주의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양보다는 질을 중요시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기뻐 받아 주실 만한 것입니다.


    묵 상


    1.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은 어떤 것일까요? (고후 19:7;8:12)

    2. 다음의 말씀을 명상합시다.


    “많은 사람들은 지갑으로만 바쳤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바쳤습니다. 이는 습관을 좇아 드리는 것과

      사랑으로 드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제4일(수요일) 한 여인의 헌신


    “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3-9)


    예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 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에 팔 수 있다고 하는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보통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이 향유는 무척 비싼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충동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불평과 비난 속에서도 예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묵 상


    1.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주님을 위하는 데 따라야 할 자기 희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2.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함과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서 ‘봉사의

       기회’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봉사해야 할 일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5일(목요일) 최후의 만찬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가복음 14:22-25)


    예수님께서는 그가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셨습니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희생해 제자들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실 것을 말씀으로만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찢기실 자신의 몸과 흘리신 피로 속죄를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은 한 사람의 제사장으로서 그의 영원한 영혼을 흠없이 하나님께 드리셨던 것입니다.


    묵 상


    1. 최후의 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의 심정을 생각해 봅시다.

    2.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 속죄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 른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제6일(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마가복음 15:16-41)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명상함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위대하신 사랑 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1.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3. “어머니 보소서. 아들입니다.”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돌봄과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대신 지신 죄 때문에 고통 당하시고

         버림받으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절규를 보게 됩니다.

    5. “내가 목마르다.” 인간들의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요청하시는 갈증입니다.

    6. “다 이루었다.” 거룩한 희생으로 모든 죄를 속하셨다는 하나님 어린 양의 승리의 외침입 니다.

    7. “아버지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묵 상


    1. 용서함 받은 우리는 역시 남을 용서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2. 훗날 우리가 남길 유언을 생각해 봅시다.


    제7일(토요일) 무덤 속의 예수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며” (마가복음 15:42-47)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청하여 자기를 위하여 새로 만들어 둔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제자였지만 이제는 관헌의 박해와 친지들의 차가운 눈총을 무릅쓰고 용기있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당당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이 무덤에 들어가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게 되셨습니다. 그는 무덤의 어두움을 제거하셨으며 그 공포를 영원히 쫓아 버리셨습니다. 죽음이 그 쏘는 살로 그리스도를 상하게 했지만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그 위력을 끼치지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묵 상


    1.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2. 기독교인은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요?

    3.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낸 이들의 슬픔이 부활을 목격한 후에는 어떻게 변화되었나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8일(부활절) 부활의 주를 만난 삶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누가복음 24: 25-35)


    금요일에 장사지낸 바 된 예수님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 부활사건이 전해진 그날 오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고, 실의에 찬 그들이 부활의 주를 만나 용기를 얻었다는 기록입니다.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는 그날 아침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께서 ?流? 사이에 동행하시면서 구약성서를 풀어 주셨습니다. 메시야가 고난받으셔야 할 것과, 그 고난 후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후 그들의 목적지까지 도달하여 떡을 떼실 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고, 용기를 얻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부활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동행하셨는데 왜 그들은 깨닫지 못했을까요? 마가복음 12장 12절에는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누가는 기록해 줍니다.(16절). 그런 그들이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고, 떡을 가지사 축사하사 저희에게 떼어 주실 때 “저희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묵 상


    1.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의심할 때가 있나요

    2. 부활을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3. 부활 신앙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생동감 있게 하나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마가복음중심으로◈...............


        *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언어, 음식, 장소, 행동을 거룩하게 합니다.


    ● 3월 16일<종려주일> : 예루살렘 입성 (마가 11장 1~11절)
    묵상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갖고 주님을 맞이한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


    기도 :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백성이 되기를 위해서.


    ● 3월 17일<월요일> :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마가 11장 12~25절)
    묵상 : 예수님께서 성전에 이르렀을 때 성전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장사하는 무리들을 내 쫓으셨다.

         성전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 하였다.
         우리는 성전을 얼마나 거룩하게 섬기고 있는가?


    기도 : 주님처럼 성전을 거룩하게 섬기고 지키게 하옵소서.


    ● 3월 18일<화요일> : 부활의 예고와 사랑과 헌신을 가르치심(마가 12장 18~44절)
    묵상 : 부활은 기독교의 기적,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영광스럽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헌신의 믿음으로 바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
         우리는 주님의 가르치심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기도 : 주님!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신앙으로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가르치신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게 하소서.


    ● 3월 19일<수요일> : 유대인들의 공모와 가롯유다의 반역(마가 14장 1~2절, 10-11절)
    묵상 : 유대인들의 교만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다.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심령에 교만은 없는지?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한지?


    기도 : 우리의 심령이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사단에게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 3월 20일<목요일> : 최후의 만찬,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마가 14장 17~24절)
    묵상: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며 예수님을 기념하게 하셨다.
         떡과 포도주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됨을 고백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섬김의 도를 보이시며 우리로 그와 같이 행하도록 하셨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삶이 재현되고 있는지?


    기도 : 우리는 삶에서 그리스도의 삶이 나타나게 하시고, 명하신 섬김을 살게 하소서.


    ● 3월 21일<금요일> :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마가14장 43 ~ 15장 41절)
    묵상 :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의 죽임 당하심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신 것이며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의 값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나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죄 용서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가?


    기도 :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게 하소서.


    ● 3월 22일<토요일> : 무덤 속에 예수님(마가 15장 42~47절, 마태 27장 62-66절)
    묵상 :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장사되어 무덤에 계신다.
         나는 우리의 삶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늘 생각하고 있는가?
    기도 :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 3월 23일<부활주일> : 부활하신 예수님(마가 16장 1~14절)
    묵상 : 예수님은 장사된 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의 축복이 임하신다.
         나는 예수님 부활신앙으로 생활하고 있는가?


    기도 : 부활신앙으로 살게 하시고, 우리 삶에 하나님의 생명의 축복이 늘 임하게 하소서.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우리가 고쳐야할 기독교 용어들 / 기도와 관련된 용어

1. 당신⇒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은총으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세우신 이 교회를..”.

