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목회상담학>>


하워드 J.크라인벨 의 「현대 목회상담학」 독서보고서

1. 저자의 의도
교인을 대상으로한 피 상담자들의 분명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저자는 로저스식(Rogers)식 정신 분석의 가성과 방법을 수정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적인 모든 문제에 직면하여 목회상담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려면 그 기본방침을 재 검토 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목회상담의 폭넓고 다양한 이론적 제시와 방법론을 포함한 새로운 모델(revised model)을 제시 하였다.아울러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목회상담의 실천방법에 일어난 새로운 변화를 반영하고 정신요법의 상담법에 대하여 새로운 강조점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교회라는 특수한 상황하에서의 상담의 가능성과 한계성을 분명히 하면서 목회와 상담 분야의 관계성 안에 가장 적절한 방법론을 활용함으로 얼마나 효과적인 목회상담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이론적인 근거들과 거기에 가장 잘 수응하는 다양한 방법론을 '관계 중심 상담'(relation centereo counseling) 을 통해 설명하려고 하였다.

2.저자에 대하여
하워드 크라인벨은 오늘날 미국신학계에서 손곱히는 이 분야의 권위자 이다. 독일을 위시한 유럽의 실천신학계에서 명성있는 목회신학자 이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클레아 몬트 신학대학의 목회 상담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드포 대학교와 께레트 신학 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바 있다. 로저스,힐트너,와이즈와 같은 이분야의 개척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신학적으로는 폴 틸리히를 위시한 실존주의 신학 , 그리고 최근에는 동료인 죤 갑을 중심으로 한 과정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


3.이저서의 목적
목회상담의 여러 가지 유형을 개발하므로 목회상담에 적응 가능한 정신 요법의 새로운 방법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려는 것이다.또한 저자는 이론지향 및 노출적 정신요법에 근거해서가 아닌,정신 요법에 대해 관계적이고 지원적이며 자아적응적인, 그리고 현실 지향적인 접근방식에 근거한 목회상담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제공하는데 있다. 또한 자자의 방법론은 '상황 연습'(reality-practice) 혹은 '역활실연방법'(role-taking method)을 널리 사용하도록하여 목회상담의 독특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4. 옮긴이의 의도
이 새로운 모델의 상담 구조는 전문가적인 일대 일의 면접상담을 중요시 하면서도 목회적 상황에서 생기는 목회상담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비공식 상담구조를 제안한다. 목회상담의 경우 한 가지 방법보다 여러 가지 방법을 함께 구사해야 더욱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또한 상담에 접근하는 방법도 로저스이 방법에 따른 비지시적 접근의 일방적인 활용보다도 '목회자'의 특수한 이미지를 감안해서 상담의 종류와 피상담자의 구체적인 경우에 따른 다양한 접근방법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상담의 목표는 문제를 지닌 한 인간의 과거를 분석해서 얻어진 통찰에 의존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문제를 초래한 인간관계와 그 문제가 어떻게 현재 행동으로 반영되고 있는지를 관심에 둔다. 그러므로 과거지향적이라기 보다는 미래지향적이고, 처방중심이 아니고 본인의 책임적 결단을 중요시하는 목회상담을 강조한다.

5. 내용요약

1. 목회상담의 현대적 도전
정신병학자 윌리암 글래써 "정신병 치료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근본적인 병 곧 자신의 근본적인 개성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무능력의 병을 앓고 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기본적인 욕구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 그리고 그가 자신과 타인에게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다."

2.목회상담의 새로운 모델
** 모델의 대체적인 윤곽
⑴ 노출방법보다는 지원적인 방법을 사용할 것.
⑵ 심리적 변화를 목표하기보다는 (부부 가족 그룹방식을 통한) 관계 개선을 목표 삼
을 것.
⑶ 부정적인 요인을 줄일 뿐 아니라 그 위에 적극적 개성의 자원들을 최대한 활용할
것.
⑷ 과거를 많이 들춰내기보다는 현재의 상황이나 미래의 계획에 성공적으로 대처토록
할 것.
⑸ 감정과 태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현실에 정면으로 대결하고 책임적일 수 있도록
할 것.
⑹ 감정과 태도뿐 아니라 건전한 행동과 창의력의 증진을 위해 직접 노력하도록 할
것.
⑺ 신체적 심리학적 상호작용의 수평적 차원은 물론 관계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수직적 차원을 직접적으로 취급할 것.

상담방법 : 목사로 하여금 그의 권위를 적절히 사용하여 피상담자가 책임적으로 그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고 안내해 주고, 정서적으로 먹여주고,영감을 불러 일으켜주고, 만나주고, 가르쳐주고 그리하여 용기를 가지도록 하는 것을 건설적이고 더우기 본질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고이다. 목사의 지식, 기술,역할에서 오는 권위는, 만약 그가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 줄만 안다면 그것은 상담에 있어서 무한한 資産이다.

상담의 목표 : 관계 중심 상담의 주요 목표는 상호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길러 주는 데 있다. 즉 그들을 도와서 그들 스스로 관계개선의 질을 높이도록 하는 데 있다. 상담은 사람을 도와서 그로 하여금 그의 문제를 건설적으로 취급하도록 하며, 위기에 대처하며, 결단하고 책임성 있게 사건에 직면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고치고 또는 그가 하기를 두려워 하뎐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려는 것을 목적 삼고 있다. 부정적인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근절시키는 것이 새로운 모델의 근본적인 목표이다.


윌리암 A. 클레비쉬와 촬스 R.재클은 교회사 중 목회자료를 요약한 가운데서 네 가지 목회 기능을 확인하고 있다.
⑴ 치유(Healing): "인간을 완전한 것으로 회복시키고 그를 이전의 상태 이상으로 나
아지도록 인도해 줌으로써 어떤 손상을 극복할 것을 목표로 삼는 목회기능."
⑵ 지탱(Sustaining):"상처입은 사람을 도와서 이전상태로의 회복이나 병으로부터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인내하고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
⑶ 인도(Guiding): "혼란에 빠진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과 사고의 사이에서 확신있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
⑷ 화해(Reconciling):"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를 재수정할 것을 모색하는 일." 역사적으로 볼 때 화해는 두 가지 방법 곧 용서와
훈련의 방법을 사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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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 기능 | 역사적 표현들 | 현대상담의 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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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 유 | 기름부음,악령추방 | 심층상담 |
| | 성자와 유물에 의한 치유 | (목회심리요법) |
| | 카리스마적 병고침 | 정신치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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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탱 | 신앙생활의 유지 | 지원상담 |
| | 위안과 위로 | 위기상담 |
| | 신앙의 강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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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도 | 충고하는 일 | 교육상담 |
| | 악마적 교활의 경고 | 단기결단 |
| | 경청하는 일 | 결혼상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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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 해 | 죄의 고백 | 대결상담 |
| | 죄의 용서 | 초자아상담 |
| | 훈련 | 결혼상담 |
| | | 실존적상담(하나님과의 화해) |
+-----------+----------------------------+-------------------------------+

3. 목회상담의 임무와 신학적 근거
목회상담의 사명과 중요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목사는 상담과 교회의 기본적 목적 사이의 관계에 관한 명백한 인식이 필요하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사람들 사이에 증대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담이 목표하는 것은 좌절과 무능을 실감하는 사람들을 도와서 하나님과 이웃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다 충분하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상담관계는 우리 자신과 이웃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본질인 '소외'를 극복하도록 돕는다 즉 깊은 개인적 영역에서 기본적인 신학문제들 - 예를들면 죄와 구원(화해, 죄책과 용서, 심판과 은혜, 영적죽음과 중생 등 - 를 다루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목회상담의 궁극적 목표는 의미와 관계의 보다 넓은 세계로의 거듭남이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과제는 케리그마(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와 코이노니아(수직적 차원에서 친교를 수립하는 것)와 디아코니아(사랑의 봉사로 신앙을 수행하는 것) 등으로 분류 되어 왔다.비록 목회상담이 주로 봉사의 사명인 디아코니아의 표현이지만 그것은 또한 복음을 전하고 친교를 수립하는 수단이기도 하다.예수의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 비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막 2:17),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 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 주고…."(눅4:18) 등은 목회상담의 과제에 관한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4. 모든 상담유형의 공통요소
**처음 상담 기간 중에 일어나는 사실
⑴ 치유관계의 발전을 위한 기초가 준비되는 것은 최초의 관계가 수립될 때이다.
⑵교인의 감정에 대해 잘 훈련된 청취력과 사고력은 억눌린 감정을 해소시킬 수 있다.
⑶ 목사는, 그의 내부 세계에서는 생이 어떻게 보이고 있는가 하는 '인간의 내부구조'
에관한 인상적 이해를 얻는다.
⑷ 상담자는 피상담자의 문제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가 처한 상황에 그가 어느 정도로
대처하고 있는가, 또 그의 단점은 무엇인가 하는 일 등을 파악한다.
⑸ 이런 시험적인 진단에 기초해서 목사는 도움의 방법들을 제시한다.
⑹ 상담이 목사에 의해 계속될 것으로 보일 경우 상담의 관계는 조직적이어야 한다.

**청취 및 되새김의과정은 여러 가지 다른 중요한 기능들을 제공한다.
⑴ 그것은 목사로 하여금 그가 이해한 바가 정확한지를 검토하게 하며, 만약 그가 피
상담자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 못하게 될 때, 그의 되새기는 행위는 그것을 바로 잡
도록 해 준다.
⑵ 그것은 피상담자로 하여금 목사는 그의내적 감정 및 이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⑶ 목사의 관심을 이해하고 그 이해가 점차 커지므로서 상담관계의 성장에 자극을 주
게 된다.
⑷ 때로는 감정에 대한 반응이 심리적 상처를 찌르게 되고, 억압된 감정의 무서운 독
을 해소함으로써 정상적인 치유가 일어날 수도 있다.
⑸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상담자의 청취 및 되새김은 피상담자에게 감수성 및 관계 훈
련의 기회를 제공한다.


** 목사가 정서적 발산을 고무시킬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시도들은 유익할 것이다.
⑴ 꼭 필요한 실제적 자료 수집에 필요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정보를 위한 질문은 피
하라.
⑵ 감정에 관해 질문하라.
⑶ 감정 전달에 이르는 문을 주목하라.
⑷ 지적 내용보다는 오히려 감정에 응답하라.
⑸ 거부반응에 특별히 유의하라.
⑹ 사람들이 왜 어떠한 방법으로 느끼고 움직이는가 하는데 대한 성급한 설명이나 충
고는 피하라.

심리학자 Elias H. Porter Ⅱ는 상담자의 반응에서 행해진 다섯가지 상이한 태도를 기술하고 있다.
E - 평가적반응(Eval‎‎uative) 이것은 상담자가 상대적 선, 적응력, 효과, 공정 등을 판
단했다고 가리키는 반응이다. 즉 상담자가 가치를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I - 설명적 반응(Interpretive) 이것은 상담자의 의도가 의미를 가르치고 전달하고 보
여주는 것인데, 사람의 다양한 행동을 가르치거나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S - 지원적 반응(Supportive) 이것은 상담자의 의도가 의뢰인의 격한 감정을 안심시키
고, 감소시키며, 달래준다는 것 즉, 사람을 안심시키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P - 탐색적 반응(Probing) 이것은 상담자의 의도가 더 많은 정보를 추구하고 더 많은
토론을 자극시키고 질문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키는 반응이다. 질문하는 반응이다.
U - 이해적 반응(Understanding) 이것은 상담자의 의도가 의뢰인이 무엇을 말하고 있
는지, 단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또 그를 어떻게 괴롭히고 있는지, 그
리고 그가 그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등에 관해 상담자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
는지를 묻는 것을 가르킨다 피상담자의 감정이나 태도를 깊이 숙고하는 반응이다.

5. 비공식 단기상담의 방법
** 단기상담의 현실적인 목표들은 의미있는 도움을 준다.
⑴ 지원적 감정이입적 관계를 수립한다.
⑵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억압되고 좌절당한 감정들을 감소시킴으로써 기능을 회
복하도록 돕는다.
⑶ 피상담자가 어떤 결심이나 인간적 갈등을 가지고 찾아 온다면 이러한 문제를 스스
로 책임있게 처리하도록 돕는다.
⑷ 인간의 숨어있는 자원들을 동원하도록 해 준다. 그리고 ㅅ것을 스스로 발굴해서 사
용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돕는다.
⑸ 그로하여금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그의 상황에 대해 보다 폭넓고 건설적인 견해를
가지도록 돕는다.
⑹ 그로하여금 당면한 문제를 직시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점점 커가는 두려움과 공
포증을 저지시켜 준다.
⑺ 피상담로 하여금 자기의 문제를 명백하게 보도록 도와서 그 문제에 대한 선택적 결
단을 하도록 한다.
⑻ 양자택일의 가능성이 탐색되고 바람직한 선택이 결정된 후, 이제는 그것을 조금씩
이행하도록 돕는다.
⑼ 유용한 사고와 정보, 시험적 암시 등의 형태에 관한 안내를 제공하라. 이것들은 피
상담가 상담하는 동암 또는 상담 후에 채택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

제한된 상담 횟수를 제안함으로써 피상담의 자기신뢰와 기능적인 능력을 자극한다.
피상담자가 후에 쉽게 추가상담을 위해 되돌아 오는 것을 위해 인간 유대관계를 수립한다.
피상담자가 깊은 불안에 빠져 있는지 또는 어떤 이유로 의료적인, 정신의학적인 혹은 다른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우에 따라 해당 전문가에게 전문가에게 위탁할 수 있다.

비공식 단기 상담의 과정에서 고려돼야 할 부분
⑴ 집중해서 듣고 그리고 나서 느낌을 나타내라.
⑵ 문제의 핵심에 신속하게 촛점을 모으기 위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하라 .
⑶ 그로하여금 전체 문제를 살피도록 돕는다.
⑷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라.
⑸ 양자택일을 요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 갈등 또는 결단의 영역 -에 촛점
을 맞추도록 하라.
⑹ 본인으로하여금 '다음단계'를 결정하고 그것을 취하도록 도우라.
⑺ 유용하다고 여겨질 때 안내를 제공하라.
⑻ 피상담자에게 정서적으로 지원하고 영감을 주라.
⑼ 단기 상담이 적절하지 않을 경우 장기 상담으로 옮겨라.

