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ROSS(존 로스)/한국의 첫 선교사
2. 선교활동 초기(1872-1879) 2.
만주에 있는 교회 성장이 그의
주요한 임무였으나,로스목사는 윌리암슨 박사의 조선에 대한 관심사를 결코 잊지 않았다. 1877년에 만주 선교에 대해 개척하면서 동시에 조선에
대해 몇 가지 계획을 착수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두가지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그의 자녀를 양육할 사람이 필요했고,
다른 하나는 만주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동년 7월에 외국선교부에 있는 맥길박사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을 기르기 위해 그의 여동생
캐더린을 보내도록 요청했다. 1873년 12월 말 캐더린은 런던에서 글라마트니(Glamartney)호를 타고 중국으로 갔으나, 아직 만주에서는
그와 같이 선교활동을 할 동력자가 없었다.
이 기간에 로스목사가 에딘버러 선교회를 보낸 편지에서 그가 관용성과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76년 1월 그는
1873년 2월에 썼던 기사를 보냈는데, 그가 만주에 머무른지 첫 석달 안에 중국 새해 기념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1873년
7월 맥길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구에 있는 집을 지을 때 노동자들에 대한 표현에서 중국인에게 느꼈던 사랑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회고하면
그의 아내의 죽음으로 그는 선교방향을 바꿨고, 그의 모든 수단과 감정을 중국인을 위해 사용했따고 할 수 있었다.
1874년 로스목사는 태평산과 개주현에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을 살 때, 지방민들이 반발했고 그 주인은 구속됐다. 왜냐하면
지방장관은 외국인이 그 지방에 있는 천주교와 내통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개주현에서 그가 나타나면 분위기는 쉽게
흐려질 수 있었다. 태평산에 있었던 개신교 집단에 의해 운영될 때, 그것을 깨달았다.
로스목사는 천주교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의 편지에서 가끔 천주교회의
치외법권 사용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외국인이나 그들의 조력자들이 외국 정부나 중국 조정의 힘에 의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느끼기를,그렇게 하면 반서양 감정이 일어나 기독교의 발전은 어렵게 될 것이라 했다. 천주교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이런 점에서는 개신교 선교사도 비판했다.
1874년 봄과 여름 모교회로 보낸 편지에서 그는 중국인 기독교인의 선교책임을 나타냈다.
대부분의 설교는 그가 훈련시킨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고,로스목사는 필요시 그가 설립했던 곳을 순회설교했으며 학습과 세례를 베풀었다. 로스목사는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고, 6개월이나 그 이상된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는데, 그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파악할 때까지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같은 해 여름 아일랜드 선교사와 만주지역을
나누었는데, 아일랜드 선교사는 서쪽을,스코틀랜드 선교사는 북쪽과 동쪽을 맡았다. 이 계약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로스목사는 두 교단이
중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모든 교단의 갈등을 없애도록 하고 싶었고,특히 헌터박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재 로스목사는 일찌기
스코틀랜드 설교의 중심지는 영구시이어서는 안되고, 만주의 수도이고 청나라의 둘째 큰 소시인 봉천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 로스목사는 그때
한국선교를 위해 많은 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었기 때문에,스코틀랜드 교회는
동만주에서 선교할 수 있고 조선 국경선에 전도자를 보낼 수 있다고 했을 것 같다.
