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교회의 현황

 

조선족 교회가 중국 교회의 일원임에 틀림없지만 중국 교회와는 상당히 다른 점이 있음도 사실이다. 삼자 교회든지 가정 교회든지 중국 교회와는 상당히 다른 면이 필자의 조사 결과 나타났다.

그러므로 중국(한족) 가정 교회의 현황을 조선족 가정 교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고, 중국(한족) 삼자 교회의 현황을 조선족 삼자 교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가정 교회의 경우 중국 교회와 연원에서 부터 다르다. 그리고 중국
가정 교회가 겪은 고난을 조선족 가정 교회는 겪지 않았다. 조선족 가정 교회는 대부분이 개방 이후에 설립된 것이기에 성원부터도 한족 교회와는 다르다. 그리고 성장하는 면이나 교회의 조직도 중국 교회와 다르다. 전국적인 조직도 없고, 성 전체를 포용하는 조직도 없다. 조직이 있다 해도 미미한 편이다.

삼자 교회도 조선족 교회는 중국 교회와 다르다. 교회의 기원이 중국
교회와 다르다. 중국 삼자 교회는 중국 교회 자체 내에서 삼자 교회가 생성된 것인데, 조선족 삼자 교회는 스스로가 주도해서 삼자 교회가 된 것이 아니라 중국 삼자 교회가 설립됨에 따라 선택의 여지없이 삼자 교회가 된 것이다.

능동적으로 삼자애국운동에 찬동해서 삼자 교회가 되었다기 보다는 생존을 위해 수동적으로 삼자 교회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 삼자 교회가 상당히 경직되어 있는 반면에 조선족 삼자 교회는 상당히 느슨한 상태이다.

외국인(한국인)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도 조선족 삼자 교회는 사전에 허락내지 묵인을 받으면 가능하다.

삼자 교회의 각급 지도자 교육과 훈련에 한국 교회가 참여하는 것이 정부의 묵인 하에 이루어지기도 한다.<한국 교회에서 조선족 삼자 교회의 신학교육이나 단기 평신도 지도자 교육에 참여하는 것은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라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 삼자 교회 지도자들은 중국 삼자 교회 지도자들보다 더욱 담대하게 사역을 하고 한국 교회와 교류한다. 필자가 만나 면담한 소가툰교회 장로 박영무는 한족 교회 지도자들이 주눅이 들어 있는 것에 대해 이해가 안된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중국의 소수민족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주류 민족인 한족에겐 엄격하게 종교정책을 적용하고, 소수민족인 조선족에게는 느슨하게 종교정책을 적용하는 것 같이 보인다. 또한 조선족 삼자 교회에는 한국 교회의 선교비가 많이 유입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차원에서 묵인해 주는 것 같이도 보인다.

모든 중국의 종교정책이 조선족 교회에도 적용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중국 교회보다는 훨씬 약한 강도로 적용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참여자 관찰과 면담을 분석한 것을 종합해 보면 동북3성의 경우 연변자치주를 포함한 길림성은 삼자 교회가 강한 편이고 가정 교회는 약한
편이었다. 흑룡강성은 삼자 교회는 약한 편이고 가정 교회는 강한 편이었다. 요녕성은 삼자 교회는 막강하고 가정 교회는 미약한 편이었다.

가정 교회와 삼자 교회의 관계를 보면 흑룡강성은 가정 교회와 삼자 교회의 갈등이 심하였다. 하얼빈 남강교회 목사 이미란과 목단강 평안교회 목사 유영노는 가정교회에 대하여 극심한 거부감을 표출하였다. 또한 흑룡강성 가정 교회 지도자들은 삼자 교회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과 감정을 갖고 있었다. 흑룡강성에서 만난 대부분의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삼자교회에 대하여 좋지 않은 인식과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수차에 걸쳐 관찰하였다. 이는 아마도 흑룡강성에는 삼자 교회를 지도할 만한 지도자가 숫자적으로도 부족하였기 때문이요, 그 보다 신자들이 본받고 따를 만한 삼자 교회의 지도자들의 부재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가정 교회 지도자들이 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삼자 교회보다 우위에 섰다고 간주하는 데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연변자치주나 길림성에도 가정 교회와 삼자 교회의 갈등은 있지만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었고, 요녕성은 적어도 외부적으로는 가정 교회와 삼자 교회의 갈등을 관찰하기 힘들었다.

 

조선족 교회의 성장

조선족 교회가 1994년까지는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1996년 1월과 5월에 조사한 바로는 성장은 하고 있지만 완만한 성장이거나 심지어는 정체현상이 발견되기 까지 하였다.

