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제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대진경교유행비 : 781년(당 건중 2년)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고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 관(숭전)에 소장되어 있다.88.8*177.8cm.

돌십자가 :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 적을 증명한다.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24.5*24*9cm.

몽천포구 :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야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오다 쥴리아의 묘 : 임잰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 시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시니에 의 해 끌려 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 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 소재.

 

1)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 에 에배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했다 가 에배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년-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 그때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 때) 우리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번 방문)

*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같은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자(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2) 몽고를 통해 접촉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 할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거리 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줘서 고맙게 생각함.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그래서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을 1246년에 보냄.

* Rubruc은 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 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 당함.당시 몽고는 우리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Coree - Korea

 

3)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 1592년 임진연에 전쟁 일으켜 우리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 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 들어 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 었다.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그는 우리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 :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세스 페데스는 6개월 수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새통치자 출현함) - 기도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 이 임진란 때문에 우리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특히 일본에 대해)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제2장 한국에 있어 카톨릭

북경 북천주당 :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방문시 꼭 들려 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서학서들이 조 선에 전달되었고 그 속에는 천주교에 관한 서적. 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 다.

곤여전도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 (F.Verbiest)가 제작 (1674년) 한 지도로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 되었다. 8퍽 병풍. 한국기 독교박물관 4-5*173.3cm.

천진암터 :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초기 서학(천주교)의 신앙회의 주역이 었던 이벽, 이승훈, 권철신, 귄일신, 정약종의묘가 조성되어있다. 경기도 광주 군 퇴촌면 우촌리 소재. 1) 선교사 들어 오기 전에 나가서 만나서 받아들임.

*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한 만주의 여진족은 자기들의 요구를 안들어 준다고 10 만을 이끌고 임진란 40여년 만에 한국을 침공. 이때(인조14년)에 우리나라 조종 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 했지만 결국 남한산 성에 ?겨가서 투항했다가 1637 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정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항복. 이때 인조의 소현세자와 대신들이 청의 심양으로 끌려감.

* 1644년에 끌려간지 7년만에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심양에서 명 의 북경으로 천도(소현세자등도 같이 감)

* 그때에 베이징에 아담 샬(주교)이 묵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만나 친 분나눔.(2달동안) - 소현세자가 기독교 저술을 읽을 기회가 있었음.

*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얻어 통감목사(벼슬)라는 위치에 까지감.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 소현세자가 귀국하게 됨. - 이때 서양문물, 기독교 서적을 아담 샬이 줌. 그것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는 곧 죽게됨.

*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 경제의 개조책이라는 책도 만들고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남.

2) 학자들의 교리연구중국을 섬기던 조선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정초에 성절사, 원단사, 동지사, 천추사등을 북경에 파송했다.(사절단은 한 행차에 300- 500명 정도가 50일에걸 려 가서 50일 정도 머물고 돌아왔고 진상갈때에는 비단, 금, 은, 보석, 호피, 좋 은약 등을 가지고 갔다.)

* 1601년에 마태오리치가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남당이다.아담 샬이 살던곳에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동당이다.

* 1603년 마태오리치가 쓴 '천주실의' 란 책을 그때 진상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져옴.

* 조선조 시대에 주자학이 당쟁에 질리고 허례허식 하던때에 나라 기강 이 안 잡혀서 이때에 학자들이 '천주실의'를 가져오자 연구했다.

* 조선조 이 수광 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일에 보상이 있고 악 하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 고 이웃을 제 2의 나라고 하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 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주교책을 가져옴.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유인용 - '어우야담' 제 1권에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언급함.허균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힘.

*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 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 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3) 이승훈의 入信한국 천주교의 발생지 : 경기도 광주, 양근(양평)이벽, 이승훈, 권..가 여기서 모여 교리를 연구하였다.이벽의 누이 : 양근 고을의 정약전과 결혼 하였다. * 이벽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열화 같은 사람이다.1777년 에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한강터에 외진곳 주어사라는 곳에서 교리 연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100리를 걸어 왔다고 함.

* 走魚寺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는데 천주교 교리 서적이 너무 빈약 해 중국에 가서 도움 요청을 하자고 결정함.

* 이승훈은 아버지가 그당시 북경에 갈 일이 있어 같이 따라감.(이벽은 이때 이승훈에게 가서 이번에 갈때 천주교 교리서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함.)

* 이승훈은 북경에 가자마자 북경의 천주당에 갔다.그래서 돌아올때는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옴.

* 이승훈은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하고 1789년에 평택 현감이 되었다.

* 이승훈은 북경의 남당에 찾아갔다.(여기서 교리를 배우고 1784년에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글라몽에게 영세를 받 는다.) 그래서 이승훈에게 영세명을 주었는데 '베드로'란 이름을 주었다. * 이승훈이 영세 받고 돌아올때 성화, 묵주, 책 가지고 돌아옴.

* 이승훈의 전교 : 이승훈이 돌아온 5년만에 신도 4000명이 불어나고 이들은 1785년 봄 서울 진 고개에 중인(당시 천민, 중인, 양반) 김범우 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교리 연구를 학자들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함.

* 조선 정부 형조 판서는 진고개의 예배당을 급습하여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우 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에서 타계함. -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에 지금 의 명동성당이 서있음)

4)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1785년 김범우 집 급습으로 많은 사람이 배교 하기 시작함. 이때 이승훈, 이벽도 배교함. * 시간이 지나 핍박이 줄어들자 다시 돌아옴. 그리고 성직자의 필요성을 느낌. 그래서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 * 주베아 주교는 중국사람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 주 신부는 윤유일, 지향 의 인도로 밀입국함.(엽부로 가장)

* 1795년 1월 한성에 잠입해 들어옴. 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부활절 전날밤에 몇 사람에게 영세줌.

* 한영익이라는 개심을 가장한 자가 주 신부를 관가에 고발함. 그래서 조선 조정이 주신부의 체포령 내림.

* 믿음 좋은 신자 하나가 주신부를 가장해 자수함.(최이길 이라는 사람인데 턱수염이 없어 들켜서 처형당함.)

* 주 신부는 가장을 하는데 상복도 입기도 하고 남의집 헛간에서 있기도 하는데 그러는 동안 신도는4천에서 1만으로 늘어남.

* 또 배교가 있자 주 신부는 국외 탈출 하려다 그냥 스스로 자수함. 1801년에 마침내 새해 남터에서 참수형 당함.

 

제3장 수난 당하는 카톨릭

명동성당 :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 자리에 1887년부터 10여년에 걸친 공사끝에 완성되었다. 사진은 1920년대 모습이 다. 1) 수난을 불러온 요소a. 조상제사의 문제유교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은 효이다(효는 백행지본이다.)그러므로 불효는 일천가지중에 가장 큰 죄이다.그리고 효중에 큰 부분이 제사이다. 중국의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할때 조상제사는 정치적의식이요 기독교는 유교의 발전이라고 했다.(배타 방지위해) 그러다 보니 종교가 혼합적 이다.

후에 선교사 도미니크 일행이 잘못된 이런것을 보고하자 교황 이노센 트 10세가 제사금지를 내림.

* 조상제사 때문에 첫 희생자는 윤시충 이다.윤시충은 전라도 사람으로 25세에 진사급제하고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 집의 교리 연구에서 감화 받고 3년후 입교함.그리고 모친이 별세 했을때 상복 입고 호곡하고 위폐를 모시지 않고 제 사도 드리지 않았다.- 이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윤시충과 외종형 권상연은 같이 처형당함.-

* 그당시 천주교 믿는 자는 패륜 외도라 하여 박해 했다.

b. 붕당적 요소(당시의 당파 싸움으로 인한 박해)영조때 부터 천주교가 들어 왔는데 해서, 관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 는 사색 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다.

영조왕은 당쟁 화를 절감해서 당쟁을 줄일려고 힘을썼고 정조 대왕도 성품이 어질어서 당쟁을 줄일려고 힘을썼다.

* 사도 세자문제 발생시시파(세자 동정하는파) - 남인 이라는 천주교도가 많이 가입해 있었다.숙종때 남인 세력이 약화됨. 남인에 속해 있으면 등용길이 막혔다.

* 이런 남인에게 우호적인 재상인 채재공이 있었는데 1799년 사망했다.정조대왕이 또 사망하자 천주교 박해가 터졌다.

* 정조 아들 순조(11세)가 왕에 오르자 정순왕후(정조의 첩)가 순조 뒤에서 정 치를 함. 이때 천주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됨.

* 채재공이 죽자 죽은후 관직까지 박탈함.(1801년) * 1801년 이때는 서학을 박해하는 교서를 발표함.(서학은 인륜에 반역하고, 교황 은 장가도 들지 않고 아들도 안 낳고 밑의 똑똑한 자를 뽑아 자기의 위치를 넘 겨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세습 윤리와 안 맞아 박해 해야 한다고 함.)

c. 황사영의 백서가 문제됨

한국 카톨릭의 4대 박해가 있었는데1. 신유 박해(1801년) : 황사영(경상도 창원사람)은 정약전의 형 정약용이* 주신부에게 영세 받음. 17세에 진사 급제를 함.박해가 시작되자 충북제천 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를 찾아온 황심을 만남. (천주교 구하기 위해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 보내자고 약속. 그 편지는 길이 62 센티 폭 38센티의 비단에다 작은 글씨로 만 삼천자의 글로 보냈는데 내용은 박 해와 참상을 보고 하는 것인데 그만 도중 들켜서 조선 조정에 밝혀짐)

* 이 백서가 들켜 카톨릭은 매국종교로 지탄 받게됨. 백서 내용 : 1). 조선 천주교의 실상을 기록하고,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다는 내용.

2). 당시 정계의 사색 당쟁의 실상을 기술. 박해의 이유는 당쟁 때문이라고 말하고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교인이 열악하다고 기술.

3). 중국의 신도 1명을 택해 북경 지대에 점포를 개설해서 청국과 조선 사이에 통신 연락을 하게하고, 북경의 청국 황제를 움직여서 조선 왕으로 하 여금 서교를 받아 들이게 하도록 압력 부탁, 또 중국의 공주를 조선조 왕자에 게 정략 결혼시켜 조선을 굴복 시키고 서학을 받아들이도록 부탁, 또 군함과 군수 물자를 실고 와서 이 나라를 치라고 부탁. 나라는 망해도 천주교는 전파 되야 한다고 함.

* 황사영은 1801년 27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의해 참수되고 이 사건으로 300명 이 순교하였다. 이것을 신유박해라고 한다.

* 신유박해 이후 서학의 창대를 염려하여 쇄국 정책을 조선에서는 실시. 북경 외의 모든 문을 닫아 버림.

* 헌조의 명을 따라 발표된 책들이 : 척사윤음이 나왔고 대외쇄국강저, 안정복 (천학고), 천학문답, 김치진(척사론)

2. 기해박해(1839) * 신유박해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북경 주교에게 성직자 보내 달라고 신자들이 요청.

* 정약종 아들 정하상이 있는데 1816년 2차례 걸쳐 북경의 신부에게 요청 했 으나 여의치 않음.

* 1827년 정하상의 편지가 라틴말로 번역되 교황에게 알려져 그레고리 16세 (교황)은 조선교구를 북경 교구에서 분립 하기로함.

* 초대 주교로 브르기에를 임명함.- 1831년 * 그레고리 16세 교서에서 첫째로 교회를 양떼로 보지 않고 목장으로 봤다.둘째로 성직자는 공고 교리, 성례전을 위해 파송한다.(즉 천주교는 교리와 구역을 더 중시함을 알수 있다.)* 브리기에는 부임 하지도 못하고 객사함.

* 1835년에 1대 주교가 객사하자 블란서에서 신부들을 파송하는데 그중 모팡이 라는 신부가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 통해 상륙.

* 2대 주교로 앙베르가 우리나라에 잠입해 옴.샤스텡이라는 블란서 신부가 그후 또 옴. * 이 세사람의 신부를 통해 카톨릭 부흥.

* 헌종 5년 (1839)에 2차 박해 시작.당시 영의정 이지현이 사학박멸을 주장하자 순원 황후가 허락.

* 정하상을 비롯한 100명의 교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당했고 나머지 세 신부는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 당했다.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 말함-강조)

 

3. 병오 박해(1846)이 박해전 1845년 앙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페레올 주교가 조선 사람으로 최초의 조선 안수 받은 김대곤 신부와 한성에 잠입한다.6개월후 김대곤은 외국인 신부 안내 신부라는 일을 하다 군교에게 잡혀 들어감. 1846년 김대곤 신부 처형(살려주려고 했으나 끝내 믿음 지킴) 이 이후로 많은 무서운 박해가 시작 되었는데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4. 병인 박해와 블란서(1866) 이때 우리나라는 동학 난으로 많은 시련을 격을때 동북쪽(두만강) 강변에 러 시아가 자꾸 통상하자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 대원근의 측근이 카톨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성에 베르노 주교가 있었는데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대 원군이 카톨릭에 관대한 생각이 있음과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에 상당한 지 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인은 아들 왕자가 황제에 등극할때 미사 드려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또 왕자의 유모는 영세까지 받은 여자였다 한다.

베르노 주교는 한성에서 열심히 전도한 결과 1865년에는 12명의 선교사와 평신도 2만3천으로 늘었다. 당시 상황이 이래서 김기호, 홍범주 등이 의논해서 조선, 영국, 블란서 의 3개국이 동맹하여 방하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민비(대원군의 며느리) 는 비밀리에 베르노 주교에게 블과 교섭해서 외세에서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남종삼(조선의 독실한 카톨릭 지도자)을 대원군이 접촉하는 등 카톨릭과 많은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희소식은 오지않고 베르노 주교는 카톨릭은 정치적 개입을 원치 않고 방하 책이라는 자체도 부족하다 하여 묵살 하였다.여기에 존심이 상한 대원군이 옛 감정이 살아나고 척외사상과 서학금지 상소문이 빗발쳤다. 또 당시 우리가 존중하는 청도 천주교 배척 분위기 여서 더욱 그럼.

그래서 새남터에서 7명의 선교사와 베르노 주교가 죽는다. 서문에서는 조선의 신도들이 많이 죽음. 한국 통사에는 교도 12만명이 죽었다고 기록?으나 다른 자료 종합결과 8천명 정도라함.(3년 동안) 이것으로 인해 블란서 군대를 우리에게 보내 전쟁하도록 하는 원인이다.

니델이라는 선교사가 포교들을 피해 충청도 해안으로 빠져나가 2명의 신 부는 거기남겨 두고 니델과 조선교도들은 아산에서 어선을 빌려타고 중국 산동 성의 지프라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 도착한 조선 교도들은 커다란 블란서 군함을 보고 이것으로 조선을 위협하여 천주교를 널리 펼치자고 말했다.

이 조선인 11명중 4명은 중국 3대 도시중 하나인 천진의 블란서 공관에 찾아가 공사인 블란서 제독(로쓰)를 만나서 한국 박해를 보고했다. 이에 분개한 블의은 청국 총리에게 보고하고 니델을 통역삼아 군함을 몰고 강화도에 침공했다.(병인양요)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조서를 내려 어린아이까지 죽임.

* 병인박해와 미국. 1866년 7월 평양 대동강에 국적이 미국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 들어왔다.(군함이 아니라 상선) - 여기에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타고 있었다.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 한강인줄 알고 대동강에서 있다 물이 빠져 남아있다 평양 관군괴 제너럴 셔먼호가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평양 시민이 모두 합류하여 상선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있은 후 1871년에 북경에 주지하던 미국 공사 F로라는 사람이 청국의 총리 아문을 통해 조선 정부에게 셔먼호 사건을 묻게했다.

- 조선정부는 조선은 외국 상선이라 해서 다 적대한 것은 아니다. 1855년, 1865년에도 미국 함정이 황해도, 평안 연안에 표류했을때 도와주고 헤어질때 술까지 했을 정도다.따라서 우린 의심 받을것이 없다. 단지 우리 허락없이 통상 하려고해서 불가피 했다고 밝혔다.-

미국 극동 함대 소장 로져스는 군함 4척을 이끌고(1871) 강화도 해역을 통해 광성진 까지와 싸움 벌어졌다.(한성 수비대와)

이것으로 외교 문제 발생하자 대원군은 일본에게 쇄국을 다시 재천명 했다.당시 조선은 외교를 몰랐으며 일본 외에는 설명할 곳이 없었고 일본이 다른나라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헤밀턴 피시(미국 국무 장과)는 일본 정부를 통해 조선의 쇄국 정책을 듣고 이제부터 미국과 조선관계는 일본이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의 배경이 됨.-

여기에 대해 로빈슨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는 고대 로마 기독교인들이 당한 고난보다 한국의 4대박해때 고난이 더컸다고 말했다. 스테판 나일 박사는 책에서 조선 카톨릭 역사는 가장 로멘틱하고 믿지 못할정 도의 수난시대라고 말함.