같은 해 10월 9일 로스목사는 영구를 떠나 순회전도를 나섰고, 첫 번째로 고려문(Corean Gate)을 방문했다. 그 기록을 그해
11월,12월에 나오는 격월지 '중국기록과 선교보고(Chinese Recorder and Missionary Journal)'에 썼고,1875년
5월 '연합장로선교보고(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에 간추려서 기고했다. 왕복여행은 약 3주일
걸렸고, 로스목사가 고려문으로 간 길은 조선의 사신이 북경으로 가는 길과는 방향이 달랐다. 10월 9일에 영구로 떠나 첫날밤은
대석교(도시이름)에서 보냈는데, 거기 있는 여관은 북중국에 있는 여관 중 가장 좋다고 했다. 대석교를 떠나 동쪽으로 여행을 하면서 천산(千山)의
산맥을 지났는데, 무수한 산맥들이 북 스코틀랜드의 산맥들처럼 생각이 들었다. 로스목사와 그의 동행인은 양하를 12번이나 건넜다.그의 보고서에서
로스목사는 그 지방의 식물과 동물 및 지리를 살펴 보았고, 또한 그 지방의 풍속도 살펴서 기록했다. 대석교를 떠나 그들이 처음 도착한 큰 도시는
수암주이었고, 거기에서 북동쪽으로 가면서 봉황성으로 곧장 가는 길이 아니었으나,로스목사와 그의 동행인은 그 도시로 갔다.
그는 6일간 세관이 개방되기를 기다리면서 그 지방의 상업과 산업을 시찰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곳 상품의 대부분은 다른 지방으로 수출되도록
대고산의 항구로 보내졌다. 그는 또한 봉황성에서 조선산배를 샀는데, 그것을 제일 맛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서도 설교했고 한문성경을 팔았다. 그가
수암주와 봉황성에서 보낸 보고서에서 그 두 곳에 이슬람교인들이 있었다고 적었다.
고려문이란 마을은 청과 조선사이에 있는 세관이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고,그것은 봉황성에서 떨어진 봉황산이라는 산맥 옆에 있었는데, 그
언덕에는 도가의 수사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세관은 일년에 4번씩 열렸다. 음력 3월에 시작해서 3,4개월간 열렸고,음력 8월에 3주간,음력
9월에 약 6주간,마지막으로 섣달에 한달간 열렸다. 로스목사의 말에 따르면 3.9월에 여는 장은 가장 중요했고,그때엔 봉황성의 지방장관이 직접
열었다. 로스목사의 첫 방문은 음력 9월이었는데 그 때는 그 문이 잠겼고,그가 조선 상인들을 만날려고 했으나 한꺼번에 몰려 올 때가 아니라서
실망했다.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 섭섭하게 영구로 돌아왔다. 고려문에 처음 올 때 그는 거기에 왔던 조선 상인 등과 접촉해서 대화할 수
있었으나, 새로운 소식을 전한다거나 성경을 팔 수가 없었다. 그는 여기에 비해 말하기를, 그들이 이런 외국책을 가졌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했고, 바로 몇년 전 조선에 있는 천주굥니들이 가장 극심한 박해를 당했고, 서양인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했다고 했다.
영구로 돌아 오자마자 로스목사는 중국기록과 선교보고에 고려문 심방('Visit to the Corean Gate')이란 글을 썼다.
그것을 쓰고 난 직후 영구 서쪽 650킬로미터에 있는 북경으로 떠났다. 이 여행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더 이상 알 수 없고 단지
추정할 수 있다. 두가지의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북경에 있는 유명한 W.A.P.Martin(마틴박사)가 있었고, 로스목사와 마틴의 선교
방법과 중국인을 이해하는 방법이 비슷한 점이 있었다. 로스목사가 거기로 가서 만주에 있는 그의 활동에 대해 얘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로스목사가 조선어를 배울 계획을 세웠고, 신약성서를 그것으로 번역해서 출판하도록 도움을 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후 새해가 되기 전에 영구로
돌아 온 것 같다.
1875년 로스목사가 쓴 기록 등이 많지 않으나,만주의 수도원 봉천에 몇개의 전도관을 설립하려고 무척 노력한 것 같다. 그것을 위해
다섯번씩이나 봉천으로 갔으나 일이 잘 안되었다. 1875년 말 그는 에딘버러에 있는 선교회에 그 장소를 설립하고 왕 징밍,탕 운환 두 전도사를
선택했다고 했다. 그는 또한 영국 주위에서 한 것 같이 대석교에서는 장소를 설립했으나, 해성과 요양에서는 설립하지 않았다고 했다. 같은 해 언제
지부로 배를 타고 갔고, 그 이유는 모르지만 존 맥킨타이어를 만주에 오도록 부탁한 것 같다. 1875년 말기 로스목사가 만주에 온지 3년만에
그는 첫 선교 통역자를 만났다.