흑룡강성의 어느 조선족 가정 교회는 1994년에 350개 이상의 처소를 갖고 있었다. 이 가정 교회는 흑룡강성 조선족 가정 교회 전체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었다. 흑룡강성에 가정 교회가 세워진 것은 10년 안밖이다.

또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 삼자 교회의 성장도 급성장하고 있었다. 김순회의 보고에 의하면 연길에는 개방된 후 교회가 연길교회 한 곳밖에 없었는데 1994년 현재 교회가 10개, 처소가 100개가 되고 교인수는 6,000명 가량된다고 하였다. 또한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600개의 처소가 있다고 하였다.

필자가 조사한 것에 의하면 연길의 광진교회는 설립 3년만에 120명의 교세가 되었다. 그리고 흑룡강성 아성에 있는 박현자 교사는 신앙력이 10년 전후인데 90여개 처소를 돌보고 있다.

그러나 1996년 1월과 5월에 조사한 바로는 조선족 교회가 성장은 하고 있지만 완만한 성장이거나 심지어 정체현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표 1. 조선족 교회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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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응답자 선교사 선교전문가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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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성장하고 있다 7 7
성장하고 있다 27 8 35
정체되고 있다 5 4 9
쇠퇴하고 있다
계 39 12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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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선교사들과 선교전문가들은 조선족 교회가 대체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조선족 교회가 정체되고 있다는 진단을 선교사들은 소수로, 전문가들은 상당수가 있다는 점이다. 이로 볼 때 대체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나 일부 정체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할 수 있다.

표 2. 한족교회와 조선족교회 성장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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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내용/ 응답자 선교사 선교전문가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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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교회 28 5 33
조선족교회 6 2 8
비슷하다 5 5 10
계 39 12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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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족 교회는 조선족 교회보다 성장하고 있다. 필자가 방문했던 동북3성 지역의 한족 가정 교회는 신생 교회였는데도 약 2,000개의 처소로 이루어졌다.

조선족 교회의 규모에 비해 한족 교회의 규모는 훨씬 더 크다. 중국
중부 지방 한족 교회들의 성장은 조선족 교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성장하고 있다. 한족이 조선족보다 인구가 많다는 것을 감안해도 한족 교회가 조선족 교회보다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3. 조선족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성장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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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내용/응답자 선교사 선교전문가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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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 9 2 11
가정교회 17 10 27
비슷하다 13 13
계 39 12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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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가정 교회는 삼자 교회보다 성장하고 있거나 성장도가 비슷하다.

표 4. 조선족 농촌교회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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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내용/응답자 선교사 선교전문가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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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고 있다 22 7 29
정체하고 있다 17 5 22
쇠퇴하고 있다
계 39 12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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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교회는 대체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나 정체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표5. 조선족 도시교회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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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내용/응답자 선교사 선교전문가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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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고 있다 35 7 42
정체되고 있다 4 5 9
쇠퇴하고 있다
계 39 12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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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교회는 비교적 성장하는 교회가 많지만 정체되는 교회도 있다.
1996년 2회에 걸친 면담과 참여자 관찰에 의하면 조선족 교회가 대체적으로 성장은 하고 있으나 1994년 같지는 않았다.

농촌 교회는 대부분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었고, 도시 교회는 완만한 성장을 하고 있었으며, 도시화가 진행되고 공단이 들어서는 곳은 높은 성장을 하고 있었다.

조선족 교회의 성장은 낙관할 수 없다. 이는 조선족 교회의 성장의 요인이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 교회가 성장한 요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1) 성령의 역사: 같은 복음을 전해도 한국교회에서는 별 반응이 없어도 조선족 가정 교회에서는 큰 반응을 보였다. 전도자들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인지하고 있다. 성령이 가정교회 사역자를 세우는 일도 주도한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세워지는 사역자들이 전도자의 역할을 그 나름대로 하고 있다.

2) 풍성한 체험과 간증: 성령의 역사는 신앙의 체험으로 나타났다. 복음을 들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피전도자들이 느낀다. 그리고 예수를 믿게된 동기가 대부분 병고침이나 기적의 체험, 문제의 해결등 체험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체험은 예수를 믿도록 결단하는데 영향을 주고, 또한 전도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체험은 간증을 생성하고, 간증은 복음을 명확하게 전하게 한다.

