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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ROSS(존 로스)/한국의 첫 선교사

5. 교회 내에서 영적인 근원들의 심화(1888-1900) 2

 

 

1892년 2월 16일 로스목사와 잉글리스는 또 한번의 여행을 했는데, 이때 봉천의 동서와 개원을 거쳐 처음엔 철령으로,서쪽으로 대평구와 매매가로 갔고, 거기서 동쪽으로 이동,남쪽으로 휘난 즉 오늘의 차오양에 이르렀다. 그 장소에서 떠날 때까지 그들은 통화와 간도지방으로 계속 여행했는데,그들은 2박 3일을 보낸 후 나흘 걸려 봉천으로 돌아 왔다.

 

5월 17일 아침 그 장로회 관할교구가 봉천에서 모였는데, 외국선교회 본부의 의장인 던칸 맥레런(Duncan M'Laren)이 참석했다. 의장은 에딘버러 신문인 '스캇츠맨(The Scotsman)'에 편지를 보냈는데, 7월 6일 로스목사와 그의 동력자들의 사업을 찬양했다. 던칸 레런은 어떤 선교회도 중국에서 이 선교회가 한 것 보다 더 빨리 성장한 것이 없다고 느꼈다. 이때 2,000명의 신자들이 있었고, 에이레 장로교회를 포함해서 간부진들이 18명이나 되었다. 에이레 사람들은 관성을 받았고, 쌍성부와 두개의 떨어진 지부엔 스코틀랜드인이 있었다. 또 그 회의에는 조선에 있는 성공회 선교사인 찰스 존 콜페(Charles John Corfe)수도원장이 있었다. 아마 주교 콜페의 최소 관할은 조선과 같이 만주도 포함되었고, 그의 영역에 있는 장로교 선교사들과의 접촉의 필요성을 느꼈는데, 특히 그들이 조선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때 그러했다. 그가 방문하는 동안 조선의 교회에 대해 수련회에서 얘기했다. 11월 말경 로스 목사는 개원 근방 지역을 여행했는데,이 해에 그는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How the Gospel Spreads in China')이라 이름 붙여진 세계 선교보고에 제출한 또 하나의 논문을 썼다.

 

1893년 4월 로스목사는 봉천의 동쪽으로 순회전도 여행을 했는데, 선왕들의 무덤이 있는 흥경을 거쳐 조선과 중국 사이에 오래된 세관 중 하나인 왕청문에 도착했다. 거기서 통화를 지나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통화와 환첸의 중간인 치안티엔추까지 도달했고, 거의 일주일을 거기서 보냈다. 일행 중 한 사람의 집 근처에 여러 젊은이들이 모여 방탕한 일을 하는 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로스목사는 그들과 긴토론을 벌였으며,그들은 아마 불교와 도교의 한 분파였을 것이고,사일리(Dsaili)로 알려졌다. 로스목사는 이 지역에 있어서조차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이들 중 한사람은 李씨라는 사람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간도의 서적보급원으로 고용되어 세례를 받으려고 로스목사에게 왔다. 보고서에서 로스목사는 그 시대의 빛나는 화동상을 자세히 기록했고,그가 전생애를 만주에서 보냈던 중요성을 기술했다. 5월 시찰회에서 차기 대회의장에 선출됐다. 여름 동안은 그의 딸 마아가렛(Margaret)이 아파서 그 가족은 그녀의 건강을 위해 연대에 얼마간 머물렀고,9월 5일 영구로 돌아 왔다.

 

1893년 여름 양자강 계곡에서 사회적 소요가 일어나 식구들이 그들의 안전을 확보키 위해 영국 포함을 사용하리라 생각한데 대해, 로스목사가 말하기를 "중국에서 있는 어떤 작은 문제들을 간섭키 위해 세속적인 힘을 빌린다면,복음이 중국에 전파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황제'나 '영국 포함'에 대한 요구는 애국적인 중국인의 심중에 더욱더 선교사는 정치적 대행자라는 인상 - 모든 다른 복합적 원인보다 더 기독교사상을 감추는 믿음-을 짙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1893년 11월 로스목사는 봉천과 철평 중간에 있는 일루(Ilu)에 지부를 설립할려고 생각했다.

1894년 1월 로스목사는 봉천 전지역 특히 일루지방을 중점적으로 여행했다. 이 지역에 대한 그의 노력은 북쪽으로 선교영역을 넓히기 위해 한 지역을 활성화한다는 뜻이다.

