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6)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5) 한국 땅을 밟았던 외국인 평신도들을 통한 개신교와의 접촉

(3) 바실 홀과 머리 맥스웰

하멜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은둔의 나라 조선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데 공헌한 사람은 영국 해군 머리 맥스웰(Murray Maxwell) 대령과 리라(Lyra) 호의 바실 홀(Basil Hall) 대령이었다. 이들은 1816년 9월 서해안을 항해하고 돌아가 바실 홀의 조선 항해기와 맥레오드(John McLeod)의 조선 항해기를 저술하여 서양세계에 조선을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이들은 처음으로 조선인들에게 성경을 건네주었고, 후에 귀츨라프 일행이 서해안을 탐사할 수 있도록 서해안 해도를 작성했으며, 조선 항해기를 저술하여 조선을 서양에 알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동양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었다. 영국이 1793년 매카티(Macarthey) 경을 수석으로 한 사절단을 파송하고 이어 1816년 암허스트(Amherst) 경을 수반한 사절단을 중국에 파송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동양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중국과의 외교적인 관계를 정상화하고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풍토와 역사와 지리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순조 16년인 1816년에 맥스웰을 선장으로 한 순양함 알세스트(Alceste) 호와 바실 홀을 선장으로 한 리라(Lyla) 호 두 함선을 파송해 이들이 조선의 서해안에 와서 해도를 측량하고 조선에 대한 일련의 정세를 연구하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 서해안 해도 작성의 임무를 띤 맥스웰 함장의 프리게이트 함 알세스트 호와 바실 홀의 브리그 함 리라 호는 8월 29일 위해위(威海威)를 출발하여 9월 1일 동틀 무렵 조선의 육지가 동쪽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일행은 황해도 대청군도에서 남하하면서 처음으로 해도 작성을 착수했다. 저들이 조선인을 처음 목격한 것은 소청도 남쪽 바다 입구에 있는 소청리에서였다. 제일 남쪽 섬을 바라보는‘아름다운 만’에 닻을 내리자 얼마 안 있어 5, 6명의 주민이 작은 배 하나를 타고 왔다. 50야드 가까이에 이르자 배를 멈추었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였으나 섬 주민들은 오지는 않고 호기심과 경계의 빛으로 바실 홀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은 보트를 타고 그들 가까이 갔으나 그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이 해안으로 노를 저어 어느 마을에 상륙하자 그들이 뒤따라왔다. 촌락을 이룬 그곳에 일행이 상륙하자 부녀자들이 마을을 버리고 급히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조선인은 상투를 틀고, 펄럭이는 넓은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닿는 상의와 짚신을 신었고, 중키에다 체격이 좋고 힘세게 보였다. 그들이 바실 홀 일행을 따라온 것은 단순히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조용한 마을에 외국인이 입국하자 경계의 태도를 취하기 위함이었다. 일행이 소청도 촌에 들어가 조선의 실정을 살펴보기를 원했으나 촌민들은 완강히 저들을 거절했다.

비록 조선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어떤 교류를 할 수는 없었지만, 바실 홀 일행은 조선인들의 생활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바실 홀 일행의 눈에 처음 만난 조선 사람들은“무뚝뚝하고 쌀쌀한 표정”을 지닌, 그러면서도“놀랍게도 호기심이 없는 고만(高慢)한 태도를 지닌 족속”이었다. 처음 만난 조선 사람에게 “멸시와 오만”을 접한 바실 홀 일행이 조선 사람들을 그렇게 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중국 정부에는 대단한 예물을 동원하고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조선에 대해서는 서해안을 탐험하고 해도를 작성하면서도 조선에 전혀 통보조차 하지 않은 자신들의 잘못되고 오만한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박용규는 한국기독교회사에 기록하고 있다.

1816년 맥스웰과 바실 홀이 서해안을 탐사하는 동안 마량진에서 마량진 첨사 조대복은 저들의 배에 올라 문정을 하였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아
무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 최초로 성경이 건네졌다는 것
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배가 마량진에 정박한 지 이틀째 되던 9월 5일 첨사 조대복이 비인현감 이승렬을 대동하고 리라 호를 재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의 상황을 바실 홀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그가 선실에 있는 서적들을 구경한 후 그는 성경(a Bible)의 장정에 상당한 마음이 끌렸으나 막상 그에게 성경을 권하자 비록 대단히 마지못해서이지만(주저하면서)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배를 막 떠나려 할 때 다시 건네주자 이제는 아주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성경)을 받고 상당히 기분 좋게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후 조대복과 이승렬은, 외국과의 교류를 철저하게 금하고있던 조정이 외국 함대의 국내 입항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책임을 저들에게 물어 관직에서 해직되었으며, 조대복이 받았던 성경을 포함한 3권의 책은 충청수사에게 모두 보내졌다가 후에 서울로 보내져서 서울 관부나 규장각에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김양선 목사는 주장한다. 이후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아쉬운 것은 바실 홀과 맥스웰의 입국이 복음 전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해안 해도 작성에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전한 성경이 영어 성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조선에 전해졌다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 성경을 통한 직접적인 역사를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인 선교 이전에 이 땅에 찾아왔던 평신도들의 방문의 의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실로 크다 할 수 있다.

첫째는, 이 땅에 복음을 가져다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둘째는, 우리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처음으로 전해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셋째는, 선교사가 이르기 전에 성경과 평신도가 먼저 왔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저들은 선교사가 아닌 상인 또는 군인이었으므로 적극적으로 선교하지는 못했지만, 저들의 언행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내었고, 자신들이 예수를 믿는 크리스천임을 나타내었다.

넷째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므로 극동에 있는 은둔의 땅 한국이 선교지로서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사(7)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1) 천주교의 전래 및 정착

중국에 천주교 선교사를 파송하여 처음 상주토록 한 것은 예수회에 의해서다. 예수회 창설의 주역을 맡았던 프란시스 자비엘은 동방 선교에 나서서 1549년 일본 선교에 이어, 중국 선교에 나섰으나 1552년 광동 앞바다의 섬에서 돌아갔다. 그 뒤 카르네이로(1568년), 발리냐니(1573년)와 40명의 선교사들, 루기에리(Michael Ruggien, 羅明堅)가 파송되었고, 루기에리의 권유로 선교 길에 오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에 의해 중국 선교가 본격화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자비엘이 돌아가던 해에 출생한 같은 예수회 신부로 이태리 태생이며, 1581년에 마카오에 도착한 후 남경(1595년)을 거쳐 1600년에는 북경에 들어갔고, 그 이듬해에는 북경에 교회당(南堂)을 세우고 동지 카타네오, 판토쟈와 함께 열심히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는 1603년「天主實義」등의 책을 저술하여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천주교를 소개하였다.

