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① 
 
동서문명의 동맥 난주의 실크로드
 
 네스토리우스는 AD 431년 에베소 세계 공의회에서 ‘기독론 시비’에 휘말려 정죄 추방이 된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였다. 이 사건은 교회사의 중심에 자리하여, 세계 기독교의 기본틀을 흔들어버렸다.
네스토리우스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수리아 사막으로 쫓겨 가서 묶인 몸이 되자 에뎃사에 집결하여 아시아 기독교를 개척하기로 결심을 굳힌다.
우리가 차분한 마음으로 초대, 중세로 이어가면서 세계로 뻗어가는 기독교의 흐름을 보면 재미있다. 초기 바울사도의 제 2차 전도여행기 중 사도행전 16장을 펴면 바울이 아시아 방향으로 가고자 했다. 그때 바울을 지도하시는 성령께서는 한사코 바울의 아시아행을 가로 막으셨다. 하는 수 없이 바울은 유럽행을 결단하고, 마케도니아의 빌립보로 건너갔다. 그날 이후 바울은 유럽 기독교의 선봉이 되어 기독교 유럽시대의 아버지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아시아는 복잡하다. 우리가 앞서 지적한대로 바울의 아시아행을 결코 용납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많은 이들은 바울이 지목한 아시아가 어디냐를 놓고 시비하는데 그건 매우 싱거운 문제이다. 당장은 에베소 아시아이겠으나, 곧이어 아나톨리아에서 북방으로 카스피해를 비켜 가면 중앙아시아, 옆으로 가면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파미르 고원이나 히말라야를 넘으면 대륙아시아, 아시아의 본토인 중원 대륙까지가 아시아가 된다.
광역 아시아에는 바울 당시에 이미 종교와 철학의 황금기를 이루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아시아로 진격해 가면서 황홀경을 느꼈던 지혜와 철학의 보고가 아시아였다.
그런 아시아를 향하여 아직은 철학적 기틀도 바로 세우지 못한 바울의 기독교가 덤벼든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을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은 아시아의 길을 열었다. 열 두 제자 중 다대오와 도마가 페르시아의 타브리즈와 인도의 마드라스까지 갔다. 물론 도마의 경우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일설에 의하면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인도까지 간 선원이 그의 배에 승선한 도마를 확인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아프가니스탄 쪽으로 인도행 선교단이 지나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아시아 행 선교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AD 280년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아르메니아는 로마 제국 영역 밖의 세계였다.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만 일삼던 카타콤 시대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아르메니아를 ‘동 기독교’로 교회사는 분류하고 있다.
`동 기독교'는 `아시아 기독교'로 호칭할 수 있다. 필자는 `아시아 기독교'로 분류한다. 아시아 기독교(동 기독교)는 아르메니아를 제외하고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타직스탄, 박트리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기독교가 확산되어 갔다.
필자가 금번 중국 서안에 도착한 날은 5월 26일, 그날부터 6월 2일 귀국하는 시간까지 짧은 한 주간을 난주에 들러 황하의 물줄기를 보았으며, 난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16시간 주변 풍광을 살필 수 있었다. 물론 밤시간은 침묵과 기도의 시간이었다. 난주는 서안 당나라 수도(장안)에서 콘스탄티노플이나 로마로 가는 Silk Road의 사실상 출발지다. 서안에서 800km로 짧지 않은 거리이기는 해도 난주는 시하허(夏河)로 거쳐서 돈황까지의 험난한 길을 가기 위한 주요한 길목이다. 다시 말하면 서안(장안)에서 출발한 중국 대륙의 물품 등을 재정리하여 수만리 먼 길을 가고 오려면 별도로 관리해야 하는 세관이 있어야 했다. 시내 중심을 가로 지르는 황하(黃河)를 바라본다. 서울의 한강만큼의 강폭은 아니어도 5,464km 강의 흐름이 만만치가 않다. 물론 강의 길이는 황하가 앞설 것이다. 그리고 황하 문명은 아시아권 인류문명의 출발점으로 기록될만큼 유명하다. 난주 시립 박물관에 갔을 때 황하에서 발굴한 진귀한 돌들을 전시한 방에 들어가 보았다. 별도의 관람료를 받을 만큼 형형색색의 돌들에서 황하의 흐름과 강변 따라 이루어지는 문명의 이야기를 암시 받을 수 있었다.
개항기 중국의 지도자 손문 선생을 기념하여 최초로 놓은 현대식 중산교(中山橋)를 마주 바라보며 앞산 높은 곳에 위치한 백탑사에서는 난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중산교를 중심으로 왼쪽 끝부분에 세관의 자리가 있다. 엄청난 물량이 로마나 페르시아를 향해서 가고, 또 그들의 문물을 중국으로 가져오는 동서 문명의 동맥이다. 장안의 예비 기착지 난주는 그래서 나의 관심 지역이다.
물론 장안(서안)에서 난주를 경유하지 않고 시하허로 가는 길도 있다. 그러나 대상(Caravan)들이 대륙을 오갈 때 사실상 당나라를 전후로한 시대에는 난주를 거치게 되어 있다.