* 조선 천주교의 신앙 형태조선 천주교는 철저히 수난과 박해로 얼룩져 있고 4대 박해를 거쳐오는 동 안 피맺힌 헌신과 형극을 거치면서 신앙형태가 생겼다.

(1) 이들 교회는 수난을 통해 오면서 상류에서 하류층으로 신앙의 계층적 구조로 변모 되었다.(2) 중류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민족 주체의식이나 고유의 민족의식에 접촉함 으로서 조선적 기독교에 언문(한글)을 중시하다.(천주교 서적이 많이 한글로 되어있다.)(3) 1850년대 와서 천주교가 하류층으로 파고들어 격정적이고 종말적인 위기 의식으로 변모됨. 그래서 마침내 저들은 박해로 인해 종교의 내면화 지향적이다.(4) 1919. 3. 1일에 개신교 교도들은 많이 참여했으나(33인중 16명) 천주교 교 인은 전혀잠잠.(박해에 그동안 질림)

제4장 한국의 개신교회 (프로테스탄트교회 영국교회(聖公會, Protestant Church)

귀츨라프 : 1831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상륙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토마스의 무덤 :1866년 병인교난 중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순교한 토마스의 시체가 묻힌 곳이다.

이수정의 개종 :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녀 간 이수정은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성서 번역과 선교사 초빙 및 유학 생교회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진은 1883년 5월 개최된 일본 전국 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한 이수정(가운데 한복입은 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로스역 성서 : 스코틀랜드연합 장로교회의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만주 봉천에 머물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두었고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의 협력을 얻어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1. 시대적 상황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졌으나 근래에 들어 종교적으로 심한 허탈감을 느낌.(고려조 : 불교, 조선조 :유교)

그러나 기독교가 전래되기 약간 이전은 종교적 공백기 였다.당시 멕킨지는 당시 서울에는 종교적 행사가 없었다고 보고한다.1866년 전쟁이 일어나고 1871년 로져스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운양호를 몰고 온 일본군이 무력시위하여 1876년 한일 강화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미, 일, 러시아와 수호조약을 맺음으로 당시 조선이 운둔국(세계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나라)으로 알려지기 시작함.

*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해서 망명 생활후 돌아온 일본 수신사 박영효 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 선교사로 온 스크렌톤 목사(감리교)를 만남.

박영효는 당시에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등 문화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부탁함. 우리 재래 종교는 한물 갔다고 말함.

* 1886년 한블 수호 조약에서 조약문 속에는 교회라는 말이 들어갔다. (나중 이단어 하나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할때 쉬웠다.)

2. 유럽 christian들의 도래1)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이 오게됨. 1627년 네델란드 사람 벨트브레 일행 3사람이 동해안에 상륙함으로 시작.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어 살아가던 도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몇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가 억류되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였음을 알수있다. -

2) 바실홀과 멕스웰의 내한.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William이라는 군함이 있었는데 Amhert 사절단이 있었다. 함장은 Maxwell, Bashall 사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암 홀스트 사절을 내려놓고 본국에서는 한국 서해안을 탐사 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에 한국 해안에 와서 해도를 작성했다.

이들이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때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 (조대복)이 가서 물어 볼때 이 조대복에게 성경을 줌.(King James Version) - 최초로 한국 에 전달된 성경. - 바실홀은 돌아가서 책을 씀.-

3) 선교 개척자들의 한국인 접근(1) 칼 큐츠라프 -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독일의 할례대학에서 졸업. 화란 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함.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중심으로 중국인 상대로 선교 함.(중국옻, 음식 잘적응) 자바 수마트라에서 - 마카오로 선교지 옮김 - 네델란드 선교회를 떠나 프리렌쓰 미션네리로서 활동함.

1832년에 선교의 방향을 한국의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 백령도 - 원산도에 도착( 만나는 사람마다 의약품, 병고쳐줌, 전도함)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에게 성경과 서적 보냄.홍주 목사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최초로 성경을 번역(주기도문을)참고: 이것은 비공식. 공식 1884년

(2) 토마스 목사(정식적으로 안수 받아 오신 목사)의 내한

큐츠라프 목사가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에 온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이다(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 중국 상해 선교사로 파 송되어 왔는데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이때 한국 선교를 자청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리를 듣고 통역관으로 자청. 관군이 화공을 맞고 대동강에서 죽음)이때 배가 타던 때 한문 성경을 강 언덕에 던졌는데 관군중 하나가 한권을 가지고 있는데 조카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이영태) 나중에 이늘서 박사가 성경번역시 도와 주었다.

토마스 목사를 배에서 끌어내 한강 근처에서 목을쳐 죽임.목을 친 사람은 박춘곤인데 나중에 회계하여 1899년 세례받아 평양 초대 교인이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3) 로쓰와 멕킨타이어의 고려문 전도(런던 선교회 소속)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심양)에는 한국 교회 설립에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특별히 우장은 최초의 한인 수세자를 배출한 곳이다.봉천은 최초의 한국 성서가 번역된 곳.

로쓰와 멕킨타이어는 처남 매부지간(중국 우장을 거점으로 한국 선교 연구함)마침 조선의 의주 청년 4사람이 , 한약 약장사를 위장하여 중국을 방문했다.의주에서 강건너 50킬로미터 떨어진 고려문(중국과 물품교환 하던장소)에 갔는데(서양 무물을 배울려는 의도로)

마침 1873년 봄 로쓰 목사가 중국인 서기를 대동하고 고려문 방문. (이때는 조선사람이 외국사람 만나는 것도 불법일때) 여기서 의주청년들을 만남.

로쓰는 그들에게 후한 급료를 주는 대신 한국언어와 역사를 가르쳐 달라고 함.

제5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집회

이수정의 성서 : 이수정이 일본에서 한문 성서에 이두토를 달아 펴낸 <신약 성서 마가전>(1884)이다. 이수정은 이외에도 마태.누가.요한복음 및 사도행 전을 같은 식으로 펴냈으며 한글성서로 <신약마가전 복음서언희>를 냈다

최초의 견미사절단 :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비로소 기독교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 셈이다. 1883년 민영익(앞줄 중앙)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 단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감리회의 가우쳐와 만나게 되어 한국선교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고종의 선교윤허 : 미국 감리회 선교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가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 및 의료 선 교 윤허를 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1934년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배재학당에서 공연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

광혜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최초로 내한(1884년 9월) 한 알렌이 고종의 윤허를 얻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오늘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이 되었다.

 

 (1)백홍준과 서상륜의 수세와 전도활동.우장으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4명이 따라감.로쓰목사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목사님은 이들에게 보수와 문물을 줌.처음에는 4명이 잘 안받아 들였다. 왜냐면 그때 서학은 국법으로 사학이라 하여 핍박했기 때문이다.

로쓰목사는 1874년에 한영회화라는 책을 만들었고 1875년에는 예수성교문답을 만들고 1879년에는 한국지역사, 생활, 습관이라는 책을 씀.만난지 3년째 1876년에 이들 4청년이 수세를 받음(우장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세례자

이들이 세례 받은후 로쓰와 4청년은 한국 성서 번역에 착수해서 1882년 봄에 요한, 누가복음을 번역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이때 의주청년 서상륜이 찾아옴. 서상륜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친척을 따라 홍삼 장사하러 중국을 따라오가다 콜레라에 걸렸는데 맥킨타이어가 그를 살게해 줌.그래서 이후에 성경번역을 로쓰와 4명과 함께 귀한 역할을 함.

그때 공관복음서를 번역 출판 했는데 국내에 배포하기 힘든 상태였다. 서상륜이 이것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배포함. 이때 3000권 찍어낸 것을 로쓰역이라 한다.

이것이 관과에 알려져 위험해 지자 서경조(서상륜삼춘)과 둘이서 황해도 송천 으로 위험을 옮김. 여기서 송천 솔래 교회 를 개척함(1884년- 조선 최초의 개신 교회) 1884년 또 다시 성경을 만들었는데 로쓰목사가 쪽복음 6천부를 제물포 (인천)로 보냄-최초의 밀수품이라 칭하기도...

조선은 당시 독일사람인 멜렌 도르프라는 사람을 현재 관세청장 이라는 자리를 줘서 이사람으로 하여금 관세 업무를 맡게함.(조선은 너무 외교를 못했기 때문) 이때 멜렌 도르프가 서상륜을 불렀다.(왜냐하면 제물포에 성경 6천권이 와있어 서) 로쓰는 백홍준과 이성하에게 편지써서 멜렌 도르프에게 잘봐 달라고 부탁.

폐지/노끈 성경 (성경을 안 들키기 위해 폐지처럼 하기 위해 제본 안하고 나 두고, 제본안하고 노끈처럼 꽈서 나둔것)

참고 : 김재준 박사 아버지는유학 자였다. 성경을 분배하는 상인이 하루는 그집 에 머물렀 는데 마땅히 줄것은 없고해서 성경을 한권 놓고 갔다. 김재준 박사가 중학교때 Y. M. C. A뒤에 승동교회에 갔다가 설교에서 성경을 읽어야 위대한 사람이 되고 영어 공부 한사람치고 킹제임스 버 젼을 안읽으면 안된다고 해서 그말에 집에 돌아가 그 책을 꺼내 읽고 훌륭한 목사님 됨.저고리 성경 : 당시 저고리에 솜을 넣는데 아예 성경을 넣고 꼬매서 가져옴.

1884년 솔레 교회가 세워 졌는데 그 마을이 58호 밖에 안되었는데 서경조, 서 경륜 형제가 열심히 전도해서 몇 달안에 50호가 교회에 나왔다. (서경조는 나중에 새문안교회의 목사됨) 1년후에는(1885) 교인들이 자력으로 8칸짜리(8평) 교회 지음.

(2) 일본을 통한 전도이수정의 개종과 성서 번역이수정은 한국에서 임오군란(군인들의 월급안에 모래석은 사건)후 일본에 사절 단으로 파견 되는데 박영효, 이수정이 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가게 됨. 이수정은 현판 이라는 자리에 있었는데 가서 안돌아 오게됨. 일본 동경 대학의 조선과 교수로 눌러 앉음. 쓰다 목사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집에 가서 마태복음 산상설교 벽화보고 감명 받고 영접함. 쓰다는 이수정을 야스까와 목사에게 소개한다. 1883년 4월에 마침내 야스까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음.

일본 성서 공회 루미스 목사가 이 소식에 기뻐함.이수정을 만나 도움을 받아 성서 번역을 시작해서 1883년 - 4복음서와 행전 번역이 나왔고 1885년 마가복음이 출간 되었다.(이수정판)일본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들이 본국에다가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부탁. 1885년 4월에 그래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오게 되는데 (그들은 제물포 도착당시 이수정판 성경을 갖고 있었다) 오기전에 일본에서 조선 성경을 보고 기뻐했다.참조 : 우리나라가 장로교는 미국, 세계보다 더크다.

제6장 한국 프로 테스탄트의 형성과 부흥

아펜젤러(좌)와 언더우드(우) : 1885년 4월 5일 함께 내한한 두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선교사들의 순회전도 : 1891년경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서북지방 순회 전도광경이다. 마펫.게일.베어드 등의 모습이 보인다.

매서인들의 전도 :성경과 전도지를 파는 매서인(권서인)들의 활약으로 한국 교회는 크게 발전하였다. 1890년경 서울지방에서 활약하는 매서인.

소래교회 : 1884년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사진은 1900년경의 교회건물)

새문안교회 : 조직교회로서는 한국에 처음 세워진 (1887년) 교회로 정동에 서 시작되었다.

정동제일교회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로 1887년 창설되었다.

장대현교회 : 1893년 평양에 설립된 장로교회로 사진의 예배당은 1900 년 건립한 것이다.

성공회 서울대성당 : 1890년 한국선교를 시작한 영국 성공회는 서울 정동에 대성당을 설립(1891)하고 로마네스크식 건물을 마련(1926)하여 성공회 선교 의 중심으로 삼았다.

강화성공회성당 : 1893년부터 시작된 성공회의 강화. 선교 결과로 1900년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채용한 성당을 건축하였다. 기독교 토착화의 단면 을 보여주고 있다.

구세군 선교 : 구세군의 한국 개전은 1908년에 이루어졌다 .개척 선교사 호 가드(중앙의 말탄)의 전도 광경(1912년)이다.

무교동 성결교회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이름으로 1907년 서울 무교동에 설립된 이 교회가 오늘의 성결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동아기독교 :침례교회의 전신인 동아기독교는 캐나다출신 선교사 펜윅(가운 데 검은 옷 입은) 에 의해 1889년에 설립되었다

일본인 교회 :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 교회(특히 조합교회)는 한국 선교 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병합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 다. 사진은 해방전까지 일본인교회로 사용되다가 해방후 덕수교회 예배당으 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서울 정동에 소재.

배재학당 :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으로 1885년 8월에 설립되었다. 1887년에 건축된 교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벽돌 건물이 기도 했다.

이화학당 : 1886년 스크랜톤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 의 요람이 되었다.

(1) 개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의료와 교육 사업(우리 나라는 의료와 교육이 필요함을 느꼈다)

중국에 의료 선교하던 알렌 박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의료 선교사로 자청해서 우리나라에 옴.같은해 1884년 10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갑신정변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을 세워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내노라 하는 우리나라 인물들이 참석했는데 수구파(엣것 지키려는, 대장은 민비의 오라비 민영익)와 개화당(개혁으로, 대장으로 박영호, 김옥균)이 있었는데 개화당 사람 이 민영익을 칼로 찔렀음. 개화당이 3일 동안 천하를 이루다가 다시 흩어짐. 이때 알렌이 민영익을 고침.(한의사 14명은 실패했는데) 이것 때문에 알렌의 인기는 치솟음.

알렌은 그래서 궁중 시의가 되어 모든 왕족, 고관을 치료함.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10만냥을 사례함. 이돈으로 알렌은 왕립 광혜원을 설립.이 병원의 설립 2주후 고종황제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줌.

제중원 - 나중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당시 의대가 파리 날렸는데 백정인 백가(白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들이 콜레라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세브란스 의사들이 살려 주었다. 의사들이 그 아들을 세브란스 의사로 만듬. 1885년 4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오는데 문을 열어주는 도움을 주게 되는 배경은 알렌이 병원으로 정부에 호의를 준 영향이 크다.

교육 멜렌 도르프 : 영어 강습소 생김.우리나라 조정에서 외교관, 통역관 양성 목적.한국정부 : 미국 정부에게 현대 교육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

헐버트 1884년에 육영공원(영재를 교육하는 공적인 학원)- 최초의 미국식 학교 인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다님. 후에 나라에서 이런 학원을 닫게하자 선교사들이 교육에 직접뜀.

(2) 선교 활동과 조직 교회의 출현1885년 4월 5일(부활절) 알렌의 뒤를 이어 언더우드와 아펜 젤러가 우리나라에 도착함.(그때는 당장 전도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887년에 언더우드가 솔래 교회에 가서 7명의 신도에게 세례를 베품. 1887년 9월 27일에 언드우드가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림.(14명과 같이)- 이 교회가 새문안 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10월 9일에 아펜젤러는 또 언더우드 처럼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정동 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 자택에서 교회만 아니라 학교를 세움(2명으로시작) - 1주년이 되는때에 고종황제께서 배재학당(인재를 배출하는)이라는 이름을 줌.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온후 들어온 선교사) 스크렌턴(감리교 의료선교사)의 어머니 미세스 스크렌턴이 자기 사랑방에서 정부 고관 부인 2사람을 데리고 학교 시작- 이화여대 전신(1885)

1886년에 고종 황비의 아내 민비가 이름을 줬는데 이화학당이라 했다.

이런 학교들에는 학생이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모유보다 우유를 먹이는등 자기들도 먹고(악성 우유통 루 머번짐) 광이문(서소문)밖에 콜레라 환자들을 버렸는데 스크렌턴의 모친이 그중 1명의 소녀를 데리고 와서 아들이 고쳐서 이 학교 3회 졸업 소녀가 된다.

1886년 정동의 언더우드 사랑방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했는데 1891 년에 와서 예수교 학교로 바뀌고 1905년에 경신 중고등 학교로 바뀜.- 나중에 정신 여자 중고등학교로 바뀜.