천주교는 17세기 초부터 조선의 지식층에게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朱子學)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사회·경제의 제반 체계가 굳어져 있었고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통하여 그 사회적 모순이 여러 곳에서 노정되고 있었던 만큼, 조선의 지식층,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사회의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며 이를 개혁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에게 이 천주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가 당시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남인계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환영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현(昭顯)세자가 한국인으로서는 비교적 초기에 천주교와 접하게 되었는데 그 때는 볼모 생활을 할 때였다. 병자호란 후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1644년 북경으로 옮겨진 후 당시 예수회 신부로서 청(淸)나라 조정의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에 오른 아담 샬(J. Adam Shall van Bell, 渴若望)과 사귀게 되었다. 서양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는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예수회 신부들은 세자를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환국할 때 선교사들은 중국인 궁녀 감독관인 환관 5명을 교인으로 구성하기까지 하였지만, 귀국한 지 70여 일만에 세자가 돌아감으로 그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1777년 정조(正祖) 원년에 이벽(李蘗), 권일신(權日身),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등 남인의 시파 유학자들이 서학(西學)에 관심을 가지고 한강가의 산사인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토론을 하였다. 이벽은 서학에서 신앙을 얻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쉬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으며, 다른 이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르쳤다. 1783년 정조 7년에 동지사 겸 시은사 황인점의 서장관 이동욱의 아들이요 정약전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자, 이벽은 천주교의 진리를 잘 알아 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일행을 따라 10월 14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21일에 북경에 당도하여 남당(南堂)을 방문하고 신부에게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다. 1784년 음력 정월 그믐께 귀국하기 직전에 예수회 신부 그라몽(Louis de Grammont)에게 세례를 받고‘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해 3월에 수십 종의 교리 서적과 십자가상과 성화, 묵주 등 진귀한 물품을 가지고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고, 이벽에게 교리 서적들을 전해 주었다. 이벽은 기독교 진리 변증, 중국과 조선에 있는 미신에 대한 반박, 7개 성사(聖事)에 관한 설명, 공교요리(公敎要理), 복음 해설, 매일의 성인전, 기도서 등을 통하여 신앙에 더욱 확신을 하고 전도하였다.

이벽은 천주교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양반계층보다는 중인(中人) 계층에 먼저 전도를 시작했다. 역관인 최창현, 김범우, 최인길, 지황, 김종교 등이 그의 전도를 받아 입교했다. 이들 중인계층 역관 출신들은 전통 유학에 사로잡힌 양반계층보다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이는데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북경을 왕래하며 이미 서학의 정신과 문명세계의 진보성을 보아 알고 있던 터였기에 이벽의 권유에 찬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계층에게 전도하려는 이벽의 시도도 계속되었다. 이가환, 이기양과 같은 학자들과 공개토론까지 벌이면서 입교를 꾀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1784년 9월, 경기도 양근(양평)에 사는 권철신, 권일신에게 전도하여 그중 권일신을 입교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승훈이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게 되면서 한국내에서 자생적인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고, 이벽, 권일신, 유항검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때 그들은 교황청의 허락도 없이 최연장자인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출하고 이들에 의해 성사를 집행하는 가성직시대(假聖職時代)를 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제도의 모순을 곧 깨닫고 북경 교회에 알려 지시를 받게 되었지만,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한 가성직제의 출현은 한국 천주교회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의 자생적 성격을 이해토록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의 천
주교회는, 초기의 학문적인‘서학’,‘ 천주학’의 단계에서 신앙적인 단계로, 초기의 기호(畿湖) 지방의 몇몇 학자들 중심의 단계에서 양반 계층을 포함한 사회 전 계층의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사(8)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2) 천주교회의 제사 문제로 인한 수난

한국의 천주교회가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은 제사문제 때문이었다.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1789, 1790년에 걸쳐 두 번이나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 신부의 파송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교회에서 오랜 동안 논란을 겪었던 제사문제에 대한 지도를 요청하였다. 윤유일이 받아온 답은 조상 제사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원래 예수회의 독점적인 전교 시기에는 제사 문제가 별로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예수회가 처음으로 현지 적응 정책을 써서 조상 제사와 공자 제사를 용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서 프란시스코(방지거)회와 도미니쿠스(도밍고)회 및 파리외방전교회가 중국에 진출하여 예수회의 제사 용납 정책에 대해 교황청에 제소함으로‘典禮問題’가 시작
되어 거의 120년 간 계속되었다. 교황청은 처음에는 단안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제사 금지’로 결론짓게 되었는데, 이런 조치에 반발하여 중국 정부는 예수회 이외의 선교 단체들을 추방하였고, 교황청은 예수회의 해산을 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윤유일이 받아온 조상 제사 금지 결론은 당시의 한국 사회를 규제하고 있던 지배 이데올로기라 할 주자학과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조선 사회가 조상과 부모에게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신위를 없애는 천주교도들의 행위에 대하여 국가적인 차원의 반응을 보인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가정적인 효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윤리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인간됨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념적 기반이라 할 주자학적 충(忠)을 붕괴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전례 문제가 한 구실이 되고 정치 역학 관계가 상승하여 몇 차례에 걸친 박해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1784년에 창설된 조선 천주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어 사실상의 종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년 동안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겪었다. 이 같은 박해는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다.