나는 일정이 모자라서 난주의 백령사 탐방은 뒤로 미루었는데 난주에는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적지 않은 흔적이 있다. 감숙성의 중심인 난주, 그러나 나는 시하허(夏河)를 잠시 다녀오려고 일정을 계획하다가 1박 2일의 난주 일정만 소화하고 밤 기차를 타고 서안으로 돌아갔다. 버스 16시간 보다 밤 기차 9시간으로 충분한 수면을 취했다.
서안 시내를 다니면서 당나라 시대의 성벽을 관찰하고, 서문 쪽으로 가서 궁성으로 들어갔다. 당태종 시대에 건축을 시작하여 그의 아들 이치, 곧 당 고종 2년에 완공한 궁성의 위치를 보았다. 북경의 자금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서점이나 박물관에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당나라 시대의 궁성은 물론 대신들과 세력가들이 살던 위치들도 확인했다.
내가 오늘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알로폰(Alopen) 페르시아 출신 주교(감독)가 AD 635년 (정관 9년)에 황제를 대신한 방현령(房玄齡)의 영접을 받으면서 당나라에 공식적으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전파하는 출발점의 분위기를 살피는 중이다.
나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AD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이단 정죄되어 추방된 이후 그들이 중심이 되어 아시아 선교를 실천했던 약 1천년 현장을 찾고 있다.
방현령이 국빈의 예로써 한 사람 기독교 지도자를 영접한 이후 당나라 2백여 년, 송나라, 징기스칸의 후예들, 그리고 바그다드에서 잠적(소멸)해 가는 네스토리안들의 역사를 복원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일은 경교사를 찾아가기로 한다.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아시아 기독교, 이교도들의 틈새에서 자기 모습을 확실히 드러내지 못한 네스토리안의 오늘 모습도 재구성해 볼 수 있을까?
조효근 목사/본지 발행인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⑪ 중국 내몽골 조효근 목사 2007/11/12 10:44 30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⑩ 조효근 목사 2007/11/05 11:23 48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⑨ 타지키스탄→내몽골 조효근 목사 2007/10/29 13:33 53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⑧-타지키스탄 조효근 목사 2007/10/29 13:30 43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⑨ 타지키스탄→내몽골  조효근 목사 2007/10/29 13:27 34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⑦ 조효근 목사 2007/10/15 11:04 69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⑥ 조효근 목사 2007/10/08 11:33 84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⑤  조효근/본지 발행인 2007/09/19 15:37 113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④  조효근 목사 2007/09/03 10:14 113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③  조효근 목사 2007/08/22 14:43 193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②  조효근 목사 2007/08/20 11:57 186
■ 네스토리우스를 만나려고 ①  조효근 목사 2007/07/11 16:46 219
■ 페르시아 순례 ⑥  조효근 목사 2007/07/04 15:42 261
■ 페르시아 순례 ⑤ 2007/06/13 12:40 262
■ 페르시아 순례 ④ 조효근 목사 2007/06/11 10:06 286
■ 페르시아 순례 ③ 조효근 목사 2007/05/23 13:36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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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들소리신문 /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6/board.php?board=toboard&command=body&no=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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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경
북경대 정치학 박사,
국민일보 종교부기자,
차이나네트워크연구소(CNI) 실행이사
[China읽기]▣ 중국 기독교 역사 I [2006.04.21]
중국 정부가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면밀히 알기 위해서는
중국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수적이다!