북한에는 숭실전문학교, 숭의전문학교, 광성중고등학교.

1892년에는 미구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레이놀즈와 6명의 선교사가 입국해 전라도 쪽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예수병원"을 설립했다.

1893년 카나다 연합교회에서 와서 함경도 선교함.

동년 동양 선교회가 들어와 년 성결교회를 시작

동년은 영국 구세군이 들어와 선교 시작

1903년에서 1905년사이에 하와이로 이민가는 사람이 늘었다.(당시 7300명 정 도였는데 이중 윤은현, 손흥조가 일본에 들렸다가 안식교 전도사를 만나서 돌 아와 한국에서 안식교가 시작된다.)

(3) 성서와 성례전한국의 프로테스탄트 - 성서와 관련하여 출발했다고 얘기할수 있다.1885년 4월에 인천에 처음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손에는 이미 한국어 로 번역된 성서가 있었다. 그당시 사람들은 성서 공부에 관한 열정이 대단하였다. 한 선교사 왈 " 이세상의 모든 성서가 불타 없어져도 한국인 5명만 모이면 성서를 재구 성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란? 루터 :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야 존재 가능 하다고.칼빈 :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제 4부에 보면 루터와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얘기함.우리 나라는 말씀에 대한 열정은 컸지만 성례전에 대한 의식은 약하였다. 오늘 날도 그런 경향이 있다.

* 교회에서의 말씀과 성례전은 균형 울 이뤄야 한다.

4. 선교지역의 분할과 선교 정책한국에는 많은 선교회가 조직됨.장로교 - 북 장로교 감리교 - 북 감리교남 장로교 남 감리교캐나다 장로교호주 장로교

이러한 많은 교단에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쓰게됨.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선교. 이 외에 이미 선교가 시작된 곳은 북장로교가 맡음.

부산(경상도)은 호주 장로교,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가 맡음.1905년 을사보호 조약 체결. 장로교와 감리교 간에도 지역 조정이 있었다.

연변 중심의 지역은 북감리교, 평북 지역은 북장로교.1908년 남감리교는 강원 북부 3분의 2와 경기도 서울 이북을 장로교로부터 모 두 떠맡게 됨. 북장로교는 강원 남부 3분의 1, 서울 동부, 서울의 남감리교 지역을 다 떠 맡음. * 선교 정책을 보면,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 사상은 보수적, 경건주의자들 이었다. 저들이 한국에 왔을 당시 한국은 - 샤머니즘 : 무지함에서 생김.

유교 : 형식주의, 허례허식불교 : 미신적임.- 위의 3가지의 사상에 어느정도 젖어 있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 John Nevius를 초청하여(1890년) 그들 과 함께 지내면서 선교사업을 위한 원칙을 세웠다. - '삼자(三自)정책'1)Self-propagation 자력전도 : 스스로 전도하게 한다.2)Self-goverment 자치제도 : 스스로가 교회를 관리, 운영하게 한다. 자치 제도 마련. 3)Self-suport 자치자립 : 자급목회를 하게 한다.

(5). 1907년대 부흥운동1882년 임오군란(직업군의 군량미 부정사건)1884년 갑신정변(개혁파와 수구파간의 구테타)1895년 청,일 전쟁1905년 러,일 전쟁

이러한 일로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망이 없었고 의지할것도 없었다. 정치, 경제, 도덕, 정신적으로 절망 가운데 빠짐. 그래서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 서울에 주재하던 선교사가 "한국의 실정을 변해가며 일반 백성들 사이 에 각성의 기미가 보인다"고 보고함.

1895년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530명 1896년에는 3276명, 1900년대 와서는 7690명으로 늘어났다. <교회성장 요인들> - 당시 황실 고위층과 선교사들 간에 친밀한 관계였다. 1895년 일본 자객에 의해서 민비가 살해되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피신을 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말만은 믿었다. 한국에는 미국인들이 250명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 뿐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그래서 일본인들 에게는 선교사들이 눈에 가시였다.

당시 배제학당의 교사였던 이승만을 비롯, 서재필, 윤치호를 중심으로 해서 배 제학당 안에 소위 '협성회'를 조직해서 애국운동을 벌였다.이 협성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 운동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좀더 체계적인 것은 1893년 10월 '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조직됨.(오늘날의 Y.M.C.A가 됨) 서울 종로 2가에 '황성 기 독교 청년회'는 3층 양옥을 건립하고 황태자(순종)가 여기에 참석해 낙성식을 치뤘다. 황제를 비롯해 이또오 히로부미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 었다.

 

 이 청년회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체육, 공업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1896년에 서재필은 독립 신문을 발간한다. 그는 그 신문을 통해 대중계몽에 성 공을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없애고 그곳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홍정우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시킴. 우국열사들이 정부의 부정부패를 공격하자 저들은 심한 불쾌감을 갖 고 마침내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해 그들에게 전도를 해서 1901년 3월에 17명중에 12사 람이 함께 세례를 받는다.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문서 전도와 문예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화 운동에 힘쓰게 되는데 1899년 언더우드와 뜻있는 사람들이 '성교서회'를 건립 (후에 기독교 서회로 바뀜)하여 正音(한글)으로 문서를 발행한다. 1903년에는 이 기독교서회를 통한 출판부수가 25만부나 되었다.

 

 마침내 1907년 우리나라에서 부흥회가 일어났다. 이 부흥회가 일어나기전 1903년에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인 하디가 기도하던 중 영감을 받았다고 그 체험을 동료선교사들에게 간증을 했는데 이것이 평양선교사들에게도 퍼져 그 이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가 함께 모여 합동집회를 연다.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연다. 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혜를 사모한다. 블레오 선교사가 고전 12:27의 말씀을 읽자 불이 붙어서 - 길선주 장로의 간증을 통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남.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인격적, 소박한, 공동체적신앙 으로 바뀌어 졌다.

1900년대 영국 웨일즈 지방의 탄광 - 무기력함과 무희망적인 삶을 살던 광부들 -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 180도 달라지는 그들의 삶이 일이 미국을 통해 우 리나라에 들어와 1907년 부흥운동을 갖게함.

(6). 교회 행정 기구의 설정1907년 9월 평양에서 장로교 독노회 창설그리고 이 때 평양 신학교에서 배출된 7 의 목사가 안수를 받는다.(서경조, 이기 풍, 길선주,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한승백)1907년 - 1910년 사이에 한국 교회는 일본, 중국, 만주, 시베리아, 미국 등에 선 교사를 파송한다. 그후 100명 구령운동이 일어남.

감리교는 1901년 김창식과 김기방이 안수를 받는다. 감리교는 처음부터 남,북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걷다가 1907년에 합동해서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세우고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신학교를 세움. - '협성 신학교' 그 후에 와서 1930년대에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 이름 을 바꿈.

제7장 일제 치하에서의 교회

옥중개종 :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민족운동에서 적극 참여하였다. 사진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민족지도자들인데 1907년 경 이들은 대거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독교의 기도자들이 되었다.

문용기의사 기념비 : 3.1운동때 이리 만세시위를 주동하면서 순국한 기독교 인 문용기의 기념비. 이리 소재. 1. 십자가를 걸머진 교회우리나라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의 교리 - 유일신 사상과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탄압했다.그 당시 교회는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강력한 조직체가 되었고 이를 눈치챈 일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밈. (기독교 말살 정책) -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헌데 이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당시 인구 2000만명중 크리스챤이 18만명이 넘었다.700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10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05인은 여러차례 감형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게 된다.105인중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저들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9000명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 운동.1918년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됨.

그후 1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33인중 16명이 크리스챤이었 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 주의로 기독교 정신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킴.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 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고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찌르고 죽였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함.

 

1919년 일본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교회가 17개, 일부 파괴된 교회는24개, 그외에 교회에 큰 손해를 본 곳이 41개, 교회 재산 피해가 3만불이었다. 장로교 보고에 의해 체포된 목사, 장로수가 134명 교인수가 3천 8백 4명, 사살된 신도수가 47명, 감리교 기타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합친수는 타 종교의 신도 숫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이일을 통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봤지만 또 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3. 선교사의 관여도.일제는 독립운동 배후에 선교사들이 관여하고,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평양 숭실학교에 모우리 모펫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일제가 그를 잡아갔다. 피신하는 학생들을 은둔 시켜 준 죄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시위에 동향을 미국 선교회 에 보고하고 총독과 일제의 잔악상을 세계에 알렸다.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십자가 처형 : 일제는 민족운동지도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였다. 사진은 철도를 파괴한 독립투사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장면이다.

신사참배 :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 (1943년).

주기철목사의 묘 :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 순교한(1944년) 주기철 목사의 묘. 서울 국립묘지 소재.

철수하는 선교사들 :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선교사들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출옥성도 : 8.15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 사 사택에 모였다.

출옥성도환영회 : 해방후 1945년 가을 서울남산 신궁터에서 출옥성도 환영회가 열렸다.

통일교 : 문선명의 통일교도 그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나갔다.사진은 1963년에 서울에서 거행된 124쌍 합동 결혼식. 1. 신사참배의 강요와 박해* 신사참배는 일본천왕과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경배이다.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국 본토 침략 전쟁 :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내선 일체' 즉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될수 있는 방법은 신사참배라고 생각하였다.

평양부터 점령해서 신사참배 시작 1935년 11월 평안남도 일본 지사 야스다께는 도내에 있는 각종학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학교는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명령함. 이 회의에 참석했던 숭실전문 학교 교장 Mccune은 한국인 목사, 장로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단호한 결의를 하게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야스다께는 Muccne를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추방시킴.

 

그 후에도 일제는 대대적인 신사참배를 강요함. 미션 스쿨에 대해 많은 간섭을 하고 교단 총회 소집도 경찰의 허락 없이는 소집 할 수 없었고 예배도 일본 국회에서 일본 종교 단체법이 통과하게 된다. 신사란? 종교의 범위를 초월한 것.

신도란? 절대의 도로써 모든 일본 국민은 반드시 신사 참배를 해야하는 것. 이에 순종치 않는 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함.

(이 법에 대한 반응) - 1. 로마 카톨릭 : 1918년 까지도 '나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입장에서 반대했는데,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애국 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참배를 허락함.2. 감리교 :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 참배가 국가적 의식이라는 것에 동의함. - 감리교 존속 가는케 함.3. 장로교 :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합법화하게 함.주기철, 이기선등은 신사참배 반대. 일본 경찰은 총재를 만나 회유책을 쓰고 예 배당 분위기는 일본 경찰이 안팎으로 감시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193명이 이 총회에 참석했는데 결론은 신사 참배를 하는 것으로 끝남. 그 후에 도 일제는 계속 교활한 방법을 씀. 평양신학교 패쇄, 2천여 신도 투옥, 50여 명의 성직자 순교.각 교단이 일제에 굴복한 다음 한국 교회 전체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는 양태를 보여줌.

전체 교회의 88%가 교회에다 일장기를 게양하는 탑을 세우고 일본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교회는 96%였고 동방 요배 실시 교회는 96%, 황국 시민 재창을 93%가 했고 예장은 애국 헌납 기성회를 조직해 그 기성회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일본 육군 비행기를 사주고, 총을 사주었으며, 교회의 종 1540개를 바쳤 다.

2.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1895년 청, 일 전쟁1905년 러,일 전쟁1930년 만주사변1936년 중,일전쟁1941년 태평양 전쟁

일본은 여러차례 승리로 기세 등등해짐.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샌드위치'였 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봄. 이러한 때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저항하면 투옥. 구 약의 모세 5경과 요한 계시록을 그들의 국시사상에 어긋남을 알고 읽지도, 가르 치지도 못하게 함. 사도신조 중에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라 라'를 뺌. 찬송가도 거슬리는 것 모두 빼버리고 예배 중에도 천와에게 목례하고, 일장기를 달고, 목사에게 일본 군복을 입도록 함.

1943년에는 주일 오후 예배와 삼일 예배를 막음. 침례교는 재림사상이 강한데 1942년 전국 모든 침례교를 폐쇄시킴. 성결교도 마찬가지로 재림 사상 때문에 1943에 문을 닫게함. 그래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다른 교단으로 옮김. 많은 성 결교 침례교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됨.일제는 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탄압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3. 교회 분열의 징조1930년대부터 분열의 징조가 생김.* 징조는 지방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 장로교 :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이 장로교가 많았다. 이곳은 신학적으로 보 수적인 경향이었다. 1911년 연희전문학교 보조문제로 총회를 열었는데 평양 중심의 교회들은 이 학 교가 남쪽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보조를 반대했다.1934년에 와서는 북쪽에서 남쪽의 총재들에게 진보 또는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 이에 맞서 남쪽은 북쪽교회에게 교회 전제주의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당시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은 신학의 깊이와 넓이가 달랐다.이들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한국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 그래서 평양 신 학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싫어함. 평양신학교는 같은 교단의 사 람이라도 유학생은 별과에 들어가 공부를 시킨후 목사로 만들었다.

감리교 : 1930대에 제 1차 총회를 소집하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기도교의 근 본원리가 시대를 따라 다른 형식으로 표명되었고...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교리적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 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그를 따르는 다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 회 조건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요 신령적인 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감리교는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용박사와 그리고 숭인 상업학교의 김재준 박사는 그 당시 신학논쟁의 거두들이었다. 박형용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극 보수적인 신학교수의 영향을 받아 성서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의 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은 같은 곳에서 공부하였는데 박씨와는 달리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는 한 국교회 신학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다가 1934년과 1935년 장로교 총회의 문제로 대두함.김영주 : 모세 5경 저작설 부인 (박형용은 이에게, 스스로 목사됨을 거절하는 것 이라 함) 김춘배 : 여권운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함.(박씨는 이를 징계에 처함이 옳다고 했다)

1935년 Abingdon 주석이 나왔을 때 감리교의 류형기 감독이 그것을 편집, 번역 하였다. 이 일을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이 같이 했는데 이 책이 아주 자유주의적이어서 번역한 자들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Abingdon주석을 교인들로 하 여금 사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 점점 신학적으로 개방적이 되어갔다.

4. 교회내의 난기류1920년대 부터 지적인 변화, 경제적 빈곤, 일제의 탄압심화등으로 목회자 양 성이 쉽지 않았다.그당시 소설가 이광수 왈 " 기독교는 이성을 경멸, 종교외의 과학, 모든 다른 사상르 경시하는 풍조를 낳아서 현세를 무시하고 죽어서 천당만 가려고 든다"라 고 혹평. 그 때 사회는 소망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은 재림, 즉 이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바라는 설교를 했다.

이러한 때 신비주의자들 등장 - 소망을 심어줌.1.이용도 목사 : 협성신학교 졸업. 감리교 목사. 교파 초월 부흥사역. 각교회를 돌아다니며 민족의 고난에 울었고 교회 형식주의를 비판. 전형적인 경건주의자 의 모델. 진리는 말에 있지않고 삶에 있다고함.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곧 삶이다. 믿음보다 사랑에 진리가 있다. 요한 복음서를 제일로 생각.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방했고 심지어는 사탄, 불경, 사회주의 책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 신학과 기독교 교리를 공격함으로서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짐. 그의 절대적인 사랑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관을 잇는다고 믿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김.

이때 한국교회는 이용도 목사에게 금종령을 내렸고 평양 장로교에서는 그를 부 흥사로 초청하지 못하도록 함.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감리교는 1933년 그에게 휴직 처분함. 얼마후 결핵으로 사망.

2. 길선주 목사 : 계시록 1만 2백번을 독파. 신구약 성서를 30독.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예수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설교의 주제는 항상 '마라나타'였다. 그에 의해 세례받은 자는 3천명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로 돌아온 자가 7만을 헤아렸다.

3. 황국주 : 백일 기도 중에 은혜의 체험을 했다고 함.그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차려입고 예수그리스도와 비슷한 풍채라 고 하기도 함.예수 그리스도와 영 육간의 합일이 이루어져 자기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왔고, 자기 목소리는 예수의 목소리로 변했다고 했다. 그 가 가는 곳마다 그를 보고 모여드는 신자가 많았다. 심지어는 가정을 버리고 따 라 다니던 유부녀들도 있었다. 그가 서울역에 왔을 때에는 전국 교회가 떠들석 했다. 그는 삼각산에 가서 기도원을 차리고 그곳에서 몸가름, 피가름을 하였다. 황국주가 죽은 후 그의 피가름 교리가 통리교로 이어짐.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기독교도연맹의 박해 : 이북의 공산정권은 기독교도연맹을 앞세워 공 산당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기독교도연맹에 반 대한 박봉옥 전도사에게 전달된 지시문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재건운동 : 1945년 11월 평북 선천에서 열린 평북 목사수양대회에서 한국교회 재건원칙이 제시되었고 이로써 재건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6.25사변 : 6.25사변중 한국교회는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었다. 사진은 퇴각하던 공산군에 의해 학살된 우익인사들이 시체들이다.

