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ROSS(존 로스)/한국의 첫 선교사

2. 선교활동 초기(1872-1879) 2.

 

만주에 있는 교회 성장이 그의 주요한 임무였으나,로스목사는 윌리암슨 박사의 조선에 대한 관심사를 결코 잊지 않았다. 1877년에 만주 선교에 대해 개척하면서 동시에 조선에 대해 몇 가지 계획을 착수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두가지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그의 자녀를 양육할 사람이 필요했고, 다른 하나는 만주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동년 7월에 외국선교부에 있는 맥길박사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을 기르기 위해 그의 여동생 캐더린을 보내도록 요청했다. 1873년 12월 말 캐더린은 런던에서 글라마트니(Glamartney)호를 타고 중국으로 갔으나, 아직 만주에서는 그와 같이 선교활동을 할 동력자가 없었다.

이 기간에 로스목사가 에딘버러 선교회를 보낸 편지에서 그가 관용성과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76년 1월 그는 1873년 2월에 썼던 기사를 보냈는데, 그가 만주에 머무른지 첫 석달 안에 중국 새해 기념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1873년 7월 맥길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구에 있는 집을 지을 때 노동자들에 대한 표현에서 중국인에게 느꼈던 사랑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회고하면 그의 아내의 죽음으로 그는 선교방향을 바꿨고, 그의 모든 수단과 감정을 중국인을 위해 사용했따고 할 수 있었다.

1874년 로스목사는 태평산과 개주현에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을 살 때, 지방민들이 반발했고 그 주인은 구속됐다. 왜냐하면 지방장관은 외국인이 그 지방에 있는 천주교와 내통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개주현에서 그가 나타나면 분위기는 쉽게 흐려질 수 있었다. 태평산에 있었던 개신교 집단에 의해 운영될 때, 그것을 깨달았다.

로스목사는 천주교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의 편지에서 가끔 천주교회의 치외법권 사용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외국인이나 그들의 조력자들이 외국 정부나 중국 조정의 힘에 의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느끼기를,그렇게 하면 반서양 감정이 일어나 기독교의 발전은 어렵게 될 것이라 했다. 천주교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이런 점에서는 개신교 선교사도 비판했다.

1874년 봄과 여름 모교회로 보낸 편지에서 그는 중국인 기독교인의 선교책임을 나타냈다. 대부분의 설교는 그가 훈련시킨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고,로스목사는 필요시 그가 설립했던 곳을 순회설교했으며 학습과 세례를 베풀었다. 로스목사는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고, 6개월이나 그 이상된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는데, 그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파악할 때까지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같은 해 여름 아일랜드 선교사와 만주지역을 나누었는데, 아일랜드 선교사는 서쪽을,스코틀랜드 선교사는 북쪽과 동쪽을 맡았다. 이 계약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로스목사는 두 교단이 중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모든 교단의 갈등을 없애도록 하고 싶었고,특히 헌터박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재 로스목사는 일찌기 스코틀랜드 설교의 중심지는 영구시이어서는 안되고, 만주의 수도이고 청나라의 둘째 큰 소시인 봉천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 로스목사는 그때 한국선교를 위해 많은 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었기 때문에,스코틀랜드 교회는 동만주에서 선교할 수 있고 조선 국경선에 전도자를 보낼 수 있다고 했을 것 같다.

같은 해 10월 9일 로스목사는 영구를 떠나 순회전도를 나섰고, 첫 번째로 고려문(Corean Gate)을 방문했다. 그 기록을 그해 11월,12월에 나오는 격월지 '중국기록과 선교보고(Chinese Recorder and Missionary Journal)'에 썼고,1875년 5월 '연합장로선교보고(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에 간추려서 기고했다. 왕복여행은 약 3주일 걸렸고, 로스목사가 고려문으로 간 길은 조선의 사신이 북경으로 가는 길과는 방향이 달랐다. 10월 9일에 영구로 떠나 첫날밤은 대석교(도시이름)에서 보냈는데, 거기 있는 여관은 북중국에 있는 여관 중 가장 좋다고 했다. 대석교를 떠나 동쪽으로 여행을 하면서 천산(千山)의 산맥을 지났는데, 무수한 산맥들이 북 스코틀랜드의 산맥들처럼 생각이 들었다. 로스목사와 그의 동행인은 양하를 12번이나 건넜다.그의 보고서에서 로스목사는 그 지방의 식물과 동물 및 지리를 살펴 보았고, 또한 그 지방의 풍속도 살펴서 기록했다. 대석교를 떠나 그들이 처음 도착한 큰 도시는 수암주이었고, 거기에서 북동쪽으로 가면서 봉황성으로 곧장 가는 길이 아니었으나,로스목사와 그의 동행인은 그 도시로 갔다.

그는 6일간 세관이 개방되기를 기다리면서 그 지방의 상업과 산업을 시찰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곳 상품의 대부분은 다른 지방으로 수출되도록 대고산의 항구로 보내졌다. 그는 또한 봉황성에서 조선산배를 샀는데, 그것을 제일 맛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서도 설교했고 한문성경을 팔았다. 그가 수암주와 봉황성에서 보낸 보고서에서 그 두 곳에 이슬람교인들이 있었다고 적었다.