이와 같이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만일 어느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당신이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말은 의당 다음과 같이 고쳐서 말해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이다. 우리말 2인칭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당신’은 다만 3인칭에서는 극존대어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3인칭이 될 수 없고 우리 간구를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에 해당되므로 ‘당신’이란 호칭은 안 된다.(제86회 / 2001년)

2. 기도 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 ⇒ 기도 드립니다(기도합니다)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같이 동사 ‘기도하다’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써야 하는데 요즈음 이를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드렸습니다’ 와 같이
과거형을 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5분이나 10분전에 기도를 시작했으므로 간구 한 모든 말들은 문법적으로는
이미 과거 또는 현재완료가 되므로 동사 ‘기도하다’의 과거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
기도(祈禱)는 글자 그대로 그 핵심이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간구다. 간구의 내용은 소원이며 소원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러한 미래 지향적인 소원을, 즉 우리의 바람을 ‘기도하였습니다’로 끝낼 수는 없다.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로 끝내는 것이 옳다.(제86회 / 2001년)


3.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 주님.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라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법상의 문제가 있다.
즉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지 못한다.
2인칭에는 존칭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 호격 조사 ‘-아’나 ‘-야’가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친구 사이나 아랫사람에게는 “복동아.”, “철수야.”와 같이 부를 수 있지만
손윗사람에게는 호격 조사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버님이시여.”, “할아버님이시여.”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 이미 사어가 된 ‘-이여’, ‘-이시여’를 붙여서는 안되고 그저 ‘주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로 해야 옳다.(제86회 / 2001년)


4. 우리 성도님들이 ⇒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국어 존대법에서는 청자(聽者)가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은 바른 표현이 못된다.

“할아버지. 형님이 가셨어요.”, “아버지. 누님이 오셨어요.”

첫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할아버지‘와 주어인 ‘형님’ 및 화자(話者)인 손자 ‘나’다. 여기서 청자인 ‘할아버지’가 최상위자이므로 ‘형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 없다.

둘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아버지’와 주어인 ‘누님’과 화자인 ‘나’다. 여기서도 청자인 ‘아버지’가 최상위자이기 때문에 ‘누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할아버지. 형이 갔어요.”, “아버지. 누나가 왔어요.”

공중기도에서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일한 입장,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즉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격이다. 그러므로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회중을 가리켜
‘우리 성도님들’ 이라 존대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저희들’, ‘교회의 권속들’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제86회 / 2001년)

5. 대표 기도 ⇒ 기도 인도
예배 순서 가운데 기도 시간이 되면 예배 인도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000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000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000님이 대표 기도를 하시겠습니다.”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못된다.
온 회중이 머리를 숙여 무언의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할 경우 우리는 이를 ‘기도 인도’라 부르는 것이 좋다.
기도 인도자는 기도의 대표자가 아니다. 이 기도 인도자는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다른 사람들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는 생각까지도 그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기도 인도자는 대표로 뽑힌 어느 운동 선수와는 다르다. 그는 대표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며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온 회중의 생각을,
즉 그들의 소원을 보다 깊게, 보다 하나님 뜻에 맞게, 아울러 그 절차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기도 인도자가 기도할 때 회중은 결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없다. 만인제사장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사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기도에 있어서 ‘대표’, ‘대신’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대표기도’, ‘대신하여 기도’는 ‘기도 인도’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제86회 / 2001년)

6. 사랑의 예수님 ⇒ 사랑의 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예수님’, ‘고마우신 예수님’ 등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을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뢴 후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되어 있다. 역시 이 속에도 성부 하나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본임을 알아야 한다.(제86회 / 2001년)

7. 참 좋으신 하나님 ⇒ 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요즈음 ‘참 좋으신’과 같은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재고를 요하는 말이라 하겠다.
즉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인 말들을 보면 ‘거룩하신’, ‘만유의’, ‘생명의’, ‘신실하신’, ‘의로우신’, ‘자비하신’, ‘영원하신’, ‘위에 계신’,
‘능력이신’, ‘진실하신’, ‘구원하시는’, ‘하늘에 계신’, ‘사유하시는’, ‘은혜로우신’, ‘보수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홀로 하나이신’, ‘천지를 지으신’... 등과 같이
대부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들이 수식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참 좋으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가 된다.
즉 ‘참 좋으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 정서로 느끼는 바대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얄팍한 주관적인 감정으로 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를 과장하여 발전시킨다면 ‘사랑스러운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과는 판이한 뜻이 된다.), ‘미운 하나님’, ‘야속한 하나님’, ‘귀찮은 하나님’...등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제86회 / 2001년)


Ⅱ. 예배, 예식과 관련된 용어


8. 사회자 ⇒ 인도자(예배시)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사회자라고 하면 마땅히 일반 회의의 진행자를 의미한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예배가 아닌 결혼예식이나 임직식 같은 인간 중심의 의식에서는 진행을 맡은 사람을 사회자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현장에서 사회자라는 명칭은 경건성의 결여를 느끼게 하므로 단순한 사회자(presider)의 개념을 넘어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로 부름이 타당하다.
인도(引導)의 사전적 의미는 “알려주며 이끄는 일”이므로 예배 인도라는 말을 회의에서의 사회와 구분지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본 교단 1998년 총회에서 통과된 표준 예식서에는 모든 예배의 진행자는 인도자(引導者)로, 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로 표기하였음을 밝힌다.(제86회 / 2001년)

9. 성가대 ⇒찬양대
우리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전담한 찬양대를 최근에 ‘성가대’로 많이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출판사들이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르는데서 보편화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 우리 한국 교회는 찬양대라는 이름이 통용되었고 성가대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세이카다이...성가대(聖歌隊)’가 그대로 직수입되면서 성경에도 없는 '성가대’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성가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이며, 우리의 ‘찬양’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성가대’라는 용어는 성경의 정신과 우리의 고유한 이름인 ‘찬양대’로 바꾸어 부름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10.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용불가(설교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한 인간이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위하여 어떤 사실이나 바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빌고 원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표현이 설교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 타당한가를 연구 검토시킨 바 있는 본 교단 총회는 1981년 65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

첫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에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설교는 설교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축도는 축도대로 하는 것이 좋다.

셋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의 사용은 회중에게 자극을 주고 흥분시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고는 안 되게 만들어 설교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미신적 기복 사상을 키워 줄 우려가 있다.

넷째, 설교의 근본 목적이 흐려지고 회중들에게는 설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아멘”을 하게 하는 식으로 유혹되기 쉽다.

연구위원회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설교시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를 하지 않도록 건의하였고 총회는 이를 아무 이의 없이 통과시킨 바 있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서 한국교회의 설교 사역을 바로잡는 일이라 보아 설교시에 이 말의 사용을 억제함이 타당하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11. 대예배 ⇒ 주일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큰 예배가 있고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가 예배일진대,
거기에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를 지칭하여 대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교회들이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 때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대예배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대예배가 있다면 소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소예배일 수가 없다.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한에 있어서, 어떤 예배도 소예배일 수가 없다. 다만 예배일뿐이다.