포로선교 : 아군에 체포된 공산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피어스 박사(1952)

선명회합창단 : 전쟁고아들로 이루어진 선명회합창단은 음악을 통한 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수족절단자복구회 : 토레이 선교사에 의해 대전에 설립된 것으로 전쟁 후 지체부자유자에 대한 사회 선교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부활절연합예배 : 1953년 수복된 서울의 남산 옛 신궁터에서 초교파적 으로 부활절연합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남북통일기원예배 : 1955년 해방 10주년 기념 및 남북통일원 연합예배 에서 한경직 목사 통역으로 피어슨 박사가 설교하고 있다.

장로교 분열 : 1959년 예장 44회 총회는 NAE측과 에큐메니칼측으로 나 뉘고 말았다. 1. 해방과 교회 재건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그동안 많은 수난을 겪은 기독교인들은 남다 른 감격을느겼다. 후에 남, 북 분단의 아픔을 가져오기도 함.

(교회 재건 운동)

1)장로교교회 재건에 있어 선두를 달린 곳이 평양 중심의 관서지방이다.일제 탄압에 의해서 투옥된 교역자 중 50명이 순교함. 평양 감옥에서 20명이 출옥하고 그동안 지하에 숨어있던 자들이 나와 교회 재건에 힘쓴 곳도 평양이 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출옥성도들은 나오자마자 가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던 평양의 삼정현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고 교회 재건에 관한 협의를 함. 그리고 9월 20일 ' 교회 재건 5대 원칙'을 발표함. 1.)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 해 죄를 졌으니 통회 자복후 사역에 임할 것.

2) 권징을 자책하고 2개월 간 휴직할 것 등등... 그 후 11월 14일에 선천 월곡교회에서 평북 5개 노회의 교직자 연합수련회가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홍택기 목사 등 일제때 신사참배를 했던 많은 목사 들이 5대 원칙에 대해 반발하고 일어섰다. 그래서 출옥성도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교회안에 나기류가 생김.

 

같은 해 12월 초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북한 5개도 연합회를 조직하고 북한 교회와 남한 교회의 교류를 위해 북한 교회에서 이인식 목사와 김양선 목사를 서울에 파송함. 남한 교회에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 상도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일어남. 이곳은 주기철 목사님의 출생지이고 최상림, 손양원, 한상동,등 이들의 영향력 때문에 부산이 중심지가 됨. 부산 진교회에 서 회의를 소집하고 경남 재건노회를 조직함.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선출.

2) 감리교재건 감리교회부흥 감리교회 - 둘로 나뉨.감리교도 해방과 함께 9월 8일 남부 교단 대회가 소집됨. 이 대회에서 변홍규, 이규갑,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 목사들이 불법성을 지적하며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이 조직을 한 사람들이 일제 시대때 굴복하고 그들에게 동조했던 자 들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재건 감리회와 부흥감리화가 나옴. 이 두파들은 서로가 자기측 사람이 감독이 되길 원하고 서로 양보하지 못함.

일제 때 신사참배한 사람은 간부나 중요한 요직에서 제외시키고 두 회에서 동수로 선출하여 간부를 뽑는다. 투표가 끝난 후 결과는 부흥 감리회에서 절대적인 숫자가 나오서 이에 불만을 품은 재건 측은 문제를 제기 또다시 갈라짐. 이때 평신도들이 양 파의 협력을 원하여 노력한 결과 분열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가 되어 감리교의 기틀을 마련함. 그 후로 평신도의 발언권이 높아짐.

3) 성결교 해방전 성결교는 약 5만 성도가 있었다. 그런데 성결교 교리중 4중 복음이라는 것(성결, 신유, 중생, 재림)이 있는데 이 중 재림에 관한 문제 때문에 성결교가 문을 닫았었다. 해방과 함께 폐쇄되었던 성결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2. 북한에서의 교회의 참화해방되던해 11월 16일 , 북한의 많은 뜻 있는 기독교도들이 보다 더 좋은나라 를 건설하기 위해 기독교 민주당을 설립했는데 윤영하, 한경직 목사가 중심 인물이었다.

 

공산당은 이것을 미리 알고 기독교 민주당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 창당 대회에서 장로 1명을 살해했고 부근에 있는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에 충격 받은 신의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를 동원해 학생들을 저지해 많은 학생들이 수난을 당함.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 2년이 지 난 1947년 11월 북한 평양에서 김화시 목사와 고한규 장로가 있었는데, 이들 이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하려 했다.

 

그런데 역시 이들도 창당 대회 하는날 4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 투옥되거나 러시아로 유배됨. 1948년 북한에서도 공 산 국가를 위해서 주의를 기해 선거일을 정하고 투표를 하는데 모든 기독교인 들을 선거에 동원 시킴. 여기에 반길를 들고 북한 기독교도의 입장을 발표하였다.

1) 주일에는 어떠한 행사에도 불참한다.2) 기독교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3) 교회당은 예배 외의 어떠한 것에도 사용을 불허한다.이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구금된다. 마침내 50년 6.25사변 이 일어날 때 북한은 남침 준비를 끝내고 기독교인들을 먼저 검거해 투옥시켰다. 이 때 기독교인들을 찾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3. 민족 분열과 교회의 분열공산당에 대항해 투쟁하던 목사들 순교.6.25때 여순 반란사건시 두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 김익두, 남궁 혁, 송창근 목사,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납북됨.6.25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손실된 교회 수가 장로교 152개, 감리교 84개, 성결교 27개 구세군이 4개 교회였고 순교자도 많았다.

6.25때 서울은 북괴에 동조하는 교인들이 몇 있었다. 경동교회에 출석하는 김욱 이라는 자는 기독교 민주 동맹을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이 서울에 왔을 때 환영식을 함. 6.25가 나기전 기독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최근식 목사 는 교도소에서 나와 목사들을 고발 해 북괴군에 의해 끌려가도록 했다,

1950년 4월 경남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장로교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년 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비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 고려파가 고려파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감. 싸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같은 해 7월 서로 무서운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파는 그 당시 국회의원 22명의 명의로 비 고려파를 용공단체라고 비 난함.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짐. 조선신학교의 김재준목사의 신학이 신신학 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움.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수 없다고 해서 갈라짐.

1958년에 같은 예장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됨. 학교 부지 관계 때문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 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1977년 그 후 합동에서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짐 그후 사분오열의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김.

 

 

 

제 6 편 민족 복음화를 향한 교회의 협력



 


    제1장 하나의 교회를 찾는 문서운동 전개

    1.성경국역 출판사업

    1906년에 출간된 신약이나 1911년에 나온 구약의 구역성경은 1937년에 개역신약이
    나올 때까지 한국교회의 유일의 공인 성경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현대인에게 적합한 번역이 나와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고,그리고 1947년의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발견으로 인한 전세계적인
    성경 번역의 붐의 영향도 있고 해서 1960년에는 우리 전 세계적인
    성경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1967년 12월 드디어 새번역 신약성경이 출판되는 장거가 있었다.

    한편, 새로운 세계사의 동향은 1962년 10월 이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갈라진 교회와의 재일치를 기본 방침으로 정하게 되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도
    여기에 적응하여 모든 교회에서의 일치의 소망을 추세화 하기에 이르렀다.

    그 행동적 실천의 하나가 세계성서공회 연합회와 로마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사이에 성경 공동 간행위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1968년 2월에
    공동번역위원회가 조직되었고 9년간의 애씀 끝에 1977년 부활절을 기하여
    공동번역 성경의 완역 간행을 보았다.

    이는 로마 카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연합하여 최초로 우리말로
    성경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한국교회 자체뿐 아니라 한국 민족 전체를 위하여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발과 거부가
    없은 것은 아니었다.

    공동번역 성경이 오리지날 텍스트로부터 조심성 있게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적 신앙의 학자들은
    교리사적 해설학적 관점에서 비난의 소리를
    높이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괜찮다는 긍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구약과 신약사이에 편삽한 제2경전이 정경으로
    취급되지 않고 외경으로 되어 잇음이 싫다는 논난을 펴고 있다.

    현실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이 성경 번역 사업의 완수는 한국 성경번역 사상
    하나의 새로운 기원을 획하였다고 하는 점에서 얼마든지 높은 평가를 가할 수 있으며
    한국민족 기독교 역사 상에 있어서 영원 불멸의 공적을 쌓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칭찬을 받을만 하다.

    2. 찬송가 출간과 보급

    해방을 맞이하면서 하나의 찬송을 부르면서 한 마음 한뜻으로 전도하자는
    좋은 생각으로 장로회와 감리교와 성결교가 합동하여 1949년에 합동찬송가를
    출간하여 약 20년간 사용하여 왔다. 그동안에 한국교회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였으니 보다 나은 그리고 보다 올바르게 새 시대에 맞는 찬송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에서 1967년에는 개편찬송가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개편위원회의 구성원으로 된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등에서만 호응을 얻었고
    나머지 여러 교단에서는 따로 '새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하거나
    또는 여전히 합동찬송가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사정이었다.

    한분 하나님을 섬기면서 한 입으로 하나의 찬송을 부름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인은 세가지의 찬송을 불러 혼잡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 불편이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고 교회 분열의 아픔을
    씻기 위한 위안을 얻기 위해서도 통일된 찬송가의 출현은 바람직하기만 하였다.

    이러한 교계 여론이 크게 일어나자 국내 20개 교단으로 총망라된
    한국찬송가통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상당한 노심 끝에 1978년 가을에는
    하나의 통일찬송가가 나온다고 하니 이는 한국기독교의 또 하나의 역사적 의의를
    지닌 쾌거로서 다 같이 기뻐하고 싶으며, 이 찬송가 통일작업은 먼 훗날에
    그 누구를 통해서도 소중히 기림을 받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원본자료 출처; 한국 컴퓨터 선교회 http://kcm.co.kr.에서 복사본 입니다.)

 

배론하당

1855년 충북 제천군 배론에 솔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교로 1866년 병안교난으로 폐쇄되기까지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공헌하였다.

 


평생전도회
만주 북간도 용정에서 교회 여성들이 조직한 평생전도회 회원들이다


12.동만노회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사업으로 이룩된 동만노회(간도노회) 의 임원들이 귀국하는 선교사 럽을 환송하기 위하여 모였다

 

 

한국교회사(20)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2) 서상륜에 의해 세워진 소래교회

한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는 서상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소래교회이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송천리는 순 토박이말로‘솔샘’이었다. 솔샘은 솔내로 변했고, 그것이‘소래’가 되었는데, 이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곳이다.

소래교회의 설립은, 선교사들이 우리 땅에 들어오기 전에 성경이 먼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것 못지않게, 1884년 4월 5일에 공식적으로 우리 땅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선교사가 도착하기 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소래교회는「황해도지」와「은율군지」의 자료에 의하면, 1883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나며, 1·4후퇴 때 월남한 소래인들이 고향을 그리며 후세대에게 정확한 사실들을 알리고자 편집한「대구면지」(大救面誌)에 송천교회 회고편을 쓴 정용하의 증언에 의해서도 1883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경조 목사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1883년 5월 16일에 교회가 설립된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있을 때 5월이 되면 어린이주일, 어머니주일, 그리고 이어서 교회생일이 있었고,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온 교회가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으며, 설립일에는 야외예배, 토론회, 웅변대회 등등 여러 가지 특별 행사를 하면서 이 날을 지켰습니다.”라고 하였다.

만주에서 쪽 복음서를 갖고 밀입국(1882년)하려다 관헌에 적발되었던 서상륜은 고향에 와서 전도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져서 그를 체포하라는 체포령이 내려지므로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자, 당숙이 살고 있는 소래로 피신하여 살면서 서울과 소래를 오가며 전도하였다. 의주에 살던 동생 서경조가 소래로 아주 이주하여 서상륜은 1883년 봄부터 자기 친척과 몇몇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동생 서경조의 초가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후에 솔내는 58세대 중 50세대가 예수를 믿는 경이로운 전도의 업적이 나타난 동리가 되었다.

상경한 형에게서 신약과‘덕혜입문’을 받아 소래로 돌아온 서경조가 결단을 하고 믿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약전서를 수차 읽어보니 예수교를 할 마음이 깊이 들어가는 동시, 그 교를 하면 피살하리란 마음이 또 생겨 시중전이 일어나”반년이나 갈등하다가 로마서를 보고는“사도 바울의 죽음을 무릅쓰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보고 내 생각에 바울도 사람이라 어찌 죽기를 두려워 아니 하였으리오…죽는 것은 잠깐 동안이요 죽을까 두려운 마음이 실상 어려우니 성신을 받아 두려운 마음이 없으면 죽는 것이 두려울 것 없고 또한 생사가 천주의 뜻대로 되리라.”하며 기독교에 입문하였다고 술회하기도 하였다.

1895년에는 교회가 비좁아 신축을 하였다. 이때 교인 수는 2백여 명이라 했으며 교회를 짓기 위하여 밤새도록 기도하는 일, 금식하는 일,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 3-4월이 되어 어려운 사람이 생기면 신·불신을 막론하고 구제해 주는 일, 근농으로 교회 설립 3-4년 만에 박토가 옥토 된 일, 주색잡기, 투전, 미신 등이 없어진 일, 열심히 전도하는 일이었다(국민일보“한국교회 뿌리를 찾아서”)고 기록되어 있다.

소래교회 건축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는데, 첫째는 소래교인들이 자체적으로 건축비를 부담했다는 것이다. 또한 둘째는 미리 비축해 두었던 기금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서경조는 성경 공부 차 상경하였을 때 언더우드의 사랑채에서 서울의 신도들과 예배당 건축계를 조직한 일이 있었다. 이계금은 매년 10냥씩 불입하도록 하였고, 한국 어디서나 최초로 예배당을 건축할 때 이 기금을 사용하도록 약조하였다. 따라서 소래교회의 건축 준비가 무르익고 공사가 진행되자 계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계금을 수령하였는데, 소래교회의 건축에 도전을 받은 서울교회가 서둘러 예배당 건축을 추진하였으므로 계금을 반분하여 500냥을 받아 건축비로 사용하였다. 셋째 특징은 건축비에 대한 언더우드선교사의 선교비 보조를 사절하고 한국 최초의 민족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소래교회의 부흥으로 인근 장연읍을 비롯하여 송화·은율·풍천·문화·해주 등 일곱 지역에 수십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의 창설은 분명 성경을 번역한 평신도들의 독자적 전도와 한글성경 반포라는 특징을 갖고 시작되었다. 또한 소래교회는 한국교회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을 감당함으로 자립, 자생하는 교회로서의 기초 돌을 놓았다.

한국교회사(21)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① 이수정의 일본 방문

만주 우장에 거점을 마련한 존 로스 선교사와 의주 출신 젊은이들에 의해 중국에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바다건너 일본에서는 이수정(李樹廷)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었다. 대학자 이병규의 아들 이수정은 민영익과 교분이 두터운 친우 사이였고, 일찍부터 개화설을 주장하였으며, 여러
차례 국가에 공로가 많았던 인물로 1882년 9월 19일 임오군란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본래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는 데다 오래 전부터 일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에 건너가기 전부터 민영익과 가까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1881년 초 이전에 이미 부산주재 일본영사 콘도우(近藤)와 접촉하고 동경에 가기 위하여 일본 주우은행에 적금도 들어 놓고 있었다. 그만
큼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면서 밝혀진 일이지만 그는 상당한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는 한때 민영익과 함께 무역과 상업을 통한 부국의 길을 찾는 데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81년 농학부문 담당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우(知友) 안종수(安宗洙)를 통해 일본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을 갖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의 선진 농업정책을 전수받고 한국에 그것을 계승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안종수는 일본에 있는 동안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걸출한 농
학자 쯔다센(律田仙)을 만나 기독교에 대해 전해들은 후,“ 내가 배운 바를 왕과 나의 친구들에게 말할 것이고,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쯔다센의 탁월한 선진 농법에 감명을 받은 안종수는 돌아와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농업기술 서적으로 국민들에게 농업 선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수정이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는 일본의 문화, 특히 농업과 법률, 우편 및 조운(遭運) 시설 사찰(査察)이었으나 제일 큰 관심은 일본의 농업 정책이었다.