고려문이란 마을은 청과 조선사이에 있는 세관이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고,그것은 봉황성에서 떨어진 봉황산이라는 산맥 옆에 있었는데, 그 언덕에는 도가의 수사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세관은 일년에 4번씩 열렸다. 음력 3월에 시작해서 3,4개월간 열렸고,음력 8월에 3주간,음력 9월에 약 6주간,마지막으로 섣달에 한달간 열렸다. 로스목사의 말에 따르면 3.9월에 여는 장은 가장 중요했고,그때엔 봉황성의 지방장관이 직접 열었다. 로스목사의 첫 방문은 음력 9월이었는데 그 때는 그 문이 잠겼고,그가 조선 상인들을 만날려고 했으나 한꺼번에 몰려 올 때가 아니라서 실망했다.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 섭섭하게 영구로 돌아왔다. 고려문에 처음 올 때 그는 거기에 왔던 조선 상인 등과 접촉해서 대화할 수 있었으나, 새로운 소식을 전한다거나 성경을 팔 수가 없었다. 그는 여기에 비해 말하기를, 그들이 이런 외국책을 가졌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했고, 바로 몇년 전 조선에 있는 천주굥니들이 가장 극심한 박해를 당했고, 서양인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했다고 했다.

영구로 돌아 오자마자 로스목사는 중국기록과 선교보고에 고려문 심방('Visit to the Corean Gate')이란 글을 썼다.

그것을 쓰고 난 직후 영구 서쪽 650킬로미터에 있는 북경으로 떠났다. 이 여행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더 이상 알 수 없고 단지 추정할 수 있다. 두가지의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북경에 있는 유명한 W.A.P.Martin(마틴박사)가 있었고, 로스목사와 마틴의 선교 방법과 중국인을 이해하는 방법이 비슷한 점이 있었다. 로스목사가 거기로 가서 만주에 있는 그의 활동에 대해 얘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로스목사가 조선어를 배울 계획을 세웠고, 신약성서를 그것으로 번역해서 출판하도록 도움을 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후 새해가 되기 전에 영구로 돌아 온 것 같다.

1875년 로스목사가 쓴 기록 등이 많지 않으나,만주의 수도원 봉천에 몇개의 전도관을 설립하려고 무척 노력한 것 같다. 그것을 위해 다섯번씩이나 봉천으로 갔으나 일이 잘 안되었다. 1875년 말 그는 에딘버러에 있는 선교회에 그 장소를 설립하고 왕 징밍,탕 운환 두 전도사를 선택했다고 했다. 그는 또한 영국 주위에서 한 것 같이 대석교에서는 장소를 설립했으나, 해성과 요양에서는 설립하지 않았다고 했다. 같은 해 언제 지부로 배를 타고 갔고, 그 이유는 모르지만 존 맥킨타이어를 만주에 오도록 부탁한 것 같다. 1875년 말기 로스목사가 만주에 온지 3년만에 그는 첫 선교 통역자를 만났다.

존 맥킨타이어는 만주로 갈 때 로스목사보다 네 살 위였으나 아직 총각이었다. 그는 1837년 7월 18일에 스코틀랜드의 록크 로먼드(Loch Lomond)에 있는 러쓰(Luss) 에서 출생해서, 페이즐리(Paisley)에서 교육을 받았고, 독일의 하이델베르그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에딘버러에 있는 연합 장로교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865년에 안수를 받고 베일리스턴(Baillieston)교회에서 목사 취임을 했다. 1871년 중국에 갈때까지 그곳에서 목회했고 일년 후 갔다. 로스목사가 부르기 전에 지부 서쪽 200킬로미터에 있는 유현에서 목회했다. 맥킨타이어가 영구로 옮길 때 로스목사는 미리 만주에서 큰 선교 활동계획을 가지고 있은 듯하다. 1876년 초에 맥킨타이어는 로스목사의 여동생 캐더린과 결혼했다.그녀는 로스목사의 아들 드러몬드를 기르고 중국 여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는 선교활동을 빨리 계획해서,한 사람이 6주간 영구에 있으면 다른 사람은 6주간 순회전도를 했다.