물론 시간별로 예배를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라든지, 주일 저녁(오후) 찬양 예배라든지, 혹은 시간에 따라 1부 예배, 2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예배”라는 용어는 합당한 말이 아니다.(제86회 / 2001년)

12. 열린 예배 ⇒ 열린 집회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1990년대 이후에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예배는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로 알려진 집회의 형태로,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통하여 소개되면서 한국 교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본래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구도자”라는 부자연스러운 번역 대신에
1990년대 초에 유행하던 “열린”이라는 단어로 의역한 것으로 “구도자의 집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열린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구도자의 집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보다는 “전도집회”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 혹은 구도자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예배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응답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배의 기본 정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받거나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열린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의 행위여야 하지,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예배가 회중지향적이 되고,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이 드림에 있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그 예배를 통해서 얻어내는데 목적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영혼구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위한 집회이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차라리 “열린 집회”로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많은 교회에서는 불신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한 “구도자의 집회”와는 별도로 신자 중심의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즉 구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 집회로서의 열린 예배의 개념보다는 기존 신자들에게 새로운 생동감을 주는 예배로서의 열린 예배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예배는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전통적인 예배를 벗어나서 잔치적이고 시각적이며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많이 격려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인데, 이를 가리켜서 “열린 예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 자체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능하면 “열린 예배”라는 용어의 사용은 삼가는 좋겠다. 의미상으로도 “열린 예배”가 있다면 “닫힌 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무엇이 열린 예배이고, 무엇이 닫힌 예배인가?
또 무엇에 대해서 열려있고, 무엇에 대해서 닫혀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굳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활기 있는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열린” 이라는 용어보다는 “젊은이 예배” 혹은 “찬양 예배” 등으로 사용하고,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13. 예배봐준다 ⇒ 사용불가
흔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업예배를 봐준다” “구역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 행위이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내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이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드리거나 봐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점을 봐준다”는 미신적인 용어를 상기케 하는 “예배봐준다”는 표현은 예배 신학적으로 볼 때에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용어이다.
(제86회 / 2001년)

14. 준비찬송 ⇒ 사용불가
찬송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곡조가 있는 시이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 곡을 붙인 성도들의 경배의 표현이며, 기도이며, 때로는 성도들의 신앙고백과 결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이면 열심히 찬송 부르는 것을 성도의 바른 자세로 알고 찬송을 열심히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찬송의 생활이 습관화 되다보니 때때로 찬송의 목적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준비찬송”이라는 말에서 찾아보게 된다. 교회에서 “다같이 준비 찬송을 부르면서 앞자리부터 채우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찬송을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런 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송을 시간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나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준비찬송”이라는 용어는 마땅히 사용해서는 안 된다.(제86회 / 2001년)

15. 예배 / 예식 / 기도회 ⇒ 구별사용

한국교회는 어느 나라의 교회보다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이다. 그래서 예배와 각종 기도회로 한 주일에 여러 차례 모인다. 주일 낮을 비롯하여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밤,
그리고 매일 새벽 등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열심은 세계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모임에 예배라는 명칭을 붙여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돌, 회갑, 추모 등의 모임에도 예배라는 명칭을 붙임으로써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배와 예식과 기도회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신 창조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결코 인간을 위한 모임이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배와 예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돌, 회갑, 추도, 입학, 졸업, 결혼, 입당,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를 할 경우에는 예식으로 표현하고,
예배와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목적으로 모이는 수요 저녁 모임과 금요 철야 혹은 심야 모임 그리고 매일 새벽 모임 등은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으로 명시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를 통과한 「표준예식서」의 정신을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주일예배, 주일저녁 찬양예배, 교회학교(주일학교)예배,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 경건회(각종 회의 시작 전)(제86회 / 2001년)

16. 헌금 ⇒ 봉헌
한국 교회의 예배 순서 가운데 “헌금”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 순서는 원래 봉헌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 속에서 봉헌의 순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봉헌의 의미는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즉 봉헌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정성을 다하여 경청한 무리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내어놓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순서를 “헌금”이라는 용어로, 즉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로 지칭하는 것은 봉헌의 의미를 아주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헌금”이라는 용어보다는 “봉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마땅하다.(제86회 / 2001년)


17. 축제 ⇒ 잔치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축제'를 “축하하고 제사지냄”이라고 단순하게 풀이하여 실어 놓았으나 이가원과 임창순의 ■東亞漢韓中辭典■에서는 "축제란 제사 이름이니,
묘문(廟門) 안과 밖에서 이틀에 걸쳐서 드리는 묘문제로서 조상을 사당 안에서 제사지내고, 그 다음날 사당 밖에서 지내는 제사이다“라고 정의해 놓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마을 제사를 영어의 Celebration 과 Festival 같은 축하행사를 보면서 자신들이 제사에서 마음놓고 떠들고 소리지르면서 춤추는 고유한 행사와 모양새가 비슷함을 알고,
1928년에 '축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그들의 사전에 도입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은 축제의 문제점을 보면서 이제는 성경대로 잔치,
또는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등으로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예를 들어 성령 축제..성령 잔치, 부활절 축제..부활절 절기 행사, 성탄 축제..성탄 축하 행사 등이다.
참고로 공동번역에서는 57회, 표준 새번역에서는 13회에 걸쳐 무분별하게 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나 개역 성경과 개역 개정판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힌다.(제86회 / 2001년)

18. 하나님의 축복 ⇒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복에 관한 표현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축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상과 같은 표현들을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복을 비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다음의 성구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비는[祝福]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降福] 분임을 잘 밝히고 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지라.”(개역 한글판 창 12:3)

“그가(멜기세덱)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개역 한글판 창 14:19)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또는 “복 내려(베풀어) 주시옵소서.”로 바로잡음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Ⅲ. 장례와 관련된 용어


19. 소천(召天)하셨다. ⇒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숨을 거두었다.


최근에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의 죽음을 알리는 광고에서 “고 ■■■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셨다.”는 문장을 보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교회에서 발표한 이러한 광고는 매우 부끄러운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 “나는 소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비록 사전에도 없는 어휘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소천을 받았다.”로 해야 한다.


그러나 이토록 실수가 많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불러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경우는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20.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용어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하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어느 장례예식에서 목사가 “이제 침묵으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립시다.” 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문객이 문상을 하면서 유족들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나 '명복(冥福)'이라는 용어는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 말은 불교의 전용어로서 불교 신자가 죽은 후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거기서 받게 되는 복을 가리킨 말이다. 곧, 죽은 자들이 복된 심판을 받아 극락에 가게 되기를 바란다는 불교의 내세관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가 지금껏 교회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용어 대신 순수하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든지,
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와 같은 말로 유족을 위로함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21. 미망인 ⇒ 고인의 부인, 고인의 유족

미망인(未亡人)이라는 용어는 순장(殉葬)제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순장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음을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먼저 죽은 시신과 함께 묻는 장례 풍속을 말한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와 이집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특히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분신 자살하여 순장되는 ‘사티..라는 풍습이 1829년 법으로써 금지되기까지 존속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22대 지증왕 3년(주후 502년)에 왕명에 의하여 순장 금지되기까지 이러한 제도가 존속되었다.

