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ROSS(존 로스)/한국의 첫 선교사
5. 교회 내에서 영적인 근원들의 심화(1888-1900)
1888년 4월 로스목사는 두 번째 안식년을 맞아 런던
선교 수양회에 참석하여 중국과 한국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불행했던 것은 그가
떠나기 전 그의 어린아들 쟈키가 죽었다.로스목사는 캐나다를 경유, 거기에서 오타와에 있을 때 애도의 편지를
받았다. 그 선교회는 6월 11일에서 19일까지 거행되었고,그후 그 가족은 글래스고우로 돌아 갔다. 8월부터 로스목사는 정열적으로 발표에
몰두했다. 1881년 7월 이전으로 더 거슬러 가서 로스목사는 휴가를 가졌던 선교사들이 그들의 사업과 교회선교에 대해 항거했다. 그는 그때
말하길 교회는 안식년을 가진 선교사들을 대표하여,이 목적을 위해 일련의 발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두번째 안식년 때는 그위원회는 그의
요구에 동의해서 그에 대해 여러가지 협정을 한 것 같다. 9월 중에 그는 아일랜드에 아일랜드 장로교회를 대표해서 순회했다. 이 소개연설은
1888년 11월까지 계속되었다.
1889년 1월까지 그는 자기의 생각을 두가지 문제로 귀결시켰는데, 하나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선교회를 합병해서 만주에서 장로교 선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그의 친구이며 동료인 왕징밍을 기리는 책을 쓰는 것이었다. 지나간 해의 개인적 슬픔은 2월 그의 차녀
캐티제인(Cathie Jane)의 출생으로 씻어졌다.
로스목사는 5월 '왕 징밍'('Old Wang')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그것으로 선교자서전의
모범으로 상을 받았다.6월 로스목사가 가족은 네른(Narin)의 '엉컹퀴 오두막'(Thistle Cottage)에 살고 있었고, 7월엔
(Fearn)에 있었다. 8월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로스목사는 두 선교회의 합병에 대해 방법을 모색했고, 그후부터 11월 말까지 대중들 앞에서
설교하고나 가르쳤다. 10월 그들은 닉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했고,11월 글래스고우에 정착했다. 11월 하순에 그는 지난달 27일 봉천에 있는
중국풍의 교회가 헌당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이 교회에서
맥킨타이어목사가 이르기를
"고대의 용무늬가 아로 새겨지고 전설적인 동물들이 지붕으로 소용돌이 치며,흠이 파인 굴뚝에서
용솟음치는 중국문화의 건축양식보다 더
나를 매료시키는 것은 없었다." 고 했다. 이 건물의 건축은 만주에 있어서 교회성장의 중요한 일면을 나타냈다.
1890년 초 로스목사는 연합장로교 선교보고에 두 강연 내용을 보도했다. 그것은
'만주에서 우리의 사역'('Our Work in Manchuria')과 '조선에 있어서 복음'('The Gospel in Corea')이었다.
첫번째 내용에서 그는 자기의 초기 생활과 사역을 기술했고, 외국 선교사들에 대응한 만큼 자국의 대행인을 두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간도지방에서
일어나는 기독교복음화의 과정을 간단하게 썼다.
그는 또 기독교 지식이 진보할려면 외국 선교사의 노력 없이 일어났음을 강조했고, 또한 그가
믿기로는 조선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 들이는 첫 아시아 국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논점엔 두가지
바탕이 깔려 있는데,첫째는 불교가 민중에게서 멀어졌고, 둘째 조선인은 고등신(Supreme Being)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2월 말까지 로스목사 기록은 만주로 돌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 마아가렛과 어린
캐티제인이 앓고 있어서 갔었는지에 대해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그러나 3월 6일까지 그 가족은 런던에 배를 타기 위해 갔을 것이다. 3월 29일
글랜노글(Glenogle)호에 타기전 로스목사가 만주에 가는것에 대해 방해하는 3명의 선교사 즉
더글라스(Douglas),잉글리스(Inglis0,로버트슨(Robertson)의 급파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항해를 기다리며 선창에서 로스목사는
'만주의 마지막 요구,교회를 분열시키는 망언들'('The Needs of Manchuria,Parting Words to the
Chruch)이란 글을 썼다. 거기서 그는 만주에 있는 교회의 위치에 대한 그의 관심을 언급했다.