6. 결혼관계상담 (p.102)
두 사람이 만나서 , 그 관계를 맺기 시작해서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된다. 그들의 결혼생활 이전과 결혼생활 중의 상호작용은 새로운 심리학적 실재 즉, '그들의 관계'를 창조한다. 결혼 관계 상담은 정신의 내적 인격갈등을 해결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결혼관계를 개선하는 데 역점을 둔다. 즉 인간관계에 있어서 좀더 서로가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혼한 부부를 도울 수 있는 10 개의 목표가 있다.
⑴ 의사소통을 다시 할 수 있도록 돕는다.
⑵ 상호 보복의 악순환을 저지시킨다.
⑶ 관계결속을 위해 함께 일할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⑷ 상호작용의 본질을 인식하도록 하며, 특히 서로 간에 고통을 자아내는 원인과 서로
의 이미지에서의 그들의 상호작용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⑸ 그들의 갈등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게 한다.
⑹ 함께 목표를 세우고, 계획하고, 일하면서 그들의 결혼생활 중에 생긴 고통과 기쁨
의 원천에 대해 함께 사고하는 경험을 가지게 한다.
⑺ 서로의 변화를 요구하는 주장의 무익성을 알게하고, 서로 '긴장해제'를 시작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서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면을 용납도록 한다.
⑻ 결혼생활에서 각자의 무책임의 영역에 관해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도록 한다.
⑼ 서로에게 만족을 주는 성적 및 인격적 요구를 불러 일으키는 관계의방법을 발견하
고 경험토록 한다. 그리하여 보다 성속한 관계에서의 장기적인 만족감을 경험케 한
다.
⑽ 가정 밖의 관심사를 찾게 하고 '확대된 가정'으로서 보다 만족할 수 있는 관계를
발견케 한다.

결혼상담은 불안하고 비뚤어진 인간관계를 치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부부상담의 기본원리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각자가 자기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도록 두 사람에게 각각 서로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적인 것은 상대방이 자기에게 베푸는 방식이 자기가 어릴 적부터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던 기대와는 어긋난다는 사실에서 일어난 갈등이었다.**

즉 어린시절로부터 생겨난 역할 기대에 관계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의 해결은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부적당한 면은 변화시킬 수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것들이 있다해도 좋은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바로 보고 또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굴복하거나 양보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상실하는 것이 아닌 그들 각자의 욕망을 함께 계획하고, 상의하고, 타협할 수 있는 성숙한 모습을 지니는 것이다.
상담자의 역할은 사람을 도와서 이자택일의 가능성을 신중히 검토하고 그 택한 길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직면하게 해 주며 가능한 한 객관성을 가지게해서 그 인간 자신이 보다 현명한 결단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즉 당사자들이 인격의 가치를 극대화라는 가장 큰 약속이라면, 무엇인가 발견하고 실행하도록 돕는 데 있다.

8. 지원상담
지원상담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안정시키고 감싸주고, 양육하며 동기를 부여해 주고 그리고 인도해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인간적 환경과 자원에 의해 어떠한 제한이 주어질지라도, 보다 건설적을 그들의 문제를 처리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과 또는 자신의 관계에 관한 이적에는 숨겨진 면들을 드러내고 그것들을 취급함으로써 자아인식과 자아용납의 증대를 통해 기본적인 인격변화를 목표로 삼는 것이다.

지원상담에는 위기, 임기응변, 지탱 및 성장 등 네 가지의 상담 유형이 있다.
지원상담에는 교인으로하여금 변화시키기 어려운 그의 문제의 관점에 대해 용납하는 태도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성장은 그의 삶의 환경을 건설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에 있는데 그것은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다시 방향설정함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적 지원을 보다 유용하게 하거나, 인간관계를 보다 낫게 개선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다.지원적 성장 상담에서 설명되는 두 가지 원리 중 하나는 인간의 대결 능력이 사용될 때, 얻어지는 능력과 지원관계가 종종 좌절당한 사람을 해방시킴으로써 이러한 대결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지원상담을 통해서 파괴적인 의존성을 벗어 버리도록 자극줌으로써 그가 스스로, 점차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확고하게 離乳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지원상담은 일곱가지 절차를 채택한다. 만족을 주는 의존 요구,감정적 카타르시스,문제에 대한 객관적 견해, 자아 방어에 대한 협력,긴장으로 가득찬 환경의 변화, 행동요법 및 종교적 자원들이다. 이러한 다양한 혼합물은 지원적 방법을 요구하는데 네 가지 상담의 유형 즉 위기 임기응변,지탱 및 성장상담에서 이용된다.

9.위기상담
사람은 누구나 항상 문제해결을 위한 행위를 요구하는 상황에 지견해 있다. 사람이 문제로 인해 긴장감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 긴장을 잘 알려진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빨리 감소된다. 위기는 평상시에 문제 해결을 위한 행위가 좌절되거나 또 는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때 일어나며, 그에 따라 긴장이 증가된다. 신체적인 또는 인격적인 면에서 몇 가지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할 때,긴장감은 생기게 된다. 캐프란은 위기를 성장을 통해 맡게 되는 단계적 위기와 비정상적으로 또는 뜻밖에 닥치게 되는 우발적 위기로 나눈다.
위기란 보다 완전한 인격으로 향하거나 또는 그 인격에서 벗어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단기위기상담은 흔히 위기에 처한 사람이 나타내는 좋지 않은 반응을 지양하고 그 위기에 대해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써서 대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다.

** 위기에 대한 비건설적 반응들
⑴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부정
⑵ 문제로부터의 회피
⑶ 도움을 구하거나 받는 것에 대한 거부
⑷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무능력
⑸ 위기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대한 실패
⑹ 다른 해결수단 모색에의 실패
⑺ 위기의 원인이나 해결에 있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킴
⑻ 친구 또는 가족과의 관계 두절.

** 건전한 대처수단
⑴ 문제를 직시하게 한다.
⑵ 문제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⑶ 분노, 불안, 죄의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통해서 표현하고 일할 수 있게 한다.
⑷ 문제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대처하도록 한다.
⑸ 여러가지 해결 수단을 모색하도록 한다.
⑹ 그 상황에서 변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분리하게 한다.
⑺ 변화 불가능한 것은 사실 그대로 용납하게 한다.
⑻ 자신의 이미지에 있어서 허세가 있고 부담스러운 면들은 포기하도록 한다.
⑼ 친척, 친구, 전문가와의 접촉을 통해 도움의 문을 열게 한다.
⑽ 문제를 건설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더디드라도 단게를 밟을 것.

사별상담에 있어서, 목사의 역할은 정신 속에 내재해 있는 다른 한편의 회복력을 일깨우는 데 있다. 피상담자가 그렇게하고 싶어 하든지 않든지 간에, 그의 상황에 관해 무엇인가를 하도록 고무시키는 것이다.

10.위탁상담
위탁은 목회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협조기술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요구에 촛점을 모으고 그들의 감정들을 정돈하도록 도와주는 보다 유용한 기술이다. 위탁이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팀의 노력을 활용하는 한 수단이다. 그것은 책임의 전적인 전가가 아니라 책임을 분배하고 확장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상호협조가 기초가 되어 있는 분업의 원리를 사용하는 것이다.

** 정신의학적 위탁을 필요로 하는 몇가지 심한 정신질환 징후를 소개하면,
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해치려들고, 강간을 하려들거나 또는 어떤 이상한 방법으
로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
⑵ 스스로에 대해 과대망상에 빠져있는 사람.
⑶ 자신의 전형적 행동약식에서 벗어나 갑작스런 변화를 보이는 사람.
⑷ 존재하지도 않는 음성을 듣고, 환영을 보거나 냄새를 맡는다는 사람.
⑸ 합리적으로 해명될 수 없는 강직하고도 이상야릇한 생각이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
⑹ 충동적인 행위나 강박관념의 반복 속에 빠져 있는 사람.
⑺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있는 사람(시간,장소, 또는 인격적 동일성에 대한 인식에서).
⑻ 정상적인 활동에 관심이나 흥미를 잃은 채, 그의 내적 세계에만 몰두해 있는 사람.

자아능력의 정도에 관한 질문에 따라 어떤 위탁이 행해져야 할 것인지가 결정된다.협조적인 직업들 사이에 협동적인 팀정신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자발적인 선수를 쳐야 한다. 때때로 그런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정신요법을 위한 위탁에 있어서 목사가 피상담자를 움직여서 또 다른 위탁관계로 옮기기 위해서 목사의 지원상담을 점차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 효과적인 위탁 상담을 위한 몇 가지 지침들
⑴ 이러한 기대를 조성하라.
⑵ 일어날 것 같은 어떤 관계의 초기에 왜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면서 위
탁의가능성을 언급하라.
⑶ 피상담자가 문제를 의식하고 그 도움에 대해 의식하는 시기에서, 시작하라.
⑷ 문제와 해결에 대한 피상담자의 인식을 일으키는 활동이다. 이것은 위탁활용이 필
요하다고 느끼는 상담자의 인식과 거의 비슷한 인식이어야 한다. 이것은 참을성 있
는 생활활동을 필요로 하며, 상황에 대한 피상담자의 인식이 중요하다.
⑸ 피상담자로하여금 특별히 추천된 협조적 대행기관과 접촉을 가짐으로써 정서적
좌절을 해결하도록 그를 도우라.
⑹ 피상담자가 받아들이기들 기대할지도 모르는 협조의 일반적인 성격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피상담자 자신의 요구에 대한 의식에 관련시킨다.
⑺ 목사와 강력한 관계를 수립한다. 그래서 이 관계가 또 다른 협조적인 관계로 들어
가게 될지도 모를 교량역할을 하게 한다.
⑻ 정해진 요법전문가나 대행기관이 기꺼이 온전하게 협조를 위해 나서드라도 피상담
자로하여금 그들을 시험해 보도록 동기부여를 시도해본다.
⑼ 물리적인 관심과 보호는 위탁 후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피상담에게 알리는
일이다.

11.교육적 목회상담
교육적 상담이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데만 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적 상담은 상담기술과 예민성을 활용함으로써 그 사람으로하여금 자신의 특별한 삶의 상황을 건설적으로 대처하기에 타당한 지식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그리고 응용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교육적 상담은 관계 확립,청취력 훈련, 감정에 대한 반응 등의 목회상담에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다음 세 가지 목표에 의해서 '교육적'이 된다.
⑴ 인간이 필요로 하거나 또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사실 개념,가치,
신념,기술,지도, 충고 등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
⑵ 위의 것들을 직접 전달해 주거나 또는 사람들이 스스로 발견하도록 (예:독서를 통
해서) 도와주는 것.
⑶ 이러한 지식을 사요 해서 자신의 이해를 줄이고 현명ㅎ한 결정을 용이하게 하며,
그래서 어려운 상황을 건설적으로 처리하도록 도와주는 것

무엇이 인간의 필요에 적절한가를 알기 위해서는 '듣는 것'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면을 다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 교육적 상담의 이론적 근거를 살펴보면,
⑴ 지적 지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중요한 자기(ego)자원이 된다.
⑵ 대부분의 피상담들은 그들로하여금 교육적 상담이나 그 밖의 곳에서 얻은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투쟁적, 자유한 인격적 영역을 가지고 있다.
⑶ 목사는 피상담자에게 유용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⑷ 상담은 사람으로하여금 적절한 지식을 활용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다.
⑸ 여러 가지 통찰력, 사실, 능숙한 기술 등은 사람으로하여금 그가 직면하고 있는 도
전장에서 효과적으로 싸워 이길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사실은 그의 가치 및 자기 동
일성을 강하게 해준다.

교육적 상담의 위험은 피상담자를 솜씨있게 조작하거나 의존적으로 대처하게 할 수 있으며, 전달되는 지식과 피상담자가 순수하게 깨닫는 배움이 동일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 교육적 상담의 방법
⑴ 부드럽고, 용납적이고,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말하므로써견실한 관계로 발전하도록
하라(신뢰깊은 관계)
⑵ 그들 관계의 긍정적인 면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두려움
은 적고, 그 끝은 개방적이 되는 질문을 함으로써 관계조성을 유도하라(관계조성).
⑶ 위협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 그래서 그들의 의심이나 걱정거리 또
는 요구들을 표시할 수 있도록 하라.
⑷ 점차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지를 알게한다. 즉 그들은 결혼에 필요한
요소를 인식하고 있는 정도를 알게 한다.
⑸ 배우는 속도는 이야기하는 내용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러므로 여러 개의 중요한
논제를 간단히 말하고 나서 가장 흥미있는 반응을 보이는 것을 관찰하라. (요구에
대한 인식)
⑹ 피상담자가 얼마 동안 반응을 보인 그 분야에 대해 토의하며, 그들로하여금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며 그것을 잘 겈토함으로서 필요한 지식을 찾아낸다.(검토)
⑺ 연상되는 미래의 문제들 뿐만 아니라 현재의 느낌이나 문제들에 토의의 촛점을 모
으도록 하라. 물론 미래에 대한 염려는 철저히 검토되어야 할 현재의 감정이다.
⑻ 피상담자와의 몇번의 상담을 통해서 점점 건전한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⑼ 결혼에식에 관한 자세한 토의는 그 예식에서 각자가 주의해야 할 걱정을 완화시키
고 이상적인 입장에 관한 의미깊은 논의도 하게된다.


어려움은 문제를 가진 교인이 그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자진해서 상담하러 오는 교육적 상담의 형태를 '동기부여를 위한 교육적 상담'이라고 한다.
교육적 상담방법은 사회의 특수문제에 관해 소규모의 그룹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건설적인 태도를 배우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막는 잘못된 지식이나 공포, 또는 편견 따위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12. 집단목회상담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분위기에서 감정, 견해 및 경험들을 서로 친밀하게 나누어 가지는 것은 자존심을 높여주고 자기 이해를 깊게 해 주며, 타인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경험은 어떠한 정도의 병에 있는 사람이든지 또는 건강한 사람에게든지 도움을 줄 수 있다.
집단요법이라고 요약되는 집단정신요법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특징을 가진 요법에 대한 집단적 병법의 총체를 말한다.
⑴ 집단 내에는 회원들이 미리 알고 있는 공인된 치유적 목적이 있다.
⑵ 활동은 전적으로 정신요법적인 것에 제한된다. 공식적으로는 어떠한 계획이나 일
정, 프로그램 또는 지시사항 등이 없다.
⑶ 그룹의 지배적인 관심은 창조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 자기 용납,
그리고 자기발견에 대한 회원들의 성장이다.
⑷ 다른 사람이나 지도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포함해서 표현의 완전한 자유가 고무
되고 또 기대된다.
⑸ 회원들의 관계가 부드러운 상호 인격적 형태임을 반영한다는 전제하에서 집단내의
상호작용에 대해 계속적이고도 집중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⑹ 이러한 집단들은 대개 6 명 내지 8 명정도의 소규모 집단들이다.