1785년(정조 9년, 乙巳) 봄에 형조의 금리들이 우연히 명례방(明禮坊, 명동)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벽이 중앙에 앉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있었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권이신, 권상학 부자 등이 모여 있었다. 금리들은 처음에 노름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들어갔다가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압수하여 형조에 갖다 바쳤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집주인인 중인(中人)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회유하여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것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 체포된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당한 후 1년만에 유배지에서 죽음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벽과 이승
훈은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며, 이백은 배교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번민하다가 1786년 봄에 열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핍박이 가라앉자 이승훈을 비롯하여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1787년 겨울에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등이 반촌에 있는 김석태의 집에 모여 서학서를 공부한 사실이 폭로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것을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라 하는데 이 사건을 폭로한 인물은 이승훈, 정약용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처음엔 서학에 호의적 관심을 보였던 이기경이었다. 이기경은 반촌에서 있었던 서학 연구 모임의 실황을 홍낙안에게 알렸고, 홍낙
안은 이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여 왕으로 하여금 서학관계 서적을 불살라 없애라는 명을 내리게 하였다.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소위 진산사건이 터졌다.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 권사연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터졌으니 조선 천주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맞은 대규모 박해였다.

정약용의 외종이 되는 윤지충은 진사 시험(1783년)에 합격한 양반계층 신분으로 1784년 서울에 갔다가 김범우의 집에 들러 천주실의와 칠극(七克)을 얻어 보았으며 고향에 돌아와 그의 외종형 되는 권상연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던 중 둘이 함께 입교하였다. 정미반회사건 이후 정부에서 서학을 금하는 명이 내리자 집에 있던 서학서를 태웠으나 은밀하게 신앙은 계속 지켰다. 그러던 중 1790년 말 윤유일을 통해 전달된 북경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들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은밀한 신앙행위가 1791년 여름 그의 어머니 권씨가 별세하게 됨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었다. 상례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위마저 만들지 않은 윤지충이나 그의 행위를 지지하는 권상연의 행위는 전통 양반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공개적 제사폐지 행위는 소문을 통해 중앙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정치 문제화시킨 장본인도 역시 홍낙안이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멸륜패상’(滅倫敗常),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난행을 범한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1년 12월 8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조선 초대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재정립하든지 아니면 천주 신앙을 포기하든지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는 박해라는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 천주교를 이끌어 온 지도자들의 배교로 인한 도전이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뿌리가 깊지 못한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을 비롯해 이벽, 정약전, 권일신, 최필공, 최인철, 최인길, 최필제, 정인혁, 손경윤, 양덕윤 등이 배교하고 말았는데, 천주교의 이와 같은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경 번역으로 시작된 후대 개신교 선교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지 못한 가운데 천주교 선교가 진행되었으므로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한 까닭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9)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3) 신유박해와 조선천주교

천주교회가 형성되면서 신자들은 모두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성직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상의한 끝에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정하였다. 1789년 10월, 교회의 지도자들은 윤유일에게 동지사 이성원 일행을 따라 북경으로 가서 천주교 주교를 만나 서울에서 교회가 조직되었음을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북경에 주재하는 주교 구베아(Gouvea)는 평신도가 행할 수 있는 세례성사만 인정할 뿐 성직제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1793년 구베아 주교는 서울의 신도들이 신부를 보내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고 북경 천주교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중국인 주문모(周文謀) 신부를 선정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주문모는 1794년 12월 국경을 넘어 이듬해 1월에 서울에 숨어들어왔다. 그러나 약 6개월 후에 밀고로 인하여 관의 체포령이 내려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신도들의 도움으로 6년 동안 용케 피해
다니면서 교회를 돌보며 지방으로 순회하면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그가 입국할 때 4천 명이던 교인수가 5년 후에는 만 명이 되었다.

박해가 완화되기를 기다렸으나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더 이상 숨어 지낼 수 없었던 주문모 신부는 이와 같은 조선천주교회의 상황을 북경의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를 썼다. 발각되지 않도록 명주에 라틴어로 쓴 다음 옷 속에 꿰매 철저하게 보안장치를 한 편지는 1797년 1월 28일 동지사 일행 틈에 끼어 북경에 입국한 두 명의 조선의 천주교인을 통해 중국 주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되었다. 주 신부의 편지는 포르투갈 왕이 조선 왕에게 조선의 천주교 신도들을 대변해 줄 것과 조선 왕과 수호조약을 맺을 것, 그리고 조선의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해줄 것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요청은 주 신부가 볼 때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 활동을 위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그러나 천주교가 전통적인 조상숭배를 거부하며 반국가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로서는 이와 같은 천주교 전래의 자유를 허락할리 만무했다. 오히려 주문모 신부가 이와 같이 요청했다는 사실이 조선 정부에 알려지면서 주신부의 그와 같은 행동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사건은 1791년에 있었던 신해박해에 이어 1801년 신유박해로 이어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로 이어졌다. 주문모 신부는 점점 더 절박하게 다가오는 위험을 피하여 국경을 넘어 귀국하려고 가다가 많은 교인들이 자기 때문에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되돌아와 자수하고, 1801년 음력 4월 19일에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위와 같이 처음 천주교가 전래되고 100여 년 간 조선천주교는 제사 문제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고, 그로 인한 순교자만도 10,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박해 속에서도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 제사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순교적 신앙으로 일관했다.

신유박해와 관련, 주목되는 점은‘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다. 천주교도였던 황사영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배론의 은거지에서 비단에 글을 써서 북경에 보내려 하다가 중간에서 발각되었다. 1만 3천여 자나 되는 이 글에는 박해의 경위와 주문모 신부 등 순교자들의 사적, 조선 천주교회의 부흥과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법이 나름대로 제시되어 있다. 문제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청나라와 프랑스 함대를 동원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신앙의 자유와 민족적 주체성 사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어서 신앙 외적인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일로 정부는 더욱 천주교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고, 이어 천주교에 대해 더욱 무서운 박해를 가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했는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이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일은 조상숭배 문제로 순교에 이르기까지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가 토착화 선교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조상제사를 비롯하여 공자숭배와 신사참배까지도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표현하는 국민적 예식이라는 이유로 허용했다는 것이다.