그는 말하길
"아주 중대한 이유로 나는 중국에 있는 많은 유럽 선교사의 주장에 항거하는 것이 분명히 이해되길
원했으므로,안수받은 사람이 증가해 가면서 그 지역이 완전히 복음화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두
사람에 의해 배치되어져야 하며,또 그들은 중국기관을 훈련시키고 도우고
지도키 위해 거기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두번째 요청은 간도지방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한 선교사가
간도지방에 영구적으로 머물기를 원했다. 이 단평에서 로스목사는 비록 자신이 이 임무를 기꺼이 떠 맡을려고 했던 스코틀랜드의 한 신학생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그가 활동하는데 자기네들의 일반적 선교비 외에 추가로 특별 헌금으로서 그를 후원할 사람이 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았었다.
1890년 여름,1888년 1월에 나왔던 맥킨타이어 목사와 제임스 와일러(James
Wylie)는 간도지방으로 여행해서 많은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로스목사 자신은 선교지에 포함된 대평구 주위의 여러 지역을 시찰키 위해
그해 가을 여행했다. 12월엔 그와 제임스 웹스터가 봉천의 북쪽 전지역을 여행했다. 그들은 철령에서 안식을 가졌고 다음날 개원으로 왔다.하룻밤을
묵고 나서 그들은 서쪽으로 향했고, 마친타이(Machintai)에 있는 세관을 지나 내 몽고의 동쪽지방을 둘러 싸고 있는 평야로 들어 갔다. 그들은
대평구에서 5일을 머물고 나서 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로스목사는 50세가 되어서도 아직 모험가였으며 선교사역을 돌아 보기 위해 넓은 지역을
여행했고,교회가 더 확장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이 없을까 하고 찾아 다녔다. 이 원정보고에서 그는 후에 봉천에서부터 동쪽으로 조선국경선까지
'빈공간을 메꾸기 위해'일하기를 바라며, 또한 그들이 만주 북동쪽 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매매가에 지부를 설립토록 촉구했다.
1890년 여름 로스목사는 상해의 제2차 중국 선교 수련회에 참석했는데 이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한 논문에서 만주인의 제사문제를 다루고 토의에 참석,그것을 제출했다. 그는 또한 세계선교의 재음미(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라는 잡지에 두 논문을 제출했는데, 하나는 '조선에 있어서 기독교의 여명'('The Christian
Dawn in Korea')이고,다른 하나는 '중국 선교의 문제'('The Chinese Missionary Problem')이란 제목을
붙였다.
여름이 거의 끝나 갈때 로스목사 가족은 또 다시 둘째 딸 캐티제인(Cathie Jane)이 죽는
불운을 맞았다. 1890년 12월과 1891년 1월에 그는 북방으로 여행을 했는데, 아주 놀랍게도 조선반도의 왕국에서 나온 조선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평북지방인 강계에서 온 어떤 최씨라는 사람이 로스 목사를 찾아와 교인들이 있었던 그 시 부근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는데,또한 로스목사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온 것이었다. 얼마 후 로스목사의 조선인 서적판매원인 김 청송이 강계에서 온 다른 조선인과 같이
봉천에 도착해서 최씨의 얘기를 뒷받침했다.
그후 조정관리의 두번째 직급에 해당하는 강계의 호방에서 온 사자가 도착해서 최씨가 복음서,
신약성서 및 교회 문답서를 가져 오도록 요구해서 이것들을 보냈다. 로스목사는 그때 그 상황을 파악키 위해 그의 조선인 식자공인 공씨라는 사람을
최씨와 같이 보냈다. 그는 관리가 직접 보낸 회답을 받았는데,거기엔 그가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고, 최씨와 공씨가 도착한 후 그는 강계와
자성,후창지방에 있는 교인들에게 신앙을 키워 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쓰여 있었다. 강계에서 서약했던 100명의 교인 중 10명만이 세례를 받기에
적격이었고,자성에서는 90여명중 단지 7명,후창에선 150명중 15명만이 적격이었다.이 32명의 이름이 로스목사에게 전달됐는데,편지는 후창현의
공인이 찍혀 우송됐다. 나아가 그 현령은 최씨가 머무르면서 이 신자들을 가르치도록 요구했고,후창에 있는 교인들이 그 중 한 사람인 최 정홍이란
사람을 로스목사에게 보낸다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조선의 북방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기독교 사회가 성립되어졌다는 것을 가르킨다.