1876년 4월말과 5월 초에 고려문으로 두 번째 여행을 했다. 이번에는 준비를 미리 잘 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비용은 영국 리즈(Leeds)시에 있는 로버트 아팅톤(Robert Arthington,1823-1900)이 대었다. 그는 유명한 자선사업가였다. 로스목사는 세관으로 갈 때는 2년 전과 같은 길로 갔으나,세관을 지나 압록강과 북쪽 국경 사이에 있는 무인지경까지 갔고, 애하와 압록강의 합류점까지 갔다. 거기에 있는 모래밭과 더 비옥한 곳에 잇는 농장에서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로스목사는 한권으로 된 전도지와 성경을 출판할려고 했고 ,나중에 반도로 들어 오는 방법을 찾을려고 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로스목사는 의주시를 볼 수 잇어서 압록강변을 따라 구경하도록 뱃사공을 부르려 했으나, 조선의 변방 군인들이 두려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스목사가 조선 국경으로 간 두번째 이유는,조선어 선생을 찾고 또 신약성서를 조선어로 번역하도록 그를 도울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로스목사는 동역자에게 성경을 번역할 수 있을 만한 지식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한약장수였고 그는 압록강을 건널 때 모든 물건을 잃어버렸다. 이 응찬은 동력자에게 관심을 나타냈으나,로스목사와 일주일 있은 뒤에 로스목사의 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도 봉황성을 떠날 때 그는 로스목사에게 은밀히 얘기했다. 외국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해서 이 응찬의 동생조차도 그가 로스목사의 교사가 된다는 것을 몰랐다. 로스목사가 떠나기 전 이응찬은 하루 먼저 떠났고, 봉천으로 가서 다시 만났다. 봉황성에서 돌아 올 때 천산을 거쳐서 다른 길로 갔다. 관전과 환인을 지나 청나라 황제 조상의 능이 있는 흥경에 갔다. 거리서 그들은 봉천으로 가기 전 며칠 머물렀다. 고려문을 방문한 세번째 이유는 압록강으로 가는 봉천의 동쪽에 있는 지방을 탐색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1876년 9월 로스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매달 해성으로 순회전도를 나갔고, 그 해성은 봉천으로 가는 도중에 정류장 하나가 되었다. 또한 동시에 봉천에 거류전도사가 있는데,그것은 만주선교 전략의 중심이 되었다. 이와 같은 양인이 바램으로 기독교 교리가 북중국에 전파될 수 있었다. 1876년 말 로스 목사는 그의 첫 저서를 내었는데, 그것은 '맨드린 프라이머'(Mandarin Primer')라는 선교사들을 위한 중국어 교본이었다. 그해 11월 중순 로스목사는 북경으로 두번째 여행을 떠났는데,가는 도중 며칠간 금주에서 머물었다. 로스목사가 무슨 이유를 갔는지 우리는 모르나,아마 조선어로 신약을 번역하고 인쇄하기 위해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한 듯하다.

1876년 썼고, 1877년 3월 연합 장로교 선교보고에 썼던 기사에서 그는 자기의 선교방법에 대해 말하긴 "내가 중국으로 갈때 그들의 가치관을 알기 위해서였고, 그것을 그들의 귓전에 깨우치기 위함이었다"했다.

이 적극적인 중국인 편으로의 접근은 그가 그리스도를 전하기 전 공자에 대해 얘기한 듯하다. 중국이들은 불교나 도교는 비판하겠으나, 유교는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로스목사는 기독교를 설명하기 이해 사서 삼경을 공부하고 많은 문장들을 암기했다. 동년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으나 기독교에 대해 가르쳤다. 이 사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사람들은 잘 받아 들였다. 그 전 해에 비해 불신이 현저히 줄어 들었다.

1877년의 선교보고에서 특히 재미 있는 것은 그의 활동방법이다. 로스목사는 두가지 특성을 가졌는데, 비판하는 사람을 다룰 때 그의 풍부한 관용과 중국문화와 풍습에 대한 지식이었다. 1876-1877년 젊은 학자들 몇 집단이 그를 추방할려고 노력했다. 원망을 많이 들었으나 참았으므로 나중에 여러 학자들은 그의 설교를 잘 수긍했다. 동시에 봉천에서 처음 전도할 때 용왕사에 살았다. 그때 다른 곳에 머무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관용성 있는 수용성은 영국 본부에서 알았더라면 놀랐을 것이다.

동시에 이 응찬 밑에서 조선말을 배웠음이 틀림없다. 그의 두번째 저술인 '조선어 교재'('Corean Primer')는 1877년에 발행됐다. 그 책의 서론을 보면,맨드린 프라이머에 기초해 있는 조선어 문법공부였다. 불란서 드로조니(de Rosny)에 의해 '조선어에 관하여'('Apercu de la Langue Corene')가 쓰여졌는데, 'Corean Primer'는 첫째 영어로 쓰여졌고 조선어 문법을 설명했으며,조선어로서 예문 문장을 들도록 모두 서양어로 썼다. 이 책의 특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한글을 완전히 쓰고 그 사용언어는 표준어가 아니라 북쪽 사투리였다. 이것은 의주 출신 이응찬의 영향을 나타낸다.

1878년 로스목사는 봉천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맥킨타이어목사는 영구를 담임했다. 로스목사의 주소는 봉천 북쪽의 교외였고, 여름엔 쉬기 위해 영구로 갔다. 이때 조선어 성경번역을 계속했었는데 여기에 대해선 제3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겠다. 그때 로수목사는 안식년에 대해 생각했고,선교회 본부로 편지를 써서 중국교인이 영국을 시찰토록 교통비를 신청했다. 이 신자는 아마 로스 목사가 신임한 왕 징밍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허락지 않았다.