3월에 로스목사는 글래스고우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는데,그 공적으은 만주에서의 선교에 대한 노력뿐만 아니라 그의 두저서인 'A History of Corea' 및 'History of the Manchus'때문이었다. 이 때까지 선교부는 만주에서 20년간 활동해 왔고 끊임없이 고요한 성장을 지속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해 여름 조선의 영주권 문제를 둘러 싸고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주된 격전지는 만주와 조선의 북쪽 지방으로 교회와 선교의 모든 방면에 타격을 주었다. 청.일전쟁은 일본과 서양인 사이를 구별치 않았던 중국인에게 강한 애국심을 자극시켰다.

 

모든 외국인들은 중국을 공격하고 중국의 종주권 박탈에 대항하는 집단에 속하는 것 같았으며, 이런 감정 때문에 많은 폭도들과 훈련 안된 여러 집단의 군사들이 기독교 단체와 중국신자들을 공격했다. 8월10일 요양에 있는 한 폭도가 쳐 들어와 제임스 와일러를 아주 심하게 때려 6일 후 그 상처를 죽었다. 비록 8월 말 범인들이 붙잡하여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으나,그 분위기가 너무 거세어져 선교사들은 내륙지방에서 영구로 가는것이 좋다고 여겨졌다.

 

소요 중반에 이르러 로스 목사는 세계일주 여행을 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부인의 내방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8월 20일 떠나 25일에 영구에 도착해야 했는데, 봉천을 떠나기 전 비숍 부인은 진료소를 세우는데 쓰도록 멕시코 은화 200불을 선사했는데, 후에 그 진료소는 그녀의 사별한 남편 이름을 따서 죤 비숍(John Bishop)이라 명했다.

 

로스목사와 크리스티(Christie)박사는 그들이 그 시를 떠나도록 정해진 10월 10일까지 봉천에 머물렀다. 이때까지 그는 건강의 악화와 체력을 소모하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해 왔다. 10월 중순 그와 가족은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타고 상하이에 들렸고,1월 22일 고향에 남아 예배와 거기 정박 중인 영국 및 미국전함들의 명사들을 위한 다른 활동들을 집행했다.

 

로스 목사가 영국의 고향에 돌아 오기 전, 글라스고우에 있었던 드러몬드 (Drummond)와 발린토어(Balintore)에 있었던 그의 숙모는 가족에 대해 마음을 졸이며 편지를 보냈으나 그들의 안전엔 이상이 없었다. 로스목사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건강은 거의 환자에 가까왔다. 스코틀랜드에서 약간의 여유를 가졌고, 1895년에 가족들은 펀(Fearn)에서 요양과 친족을 방문하면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와 선교부는 그가 소요 기간 중 영국에 남아 계속 활동할 것인가 혹은 현지로 선교사로 돌아 갈 것인가에 대해 다투었다. 또한 여선교사들이 만주에 돌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토론했다. 8월 로스목사 가족은 9월 13일 런던에서 '피 엔드 오우(P & O;Peninsular and Orient)'회사 기선인 로마호를 타고 갈려고 했으나, 로스목사의 건강 때문에 영국에서 그해 겨울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 해 여름이 다되어 갈 무렵, 만주에서 전보가 도착했는데 여성들을 축출할 것이라 했다. 이 전보를 받고 도착했는데 여성들을 축출할 것이라 했다. 이 전보를 받고 로스목사는 갑자기 그의 생각을 바꾸고 혼자 9월 19일 영국을 떠나 제노아(Genoa)에 가서 23일 북독일 로이트(Lloyd)기선인 프린스 하인리히(Prinz Heinrich)를 타고 영구에 도착했다. 11월 4일에 영구에 가사 11월 31일 봉천에 도착했다. 그때의 보고에서 봉천에 아직 약간의 소요가 있었으나 얼마간의 반외국인 감정폭발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인명손실이 없었다고 알렸다.

로스 목사는 한번 더 중국 내부의 문제에 서양의 무력이 참견해서는 안된다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인들의 노력에 결정적으로 해를 끼친다고 느끼는 전함의 출동에 대해 단호했다. 그가 주둔지로 돌아 왔을 때,제임스 웹스터는 사업이 해룡성에서 시작되어 개우너지역의 사업이 확장되기를 기대했다.