② 이수정의 회심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쯔다센과 개신교 지도자들, 그리고 주일 미국 선교사들과도 교분을 갖기 시작했다. 쯔다센은 자신을 찾아온 이수정을 친절히 맞아 주었고, 교리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문 성경 한 권을 건네주었다. 쯔다센은 당시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수정에게 한문 성경을 건네주고, 한문을 인용해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수정은 숙소로 돌아와 한문 성경을 읽는 가운데 감동을 받고 쯔다센이 믿고있던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수정은 김옥균과 민영익이 귀국하고, 다시 얼마 후 박영효가 본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쯔다센 박사 밑에서 농업 기술을 전수받겠다는 이유로 계속 일본에 남았다. 그러나 그가 남은 진짜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이수정은 쯔다센 박사로부터 농업기술을 전수받는 중에 훌
륭한 그의 인격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그의 인격의 기원이 종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쯔다센 박사가 다니는 감리교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즈음 쯔다센 박사가 야스카와 토오루(安川亭) 목사를 이수정에게 소개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츠키지교회(築地敎會)에 나가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수정은 쯔다센에게 체계적으로 성경교육을 받으며 신앙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에 건너간 지 9개월 만에 로개쥬쵸교회(露月町敎會)에서 야스카와 토오루 목사로부터 세례문답을 받은 후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 Knox)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문답에 대한 그의 답변은 너무도 명확하고 또렷했다. 시취한 일본인 목사나 낙스 목사는 물론 방청했던 사람들 모두가 이수정의 분명한 신앙고백과 유창한 일본어 답변 실력에 놀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 40세였다. 비록 일본에 9개월밖에 체류하지 않았지만 그는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했고, 심지어 두 번에 걸쳐 설교해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정확한 언어로 모인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그가 쓴 한문 시는 일본의 주요 신문에서 대단한 호평
을 받을 정도였고, 또한 그림도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졌다. 루미스는 1883년 5월 30일 본부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그는 대단히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이미 여기에 있는 그의 모든 한국인 동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는 그들이 이미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자질과 능력과 더불어 그의 탁월성은 그의 한국인 동료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도쿄국립대학의 한국어 선생은‘만약 이수정이 기독교 때문에 죽는다면 나 역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불과 18년 전 이수정의 친척가운데 한 사람과 그의 가까운 친구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기때문에 순교 당했다. 그의 팔과 다리가 먼저 절단되었고, 그
후 그의 머리가 절단되었다. 이수정은 몇 차례 밤에 나의 집에서‘만약 내가 나의 조국에 있었더라면 나는 어느 때든지 살해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미국 성서공회 일본주재 총무 헨리 루미스 선교사는 1883년 5월 11일 이수정의 세례 소식을 본부에 알리면서 이수정이 그의 조국 은둔의 나라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1883년 당시 일본 사람들과 일본에 있던 외국 선교사들은 한국선교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인 이수정이 복음을 접했다는 소식은 곧 일본에 널리 알려졌고 여러 선교단체나 교회가 그를 연사로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해인 1883년 1월에 일본에서는 선교사, 목사, 교역자, 교회 성도들 모두가 일본교회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대 부흥
이 일어났고, 그와 같은 부흥의 열기는 가장 가까운 나라 조선에 대한 선교열을 한층 더해 주었다.

그런 때에 이수정이 로개쥬쵸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1883년 5월 8일부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우에무라(植村), 니이지마 죠(新島)를 비롯한 전 일본의 기독교인들과 각 교파 목사, 교사, 교회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3회 전국기독교도 대 친목회가 동경에서 열렸다. 이것은 일종의 대 부흥집회였다. 집회 4일째인 5월 11일 오전 8시에 신에이교회당(新榮敎會堂)에서 특별기도회가 열렸을 때, 그곳에 참석한 일본인 목사 오쿠노 마사즈나(奧野正綱)의 제청에 의하여 이수정이 등단하여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드렸다. 비록 그곳에 모인 이들 중 이수정의 한국어 기도를 알아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오순절의 영감을 더해 주었다고 우찌무라 간조는 술회했다.

“그는 자기 나라 말로 기도했는데 우리들은 그 마지막에 아멘 하는 소리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한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 그가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장소와 광경을 더 한층 오순절과 같이 만들어 주었다.”고 하였다.

1883년 5월 12일, 도쿄쿠단자카(東京九段坂) 스즈끼(鈴木)씨의 사진관에서 찍은 전국기독교 신도 대 친목회 간부 사진에는 이수정이 정가운데에 쯔다센과 마주앉아 있어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그의 신앙고백문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요한복음에 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의 일치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으로서, 이것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증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세례를 받고도 그 사람 마음속에 참된 신앙이 없다고 한다면 성도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수정은 인간의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자신의 분명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었고, 만약 그것이 포기된다면 곧 기독교가 포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이수정의 성품과 관심은 바뀌어 갔다. 무엇보다도 진리를 사모함과 동포를 향한 구령의 열정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일본에 유학하고있던 유학생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해 주었고, 그들 중에 세례를 받은 이들이 늘어나면서 성경공부반도 생겼다. 1883
년 말 요한복음 15장에 기초한 그의 신앙고백과 교리에 대한 이해는 그가 이미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수정의 활달한 성격, 분명한 신앙고백과 민족에 대한 구령의 열정 그리고 그의 뛰어난 리더십은 일본인들은 물론 일본주재 미국 선교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
기에 충분했다.

이수정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중생의 깊은 체험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어느 것도 제공해 줄 수 없는 내면의 평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나는 자네가 지금 그렇게 행복하게 보이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네. 자네는 최근 매우 크게 변화하였으며 어떤 새
롭고 특별한 기쁨을 찾은 것 같네.”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수정은 그 친구에게“나는 내가 이전에는 결코 생각해보지 못했던 마음의 큰 평안과 행복이 있다.”고 답했다. 그에게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깊은 영혼의 평안이 그의 마음과 전 인격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원의 확신과 민족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 없이는 소유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신앙이었다.

한국교회사(22)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③ 이수정의 성경 번역

이수정은 자신의 백성에게 성경을 줄 수 있기를 대단히 갈망하고 있던 차에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헨리 루미스 선교사가 한글 성경 번역을 의뢰하자 주저하지 않고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미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던 미국 성서공회가 한국을 위해서도 성서반포사업
을 추진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을 루미스는 다음과 같이 선교부에 보고하였다. “조선사절단 가운데 한 명이 최근 동경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그가 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어떤 사람이 책 한 보따리를 가지고 그에게 오더니, 그 책속에는 번영과 행복의 능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였답니다.
계속 물으니 그 책이 성경이라는 답을 듣게 되었고, 꿈에서 깨어난 그는 그 책을 찾아 그 가르침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현재 교인이 되었으며, 우리는 이것이 복음이 저‘은둔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라고 하였다.

루미스로부터 성경 번역을 의뢰받은 후 곧바로 작업에 착수해 성경 번역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이수정은 로개쥬초교회 야스카와 목사의 도움으로 시간적으로 방해를 받지 않은 조용한 그의 서재에서 성경 번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성경번역 과정 중 이수정은 동경대학 한국어 교수로 있는 자신의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루미스는 1883년 5월 29일 이수정에게 ‘마태복음 원고와 상당한 양의 마가복음 번역이 이미 완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루미스가 야스카와 목사의 안내로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이수정은 이미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완역하였고, 로마서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다. 이수정은 루미스에게“나는 사도의 서간들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만족할 때까지 결코 글자 한 자도 쓰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번역에 임하는 그의 태도가 얼마나 신중했는가를 말해준다. 이처럼 성경번역에 대한 이수정의 애착은 남달랐다.

이수정이 성경을 번역하게 된 동기에 대해 이만열은 그의 저서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다.

“첫째는 신앙적 동기로서, 한국 선교를 위한 그의 열망의 발로였으며, 둘째는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갈 미국 선교사들을 위해 성경의 한글 번역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셋째는 신앙적 동기와 함께 개화 의지 때문이기도 했다.”고 하였다.

이수정의 회심과 그의 성경 번역의 착수는 일본에 유학 온 한국인들 사이에 복음이 전파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전도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인들이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신앙의 공동체가 일본에서 형성되었다. 이수정은 그의 친구들과 일본에서 주일학교를 개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
었으며, 그의 동향 사람 가운데 두 명이 세례를 요청했는데 그 중의 한사람이 귀족의 아들이었다.

이수정은 무엇보다도 성경 번역이 그에게 맡겨진 일차적인 시대적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1883년에 마가복음 번역을 끝낸 이수정은 다른 성경 번역에 착수했고, 그에게 성경 번역을 부탁한 루미스는 1883년 7월 30일 인쇄되어 나온 요한복음 일부를 미국 성서공회본부에 보냈다. 그의 노력으로 한문 성경에 토를 단 현토성경 신약성서 마가전이 1884년 11월에 출판되었고, 현토한한신약전서가 1887년에 출판되었다. 토를 붙인 한문 성경은 유식자 층에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수정은 이와 함께 1883년 6월부터 순수 우리말로의 번역을 착수해 1884년 4월에 완성하여 이듬해 2월 요코하마에서 신약 마가복음 1천 부를 발행했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가지고 온 성경이 바로 이 성경이었다. 비록 출판은 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번역도 완성했다. 이수정의 역본은 로스 역본과 함께 한글 성경 번역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번역 저본들이었다. 한글 성경 번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레이놀즈(W.
D. Reynolds)의 증언대로 로스와 이수정의 초기 번역은 여러 모로 보아서‘대단히 값진’선물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피어선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
의‘한국 선교사역에 대한 인치심의 증거’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23)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④ 이수정의 한국 선교 요청

이수정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농업 기술이나 서양 기술문명의 전수가 아니라 동족을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자신이 만나는 일본 주재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했다. 세례를 받은 후 이수정은 곧바로 루미스와 다른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미국 선교단체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사역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나라에서 먼저 선교사를 파송해 선교사역을 시작할 것에 대해 매우 우려했다. 당시 일본 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한국 선교사를 지원하는 분위기였다. 이수정은 일본 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한다는 데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한일 간의 오랜 역사적 감정 문제와 정치적 문제도 있었지만, 서구 문명을 직접 미국으로부터 수용하고자 하는 문화적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이수정은 통역과 지원만 이루어진다면 성공은 매우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수정의 노력에 힘입어 이미 1883년 5월에 조지 낙스 선교사와 헨리 루미스는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을 여행할 계획까지 세우고, 이를 본부에 타진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는 1883년 12월 13일자 이수정의 편지가 선교잡지인 미셔너리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84년 3월호에 실렸다.

그의 편지는‘1883년 12월 13일 요코하마에서’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이수정은 미국의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믿음과 진리의 능력으로 나는 주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며, 나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간구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지킬 수 있으며, 결코 사단에 의해서도 제거될 수없기 때문에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의 조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아직 참 하나님의 길을 모르고 있으며, 이방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복음전래의 시대에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눈에 띄지 않는 지구촌의 한 구석에 위치하고 있어 그 곳에서는 기독교의 축복을 누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나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다섯명의 나의 동포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
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장차 기독교인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숫자가 매일 증가하고 있습니다.

과거 칠, 팔십 년 동안 불란서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비밀리에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엄격히 그 종교를 금했고, 회심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승리의 죽음을 맞았던 것입니다.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숫자가
십만 명이 넘습니다. 비록 이 사람들은 주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예찬할 만하며,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부들 역시 종종 박해를 받았으나 그들은 결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정부는 나라를 개방해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고 있으며 국민의 여건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과거보다는) 기독교에 대해 좀 더 완만한 정책을 쓰고 있으며, 그러므로 비록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완선작이라는 한 중국 기독교인이 우리 왕에게 신약성경 한 권을 헌정했으나, 정부가 이를 방해해 왕이 그것을 하사받지 못했습니다. 왕은 매우 불쾌해 했고, 그 일이 현재 중요한 논제가 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어려움들이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만 그것들은 곧 해결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는 황금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귀국은 기독교 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민족들이 교사들을 보낼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되면) 그러한 가르침들이 주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나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를 간구합니다. 만일 나의 요구가 허락된다면 나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그리스도의 종 이수정’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다.

이수정의 편지는 그가 일본에 건너간 이유와 그 곳에서의 활동과 사역을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그가 일본에서 한국 선교를 준비하는 데 기여한 사실은 단순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복음을 접함으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전도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고, 후에 성경과 많은 기독교 전도문서를 번역하여 한국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토대를 구축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한국 복음화를 위해 그가 이룩한 더 큰 공헌은 미국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여 한국 선
교의 장을 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세례받은 지 만 1년도 채 안 된 사람의 편지치고는 복음의 열정이 짙게 배어 있고, 전체 구성은 물론 내용과 논제가 너무도 분명하다. 이수정에게 세례를 베푼 일본주재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수정의 편지는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바울의 꿈 속에 찾아와서 간곡하게
부탁했던 그야말로‘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이었다. 이것은 한국 선교열을 고취시키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미북장로회 선교부가 이 편지에 고무되어 선교사를 파송케 되었음이 다음 글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주목할 만한 일련의 사건에 자극된 우리(미북장로회) 선교사 몇 명은 여러 달 동안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를 임명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는데, 이는 개종한 한국인 자신들의 청원과 일치한다. 다음 사실이 선교 본부가 취한 행동이다. 최근 모임에서 선교 본부는 목회 선교사로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를 임명했다. 그는 뉴욕 대학과 뉴저지 뉴브른스윅의 개혁교회신학교를 졸업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12월 1일까지 미국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떠날 것이다. 최초의 선교사들이 현재 동경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 신자들로부터 일본에서 잠시 한국어 공부를 할 것이 확실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오윤태는‘이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에 뜻을 정하고 자기 나라를 떠나서 멀리 태평양을 건너 한국까지 온 사람은 한국장로교회의 창시자 언더우드 목사(Rev. Horace Underwood)와 메쏘디스트(감리교)의 창시자 아펜젤러 목사(Rev. Gerhart Appenzeller)이다. 당시 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두 청년이 뜻을 정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이수정 씨의 편지를 잡지에서 읽은 후에“조선에는 누가 가는가?”하는 신령한 음성을 듣고, 전자는 북장로회의 선교사로서, 후자는 메쏘디스트교회(감리교회)의 선교사로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수정의 한국 선교의 공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의 요청을 받고 감리교 요리문답도 번역하여 1천부가 출판돼 국내에 널리 유포되었다. 요코하마에서 그의 마가복음 성경 1천 권이 출판되던 바로 그 해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한국을 향해 오던 중 요코하마에 들려 이수정에게 2개월간 한국어를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오는 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그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선교사가 입국할 때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입국해 선교를 시작한 경우는 없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가 인도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해 인도 선교의 토대를 마련한 것처럼, 이수정의 성경 번역은 언더우드를
비롯해 이후에 오는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를 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준 셈이다. 언더우드가 선교지에 실린 이수정의 선교 호소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았고, 입국 전 그로부터 한국어를 배웠고, 그리고 그가 번역한 성경을 가슴에 지니고 입국해 선교를 시작했다면, 한국 선교에 끼친 이수정의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수정은“비록 나는 별로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이라고 겸손하게 편지에서 밝혔지만, 확실히 그는 한국 선교를 가시화시킨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한국교회사(24)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⑤ 이수정의 귀국

이수정이 이같이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당시 조선 정부로서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갑신정변 이후에 한국에서는 외국 유학생을 소환하기 위해 소환령을 내렸다. 이수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명의 고위 관리가 일본에 와 이수정을 설득했으나 이수정이 귀환을 거절했다. 1886년 1월경에는 이수정의 동생이 형이 일본에서 진 부채를 갚기 전에는 한국으로 귀국할 수 없다는 소문을 듣고, 7,8백 달러에 해당하는 1천 원을 건네주러 왔다. 일본에서 농업 기술을 배워 한국의 농업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형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일본에 건너온 동생은 형이 더 이상 상업과 농업을 연구하지 않고 기독교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단히 실망했다.