이 시간,
기독교에 대해
‘제국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는
외래종교‘라 여겼던 중국정부의
역사적 관점을 들여다보자.

▣오프닝
오늘부터 2차례로 나눠 중국의 기독교 역사, 즉 1949년 이전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중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시기는 현재까지 기록상으로 당태종 9년인 서기 635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기독교협회 상임위원이었던 왕웨이판(汪維藩) 교수가 재미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예술관에 소장돼 있는 한대 화상석을 연구하던 중 성경이야기와 초기 기독교 도안 등 천지창조에 관한 내용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왕 교수는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을 제시하고 중국 기독교 역사를 86년까지 소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이들 한대 화상석 위에 새겨진 도안들은 중동 일대의 초기 기독교 예술품과 동한대의 예술 특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화상석은 한대 분묘의 가장 중요한 수장품이며 쉬저우는 한대 화상석이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는 중국 내 4개 지역 중 한 곳입니다. 이전에도 일부 전문가들이 기독교의 동한대 전래 가능성을 제기한 적은 있었지만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부족해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 같은 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이 공인하는 기독교 전파 연대는 아직도 635년입니다.

▣본론
먼저 경교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당태종의 환대를 받으며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간 알로펜은 경교, 즉 네스토리안교를 전파합니다. 이 네스토리안교는 그리스도의 이성이위론을 주장, 서기 435년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가 창시한 교파입니다. 네스토리안들은 612년경 아랍지역에서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세력의 위협을 피해 동방으로 건너갔고 당시 당나라의 문호 개방정책으로 쉽게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알로펜은 638년 7월에 황제의 윤허를 받아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이후 경교는 841년까지 12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발전해 나가다가 무즉천의 숭불정책으로 잠시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 현종에 이르기까지 황실의 보호를 받고 확장됐습니다. 하지만 당 무종이 도교숭상정책을 실시하며 845년에 불교말살정책과 다른 종교에 대한 배척운동을 전개하면서 경교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경교의 선교전략은 상층부 전도였습니다. 그들은 당나라 조정과 친밀한 관계유지에 힘썼으며 중국인들에게 자기들의 신앙을 이해시키기에 열심이었습니다. 또한 중국 사회의 종교문화 환경에 적응하려고 불교, 도교의 종교언어 더 나아가 유교의 이론 도덕에 기독교 문화를 접목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인들은 기독교를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로 취급했고 심지어는 외국에서 들어온 불교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당무종에 의해 불교와 함께 경교가 쇄락하게 됐는데 불교는 훗날 흥왕하였고 경교는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13세기 말 중국에 들어간 몽고인 중 귀족과 평민이 섞여 있었는데 거기에 경교 신자가 있었습니다. 이 때 경교는 야리가온교로 불렸습니다. 1279년 몽고인들이 완전히 중국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야리가온교(경교)가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몽고인들은 중국에서 엄격한 등급 제도를 적용했고 한족 사람들은 지위가 낮아 원하지 않는 외래 통치자들의 신앙에도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 가톨릭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고 1265년 원의 세조인 쿠빌라이칸이 베니스 상인 폴로 형제를 통해 교황에게 칙서를 보내면서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 프란스시코회 수도사인 몬테코르비노의 요한이 베이징 총주교로 활동한 1305년 6000여명의 기독인들이 세례를 받았고 베이징에 3개의 성당을 세웠습니다. 가톨릭의 선교대상은 상층부에 있는 몽고인과 중동 아시아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한족이 다시 정권을 장악할 때 사라지게 됐습니다. 1368년에 건립한 명 왕조시대는 대부분 쇄국정책을 사용해서 외국인이 중국에 들어오기 어려웠고 선교활동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한 예수회 신부는 중국의 변방에서 “반석아, 반석아, 언제서야 깨어지겠느냐!”고 탄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국에 대해 침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579년 마이클 루게리가 거주승인을 받고 광저우에서 거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1582년 마태오 리치가 중국 마카오에 입국했습니다. 그는 중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양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고 자신을 서양의 승려, 혹은 유학자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회 선교사들은 점차 많아지게 됐습니다. 그들의 선교전략은 중국전통을 존경하고, 중국문화에 접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서양 유교’ 혹은‘서양으로부터 온 공자’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와 중국의 전통문화 사이의 모순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유교화 된 기독교’를 추구한 것입니다.