집단요법은 주로 일상생활에 매우 밀착해 있다는 점에서 개별요법과 다르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도록 유도하고 또 목표 달성보다는 오히려 그 동기 현상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일반적 사회집단과 다르다.
교육적집단상담의 원칙을 몇가지 예로 들수 있다.
⑴ 다음의 사실들이 사람들을 집단에 끌어 들이는 요소들인 것같다. ㈀ 교회에서 특별
한 집단의 사람들의 절신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방법. ㈁ 위협을 주지
않는 명칭이나 부담감을 주지 않는 대중성의 사용 ㈂ 목사나 집단의 지도자가 선택
된 개인에게 개별적인 초청을 한다. ㈃ 집단의 목적이 첫모임에서 분명하게 말해지
고 되풀이 된다.
⑵ 효과적인 교육적 상담집단은 집단의 전체회원들이 자주 참석할 수 있을 만큼 작아
야 한다.
⑶ 모임에서의 첫표현은 반드시 간단하고도 집단의 절실한 요구에 타당한 것이어야 한
다.
⑷ 다양한 여러 상담모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한 자료집이 나 주제, 신축성
또는 윤관을 가진다는 것은 집단이나 지도자의 불안을 덮어 줄 수 있다.
⑸ 집단 중심에서의 지도자의 기능은 따뜻하고 용납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집단으로하여금 그 문제에 촛점을 모으도록 돕는다.
⑹ 지도자는 개별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한다.

13.대결상담
목사는 양심문제의 세 가지 형태 즉 사실적인 죄의식, 신경증적인 죄의식,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는 죄의식 등을 직면하게 된다.죄의식과 함께 소외는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현상을 이룬다. 효과적인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서 목사의 상담방법은 이 복합성과 다양성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피상담자의 죄의식 가운데 순수하고도 당연한 죄의식 요소들을 해소시킬 수 있는 다섯 가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즉 대결, 고백, 용서, 회복, 그리고 화해이다. 환자와의 진정한 대결을 위한 필수조건은 그와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용납적인 상황 안에서의 정직한 대결은 대개 관계를 강화시키기는 하나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과거의 관계보다 현재의 책임있게 살려는 노력이나 회복을 통해 두려움없이 자기의 도덕적 문제점을 검토해 보는 것이다.목회상담에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리는 상호관계이다. 그것은 목사가 피상담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에서 깊은 사죄의 은혜를 체험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양심이 약한 사람들과의 상담을 위한 몇가지 원칙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⑴ 관계를 맺을 것
⑵ 그로하여금 그의 현실 부정적인 행위가 가진 자기 파멸적 성격을 직면하도록 하라.
⑶ 무책임한 연극적인 행위를 저지시켜야 한다.
⑷ 책임있는 행위에는 긍정과 칭찬의 보상을 한다.
⑸ 그로하여금 사회적으로 건전하고, 현실 지향적인 방향에서 자기의 요구를 충족시키
는 방법을 배우도록 돕는다.
⑹ 그의 포부를 캐내어 그로하여금 현실적이면서도 미래를 위한 계획을 수립하도록 도
울 것.
14.종교적 실존적 문제에 관한 상담
어떤 문제의 유형들 속에는 종교적 실존적 측면이 아주 분명하고 또 심각하기 마련이다. 실존적 종교적 요인들은 종종 위기상담, 특히 병자나 죽어가는 사람, 또는 유가족과의 상담 등에서는 거의 늘 부딪치는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불안이란 사람이 자기의 행복이나 안전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간주하던 것이 위협을 받는다고 깨닫게 될 때, 그것에 대한 인간유기체의 반응이 불안이다.
병리학적(신경증적 불안은 모슨되는 충동이나 욕망들, 또는 요구 등이 동시적으로 표현되거나 만족되고자 할 때 생겨나는 불안이다 그것은 내부적 갈등의 산물이다. 이 불안은 억압된 자기 이미지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한다. 반면에 실존적 불안은 병리학적 불안이 아닌 정상적 불안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 실존의 볼진에서 유래한 것이다.실존적 불안은 모든 불안을 형성시키는 원료(raw material)이다.
실존적인 불안을 취금할 수 있는 유일한 건설적인 방법은 인간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현실화하는 것을 포함한 진정한 종교적 생활이다.

** 사람들이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자신과 관계하는 법을 배울 때 생기는 네 가지 기본
적인 욕구
⑴ 의미있는 삶은 철학과 자신을 투자할 만한 도전적인 대상에 대한 욕구.
⑵ 신령하고 초월적인 인식에 대한 욕구.
⑶ 하나님과 이웃,그리고 자신과의 신뢰적인 관게에 대한 욕구.
⑷ 창의력,인식, 내적자유 등을 통해서 가장 진실한 인간성을 개발시킴으로써 자신 안
에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시키려는 욕구.
이것들은 수직적인 차원과 서로 교통하려는 인간의근본적인 욕구들이다.
에릭프롬은 모든 사람은 "자기와 목적이 같은 집단의 사상이나 행동의 체제"를 반드시 요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빅톨프랭클의 '의미요법'은 인간의 삶의 지배적인 경향은 '의미에 대한 의지'라는 확신 위에 근거해 있다 그것은 인간은 자신의 의미속에서 살고 있다는 확신이며, 따라서, 요법의 중심 과제는 사람으로하여금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라는 확신이다. "삶은 수행할 만한 가치-창조적 가치,경험적 가치, 태도적 가치-가 발견될 때 변화된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 이론이다.
실존적인 문제에 관한 목회상담은 사람들로하여금 심리학적 영적 세계의 원칙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살도록, 또 자연과 그리고 개장적이고, 성숙한 하나님과의 사랑으로 상호작용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존적 요법전문가들과 더불어 목회상담자들은 피상담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창조성, 의식성, 그리고 내적 자유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그로하여금 더욱 충분히 인간이 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교역자를 겸한 상담자의 효과는 만약 그가 정신요법에서 실존주의자의 관점에서 몰두하게 될 때 증진될 것이다. 가치, 의식, 창의력, 자유, 진실성, 실존적 불안(및 실존적 죄의식과 기쁨), 존재하는 것, 실현하는 것, 만남, 확신, 대화 및 의미 등에 대한 강조는 모두 인간에 대한 종교적 견해와 일치한다. 행동주의 및 정신분석과는 달리 인간에 대한 비분해적 개념(nonreductionistic conception)은 인간 내부의 독특한 인간성을 높이 들어 올린다.

15. 심층목회상담
심층목회상담은 감추어진 감정과 내적 갈등, 그리고 억눌린 어릴 때의 기억들을 발견해 내 다룸으로써 피상담자의 인격에 깊은 변화를 일으킬 목적으로 장기간 도와주는 과정이다. '통찰력 상담', '목회정신요법',심층목회상담'이라는 말은 거의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심층상담은 복잡하고도 시간을 요하는 과정이다.
심층상담이 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인간'이며 다음과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⑴ 자아인식- 자신의 감정과 경험에 귀를 기울인다.
⑵ 통찰력 - 자신의 감정과 타인과의 관계 대한 깊은 이해.
⑶ 상담자로하여금 자신을 돌보도록 허락함으로써 자신을 가치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⑷ 내면적인 깊이를 파악하면서, 인간 속에는 인간만이 있을 뿐이고 '동물'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다.
⑸ 타인의 '의무'와 '당위'에 대한 반응으로 이루어진 자기의 이중성에 대한 불만
⑹ 자율성, 자기 지향성, 자신의 목표를 선택하고, 순수한 가치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신뢰한다.
⑺ 자기를 용납함으로써 타인을 용납하게 된다.
⑻ '자신으로 돌아가는 조용한 기븜' - 초원에서 뛰노는 어린양과도 같은 인생의 본능
적 즐거움.
⑼ 주어진 순간에 진실한 인간이 되려고 하는 욕망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려고
하는 욕망'. 가장 공통된 절망은 자신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심층상담의 독특하고도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랑과 성장의 관계이다.
대체로 심층상담은 현실의 삶을 제한하는 잠재적인 억압받는 감정, 이미지, 충동, 기억과 갈등 등을 점차로 깨닫게 하는 방법을 이용한다. 대부분의 심층요법은 자아 인식과 자아 용납의 중요한 개선이 사람의 행위와 관계에 있어서 자발적이고 적극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행해진다.
심층목회상담에는 두 가지 방법 즉, 내담자 위주의 방법과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이 있다.
내담자 중심의 방법은 강한 자아를 소유하면서 정신병이나 성격이상의 문제가 아닌, 오히려 정신 신경증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효과적이다. 일반적으로 내담자 중심의 요법은 다음과 같은 면들을 가지고 있다.
⑴ 최초의 관계확립과 치유적 관계의 조성.
⑵ '자기표현 단계' - 적극적인 감정 다음에 오는 부정적인 감정의 해소.
⑶ 자아인식과 행위를 변회시키는 통찰력의 발휘.
⑷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관계가 끝나는 마지막 단계.

수정되지 않은 로저스 방법에서 "상담자의 주된 기능은 내담자가 자유스런 기분을 느끼면서 자신을 극복하고 자신에게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얻도록 하고, 점차로 자신에 대한 인식과 자기 주위의 세계를 재조직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자유로운 관계형성, 활동적인 인상,꿈이나 환상의 분석, 감정의 전이 등과 같은 정신분석적 방법에 의해서 무의식적인 왜곡을 취급하는 것은 심층목회상담의 한 형태이다 이 방법은 내담자 중심의 요법보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가서 인간관계에 투사된 변형된 감정을 밝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건설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며, 이 방법에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이 방법을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16. 목회와 상담을 위한 일반신도의 봉사
목회자의 기능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켜서 각자가 봉사 직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이다. 모든 교인들은 자기 나름의 독특한 목회의 기회를 가지고 있다.평신도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그 지역사회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한 봉사이다. 지역사회의 외롭고 병들고, 연로하고, 사별하고, 감금당하고, 나그네 되고, 제도화된 그리고 일단의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목회적 사명은 바로 훈련받은 평신도의 헌헌신을 통해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교회의용납을 통해 조직이 가능하며, 선발 되고 훈련되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모든 신자들의 목사직이 진지하게 취급될 때, 그리고 교회마다 이러한 사리을 충분히 인식하고 시행할 때, 새로운 치유의 능력이 우리들의 공동체의 삶 가운데로 흘러 들어올 것이다.

17. 목회상담자로서의 훈련
상담은 단지 어떤 기술의 활용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상담자가 자기의 어려운 문제에 관해 무엇인가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를 돕는데에 상담자 자신을 활용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용되어지는 기술이 아니라, 목사가 그의 교인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또는 그가 그의 교인들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 신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상담자 자신의 전체적 태도이다.
일치성,무조건적인 적극적 관심, 감정이입적 이해 등과 같은 상담자의 특징들이 상담자들에게 나타나고 동시에 피상담자에게 인지되어질 때, 상담의 진행은 적극적인 인간 내부의 변화와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일치성이란 내적 순수성과 통일성 및 개방성을 의미하며, 조건없는 적극적 관심이란 관계성 안에서의 은혜의 체험을 말한다. 감정이입적 이해란 주의깊은 경청을 통해서 그 사람의 내적인 의미의 세계와 깊은 감정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상담자의 특성으로는 인간으로서의 동일성의 의식과 치유적 태도 등이 있다. 동일성의 의식에 있어서 목사는 자아능력의 핵심에 있는 동일성, 인격적 가치, 능력 등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필요하다. 치유적 태도는 정신병, 알콜중독, 또는 자살 충동의 증세를 지닌 사람 앞에서 목사가 자기 속에 하나님의 은총과 선한 어머니의 심정이 의식될 때 점차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상담자의 성장을 높여주는 보다 깊은 자기만남을 제공해 주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⑴ 자기자신의 정신요법, ⑵ 목회임상훈련, ⑶ 상담의 감독, ⑷ 감수성훈련 및 ⑸ 상담연습 등이 그것이다. 그것은 인간관게에서 그 자신의 역량을 증진시켜 준다.

상담기술의 실천에 있어 유의할 사항들이 있다.
상담을 요구하는 개인의 요구에 대한 목사의관심은 언제나 전체로서의 회중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인 목회사명의 수행으로서 균형을 유지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상담을 필요로 하지는 않으나 목사의 관심과 영감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상담에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문제를 지닌 많은 교인들을 도와 줄 수 있다. 모든 목회자는 반드시 자기가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차원에서든지 순수하게 도움을 받을 기회도 있는 것이다.
모든 상담자와 도움을 주는 관계마다에는 불가피한 한계가 있음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상담의 기술과 감수성을 증진시킨다고 하는 것은 오직 배움으로서만이 가능하다. 만약 그이 경험이 체계적인 반성과 평가에서 노출될 때에는 크게 촉진이 된다. 이것이 곧 지도, 감독, 전문가와의 협의 및 상담 연습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그 밖에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할 지라도 그의 가장 우선적이고도 긴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그를 이해해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담의 다양한 이론과 방법을 검토한 후에도 다시한 번 강조해야 할 문제의 핵심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평가 (EVAL‎‎UATION)