 

1869년 초 일반교회 활동은 정상을 되찾았고, 외국선교사들은 가장 멀리 떠러진 곳에서까지 원상을 회복했다. 멀리 남쪽과 북쪽의 지부에서는 외국인들에 항거하는 소동의 소식은 하나의 결과로서,교회나 선교사들 어느 쪽도 청.일정쟁의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만큼 그곳의 주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4월 16일까지 로스목사 부인과 두딸이 그와 같이 있기 위해 만주로 돌아 왔고, 6월 14일 교회발전의 획기적인 사건이 봉천 출신의 첫 목사와 장로를피택함으로 이루어졌다. 중국 양식의 두번째 교회건물이 그 해 여름과 가을 동안 철령에 세워졌고,처음으로 새 부속예배당이 봉천의 한 교외에 건축됐다. 9월 로스목사는 만주 수도 북쪽의 선교지부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로 그가 생각했던 일루의 교회에 열중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이 도시에만도 300명 이상의 세례받을 사람이 있고,그것이 확설화와 가능성을 방해했던 교회의 공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9월 말인가 10월초에 상해로 여행한 적이 있는데 이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12월 성탄절 바로 전에 로스목사는 흥경과 영릉 동쪽으로 순회전도 여행을 하면서 44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897년 1월 그는 일루로 여행을 계속해서,이 시장 주위 몇몇 마을에서 158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2월 그는 동쪽으로 또 여행했고 그 때 약 50마일을 선회했는데,그가 관할했던 가장자리에서 개원의 서쪽인 파짜쯔우로 가서 그 후 영릉,흥경,통화와 치앙티엔쯔우 남부까지 갔다. 여행 중 159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동화에 있을 때 그가 남긴 말은 "내가 마음과 손에서 멀리 떨쳐 냈던 조선인들이 우리에게 다시 밀려 온다"라고 한 것이었다. 그가 통화에 갔을 때 50명의 한국인이 참석해 21명이 세례를 받았다.이유는 이들이 그에게 거대한 조선 사회에서 그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선사를 보내 달라는 청원을 또 한번 피했다.

 

1897년 4월 일루 부근 지역을 순회 전도했고,5월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목사를 위해 동북 중국선교 25주년으로 만주 선교부가 잔치를 베풀었다. 7월 중순부터 로스목사는 여름을 상해에서 보내면서 성서주석협의회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나온 나온 결론은 로스목사가 욥기 주석, 이사야(절반),마태복음(절반),야고보서와 몇몇 서신의 주석을 쓰기로 되었는데, 후에 성서의 완전한 중국어 주석의 부분으로서 출판되었다.

 

이 해에 새로 안수받은 목사 류첸야오는 영국을 여행하여 스코틀랜드에 있는 로스목사의 모교회를 방문할 수 있었다. 류목사의 방문은 로스목사의 오랜 숙원인 중국 교인들이 서양교회의 사정이 어떤가를 알아 보기 위해 스스로 서양으로 갈 수 있음을 실증했다.

10월 로스목사는 봉천 북쪽을 잡지인 만주교회지 (Manchurian Church Magazine)를 내도록 활동했다. 그 외 한국인 서적 보급원이 이 때 도착해 간도에 있는 한국촌으로 다시 오도록 독촉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때 만주교회를 위한 전략은 교회의 성장을 증명했다. 즉 한 사람의 중국인 목사, 17명의 장로,165명의 집사와 105개의 예배당 및 예배소,전체 세례받은 자가 5,802명에 달했고,학습자가 6,300명이나 되었다.

 

로스목사는 불굴의 여행자였다. 1898년 1월 다시 동쪽으로 여행했는데 흥정까지 여행했고,먼 산골에 있는 작은 마을을 거치면서 북쪽으로 파치아쭈까지 갔다. 이 여행을 끝내고 2월에 다시 더 동쪽에 있는 마을들을 방문했고, 한 달 후 영릉,흥경에 다시 갔으며,그후 통화 서도강,예쉬호쭈,치앙티엔쭈,라클리큐,쟈오징고우와 리쉬짜이를 방문했다. 여기에서 중국인 122명,조선인 9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여행과 특히 조선인의 세례를 회고하면서 "모든 조선인의 문제는 나에게 무겁게 지워져 있다"라고 술회했다. 만주 전체의 두배에 해당하는 인구가 서울에 있었으나, 이 중요한 지역에는 한 사람도 배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의 모교회에 편지를 보내, 통화지방에 머무를 수 있는 그들에게 선교사를 보내는 것을 고려해 보도록 간청했다. 신앙을 숙련시키러 온 많은 조선인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렸고, 그렇지 않으면 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인이 될 것이고 사실 그렇게 되었었다. 로스목사는 이것에 대해 그러한 사람들이 그와 맥킨타이어 목사가 번역했던 신약서서의 보급을 통해 그리스도 사상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그것이 특히 절박함을 느꼈다.