로스목사는 1878년 보고서에서 보면,봉천에 있는 천주교 신부와 다툼이 있었다. 그들은 (신부는) 치외법권을 이용해서 돈을 갈취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은 기독교인을 비판했으니 이런 일이 없도록 막았다. 또한 그의 비세례 신자는 경제적인 획득을 꾀했으므로 추방했다. 로스목사는 천주교도 비판했으나, 천주교 신부들이 일부러 중국법을 파기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1879년 2월,1878년 보고서로 보냈고, 1879년 5월 9일,7년만에 처음 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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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ROSS(존 로스)/한국의 첫 선교사

 

3. 첫번째 안식년(1879-1881)

 

1879년 안식년 로스목사는 이 기간 중에 펴 냈던 두 책의 원고와 4복음서,사도행전로마서의 첫 번역원고를 가지고 갔다. 그 이전 선교부로 보낸 편지엔 이와같은 성서번역에 관해 언급이 없었으므로,언제 어떻게 그가 이런 사업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로스목사의 조선어 교사가 이응찬이었으나,김양선과 다른 교인들을 만났던 것은 1874년이 아니라 1876년이었을 것이다. 김양선은 이응찬과 의주에서 온 다른 세사람이 로스목사에게 가서 조선어 선생이 됐고,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믿고 있다. 5월 중순 로스목사는 두번째 고려문 방문이 있었으므로,그해 말이 되기 전에 주로 그의 친구들에게 연락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의 첫 세례는 1876년쯤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응찬은 맥킨타이어목사에게서,나머지 사람들은 로스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이들은 이성하, 김진기와 백봉춘이다.

 

김양선의 생각에 성경번역은 1875년에 시작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로스목사가 이응찬을 1874년에 만났으며,1년 후에 성경번역이 시작됐으니 1875년이었을 것이다고 했다. 그런데 자료에 따르면 로스목사가 이응찬을 1876년에 만났으니 성경번역은 1877년에 나왔으니,성경번역은 조선어 공부가 끝날 때 시작됐다고 볼 수 있으므로 1877년에 시작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서상윤이 로스목사의 첫조선어 교사였었다고 하나, 김 양선은 서상윤과 그의 동생 서 경조가 1878년 로스목사를 만났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서상윤은 1879년 세례를 받았다. 아마 이런일은 성경번역 후 2년 지난 다음 있었는 듯하다. 성경번역 시작은 두말할 것 없이 여러 사람이 했던 것이 분명하다.

 

번역할 때 어떤 방법이 있었는가? 번역은 네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두번,세번,네번째 번역은 근거로 증명될 만한 것이 있으나, 첫번째의 기록은 없다. 1880년 말 맥킨타이어목사는 선교본부에 편지하기를 첫 원고는 1878-1879년에 시작됐고,두번째 원고는 로스목사가 안식년으로 간 후 시작했다. 한문을 사용해서 로스,목사와 사람들은 번역을 시작했다. 1880년 말 맥킨타이어목사는 새로 성경번역을 시작했고 헬라어 성경을 사용했다. 에딘버러 본부에 편지를 보낼 때,맥킨타이어목사는 마태복음사도행전을 끝냈고 누가복음을 시작했다. 매일 맥킨타이어목사와 두 사람은 3시간 내지 4시간을 일했다. 이때 세번째 번역했고, 맥킨타이어목사는 세번째 역자에게 1881년 봄까지 번역의 [천로역정]을 완성하도록 부탁했다. 매일 아침 7시에서 9시까지 맥킨타이어목사는 소장역자를 불러서 번역했고,저녁엔 소장역자에게 가서 그의 번역을 수정했는데,처음에는 중국성경을 보고 번역했고, 그 다음에 헬라어 성경으로 수정했다. 1880년 맥킨타이어 목사의 보고서에서 마태복음은 네번 번역했는데, 이것은 그것을 대단히 자세히 번역했다고 했다.

 

그때 로스목사는 조선에 성서번역에 대한 비용을 여러 단체들에게 부탁했다. 맨처음 스코틀랜드 성서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880년 영국 및 해외 성서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의 주필인 라잇(Wright)박사와 얘기했는데, 그는 번역을 위해 첫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1881년 2월 여러 후원자들에게 인쇄와 출판의 도움을 부탁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성서회가 지원할 수 있었으나,그때 영국의 극심한 불경기로 활자를 위해 130파운드만 제공할 수 있었다. 자선사업가 로버트 아링톤은 1876년 종이와 누가복음,요한복음의 3,000권의 인쇄비용을 돕겠다고 했고,그는 1876년 두번째 고려문을 방문하도록 도왔다. 글라스고우와 던디(Dundee)는 무명의 자선사업가들고,맥킨타이어 목사를 선택해서 5년 동안 첫 조선 선교사의 봉급을 지불하는데 동의했다. 여러 다른 후원자 중 재미 있었던 것은 엘진에 있는 국민학교부와, 랜즈타운(Lansdowne)에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 1파운드 15실링과 10실링을 각각 주었다.