하워드 클라인벨의 현대 목회상담을 고전적이고 직관적인 목회상담의 차원을 벗어나 현대심리학의 도전적인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목회상담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권위는 13년의 목사직, 5년의 상담을 통해 이론과 방법론이 잘 적용되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책을 통하여 하워드 클라인벨은 목회상담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볼수 있으며 폭 넓은 이론적인 근거와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반목회자와 신학도들이 목회상담에 쉽게 접근하고 기여할 수 있도록 평이하고 간략하게 시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자는 "현대" 목회상담의 이론과 실제를 총망라해서 조리있게 집대성한 권위서요 비로서 '목회' 상담이라 부를수 있을만큼 유서깊은 우리의 목회전통과 새로 발전되어 가는 상담기술을 조화시킨 사계의 결정판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까지의 방법이 면담중심이었다면 목회적상황을 중시한 비공식 상담구가를 제안한다. 효과적인 목회상담을 위해 비지시적인 방법보다는 구체적인 경우에 따르는 다양한 접근방법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역시 이책에서는 상담은 과저지향적이아니고 미래 지향적이며 본인의 책임적 결단을 중요시하고 있다.
현대목회상담의 중요한 관점은 대중화 되어가며 다양화되어가는 현대사회의 심리학측면을 골고루 다 다루기 위하여 목회자 혼자만이 이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와 더불어 이 귀중한 사역을 함께하되, 평신도사역의 중요성을 저자는 일깨워주고 있다. 그래서 만인사제직의 실천이 요구되어 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학문적방법이 상당히 진보적인면이 보임을 알수 있다.
그는 목회상담의 발전을 위해 실존적인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즉, 현대도시사회의 극심한 심리적 절망상태를 깊이 인정하는자세에서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인정하며 이기적, 실존적상황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성실된 목회자의 상담사역과 피상담자의 적극적인 삶의 대치를 요청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것이다. 그러한 성숙한 목회상담의 성취를 위해 목회자가 훈련받아야 하며 성숙한 상담사역에 대한 기술도 익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P 16)에 목회상담의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웨델의 조난자들의 생명을 구조하는 구조대로서의 교회의 사명과 생명력을 비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교회가 인간의 요구에 적절하게 응할수 있는 가치있는 방편인것이다. 그것은 로우엘 하위가 표현한 것처럼 복음을 '관계어'로 바꾸어주는 방편이다. 즉, 목사로 하여금 고독과 절망가운데서 몸부림치는 인간에게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는 언어인 것이다.
목회상담은 곧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죄의 비극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돕는 것이며 인간의 숨어있는 잠재능력을 깨우고 인간성 회복을 통하여 새로움을 창조하는 변화의 주체자가 되는것이라고 하였는데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저자는 또한 목회상담의 다른면을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일이며 한 사람의 실존적인 인간성과 만나는 것이며 내면의 고통과 어둠을 노출시키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상담은 곧 영적인 산파역을 수행하는 것이며 교회안에서 영적생명력을 탄생시키는 일을 하는 산파역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정말 깊이 공감할수 있는 표현이라 여긴다.
이러므로 목회상담의 주요목표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중 두가지욕구 즉, 사랑하는것과 사랑받는것(글래써), 그리고 그가 자신과 타인에게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라는 것이다. 즉, 신뢰할 수 있는 관계에서 진실한 사랑을 사람은 경험하고 싶어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결국 목회상담은 인간의 천부적이고 종교적인 심리를 충족시키는 일이며, 목사에 의해서 일대일, 또는 소수집단과의 관계에 이용함으로서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 나아가 그들의 잠재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것이다. 하워드의 이런정의는 정말 목회상담의 귀중성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인간의 모든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인간의 잠재능력을 돕는 것이 목회상담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깊게 모든 문제가 쌓여있는자가 가족, 지역사회, 그리고 교회내에서 새로운 주체적인 요원이 될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저서를 통하여 저자는 효과있는 목사직의 감당을 위해 유능한 숙련가가 되며 목회상담에 있어서 다양한 기어장치(Gear Shift)를 자유자재로 다루길 웒하고 있다. 또한 정신분석요법인 목회상담의 새로운 모델(revised model)을 제공하는데 이 방식이 '관계중심상담(Crelation ship-Centered Counseling)'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책의 독특한 방법으로 '상황연습(reality-practice)' 혹은 '역할실연방법(role-taking method)을 널리 사용하도록 장려하고 있음을 볼때, 그가 실천신학의 상당히 진보적인 위치에 서있는 권위자임을 알 수 있다.
본 저서를 읽으면서 저자의 심리학적 그리고 정신분석적 통찰력은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아울러 그의 신학적 권위와 영적 통찰력이 지닌 확신성이 높아
대단히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잘 활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학문적이론에서 머물지 않게하기 위해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제 2장에서 저자는 목회상담의 새로운 모델을 언급하며 상담의 목표를 힐트너의 진술대로 '새로운 통찰력'을 얻는것이라고 하였다. 관계성 및 책임성을 감당하는 개성의 부분을 근육에 묘사하고 있는데 목회전통의 맥락에서 크리소스톤의 표현대로 '영혼의 의사'로 생각하고 있으며 윌리암A.클레비쉬(Willam A.Clebsh)의 4가지 목회기능인 1)치유(Healing), 2)지탱(Sustaining), 3)인도(Guiding), 4)화해(Reconciling)의 네가지 기능을 새로운 모델을 잘 수행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제 3장에서 저자는 상담의 사명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이웃과 그리고 그들을 내적으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며 교회의 사명에서 벗어난 건전한 목회상담은 있을수 없다고 그의 신학을 못박고 있다.
즉, 케리그마(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것) 와 코이노이아(수직적차원에서 친교를 수립하는것), 디아코니아(사랑의 봉사로 신앙을 수행하는것)이다.
또한 상담관계의 발전을 위해 치유법(therapentic), 산파술(maieutic) 혹은 화해의 기능(reconciling)을 강조하며 '화해의 일치(rapport)'와 용납적 관계인 카타르시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목사가 정서적발산을 어떻게 고무시키는가?
대개 감정의 귀를 기울이므로서이다.
제 5장에서는 비공식 단기상담의 방법이 얼마나 교회에서 절실히 요구 되는가를 저자는 설명하며 짧은 목회대화에서 진주같은 귀중함을 잃지 말것을 당부한다.
제 6장 결혼상담은 목회상담의 60%를 차지하는 비중이며 가정의 파괴를 가져오는 심각성을 가진다고 설명하고 부부갈등의 근원은 유아-부모의 의존관계에서 서로가 '어린이'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담을 통하여 모든 경우에 책임있고 성실한 관계를 만들고 양자가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도록 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제 10장인 위탁상담부분에서 목사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스스로가 다 하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훌륭한 지적이며 현대목회자의 목회가 개방적이며 위탁적이어야함을 강조하였다.

끝으로 본저서를 통하여 하워드 클라인벨의 실존주의적 접근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에릭프롬의 '자기와 목적이 같은 집단사상', 빅톨브랭클의 '의미요법(Lego therapy)폴틸히의 '황홀한 순간' 아브라함 마슬로우(Abraham Maslow)의 대양같은 느낌이라는 표현, 톨스토이의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등은 다 실존주의적 상담학의 요청을 표현하고 있다. 실존주의적 상담의 방법으로 기도와 예배, 완전에의 추구, 화해, 재생등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가를 깨닫는일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사명을 위해 뜨겁고 헌신적인 목회사명의 기능을 실천하는 일이 목회상담에 성공하는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하여 목회상담의 사명을 재 인식하게 되었고 현대목회의 차원에 맞는 다양한 그리고 과학적인 방법과 정신분석적인 방법, 아울러 실존적인간본성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신학적 제요소에 깊은 관심을 갖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사회의 갈등을 우리는 신문지상을 통하여 매일 비극적인 접촉을 갖고 살아간다. 집단범죄와 흉악사범들과 사회에 대한 보복심리에서 나타나는 무서운 범죄들은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때의 목회자의 상담사역은 교회의 일부분이 아닌 시급한 사명이며 모든 목회자와 신학자가 실천적인 입장에서 다루어야할 최선의 과제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사

 

제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대진경교유행비 : 781년(당 건중 2년)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고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 관(숭전)에 소장되어 있다.88.8*177.8cm.

돌십자가 :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 적을 증명한다.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24.5*24*9cm.

몽천포구 :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야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오다 쥴리아의 묘 : 임잰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 시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시니에 의 해 끌려 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 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 소재.

 

1)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 에 에배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했다 가 에배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년-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 그때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 때) 우리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번 방문)

*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같은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자(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2) 몽고를 통해 접촉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 할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거리 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줘서 고맙게 생각함.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그래서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을 1246년에 보냄.

* Rubruc은 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 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 당함.당시 몽고는 우리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Coree - Korea

 

3)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 1592년 임진연에 전쟁 일으켜 우리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 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 들어 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 었다.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그는 우리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 :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세스 페데스는 6개월 수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새통치자 출현함) - 기도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 이 임진란 때문에 우리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특히 일본에 대해)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제2장 한국에 있어 카톨릭

북경 북천주당 :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방문시 꼭 들려 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서학서들이 조 선에 전달되었고 그 속에는 천주교에 관한 서적. 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 다.

곤여전도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 (F.Verbiest)가 제작 (1674년) 한 지도로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 되었다. 8퍽 병풍. 한국기 독교박물관 4-5*173.3cm.

천진암터 :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초기 서학(천주교)의 신앙회의 주역이 었던 이벽, 이승훈, 권철신, 귄일신, 정약종의묘가 조성되어있다. 경기도 광주 군 퇴촌면 우촌리 소재. 1) 선교사 들어 오기 전에 나가서 만나서 받아들임.

*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한 만주의 여진족은 자기들의 요구를 안들어 준다고 10 만을 이끌고 임진란 40여년 만에 한국을 침공. 이때(인조14년)에 우리나라 조종 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 했지만 결국 남한산 성에 ?겨가서 투항했다가 1637 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정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항복. 이때 인조의 소현세자와 대신들이 청의 심양으로 끌려감.

* 1644년에 끌려간지 7년만에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심양에서 명 의 북경으로 천도(소현세자등도 같이 감)

* 그때에 베이징에 아담 샬(주교)이 묵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만나 친 분나눔.(2달동안) - 소현세자가 기독교 저술을 읽을 기회가 있었음.

*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얻어 통감목사(벼슬)라는 위치에 까지감.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 소현세자가 귀국하게 됨. - 이때 서양문물, 기독교 서적을 아담 샬이 줌. 그것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는 곧 죽게됨.

*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 경제의 개조책이라는 책도 만들고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남.

2) 학자들의 교리연구중국을 섬기던 조선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정초에 성절사, 원단사, 동지사, 천추사등을 북경에 파송했다.(사절단은 한 행차에 300- 500명 정도가 50일에걸 려 가서 50일 정도 머물고 돌아왔고 진상갈때에는 비단, 금, 은, 보석, 호피, 좋 은약 등을 가지고 갔다.)

* 1601년에 마태오리치가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남당이다.아담 샬이 살던곳에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동당이다.

* 1603년 마태오리치가 쓴 '천주실의' 란 책을 그때 진상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져옴.

* 조선조 시대에 주자학이 당쟁에 질리고 허례허식 하던때에 나라 기강 이 안 잡혀서 이때에 학자들이 '천주실의'를 가져오자 연구했다.

* 조선조 이 수광 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일에 보상이 있고 악 하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 고 이웃을 제 2의 나라고 하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 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주교책을 가져옴.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유인용 - '어우야담' 제 1권에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언급함.허균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힘.

*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 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 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3) 이승훈의 入信한국 천주교의 발생지 : 경기도 광주, 양근(양평)이벽, 이승훈, 권..가 여기서 모여 교리를 연구하였다.이벽의 누이 : 양근 고을의 정약전과 결혼 하였다. * 이벽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열화 같은 사람이다.1777년 에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한강터에 외진곳 주어사라는 곳에서 교리 연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100리를 걸어 왔다고 함.

* 走魚寺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는데 천주교 교리 서적이 너무 빈약 해 중국에 가서 도움 요청을 하자고 결정함.

* 이승훈은 아버지가 그당시 북경에 갈 일이 있어 같이 따라감.(이벽은 이때 이승훈에게 가서 이번에 갈때 천주교 교리서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함.)

* 이승훈은 북경에 가자마자 북경의 천주당에 갔다.그래서 돌아올때는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옴.

* 이승훈은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하고 1789년에 평택 현감이 되었다.

* 이승훈은 북경의 남당에 찾아갔다.(여기서 교리를 배우고 1784년에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글라몽에게 영세를 받 는다.) 그래서 이승훈에게 영세명을 주었는데 '베드로'란 이름을 주었다. * 이승훈이 영세 받고 돌아올때 성화, 묵주, 책 가지고 돌아옴.

* 이승훈의 전교 : 이승훈이 돌아온 5년만에 신도 4000명이 불어나고 이들은 1785년 봄 서울 진 고개에 중인(당시 천민, 중인, 양반) 김범우 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교리 연구를 학자들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함.

* 조선 정부 형조 판서는 진고개의 예배당을 급습하여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우 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에서 타계함. -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에 지금 의 명동성당이 서있음)

4)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1785년 김범우 집 급습으로 많은 사람이 배교 하기 시작함. 이때 이승훈, 이벽도 배교함. * 시간이 지나 핍박이 줄어들자 다시 돌아옴. 그리고 성직자의 필요성을 느낌. 그래서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 * 주베아 주교는 중국사람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 주 신부는 윤유일, 지향 의 인도로 밀입국함.(엽부로 가장)

* 1795년 1월 한성에 잠입해 들어옴. 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부활절 전날밤에 몇 사람에게 영세줌.

* 한영익이라는 개심을 가장한 자가 주 신부를 관가에 고발함. 그래서 조선 조정이 주신부의 체포령 내림.

* 믿음 좋은 신자 하나가 주신부를 가장해 자수함.(최이길 이라는 사람인데 턱수염이 없어 들켜서 처형당함.)

* 주 신부는 가장을 하는데 상복도 입기도 하고 남의집 헛간에서 있기도 하는데 그러는 동안 신도는4천에서 1만으로 늘어남.

* 또 배교가 있자 주 신부는 국외 탈출 하려다 그냥 스스로 자수함. 1801년에 마침내 새해 남터에서 참수형 당함.

 

제3장 수난 당하는 카톨릭

명동성당 :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 자리에 1887년부터 10여년에 걸친 공사끝에 완성되었다. 사진은 1920년대 모습이 다. 1) 수난을 불러온 요소a. 조상제사의 문제유교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은 효이다(효는 백행지본이다.)그러므로 불효는 일천가지중에 가장 큰 죄이다.그리고 효중에 큰 부분이 제사이다. 중국의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할때 조상제사는 정치적의식이요 기독교는 유교의 발전이라고 했다.(배타 방지위해) 그러다 보니 종교가 혼합적 이다.

후에 선교사 도미니크 일행이 잘못된 이런것을 보고하자 교황 이노센 트 10세가 제사금지를 내림.

* 조상제사 때문에 첫 희생자는 윤시충 이다.윤시충은 전라도 사람으로 25세에 진사급제하고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 집의 교리 연구에서 감화 받고 3년후 입교함.그리고 모친이 별세 했을때 상복 입고 호곡하고 위폐를 모시지 않고 제 사도 드리지 않았다.- 이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윤시충과 외종형 권상연은 같이 처형당함.-

* 그당시 천주교 믿는 자는 패륜 외도라 하여 박해 했다.

b. 붕당적 요소(당시의 당파 싸움으로 인한 박해)영조때 부터 천주교가 들어 왔는데 해서, 관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 는 사색 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다.

영조왕은 당쟁 화를 절감해서 당쟁을 줄일려고 힘을썼고 정조 대왕도 성품이 어질어서 당쟁을 줄일려고 힘을썼다.

* 사도 세자문제 발생시시파(세자 동정하는파) - 남인 이라는 천주교도가 많이 가입해 있었다.숙종때 남인 세력이 약화됨. 남인에 속해 있으면 등용길이 막혔다.