 

영국 및 해외성서회(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의 트러리(R.H.Turley)는 이 마지막 여행에 로스목사를 동반했고 4월 그는 외국선교부(Foreign Missions Committee)에 강력한 편지를 써서 압록강 기슭을 따라 사업을 시작하도록 촉구했는데,교회는 그들이 도전하는 환경에 직면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드러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그는 더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가을에 로스목사의 주의가 집중된 것은 교회의 가장 밀접한 관련 중 하나인 숙련된 성직자의 교육이라는 견해였다. 로스목사가 초보적 평신도 교육기관은 이미 설립했으나,좀더 조직적이고 복잡한 신학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더 절박하게 요청되어졌다. 로스목사와 에이레교회의 필턴(T.C.Fulton)은 교수들을 불러 들이고 로스목사가 새 기관의 학장이 되었다. 다른 데 선교사들은 강사로 강의를 맡게 했다. 교육과정은 6개월에 매 4장과 이상을 짜고, 강좌는 10월에 시작해서 4월에 마쳤다. 고등학교 졸업자격이 없는 네 학생에게는 입학시험이 부과되었다.

 

1893년 12월 세 사람이 로스목사의 부탁으로 간도지방을 여행했는데,그들은 2월 여행에 동반했기 트럴리,복음서 보급협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스프랜트(Sprent)씨와 요양의 선교사인 그레함(J.Miller Graham)이었다. 스프랜트가 온 것은 아마 간도지역 상황에 관계된 조선의 주교 코프씨의 제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 셋은 12월 13일 봉천을 떠나 1899년 1월 16일 집으로 돌아 왔다. 그의 보고에서 그레함이 언급하기를 "이 지역은 명백히 최소한 한 사람의 안수받은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하고, 거기의 많은 새 신자들은 돌 보아줄 사람이 부족해서 많은 사람들이 장로교와 가까운 천주 교인이 된다는 로스목사와 트러리의 견해를 강조했고, 또 지방집회를 표시하는 자립적 태도를 칭찬했다.

 

이 세사람이 갔던 진로는 흥경,황청문,영액과 통화전체 지역이었다. 그들은 26일까지 통화에 머물렀고,거기서 성탄절을 지내면서 그 교회의 헌금으로 생활했다. 또 성찬식을 거행하고 33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6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압록강의 어귀인 통구성으로 가서 조선으로 건너 갔다. 그들은 통화에 있는 교회가 그곳에 알려진 것을 보고 기뻐했다. 스프렌트는 거기서 떨어져 강계로 일주일간 여행했고,그레함과 트러리는 압록강을 다시 건너 서남서쪽으로 강을 따라서 내려 갔다. 그 길을 따라 내려 내려가면서 그들은 많은 조선인 거주자들을 만났고,치앙티엔쭈와 환인,태평초를 거쳐서 치우짜이코우에서 다시 만났는데, 거기엔 로스목사에게 잘 알려진 교인 가족이 있었다. 그후 그레헴은 갈라져서 관전과 요양을 경유해서 봉천으로 갔고, 트러리와 스프랜트는 압록강으로 갔다가 영구로 왔다.

1898년 겨울과 1899년초 로스목사는 대부분의 시간을 신학생 고학년을 가르치며 보냈다. 7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들을 실천신학으로 양육했는데,대부분이 설교준비와 설교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1900년 정월 그는 사도들의 말씀의 내용과 거기에 관련된 열가지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 로마서에 관한 221가지 레포트를 읽었다. 2월 욥기 강해와 시험이 있었고,3월에 더 많은 실천훈련, 4월에는 누가복음에 집중했다. 저학년에는 126명의 학생과 60명의 청강생이 있었다.