약 2세기 간이나 엄격히 금지되어 오던 동양제례가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문제화 된 것은 1932년 일본의 팽창주의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이 국민의 단결을 이루기 위하여 공자숭배를 국민에게 의무화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일로 인해 천주교인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당황한 교회당국은 공자숭배의 성격을 정부에 질의했으며, 정부는 이 의식이 종교적이 아
니라 단순히 사회적, 국가적 예식일 뿐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토착화 정책을 선교의 기본방향으로 지향하고 있던 교황 비오11세는 1935년 공자 공경의식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만주 주교단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례시 사자(死者)에 대한 사회적 경의 표시로서의 절도 허용하였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되었다. 군국주의의 일본정부는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국민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의무화하였다. 이에 교회당국은 신사참배의 의의와 성격에 대해 정부에 질의를 하였고, 정부는 이 의식이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표현하는 국민적 예식이라고 답변을 하였다. 교황청은 정부의 해명을 근거로 하여 1936년 신사참배를 허용하면서 선교사들은 조국에 대한 국민의 충성과 사랑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하며 신자들에게 일반 국민들에 못지않은 애국심을 갖도록 고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천주교의 주장대로라면, 그 직무에 있어서 무흠한 교황과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가 어떻게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이같이 번복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그 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조상제사나 공자숭배와 신사참배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일로 인해 죽은 자들은 순교자가 아니라 교회의 잘못된 결정에 의
해 어이없이 희생되어진 자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건만 보아도 천주교가 때를 따라 본색을 달리하는 단체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대진경교유행비

 781년(당 건중2년)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교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관(숭실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88.8*177.8cm

 

 

돌십자가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적을 증명한다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한국기독교박물관소장. 24.5 *24*9cm



오다 쥴리아의 묘
임진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사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니시에 끌려 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 소재.


북경 북천주당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방문시 꼭 들려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가 번역 되었다.

 

 척화비
1871년 신미양요때 세웠다가 1882년에 철거된 척화비는 바로 교회의 박해 상징이기도 했다.

 


 1890년대 개화전 제물포항


선교사들의 순회 전도
1891년경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서북지방 순회전도광경이다. 마펫, 게일, 베어드 등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교회사(2)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한국이 서양문화와 접촉한 시기는 언제이며, 서방 세계에 알려지게 된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문제는 많은 역사가들의 주요한 관심이 되어왔다. 그 첫째 접촉은 중국을 통한 경교와의 접촉 가능성이고, 둘째는 통일신라시대 아랍세계와의 접촉 가능성이며, 셋째는 몽고를 통한 가톨릭과의 접촉 가능성이다.

1) 중국을 통한 경교와의 접촉

중국의 기독교 접촉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도마와 바돌로매가 동방으로 진출하여 도마는 인도에, 바돌로매는 중국에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중국이 서방 기독교와 최초로 접촉한 교파는 경교였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일파는 선교의 방향을 오늘날의 이라크, 이란, 터키 동남부 등 동방으로 돌려 활동하였으며, 서방교회와는 다른 신학을 정립해가기 시작했다. 페르시아를 거점으로 오랫동안 세력을 확장하던 네스토리우스파는 674년 페르시아가 회교국 아라비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도 칼리파(Khalifa)의 신임을 얻어 계속 교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762년에 본거지를 바그다드로 옮겨 계속 발전했다.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당나라 시대였다. 중국에 경교의 전래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1625년‘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알로펜(Alopen,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중국에 도착한 것이 635년,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9년이었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내보내 이들을 환영하였고 당의 수도 장안에 머물게 하며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도록 배려하였다.

이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한자 명칭은 여러 가지다. 그들이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 음역인‘파사’를 붙여 파사교(波斯敎)라 칭하기도 했으며, 후에 그 교가 로마에서 전래되었음을 알고 로마를 의미하는 한자‘대진’을 넣어 대진교(大秦敎)라 불렀다. 그러다가‘광명정대한 종교’라는 의미가 담긴‘경교’(景敎)란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여‘대진
경교’(大秦景敎)란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638년 7월에 경교(景敎)는 태종(太宗)의 조정이 공인하는 종교가 되었다. 태종은 국비로 장안의령방(長安義零坊)에 대진사(大秦寺)를 건립하고 승려 21명을 두게 하였다. 태종은 경교를 공인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이 교는 도덕적으로 숭고하며 심오한 신비성이 풍부하고 평화를 존중하는 종교이므로 나라가 공인하는 종교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이 이유 외에도‘당의 태종이 경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배경에는 한(漢) 이래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룬 태종이 서쪽으로부터 확산되고 있는 아라비아의 회교국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알로펜은 635년부터 641년까지 포교하는 한편, 「예수 메시아경」을 번역하였다. 650년에 즉위한 고종(高宗) 때에는 경교를 진종(眞宗)이라며 전국 각지에 사원을 건설하고 알로펜을 높이어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삼았다. 이때부터 경교는 국교로 인정받았으며, 845년 무종(武宗) 때의 외래 종교 대박해 사건이 있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융성하였다.


경교가 한국에 전래 되었을 가능성은 있는가?

경교가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635-845년까지 210년 동안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통일제국을 형성했던 시기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의 군사력의 도움을 받았고, 그 후 통일신라가 친당 정책을 쓰면서 사회·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당의 영향을 깊숙이 받고 있었다. 더구나 일부 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 해상 무역이 발달해 중국,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지역에까지 무역을 확장하였다고 주장한다. 경교의 한국 전래를 주창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논리, 즉 신라와 당나라간의 정치, 문화, 군사 교류, 신라와 아랍국들 사이의 무역 교류 등을 통해 경교가 한국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1917년 골든 여사는 금강산의 장안사에서 발견한‘경교모조비’와 경주 석굴암의 무인상, 십일서관음상 등의 옷 무늬와 신발과 유리 장식 등을 페르시아의 것으로 보고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1956년에는 불국사에서 석재 십자가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김양선은「한국 기독교사 연구」에서 통일 신라 이후 능묘 제도의 특색이 되어 있는 호석(護石)에 부조(浮彫)된 12지상과 능묘 앞에 배치된 페르시아의 무인상 등이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교의 한국 전래에 대한 위와 같은 주장은 단지 추측일 뿐 결정적인 역사적 사료는 되지 못하며, 혹 전래가 되었다 할지라도 종교적인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사(3)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2) 아랍문명을 통한 세계와의 첫 접촉

한국이 최초로 유럽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루브루크가 한국을 소개한 것보다 4세기나 앞선 9세기경이었다.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에 따르면“서양 문헌에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 것은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Ibn Khurdhibah, 820-912)의 작품, ‘제도로 및 제왕국지’(Book of Roads and Provinces) 에서이다.