* 이런 남인에게 우호적인 재상인 채재공이 있었는데 1799년 사망했다.정조대왕이 또 사망하자 천주교 박해가 터졌다.

* 정조 아들 순조(11세)가 왕에 오르자 정순왕후(정조의 첩)가 순조 뒤에서 정 치를 함. 이때 천주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됨.

* 채재공이 죽자 죽은후 관직까지 박탈함.(1801년) * 1801년 이때는 서학을 박해하는 교서를 발표함.(서학은 인륜에 반역하고, 교황 은 장가도 들지 않고 아들도 안 낳고 밑의 똑똑한 자를 뽑아 자기의 위치를 넘 겨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세습 윤리와 안 맞아 박해 해야 한다고 함.)

c. 황사영의 백서가 문제됨

한국 카톨릭의 4대 박해가 있었는데1. 신유 박해(1801년) : 황사영(경상도 창원사람)은 정약전의 형 정약용이* 주신부에게 영세 받음. 17세에 진사 급제를 함.박해가 시작되자 충북제천 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를 찾아온 황심을 만남. (천주교 구하기 위해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 보내자고 약속. 그 편지는 길이 62 센티 폭 38센티의 비단에다 작은 글씨로 만 삼천자의 글로 보냈는데 내용은 박 해와 참상을 보고 하는 것인데 그만 도중 들켜서 조선 조정에 밝혀짐)

* 이 백서가 들켜 카톨릭은 매국종교로 지탄 받게됨. 백서 내용 : 1). 조선 천주교의 실상을 기록하고,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다는 내용.

2). 당시 정계의 사색 당쟁의 실상을 기술. 박해의 이유는 당쟁 때문이라고 말하고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교인이 열악하다고 기술.

3). 중국의 신도 1명을 택해 북경 지대에 점포를 개설해서 청국과 조선 사이에 통신 연락을 하게하고, 북경의 청국 황제를 움직여서 조선 왕으로 하 여금 서교를 받아 들이게 하도록 압력 부탁, 또 중국의 공주를 조선조 왕자에 게 정략 결혼시켜 조선을 굴복 시키고 서학을 받아들이도록 부탁, 또 군함과 군수 물자를 실고 와서 이 나라를 치라고 부탁. 나라는 망해도 천주교는 전파 되야 한다고 함.

* 황사영은 1801년 27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의해 참수되고 이 사건으로 300명 이 순교하였다. 이것을 신유박해라고 한다.

* 신유박해 이후 서학의 창대를 염려하여 쇄국 정책을 조선에서는 실시. 북경 외의 모든 문을 닫아 버림.

* 헌조의 명을 따라 발표된 책들이 : 척사윤음이 나왔고 대외쇄국강저, 안정복 (천학고), 천학문답, 김치진(척사론)

2. 기해박해(1839) * 신유박해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북경 주교에게 성직자 보내 달라고 신자들이 요청.

* 정약종 아들 정하상이 있는데 1816년 2차례 걸쳐 북경의 신부에게 요청 했 으나 여의치 않음.

* 1827년 정하상의 편지가 라틴말로 번역되 교황에게 알려져 그레고리 16세 (교황)은 조선교구를 북경 교구에서 분립 하기로함.

* 초대 주교로 브르기에를 임명함.- 1831년 * 그레고리 16세 교서에서 첫째로 교회를 양떼로 보지 않고 목장으로 봤다.둘째로 성직자는 공고 교리, 성례전을 위해 파송한다.(즉 천주교는 교리와 구역을 더 중시함을 알수 있다.)* 브리기에는 부임 하지도 못하고 객사함.

* 1835년에 1대 주교가 객사하자 블란서에서 신부들을 파송하는데 그중 모팡이 라는 신부가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 통해 상륙.

* 2대 주교로 앙베르가 우리나라에 잠입해 옴.샤스텡이라는 블란서 신부가 그후 또 옴. * 이 세사람의 신부를 통해 카톨릭 부흥.

* 헌종 5년 (1839)에 2차 박해 시작.당시 영의정 이지현이 사학박멸을 주장하자 순원 황후가 허락.

* 정하상을 비롯한 100명의 교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당했고 나머지 세 신부는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 당했다.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 말함-강조)

 

3. 병오 박해(1846)이 박해전 1845년 앙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페레올 주교가 조선 사람으로 최초의 조선 안수 받은 김대곤 신부와 한성에 잠입한다.6개월후 김대곤은 외국인 신부 안내 신부라는 일을 하다 군교에게 잡혀 들어감. 1846년 김대곤 신부 처형(살려주려고 했으나 끝내 믿음 지킴) 이 이후로 많은 무서운 박해가 시작 되었는데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4. 병인 박해와 블란서(1866) 이때 우리나라는 동학 난으로 많은 시련을 격을때 동북쪽(두만강) 강변에 러 시아가 자꾸 통상하자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 대원근의 측근이 카톨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성에 베르노 주교가 있었는데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대 원군이 카톨릭에 관대한 생각이 있음과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에 상당한 지 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인은 아들 왕자가 황제에 등극할때 미사 드려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또 왕자의 유모는 영세까지 받은 여자였다 한다.

베르노 주교는 한성에서 열심히 전도한 결과 1865년에는 12명의 선교사와 평신도 2만3천으로 늘었다. 당시 상황이 이래서 김기호, 홍범주 등이 의논해서 조선, 영국, 블란서 의 3개국이 동맹하여 방하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민비(대원군의 며느리) 는 비밀리에 베르노 주교에게 블과 교섭해서 외세에서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남종삼(조선의 독실한 카톨릭 지도자)을 대원군이 접촉하는 등 카톨릭과 많은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희소식은 오지않고 베르노 주교는 카톨릭은 정치적 개입을 원치 않고 방하 책이라는 자체도 부족하다 하여 묵살 하였다.여기에 존심이 상한 대원군이 옛 감정이 살아나고 척외사상과 서학금지 상소문이 빗발쳤다. 또 당시 우리가 존중하는 청도 천주교 배척 분위기 여서 더욱 그럼.

그래서 새남터에서 7명의 선교사와 베르노 주교가 죽는다. 서문에서는 조선의 신도들이 많이 죽음. 한국 통사에는 교도 12만명이 죽었다고 기록?으나 다른 자료 종합결과 8천명 정도라함.(3년 동안) 이것으로 인해 블란서 군대를 우리에게 보내 전쟁하도록 하는 원인이다.

니델이라는 선교사가 포교들을 피해 충청도 해안으로 빠져나가 2명의 신 부는 거기남겨 두고 니델과 조선교도들은 아산에서 어선을 빌려타고 중국 산동 성의 지프라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 도착한 조선 교도들은 커다란 블란서 군함을 보고 이것으로 조선을 위협하여 천주교를 널리 펼치자고 말했다.

이 조선인 11명중 4명은 중국 3대 도시중 하나인 천진의 블란서 공관에 찾아가 공사인 블란서 제독(로쓰)를 만나서 한국 박해를 보고했다. 이에 분개한 블의은 청국 총리에게 보고하고 니델을 통역삼아 군함을 몰고 강화도에 침공했다.(병인양요)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조서를 내려 어린아이까지 죽임.

* 병인박해와 미국. 1866년 7월 평양 대동강에 국적이 미국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 들어왔다.(군함이 아니라 상선) - 여기에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타고 있었다.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 한강인줄 알고 대동강에서 있다 물이 빠져 남아있다 평양 관군괴 제너럴 셔먼호가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평양 시민이 모두 합류하여 상선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있은 후 1871년에 북경에 주지하던 미국 공사 F로라는 사람이 청국의 총리 아문을 통해 조선 정부에게 셔먼호 사건을 묻게했다.

- 조선정부는 조선은 외국 상선이라 해서 다 적대한 것은 아니다. 1855년, 1865년에도 미국 함정이 황해도, 평안 연안에 표류했을때 도와주고 헤어질때 술까지 했을 정도다.따라서 우린 의심 받을것이 없다. 단지 우리 허락없이 통상 하려고해서 불가피 했다고 밝혔다.-

미국 극동 함대 소장 로져스는 군함 4척을 이끌고(1871) 강화도 해역을 통해 광성진 까지와 싸움 벌어졌다.(한성 수비대와)

이것으로 외교 문제 발생하자 대원군은 일본에게 쇄국을 다시 재천명 했다.당시 조선은 외교를 몰랐으며 일본 외에는 설명할 곳이 없었고 일본이 다른나라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헤밀턴 피시(미국 국무 장과)는 일본 정부를 통해 조선의 쇄국 정책을 듣고 이제부터 미국과 조선관계는 일본이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의 배경이 됨.-

여기에 대해 로빈슨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는 고대 로마 기독교인들이 당한 고난보다 한국의 4대박해때 고난이 더컸다고 말했다. 스테판 나일 박사는 책에서 조선 카톨릭 역사는 가장 로멘틱하고 믿지 못할정 도의 수난시대라고 말함.

* 조선 천주교의 신앙 형태조선 천주교는 철저히 수난과 박해로 얼룩져 있고 4대 박해를 거쳐오는 동 안 피맺힌 헌신과 형극을 거치면서 신앙형태가 생겼다.

(1) 이들 교회는 수난을 통해 오면서 상류에서 하류층으로 신앙의 계층적 구조로 변모 되었다.(2) 중류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민족 주체의식이나 고유의 민족의식에 접촉함 으로서 조선적 기독교에 언문(한글)을 중시하다.(천주교 서적이 많이 한글로 되어있다.)(3) 1850년대 와서 천주교가 하류층으로 파고들어 격정적이고 종말적인 위기 의식으로 변모됨. 그래서 마침내 저들은 박해로 인해 종교의 내면화 지향적이다.(4) 1919. 3. 1일에 개신교 교도들은 많이 참여했으나(33인중 16명) 천주교 교 인은 전혀잠잠.(박해에 그동안 질림)

제4장 한국의 개신교회 (프로테스탄트교회 영국교회(聖公會, Protestant Church)

귀츨라프 : 1831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상륙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토마스의 무덤 :1866년 병인교난 중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순교한 토마스의 시체가 묻힌 곳이다.

이수정의 개종 :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녀 간 이수정은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성서 번역과 선교사 초빙 및 유학 생교회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진은 1883년 5월 개최된 일본 전국 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한 이수정(가운데 한복입은 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로스역 성서 : 스코틀랜드연합 장로교회의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만주 봉천에 머물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두었고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의 협력을 얻어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1. 시대적 상황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졌으나 근래에 들어 종교적으로 심한 허탈감을 느낌.(고려조 : 불교, 조선조 :유교)

그러나 기독교가 전래되기 약간 이전은 종교적 공백기 였다.당시 멕킨지는 당시 서울에는 종교적 행사가 없었다고 보고한다.1866년 전쟁이 일어나고 1871년 로져스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운양호를 몰고 온 일본군이 무력시위하여 1876년 한일 강화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미, 일, 러시아와 수호조약을 맺음으로 당시 조선이 운둔국(세계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나라)으로 알려지기 시작함.

*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해서 망명 생활후 돌아온 일본 수신사 박영효 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 선교사로 온 스크렌톤 목사(감리교)를 만남.

박영효는 당시에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등 문화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부탁함. 우리 재래 종교는 한물 갔다고 말함.

* 1886년 한블 수호 조약에서 조약문 속에는 교회라는 말이 들어갔다. (나중 이단어 하나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할때 쉬웠다.)

2. 유럽 christian들의 도래1)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이 오게됨. 1627년 네델란드 사람 벨트브레 일행 3사람이 동해안에 상륙함으로 시작.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어 살아가던 도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몇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가 억류되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였음을 알수있다. -

2) 바실홀과 멕스웰의 내한.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William이라는 군함이 있었는데 Amhert 사절단이 있었다. 함장은 Maxwell, Bashall 사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암 홀스트 사절을 내려놓고 본국에서는 한국 서해안을 탐사 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에 한국 해안에 와서 해도를 작성했다.

이들이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때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 (조대복)이 가서 물어 볼때 이 조대복에게 성경을 줌.(King James Version) - 최초로 한국 에 전달된 성경. - 바실홀은 돌아가서 책을 씀.-

3) 선교 개척자들의 한국인 접근(1) 칼 큐츠라프 -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독일의 할례대학에서 졸업. 화란 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함.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중심으로 중국인 상대로 선교 함.(중국옻, 음식 잘적응) 자바 수마트라에서 - 마카오로 선교지 옮김 - 네델란드 선교회를 떠나 프리렌쓰 미션네리로서 활동함.

1832년에 선교의 방향을 한국의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 백령도 - 원산도에 도착( 만나는 사람마다 의약품, 병고쳐줌, 전도함)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에게 성경과 서적 보냄.홍주 목사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최초로 성경을 번역(주기도문을)참고: 이것은 비공식. 공식 1884년

(2) 토마스 목사(정식적으로 안수 받아 오신 목사)의 내한

큐츠라프 목사가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에 온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이다(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 중국 상해 선교사로 파 송되어 왔는데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이때 한국 선교를 자청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리를 듣고 통역관으로 자청. 관군이 화공을 맞고 대동강에서 죽음)이때 배가 타던 때 한문 성경을 강 언덕에 던졌는데 관군중 하나가 한권을 가지고 있는데 조카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이영태) 나중에 이늘서 박사가 성경번역시 도와 주었다.

토마스 목사를 배에서 끌어내 한강 근처에서 목을쳐 죽임.목을 친 사람은 박춘곤인데 나중에 회계하여 1899년 세례받아 평양 초대 교인이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3) 로쓰와 멕킨타이어의 고려문 전도(런던 선교회 소속)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심양)에는 한국 교회 설립에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특별히 우장은 최초의 한인 수세자를 배출한 곳이다.봉천은 최초의 한국 성서가 번역된 곳.

로쓰와 멕킨타이어는 처남 매부지간(중국 우장을 거점으로 한국 선교 연구함)마침 조선의 의주 청년 4사람이 , 한약 약장사를 위장하여 중국을 방문했다.의주에서 강건너 50킬로미터 떨어진 고려문(중국과 물품교환 하던장소)에 갔는데(서양 무물을 배울려는 의도로)

마침 1873년 봄 로쓰 목사가 중국인 서기를 대동하고 고려문 방문. (이때는 조선사람이 외국사람 만나는 것도 불법일때) 여기서 의주청년들을 만남.

로쓰는 그들에게 후한 급료를 주는 대신 한국언어와 역사를 가르쳐 달라고 함.