당시의 상황을 오윤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여기에 도착하자 그는 이수정이 농업, 상업의 연구에 종사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혹은 수많은 이상한 발명품에 접하여 보고 놀랐다. 그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쳐졌으며, 그의 마음은 완전히 변화한 것 같았다. 동생은 이것을 보고 당황하여 그 형 이수정에게 말하기를“당신은 더
이상 나의 형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떠한 이상한 감응이 형님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기독교 신앙에 빠져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전 시간을 몰두하며 신앙생활에만 매진해 있는 형의 모습을 불신자인 동생이 이해할 리 없었다. 그가 볼 때 그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을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리고 일본에 도착해 한동안은 농업기술을 전수해 한국의 농업발전에
기여하겠다던 형이 이처럼 기독교에 빠져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고는 형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형을 돕기 위해 1천 원의 돈을 가지고 일본까지 찾아왔던 동생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분노하는 동생에게 이수정은“나는 돈이 필요 없다. 너는 그 돈을 도로 가지고
가라. 나는 내가 여기서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네가 바라는 대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와 우리 동포를 위하여 철도나 전신기나 증기선보다도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동생을 돌려보냈다. 이수정은 자신이 하고 있는 성경 번역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 사역인지를 깨닫고 있었고, 또 그 일을 속히 마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동생의 귀국 권유를 거부한 것은 동생을 무시하거나 고국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민족을 향한 더 큰일, 더 시급한 일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가 또다시 고위관리 박준우를 일본으로 파송해 설득하는 바람에 이수정은 고국의 부름을 거부하는 것도 신앙인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귀국을 결심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평소 이수정은 조선의 왕실은 물론 기왕의 민영익과의 친분과 우호를 소중히 여겼다. 정치적인 역학관
계도 그의 귀국을 부채질했다. 갑신정변 후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주모자들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은 물론 자객을 보내 주모자들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옥균이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선교를 호소하자 자신도 그들과 한 배를 탄 매국자라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일본에 올 수 있도록 자신을 지원해준 민영익과의 개인적 친분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주재 선교사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그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행위 자체가 순수한 신앙에서 발로된 것이지만 본의 아니게 개화파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격이 될 수도있다고 그는 판단한 것이다.

본래부터 이수정이 김옥균과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이수정은 김옥균과 마찬가지로 개화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 문호를 열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을 꾀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1880년 친구 김굉집이 일본에 건너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왔을때 그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일본에 갔을 때도 이수정은 김옥균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만큼 둘의 사이는 좋았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기 1개월 전인 1883년 3월에 김옥균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이수정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정책적으로 조선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조선 학생들을 받아 1884년 3월 7일 당시 30여 명의 학생들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가 1883년 8월에 저술한 조선일본선린호화(朝鮮日本善隣互話) 1권에 김옥균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을 볼 때도 김옥균에 대한 이수정의 인상이 상당히 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그들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된 것은 갑신정변 이후였다. 이수정은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주도하고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던 민영익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으로 인해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다. 그때부터 이수정이 1886년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이때문에 김옥균은 기회가 있는 대로 이수정을 제거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1886년 1월에 방문한 동생이 고국으로 돌아간 후 불과 얼마 되지 않은 3월 21일, 이수정은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습격을 받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당시 일본에서 간행되고 있던 1886년 5월 10일자 시사신
보는‘김정식이라는 사람이 이수정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동경경죄재판소에 구속되어있다.’고 보도했으며, 그 해 8월 24일자 시사신보에 의하면 ‘조선국 양산부 원동에서 온 김의순은 지난 3월 21일 밤에 신전구 담로정 2목 4번지 도변유길(渡邊留吉) 댁에서 친하게
교제하던 이수정 씨와 말다툼 끝에 복부를 차고 준비해 가지고 있던 비단 손수건에 싼 탄환의 파편으로 머리와 얼굴을 때려 전치 20일 이상의 상처를 입혀 동경경죄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은 결과, 지난 21일 형법 제 삼백일 조에 의거 중금고 일년의 형을 받았다.’고 하였다.

1886년 들어 이수정은 두 번에 걸쳐 자객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이수정에게 적지 않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미 이 일이 있기 전 고국을 다녀올 계획을 세웠던 이수정으로서는 이와 같은 자객의 습격을 받자 아예 일시 귀국이 아닌 영구 귀국 쪽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 이수정이 일본에 계속 체류한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조국의 부름을 계속하여 거부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클라라 루미스(Clara Denison Loomis)에 의하면 그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헨리 루미스를 찾아와 한국에 오면 자신을 방문해 달라고 헨리 루미스를 초청했다. 루미스에게 방문 요청을 한 것을 보면 이수정은 귀국해
도 특별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것 같다. 이렇게 해서 그는 1886년 6월 2일, 4년 동안의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정부가 보낸 박준우와 함께 귀국했다. 그가 탄 배에는 이수정 외에도 박준우, 본국으로 소환되는 유형준, 유송진, 박영우, 서광철, 김학기 등 다섯 명의 유학생 그리고 김옥균을 암살하겠다며 한국 정부로부터 2만 원을 가지고 와서 호화로운 생활만 하던 조복도 있었다.

조선으로 귀국할 당시 이수정과 선교사들과의 관계는 상당히 소원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는 이수정이 정치 외교 문제에 깊이 관계하면서 친선교사적인 망명 개화파들(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정적으로 등장하는 한편, 반선교사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오던 묄렌도르프와 가까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1885년 3월 5일 매클레이의 집에서 제1회 한국 선교사회가 모였는데, 매클레이 부처 외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은 스크랜튼 여사, 아펜젤러 부부, 언더우드 그리고 한국인으로 이수정과 박영효 등이 참석해서, 한국에 대한“상황 분석과 여행 문제, 사업 방법, 선교회 개설 계획 등을 토론하고 무엇보다 앞에 놓여 있는 중요한 사업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것을 감사와 함께 간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수정과 선교사들과의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민영익과의 관계로 김옥균과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망명 개화파들의 정적이 되어 김옥균 일파가 보낸 자객에 의해 두 차례의 암살 미수를 당하면서 이수정은 정치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신앙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루미스는 1886년 5월 14일자의 편지에서“이수정은 5월 12일 한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는 줄곧 기독교인으로만 산 것은 아니었으며, 우리는 대단히 실망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매우 아팠으며, 최근에는 한 못된 동료에 의해 살해될 뻔 하였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우리는 위 편지에서 루미스가 이수정에 대해 실망한 것이 그의 비기독교적인(정치적인) 행동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귀국하기 전 이수정은 루미스를 찾아가 “그의 죄에 대해 깊이 뉘우친다고 고백”하였으며, 한국에 오면 자신을 찾아달라고 루미스를 초청하였다. 이러한 이수정의 행동은, 지난 1년여 동안 그가 행한 분주한 정치적 활동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상처와 오해뿐이었음을 깨닫고, 루미스를 만나 우정을 회복하고, 한국선교 사업에 동참할 것을 약속한 것이라 해석된다.

한국교회사(6)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5) 한국 땅을 밟았던 외국인 평신도들을 통한 개신교와의 접촉

(3) 바실 홀과 머리 맥스웰

하멜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은둔의 나라 조선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데 공헌한 사람은 영국 해군 머리 맥스웰(Murray Maxwell) 대령과 리라(Lyra) 호의 바실 홀(Basil Hall) 대령이었다. 이들은 1816년 9월 서해안을 항해하고 돌아가 바실 홀의 조선 항해기와 맥레오드(John McLeod)의 조선 항해기를 저술하여 서양세계에 조선을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이들은 처음으로 조선인들에게 성경을 건네주었고, 후에 귀츨라프 일행이 서해안을 탐사할 수 있도록 서해안 해도를 작성했으며, 조선 항해기를 저술하여 조선을 서양에 알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동양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었다. 영국이 1793년 매카티(Macarthey) 경을 수석으로 한 사절단을 파송하고 이어 1816년 암허스트(Amherst) 경을 수반한 사절단을 중국에 파송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동양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중국과의 외교적인 관계를 정상화하고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풍토와 역사와 지리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순조 16년인 1816년에 맥스웰을 선장으로 한 순양함 알세스트(Alceste) 호와 바실 홀을 선장으로 한 리라(Lyla) 호 두 함선을 파송해 이들이 조선의 서해안에 와서 해도를 측량하고 조선에 대한 일련의 정세를 연구하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 서해안 해도 작성의 임무를 띤 맥스웰 함장의 프리게이트 함 알세스트 호와 바실 홀의 브리그 함 리라 호는 8월 29일 위해위(威海威)를 출발하여 9월 1일 동틀 무렵 조선의 육지가 동쪽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일행은 황해도 대청군도에서 남하하면서 처음으로 해도 작성을 착수했다. 저들이 조선인을 처음 목격한 것은 소청도 남쪽 바다 입구에 있는 소청리에서였다. 제일 남쪽 섬을 바라보는‘아름다운 만’에 닻을 내리자 얼마 안 있어 5, 6명의 주민이 작은 배 하나를 타고 왔다. 50야드 가까이에 이르자 배를 멈추었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였으나 섬 주민들은 오지는 않고 호기심과 경계의 빛으로 바실 홀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은 보트를 타고 그들 가까이 갔으나 그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이 해안으로 노를 저어 어느 마을에 상륙하자 그들이 뒤따라왔다. 촌락을 이룬 그곳에 일행이 상륙하자 부녀자들이 마을을 버리고 급히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조선인은 상투를 틀고, 펄럭이는 넓은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닿는 상의와 짚신을 신었고, 중키에다 체격이 좋고 힘세게 보였다. 그들이 바실 홀 일행을 따라온 것은 단순히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조용한 마을에 외국인이 입국하자 경계의 태도를 취하기 위함이었다. 일행이 소청도 촌에 들어가 조선의 실정을 살펴보기를 원했으나 촌민들은 완강히 저들을 거절했다.

비록 조선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어떤 교류를 할 수는 없었지만, 바실 홀 일행은 조선인들의 생활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바실 홀 일행의 눈에 처음 만난 조선 사람들은“무뚝뚝하고 쌀쌀한 표정”을 지닌, 그러면서도“놀랍게도 호기심이 없는 고만(高慢)한 태도를 지닌 족속”이었다. 처음 만난 조선 사람에게 “멸시와 오만”을 접한 바실 홀 일행이 조선 사람들을 그렇게 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중국 정부에는 대단한 예물을 동원하고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조선에 대해서는 서해안을 탐험하고 해도를 작성하면서도 조선에 전혀 통보조차 하지 않은 자신들의 잘못되고 오만한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박용규는 한국기독교회사에 기록하고 있다.

1816년 맥스웰과 바실 홀이 서해안을 탐사하는 동안 마량진에서 마량진 첨사 조대복은 저들의 배에 올라 문정을 하였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아
무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 최초로 성경이 건네졌다는 것
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배가 마량진에 정박한 지 이틀째 되던 9월 5일 첨사 조대복이 비인현감 이승렬을 대동하고 리라 호를 재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의 상황을 바실 홀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그가 선실에 있는 서적들을 구경한 후 그는 성경(a Bible)의 장정에 상당한 마음이 끌렸으나 막상 그에게 성경을 권하자 비록 대단히 마지못해서이지만(주저하면서)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배를 막 떠나려 할 때 다시 건네주자 이제는 아주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성경)을 받고 상당히 기분 좋게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후 조대복과 이승렬은, 외국과의 교류를 철저하게 금하고있던 조정이 외국 함대의 국내 입항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책임을 저들에게 물어 관직에서 해직되었으며, 조대복이 받았던 성경을 포함한 3권의 책은 충청수사에게 모두 보내졌다가 후에 서울로 보내져서 서울 관부나 규장각에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김양선 목사는 주장한다. 이후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아쉬운 것은 바실 홀과 맥스웰의 입국이 복음 전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해안 해도 작성에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전한 성경이 영어 성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조선에 전해졌다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 성경을 통한 직접적인 역사를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인 선교 이전에 이 땅에 찾아왔던 평신도들의 방문의 의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실로 크다 할 수 있다.

첫째는, 이 땅에 복음을 가져다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둘째는, 우리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처음으로 전해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셋째는, 선교사가 이르기 전에 성경과 평신도가 먼저 왔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저들은 선교사가 아닌 상인 또는 군인이었으므로 적극적으로 선교하지는 못했지만, 저들의 언행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내었고, 자신들이 예수를 믿는 크리스천임을 나타내었다.

넷째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므로 극동에 있는 은둔의 땅 한국이 선교지로서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사(7)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1) 천주교의 전래 및 정착

중국에 천주교 선교사를 파송하여 처음 상주토록 한 것은 예수회에 의해서다. 예수회 창설의 주역을 맡았던 프란시스 자비엘은 동방 선교에 나서서 1549년 일본 선교에 이어, 중국 선교에 나섰으나 1552년 광동 앞바다의 섬에서 돌아갔다. 그 뒤 카르네이로(1568년), 발리냐니(1573년)와 40명의 선교사들, 루기에리(Michael Ruggien, 羅明堅)가 파송되었고, 루기에리의 권유로 선교 길에 오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에 의해 중국 선교가 본격화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자비엘이 돌아가던 해에 출생한 같은 예수회 신부로 이태리 태생이며, 1581년에 마카오에 도착한 후 남경(1595년)을 거쳐 1600년에는 북경에 들어갔고, 그 이듬해에는 북경에 교회당(南堂)을 세우고 동지 카타네오, 판토쟈와 함께 열심히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는 1603년「天主實義」등의 책을 저술하여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천주교를 소개하였다.

천주교는 17세기 초부터 조선의 지식층에게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朱子學)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사회·경제의 제반 체계가 굳어져 있었고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통하여 그 사회적 모순이 여러 곳에서 노정되고 있었던 만큼, 조선의 지식층,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사회의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며 이를 개혁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에게 이 천주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가 당시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남인계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환영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현(昭顯)세자가 한국인으로서는 비교적 초기에 천주교와 접하게 되었는데 그 때는 볼모 생활을 할 때였다. 병자호란 후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1644년 북경으로 옮겨진 후 당시 예수회 신부로서 청(淸)나라 조정의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에 오른 아담 샬(J. Adam Shall van Bell, 渴若望)과 사귀게 되었다. 서양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는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예수회 신부들은 세자를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환국할 때 선교사들은 중국인 궁녀 감독관인 환관 5명을 교인으로 구성하기까지 하였지만, 귀국한 지 70여 일만에 세자가 돌아감으로 그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1777년 정조(正祖) 원년에 이벽(李蘗), 권일신(權日身),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등 남인의 시파 유학자들이 서학(西學)에 관심을 가지고 한강가의 산사인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토론을 하였다. 이벽은 서학에서 신앙을 얻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쉬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으며, 다른 이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르쳤다. 1783년 정조 7년에 동지사 겸 시은사 황인점의 서장관 이동욱의 아들이요 정약전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자, 이벽은 천주교의 진리를 잘 알아 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일행을 따라 10월 14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21일에 북경에 당도하여 남당(南堂)을 방문하고 신부에게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다. 1784년 음력 정월 그믐께 귀국하기 직전에 예수회 신부 그라몽(Louis de Grammont)에게 세례를 받고‘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해 3월에 수십 종의 교리 서적과 십자가상과 성화, 묵주 등 진귀한 물품을 가지고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고, 이벽에게 교리 서적들을 전해 주었다. 이벽은 기독교 진리 변증, 중국과 조선에 있는 미신에 대한 반박, 7개 성사(聖事)에 관한 설명, 공교요리(公敎要理), 복음 해설, 매일의 성인전, 기도서 등을 통하여 신앙에 더욱 확신을 하고 전도하였다.