당시 아랍은 거대한 민족을 형성하여 아랍과 중국 두 제국이 국경을 맞대고 접촉하고 있었고, 한국은 중국을 통해 아랍 상인 및 문화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랍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는 동·서 문명을 잇는 가교가 되었고, 자연히 한국이 이들에 의해 서방 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가 한국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그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의 작품,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다른 쪽에 놓여 있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다.

그러나 높은 산들이 조밀하게 간도(Kantu, 산동성)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 산들은 신라(Sila)에 걸쳐 놓여 있는데, 신라는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를 방문한 회교도들은 이 같은 이점을 경험하고는 여기에 정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인삼, 녹용, 용설란(aloes), 장뇌(camphor), 못, 안장(saddles), 자기, 공단(satin), 계피(zimmit), 생강(galauga)을 수입했다.

쿠르드지바 이후 아랍세계의 문헌에는 신라가 자주 등장한다.

신라에 대한 소개는 10세기의 아랍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al-Masoudi, -965)의 세계 역사서‘황금초원과 보석광’에도 나타난다.

“바다를 따라 중국 다음에는 신라국과 그에 속한 도서를 제외하고는 알려졌거나 기술된 왕국이란 없다. 그곳(신라국)에 간 이라크 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고 토지가 비옥하며 또 자원이 풍부하고 보석이 일품이기 때문에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후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모로코의 알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자리한 사실이 나타난다. 그는 전래의 지리 지식을 집대성하여 지은‘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년)이란 책 속에 한 장의 세계지도와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려 넣었다. 그 제1지역도 제10세분도에 5개 섬으로 구성된 신라가 명기되어져 있는데, 그 지도의 후미에 신라에서는 금이 흔해서 개의 쇠사슬까지도 금으로 만든다는 기술이 곁들여져 있다. 이 지도는 유럽의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한국이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벨호 세계지도(1562년 제작)보다 무려 408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아랍 지도야말로 한국 이름이 적힌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3) 루브루크와 몽고를 통한 가톨릭과의 접촉

몽고가 세계 제패의 여세를 몰아 근동 중동의 회교도 국가들을 침공해 세력을 떨치면서“서구의 기독교는 오히려 몽고와의 제협을 바라게 되었고, 또 거기에 대한 선교의 가능성까지 찾아 타진하게 되었다. ”십여 차례 십자군전쟁을 통해 수많은 대가를 치르면서도 눈에 띄는 결과 하나 얻지 못한 상황에서, 그렇게 난공불락의 중동의 회교국들이 징기스칸의 말발굽 아래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서구의 기독교는 징기스칸을 단지 한 민족의 통치자라는 차원을 넘어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황은 한편으로는 고마움의 표시로 다른 한편으로는 차제에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일환으로 성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성지 순례의 자유를 획득해 준 몽고와 징기스칸에게 사절단을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가톨릭의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교황의 전권대사로 프란체스코회의 카르피니(Giovanni da Piandi Carpini, 1182-1252)가 선출되어 1246년 7월 22일 몽고의 수도 카라코룸(和林)에 도착하였다. 마침 그때가 쿠유크(Kuyuk)가 정종으로 즉위할 무렵이어서 그 대관식에 참석, 교황의 친서를 전달했고 정종의 우호적인 내용의 친서를 받고 1247년 가을에 유럽으로 귀환하였다.

1253년에는 다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루브루크(William de Ruburck)가 동료 크레모나(Bartolomeo da Cremona) 와 함께 카라코룸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프랑스 왕 루이 9세(Louis Ⅸ)의 사절들로 징기스칸의 증손 사르탁(Sartach)이 기독교인(네스토리우스파)이란 사실을 소문으로 전해 듣고 그와 협력하여 이집트를 공략할 정치적인 목적에서 파송된 인물들이었다. 카라코룸에 도착하여 사르탁을 만났으나 그가 기독교인이 아님을 알고 실망했
으며 종교적인 토론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헌종의 친서를 받아 1254년 돌아오고 말았다. 루브루크는 귀환한 후 몽고에서 체험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몽고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의 현황과 이때 유럽에서 포로로 잡혀 온 기독교인들의 실태를 소개하였다. 이때 그는 압록강 부근까지 여행하였으며 고려를‘카울레’(Caulej)로 표기하여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루브루크가 한국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한 사람은 아니다.
루브루크가 13세기에 한국을 서양에 소개하기 4세기 전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가 신라를 서양에 소개한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사(4)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4) 임진왜란을 통한 천주교와의 접촉

16세기 후반 유럽 열국이 종교개혁으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동안 성격은 다르지만 한반도는 전에 없는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었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이 바로 그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내적으로는 자체 개혁을 목적하고, 외적으로는 선교를 통해 실추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예수회(Jesuits)라는 선교단체를 세웠다. 예수회는 스페인 출신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와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에 의해 1534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되었다. 예수회의 동양선교는 설립자의 한 사람인 사비에르의 직접 참여로 시작되었다.