1891년 2월 로스목사는 철령과 그 주위를 살펴 보려고 여행했고,26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4명의 집사들을 뽑도록 지도했다. 교회가 최초에 설립된 봉천의 북쪽지방에 있어서 조차 자체 독립과 자체 전도의 단계가 이미 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1891년 3월 대평구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47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3월 27일 그의 아들인 존
허버트(John Herbert)가 출생함으로 로스목사에게 기쁨을 더하게 했다. 잉글리스가 봉천에 왔고, 더글라스씨가 요양에
보내졌으며,영박사(Dr.Young)와 로버트슨(Robertson)이 하루빈의 바로 남쪽에 있는 쌍성부에 새 지부를 설립해서 왔다.
이것은 선교부가 사람들이 타지방에서 많이 이주해 오는 지방을 접촉하기 이함이였다. 6월 7일
제임스 와일러는 압록강의 초산지방에서 온 한 조선인의 세례소식을 알렸다. 아마 그 젊은 사람과 초산에서 군인과 리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둘 다
요양에서 웨스터워터(Westwater)박사와 같이 있었을 것이다.
1891년 2월 27일 북미 선교사 중 조선으로
왔던 제임스 게일(James Gale0과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t)은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서 북쪽으로 탐험 여행을 떠났다. 게일은
캐나다인으로 토론토대학교
YMCA의 파송을 받았고, 반면 마펫은 북장로교에서 왔다. 3월 24일까지 그들은 의주에 도착했는데, 로스목사를 통해 믿었던 많은 교인들이
나와서 영접했고,거기서 4월 5일까지 머물렀다. 그달 중순까지 그들은 봉천에 도착해서 로스목사와 4일간 같이 지냈다. 로스목사는 그들에게
강계지방에서 조선인과의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고, 그들 스스로 그 상황을 연구하도록 말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봉천을 출발한 뒤 그들은 통화를 거쳐 간도지방까지 갔다. 그곳에서 자성과 후창으로 갔고, 연안에
있는 장진을 거쳐 5월 9일 원산에 도착했다. 로스목사는 조선과 만주지방에 어떤 선교사가 있어야 하며,젊은 선교사들이 스스로 그 상황을 본다면
그들이나 동료 중 하나가 그곳에 파송되길 바란다고 했다.
1891년 7월 한달간을 로스목사는 순회전도 여행을 하면서 보냈다. 그해 여름 동력하여 활동
중인 에이레와 스코틀랜드 선교회가 단독 장로회 관학구를 만들었는데,그것이 지방교회 연합의 중요한 단계였다. 그것은 하나의 선교회로서 더 이상
간주되지 않았고, 관동 장로교구로서 알려진 하나의 자립교회로 생각되었다. 그 장로교구의 영역을 청나라 시대에 전형적인 만주의 새
지방으로서,만리장성 동쪽으로 조선국경과 남쪽으로는 흑룡강까지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었다. 8월에 로스목사는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 강계에서 왔던
교인 최씨와 있었던 경험을 글로 썼다. 따로 또 그는 선교부에 편지를 보내 최씨가 조선의 그 지역에서 그들의 대행자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에딘버러 선교부는 이것을 기각하고 만주 선교회로 다시 문의했다.
단념치 않고 로스목사는 다시 10월 27일 같은 청원을 써서 선교부가 그 지역에 외국 선교사를
보낼 것을 고려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선교부 기록에 주제가 언급되지 않은 만큼 힘 없이 거절되었음이 틀림없다. 9월 23일에서
10월 16일 사이에 로스목사와 잉글리스는 북쪽을 두루 여행했다. 이 여행기간 그들의 진로는 철령과 위원을 거쳐 이통을 방문했고, 이통에서
매매가 지방을 거쳐 최북단까지와 그 지방의 최남단을 왕래할 때 이들을 중심지로 삼았다.그해 겨울 로스목사는 세계선교 재음미(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라는 잡지에서 "선교사 바울"("Paul the Missionary")이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얼마간 로스목사는
바울이 현대 선교사들이 따라야 하고,사도 이후 그 자신을
특정지우도록 시도했던 표본이었다고 느꼈다.
그는 또 고향교회에 편지해서 중국에 사회적 혼란이 비록 있었다 하더라도, 만주의 총독
자신이 외국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했다고 써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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