제5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집회

이수정의 성서 : 이수정이 일본에서 한문 성서에 이두토를 달아 펴낸 <신약 성서 마가전>(1884)이다. 이수정은 이외에도 마태.누가.요한복음 및 사도행 전을 같은 식으로 펴냈으며 한글성서로 <신약마가전 복음서언희>를 냈다

최초의 견미사절단 :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비로소 기독교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 셈이다. 1883년 민영익(앞줄 중앙)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 단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감리회의 가우쳐와 만나게 되어 한국선교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고종의 선교윤허 : 미국 감리회 선교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가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 및 의료 선 교 윤허를 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1934년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배재학당에서 공연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

광혜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최초로 내한(1884년 9월) 한 알렌이 고종의 윤허를 얻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오늘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이 되었다.

 

 (1)백홍준과 서상륜의 수세와 전도활동.우장으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4명이 따라감.로쓰목사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목사님은 이들에게 보수와 문물을 줌.처음에는 4명이 잘 안받아 들였다. 왜냐면 그때 서학은 국법으로 사학이라 하여 핍박했기 때문이다.

로쓰목사는 1874년에 한영회화라는 책을 만들었고 1875년에는 예수성교문답을 만들고 1879년에는 한국지역사, 생활, 습관이라는 책을 씀.만난지 3년째 1876년에 이들 4청년이 수세를 받음(우장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세례자

이들이 세례 받은후 로쓰와 4청년은 한국 성서 번역에 착수해서 1882년 봄에 요한, 누가복음을 번역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이때 의주청년 서상륜이 찾아옴. 서상륜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친척을 따라 홍삼 장사하러 중국을 따라오가다 콜레라에 걸렸는데 맥킨타이어가 그를 살게해 줌.그래서 이후에 성경번역을 로쓰와 4명과 함께 귀한 역할을 함.

그때 공관복음서를 번역 출판 했는데 국내에 배포하기 힘든 상태였다. 서상륜이 이것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배포함. 이때 3000권 찍어낸 것을 로쓰역이라 한다.

이것이 관과에 알려져 위험해 지자 서경조(서상륜삼춘)과 둘이서 황해도 송천 으로 위험을 옮김. 여기서 송천 솔래 교회 를 개척함(1884년- 조선 최초의 개신 교회) 1884년 또 다시 성경을 만들었는데 로쓰목사가 쪽복음 6천부를 제물포 (인천)로 보냄-최초의 밀수품이라 칭하기도...

조선은 당시 독일사람인 멜렌 도르프라는 사람을 현재 관세청장 이라는 자리를 줘서 이사람으로 하여금 관세 업무를 맡게함.(조선은 너무 외교를 못했기 때문) 이때 멜렌 도르프가 서상륜을 불렀다.(왜냐하면 제물포에 성경 6천권이 와있어 서) 로쓰는 백홍준과 이성하에게 편지써서 멜렌 도르프에게 잘봐 달라고 부탁.

폐지/노끈 성경 (성경을 안 들키기 위해 폐지처럼 하기 위해 제본 안하고 나 두고, 제본안하고 노끈처럼 꽈서 나둔것)

참고 : 김재준 박사 아버지는유학 자였다. 성경을 분배하는 상인이 하루는 그집 에 머물렀 는데 마땅히 줄것은 없고해서 성경을 한권 놓고 갔다. 김재준 박사가 중학교때 Y. M. C. A뒤에 승동교회에 갔다가 설교에서 성경을 읽어야 위대한 사람이 되고 영어 공부 한사람치고 킹제임스 버 젼을 안읽으면 안된다고 해서 그말에 집에 돌아가 그 책을 꺼내 읽고 훌륭한 목사님 됨.저고리 성경 : 당시 저고리에 솜을 넣는데 아예 성경을 넣고 꼬매서 가져옴.

1884년 솔레 교회가 세워 졌는데 그 마을이 58호 밖에 안되었는데 서경조, 서 경륜 형제가 열심히 전도해서 몇 달안에 50호가 교회에 나왔다. (서경조는 나중에 새문안교회의 목사됨) 1년후에는(1885) 교인들이 자력으로 8칸짜리(8평) 교회 지음.

(2) 일본을 통한 전도이수정의 개종과 성서 번역이수정은 한국에서 임오군란(군인들의 월급안에 모래석은 사건)후 일본에 사절 단으로 파견 되는데 박영효, 이수정이 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가게 됨. 이수정은 현판 이라는 자리에 있었는데 가서 안돌아 오게됨. 일본 동경 대학의 조선과 교수로 눌러 앉음. 쓰다 목사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집에 가서 마태복음 산상설교 벽화보고 감명 받고 영접함. 쓰다는 이수정을 야스까와 목사에게 소개한다. 1883년 4월에 마침내 야스까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음.

일본 성서 공회 루미스 목사가 이 소식에 기뻐함.이수정을 만나 도움을 받아 성서 번역을 시작해서 1883년 - 4복음서와 행전 번역이 나왔고 1885년 마가복음이 출간 되었다.(이수정판)일본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들이 본국에다가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부탁. 1885년 4월에 그래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오게 되는데 (그들은 제물포 도착당시 이수정판 성경을 갖고 있었다) 오기전에 일본에서 조선 성경을 보고 기뻐했다.참조 : 우리나라가 장로교는 미국, 세계보다 더크다.

제6장 한국 프로 테스탄트의 형성과 부흥

아펜젤러(좌)와 언더우드(우) : 1885년 4월 5일 함께 내한한 두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선교사들의 순회전도 : 1891년경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서북지방 순회 전도광경이다. 마펫.게일.베어드 등의 모습이 보인다.

매서인들의 전도 :성경과 전도지를 파는 매서인(권서인)들의 활약으로 한국 교회는 크게 발전하였다. 1890년경 서울지방에서 활약하는 매서인.

소래교회 : 1884년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사진은 1900년경의 교회건물)

새문안교회 : 조직교회로서는 한국에 처음 세워진 (1887년) 교회로 정동에 서 시작되었다.

정동제일교회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로 1887년 창설되었다.

장대현교회 : 1893년 평양에 설립된 장로교회로 사진의 예배당은 1900 년 건립한 것이다.

성공회 서울대성당 : 1890년 한국선교를 시작한 영국 성공회는 서울 정동에 대성당을 설립(1891)하고 로마네스크식 건물을 마련(1926)하여 성공회 선교 의 중심으로 삼았다.

강화성공회성당 : 1893년부터 시작된 성공회의 강화. 선교 결과로 1900년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채용한 성당을 건축하였다. 기독교 토착화의 단면 을 보여주고 있다.

구세군 선교 : 구세군의 한국 개전은 1908년에 이루어졌다 .개척 선교사 호 가드(중앙의 말탄)의 전도 광경(1912년)이다.

무교동 성결교회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이름으로 1907년 서울 무교동에 설립된 이 교회가 오늘의 성결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동아기독교 :침례교회의 전신인 동아기독교는 캐나다출신 선교사 펜윅(가운 데 검은 옷 입은) 에 의해 1889년에 설립되었다

일본인 교회 :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 교회(특히 조합교회)는 한국 선교 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병합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 다. 사진은 해방전까지 일본인교회로 사용되다가 해방후 덕수교회 예배당으 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서울 정동에 소재.

배재학당 :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으로 1885년 8월에 설립되었다. 1887년에 건축된 교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벽돌 건물이 기도 했다.

이화학당 : 1886년 스크랜톤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 의 요람이 되었다.

(1) 개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의료와 교육 사업(우리 나라는 의료와 교육이 필요함을 느꼈다)

중국에 의료 선교하던 알렌 박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의료 선교사로 자청해서 우리나라에 옴.같은해 1884년 10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갑신정변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을 세워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내노라 하는 우리나라 인물들이 참석했는데 수구파(엣것 지키려는, 대장은 민비의 오라비 민영익)와 개화당(개혁으로, 대장으로 박영호, 김옥균)이 있었는데 개화당 사람 이 민영익을 칼로 찔렀음. 개화당이 3일 동안 천하를 이루다가 다시 흩어짐. 이때 알렌이 민영익을 고침.(한의사 14명은 실패했는데) 이것 때문에 알렌의 인기는 치솟음.

알렌은 그래서 궁중 시의가 되어 모든 왕족, 고관을 치료함.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10만냥을 사례함. 이돈으로 알렌은 왕립 광혜원을 설립.이 병원의 설립 2주후 고종황제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줌.

제중원 - 나중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당시 의대가 파리 날렸는데 백정인 백가(白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들이 콜레라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세브란스 의사들이 살려 주었다. 의사들이 그 아들을 세브란스 의사로 만듬. 1885년 4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오는데 문을 열어주는 도움을 주게 되는 배경은 알렌이 병원으로 정부에 호의를 준 영향이 크다.

교육 멜렌 도르프 : 영어 강습소 생김.우리나라 조정에서 외교관, 통역관 양성 목적.한국정부 : 미국 정부에게 현대 교육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

헐버트 1884년에 육영공원(영재를 교육하는 공적인 학원)- 최초의 미국식 학교 인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다님. 후에 나라에서 이런 학원을 닫게하자 선교사들이 교육에 직접뜀.

(2) 선교 활동과 조직 교회의 출현1885년 4월 5일(부활절) 알렌의 뒤를 이어 언더우드와 아펜 젤러가 우리나라에 도착함.(그때는 당장 전도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887년에 언더우드가 솔래 교회에 가서 7명의 신도에게 세례를 베품. 1887년 9월 27일에 언드우드가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림.(14명과 같이)- 이 교회가 새문안 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10월 9일에 아펜젤러는 또 언더우드 처럼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정동 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 자택에서 교회만 아니라 학교를 세움(2명으로시작) - 1주년이 되는때에 고종황제께서 배재학당(인재를 배출하는)이라는 이름을 줌.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온후 들어온 선교사) 스크렌턴(감리교 의료선교사)의 어머니 미세스 스크렌턴이 자기 사랑방에서 정부 고관 부인 2사람을 데리고 학교 시작- 이화여대 전신(1885)

1886년에 고종 황비의 아내 민비가 이름을 줬는데 이화학당이라 했다.

이런 학교들에는 학생이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모유보다 우유를 먹이는등 자기들도 먹고(악성 우유통 루 머번짐) 광이문(서소문)밖에 콜레라 환자들을 버렸는데 스크렌턴의 모친이 그중 1명의 소녀를 데리고 와서 아들이 고쳐서 이 학교 3회 졸업 소녀가 된다.

1886년 정동의 언더우드 사랑방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했는데 1891 년에 와서 예수교 학교로 바뀌고 1905년에 경신 중고등 학교로 바뀜.- 나중에 정신 여자 중고등학교로 바뀜.

북한에는 숭실전문학교, 숭의전문학교, 광성중고등학교.

1892년에는 미구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레이놀즈와 6명의 선교사가 입국해 전라도 쪽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예수병원"을 설립했다.

1893년 카나다 연합교회에서 와서 함경도 선교함.

동년 동양 선교회가 들어와 년 성결교회를 시작

동년은 영국 구세군이 들어와 선교 시작

1903년에서 1905년사이에 하와이로 이민가는 사람이 늘었다.(당시 7300명 정 도였는데 이중 윤은현, 손흥조가 일본에 들렸다가 안식교 전도사를 만나서 돌 아와 한국에서 안식교가 시작된다.)

(3) 성서와 성례전한국의 프로테스탄트 - 성서와 관련하여 출발했다고 얘기할수 있다.1885년 4월에 인천에 처음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손에는 이미 한국어 로 번역된 성서가 있었다. 그당시 사람들은 성서 공부에 관한 열정이 대단하였다. 한 선교사 왈 " 이세상의 모든 성서가 불타 없어져도 한국인 5명만 모이면 성서를 재구 성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란? 루터 :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야 존재 가능 하다고.칼빈 :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제 4부에 보면 루터와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얘기함.우리 나라는 말씀에 대한 열정은 컸지만 성례전에 대한 의식은 약하였다. 오늘 날도 그런 경향이 있다.

* 교회에서의 말씀과 성례전은 균형 울 이뤄야 한다.

4. 선교지역의 분할과 선교 정책한국에는 많은 선교회가 조직됨.장로교 - 북 장로교 감리교 - 북 감리교남 장로교 남 감리교캐나다 장로교호주 장로교

이러한 많은 교단에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쓰게됨.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선교. 이 외에 이미 선교가 시작된 곳은 북장로교가 맡음.

부산(경상도)은 호주 장로교,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가 맡음.1905년 을사보호 조약 체결. 장로교와 감리교 간에도 지역 조정이 있었다.

연변 중심의 지역은 북감리교, 평북 지역은 북장로교.1908년 남감리교는 강원 북부 3분의 2와 경기도 서울 이북을 장로교로부터 모 두 떠맡게 됨. 북장로교는 강원 남부 3분의 1, 서울 동부, 서울의 남감리교 지역을 다 떠 맡음. * 선교 정책을 보면,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 사상은 보수적, 경건주의자들 이었다. 저들이 한국에 왔을 당시 한국은 - 샤머니즘 : 무지함에서 생김.

유교 : 형식주의, 허례허식불교 : 미신적임.- 위의 3가지의 사상에 어느정도 젖어 있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 John Nevius를 초청하여(1890년) 그들 과 함께 지내면서 선교사업을 위한 원칙을 세웠다. - '삼자(三自)정책'1)Self-propagation 자력전도 : 스스로 전도하게 한다.2)Self-goverment 자치제도 : 스스로가 교회를 관리, 운영하게 한다. 자치 제도 마련. 3)Self-suport 자치자립 : 자급목회를 하게 한다.

(5). 1907년대 부흥운동1882년 임오군란(직업군의 군량미 부정사건)1884년 갑신정변(개혁파와 수구파간의 구테타)1895년 청,일 전쟁1905년 러,일 전쟁

이러한 일로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망이 없었고 의지할것도 없었다. 정치, 경제, 도덕, 정신적으로 절망 가운데 빠짐. 그래서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 서울에 주재하던 선교사가 "한국의 실정을 변해가며 일반 백성들 사이 에 각성의 기미가 보인다"고 보고함.

1895년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530명 1896년에는 3276명, 1900년대 와서는 7690명으로 늘어났다. <교회성장 요인들> - 당시 황실 고위층과 선교사들 간에 친밀한 관계였다. 1895년 일본 자객에 의해서 민비가 살해되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피신을 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말만은 믿었다. 한국에는 미국인들이 250명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 뿐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그래서 일본인들 에게는 선교사들이 눈에 가시였다.

당시 배제학당의 교사였던 이승만을 비롯, 서재필, 윤치호를 중심으로 해서 배 제학당 안에 소위 '협성회'를 조직해서 애국운동을 벌였다.이 협성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 운동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좀더 체계적인 것은 1893년 10월 '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조직됨.(오늘날의 Y.M.C.A가 됨) 서울 종로 2가에 '황성 기 독교 청년회'는 3층 양옥을 건립하고 황태자(순종)가 여기에 참석해 낙성식을 치뤘다. 황제를 비롯해 이또오 히로부미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 었다.