사비에르는 1541년 포르투갈 국왕의 지원을 받으며 인도 고아(Goa)에 진출했으며, 1549년 8월 15일에 토레스(Come de Torres)신부, 페르난데스(Joas Fernandes) 수사, 안지로와 함께 일본의 가고시마에 도착해 일본 선교의 장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천주교인을‘기리시단’(吉利支丹)으로 불렀다. 1552년 일본을 떠나기 전까지 불과 2년 3개월 만에 사비에르는 1천 5백 명의 개종자를 얻었는데, 후대 이들은 일본 선교의 초석이 되었다. 일본의 예수회 천주교세는 그 후 놀랍게 증가하여 1570년에 약 3만 명, 1579년 10만 명, 1581년 15만 명, 1587년에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일본의 예수회 천주교세가 이처럼 급증하게 된 것은 천주교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국가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무역에 관심을 갖게 된 일본의 다이묘(大名)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어, 교토와 규슈의 명문들이 기리시단으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기리시단 다이묘들의 출현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주민들의 개종으로 이어져 기리시단의 수가 급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교세를 가진 예수회가 수난을 겪기 시작했는데, 158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세상을 떠난 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이다. 포르투갈이라는 강대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예수회 세력의 급속한 신장은 정치적 안정이 구축되지 않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인 위협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집권 7년만에 예수회에 대한 금교령을 발표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강력한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한편 내적불안 요인들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1592년에 시작되어 1598년에 끝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이 전쟁 중에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첫째는 전쟁 중에 서양인 성직자가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이고, 둘째는 전쟁 중에 잡혀 간 많은 한국인 포로 중에 상당수의 천주교 개종자가 나왔으며 그들 가운데는 순교에 이른 사람도 있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의 한 사람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유명한 기리시단 다이묘 중의 하나였다. 불과 20여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고 평양까지 진출했던 고니시 부대는 조선 의병들의 저항을 받아 후퇴, 경상도 남단의 웅천(熊川)을 거점으로 삼아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전쟁이 오래 계속되자 고니시는 본국에 있는 예수회 신부들에게 종군 사제를 한 사람 보내달라는 서한을 띄웠다. 휘하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것이었다. 이 요청에 따라 1593년 12월 27일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와 일본인 수사 후칸 에이온(Foucan Eion)이 파견되어 1년 가까이 머물면서 은밀하게 천주교 신자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었고 1595년 초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1년 동안 세스페데스는 일본군인들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했을 뿐 조선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입국은“조선인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방한한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서양 사람으로서 더구나 크리스천이며 전도자인 그가 한반도의 땅을 밟았다는 점에서 역사상 특별히 기록할 만한 가치가”있다 하겠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던 한국인은 약 5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 가정의 노비가 되거나 노예로 팔려, 멀리는 마카오, 마닐라, 인도 및 이태리에까지 끌려갔다. 1597년 6월에 일본에 상륙했던 프란시스코 카를레티(Francisco Carletti) 수사는 5명의 한국인 노예를 사서 세례를 주고 인도 고아로 데려가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그 중의 안토니오 꼬레아(Antonio Corea)는 수사와 함께 프로렌스까지 가서 공부한 후에 로마에서 살았다고 한다. 포로된 한국인 중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자가 7천여 명이나 나왔다.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에서는 2천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며, 그러는 중에 한문으로 된 교리서가 한글로 번역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뒷날 포로 중의 일부가 귀국하였을 때 그 일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은밀히 신앙생활을 유지하였던 것 같다. 일본에 체류한 한국 신자들 중에는 권(權) 빈센트같이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1605-1637년에 걸친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천주교박해 시대에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희생된 이들도 많았다. 이 중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도쿠가와 궁전 안에서 궁녀로 있으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고오즈시마란 조그만 섬에 유배당해 그곳에서 절명한 오타 쥴리아(Ota Julia)를 비롯하여 6명의 증거자들이 일본 천주교회사에 기록되고 있으며, 최근 일본인 성인 26인
중 3인이 한국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사(5)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5) 한국 땅을 밟았던 외국인 평신도들을 통한 개신교와의 접촉

1595년경, 세스페데스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간헐적이지만 서양인들이 국내에 입국한 일이 있었다. 이 시기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들로는 1627년 경주 앞바다에서 표류해 입국한 벨트브레(Jan Janse Weltevree, 朴燕),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816년 조선의 서해
안을 탐사하기 위해 군함을 이끌고 입국한 영국 해군대령 머리 맥스웰(Murray Maxwell)과 바실 홀(Basil Hall)을 들 수 있다.

(1) 박연 일행의 한국 표착

박연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벨트브레(Jan Janse Weltevree)는 화란 리프(Riip) 지방 사람으로 1627년 무역선 우베르케르크(Ouwerkerck)에 올라 일본으로 교역 차 항해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일행 세 사람과 함께 경주 앞바다에 표착하였다. 박연은 같은 동향 출신인 디렉 헤리
스베르쓰(Direk Gijsbertz)와 암스텔담 출신 얀 피테르츠(Jean Pieterz)와 함께 물을 구하기 위해 단정(短艇)을 타고 육지에 상륙했다가 그곳 주민에 의해 사로잡혔다.

박연 일행은 경주로 압송되어 동래부사 앞에 끌려가게 되자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에 동래부사는 이들을 나가사키로 보내기 위해 동래의 왜관(倭館)으로 보냈으나 왜관이 저들을 받지 아니하고 되돌려 보내므로 저들은 부산에 4, 5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일행은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인조 대왕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다시 간청했으나 왕이 이를 거절했다. 저들은 심문을 받고 얼마 후에는 군대(訓練都監)에 편입되어 전투에도 참전했다. 박연은 3인 중에서 그 용모, 지식, 인격, 기술이 출중하여 호겸과 함께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서 한·왜군의 영솔자가 되었다. 세 사람이 모두 인조 14년 병자호란에
참전했으나 박연만 살아남고 두 사람은 그 전쟁에서 사망했다. 이 전쟁에서 공을 인정받은 벨트브레는 얼마 후 조선 여인과 결혼이 허락되어 1남 1녀까지 두었다.

그가 과연 개신교도였는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1618년 화란은 개신교 국가로 세계에 명성을 떨치며 세계 개신교를 주도하는 국가 중 하나였기 때문에 박연 역시 독실한 개신교도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김양선은 정재윤의 한거만록(閑居漫錄) 제2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벨트브레는 일개 상인이었고 전도자가 아니었으므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았으나 기독신자로서의 행위와 언사를 십분 이행하여 접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도 환경이 바뀌어지면 신앙에 변화가 오기 쉽다. 더구나 외국에 가서 기독교인이 전혀 없는 곳에서 신앙의 절조를 지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벨트브레는 일평생 신앙을 지켜서 생면부지의 사람들로 그를 훌륭한 종교인으로 추존케 하였으니 그의 신앙은 실로 놀랄 만하다. 그는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신교 신자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정재윤이 한거만록에서 지적한바 박연이“매양 선악화복(善惡禍福)의 이치를 말하고 툭하면 하늘이 갚는다고 말하니 그 말이 도(道) 있는 자의 유(類)하더라.”는 사실은 성해웅의 연경제전집과 탐라기년 제2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때 박연을 보는 주변의 인물들은 그가 하늘의 신을 믿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연은 조선에 정착, 자신처럼 배의 난파로 표착하는 외국인들의 통역을 담당하는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이국 조선에서 보냈으며, 그의 후손들도 모두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군인일가를 이루었다.