1643년엔 가톨릭과 중국 전통 문화가 충돌합니다. 천주(天主)와 중국 상제의 혼용, 공자제례와 조상 숭배 등에 대한 중국예의지쟁(中國禮儀之爭)이 발생한 것입니다. 여기서 강희황제와 중국 조정이 교황에게 그들의 전통의식과 전통문화에 대해 제시한 의견은 중국인에 있어 상제란 개념은 범신론적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참 하나님을 의미하고, 중국인이 고대부터 하늘을 경배한 사상(경천사상)은 그저 물질적인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중국 전통사상이고 공자제례는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중국 전통문화와 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1723년 왕위에 오른 옹정황제는 1692년 강희 황제가 발령한 보교령(保敎令)을 폐지하고 모든 교회를 폐쇄했습니다. 또 6개월 내에 모든 선교사들이 중국을 떠날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것은 가톨릭 활동의 공식적 금지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청도 이에 지지 않았습니다.
1742년 교황청은 1715년의 금지령보다 더 엄격한 결의를 함으로써 조정과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습니다. 1757년 건륭 황제는 중국의 제례에 반대하는 모든 선교사들을 쫓아내도록 했고 이로 인해 1775년 예수회는 해산됐습니다. 이후 가톨릭의 선교활동은 지하로 숨어 비밀리에 가정교회를 건립하고 성직자들을 배양하게 되었고 선교대상도 상층부에서 하층민들을 위주로 바뀌었습니다.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본격화되기 전에는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 활동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명나라 말엽에는 궁중에만 500여명의 신자가 있었고 전국적으로 20만 명에 달했습니다. 19세기말엽에는 라후족 이족 등 소수민족도 가톨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중국 전통문화와의 모순과 충돌로 일어난 예의지쟁, 청나라 조정의 장기적인 금교정책, 예수회의 교황청에 의한 강제 해산 등으로 카톨릭 선교는 몰락하게 됐습니다.