 

 이 청년회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체육, 공업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1896년에 서재필은 독립 신문을 발간한다. 그는 그 신문을 통해 대중계몽에 성 공을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없애고 그곳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홍정우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시킴. 우국열사들이 정부의 부정부패를 공격하자 저들은 심한 불쾌감을 갖 고 마침내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해 그들에게 전도를 해서 1901년 3월에 17명중에 12사 람이 함께 세례를 받는다.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문서 전도와 문예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화 운동에 힘쓰게 되는데 1899년 언더우드와 뜻있는 사람들이 '성교서회'를 건립 (후에 기독교 서회로 바뀜)하여 正音(한글)으로 문서를 발행한다. 1903년에는 이 기독교서회를 통한 출판부수가 25만부나 되었다.

 

 마침내 1907년 우리나라에서 부흥회가 일어났다. 이 부흥회가 일어나기전 1903년에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인 하디가 기도하던 중 영감을 받았다고 그 체험을 동료선교사들에게 간증을 했는데 이것이 평양선교사들에게도 퍼져 그 이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가 함께 모여 합동집회를 연다.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연다. 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혜를 사모한다. 블레오 선교사가 고전 12:27의 말씀을 읽자 불이 붙어서 - 길선주 장로의 간증을 통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남.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인격적, 소박한, 공동체적신앙 으로 바뀌어 졌다.

1900년대 영국 웨일즈 지방의 탄광 - 무기력함과 무희망적인 삶을 살던 광부들 -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 180도 달라지는 그들의 삶이 일이 미국을 통해 우 리나라에 들어와 1907년 부흥운동을 갖게함.

(6). 교회 행정 기구의 설정1907년 9월 평양에서 장로교 독노회 창설그리고 이 때 평양 신학교에서 배출된 7 의 목사가 안수를 받는다.(서경조, 이기 풍, 길선주,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한승백)1907년 - 1910년 사이에 한국 교회는 일본, 중국, 만주, 시베리아, 미국 등에 선 교사를 파송한다. 그후 100명 구령운동이 일어남.

감리교는 1901년 김창식과 김기방이 안수를 받는다. 감리교는 처음부터 남,북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걷다가 1907년에 합동해서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세우고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신학교를 세움. - '협성 신학교' 그 후에 와서 1930년대에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 이름 을 바꿈.

제7장 일제 치하에서의 교회

옥중개종 :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민족운동에서 적극 참여하였다. 사진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민족지도자들인데 1907년 경 이들은 대거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독교의 기도자들이 되었다.

문용기의사 기념비 : 3.1운동때 이리 만세시위를 주동하면서 순국한 기독교 인 문용기의 기념비. 이리 소재. 1. 십자가를 걸머진 교회우리나라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의 교리 - 유일신 사상과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탄압했다.그 당시 교회는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강력한 조직체가 되었고 이를 눈치챈 일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밈. (기독교 말살 정책) -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헌데 이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당시 인구 2000만명중 크리스챤이 18만명이 넘었다.700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10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05인은 여러차례 감형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게 된다.105인중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저들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9000명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 운동.1918년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됨.

그후 1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33인중 16명이 크리스챤이었 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 주의로 기독교 정신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킴.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 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고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찌르고 죽였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함.

 

1919년 일본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교회가 17개, 일부 파괴된 교회는24개, 그외에 교회에 큰 손해를 본 곳이 41개, 교회 재산 피해가 3만불이었다. 장로교 보고에 의해 체포된 목사, 장로수가 134명 교인수가 3천 8백 4명, 사살된 신도수가 47명, 감리교 기타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합친수는 타 종교의 신도 숫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이일을 통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봤지만 또 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3. 선교사의 관여도.일제는 독립운동 배후에 선교사들이 관여하고,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평양 숭실학교에 모우리 모펫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일제가 그를 잡아갔다. 피신하는 학생들을 은둔 시켜 준 죄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시위에 동향을 미국 선교회 에 보고하고 총독과 일제의 잔악상을 세계에 알렸다.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십자가 처형 : 일제는 민족운동지도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였다. 사진은 철도를 파괴한 독립투사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장면이다.

신사참배 :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 (1943년).

주기철목사의 묘 :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 순교한(1944년) 주기철 목사의 묘. 서울 국립묘지 소재.

철수하는 선교사들 :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선교사들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출옥성도 : 8.15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 사 사택에 모였다.

출옥성도환영회 : 해방후 1945년 가을 서울남산 신궁터에서 출옥성도 환영회가 열렸다.

통일교 : 문선명의 통일교도 그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나갔다.사진은 1963년에 서울에서 거행된 124쌍 합동 결혼식. 1. 신사참배의 강요와 박해* 신사참배는 일본천왕과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경배이다.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국 본토 침략 전쟁 :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내선 일체' 즉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될수 있는 방법은 신사참배라고 생각하였다.

평양부터 점령해서 신사참배 시작 1935년 11월 평안남도 일본 지사 야스다께는 도내에 있는 각종학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학교는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명령함. 이 회의에 참석했던 숭실전문 학교 교장 Mccune은 한국인 목사, 장로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단호한 결의를 하게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야스다께는 Muccne를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추방시킴.

 

그 후에도 일제는 대대적인 신사참배를 강요함. 미션 스쿨에 대해 많은 간섭을 하고 교단 총회 소집도 경찰의 허락 없이는 소집 할 수 없었고 예배도 일본 국회에서 일본 종교 단체법이 통과하게 된다. 신사란? 종교의 범위를 초월한 것.

신도란? 절대의 도로써 모든 일본 국민은 반드시 신사 참배를 해야하는 것. 이에 순종치 않는 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함.

(이 법에 대한 반응) - 1. 로마 카톨릭 : 1918년 까지도 '나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입장에서 반대했는데,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애국 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참배를 허락함.2. 감리교 :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 참배가 국가적 의식이라는 것에 동의함. - 감리교 존속 가는케 함.3. 장로교 :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합법화하게 함.주기철, 이기선등은 신사참배 반대. 일본 경찰은 총재를 만나 회유책을 쓰고 예 배당 분위기는 일본 경찰이 안팎으로 감시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193명이 이 총회에 참석했는데 결론은 신사 참배를 하는 것으로 끝남. 그 후에 도 일제는 계속 교활한 방법을 씀. 평양신학교 패쇄, 2천여 신도 투옥, 50여 명의 성직자 순교.각 교단이 일제에 굴복한 다음 한국 교회 전체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는 양태를 보여줌.

전체 교회의 88%가 교회에다 일장기를 게양하는 탑을 세우고 일본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교회는 96%였고 동방 요배 실시 교회는 96%, 황국 시민 재창을 93%가 했고 예장은 애국 헌납 기성회를 조직해 그 기성회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일본 육군 비행기를 사주고, 총을 사주었으며, 교회의 종 1540개를 바쳤 다.

2.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1895년 청, 일 전쟁1905년 러,일 전쟁1930년 만주사변1936년 중,일전쟁1941년 태평양 전쟁

일본은 여러차례 승리로 기세 등등해짐.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샌드위치'였 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봄. 이러한 때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저항하면 투옥. 구 약의 모세 5경과 요한 계시록을 그들의 국시사상에 어긋남을 알고 읽지도, 가르 치지도 못하게 함. 사도신조 중에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라 라'를 뺌. 찬송가도 거슬리는 것 모두 빼버리고 예배 중에도 천와에게 목례하고, 일장기를 달고, 목사에게 일본 군복을 입도록 함.

1943년에는 주일 오후 예배와 삼일 예배를 막음. 침례교는 재림사상이 강한데 1942년 전국 모든 침례교를 폐쇄시킴. 성결교도 마찬가지로 재림 사상 때문에 1943에 문을 닫게함. 그래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다른 교단으로 옮김. 많은 성 결교 침례교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됨.일제는 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탄압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3. 교회 분열의 징조1930년대부터 분열의 징조가 생김.* 징조는 지방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 장로교 :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이 장로교가 많았다. 이곳은 신학적으로 보 수적인 경향이었다. 1911년 연희전문학교 보조문제로 총회를 열었는데 평양 중심의 교회들은 이 학 교가 남쪽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보조를 반대했다.1934년에 와서는 북쪽에서 남쪽의 총재들에게 진보 또는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 이에 맞서 남쪽은 북쪽교회에게 교회 전제주의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당시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은 신학의 깊이와 넓이가 달랐다.이들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한국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 그래서 평양 신 학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싫어함. 평양신학교는 같은 교단의 사 람이라도 유학생은 별과에 들어가 공부를 시킨후 목사로 만들었다.

감리교 : 1930대에 제 1차 총회를 소집하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기도교의 근 본원리가 시대를 따라 다른 형식으로 표명되었고...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교리적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 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그를 따르는 다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 회 조건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요 신령적인 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감리교는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용박사와 그리고 숭인 상업학교의 김재준 박사는 그 당시 신학논쟁의 거두들이었다. 박형용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극 보수적인 신학교수의 영향을 받아 성서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의 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은 같은 곳에서 공부하였는데 박씨와는 달리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는 한 국교회 신학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다가 1934년과 1935년 장로교 총회의 문제로 대두함.김영주 : 모세 5경 저작설 부인 (박형용은 이에게, 스스로 목사됨을 거절하는 것 이라 함) 김춘배 : 여권운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함.(박씨는 이를 징계에 처함이 옳다고 했다)

1935년 Abingdon 주석이 나왔을 때 감리교의 류형기 감독이 그것을 편집, 번역 하였다. 이 일을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이 같이 했는데 이 책이 아주 자유주의적이어서 번역한 자들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Abingdon주석을 교인들로 하 여금 사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 점점 신학적으로 개방적이 되어갔다.

4. 교회내의 난기류1920년대 부터 지적인 변화, 경제적 빈곤, 일제의 탄압심화등으로 목회자 양 성이 쉽지 않았다.그당시 소설가 이광수 왈 " 기독교는 이성을 경멸, 종교외의 과학, 모든 다른 사상르 경시하는 풍조를 낳아서 현세를 무시하고 죽어서 천당만 가려고 든다"라 고 혹평. 그 때 사회는 소망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은 재림, 즉 이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바라는 설교를 했다.

이러한 때 신비주의자들 등장 - 소망을 심어줌.1.이용도 목사 : 협성신학교 졸업. 감리교 목사. 교파 초월 부흥사역. 각교회를 돌아다니며 민족의 고난에 울었고 교회 형식주의를 비판. 전형적인 경건주의자 의 모델. 진리는 말에 있지않고 삶에 있다고함.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곧 삶이다. 믿음보다 사랑에 진리가 있다. 요한 복음서를 제일로 생각.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방했고 심지어는 사탄, 불경, 사회주의 책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 신학과 기독교 교리를 공격함으로서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짐. 그의 절대적인 사랑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관을 잇는다고 믿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김.

이때 한국교회는 이용도 목사에게 금종령을 내렸고 평양 장로교에서는 그를 부 흥사로 초청하지 못하도록 함.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감리교는 1933년 그에게 휴직 처분함. 얼마후 결핵으로 사망.

2. 길선주 목사 : 계시록 1만 2백번을 독파. 신구약 성서를 30독.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예수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설교의 주제는 항상 '마라나타'였다. 그에 의해 세례받은 자는 3천명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로 돌아온 자가 7만을 헤아렸다.

3. 황국주 : 백일 기도 중에 은혜의 체험을 했다고 함.그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차려입고 예수그리스도와 비슷한 풍채라 고 하기도 함.예수 그리스도와 영 육간의 합일이 이루어져 자기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왔고, 자기 목소리는 예수의 목소리로 변했다고 했다. 그 가 가는 곳마다 그를 보고 모여드는 신자가 많았다. 심지어는 가정을 버리고 따 라 다니던 유부녀들도 있었다. 그가 서울역에 왔을 때에는 전국 교회가 떠들석 했다. 그는 삼각산에 가서 기도원을 차리고 그곳에서 몸가름, 피가름을 하였다. 황국주가 죽은 후 그의 피가름 교리가 통리교로 이어짐.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기독교도연맹의 박해 : 이북의 공산정권은 기독교도연맹을 앞세워 공 산당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기독교도연맹에 반 대한 박봉옥 전도사에게 전달된 지시문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재건운동 : 1945년 11월 평북 선천에서 열린 평북 목사수양대회에서 한국교회 재건원칙이 제시되었고 이로써 재건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6.25사변 : 6.25사변중 한국교회는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었다. 사진은 퇴각하던 공산군에 의해 학살된 우익인사들이 시체들이다.

포로선교 : 아군에 체포된 공산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피어스 박사(1952)

선명회합창단 : 전쟁고아들로 이루어진 선명회합창단은 음악을 통한 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수족절단자복구회 : 토레이 선교사에 의해 대전에 설립된 것으로 전쟁 후 지체부자유자에 대한 사회 선교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부활절연합예배 : 1953년 수복된 서울의 남산 옛 신궁터에서 초교파적 으로 부활절연합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남북통일기원예배 : 1955년 해방 10주년 기념 및 남북통일원 연합예배 에서 한경직 목사 통역으로 피어슨 박사가 설교하고 있다.

장로교 분열 : 1959년 예장 44회 총회는 NAE측과 에큐메니칼측으로 나 뉘고 말았다. 1. 해방과 교회 재건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그동안 많은 수난을 겪은 기독교인들은 남다 른 감격을느겼다. 후에 남, 북 분단의 아픔을 가져오기도 함.

(교회 재건 운동)

1)장로교교회 재건에 있어 선두를 달린 곳이 평양 중심의 관서지방이다.일제 탄압에 의해서 투옥된 교역자 중 50명이 순교함. 평양 감옥에서 20명이 출옥하고 그동안 지하에 숨어있던 자들이 나와 교회 재건에 힘쓴 곳도 평양이 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출옥성도들은 나오자마자 가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던 평양의 삼정현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고 교회 재건에 관한 협의를 함. 그리고 9월 20일 ' 교회 재건 5대 원칙'을 발표함. 1.)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 해 죄를 졌으니 통회 자복후 사역에 임할 것.

2) 권징을 자책하고 2개월 간 휴직할 것 등등... 그 후 11월 14일에 선천 월곡교회에서 평북 5개 노회의 교직자 연합수련회가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홍택기 목사 등 일제때 신사참배를 했던 많은 목사 들이 5대 원칙에 대해 반발하고 일어섰다. 그래서 출옥성도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교회안에 나기류가 생김.