이런 순장제도가 성행할 때나 쓰일 수 있었던 ‘미망인’ 이라는 용어의 뜻을 풀어 보면 “남편이 죽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인데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용어의 뜻을 알았을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임을 깨닫게 된다.(제86회 / 2001년)


22. 칠성판(七星板) ⇒고정판 또는 시정판
우리의 장례문화에 변화가 일고 있으나 아직껏 가정에서 죽음을 맞은 경우가 많으며 그 때마다 목회자가 직접 시신을 다루는 일이 많다.
이때 시신이 반듯하게 굳어지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널빤지를 시신 밑에 깔고 손발의 위치를 반듯이 잡아 준다.
여기에 사용되는 널빤지 사용의 전통적인 관례가 이 널빤지에 북두칠성을 본 따서 일곱 개의 구멍을 뚫었다 하여 ‘칠성판’이라 부른다.
흔히 우리 교회에서도 적당한 이름을 못 찾아 ‘칠성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유래는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토속 신앙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신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기에 순수하게 ‘고정판(固定板)’ 또는 ‘시정판(屍定板)’으로 부름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23. 영결식, 고별식 ⇒ 장례예식

인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행하는 예식을 칭하는 용어로서 ‘영결식’, ‘고별식’, ‘발인식’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우리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결식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며 고별식은 ‘작별을 고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교리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표현은 적당하지 못하다.
그리고 발인식은 시신을 담은 상여가 집에서 떠남을 뜻하기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

이러한 용어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에서는 표준예식서를 통하여 이미 장례예식으로 정리하였기에 이제는 모두가 ‘장례예식’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해야 한다.(제86회 / 2001년)

24. 삼우제(三虞祭) ⇒ 첫 성묘(省墓)
우제(虞祭)란 장례를 마친 뒤에 지내는 제사로서 우리의 장례문화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이 때의 제사는 세 번 갖게 되는데 그것을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라 한다.
이 중에 아직도 삼우제라는 이름은 교회 안팎에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최근의 삼우제는 장사 지낸 뒤 3일 만에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관례로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성묘란 시체를 묻고 뫼를 만드는 일, 즉 산역(山役)이 잘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다. 아직도 매장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는 가족들이
3일만에 성묘를 하는 일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본 교단의 표준예식서에는 삼우제라는 이름을 ‘첫 성묘’로 부르도록 하였는데 매우 적절한 용어라고 본다.(제86회 / 2001년)

Ⅳ. 회의와 관련된 용어


25. 고퇴 ⇒ 고퇴 또는 의사봉
한국의 장로교회는 정규 회의에 사용하는 의사봉(議事棒)을 ‘고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 용어는 국가나 사회 기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며,
한국 교회 가운데서도 장로교회에서만 제한적으로 쓰고 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는 회의가 열렸던 때의 일이다. 절차위원장이 은으로 십자를 면에 새기고 청홍으로 태극을 머리에
그리고 광채 있는 은으로 띠를 띤 견고한 ‘마치’를 마삼열 회장에게 전달했다. 회장은 이 물건이 영원토록 대한장로교 노회의 마치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마치’란 이름이 속되다는 의견이 있어 회장은 기 일, 한석진 두 사람에게 이름을 개정하도록 임무를 맡겼다.
두 위원은 이틀 후 회의에서 ‘나무마치 퇴(槌)’자와 ‘고두’라 할 때 쓰는 ‘두드릴 고(叩)’자를 합하여 ‘고퇴’라 정했음을 보고하였고,
이것을 길선주 회원의 동의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고퇴’라는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에서 작명되어 결의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공식적 효력을 가진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노회 창설 때 제작된 의사봉에 대한 개별 명칭으로 지어졌고, 기독교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은 이름이며, 장로교회 밖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특수용어임을 고려하여, 장로회 총회의 상징적 의사봉 만을 ‘고퇴’라 부르고 그 외에는 ‘의사봉’이나 ‘사회봉(司會棒)’이라는 현대적 용어로 바꾸어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제86회 / 2001년)

26. 자벽 ⇒ 지명, 임명

교회 회의록에 종종 ‘회장 자벽’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심지어 ‘자백’이라고 잘못 써 놓은 사례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고어에 유래를 두고 있어 현대에 와서 거의 세력을 잃어버린 말을 교회가 고수하다보니 이처럼 생소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자벽(自辟)이란, 장관이 자기 뜻대로 관원을 추천하여 벼슬을 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이는 <수교집록(受敎輯錄)> <조선철종실록(朝鮮哲宗實錄)>에서 용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벽 행위는 각 관아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기준도 없이 자기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에 대거 기용함으로써 심각한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미나 정서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이 말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의장이 임의로 어떤 임원을 임명하는 일’로 바뀌었으나 어감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각종 회의에서 굳이 이 용어를 고집하고 있다. 대체로 회의 벽두에 특별위원을 선정하는 경우에 국한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회장의 자의임명이 불가피한 형편이라면 ‘회장 자벽’이라는 용어 대신에 ‘회장 임명’ 또는 ‘회장 지명’으로 고쳐 쓰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27. 증경 ⇒ 전(前)

‘증경(曾經)’이란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의 고대시가에 기원을 둔 특수한 말이다. 증(曾)은 ‘일찍이’라는 뜻이고, 경(經)은 ‘지내다’라는 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찍이 지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노조린(盧照隣)이라는 사람의 작품 <장안고의(長安古意)>에서 ‘증경’이라는 시어가 나오는데, ‘증경학무도방년(曾經學舞度芳年)’
■일찍이 춤 배우느라고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네■ 정도이므로 그다지 심오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한자어를 전통적으로 존중하며 차용하기 좋아했던 선비들이 이런 희귀한 용어를 우리나라에 들여왔고, 한국 교회도 교단을 위하여 일한 경력이 있는 분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자
이 단어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는 이 용어를 전혀 쓰지 않고 있어 ‘증경대통령’ ‘증경총장’ ‘증경사장’이라는 호칭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교회에서만 ‘증경총회장’ ‘증경노회장’으로 부르며 심지어 ‘증경청년회장’이라고까지 하여 이 단어를 남용하는 실정이다.
신분을 존중하기 위해 중국의 고대어를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총회장’이라고 하여 존대의 정도가 손상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제86회 / 2001년)