(2) 하멜 일행의 한국 표착

1653년 1월 10일 본국을 떠난 화란 상인 하멜 일행을 실은 네덜란드 무역선 스패로우 호오크(Sparrow Hawk) 호는 자바의 수도 바타비아와 대만을 거쳐 일본을 향하여 가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8월 15일 제주도 남해 앞바다 화순포에 표착하였다. 저들이 육지를 발견하고 안도감을 가지는 순간 거대한 파도가 배를 강타하면서 세 겹의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닥치고 그와 함께 배가 쪼개져 선창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익사당했다. 갑판 위에 있던 몇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 내렸고 남은 사람은 물결에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탑승원 64명 중 선장 에흐베르츠(Egbertz)를 포함한 28명이 익사하고 36명이 가까스로 물에서 기어올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8월 18일 하멜 일행은 현감 권극중에 의해 생포되었고, 역관을 불러 문정을 하려 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주현감은 하멜 일행이 난파된 배에서 마음대로 물건을 건져 낼 수 있도록 자유를 주었으며, 여러 날 동안 파선된 배 속에 남아 있는 물건들을 건져 내게 하였다.
효종실록, 하멜의 표류기, 연경제전집에 의하면 하멜 일행이 건져 낸 물품들은 식료, 의료, 적포도주, 서적, 양기, 천리경, 조총, 망원경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고, 그 양도 상당했다고 한다.

1653년 8월 21일 하멜 일행은 제주 감영에 압송되어 제주 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았다.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화란 사람으로 일본으로 가려다 사고를 당했다고 말하고,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간청했으나 목사는 국왕의 지시에 따르겠다며 정확한 답을 보류했다. 하멜 표류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문정관과 역관 벨트브레가 제주도에 도착한 것은 두 달이 지난 10월 29일이었다. 박연이 화란어로 하멜 일행에게 국적과 여행 목적을 물었고, 서로 같은 화란인인 것을 확인한 하멜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연에게 자신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박연은 외국인이 내지에 들어오면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사실, 일본 역시 바다 선상에서만 외
국인과의 교역이 허용된다는 사실, 더구나 기독교인과는 교역조차 금하고 있어 전에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을 대마도로 보냈는데 다 죽였다는 사실을 들어 일본으로 간다고 해서 생명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자신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훈련도감에 예속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멜 일행은 비록 일본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여
전했지만, 박연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54년 5월 말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효종을 만나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입국한 외국인을 도로 국외로 내어보내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므로 보내주지는 못하지만 왕으로서 이들을 관대하게 대우하였다. 또한 당시 상선에 승선한 대부분의 화란 사람들이 총포에 능숙한 이들이어서 전투 훈련관으로 적합하였기 때문에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편입되어 훈련도감 대장 이완 휘하에서 박연의 지도를 받으며 군인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해양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박연을 통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화란의 우수한 과학문명이 조선에 접목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항해술은 모든 과학지식의 집약을 요구하는 분야였기 때문에 이들이
갖고 있는 서양 과학에 대한 기술은 대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생활에 잘 적응을 한 박연과는 다르게 하멜 일행은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1657년 전라도 작천병영으로 유배되어 10년 동안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10년의 감금생활 동안 하멜 일행은 선관을 만나 행동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에는 조선의 문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산사를 돌면서 수도승과 환담을 나누며 조선 종교와 문화에 대한 많은 식견들을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으며, 이 기록들은 후에 하멜표류기를 기술하는 데 상당히 훌륭한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천병영에 유배되어 살던 10년의 대부분은“악관의 학대와 흉년과 기근이 그들을 한없이 괴롭혔으며”이로 인한 식량부족으로“한 때는 구걸행각에 나선 일도 있었다.”유배생활 7년 만에 33인(탈출 시도로 사망한 2명을 포함하여 3명이 사망한 상태임) 중 11명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들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흉년과 기근으로 인한 식량 문제가 극에 달하자 그들을 책임 맡은 감사는 1663년 3월 이들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일행을 여수 좌수영에 12인, 순천에 5인, 그리고 남원에 5인 등 세 곳으로 분산 배치시켰다.

오랫동안 조선을 떠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하멜 일행은 전라도 여수의 바닷가로 보내지자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664년부터 3년간 나무를 해다 파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해 이들은 작은 배 한 척을 구입하여 탈출 준비를 하였으며, 1666년 9월 4일 여수 좌수영에 유배되어 있는 12명 중 하멜을 비롯한 5명과 다른 곳에서 방문 온 2명, 그리고 순천에서 불러온 조선인 뱃사공 등 도합 8명은 한밤을 이용해 여수를 떠나 일본 이쓰시마(五島)에 도착하였으며, 그곳 관리를 만나 자신들이 화란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나가사기(長崎) 화란상관으로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668년 7월 20일, 일행은 화란 상관의 주선으로 고국 암스텔
담에 도착했다. 또한 조선에 남아 있던 생존자 8명도 일본 대마도주의 요청에 따라 1668년 4월 12일 대마도로 보내어졌고, 고국 화란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약간의 풍랑을 만난 후 이들 배가 1668년 7월 20일 암스텔담에 도착했다. 살아 돌아온 우리는 13년 28일에 걸친 긴 포로생활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으며, 아울러 뒤에 떨어져 있는 우리의 불쌍한 동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절히 간구했다.”

하멜은 그의 표류기에서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시종일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고 지내 왔음을 밝히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자신의 14년간의 조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표류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하멜은 그 동안 경험한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등 조선의 물정과 조선인의 기
질, 풍습, 군사, 법속, 정치, 종교, 사회관습에 이르기까지 조선에 관한 모든 지식을 소상히 기록했다. 하멜의 표류기는 유럽에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얼마 후 영어, 프랑스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 유포되면서 유럽인들에게 조선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은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출판 동기와는 달리 표류기는 조선선교와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진 많은 선교 후보생들에게 유용한 조선입문서가 되었으며, 그리피스는 하멜의 표류기를 담아‘한국, 국내외’(Corea, Without and Within)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1832년의 귀츨라프의 서해안 항해 및 선교와 1865년의 토마스 목사의 조선선교는 모두 하멜의 표류기에 힘입은 바컸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박연과 하멜은 개신교도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조선과 접촉이 있었던 박연과 하멜이 개신교도였다는 점에서 조선과 개신교와의 접촉 역사는 청을 통한 천주교와의 접촉의 역사보다 앞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smmission

 

 

 한국교회사(그리스도인의 역사관)<출처: 경향교회보 한국교회사>

 

한국교회사를 연재하는 목적은 선교 121년을 맞이한 한국교회의 발자취를 살펴봄으로써 과거에 한국교회가 수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그 신앙을 지키며 성장하였는가를 살피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고 모색해 보며,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봄에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

그리스도인의 역사관

그리스도인의 역사관은 어떠해야 하는가?