 

길지 않은 교회생활에 성숙하는 기간 중 로스목사는 지방의 북청사변의 소식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중국인 신자들은 황태후의 '무례하고 천박한'행동 때문에 신앙의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비록 아주 경미한 압박이 있었을 지라도 몇 달 내에 없어졌다. 성장한 반 외국 움직임에 대해 지시한 사항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1899년 6,7월에 지난 해 12월 물러났던 풀러(H.W.Fuller)는 통화 지역에서 일하기 위해 로스목사를 그의 할당된 구역으로 여행했는데,그들은 영릉과 풀러가 그의 거주할 곳을 설치하려 했던 흥경을 지나 황청문을 거쳐 통화까지 갔다. 풀러는 통화가 중국인 및 조선인의 사역을 위해 중심지가 되리라 생각했다. 로스목사는 통화에서 한 용지를 구입했는데, 거기엔 이미 그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부속 예배당과 전도자가 방문하기 위해 팔도강 북쪽으로 갔고,수많은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다시 계속해서 흥퉁가이까지 가서 거기에서 더 많은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풀러는 젊은이 중 한 사람을 자기의 조선어 선생으로 선택했다. 그들은 서도강을 경유해서 돌아 왔는데,도중 두 어린이를 포함해서 20명의 조선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또 특기할 만한 재미 있는 것은 조선인이 살고 있던 학교의 숫자가 20개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1) 휴 로스는 흔히 말하는 양복업자가 아니라 모든 옷을 만들어 파는 상당한 
     위치의 특수한 전문업자였음.
 2) 라리키 근방의 마을
 3) 'Corean Primer'는 존.로스 목사와 이 응찬이 공부한 조선어 교재이다.
 4) 장로교회 조직으로서 노회 위에 있으면서 총회 바로 밑에 있는 조직체.
 5) 중국어 문법 중 가장 학식이 높은 사람이 쓰는 문법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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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남겨진 복음의 일꾼들

Lai-Kheng Pousson

선교에 대한 역사는 지구상의 어떤 역사보다 위대한 역사이다. 그러나 사실과 숫자, 미래의 원리와 형태보다 선교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친구, 죄인의 친구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라, 메시아와 그의 사명을 열렬한 사랑으로 살아갔던 삶의 결과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친구로, 죄인의 친구로 살아갔던 몇몇의 선배들을 찾아보려 한다. 그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교훈이 되며, 다음 세대에게도 유용한 유산이 된다. 또한 그들의 믿음을 지탱했던, 대범한 종의 지도자가 되는 꿈을 갖게 했던 그 열정을 찾아보려 한다.

아브라함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그의 부족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전했던 유대 지도자. 그리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 그 약속을 완성 하셨다. 그 후 기독교의 믿음은 어떤 인종, 종교, 언어, 문화의 개인과 공동체 속에 침투, 변화 시키는 놀라운 힘을 보여 주었다. 20세기 중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든 대륙, 실제적으로는 모든 나라로부터 한 곳에 모였었다. 오늘날 20억, 세계인구의 1/3이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을 고백했다.

오늘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인다. 하늘로부터 죄인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오셨던 메시아, 종의 왕을 송축한다. 고난으로 유명한 한 사람, 우리는 그의 고통을 측량할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죄를 꾀뚤어 보셨으며, 우리의 부정한 것을 부수어 버리셨다. 따라서 우리에게 평화로 다가온 심판은 그에게 돌아갔고, 그의 상함을 통해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예수! 하나님의 친구, 죄인의 친구, 구속자! 이것이 세계선교의 핵심이다.

바울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자칭했던 바울, 하나님의 속죄의 선교가 유대인에게 먼저 제공되던 동안 그는 속죄가 이방인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따라서 누구든지 유대인이 될 필요 없이 예수를 따를 권리가 있다. 바울이 복음을 이방인들을 위한 것으로 여겼듯이 오늘날 우리 역시 복음이 10/40창의 미전도종족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울로부터 배우는 것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독특한 개성을 수용하며 판이하게 다른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신 선물과 위대함임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인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로마서 11장 13-15절)

Medieval Period

바울이 1세기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면, Medieval Period는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했었다. 그의 생애동안 제도상의 교회는 무슬림, 유대인 심지어는 그리스도인까지 대적했던 십자군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무슬림에게 접근해 갔던 우승자였다. 5세기의 십자군운동 동안 그는 전쟁터를 가로질러 다녔으며, 후에는 사로 잡혀 매를 맞았으나 이집트의 이슬람 군주에게 복음을 제시했다. 설명이 필요 없이 이집트의 군주는 이 젊은이의 신앙고백에 깊게 감동을 받았으며 상아로 만든 나팔을 선사하면서 그를 높였다. Assisi의 Francis는 하나님의 친구, 죄인의 친구, 하나님의 사랑, 무슬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Raymond Lull

Francis 운동에 감동을 받은 Raymond Lull, Franciscan의 사제로 폭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사랑, 기도, 눈물과 순교로 무슬림에게 다가 갔다. 그는 자신이 전파하는 대로 살았으며, 그의 마지막 여행이었던 북 아프리카 여행에서 그는 돌에 맞았으며, 그가 순교한 지역에서 1980년대 알제리아의 베르베르종족(북 아프리카 원주민) 사이에서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났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장 24절). 자신의 생명을 친구들을 위해 희생한 이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 Raymond Lull은 하나님의 친구, 죄인의 친구, 하나님의 사랑, 무슬림을 사랑하는 자였다.