이벽은 천주교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양반계층보다는 중인(中人) 계층에 먼저 전도를 시작했다. 역관인 최창현, 김범우, 최인길, 지황, 김종교 등이 그의 전도를 받아 입교했다. 이들 중인계층 역관 출신들은 전통 유학에 사로잡힌 양반계층보다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이는데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북경을 왕래하며 이미 서학의 정신과 문명세계의 진보성을 보아 알고 있던 터였기에 이벽의 권유에 찬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계층에게 전도하려는 이벽의 시도도 계속되었다. 이가환, 이기양과 같은 학자들과 공개토론까지 벌이면서 입교를 꾀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1784년 9월, 경기도 양근(양평)에 사는 권철신, 권일신에게 전도하여 그중 권일신을 입교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승훈이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게 되면서 한국내에서 자생적인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고, 이벽, 권일신, 유항검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때 그들은 교황청의 허락도 없이 최연장자인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출하고 이들에 의해 성사를 집행하는 가성직시대(假聖職時代)를 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제도의 모순을 곧 깨닫고 북경 교회에 알려 지시를 받게 되었지만,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한 가성직제의 출현은 한국 천주교회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의 자생적 성격을 이해토록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의 천
주교회는, 초기의 학문적인‘서학’,‘ 천주학’의 단계에서 신앙적인 단계로, 초기의 기호(畿湖) 지방의 몇몇 학자들 중심의 단계에서 양반 계층을 포함한 사회 전 계층의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사(8)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2) 천주교회의 제사 문제로 인한 수난

한국의 천주교회가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은 제사문제 때문이었다.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1789, 1790년에 걸쳐 두 번이나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 신부의 파송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교회에서 오랜 동안 논란을 겪었던 제사문제에 대한 지도를 요청하였다. 윤유일이 받아온 답은 조상 제사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원래 예수회의 독점적인 전교 시기에는 제사 문제가 별로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예수회가 처음으로 현지 적응 정책을 써서 조상 제사와 공자 제사를 용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서 프란시스코(방지거)회와 도미니쿠스(도밍고)회 및 파리외방전교회가 중국에 진출하여 예수회의 제사 용납 정책에 대해 교황청에 제소함으로‘典禮問題’가 시작
되어 거의 120년 간 계속되었다. 교황청은 처음에는 단안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제사 금지’로 결론짓게 되었는데, 이런 조치에 반발하여 중국 정부는 예수회 이외의 선교 단체들을 추방하였고, 교황청은 예수회의 해산을 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윤유일이 받아온 조상 제사 금지 결론은 당시의 한국 사회를 규제하고 있던 지배 이데올로기라 할 주자학과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조선 사회가 조상과 부모에게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신위를 없애는 천주교도들의 행위에 대하여 국가적인 차원의 반응을 보인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가정적인 효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윤리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인간됨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념적 기반이라 할 주자학적 충(忠)을 붕괴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전례 문제가 한 구실이 되고 정치 역학 관계가 상승하여 몇 차례에 걸친 박해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1784년에 창설된 조선 천주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어 사실상의 종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년 동안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겪었다. 이 같은 박해는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다.

1785년(정조 9년, 乙巳) 봄에 형조의 금리들이 우연히 명례방(明禮坊, 명동)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벽이 중앙에 앉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있었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권이신, 권상학 부자 등이 모여 있었다. 금리들은 처음에 노름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들어갔다가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압수하여 형조에 갖다 바쳤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집주인인 중인(中人)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회유하여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것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 체포된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당한 후 1년만에 유배지에서 죽음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벽과 이승
훈은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며, 이백은 배교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번민하다가 1786년 봄에 열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핍박이 가라앉자 이승훈을 비롯하여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1787년 겨울에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등이 반촌에 있는 김석태의 집에 모여 서학서를 공부한 사실이 폭로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것을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라 하는데 이 사건을 폭로한 인물은 이승훈, 정약용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처음엔 서학에 호의적 관심을 보였던 이기경이었다. 이기경은 반촌에서 있었던 서학 연구 모임의 실황을 홍낙안에게 알렸고, 홍낙
안은 이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여 왕으로 하여금 서학관계 서적을 불살라 없애라는 명을 내리게 하였다.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소위 진산사건이 터졌다.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 권사연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터졌으니 조선 천주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맞은 대규모 박해였다.

정약용의 외종이 되는 윤지충은 진사 시험(1783년)에 합격한 양반계층 신분으로 1784년 서울에 갔다가 김범우의 집에 들러 천주실의와 칠극(七克)을 얻어 보았으며 고향에 돌아와 그의 외종형 되는 권상연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던 중 둘이 함께 입교하였다. 정미반회사건 이후 정부에서 서학을 금하는 명이 내리자 집에 있던 서학서를 태웠으나 은밀하게 신앙은 계속 지켰다. 그러던 중 1790년 말 윤유일을 통해 전달된 북경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들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은밀한 신앙행위가 1791년 여름 그의 어머니 권씨가 별세하게 됨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었다. 상례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위마저 만들지 않은 윤지충이나 그의 행위를 지지하는 권상연의 행위는 전통 양반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공개적 제사폐지 행위는 소문을 통해 중앙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정치 문제화시킨 장본인도 역시 홍낙안이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멸륜패상’(滅倫敗常),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난행을 범한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1년 12월 8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조선 초대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재정립하든지 아니면 천주 신앙을 포기하든지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는 박해라는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 천주교를 이끌어 온 지도자들의 배교로 인한 도전이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뿌리가 깊지 못한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을 비롯해 이벽, 정약전, 권일신, 최필공, 최인철, 최인길, 최필제, 정인혁, 손경윤, 양덕윤 등이 배교하고 말았는데, 천주교의 이와 같은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경 번역으로 시작된 후대 개신교 선교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지 못한 가운데 천주교 선교가 진행되었으므로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한 까닭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9)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3) 신유박해와 조선천주교

천주교회가 형성되면서 신자들은 모두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성직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상의한 끝에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정하였다. 1789년 10월, 교회의 지도자들은 윤유일에게 동지사 이성원 일행을 따라 북경으로 가서 천주교 주교를 만나 서울에서 교회가 조직되었음을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북경에 주재하는 주교 구베아(Gouvea)는 평신도가 행할 수 있는 세례성사만 인정할 뿐 성직제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1793년 구베아 주교는 서울의 신도들이 신부를 보내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고 북경 천주교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중국인 주문모(周文謀) 신부를 선정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주문모는 1794년 12월 국경을 넘어 이듬해 1월에 서울에 숨어들어왔다. 그러나 약 6개월 후에 밀고로 인하여 관의 체포령이 내려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신도들의 도움으로 6년 동안 용케 피해
다니면서 교회를 돌보며 지방으로 순회하면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그가 입국할 때 4천 명이던 교인수가 5년 후에는 만 명이 되었다.

박해가 완화되기를 기다렸으나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더 이상 숨어 지낼 수 없었던 주문모 신부는 이와 같은 조선천주교회의 상황을 북경의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를 썼다. 발각되지 않도록 명주에 라틴어로 쓴 다음 옷 속에 꿰매 철저하게 보안장치를 한 편지는 1797년 1월 28일 동지사 일행 틈에 끼어 북경에 입국한 두 명의 조선의 천주교인을 통해 중국 주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되었다. 주 신부의 편지는 포르투갈 왕이 조선 왕에게 조선의 천주교 신도들을 대변해 줄 것과 조선 왕과 수호조약을 맺을 것, 그리고 조선의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해줄 것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요청은 주 신부가 볼 때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 활동을 위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그러나 천주교가 전통적인 조상숭배를 거부하며 반국가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로서는 이와 같은 천주교 전래의 자유를 허락할리 만무했다. 오히려 주문모 신부가 이와 같이 요청했다는 사실이 조선 정부에 알려지면서 주신부의 그와 같은 행동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사건은 1791년에 있었던 신해박해에 이어 1801년 신유박해로 이어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로 이어졌다. 주문모 신부는 점점 더 절박하게 다가오는 위험을 피하여 국경을 넘어 귀국하려고 가다가 많은 교인들이 자기 때문에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되돌아와 자수하고, 1801년 음력 4월 19일에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위와 같이 처음 천주교가 전래되고 100여 년 간 조선천주교는 제사 문제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고, 그로 인한 순교자만도 10,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박해 속에서도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 제사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순교적 신앙으로 일관했다.

신유박해와 관련, 주목되는 점은‘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다. 천주교도였던 황사영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배론의 은거지에서 비단에 글을 써서 북경에 보내려 하다가 중간에서 발각되었다. 1만 3천여 자나 되는 이 글에는 박해의 경위와 주문모 신부 등 순교자들의 사적, 조선 천주교회의 부흥과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법이 나름대로 제시되어 있다. 문제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청나라와 프랑스 함대를 동원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신앙의 자유와 민족적 주체성 사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어서 신앙 외적인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일로 정부는 더욱 천주교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고, 이어 천주교에 대해 더욱 무서운 박해를 가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했는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이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일은 조상숭배 문제로 순교에 이르기까지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가 토착화 선교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조상제사를 비롯하여 공자숭배와 신사참배까지도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표현하는 국민적 예식이라는 이유로 허용했다는 것이다.

약 2세기 간이나 엄격히 금지되어 오던 동양제례가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문제화 된 것은 1932년 일본의 팽창주의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이 국민의 단결을 이루기 위하여 공자숭배를 국민에게 의무화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일로 인해 천주교인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당황한 교회당국은 공자숭배의 성격을 정부에 질의했으며, 정부는 이 의식이 종교적이 아
니라 단순히 사회적, 국가적 예식일 뿐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토착화 정책을 선교의 기본방향으로 지향하고 있던 교황 비오11세는 1935년 공자 공경의식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만주 주교단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례시 사자(死者)에 대한 사회적 경의 표시로서의 절도 허용하였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되었다. 군국주의의 일본정부는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국민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의무화하였다. 이에 교회당국은 신사참배의 의의와 성격에 대해 정부에 질의를 하였고, 정부는 이 의식이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표현하는 국민적 예식이라고 답변을 하였다. 교황청은 정부의 해명을 근거로 하여 1936년 신사참배를 허용하면서 선교사들은 조국에 대한 국민의 충성과 사랑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하며 신자들에게 일반 국민들에 못지않은 애국심을 갖도록 고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천주교의 주장대로라면, 그 직무에 있어서 무흠한 교황과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가 어떻게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이같이 번복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그 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조상제사나 공자숭배와 신사참배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일로 인해 죽은 자들은 순교자가 아니라 교회의 잘못된 결정에 의
해 어이없이 희생되어진 자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건만 보아도 천주교가 때를 따라 본색을 달리하는 단체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대진경교유행비

 781년(당 건중2년)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교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관(숭실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88.8*177.8cm

 

 

돌십자가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적을 증명한다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한국기독교박물관소장. 24.5 *24*9cm



오다 쥴리아의 묘
임진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사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니시에 끌려 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 소재.


북경 북천주당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방문시 꼭 들려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가 번역 되었다.

 

 척화비
1871년 신미양요때 세웠다가 1882년에 철거된 척화비는 바로 교회의 박해 상징이기도 했다.

 


 1890년대 개화전 제물포항


선교사들의 순회 전도
1891년경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서북지방 순회전도광경이다. 마펫, 게일, 베어드 등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교회사(2)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한국이 서양문화와 접촉한 시기는 언제이며, 서방 세계에 알려지게 된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문제는 많은 역사가들의 주요한 관심이 되어왔다. 그 첫째 접촉은 중국을 통한 경교와의 접촉 가능성이고, 둘째는 통일신라시대 아랍세계와의 접촉 가능성이며, 셋째는 몽고를 통한 가톨릭과의 접촉 가능성이다.

1) 중국을 통한 경교와의 접촉

중국의 기독교 접촉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도마와 바돌로매가 동방으로 진출하여 도마는 인도에, 바돌로매는 중국에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중국이 서방 기독교와 최초로 접촉한 교파는 경교였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일파는 선교의 방향을 오늘날의 이라크, 이란, 터키 동남부 등 동방으로 돌려 활동하였으며, 서방교회와는 다른 신학을 정립해가기 시작했다. 페르시아를 거점으로 오랫동안 세력을 확장하던 네스토리우스파는 674년 페르시아가 회교국 아라비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도 칼리파(Khalifa)의 신임을 얻어 계속 교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762년에 본거지를 바그다드로 옮겨 계속 발전했다.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당나라 시대였다. 중국에 경교의 전래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1625년‘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알로펜(Alopen,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중국에 도착한 것이 635년,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9년이었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내보내 이들을 환영하였고 당의 수도 장안에 머물게 하며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도록 배려하였다.

이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한자 명칭은 여러 가지다. 그들이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 음역인‘파사’를 붙여 파사교(波斯敎)라 칭하기도 했으며, 후에 그 교가 로마에서 전래되었음을 알고 로마를 의미하는 한자‘대진’을 넣어 대진교(大秦敎)라 불렀다. 그러다가‘광명정대한 종교’라는 의미가 담긴‘경교’(景敎)란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여‘대진
경교’(大秦景敎)란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638년 7월에 경교(景敎)는 태종(太宗)의 조정이 공인하는 종교가 되었다. 태종은 국비로 장안의령방(長安義零坊)에 대진사(大秦寺)를 건립하고 승려 21명을 두게 하였다. 태종은 경교를 공인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이 교는 도덕적으로 숭고하며 심오한 신비성이 풍부하고 평화를 존중하는 종교이므로 나라가 공인하는 종교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이 이유 외에도‘당의 태종이 경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배경에는 한(漢) 이래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룬 태종이 서쪽으로부터 확산되고 있는 아라비아의 회교국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알로펜은 635년부터 641년까지 포교하는 한편, 「예수 메시아경」을 번역하였다. 650년에 즉위한 고종(高宗) 때에는 경교를 진종(眞宗)이라며 전국 각지에 사원을 건설하고 알로펜을 높이어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삼았다. 이때부터 경교는 국교로 인정받았으며, 845년 무종(武宗) 때의 외래 종교 대박해 사건이 있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융성하였다.


경교가 한국에 전래 되었을 가능성은 있는가?

경교가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635-845년까지 210년 동안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통일제국을 형성했던 시기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의 군사력의 도움을 받았고, 그 후 통일신라가 친당 정책을 쓰면서 사회·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당의 영향을 깊숙이 받고 있었다. 더구나 일부 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 해상 무역이 발달해 중국,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지역에까지 무역을 확장하였다고 주장한다. 경교의 한국 전래를 주창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논리, 즉 신라와 당나라간의 정치, 문화, 군사 교류, 신라와 아랍국들 사이의 무역 교류 등을 통해 경교가 한국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1917년 골든 여사는 금강산의 장안사에서 발견한‘경교모조비’와 경주 석굴암의 무인상, 십일서관음상 등의 옷 무늬와 신발과 유리 장식 등을 페르시아의 것으로 보고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1956년에는 불국사에서 석재 십자가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김양선은「한국 기독교사 연구」에서 통일 신라 이후 능묘 제도의 특색이 되어 있는 호석(護石)에 부조(浮彫)된 12지상과 능묘 앞에 배치된 페르시아의 무인상 등이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교의 한국 전래에 대한 위와 같은 주장은 단지 추측일 뿐 결정적인 역사적 사료는 되지 못하며, 혹 전래가 되었다 할지라도 종교적인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사(3)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2) 아랍문명을 통한 세계와의 첫 접촉

한국이 최초로 유럽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루브루크가 한국을 소개한 것보다 4세기나 앞선 9세기경이었다.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에 따르면“서양 문헌에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 것은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Ibn Khurdhibah, 820-912)의 작품, ‘제도로 및 제왕국지’(Book of Roads and Provinces) 에서이다.

당시 아랍은 거대한 민족을 형성하여 아랍과 중국 두 제국이 국경을 맞대고 접촉하고 있었고, 한국은 중국을 통해 아랍 상인 및 문화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랍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는 동·서 문명을 잇는 가교가 되었고, 자연히 한국이 이들에 의해 서방 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가 한국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그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의 작품,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다른 쪽에 놓여 있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다.

그러나 높은 산들이 조밀하게 간도(Kantu, 산동성)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 산들은 신라(Sila)에 걸쳐 놓여 있는데, 신라는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를 방문한 회교도들은 이 같은 이점을 경험하고는 여기에 정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인삼, 녹용, 용설란(aloes), 장뇌(camphor), 못, 안장(saddles), 자기, 공단(satin), 계피(zimmit), 생강(galauga)을 수입했다.

쿠르드지바 이후 아랍세계의 문헌에는 신라가 자주 등장한다.

신라에 대한 소개는 10세기의 아랍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al-Masoudi, -965)의 세계 역사서‘황금초원과 보석광’에도 나타난다.