28. 휘장 분배 ⇒ 꽃 증정

총회나 노회에서 개회를 선포한 직후 ‘휘장 분배’라는 순서를 갖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점차 이를 생략하는 추세이지만, 역대 회장들과 주요 임원들이 일제히 단상으로 올라가
도열하면 이어서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등장하여 임원들의 가슴에 꽃을 꽂아 드리는 모습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휘장(徽章)’이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모자나 의복에 붙이는 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표지(標識)’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 익숙해진 영어 단어로 ‘배지(badge)’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회의 초반에 원로회원에게 상징적인 지위를 부여하고자 배지 대신 가슴에 꽂아 드리는 꽃은 결코 휘장이라 할 수 없으며, 이 순서 또한 매우 형식적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분배(分配)’라는 용어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분배는 고르게 나누어준다는 뜻이므로, 원로들에게 표지를 고루 나누어주는 순서라는 의미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굳이 이 순서를 사용하려 한다면 ‘꽃 증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가장 타당하리라 본다.(제86회 / 2001년)


Ⅴ. 교회생활과 관련된 용어


29. 당회장 ⇒ 담임목사. 당회장(당회 회의 때)
많은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당회장으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예배순서를 실은 주보나 교회 게시판에 당회장 000 목사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원래 당회장이란 영어의 Moderator로서 토론이나 회의의 사회자 또는 중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래서 당회 회의를 주관하는 목사를 비롯하여 노회와 총회의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을 모두 ‘모더레이터’라고 부른다. 그러기 때문에 당회를 주관하는 순간에는
목사를 ‘당회장’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그 외의 시간이나 장소에서는 ‘목사’ 또는 ‘담임목사’로 부름이 타당하다.
이 호칭이 바로잡아지지 않으면 장로를 언제 어디서나 ‘당회원’으로 불러야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제86회 / 2001년)


30. 예수 ⇒ 예수님, 성령 ⇒ 성령님
우리의 언어문화는 윗분들을 호칭할 때 ‘님’자의 사용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특히 자신이 섬기는 신의 존재를 호칭할 때는 ’님‘자 또는 그 이상의 존칭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신도들은 ’부처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이 철저히 ’님‘자를 사용하여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그 위(位)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하게 되어있다. 성삼위가 동격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한동안 논쟁이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325년 니케야 공회의에서는 제2 위격 예수님의 신성문제가 확정되었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제3 위이신 성령님의 신성문제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에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성삼위는 동격이신데 어느 위에는 ‘님’자를 붙여 호칭을 하고, 어느 위에는 그렇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호칭할 때도 ‘님’자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 ‘성령님의 역사’로 언어의 순화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31. 전야제 ⇒ 전야 축하행사
이 용어는 ‘축제’라는 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부활절 축제’ ‘성탄 축제’라는 용어를 ‘부활절 절기행사’ ‘성탄 축하행사’ 등으로 바꾸어 써야 할 필요성을 밝혔으므로,
부활절 전날 밤에 갖는 행사도 당연히 ‘부활절 전야제’ 대신 ‘부활절 전야 축하행사’라고 불러야 한다.

전야제는 전날 밤에 여는 축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종 제사가 새벽에 열리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앞날의 밤은 이것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보름이나 중추절 같은 명절의 전날은 밝은 달을 바라보며 축하의 행사를 펼치기에 적절했었다.

성경에는 어떤 행사에서 전야에 모여 축하 자리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에서는 부활이나 성탄처럼 새벽에 이루어진 일을 축하하기 위한 전야 행사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행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전야제’ 대신 ‘전야 축하행사’라고 하여 제사의 성격을 배제하고,
밤 깊은 시간까지 축하한다는 순수한 의미를 담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32. 사모 ⇒ 사모님

예로부터 스승을 높여 사부님이라 했으며 이에 걸맞게 스승의 부인을 높이어서 사모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서는 목사 부인도 사모님이라 부르고 있다.
선생이 자신을 사부라 부를 수 없듯이 선생이나 목사도 자기 부인을 사모라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느 목사가 자기 부인을 가리켜 사모라고 한 다음과 같은 표현은 잘못 된 것이다. “우리 집 사모는 다녀왔지요.”

또한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들도 자신을 사모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최근 목사 부인들이 모여서 “사모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사모회”는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목사 부인들이 자신을 사모라 지칭했기 때문이다.

이 “사모”는 주로 제자나 평신도들이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을 높여 불러 주는 말이기 때문에 실제 사용 될 때는 “사모님”이 될 수밖에 없다.(제86회 / 2001년)


87회


1. 천당(天堂) ⇒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늘나라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 간다.”, 또는 죽은 사람을 가리켜 “천당에 갔다.” 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천당’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성경에는 물질로 된 유형의 집 또는 공간으로 이해하기 쉬운 천당의 개념이나 서술이 없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이 땅의 종교 문화를 형성한 타종교에서 유래된다. 한민족의 일반적인 종교개념이나 사전적 풀이에서는 천당을
“하늘 위의 신의 궁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인 정토(淨土), 즉 깨끗한 국토, 곧 부처와 보살이 사는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을 천당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천당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교도들이 즐겨 쓰는 ‘천당’이라는 어휘보다 한글성경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만이 온전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 ‘하늘나라’로 사용함이 적절하다.(제87회 / 2002년)

2. 입신(入神) ⇒ 사용불가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기도하는 열심은 매우 소중한 특성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한 기도생활은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를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각각 달리 경험하게 한다.
그러는 중에 여러 형태의 은사를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신학적인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기도원 등에서 기도에 집중하다가 “입신(入神)”을 했다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입신(入神)이란 무속종교의 표현으로서 무당에게 신이 내려 인간으로서의 자아의식을 상실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사전에서는 입신(入神)을 한 인간이 영묘(靈妙)한 경지에 이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신의 경지에 이름” 이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표현은 천주교가 주로 사용한 공동번역의 민수기 11장 25~27절에서 유일하게 사용했을 뿐 본 교단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개역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영을 내리실 때” 또는 “영이 임하실 때”로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그 분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입신(入神)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용어이다.(제87회 / 2002년)


3.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 사용불가
기도하는 중에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살아있다는 표현은 ‘언젠가는 살아있지 못할지 모른다’
또는 ‘아직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등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극히 제한하는 표현이 된다.(제87회 / 2002년)


4.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 룻기, 욥기, 잠언, 아가
룻記書, 욥記書, 箴言書, 雅歌書 등으로 말하거나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자체에 記, 言, 歌 등이 있어 ‘書’ 자가 의미상 과잉표현(redundancy)이 되므로
그렇게 쓸 수가 없다. ‘創世記’ 나 ‘출애굽記’ 에 ‘書’ 자를 붙여 ‘創世記書’로나 ‘출애굽記書’로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啓示綠’에 ‘書’ 자를 붙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말 성경이 바로 쓰고 있으며, 같은 한자를 중국어나 일본어 성경 책명에서 그렇게 쓰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제87회 / 2002년)