Count Zinzendorf

눈에 띄는 하나님의 친구이며, 죄인의 친구였다. 어렸을 때 그는 그리스도와 기도에 헌신 되었었다. 십대가 되었을 때 그와 다섯명의 친구들의 신앙고백은 단순한 것으로 "우리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였다. 그는 그의 학교를 위한 기도모임을 조직했고,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헤맸다.

이것은 모라비안운동(Moravian movement,)의 시작이었고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인 100년동안 지속된 기도운동이었다. 그들은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동정과 그리스도의 열정으로 잘 조화시켰다. 그들의 첫번째 선교사인 그릇을 구웠던 Dober, 목수였던 Nitchman은 서 인도의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예가 되는 것을 자청했다. 그들을 실은 배가 1732년 9월 8일 항구를 떠나면서 외쳤던 구호 - "희생된 어린양이 그 고난의 보상을 받기를!" - 가 그들의 표어가 되었다.1930년경 Moravian은 3,000명의 선교사를 파송 했으며, 이것은 12명의 성도 당 1명의 선교사가 파송된 것이었다. 같은 열정과 우선권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미전도종족을 향해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길 소망한다.

William Carey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성공하지 못했던 구두 수선공으로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그가 미전도종족 을 향해 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을 때 그는 "젊은이여!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개종 시키실 때 당신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칼빈주의의 오용은 이교도의 개종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을 낳았다. 그러나 William 은 "이교도를 개종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무엇인지 확인하라!."고 주장했다(1792).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연필과 종이로 중요한 신학적인 장애물과 변명으로 선교를 반박했었다.

그러나 그는 Baptist Missionary Society(침례교 선교회)를 도왔고 바다를 건너 인도로 향했다. 문화를 초월해 자신의 일생의 40년간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했다. 그는 7개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으며, 29개 언어로 성경의 일부분을 번역했고, 채계적인 선교, 교회개척, 교육 등을 추구했다. 또한 불평등을 대항하여 노예제도, 어린이를 희생제물로 드리는 관습, 과부를 불사르는 풍습들을 개선해 나갔다. 이것은 선교에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을 끌어 들이는 시발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친구, 죄인의 친구, 하나님의 대사, 억압받는 자를 위한 변호자였다.

Hudson Taylor

William Carey의 모본은 비서방의 미전도종족을 향한 새로운 선교운동을 출발시켰다. 그러나 1860년대 대부분의 선교는 자신들의 연안지역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20대의 한 젊은이는 오지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선교지로 중국을 선택했었다.

다른 나라를 지배하며 착취하려는 서방의 욕심으로, 중국은 다른 나라로부터 많은 박해와 수치를 당했다. 그러나 Hudson Taylor은 긍휼의 종으로 생명과 빛을 거대한 중국 땅에 심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중국인과 자신을 동일시 했으며, 중국어를 배웠고, 중국 의상, 머리 스타일등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Taylor의 놀라운 동일화에 서양의 의상이 아니기 때문에 정결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그의 행동은 현대 선교에서 우리가 사역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의 문화를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원리를 만들었다.

영국에 되돌아 온 한 주일 아침 그는 힘든 하루를 이렇게 기록했다. "수천만명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죽어가는 동안 자신들의 환경에 안주해 즐기고 있는 수천의 그리스도인의 안일한 시각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영적인 고뇌와 함께 해변을 거닐었고,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셨고,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했다."

그는 1869년 China Inland Mission을 설립했고 지금까지 수천의 남,여를 중국으로 파송하고 있다. 이것은 첫번째 초교파적인 선교단체로서 현재는 약40여개 단체에 달한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William Carey, Hudson Taylor와 같이 수천의 반대하는 목소리와 다른 선택을 거절하는 보다 고집이 센 하나님의 친구, 죄인의 친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

C.T. Studd

Hudson Taylor는 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별히 젊은이를 세계를 변화 시키는 자들로 만들었다. 1885년 C.T.Studd와 6명의 켐브리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성공을 포기하고 Taylor가 세운 China Inland Mission을 통해 중국으로 갔다. 이러한 결정은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이에 자극을 받아 시작된 학생 자원봉사운동은 19세기말 미국 교회의 한 풍토로 자리잡게 되었다.