 

같은 해 12월 초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북한 5개도 연합회를 조직하고 북한 교회와 남한 교회의 교류를 위해 북한 교회에서 이인식 목사와 김양선 목사를 서울에 파송함. 남한 교회에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 상도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일어남. 이곳은 주기철 목사님의 출생지이고 최상림, 손양원, 한상동,등 이들의 영향력 때문에 부산이 중심지가 됨. 부산 진교회에 서 회의를 소집하고 경남 재건노회를 조직함.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선출.

2) 감리교재건 감리교회부흥 감리교회 - 둘로 나뉨.감리교도 해방과 함께 9월 8일 남부 교단 대회가 소집됨. 이 대회에서 변홍규, 이규갑,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 목사들이 불법성을 지적하며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이 조직을 한 사람들이 일제 시대때 굴복하고 그들에게 동조했던 자 들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재건 감리회와 부흥감리화가 나옴. 이 두파들은 서로가 자기측 사람이 감독이 되길 원하고 서로 양보하지 못함.

일제 때 신사참배한 사람은 간부나 중요한 요직에서 제외시키고 두 회에서 동수로 선출하여 간부를 뽑는다. 투표가 끝난 후 결과는 부흥 감리회에서 절대적인 숫자가 나오서 이에 불만을 품은 재건 측은 문제를 제기 또다시 갈라짐. 이때 평신도들이 양 파의 협력을 원하여 노력한 결과 분열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가 되어 감리교의 기틀을 마련함. 그 후로 평신도의 발언권이 높아짐.

3) 성결교 해방전 성결교는 약 5만 성도가 있었다. 그런데 성결교 교리중 4중 복음이라는 것(성결, 신유, 중생, 재림)이 있는데 이 중 재림에 관한 문제 때문에 성결교가 문을 닫았었다. 해방과 함께 폐쇄되었던 성결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2. 북한에서의 교회의 참화해방되던해 11월 16일 , 북한의 많은 뜻 있는 기독교도들이 보다 더 좋은나라 를 건설하기 위해 기독교 민주당을 설립했는데 윤영하, 한경직 목사가 중심 인물이었다.

 

공산당은 이것을 미리 알고 기독교 민주당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 창당 대회에서 장로 1명을 살해했고 부근에 있는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에 충격 받은 신의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를 동원해 학생들을 저지해 많은 학생들이 수난을 당함.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 2년이 지 난 1947년 11월 북한 평양에서 김화시 목사와 고한규 장로가 있었는데, 이들 이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하려 했다.

 

그런데 역시 이들도 창당 대회 하는날 4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 투옥되거나 러시아로 유배됨. 1948년 북한에서도 공 산 국가를 위해서 주의를 기해 선거일을 정하고 투표를 하는데 모든 기독교인 들을 선거에 동원 시킴. 여기에 반길를 들고 북한 기독교도의 입장을 발표하였다.

1) 주일에는 어떠한 행사에도 불참한다.2) 기독교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3) 교회당은 예배 외의 어떠한 것에도 사용을 불허한다.이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구금된다. 마침내 50년 6.25사변 이 일어날 때 북한은 남침 준비를 끝내고 기독교인들을 먼저 검거해 투옥시켰다. 이 때 기독교인들을 찾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3. 민족 분열과 교회의 분열공산당에 대항해 투쟁하던 목사들 순교.6.25때 여순 반란사건시 두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 김익두, 남궁 혁, 송창근 목사,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납북됨.6.25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손실된 교회 수가 장로교 152개, 감리교 84개, 성결교 27개 구세군이 4개 교회였고 순교자도 많았다.

6.25때 서울은 북괴에 동조하는 교인들이 몇 있었다. 경동교회에 출석하는 김욱 이라는 자는 기독교 민주 동맹을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이 서울에 왔을 때 환영식을 함. 6.25가 나기전 기독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최근식 목사 는 교도소에서 나와 목사들을 고발 해 북괴군에 의해 끌려가도록 했다,

1950년 4월 경남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장로교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년 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비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 고려파가 고려파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감. 싸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같은 해 7월 서로 무서운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파는 그 당시 국회의원 22명의 명의로 비 고려파를 용공단체라고 비 난함.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짐. 조선신학교의 김재준목사의 신학이 신신학 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움.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수 없다고 해서 갈라짐.

1958년에 같은 예장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됨. 학교 부지 관계 때문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 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1977년 그 후 합동에서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짐 그후 사분오열의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김.

[한민족연합선교회] 신학자료

                                                                                                                                         http://blog.daum.net/sm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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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학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신학연구를 위한 보조학문

1) 세계사 : 특히 애굽, 바벨론, 앗수르, 희랍, 로마역사와 유럽의 중세, 현대사.

2) 고고학 : 비문, 고문서, 동전, 예술적 작품 등 수집된 자료를 통하여 성경의 배경 연구에 도움을 준다.

3) 인종학 : 인류를 민족과 국가로 구분하고 세계에 그들의 분포 상황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그 종족의 기원, 연관성, 정신적 도덕적 특성, 그리고 이런 특성들을 이루게 한 요인들을 알려준다.

4) 비교언어학 : 인류 언어의 자연적인 그룹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언어와 방언의 기원 및 관계를 찾아내고 또 인류 역사의 시작에까지 올라가, 현재는 분리되어 있는 종족들의 단일성과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진 명의 자료들을 찾아내는 학문으로서 성경의 배경 연구에 도움을 준다.

5) 비교종교학 : 모든 이방종교의 역사, 신앙, 원리, 제도, 실제적 특성들을 연구하고 비교하는 학문으로 이들이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게시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하여준다.

6) 철학 : 철학은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려는 학문으로서 인간의 모든 학문 가운데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철학은 고대, 중세, 현대의 모든 철학 학파들의 기원, 발전사와 그 원리, 방법, 주장 내용 등을 비교 연구하는 일을 포함한다. 이로 말미암아 철학과 신학은 그 공통적인 과제 (인생의 궁극적 질문)에 대하여 상호 어떤 영향을 끼쳐 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신학 연구에 도움을 준다.

7) 심리학 : 개인적 의식과 행동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 심리의 행동법칙을 밝히는 학문으로서 간의 종교활동을 설명하는데 관련을 갖는다.

8) 미학 : 음악, 수사, 건축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미의 법칙과 모든 예술의 원리 및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간의 종교 생활의 표현방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 외에도 물리학, 통계학 등이 신학에 도움을 준다.

9) 문화인류학 : 오늘날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문화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한다. 석기를 사용하는 문화에서부터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가족, 친족관계, 경제생활, 정치생활, 종교생활과 같은 여러 문화적 생활을 연구하여 해당 사회의 내적 규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2.성경신학

A. 구약학

1) 히브리어 : 구약성경을 원문으로 해독하기 위한 학문이다.

2) 모세오경 : 문서설과 그 밖의 비판적 학설을 평가하여 모세오경의 신비성과 저작권을 성경적 입장에서 밝힌다.

3) 구약사 : 구약의 창조시대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족장시대의 문화와 풍속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포로에서 귀국하는 시기까지에 걸쳐 개괄한다.

4) 구약서론 : 구약의 편집, 연대, 저자 및 배경과 사상등의 개론 문제를 취급한다.

각 사본과 고대 역본들과 외경에 관한 문제도 취급 비평한다.

5) 시서총론 : 히브리 백성의 시의 본질과 지혜문의 내용들을 취급한다.

그 범위는 시편, 욥기, 잠언, 전도서 및 아가서이다.

6) 대선지서 : 대선지서를 특히 성경신학적 면에서 연구한다.

7) 구약신학 : 구약신대의 하나님의 계시의 과정을 개괄하여 구약 내용의 신학적인 문제와

구약의 종교적 제도 등을 취급한다. 특별히 구약의 내용을 사상적, 신학적 체계 밑에서 파악하도록 한다.

8) 성서고고학 : 성경연구에 도움이 되는 고고학이 제공해 주는 자료들을 연구한다.

9) 소선지서 : 포로 전후의 여러 소선지서의 시대와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면서 그 내용과 사상을 주경학적으로 연구한다.

B. 신약학

1) 성경 해석학 : 성경해석의 원리를 연구한다.

2) 신약해석 : 신약의 각 책을 다루는 과정으로서 특별히 필요한 구절을 해석하며, 각 책들의 구조와 주된 테마를 정립한다.

3) 신약서론 : 신약의 배경, 정경론, 사본학 등 신약 각 저자 및 중요한 내용을 검토하면서 연구한다.

4) 헬라어 : 신약 성경을 원문으로 해독하기 위한 학문이다.

5) 신약신학 : 복음서를 중심으로 필요한 귀절을 해석함으로써 천국의 개념을 예수님의 사역과 연관시켜 구체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6) 복음서 : 예수님의 지상생애와 사역을 중심으로 복음서들의 증언과 복음서 비평의 역사적 발전을 다룬다.

7) 사도사 : 사도행전 기록과 내용에 대한 비평적인 연구에 대하여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정립하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초로 왕국과 성경과 복음전도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3.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교의신학)

1) 변증학 : 본 과목에서는 비기독교 철학 사상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유신론 신앙을 이론적으로 변호하는 방법론을 연구한다.

2) 험증학 : 본 과목에서는 비기독교적 과학사상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유신론의 신앙을 변호하는 방법론을 연구한다.

3) 조직신학 서론 : 신학의 본격적이며 조직적인 연구에 앞서서 그 서론적인 이해를 도모하고 교의연구의 기초를 제시하는 학문이다.

4) 신론 :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연구한다. 하나님의 존재에서는 하나님의 명칭, 속성,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고, 하나님의 사역에서는 작정, 창조, 섭리를 다루게 된다.

5) 인간론 : 인죄론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다루게 된다.

원시상태의 인간,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 은혜언약 안에 있는 인간으로 구분하여 연구한다.

6) 기독론 : 기독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되게 하시어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7) 교회론 : 교회론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단체인 교회 안의 종교 생활을 성령께서 지도하시는 사역을 다룬다.

8) 구원론 : 구원론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효과를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방법론은 다룬다.

9) 종말론 : 종말론은 개인 종말론과 일반 종말론으로 구분된다.

개인 종말론은 개인의 사망으로부터 부활 사이의 인간 상태를 다루며, 일반 종말론은 세상 종말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10) 현대신학 : 현대신학 사조를 연구한다.

11) 기독교 윤리 : 본 과목에서는 기독교 윤리사상에 대하여 연구한다.

개인 윤리에서는 기독교인의 품격 조성 문제와 시험, 고난, 행복 및 신앙과 덕행문제 등을 연구하고, 사회윤리에서는 기독교인과 가정, 직장, 국가 등의 문제를 다룬다.


4. 역사신학

1) 초대교회사 : 기독교의 발생, 교회와 로마 정부와의 관계, 변증가들과 교부들의 신학사상에 비추어진 초대교회의 당면문제들, 교회의 예배와 생활, 이단운동, 신학파들의 비교연구 등이 다루어진다.

2) 중세교회사 : 그레고리 대제로부터 보니페니스 8세에 이르기까지의 교황청과 세속권과의 관계, 중세초기의 선교운동, 수도원의 발생 및 발전, 십자군운동, 스콜라신학, 신비주의와 경건주의의 전말을 연구한다.

3) 종교개혁사 :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루터의 종교개혁, 쯔윙글리와 재세례파, 칼빈의 개혁운동과 그 특징, 영국의 종교개혁,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 등을 연구한다.

4) 근세교회사 : 로마 교회의 반동 종교개혁, 경건주의 운동과 영국의 감리교 부흥운동, 자연신교 운동과 계몽주의 운동 등을 연구한다.

5) 현대교회사 : 18,19세기의 독일신학, 미국의 청교도 운동, 부흥운동과 선교운동,

미국의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운동 등을 연구한다.

6) 교리사 : 기독논쟁, 삼위일체론, 교회론 등의 교리적 발전 과정을 연구한다.

5. 실천신학

1) 목회학 : 일반 목회에 관한 모든 내용을 연구한다.

2) 설교학 : 설교의 정의, 분류, 준비, 작성 등을 연구한다.

3) 기독교 교육학 : 기초 목회학으로서의 기독교 교육원천을 규명하면서 역사적 과정, 방법론, 목회자의 교육 지도 원리와 실제를 연구한다.

4) 설교실습 : 설교의 실제적인 면을 연구하며 직접 연습케 한다.

5) 교회정치학 : 교회행정의 필요성과 행정의 원리와방법, 그리고 실제를 담당한 목사의 임무, 당회와 제직화의 조직, 직무, 교육, 예배, 재정, 기타 처리를 위한 것을 연구한다.

6) 예배모범 : 예배의 역사적 고찰과 예배의 의의와 방법, 그리고 예배순서 등의 이론과 실제를 연구한다.

7) 전도학 : 전도의 이론과 실제를 연구한다.

8) 선교학 : 선교학의 정의와 학문적 위치, 선교의 성경적 개념, 선교 역사 고찰, 선교 신학의 동향에 대한 고찰과 비판을 한다.

9) 주교교육학 : 기독교교육의 한 분과로서 그 역사적 과정, 방법론 목회자와 주교교욱의 원리와 실제를 연구한다.

10) 목회상담 : 목회의 모든 문제를 심리학적인 면에서 다루고 그 실제를 연구한다.

11) 종교심리학 : 종교적 경험의 심리적 해석, 연령층 별로 나타나는 신앙적 문제 및 종교 생활에 관계되는 문제등을 심리학적으로 연구한다.

12) 교회성장학 : 교회의 성장사례, 원리등을 연구한다.

13) 청소년목회 : 현대 교회에서 문제가 되어있는 청소년들의 지도에 따르는 목회의 원리와 실제에 관하여 연구한다.

14) 가정교육학 : 가정은 기독교 교육의 원천인 고로 가정의 기독교적인 의미를 찾고 가정을 위한 주일학교 교육 행정과 직접적인 지도를 계획해보며 가정과 교회의 공동 사명인 기독교 교육의 효과적 양육을 연구한다.

15) 유아교육학 : 출생기로부터 학령기에 이르기까지의 어린이들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것을 연구한다.

16) 상담학 : 신앙과 생활의 제반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상담을 통하여 해결해 주는 방법을 연구한다.

17) 개인전도학 : 전도학의 한 분야로서 개인에 대한 전도 원리와 실제를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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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하나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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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율법과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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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벨리우스 

디아코니아(단어연구)

레드 예수의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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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3장 하나님나라

마가의 하나님나라 

막 2 13~17 (양식사)

말씀과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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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바울복음 전승

바울사도직 

바울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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