 

조선 내의 번역에 관한 소식이 멀리 전해졌다. 로스목사가 없을 때 맥킨타이어목사가 부쳤던 보고서에서 방문하고 싶은 사람, 기독교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 한문성경을 읽고 세례를 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1879년 여름 그의 조선어 교사와 해성에서 예배를 볼 때, 제 나라 국민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왔다. 1979년 말 "이번 여름에 11명의 한국인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1876년에 로스목사가 압록강가에서 조선어 성경을 나누어 주었기에 이 사람들은 모두 영구로 가서 영국선교사를 찾았다. 그해 여름 첫 성경 번역을 몇 달 도왔던 사람이 로스목사와 영국으로 같이 갈려고 영구로 왔다. 같은 해 맥킨타이어목사는 로스목사에게 조선인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전했다. 1880년에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조선인들이 많아졌다. 이 사람들은 5-6명씩 떼를 지어 선교사 집으로 와서 며칠간이나, 일 주일간 성경교육을 받았다. 1880년에는 조선인 30여명이 같은 방법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때 영구로 들어 오는 조선상인들이 많았을 시기인데, 맥킨타이어 목사가 말하길 "거의 한달에 한번씩 조선인 성경반을 가르쳤는데,그것을 광고한다면 더 많이 올 것이다"고 했다.

그의 아들 리드몬드와 영국에 도착할 때 로스목사의 가장 급선무는 1879년 6월 21일에 에디너러에 있는 연합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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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ROSS(존 로스)/한국의 첫 선교사

 

3. 첫번째 안식년(1879-1881) 2.

 

그때 중국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강하게 건의하면서 "중국은 미래 아시아 선교의 발판이요, 세계선교를 위해서는 중국선교가 중시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중국선교의 전략적 중요성과 문화수준을 높이 평가해서 주장하기를 "평범하거나 국내에서 그 이하 수준의 선교사 파송은 무의미한 것"이라 했다. 이것은 곧 중국파송 선교사는 최고 수준의 실력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로스목사는 동북 중국과 조선의 선교 중심지로서 만주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해 7월 로스목사는 페이즐리(Paisley)에서 살았다. 그곳은 존.맥킨타이어 부모의 고향일 뿐 아니라, 로스목사의 동생인 도널드가 1878년 이래 개업했던 글래스고우와 가까운 곳이었다. 같은 달에 도널드가 선교할려고 선교부에 신청했으나 그 뜻이 성취되지 못하였음을 알았다. 또한 페이즐기는 로스목사가 그의 출판사인 제이 앤드 알 파래인(J.and R.Parlane)이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중요시된다. 1879년 말 그 출판사는 로스목사의 첫번째 큰 책을 만들었다. 페이즐리에 있을 때 로스목사는 그들과 이 책의 출판에 대해 얘기하고, 그때 원고를 주었음이 틀림없다. 이 책은 동양학 연구의 이정표였는데, 그 제목은 '조선의 고대 근대사'('History of Corea,Ancient and Modern')였다.

이것은 그의 세번째 작품이나 초기 저술 중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이 책의 영어판은 처음 어떤 서양어로서 출판됐는데,조선사(史)에 대해서는 최초의 저술이었다. 물론 드 할드(de Halde)신부의 청제국에 대한 기록 ('Description...de la Chine et la Tartarie Chinoise'[1735])에서 조선에 대해 한 단원을 썼으나, 그것은 내용이나 분량면에서 로스목사의 그것과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스목사의 기술 중에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는 한국 역사를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조손에 대한 자료가 없었으므로 중국역사 자료를 사용해야 했다.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조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로스목사를 거쳐야 됐을 것이다.

1880년 5월 로스목사는 에디너러의 시너드(Synod)4)에 참석해서 중국 선교의 최근 현황을 얘기했다. 그가 조선 고대 근대사를 쓰고 난 후부터 시너드에 참석하는 중간에 각 교회에서 설교 현황을 발표할 기회가 없어서,조선 고대 근대사의 속간인 '만주족:중국의 현대 왕조'('The Manchus,or the Reigning Dynasty of China')글 쓰기에 몰두했다. 시너드가 끝난 뒤 이것은 제이 앤드 앞 파레인 출판사에서 나왔고,9월에 런던에 더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잡지는 이를 칭찬했다. 이것이 중국과 중국인의 가능성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보였기 때문에 로스목사를 중국에 대한 열광자로 표현했는데 그가 중국인에 대해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나왔던 책고 마찬가지로 이것은 그 기언과 자료를 사용하는데 생생한 필체로 썼다고 칭찬받았다. 이 출판은 동아시아와 연구에 훌륭한 학자로서 로스목사의 명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로스목사는 저술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첫 안식년에 그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 또한 영어로 동양역사에 관한 책 등 두 권을 썼고, 연합 장로교인을 위해 중국에 대한 소개의 글도 썼다. 1880년 11월 연합장로교 선교보고에,중국의 지리와 인구에 대해 '中國의 廣大'('The Extent of China')라는 제목을 붙여 썼다. 1881년 1월 같은 잡지에 '중국의 민족'('China's People')이라는 제목을 붙여 그들의 그년성을 찬양했다. 3월과 5월호에 '중국인의 교육'('Chinese Education')이란 제목 하에 중국인 교육제도와 한문과거시험에 대해 설명했다.