존 맥킨타이어는 만주로 갈 때 로스목사보다 네 살 위였으나 아직 총각이었다. 그는 1837년 7월 18일에 스코틀랜드의 록크
로먼드(Loch Lomond)에 있는 러쓰(Luss) 에서 출생해서, 페이즐리(Paisley)에서 교육을 받았고, 독일의 하이델베르그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에딘버러에 있는 연합
장로교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865년에 안수를 받고 베일리스턴(Baillieston)교회에서 목사 취임을 했다. 1871년 중국에
갈때까지 그곳에서 목회했고 일년 후 갔다. 로스목사가 부르기 전에 지부 서쪽 200킬로미터에 있는 유현에서 목회했다. 맥킨타이어가 영구로 옮길
때 로스목사는 미리 만주에서 큰 선교 활동계획을 가지고 있은 듯하다. 1876년 초에 맥킨타이어는 로스목사의 여동생 캐더린과 결혼했다.그녀는
로스목사의 아들 드러몬드를 기르고 중국 여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는 선교활동을 빨리 계획해서,한 사람이 6주간 영구에
있으면 다른 사람은 6주간 순회전도를 했다.
1876년 4월말과 5월 초에 고려문으로 두 번째 여행을 했다. 이번에는 준비를 미리 잘 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비용은 영국
리즈(Leeds)시에 있는 로버트 아팅톤(Robert Arthington,1823-1900)이 대었다. 그는 유명한 자선사업가였다. 로스목사는
세관으로 갈 때는 2년 전과 같은 길로 갔으나,세관을 지나 압록강과 북쪽 국경 사이에 있는 무인지경까지 갔고, 애하와 압록강의 합류점까지 갔다.
거기에 있는 모래밭과 더 비옥한 곳에 잇는 농장에서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로스목사는 한권으로 된 전도지와 성경을 출판할려고
했고 ,나중에 반도로 들어 오는 방법을 찾을려고 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로스목사는 의주시를 볼 수 잇어서 압록강변을 따라 구경하도록
뱃사공을 부르려 했으나, 조선의 변방 군인들이 두려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스목사가 조선 국경으로 간 두번째 이유는,조선어 선생을 찾고 또 신약성서를 조선어로 번역하도록 그를 도울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로스목사는 동역자에게 성경을 번역할 수 있을 만한 지식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한약장수였고 그는 압록강을 건널 때 모든 물건을 잃어버렸다. 이
응찬은 동력자에게 관심을 나타냈으나,로스목사와 일주일 있은 뒤에 로스목사의 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도 봉황성을 떠날 때 그는
로스목사에게 은밀히 얘기했다. 외국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해서 이 응찬의 동생조차도 그가 로스목사의 교사가 된다는 것을 몰랐다. 로스목사가 떠나기
전 이응찬은 하루 먼저 떠났고, 봉천으로 가서 다시 만났다. 봉황성에서 돌아 올 때 천산을 거쳐서 다른 길로 갔다. 관전과 환인을 지나 청나라
황제 조상의 능이 있는 흥경에 갔다. 거리서 그들은 봉천으로 가기 전 며칠 머물렀다. 고려문을 방문한 세번째 이유는 압록강으로 가는 봉천의
동쪽에 있는 지방을 탐색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1876년 9월 로스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매달 해성으로 순회전도를 나갔고, 그 해성은 봉천으로 가는 도중에 정류장 하나가 되었다. 또한
동시에 봉천에 거류전도사가 있는데,그것은 만주선교 전략의 중심이 되었다. 이와 같은 양인이 바램으로 기독교 교리가 북중국에 전파될 수 있었다. 1876년 말 로스 목사는 그의 첫 저서를 내었는데, 그것은
'맨드린 프라이머'(Mandarin Primer')라는 선교사들을 위한 중국어 교본이었다. 그해 11월 중순 로스목사는 북경으로 두번째 여행을
떠났는데,가는 도중 며칠간 금주에서 머물었다. 로스목사가 무슨 이유를 갔는지 우리는 모르나,아마 조선어로 신약을 번역하고 인쇄하기 위해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한 듯하다.