5. 시편 ○장 ○절 ⇒ 시편 ○편 ○절
많은 사람이 시편의 장 절을 나타낼 때, 시편 몇 장 몇 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몇 장과 몇 절은 산문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의 구분을 신■구약의 다른 책의 구분을 나타내는 ‘장’ 과는 달리 ‘편’을 쓰는 것은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 성경이나 일어 성경에서도 우리나라와 같다.(제87회 / 2002년)

6. 하나님의 몸 된 교회 ⇒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하나님의 몸 된 교회’란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와의 관계에서 비유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온 몸의 지체가 머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과 같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교회론의 한 단면이다.
그는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을 결합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천명하고 있다.(엡 1:20~23) (제87회 / 2002년)


7.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설교용어)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시는 하나님(기도용어) ⇒ 사랑하는 하나님

설교를 할 때 흔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라고 하는 말은 말하는 이가 그 동사 ‘사랑하시는’의 주체가 될 때에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말하는 주체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존대를 나타내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기도를 할 때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란 말도,
그 ‘사랑하시는’이란 동사의 주체를 말하는 이 자신을 가리키는 뜻으로 말하는 경우라면, 즉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옳지 않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경우를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의미는 흔히 ‘사랑하시는 시민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경우처럼
그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고 말하는 이(화자)인 것이 분명하다. 만일 사랑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라 해야 분명하다.(제87회 / 2002년)

8.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 ⇒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예배로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겠습니다.

“다같이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예배시에 성도들은 결코 주기도문을 단순히 외는(외우는) 것, 즉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 한 마디 뜻을 바로 새기면서
음송(吟誦)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른 표현은 “다같이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 “다같이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도
그와 같은 경우로서 옳지 않다. 즉 “다같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주기도문을 외운다”라는 표현이나
“사도신경을 외운다”라는 표현은 그 자체가 주기도나 사도신경을 진지하게 뜻을 생각함이 없이 형식적으로만 소리내어 외는 행위이다.(제87회 / 2002년)


9. 중보기도 ⇒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기독교에서 “중보”라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단 한 분의 중보자이시다.(딤전 2:5)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계시고 성육신 이전에도 선재(先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중보자이셨다.(요 1:3,10; 골 1:16; 히 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행위가 가장 명백하고 독점적으로 드러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구속사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보는 이미 완성된 구속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구속의 열매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끊임없이 의존하며 살아간다.
예컨대, 믿는 자들이 드리는 감사와 기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진다.(요 14:14; 롬 1:8; 골 3:17; 히 13:15)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눅 22:69; 골 3:1; 히 12:2)
하늘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한 일면은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롬 8:34; 히 7:25)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종말에 있게 될 부활과 심판의 때에도 계속될 것이다. 즉 부활과 심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요 5:28~29, 고전 15:22, 52~54; 살전 5:16; 마 25:31~46; 요 5:27; 행 17:31)

그러므로 중보기도라는 표현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며, “이웃을 위한 기도”, “중보적 기도”, 라는 표현으로 사용함이 적절하다.

중보적 기도는 중보자의 기도(중보기도)와는 다른 “나” 아닌 “남”을 위한 기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제87회 / 2002년)

10. 제사, 제단, 제물 ⇒ 예배, 성단, 예물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소나 양을 잡아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제물의 피를 단에 뿌린 뒤 그것을 불살랐다.
이것이 곧 레위기의 제사요, 이 단이 바로 모세의 제단이며, 죽임을 당한 소나 양들이 희생의 제물이었다.
이 제사는 마침내 모든 제물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성되었고, 신약시대에 들어 예배로 내용과 형식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교회는 지금도 예배를 제사의 의미로 이해하며 다음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게 하옵소서.”, “기도의 제단에 나와서, 작은 제물을 바칩니다.”

한국 문화의 특징으로서 제의적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는 점을 지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신화, 민속, 종교의식 등이 모두 제단 근처에서 성육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구약의 제사용어를 예배 속에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부자연스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한국교회 역시 제의적인 문화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제사는 ‘예배’로, 제단은 ‘성단’으로, 제물은 ‘예물’로 바꾸어야 한다.

한편, 제단을 ‘강단’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으나 이것은 성례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설교만 이루어지는 단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므로 ‘성단’이라 함이 적절하다.(제87회 / 2002년)


11. 영시(0시)예배, 자정예배 ⇒ 송구영신예배

영시(0시)는 하루가 끝남과 동시에 또 하루가 시작되는 밤 12시 정각, 곧 자정을 가리키는 시각이다. 교회가 이 시각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한 해가 지나가고
다시 시작하는 연말연시의 자정에 국한된다. 그러므로 연말연시의 0시에 드리는 이 예배를 영시예배나 자정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예배는 감리교회의 존 웨슬리가 언약갱신예배(Covenant Renewal Worship)라는 이름으로 소개하였는데 새로운 해를 맞아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우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예배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날짜의 특성을 강조하여 야성회(Watch Night Worship)라는 이름이 나왔고, 한국교회에서는 단순히 시각만을 앞세워 0시예배라 부르고 있다.

예배가 시작되는 시각을 예배의 명칭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낮11시예배, 밤7시예배가 예배의 이름이 될 수 없듯 0시예배 역시 마찬가지다. 또, 0시는 예배 시작 시각도 아니다.
교회에 따라 밤 11시나 11시30분에 시작하여 고백의 시간을 갖고 새 언약을 세우는 중에 새해를 알리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일을 가리켜 ‘송구영신’, 또는 ‘송영’이라 한다. 이 의미가 예배의 성격 및 내용과 일치하므로 ‘송구영신예배’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송영’은 ‘송구영신’의 준말이지만, 찬양에서의 ‘송영’과 동음이어서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있으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제87회 / 2002년)

12. 수양회 ⇒ 신앙수련회

절기가 바뀌면 교회마다 행사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특히 기도원이나 수양관이 있는 교회는 그 장소를 활용하여 행사를 펼치는데 그 내용이 점차 새로워지고 다양해져
말씀집회, 찬양콘서트, 각종 이벤트, 세미나와 워크숍 등을 포함하게 되었다.

아무리 수양관에서 행사를 치른다 하더라도, 이런 행사를 전통적 용어인 수양회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그 성격이 크게 바뀌고 말았다. ‘수양’이란 도덕적 품성을 닦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소극적이고 정적인 느낌을 주는 이 용어를 가지고서는 현대의 다양한 행사 내용을 다 담을 수 없다.

교회의 공동체 훈련이라는 목적을 잘 드러내면서 다양한 행사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 ‘신앙수련회’가 적합하다. ‘수련’은 마음과 몸을 잘 닦아서 익힌다는 사전적인 뜻을 갖고 있으며,
특히 정신을 닦고 기르는 데 사용하는 종교적 용어로도 익숙하다. 여기에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한 뚜렷한 목표를 앞에 내세우게 되므로 가장 합리적인 명칭이다.(제87회 / 2002년)

13. ...... 기도로 폐회합니다 ⇒ ......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기도로 기도회를 마칩니다.