이제 개신교의 중국선교를 살펴보겠습니다. 1807년 로버트 모리슨이 중국
에 간 첫 번째 선교사입니다. 그는 중국 선교의 개척자로서 사전을 만들고
성경을 번역했으며 7년 만에 중국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1840년 아편전쟁이후 런던회 화란전도회 미국침례회 미국성공회 영국 해외성경회 등이 중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그들은 마카오, 광저우지역에서 사역했습니다. 1842년 난징조약을 통해 연해주가 개발되면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대거 중국에 입국, 해안 지역 선교를 시작했으나 중국인들은 아편전쟁과 기독교 선교사와의 관계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게 됐습니다. 갖가지 불평등 조약 뒤에는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의 수모를 받아 온 중국인들에게는 적대심과 서양인에 대한 증오의 마음이 동시에 싹트게 됐습니다.
그 이유를 들자면 첫째, 선교사들이 아편을 수출하는 회사의 직원 혹은 통역관으로 일하며 아편 무역과 특수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선교사들은 아편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중국 정부에 대해 강력한 정책을 펴서 문호를 개방시켜야 한다고 했으며 직접 모국에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셋째, 일부 선교사들은 아편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중국의 해안과 연해주 또는 정부의 사정을 살펴 전쟁수행과 전략 수립을 도왔으며 전쟁에서도 통역이나 의료 활동으로 전쟁을 도왔습니다.
넷째, 선교사들은 불평등 조약의 주요한 수혜자였습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선교사들은 특권을 갖고 거주하게 됐으며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면서 선교활동에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렇게 1900년 초까지 기독교가 연해지구에서 점차적으로 내륙 안으로 확산되어가면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상당히 많은 지식인들과 관원들이 배후에서 선동하고 백성들을 조직해 외국인 배척과 기독교 반대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840년부터 1900년까지,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400여 개에 달했습니다. 대부분이 1860-90년대에 이뤄졌습니다. 중국에서 비기독인들은 기독인이 한 명 더 있으면 중국인이 한 명 적어진다고 인식했습니다. 불평등조약으로 외국인들은 여러 가지 특권을 가졌고 민간종교와의 충돌가운데서 언제나 교회는 최종적으로 이겼습니다. 교회의 신자들과 관원들은 악독과 훼방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하면서 명목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불량자들이 교회에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고 거짓으로 예수를 믿고 사람들을 모욕하며 자신의 사욕을 채웠습니다. 그리하여 적대감은 쌓이게 됐고 그 결과 1900년 세상을 놀라게 한 의화단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반세기동안 마음에 쌓인 적개심과 분노들이 쌓여 일어난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에 개신교의 선교전략이 눈에 띕니다. 내지선교회를 창립한 허드슨 테일러가 복음을 전하며 교육선교사업에 힘쓰면서 출판을 시작한 것입니다.

의화단운동은 수많은 선교사와 중국교회 사역자들에게 반성의 목소리를 내게 한 촉매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불평등조약이 선교의 문을 열어 주기는 했지만 중국인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907년 상하이에서 세 번째 선교대회가 열린 때는 모리슨 선교사가 중국에 온 지 100주년이 된 시기였습니다. 이 때 각 종파에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수는 3833명, 그 중 세 번째 선교대회에 출석한 사람은 1179명이었습니다.

▣칼럼포인트
-초창기 천주교의 선교전략 - 중국전통을 존중하며, 중국문화에 접근.
-1643년 가톨릭과 중국 전통 문화의 충돌로 예수회 해산.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개신교의 선교활동 본격화.
-1807년 중국에 간 첫 번째 선교사 - 로버트 모리슨
-1900년 아편전쟁과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의화단 사건 발생
-중국 내지선교회를 창립한 허드슨 테일러

▣클로징
중국인들은 서방을 이해하는데 있어 두 가지 틀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서방국가를 적으로 보는 것, 즉 ‘우리 민족이 아니면 마음이 반드시 우리와 다르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우리를 죽이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진보적인 것을 따라 배우고 본 받아 온전히 서방 화하여 중국을 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국인의 기독교에 대한 입장이기도 합니다. 전자는 기독교가 침략자의 도구라는 것이며 후자는 기독교가 문화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중국 근대사에서 기독교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에 걸친 모든 영역에서 역할을 감당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앞으로 어떻게 선교활동을 펼쳐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중국은 이후로 보다 더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얼마나 준비됐느냐가 우리의 행로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자료출처: CGNTV http://news.cgntv.net/anews/Column_detail.asp?num=837&chk=C&s=C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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