“바다를 따라 중국 다음에는 신라국과 그에 속한 도서를 제외하고는 알려졌거나 기술된 왕국이란 없다. 그곳(신라국)에 간 이라크 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고 토지가 비옥하며 또 자원이 풍부하고 보석이 일품이기 때문에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후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모로코의 알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자리한 사실이 나타난다. 그는 전래의 지리 지식을 집대성하여 지은‘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년)이란 책 속에 한 장의 세계지도와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려 넣었다. 그 제1지역도 제10세분도에 5개 섬으로 구성된 신라가 명기되어져 있는데, 그 지도의 후미에 신라에서는 금이 흔해서 개의 쇠사슬까지도 금으로 만든다는 기술이 곁들여져 있다. 이 지도는 유럽의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한국이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벨호 세계지도(1562년 제작)보다 무려 408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아랍 지도야말로 한국 이름이 적힌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3) 루브루크와 몽고를 통한 가톨릭과의 접촉

몽고가 세계 제패의 여세를 몰아 근동 중동의 회교도 국가들을 침공해 세력을 떨치면서“서구의 기독교는 오히려 몽고와의 제협을 바라게 되었고, 또 거기에 대한 선교의 가능성까지 찾아 타진하게 되었다. ”십여 차례 십자군전쟁을 통해 수많은 대가를 치르면서도 눈에 띄는 결과 하나 얻지 못한 상황에서, 그렇게 난공불락의 중동의 회교국들이 징기스칸의 말발굽 아래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서구의 기독교는 징기스칸을 단지 한 민족의 통치자라는 차원을 넘어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황은 한편으로는 고마움의 표시로 다른 한편으로는 차제에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일환으로 성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성지 순례의 자유를 획득해 준 몽고와 징기스칸에게 사절단을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가톨릭의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교황의 전권대사로 프란체스코회의 카르피니(Giovanni da Piandi Carpini, 1182-1252)가 선출되어 1246년 7월 22일 몽고의 수도 카라코룸(和林)에 도착하였다. 마침 그때가 쿠유크(Kuyuk)가 정종으로 즉위할 무렵이어서 그 대관식에 참석, 교황의 친서를 전달했고 정종의 우호적인 내용의 친서를 받고 1247년 가을에 유럽으로 귀환하였다.

1253년에는 다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루브루크(William de Ruburck)가 동료 크레모나(Bartolomeo da Cremona) 와 함께 카라코룸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프랑스 왕 루이 9세(Louis Ⅸ)의 사절들로 징기스칸의 증손 사르탁(Sartach)이 기독교인(네스토리우스파)이란 사실을 소문으로 전해 듣고 그와 협력하여 이집트를 공략할 정치적인 목적에서 파송된 인물들이었다. 카라코룸에 도착하여 사르탁을 만났으나 그가 기독교인이 아님을 알고 실망했
으며 종교적인 토론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헌종의 친서를 받아 1254년 돌아오고 말았다. 루브루크는 귀환한 후 몽고에서 체험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몽고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의 현황과 이때 유럽에서 포로로 잡혀 온 기독교인들의 실태를 소개하였다. 이때 그는 압록강 부근까지 여행하였으며 고려를‘카울레’(Caulej)로 표기하여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루브루크가 한국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한 사람은 아니다.
루브루크가 13세기에 한국을 서양에 소개하기 4세기 전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가 신라를 서양에 소개한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사(4)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4) 임진왜란을 통한 천주교와의 접촉

16세기 후반 유럽 열국이 종교개혁으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동안 성격은 다르지만 한반도는 전에 없는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었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이 바로 그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내적으로는 자체 개혁을 목적하고, 외적으로는 선교를 통해 실추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예수회(Jesuits)라는 선교단체를 세웠다. 예수회는 스페인 출신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와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에 의해 1534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되었다. 예수회의 동양선교는 설립자의 한 사람인 사비에르의 직접 참여로 시작되었다.

사비에르는 1541년 포르투갈 국왕의 지원을 받으며 인도 고아(Goa)에 진출했으며, 1549년 8월 15일에 토레스(Come de Torres)신부, 페르난데스(Joas Fernandes) 수사, 안지로와 함께 일본의 가고시마에 도착해 일본 선교의 장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천주교인을‘기리시단’(吉利支丹)으로 불렀다. 1552년 일본을 떠나기 전까지 불과 2년 3개월 만에 사비에르는 1천 5백 명의 개종자를 얻었는데, 후대 이들은 일본 선교의 초석이 되었다. 일본의 예수회 천주교세는 그 후 놀랍게 증가하여 1570년에 약 3만 명, 1579년 10만 명, 1581년 15만 명, 1587년에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일본의 예수회 천주교세가 이처럼 급증하게 된 것은 천주교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국가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무역에 관심을 갖게 된 일본의 다이묘(大名)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어, 교토와 규슈의 명문들이 기리시단으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기리시단 다이묘들의 출현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주민들의 개종으로 이어져 기리시단의 수가 급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교세를 가진 예수회가 수난을 겪기 시작했는데, 158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세상을 떠난 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이다. 포르투갈이라는 강대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예수회 세력의 급속한 신장은 정치적 안정이 구축되지 않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인 위협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집권 7년만에 예수회에 대한 금교령을 발표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강력한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한편 내적불안 요인들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1592년에 시작되어 1598년에 끝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이 전쟁 중에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첫째는 전쟁 중에 서양인 성직자가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이고, 둘째는 전쟁 중에 잡혀 간 많은 한국인 포로 중에 상당수의 천주교 개종자가 나왔으며 그들 가운데는 순교에 이른 사람도 있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의 한 사람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유명한 기리시단 다이묘 중의 하나였다. 불과 20여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고 평양까지 진출했던 고니시 부대는 조선 의병들의 저항을 받아 후퇴, 경상도 남단의 웅천(熊川)을 거점으로 삼아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전쟁이 오래 계속되자 고니시는 본국에 있는 예수회 신부들에게 종군 사제를 한 사람 보내달라는 서한을 띄웠다. 휘하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것이었다. 이 요청에 따라 1593년 12월 27일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와 일본인 수사 후칸 에이온(Foucan Eion)이 파견되어 1년 가까이 머물면서 은밀하게 천주교 신자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었고 1595년 초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1년 동안 세스페데스는 일본군인들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했을 뿐 조선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입국은“조선인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방한한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서양 사람으로서 더구나 크리스천이며 전도자인 그가 한반도의 땅을 밟았다는 점에서 역사상 특별히 기록할 만한 가치가”있다 하겠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던 한국인은 약 5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 가정의 노비가 되거나 노예로 팔려, 멀리는 마카오, 마닐라, 인도 및 이태리에까지 끌려갔다. 1597년 6월에 일본에 상륙했던 프란시스코 카를레티(Francisco Carletti) 수사는 5명의 한국인 노예를 사서 세례를 주고 인도 고아로 데려가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그 중의 안토니오 꼬레아(Antonio Corea)는 수사와 함께 프로렌스까지 가서 공부한 후에 로마에서 살았다고 한다. 포로된 한국인 중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자가 7천여 명이나 나왔다.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에서는 2천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며, 그러는 중에 한문으로 된 교리서가 한글로 번역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뒷날 포로 중의 일부가 귀국하였을 때 그 일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은밀히 신앙생활을 유지하였던 것 같다. 일본에 체류한 한국 신자들 중에는 권(權) 빈센트같이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1605-1637년에 걸친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천주교박해 시대에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희생된 이들도 많았다. 이 중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도쿠가와 궁전 안에서 궁녀로 있으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고오즈시마란 조그만 섬에 유배당해 그곳에서 절명한 오타 쥴리아(Ota Julia)를 비롯하여 6명의 증거자들이 일본 천주교회사에 기록되고 있으며, 최근 일본인 성인 26인
중 3인이 한국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사(5)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5) 한국 땅을 밟았던 외국인 평신도들을 통한 개신교와의 접촉

1595년경, 세스페데스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간헐적이지만 서양인들이 국내에 입국한 일이 있었다. 이 시기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들로는 1627년 경주 앞바다에서 표류해 입국한 벨트브레(Jan Janse Weltevree, 朴燕),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816년 조선의 서해
안을 탐사하기 위해 군함을 이끌고 입국한 영국 해군대령 머리 맥스웰(Murray Maxwell)과 바실 홀(Basil Hall)을 들 수 있다.

(1) 박연 일행의 한국 표착

박연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벨트브레(Jan Janse Weltevree)는 화란 리프(Riip) 지방 사람으로 1627년 무역선 우베르케르크(Ouwerkerck)에 올라 일본으로 교역 차 항해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일행 세 사람과 함께 경주 앞바다에 표착하였다. 박연은 같은 동향 출신인 디렉 헤리
스베르쓰(Direk Gijsbertz)와 암스텔담 출신 얀 피테르츠(Jean Pieterz)와 함께 물을 구하기 위해 단정(短艇)을 타고 육지에 상륙했다가 그곳 주민에 의해 사로잡혔다.

박연 일행은 경주로 압송되어 동래부사 앞에 끌려가게 되자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에 동래부사는 이들을 나가사키로 보내기 위해 동래의 왜관(倭館)으로 보냈으나 왜관이 저들을 받지 아니하고 되돌려 보내므로 저들은 부산에 4, 5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일행은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인조 대왕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다시 간청했으나 왕이 이를 거절했다. 저들은 심문을 받고 얼마 후에는 군대(訓練都監)에 편입되어 전투에도 참전했다. 박연은 3인 중에서 그 용모, 지식, 인격, 기술이 출중하여 호겸과 함께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서 한·왜군의 영솔자가 되었다. 세 사람이 모두 인조 14년 병자호란에
참전했으나 박연만 살아남고 두 사람은 그 전쟁에서 사망했다. 이 전쟁에서 공을 인정받은 벨트브레는 얼마 후 조선 여인과 결혼이 허락되어 1남 1녀까지 두었다.

그가 과연 개신교도였는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1618년 화란은 개신교 국가로 세계에 명성을 떨치며 세계 개신교를 주도하는 국가 중 하나였기 때문에 박연 역시 독실한 개신교도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김양선은 정재윤의 한거만록(閑居漫錄) 제2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벨트브레는 일개 상인이었고 전도자가 아니었으므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았으나 기독신자로서의 행위와 언사를 십분 이행하여 접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도 환경이 바뀌어지면 신앙에 변화가 오기 쉽다. 더구나 외국에 가서 기독교인이 전혀 없는 곳에서 신앙의 절조를 지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벨트브레는 일평생 신앙을 지켜서 생면부지의 사람들로 그를 훌륭한 종교인으로 추존케 하였으니 그의 신앙은 실로 놀랄 만하다. 그는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신교 신자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정재윤이 한거만록에서 지적한바 박연이“매양 선악화복(善惡禍福)의 이치를 말하고 툭하면 하늘이 갚는다고 말하니 그 말이 도(道) 있는 자의 유(類)하더라.”는 사실은 성해웅의 연경제전집과 탐라기년 제2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때 박연을 보는 주변의 인물들은 그가 하늘의 신을 믿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연은 조선에 정착, 자신처럼 배의 난파로 표착하는 외국인들의 통역을 담당하는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이국 조선에서 보냈으며, 그의 후손들도 모두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군인일가를 이루었다.

(2) 하멜 일행의 한국 표착

1653년 1월 10일 본국을 떠난 화란 상인 하멜 일행을 실은 네덜란드 무역선 스패로우 호오크(Sparrow Hawk) 호는 자바의 수도 바타비아와 대만을 거쳐 일본을 향하여 가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8월 15일 제주도 남해 앞바다 화순포에 표착하였다. 저들이 육지를 발견하고 안도감을 가지는 순간 거대한 파도가 배를 강타하면서 세 겹의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닥치고 그와 함께 배가 쪼개져 선창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익사당했다. 갑판 위에 있던 몇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 내렸고 남은 사람은 물결에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탑승원 64명 중 선장 에흐베르츠(Egbertz)를 포함한 28명이 익사하고 36명이 가까스로 물에서 기어올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8월 18일 하멜 일행은 현감 권극중에 의해 생포되었고, 역관을 불러 문정을 하려 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주현감은 하멜 일행이 난파된 배에서 마음대로 물건을 건져 낼 수 있도록 자유를 주었으며, 여러 날 동안 파선된 배 속에 남아 있는 물건들을 건져 내게 하였다.
효종실록, 하멜의 표류기, 연경제전집에 의하면 하멜 일행이 건져 낸 물품들은 식료, 의료, 적포도주, 서적, 양기, 천리경, 조총, 망원경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고, 그 양도 상당했다고 한다.

1653년 8월 21일 하멜 일행은 제주 감영에 압송되어 제주 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았다.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화란 사람으로 일본으로 가려다 사고를 당했다고 말하고,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간청했으나 목사는 국왕의 지시에 따르겠다며 정확한 답을 보류했다. 하멜 표류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문정관과 역관 벨트브레가 제주도에 도착한 것은 두 달이 지난 10월 29일이었다. 박연이 화란어로 하멜 일행에게 국적과 여행 목적을 물었고, 서로 같은 화란인인 것을 확인한 하멜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연에게 자신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박연은 외국인이 내지에 들어오면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사실, 일본 역시 바다 선상에서만 외
국인과의 교역이 허용된다는 사실, 더구나 기독교인과는 교역조차 금하고 있어 전에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을 대마도로 보냈는데 다 죽였다는 사실을 들어 일본으로 간다고 해서 생명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자신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훈련도감에 예속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멜 일행은 비록 일본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여
전했지만, 박연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54년 5월 말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효종을 만나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입국한 외국인을 도로 국외로 내어보내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므로 보내주지는 못하지만 왕으로서 이들을 관대하게 대우하였다. 또한 당시 상선에 승선한 대부분의 화란 사람들이 총포에 능숙한 이들이어서 전투 훈련관으로 적합하였기 때문에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편입되어 훈련도감 대장 이완 휘하에서 박연의 지도를 받으며 군인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해양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박연을 통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화란의 우수한 과학문명이 조선에 접목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항해술은 모든 과학지식의 집약을 요구하는 분야였기 때문에 이들이
갖고 있는 서양 과학에 대한 기술은 대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생활에 잘 적응을 한 박연과는 다르게 하멜 일행은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1657년 전라도 작천병영으로 유배되어 10년 동안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10년의 감금생활 동안 하멜 일행은 선관을 만나 행동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에는 조선의 문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산사를 돌면서 수도승과 환담을 나누며 조선 종교와 문화에 대한 많은 식견들을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으며, 이 기록들은 후에 하멜표류기를 기술하는 데 상당히 훌륭한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천병영에 유배되어 살던 10년의 대부분은“악관의 학대와 흉년과 기근이 그들을 한없이 괴롭혔으며”이로 인한 식량부족으로“한 때는 구걸행각에 나선 일도 있었다.”유배생활 7년 만에 33인(탈출 시도로 사망한 2명을 포함하여 3명이 사망한 상태임) 중 11명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들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흉년과 기근으로 인한 식량 문제가 극에 달하자 그들을 책임 맡은 감사는 1663년 3월 이들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일행을 여수 좌수영에 12인, 순천에 5인, 그리고 남원에 5인 등 세 곳으로 분산 배치시켰다.

오랫동안 조선을 떠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하멜 일행은 전라도 여수의 바닷가로 보내지자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664년부터 3년간 나무를 해다 파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해 이들은 작은 배 한 척을 구입하여 탈출 준비를 하였으며, 1666년 9월 4일 여수 좌수영에 유배되어 있는 12명 중 하멜을 비롯한 5명과 다른 곳에서 방문 온 2명, 그리고 순천에서 불러온 조선인 뱃사공 등 도합 8명은 한밤을 이용해 여수를 떠나 일본 이쓰시마(五島)에 도착하였으며, 그곳 관리를 만나 자신들이 화란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나가사기(長崎) 화란상관으로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668년 7월 20일, 일행은 화란 상관의 주선으로 고국 암스텔
담에 도착했다. 또한 조선에 남아 있던 생존자 8명도 일본 대마도주의 요청에 따라 1668년 4월 12일 대마도로 보내어졌고, 고국 화란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약간의 풍랑을 만난 후 이들 배가 1668년 7월 20일 암스텔담에 도착했다. 살아 돌아온 우리는 13년 28일에 걸친 긴 포로생활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으며, 아울러 뒤에 떨어져 있는 우리의 불쌍한 동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절히 간구했다.”

하멜은 그의 표류기에서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시종일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고 지내 왔음을 밝히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자신의 14년간의 조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표류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하멜은 그 동안 경험한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등 조선의 물정과 조선인의 기
질, 풍습, 군사, 법속, 정치, 종교, 사회관습에 이르기까지 조선에 관한 모든 지식을 소상히 기록했다. 하멜의 표류기는 유럽에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얼마 후 영어, 프랑스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 유포되면서 유럽인들에게 조선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은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출판 동기와는 달리 표류기는 조선선교와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진 많은 선교 후보생들에게 유용한 조선입문서가 되었으며, 그리피스는 하멜의 표류기를 담아‘한국, 국내외’(Corea, Without and Within)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1832년의 귀츨라프의 서해안 항해 및 선교와 1865년의 토마스 목사의 조선선교는 모두 하멜의 표류기에 힘입은 바컸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박연과 하멜은 개신교도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조선과 접촉이 있었던 박연과 하멜이 개신교도였다는 점에서 조선과 개신교와의 접촉 역사는 청을 통한 천주교와의 접촉의 역사보다 앞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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