예배가 끝날 즈음해서 예배 인도자가 이제 “○○○ 목사님 축도로 폐회합니다”, “○○○ 장로님 기도로 폐회합니다” 또는 “○○○ 집사님이 폐회기도를 해 주시겠습니다”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 안의 각종 회의에서 그 회의가 끝날 무렵 의장이 “○○○ 장로님의 기도로 폐회합니다”, “폐회기도를 ○○○ 집사님이 해 주시겠습니다”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무의식중에 예배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예배가 회의가 아닌 이상 반드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주일날 드리는 주일 낮 예배는 물론 새벽기도회나 수요기도회, 금요밤 심야기도회 등도 비록 우리가 관례를 따라 ○○회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바로 예배의 일종이므로
이 때에도 “○○○의 기도로 폐회합니다”와 같이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교회 밖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든지 예배가 끝날 때
위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은 안 된다. 예배는 어느 경우나 ‘○○회’가 아님을 분명히 새겨둘 필요가 있다.(제87회 / 2002년)

14.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 ⇒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 기도로

예배드릴 때 기도 인도자가 기도의 마무리를 하면서 ‘예배의 시종을 하나님께 의탁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와 같은 표현을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예배의 시종을 하나님께 의탁드리며’는 바람직한 표현이 못된다.

의탁은 ‘어떤 것에 몸이나 마음을 의지하여 맡긴다’는 의미다.

내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거의 ‘그가 대신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인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이 예배를 도리어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방관자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이 예배를 하나님께 의탁하면서’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필요할 시는 “이 예배를 주장하시고” 또는 “이 예배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고”로 쓸 수 있다.(제87회 / 2002년)


15. 태신자 ⇒ 전도 대상자
생소한 용어가 교회 안에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는데 바로 ‘태신자’가 그것이다.


이 말은 믿지 않는 어느 사람을 지칭하면서 장차 태어나게 될 신자라는 의미로 즉 태안에 들어 있는 신자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전도해서 꼭 신자를 만들겠다고 속으로 작정한 어떤 특정한 사람을 ‘태신자’라고 하고 있다.


임산부의 태 안에 들어 있는 생명체를 태아라 부르는 것에 연유하여 태안에 들어 있는 신자라는 뜻으로 ‘태신자’가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부적합한 용어이다.
태아가 임산부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생명체일진대 그러면 ‘태신자’는 과연 누구의 뱃속에 들어 있다는 말인가.


만일 ‘태신자’를 용납한다면 장차 목사나 장로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그 사람을 ‘태목사’, ‘태장로’ 라 해도 괜찮다는 무리한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태신자’라는 용어대신 ‘전도 대상자’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제87회 / 2002년)


16. 안집(‘안수집사’의 줄임말) ⇒ 사용불가

집사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안수하여 임직한 이들을 가리키는 직분인데, 서리집사와 구별하기 위하여 안수집사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그 명칭을 줄여 ‘안집’이라는 생소한 말로 부르거나 기록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이는 사회에서 유행을 타고 있는 두문자어(acronym) 사용이 교회에 스며들어온 결과라 하겠다. 신문과 같은 활자매체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되도록 줄여 쓰기 위한 목적으로
무리한 약어를 만들어낸다. 이런 현상이 간결한 것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의 성향과 맞아 떨어져, 단체이름 줄여 말하기(예, 나라사랑실천본부 → 나사본),
일상어 재미있게 줄이기(예, 바라보고 싶은 사람과 천하에 재미없는 사람 → 바보와 천재) 등 언어생활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에서도 직분의 호칭을 줄여 말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것이 부목사를 ‘부목’이라고 부르는 경우인데 이는 교목, 군목, 경목 같은 준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의미가 통하고 있다. 그러나 안수집사를 ‘안집’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무리한 줄임말이다.
만약 이런 두 문자어를 받아들인다면 원로목사를 ‘원목’, 은퇴장로를 ‘은장’이라 부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동의어가 양산되고, 어감이 이상해지며,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의 위화감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 줄임말의 폐단이다.
교회 공동체의 순수성을 해칠 우려가 있는 ‘안집’ 같은 생소한 두 문자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제87회 / 2002년)


17.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 주님 안에서 문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

‘이름’은 누구를 대신하여 부르는 말 또는 누구를 대신하여 지시하는 말이므로, 그 사람의 권위와 인격의 임재를 동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의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고 말할 때,
그 서술어는 권위와 위엄과 인격의 동반을 의미요소로 하는 용어이어야 한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이름은 더할 수 없는
권위와 위엄과 인격과 능력을 동반하는 것이므로 단순히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는 뜻인 ‘문안’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것은 어색하다.
다시 말하자면, ‘문안’이라는 행위는 ‘예수님 이름을 대신하여’ 혹은 ‘예수님 이름을 빌어서’ 비로소 성립되는 것일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또한, ‘이름으로’에 쓰인 격조사 ‘-으로’는 ‘수단, 방법, 도구, 기구’ 등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누구의 이름으로 문안드리다’라는 표현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대안으로, ‘주님의 이름으로’는 ‘주님 안에서’ 또는 ‘주 예수님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등으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다. 성경에는 문안이나 감사나 부탁을 할 경우 거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로 기록되어 있다.(롬 16:10, 고전 1:4, 딛 3:15) (제87회 / 2002년)


18. 일요일(공일) ⇒ 주일

그리스도인은 일요일(공일)을 ‘주의 날’(계1:10)을 뜻하는 주일이라고 해야 한다.

현재 총회 헌법의 예배와 예식에 주일이 안식일과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별도의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제87회 / 2002년)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 바람직하지 못한 용어


현재 우리 생활 속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말들 중에 다음과 같은 말들은 무속, 토속신앙, 도교, 불교 등의 사상이나 교리가 담겨져 있는 말들로 우리 기독교 신앙과는 맞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용어 사용을 피하는 것이 좋다.

1. 도로 아미타불


고생만 하고 아무 소득이 없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본래는 중이 평생을 두고 아미타불을 외우지만 아무 효과도 없다는 뜻에서 왔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는 바람직하지 않다.

2. 공염불(空念佛)

본래 불교와 관계된 말로 신심(信心)이 없이 입으로만 외는 헛된 염불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급적 이 말을 피하는 것이 좋다.

3. 보살 같다.

보살의 뜻은 ‘위로 부처를 따르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버금이 되는 성인’이라 되어있는데 아주 성품이 좋은 사람을 일컬어 ‘보살 같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는 적합한 말이 못된다.

4.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음흉하거나 요사스러운 마음이 전혀 없고 마음이 지나치게 어질고 순한 사람을 가리켜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피해야 할 말이다.