D.L. Moody

1886년 D.L. Moody는 메사추세트주 Mt. Hermon 학교 운동장에서 한 달동안 학생집회를 인도했었다. 마지막 날 참석자 250명 중 100명이 "나는 자원함으로 선교가가 되길 열망하며, 이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를 소망한다."는 "프린드톤 서약"에 참여했다. 그리고 1888년 학생 자원봉사 운동은 지도자 John Mott에 의해서 정식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들의 표어는 "우리의 세대에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자!"였다. 그 후 50년 이 운동은 10만명의 학생을 선교에 동참시켰으며 2만명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리고 다른 8만명은 본국에 남아 기도와 선교를 위한 재정을 지원했다. 이들의 복음에 대한 순종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했다.

Cameron Townsend

1917년 Cameron Toensend가 스페인어 성경을 과테말라에서 판매하고 있을 때 Cakchiguel어를 구사하는 인도인 그에게 "만약 하나님이 능력있는 분이라면, 왜 당신은 우리의 언어를 말하지 못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인디언의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스페인어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현지의 언어를 배우는 것보다는 현지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Townsend는 Cakchihuel를 배웠고 1931년 Cakechiguel어 신약성경이 번역되었다. 그리고 그의 비전은 다른 종족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는 현재가지 수백여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 Wycliffe Bible Translator(성경번역선교회)의 전신인 '여름 언어학교'를 세웠다. Townwsend는 언어적인 장애에 촛점을 맞추어 미전도종족을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Donald McGavran

그가 인도선교사로 일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도 없이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했다. 복음은 친족과 친구를 통해 효과적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하나님의 다리로서 McGavran은 복음이 물 속에 떨어진 잉크방울처럼 모든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새로은 관점에서 McGavran은 그의 선교단체 총무직을 사임하고 17년동안 인도에서 교회개척과 제자훈련에 헌신했다. 하나님의 친구, 죄인의 친구.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에 동기가 되어 인도인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의 사역과 훈련의 열매들은 모든 사람을 제자로 만들라는 예수님의 대 사명을 위한 그의 원칙이 지혜로왔음을 입증하고 있다.

1960년대 세계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복음이 세계 곳곳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선교를 중지해야 된다고 외쳐댔다. 그러나 1974년 세계 복음화 로잔대회에서 Dr. Ralph Winter는 복음이 자동으로 다른 문화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현존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주 활발한 복음 전파 노력도 교회가 없는 수십억 넘는 비 그리스도인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한 최고의 우선권은 타문화선교로써 모든 미전도종족 안에 교회를 세워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교회를!"이란 표어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McGavran은 "선교의 중지"가 선교의 부활"로 바뀌었다.

우리는 미전도종족의 실체와 그들의 필요에 대하여 20세기 교회를 일깨우고 삶은 변화 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에 조화시킨 William Cameron Townsend, Donald McGavran, 그리고 Ralph Winter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1974년의 모임 후 로잔운동은 미전도종족에 대한 실체를 분명하게 조명해 갔다. 그리고 1989년 선교의 전략과 전 세계 수천의 교회와 사역자들을 2000년 말까지 모든 사람에게 복음과 교회를 개척하자는 목표를 향해 동원하는 일에 연합으로 일하는 AD 2000 & Beyond Movement 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1996년 AD 2000운동은 Joshua Project 2000 (미전도종족 입양운동)을 만들었고 세계의 미전도종족의 목록을 만들어 졌다. 그리고 2000년 말까지 모든 미전도종족이 입양되었다. 특별히 이 놀라운 성취에는 Thomas Wang과 Luis Bush와 그리고 다른 많은 사역자, 교회와 전세계 그리스도인의 노력이 담겨져 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장 14절). 지구 상의 주요한 종족에게 복음을 전한 2000년 후 우리 세대에 예수님의 명령의 완성하는 것은 그들에게 찾아 가는 것 뿐이다.

전 세계의 교회들이 필연적으로 새로운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친구요, 죄인의 친구였던 신앙과 선교의 선배들을 통해 선교의 원리를 배울 수 있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그리스도를 향한 새로운 열정과 미전도종족을 향한 끓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죄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하늘로 향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장 14절)

세계선교는 임마누엘로 세상에 오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포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21세기 우리는 복음전파, 능력전도, 기도전도의 열매들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우리 중에 함께 계신다.