1881년 2월 24일 로스목사는 재혼했고,두번째 그의 아내 이사벨라스트랩 맥패디언(Isabella Strapp McFadyen)은 그의 여생의 반려자로 그에게서 8명의 아이들이 출생했으나 그중 넷만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난 장자 드러몬드는 4월 중순 영국을 떠나 5월 25일 영구에 도착했다. 이때가 그의 저술의 전성기였다. 39세에 로스목사의 사역은 영광스러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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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ROSS(존 로스)/한국의 첫 선교사

4.교회의 건설(1881-1888)


로스목사의 첫 선교 기간의 특징은 그의 문학의 성취이며 ,둘째는 교회의 사회내 정착이었다. 특히 로스목사는 만주의 주요 도시에 새로운 선교사를 보내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염려했기 때문에,1881년 6월 선교회 총무는 봉천에 있는 그에게 목사 한 사람과 의사 한 사람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그 교회는 제나나(Zenana)라는 여선교회를 설립하여, 같은 해 9월 14일에 한 사람을 중국에 보냈고, 상해에 10월 31일에 도달했다. 바바라 프리티(Barbara Pritty)라는 여선교사는 11월 13일 영구에 도착되었으나 겨울을 지나서 봉천으로 가게 되었다. 그해 겨울 로스목사는 영구에 머무르면서 왕 징밍(Wang Jing-Ming)및 중국 전도사가 감독하고 있는 봉천교회를 살폈다.

 

1881년 보고서를 보면 중국에 도착한 다음 로스목사는 신약성경 번역을 강조했고, 그해 말 누가복음의 출판됐으며 1,000권을 일본에 있는 스코틀랜드 성서회 앞으로 보냈는데, 그 사람들은 조선으로 가지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로스목사는 누가복음은 거의 전부 맥킨타이어목사가 한 일이라고 말했고, 보고서를 붙일 때 요한복음서는 거의 출판되었다고 전했다. 이 복음서들은 출판할 때 이 두선교사가 고백서와 스코틀랜드교회 소문답서(The Scottish Shorter Catechism)를 같이 인쇄했는데, 이 전도지는 누가복음의 입문과 같은 것이다.

로스목사의 1881년 편지를 보면, 그가 번역한 방법을 알 수 있다. 먼저 과거를 치뤘던 조선인이 중국 文理신약5) 번역으로부터 조선어로 옮기고,다음에 로스목사가 각 문장을 헬라어로 번역하고 비교했다. 비교하면서 항상 조서인과 같이 번역했고,문제가 생길 때는 토론했다. 교정한 후 로스목사는 "그 번역한 것이 천연두 환자의 얼굴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후 그 개정, 번역을 백지에 다시 쓰고,그 다음 헬라어 용어 색인과 비교했다. 그 까닭은 될 수 있으면 조선의 단어가 같은 헬라어 단어로 번역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신약 성경은 다시 헬라어 신약과 비교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항상 통역하는 조선인의 노력을 인정하고 감사했다.

 

1881년 11월이나 12월에 로스목사에게 비극이 닥쳤다. 그의 두번째 부인이 낳은 첫 아들인 휴(Hugh)가 죽었다는데, 그 이름은 자기의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1882년의 기록은 거의 없으나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로스목사는 늘 조선어 신약성번역의 완성을 위해 걱정하고 있었다. 신약번역에 많은 시간을 썼기 때문에 1881년도 선교사업 보고서를 늦게 부쳤다. 이로 인해 에딘버러(Edinburgh)를 본부로부터 심한 징계를 받았고, 전도여행을 더 열심히 하고 중요한 보고서는 제시간에 부치며, 성경번역 사업을 강조하지 말라고 꾸중했으며,1882년 로스목사는 선교본부로부터 이런 편지를 가끔 받았으므로 언짢아 한 것 같다. 1882년 말 본부에 편지를 쓴 때에 본부가 자기 사업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했다.

그해 여러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그중에 조선인 인쇄자 김 청송은 세례를 받았고, 로스목사는 그를 고향인 간도지역에 성서 판매원으로 보냈다. 1882년에도 맥킨타이어는 에딘버러에 연락할 때에 '白(Pae)'이라는 조선인 저도자가 한반도에 전도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했다. 백자는 한국어 발음으로 '백'이 되나 중국어로는 '배'가 되니까 그 사람은 아마 백홍준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년 만주교회에서 세사람의 집사가 안수를 받았다. 로스목사를 조선으로 가는 선교사를 위해 '조선어문법 및 어휘'('Korean Speech with Grammar & Vocabulary')라는 조선어 교재를 썼다. 그해 10월 26일에 새 선교사인 제임스 웹스터(James Webster)목사와 듀걸드 크리스티(Dugald Christie)의사가 왔고,로스목사 부부와 프리디 선교사는 영구의 부드에서 그를 만났다. 이 사람들은 며칠간 쉰 후,로스목사가 만주와 광활한 선교지역을 구경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며칠 순회전도를 했고, 이듬해에 크리스티 의사가 로스목사와 함께 봉천에서 일하게 되었으며,웹스터목사는 영구에서 일을 했다. 이 두 선교사가 왔으나 매킨타이어목사가 1882년 3월,11년만의 안식년을 맞아 영구에 왔으므로 만주 선교회는 힘이 조금 약해졌다.