1876년 썼고, 1877년 3월 연합 장로교 선교보고에 썼던 기사에서 그는 자기의 선교방법에 대해 말하긴 "내가 중국으로 갈때 그들의
가치관을 알기 위해서였고, 그것을 그들의 귓전에 깨우치기 위함이었다"했다.
이 적극적인 중국인 편으로의 접근은 그가 그리스도를 전하기 전 공자에 대해 얘기한 듯하다. 중국이들은 불교나 도교는 비판하겠으나, 유교는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로스목사는 기독교를 설명하기 이해 사서 삼경을 공부하고 많은 문장들을 암기했다. 동년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으나 기독교에 대해 가르쳤다. 이 사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사람들은 잘 받아 들였다. 그 전 해에 비해 불신이 현저히 줄어 들었다.
1877년의 선교보고에서 특히 재미 있는 것은 그의 활동방법이다. 로스목사는 두가지 특성을 가졌는데, 비판하는 사람을 다룰 때 그의 풍부한
관용과 중국문화와 풍습에 대한 지식이었다. 1876-1877년 젊은 학자들 몇 집단이 그를 추방할려고 노력했다. 원망을 많이 들었으나 참았으므로
나중에 여러 학자들은 그의 설교를 잘 수긍했다. 동시에 봉천에서 처음 전도할 때 용왕사에 살았다. 그때 다른 곳에 머무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관용성 있는 수용성은 영국 본부에서 알았더라면 놀랐을
것이다.
동시에 이 응찬 밑에서 조선말을 배웠음이 틀림없다. 그의 두번째 저술인 '조선어 교재'('Corean Primer')는 1877년에
발행됐다. 그 책의 서론을 보면,맨드린 프라이머에 기초해 있는 조선어 문법공부였다. 불란서 드로조니(de Rosny)에 의해 '조선어에
관하여'('Apercu de la Langue Corene')가 쓰여졌는데, 'Corean Primer'는 첫째 영어로 쓰여졌고 조선어 문법을
설명했으며,조선어로서 예문 문장을 들도록 모두 서양어로 썼다. 이 책의 특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한글을 완전히 쓰고 그 사용언어는 표준어가
아니라 북쪽 사투리였다. 이것은 의주 출신 이응찬의 영향을 나타낸다.
1878년 로스목사는 봉천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맥킨타이어목사는 영구를 담임했다. 로스목사의 주소는 봉천 북쪽의 교외였고, 여름엔 쉬기
위해 영구로 갔다. 이때 조선어 성경번역을 계속했었는데 여기에 대해선 제3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겠다. 그때 로수목사는 안식년에 대해
생각했고,선교회 본부로 편지를 써서 중국교인이 영국을 시찰토록 교통비를 신청했다. 이 신자는 아마 로스 목사가 신임한 왕 징밍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허락지 않았다.
로스목사는 1878년 보고서에서 보면,봉천에 있는 천주교 신부와 다툼이 있었다. 그들은 (신부는) 치외법권을 이용해서 돈을 갈취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은 기독교인을 비판했으니 이런 일이 없도록 막았다. 또한 그의 비세례 신자는 경제적인 획득을 꾀했으므로 추방했다. 로스목사는
천주교도 비판했으나, 천주교 신부들이 일부러 중국법을 파기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1879년 2월,1878년 보고서로 보냈고, 1879년 5월 9일,7년만에 처음 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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