5. 신선놀음

신선이란 도를 닦아서 인간 세상을 떠나 자연과 벗하여 늙지 않고 죽지도 않고 오래 오래 산다고 하는 초월적인 상상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편안한 삶을 가리켜
‘신선놀음이다’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쓰기에 적합한 말이 못된다.

6. 도사(道士)

어떤 일에 도가 트여서 능숙하게 해 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이 도사란 본래 도교에서 도를 갈고 닦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성직자나 직분자에게
이 말을 비유하여 쓰는 것은 삼가야 한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길 찾는 데는 도사야’와 같은 말은 해서는 안 된다.

7. 신주(神主)모시듯 한다.

신주란 사당 등에 모시어 두는 죽은 사람의 위패를 말하는데 글자 그대로 죽은 사람을 신으로 받드는 민간 신앙에서 온 말로 몹시 귀하게 여기어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다루거나 간직하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신주 모시듯 한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가급적 이런 말은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8. 명당(明堂) 자리

명당이란 민간 신앙의 풍수지리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후손에게 장차 큰 복을 가져다 준다는 묏자리나 집터를 말하는데 이는 우리 기독교 신앙과 어긋남으로 쓰지 않아야 된다.
예를 들어 ‘여기는 정말 명당자리다’와 같은 말을 쓰는 것은 피해야 한다.

9. 넋두리

민간 신앙에서 굿을 할 때 무당이나 가족의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의 넋을 힘입어 그 넋을 대신하여 말을 하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불만이나 신세타령을 길게 늘어놓으며
하소연하는 말을 가리켜 넋두리라 하는데 이런 말은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10. 도깨비 장난

민간 신앙에서 도깨비란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인데 이 도깨비는 비상한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을 홀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심술궂은 짓을 많이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 도깨비와 관련된 ‘도깨비 장난’, ‘도깨비 짓’, ‘도깨비 불’과 같은 허무 맹랑한 술어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

11. 일진(日辰)

날의 간지(干支)를 말하는데 이에 따라 그 날 그 날의 운세가 있다고 믿고 있다. 용례로 ‘일진이 나빠서’, ‘일진이 사나워서’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피해야 될 말이다.

12. 살(煞)

민간 신앙에서 살이란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을 말한다. ‘살이 낀다’, ‘살을 푼다’, ‘살이 내린다’ 와 같은 말들을 우리는 쓰지 말아야 한다.

13. 귀신같다(이다).

귀신을 미화해서 어떤 일을 잘 알고 있다든지 또는 아주 잘 할 경우 이를 ‘귀신같다’, ‘귀신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피해야 될 말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을
이 귀신에 비유하는 것 즉 ‘김 장로님이 귀신같이 알아 맞추시네’와 같은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

14. 액(厄)

액이란 ‘모질고 사나운 운수’라는 뜻인데 ‘액이 닥친다’, ‘액을 물리친다’, ‘액땜을 한다’와 같은 말은 우리가 피해야 될 말이다.

15. 운수(運數), 운(運), 수(數), 재수(財數)

운수, 운, 수는 같은 말로 사전적인 풀이는 ‘이미 정하여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天運)과 기수(基數)’를 뜻하며, 재수란 ‘재물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있을 운수’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가급적 이런 말들을 피해야 한다. ‘운이 나쁘다’,
‘운이 없다’, ‘운수 사납다’, ‘재수 있다’, ‘재수 없다’ 등과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6. 사주팔자(四柱八字)

사주팔자란 ‘사람이 타고난 한 평생의 운수’를 말하며 이를 줄여 ‘팔자’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는 우리는 이와 같은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사주팔자를 잘 타고났다’, ‘팔자가 기구하다’와 같은 말을 우리는 쓸 수 없다.

17. 터줏대감

민간 신앙에서 터주란 ‘집터를 지키는 지신, 또는 그 자리’를 말하는데 가마니 같은 것 안에 베 석자와 짚신 따위를 넣어서 달아 두고 위한다.
이 터주에 관련된 말로 집단이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람을 가리켜 ‘터주대감’이라 하는데 이 말은 우리가 가급적 쓰지 않는 것이 좋다.

18. 손

민간 신앙에서 손이란 날짜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여 따라 다니면서 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을 뜻하며 초하루와 이틀은 동쪽, 사흘과 나흗날은 남쪽에 있다고 하며,
9일과 10일에는 손이 없는 날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날짜를 따져서 ‘내일은 손이 없는 날이니 이사를 하자’,
‘내일을 손이 있는 날이니 이사하지 말자’와 같은 말들을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말들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를 따르는 것도 안 된다.

19. 운명

운명이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말하는데 우리는 이런 뜻을 가진 ‘운명’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운명에 맡기다’, ‘모든 것이 운명에 달려 있다’ 와 같은 말을 우리는 쓰지 않아야겠다.


1. 천당(天堂) ⇒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늘나라 === 교회생활

2. 입신(入神) ⇒ 사용불가 === 교회생활

3.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 사용불가 === 기도

4.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 룻기, 욥기, 잠언, 아가 === 성경 呼稱

5. 시편 ○장 ○절 ⇒ 시편 ○편 ○절 === 성경 呼稱

6. 하나님의 몸 된 교회 ⇒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 교회생활

7.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설교용어)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배, 사랑하시는 하나님(기도용어) ⇒ 사랑하는 하나님

8.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 ⇒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겠습니다.

9. 중보기도 ⇒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 기도

10. 제사, 제단, 제물 ⇒ 예배, 성단, 예물 === 예배

11. 영시(0시)예배, 자정예배 ⇒ 송구영신예배 === 예배

12. 수양회 ⇒ 신앙수련회 === 교회생활

13. ...... 기도로 폐회합니다 ⇒ ......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기도로 기도회를 마칩니다. = 기도

14.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 ⇒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 예배

15. 태신자 ⇒ 전도 대상자 === 교회생활

16. 안집(‘안수집사’의 줄임말) ⇒ 사용불가 === 교회생활

17.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 주님 안에서 문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교회생활

18. 일요일(공일) ⇒ 주일 === 교회생활
 
               #자료들중에 간혹 접근이 안되는게 있어요.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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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소리

김 석균

주께 두 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밝아오는 이 아침을 환히 비춰주소서
오 주 우리 모든 허물을 성혈의 피로 씻기어
하느님 사랑 안에서 행복을 갖게 하소서
서로 믿음 안에서 서로 소망 가운데
서로 사랑 안에서 손잡고 가는 길

-후렴-
오 주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주께 두 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주가 예비하신 동산에 항상 있게 하소서
오 주 우리 맘에 새 빛이 어두움 밝히게 하시어
진리의 말씀 안에서 늘 순종하게 하소서
서로 참아주면서 서로 감싸주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주께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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