1883년 주일본 스코틀랜드 성서회를 통해 신약이 한반도로 분배되었고, 성서회 대표자 長坂(나가사가)와 和田(와다)씨를 조선으로 보냈다. 그해 봉천에서는 37명이 세례를 받았고, 그중에 5명은 조선인이었다. 그 사람들은 한반도로 들어온 성경을 통해서 처음 기독교에 대해 듣고 봉천으로 가서 세례를 받을 계획을 세웠다. 같은 때 선교회 본부는 처음 지부에 있는 사업을 폐쇄하고 만주에 있는 사업을 강화할 생각이 있었다. 그 전해에 그와 본부 사이에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으나,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로스목사의 사역에 성공과 발전을 나타낸 것 같다.

 

중국기록과 선교보고에 '조선어 신약'('Corean New Testament')이라는 기사를 썼는데,거시서 신약번역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이 기사가 중국에 있는 선교사에게 로스목사의 명성과 한국 신약성서 번역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로스목사가 신약을 번역할 때에 현재 교회가 사용하는 하나님,성령,천사 등의 용어 선택이 제일 어려웠다고 했는데,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용어를 로스목사가 택하고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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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교회의 건설(1881-1888) 2.

 

1884년 보고서에 만주의 교회가 계속해서 커지고, 조선어 신약의 출판과 배포가 잘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직 신약은 한권으로 묶여진 것이아니라 각 복음서가 따로 따로 배포되고 있었다. 누가와 요한복음서는 각각 3,000여권씩 출판하였으나 1884년 초에 다 나누어졌으므로 ,같은 해에 누가복음사도행전을 출판하고 같이 5,000여권씩 제본했다. 1884년 말 요한복음서 5,000여권과,마태복음서 5,000권을 출판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동시에 마가복음서와 로아서,고린도 전.후서가 인쇄 중이고,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의 번역을 다시 교정하고 있으며,여러 소론들을 한반도로 보냈다고전했다.

1884년도 만주 교회는 계속 성장했고 6월까지 34명이 세례를 받았다. 또한 중국인 전도자 2명은 요앙에서 일하고 있었고, 봉천에 3개의 예배당이 설립되었는데 그것을 모두 중국인이 감독했다. 철령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봉천 북쪽에 교회가 설립되었다.같은 해 영국 및 외국성서회 대표자들은 각 지역에서 성경 보급이 동이 났다고 전했다. 재미 있었던 것 중에는 로스목사가 그 전 인쇄자인 김 청송의 간도지방 전도에 대해 전했고, 로스목사에게 통화 동쪽 지역에 머무르고 있는 조선 피난민들에게 성서를 많이 팔았고, 물건이 더 공급되면 더 팔 수 있다고 전했다. 그의 전도에서 갑신정변 피난자인 사람은 봉천으로 가서 세례를 부탁했다.

 

한 사람은 간도지방으로 다시 가서 전도를 시작했고, 또 한 사람은 로스목사가 신약번역의 최후 교정을 할 때에 도움을 주었다. 이때에 이 응찬씨는 죽었던 것 같다.

김 청송을 통해서 간도 전도가 잘 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으므로, 로스목사는 1884년 가을 초 웹스터목사를 그 지방으로 보냈는데, 아마 봉황성에 선교장소를 설립할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웹스터목사와 아일랜드 선교회 하먼(Harmon)목사와 함께 수암과 대고산으로 갔다가 봉황성과 고려문(Corean Gate)으로 갔다.거기에는 관전으로 해서 120리 북쪽에 있는 Corean Valleys(간도)라는 조선인 촌으로 갔다. 영구로 돌아 갈때는 봉황성과 해성을 통해서 갔다.

간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원했기 때문에,로스목사와 웹스터 목사 생각에는 그 지역에서 선교사 한 사람을 지명한 것 같다. 맥킨타이어목사의 1884년 선교보고서를 보면, 봉천 북쪽 및 동쪽지역의 교회 발전과 제일 희망적인 한국인 전도에대해 언급했다. 그의 생각에 봉황성에 임명되면 그가 배웠던 중국어와 조선어를 둘 다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또 만주 선교사는 조선인 전도에 대해 모두 열의를 가지고 있고, 미국과 구라파 선교회로부터 자기의 조선전도 계획에 대해 문의를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이 얘기를 보면 선교회 본부에 봉황성이나 통화 지역과 조선 북쪽의 전도를 탄원한 것 같으나,아마 본부는 산동반도의 선교를 폐지하려고 계획했으므로 맥킨타이어목사는 이런 새 선교계획을 요청했다.

1884년 12월 로스목사와 웹스터목사는 간도로 갔고,봉천을 떠나 왕릉이 있는 흥경을 거쳐 통화로 갔다. 그곳을 새로운 부라 하며 중국과 조선 사이에 있는 女軍 숙영지와 같은 곳이었다. 그 지역의 행정장관이 보냈던 군인 2명을 성 밖에서 만나서 성안으로 호위했다. 거기서 며칠간 머무른 후에 다시 동쪽으로 향했는데,눈이 많이 와서 그 우두머리는 행로에 대해 대단히 걱정했다. 또한 장관이 보냈던 군인을 로스 목사가 다시 통화로 돌려 보냈으므로,산적이나 노상강도에 대해서도 염려했다.