복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치유와 화해, 모든 사람에게 함께 하시는 평화의 능력이다. 1세기에 유대인과 사마리안인 사이의 많은 장애물들을 무너뜨렸던 그 능력만이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상처와 염려를 치료할 수 있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회개, 용서, 평화의 말씀과 모든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름도 없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을 바꾸었던 수 많은 복음의 증인들에 둘려 쌓여 있듯이 우리도 개인의 삶과, 개인의 포부를 내려 놓고 예수님의 대 사명에 동참하자!

예수님처럼 단순하게 살자!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친구로, 죄인의 친구가 되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빛을, 진리를 전하자!
출처 : Joyful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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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삼용이와 순애
글쓴이 : 따스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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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의 독서 안내자
송광택 목사
 
오랫동안 한국 교회 독서 길라잡이로 활동해왔던 송광택 목사(시인·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가 예비 목회자들과 목회자들을 위한 <목회자 독서법>을 새로 내놨다.

송 목사는 지난 93년부터 독서지도자 교육, 극동방송 ‘신앙서적 길라잡이’ 진행자, 각종 잡지·방송 북리뷰 고정필자 등 독서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을 펼쳐왔다.
 
<목회자 독서법>은 이런 개인적인 이력이 말해주듯 오랜 독서운동을 통해, 이론을 통해, 그리고 현장에서 습득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유용하고 효과적인 독서법을 소개하고 있다.
 
독서에 있어서는 사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지만, 다독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독서법. 특히 늘 시간에 쫓기는 목회자들로서는 한정된 시간에 어떤 책을, 또 어떻게 읽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해질 수 밖에 없다.
 
송 목사는 목회자에게 있어 독서가 중요한 이유와 어떤 책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할 지에 관해 분명한 지침을 준다. 특히 김남준 이성희 하정완 한기채 목사 등 독서량이 많은 현직 목회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독서습관과 독서노하우를 소개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 목회자에게 있어 특히 독서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 목회자는 영적 지도자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성경과 인간에 관한 이해, 현시대와 미래에 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체계적이고 꾸준한 독서를 통해 가능하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또 목회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교사다. 영광스러운 진리를 영광스럽게 전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진리가 진리로서 빛나도록 하기 위해 설교자는 독서를 통해 지성을 단련하고 풍성한 어휘력으로 무장해야 한다.
 
아울러 목회자는 평생학습자다. 교회사를 보면 훌륭한 영성의 사람들은 평생학습자로 살았다. 이들은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가장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었고 영적인 독서에 있어서도 가장 넓게 섭렵한 사람들이다. 경건한 독서는 이들의 삶과 사역을 변화시켰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는 회중을 위한 상담자다. 지식과 지혜와 영적 통찰에 있어서 부끄럽지 않은 상담자로 살아가야 한다. 다양한 회중의 영적 상태와 삶의 현장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인간 이해를 위한 독서를 게을리 할 수 없다. 기독교 고전과 신앙서적 그리고 양서를 늘 가까이 해야 한다.
 
 
- 목회자를 위한 독서팁을 좀 소개한다면.
 
= 목회자의 독서는 설교를 위한 기본 독서다. 저수지처럼 저장량이 많아야 풍성한 설교가 가능해진다. 좀 어렵기는 하지만 목회자의 독서는 넓고 깊어야 하고 시간이 부족한만큼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독서법이 효과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책을 들고 다니는 습관을 들여야 하고 한 달에 하루는 독서를 위한 시간으로 비워두는 것도 좋다. 또 독서모임이 유용할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혼자 독서를 하는 것보다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그 느낌을 공유하는 것은 독서의욕을 촉진시킨다.
 
 
-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과 저자가 있다면.
 
= <사귐의 기도>(김영봉/IVP)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게리 토마스/CUP)
  <영적지도자 만들기>(로버트 클린턴/베다니)
  <오소독시>(G. K. 체스터턴/이끌리오)
  <청교도-이 세상의 성자들>(리런드 라이큰/생명의 말씀사)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두레)
  <21세기를 위한 가속학습>(고려대학교출판부)
 
   김남준, 김홍전, 박영선, 리차드 포스터, 고든 맥도날드, 필립 얀시, 맥스 루케이도,
   필립 얀시, 켄 가이어, C. S. 루이스, 쟈크 엘룰
출처 : ♡ 영혼의 설레임
글쓴이 : 마을촌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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