역사(History)란, 인류사회의 과거에 있어서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 그 기록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역사가 성립되는 전제들로서는 ①시간(언제) ②공간(어디서) ③사람(누가) ④사건(무엇) ⑤기록(의미와 교훈) ⑥목적(왜 일어났는가?) ⑦교훈(어떻게 되었는가?) 등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역사란 시간과 공간 세계 속에 일어났던 기록적 가치를 가진 사건들의 모음임과 동시에 그 사건들의 의미와 연관(사건과 사건 간의, 어제와 오늘 간의,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나 사이의)을 탐구하는 인간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역사관이다. 이 역사의 중심은 언제나 인간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 역사는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또한 과거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역사관은 이와 다르다.

기독교 역사란, ①여러 시대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헤롯 왕 때) ②유대 베들레헴에서 ③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④오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구원) ⑤성령을 보내어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전개해 나가는 일을 ⑥기록하여(성문화 계시=성경) ⑦오늘에 교회가 받은 선교적 사명으로 삼아 구원성취를 이루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역사관과 기독교적 역사관은 모든 관점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1) 우선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리스도인이 보는 역사는 인류사도 아니요, 문화사도 아니요, 사상사도 아니요, 전쟁사도 아니며, 세상 나라의 흥망성쇠사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계사의 중심은 구속사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을 위하여 어떻게 역사를 섭리하셨는가?’를 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사관이다.

2) 역사의 중심인물이 다르다.

일반 역사의 중심인물은 영웅과 호걸과 재사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과 그가 행한 일들을 중심으로 기록되는 것이 일반 역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중심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속사의 중심에 우뚝 서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기 때문이다.

3) 또한 역사의 전개 기관이 다르다.

일반 역사는 국가라고 하는 세상 기관을 통해 역사가 전개된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는 그의 몸 된 교회 운동을 통하여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역사는 곧 교회사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세상속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어떻게 성장하고 선교하였는가가 역사 기록의 중요한 내용이되는 것이다.

4) 또한 역사의 전개 방법이 다르다.

일반 역사는 힘(칼의 권세)을 바탕으로 그 역사를 전개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은 케르그마 곧 전도(설교, 말씀의 검) 운동을 통하여 전개된다.

위와 같은 역사관은 역사에 대한 변할 수 없는 우리의 관점이다.


세계사의 중심인 하나님의 구속 역사

1)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고 하는 선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시간과 공간과 모든 물질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유지된다는 의미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가 하나님이시요, 그것을 다스리시는 통치주도 하나님이시요, 그 최종적 소유주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이를 한 마디로 성경은「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2) 역사 운행의 목적은 구속사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하였다.

이는 역사 존재의 목적이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이 세상 역사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를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 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해 내는 역사로 진행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이라고 하는 영원한 형벌 가운데 놓여있을 때에 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셔서 저를 구원하셨다. 노아에게 방주를 예비케 하셔서 저를 구원하시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성민(선민)을 삼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그 백성을 출애굽 시키심으로 저들을 구원하셨다.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과 나라를 통치하시고, 저들이 범죄하였을 때 바벨론과 앗수르에 포로로 보내셨다가 당신이 정하신 때에 저들을 귀환케 하심으로 구원하셨다.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 운동을 전개하시므로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내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역사를 존재케 하는 근본 목적이요, 의의였던 것이다.

구속사야말로 모든 역사의 중심이요, 의의요, 열쇠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 이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3) 역사의 중심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일반 역사의 중심인물이 영웅과 호걸과 재사라고 하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중심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래서 애굽의 바로나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나 페르시아의 고레스나 헬라의 알렉산더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듯 하였으나 결코 영구히 역사의 중심인물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저들은 모두 다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사라져 버리고 마는 유한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시작부터 마치는 그 날까지 결코 사라지지 아니하고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구약의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으며, 신약의 복음서들은 역사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사셨는가를 증거하고 있으며, 서신서와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
서 이 세상의 끝 날에 다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역사 곧 구속사의 중심에 언제나 영원토록 우뚝 서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세계사의 구심점이 되고 분기점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역사의 분기점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주전(B.C.)과 주후(A.D.)로 나뉘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 모든 개인과 가정과 나라들마다 주전에서 주후로 변화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주를 만난 사람마다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의 새 시대가
열리고, 새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4) 역사의 전개 기관은 교회이다.

일반 역사는 국가라고 하는 세상 기관을 통해 역사가 전개된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는 그의 몸 된 교회 운동을 통하여 전개된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운동이야말로 구속사 성취의 필연적인 기관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이 역사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곧 그의 몸 된 교회가 역사의 중심이라는 사실과 직결된다.

5) 역사의 전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일반 역사는 힘(칼의 권세)을 바탕으로 그 역사를 전개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은 케르그마 곧 전도(설교, 말씀의 검) 운동을 통하여 전개된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은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역사를 당신의 뜻대로 후회함이 없이 진행해 가신다. 죄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심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역의 중심 계획이시다. 그러므로 세계와 세계 역사는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든지 구속사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기쁘게 동원된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상관없이 거룩하신 주권자의 목적 성취를 위하여 동원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님은 특별히 전도 운동을 통하여 당신의 구속사를 전개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역사가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져야 한다. 아니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지기 전까지 인류 역사는 복음때문에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역사는 결국 택자 구원 완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 역사의 주인이시다.

역사의 주인이신 그 하나님이 이 세상 역사를 구속사로 진행하신다.

구속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운동을 통하여 구속 운동을 전개하신다.

교회는 복음 전파를 통하여 구속 운동을 전개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역사를 구속사로 진행하심은 당신의 택자 구원 완성을 위해서이다.

택자 구원이 완성되는 날, 인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곳에서의 영원한 삶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구속사의 현장에 한국교회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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