여행의 제일 험난한 산길인 요양 정상에 올라 갔다가,거기서 로스목사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로 사진을 찍은 후,중국인이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무사히 산을 내려와 첫 조선인 마을로 들어 갔다. 거기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성겨을 분배했으므로 이 지역의 전체가 기독교촌이 되어 있는 점이 참 놀라운 일이었다. 웹스터목사의 일기를 보면,마을이나 골짜기의 이름은 없고 그냥 첫째,둘째,셋째,넷째 골짜기라 임명했고,선교사들은 12월 5일부터 12일까지 이 지역에서 머물렀다. 거기서 로스목사는 7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시간이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고 말을 했다. 12월 13일에 떠났고,봉천에 19일 도착했고, 성탄 전야에 영구에 도착했다.

1884년도는 로스목사에게 불운이 닥쳤는데, 그때 여름 새로운 부인의 둘째 아들인 Findlay가 죽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간도의 순회전도가 연기되었으나,이런 슬픔은 첫 딸 마가렛 프리티(Margaret Pritty)의 출생으로 씻어졌는데,그것은 프리티 여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1885년 로스목사와 여러 선교사들은 만주의 선교장소를 늘일려고 노력했고, 선교 보고서를 보면 봉천 철령 연대의 전도에 대해 많이 전했다. 같은 해에 로스목사는 중국어 찬송가를 출판했으므로 선교 본부는 15파운드를 지불했고,간도의 조선인촌 학교를 위해 매년 10파운드를 보조했다. 1885년에 104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외에도 조선인 100명이 또 세례를 받았다. 자세한 내용이 없지만 보고서를 보면,로스목사나 다른 선교사를 통해 언제 조선인 촌으로 갔던 것 같다. 로스목사는 제일 중요한 조수인 왕 징민씨가 죽었으므로 아주 슬퍼했다.

1886년 보고서에서 로스목사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과 세례자 수가 많아지는 것을 강조했다.이것은 자기의 노력이 중국인 전도자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 했고, 그가 만주에 온 다음에 600명이 세례를 받았고, 이 중 12명만 로스목사의 전도 때문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중국인 전도자를 통해서만 교회가 발전될 수 있겠다고 했고, 이 결과는 그 생각을 확신케 했다. 1882년부터 로스목사는 선교회 본부와 중국인 전도자 문제에 대해 다루었다. 에딘버러에 있는 본부는 모든 전도자와 대표자를 임명하고 싶었으나, 로스목사의 생각은 환경을 잘 이해하는 선교사들이 직접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1886년 로스목사가 본부에 대해

"신앙심 깊고 지식 있는 토착 전도자를 이용하는 선교회는 발전이 있고,그것이 없는 선교회는 발전이 없다."는 말을 강조했다.

시간장 간도와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 가서 그 두 곳의 개종자들과 만나 학습문답을 할 수 없는 것이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했다. 서울에서 일하는 전도자가 로스목사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아직 새로 온 미국선교사에게 연락을 못해, 로스목사를 그들의 지도자로서 생각했었으므로,로스목사 밑에서 세례를 받고 싶다는 내용을 전했다. 그해 대원군의 동료가 북경으로 갈 때에 봉천에 머무르면서,성서를 번역하는 조선인에게 대원군이 조선은 3년 내에 완전한 기독교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했다.

이것은 지나칠지 모르나 로스목사의 선교방법을 아주 칭찬했다고 생각된다. 1886년 말 조선어로 된 신약번역의 최후 교정이 완성되어서 신약 전체를 배푸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 번역을 이용,중국어 성경은 지성적 文理번역으로부터 현대어로 표현된 성경으로 번역하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로스목사의 본부와의 서신왕래 가운데, 아일랜드 장로교 선교회는 봉천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싶다는 내용과 만주의 연합 개신교 선교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1887년에 로스목사가 본부에 편지하기를 만주 교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전했는데, 그것은 7월이나 8월에 만주 교회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전도자로 택했고, 그의 봉급을 보증하겠다고 전했다. 보고서를 쓸 때 교인을 한 사람 더 택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의논 중이었는데, 같은 해 모든 교인을 위해 표준 교리교육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매년 지도자 교리 시험을 실시했다.

1886년 N.E.M.James이라는 탐험가가 로스목사 집에 들렸다가 그후 만주 산맥들을 탐험했다.

1887년 출판된 긴진 산맥:만주의 여행(The Long White Mountain:or a Journey in Manchuria)을 보면, 만주 교회에 대해 칭찬을 많이 했다. 그 해에 본부에서

1888년이 안식년이란 소식을 받고 귀국할 준비를 했다. 이 소식을 받고 봉천 북쪽 지방에서 탐험과 전도할 생각이 있어서, 웹스터목사와 함께 11월 18일 봉천을 떠나 먼 길림으로 갔다. 갈 때는 철령과 해룡성을 거쳐 갔다고 했다. 로스목사는 계속해서 글을 썼고,그해 봄 만주 선교회의 小史와 유교에 관한 글을 본부에 보냈다.

1887년 가을 로스 목사는 배를 타고 서울에 가서, 조선에서 있은 조선인의 세례와 한국 교회의 첫 장로 임명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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