3) 순회 전도자의 헌신: 순회 전도자는 이 곳 , 저 곳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순회 전도자들은 대부분 나름대로 예수 믿는 증거가 있고, 성령의 체험이 있다. 그들은 구원받은 감격을 갖고 위험을 무릎쓰고 자비량하여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흑룡강성은 순회 전도자들의 헌신으로 수많은 가정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고, 내몽고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4) 박해: 박해는 견디기 힘드나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족 가정
교회들이 순결하게 되었고, 복음에 대한 열심이 생겼다. 박해는 주로 공안부와 삼자 교회로부터 온다. 박해는 조선족 가정 교회로 하여금 움추리게도 하였고, 더욱 주를 의지하게도 하였다. 적어도 박해가 명목상의 교인들이 양산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하였다.

5) 교인들의 헌신: 예수믿고 은혜받은 교인들이 초신자들임에도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내어 놓아 교회를 시작하였다.

6) 순회 선교사들의 사역: 미국 시민권자인 교포 선교사들이 가정교회
사역자들을 훈련시켰고, 가정 교회가 어느 정도 체계를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재정적인 필요도 어느 정도 공급하였다.

최근에는 조선족 교회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요소가 부각되고 있다. 그 장애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사역자의 부족: 사역자의 부족은 양면성을 지닌다. 즉 양적인 부족과
질적인 부족이다.

2) 이단의 침투와 발호: 조선족교계에서 발호하고 있는 이단은 10월
복음파(10. 28휴거파), 수건을 머리에 쓰는 파, 우는 파, 안식일파 등이 있다.

3) 교회의 분열: 가정교회나 삼자교회가 다같이 분열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분열은 내부의 문제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한국 교회와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다.

4) 자본주의 유입에 대한 대응책 부재. 사회주의 체제에서 성장해 온
조선족 교회 교인들이 자본주의 내지는 물질주의의 유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

5) 삼자 교회와 가정 교회의 갈등.

 

한국 교회의 조선족 선교

한국 교회의 조선족 선교는 재미 교포들의 간혈적인 방문기, 교포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기, 한국 목사와 선교사들의 활동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재미 교포들의 중국 방문
조선족 선교는 재미 교포 목사와 신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김응삼에게 온 조선족들의 서신에서 그 편린을 찾아 볼 수는 있다.

"금년 10월에 미국 라성에 계신 이득애 권사님이 동북에 계신 어머님을 보시러 오는 도중 이곳을 경과하시며 우리 신자댁을 방문하였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홍콩에 계신 홍종만 목사님께서 성경, 찬송가, 록음기를 보내 주셔서 록음기를 틀어 놓고 예배합니다."

"이곳 형편을 알려드리지요. 상해교회 집사님은 아직도 세 분이 세분이 계십니다. 두 분은 자녀들이 북한에 살기 때문에 교회에 나올 생각도 못하고 여집사님 한 분은 75세로 나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 외에 이득애 권사님이 오시어서 이곳을 경과하시며 그 때부터 믿기로 작정하신 분들입니다.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금번 성탄절에 29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득애 권사님이 성탄에 모여 기쁘게 지내라고 돈도 50불을 주셔서 잘 지냈습니다. 저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나누고 록음기를 틀어 놓고 예배를 디리고, 12시 서울 방송국에서 보내는 성가대합창을 듣고 예배를 필하였습니다. 록음기는 서울 이성배 목사님이 보내주셨고, 홍종만 목사님께서 록음 테이프를 보내주셨습니다. 미국에 계신 김의환 목사님께서도 록음기를 보내주셨습니다."

"작년 남조선에서 온 리종윤 목사가 하얼빈 조선족 운동대회에 나갔다가 도리구에 있는 젊은 청년을 만나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서 세례를 주고 간 청년이 있습니다. 그 목사는 이 청년에게 기편(사기) 당했습니다. 이 청년은 금전을 위하여 그 목사를 기편했습니다. 이 청년은 정부를 위해 기편을 다니면서 특무인 듯 형제들을 잡아주고 있으며, 그 부인은 8월에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남조선에서는 그의 기편적인 편지를 통하여 적지 않은 책들을 부쳐오지만 전부 침대밑에 넣어두고 있습니다. 이 사람으로 인해 흑룡강성의 적지 않은 신자들이 핍박과 주시와 분쟁이 일어나고 있답니다. 이 일을 리종윤 목사에게 알려줌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들 재미교포 신자와 목사들의 중국 방문을 선교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선교적인 차원에서 그 시발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2. 재미교포 선교사들의 조선족 선교
교포 선교사들이 조선족 선교를 시작한 것은 김응삼의 증언에 의하면
1986년 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전에도 교포 선교사들의 조선족 선교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그리고 교포 선교사들의 조선 족선교가 조선족 교회, 특히 가정 교회의 설립과 성장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그 기록은 없다. 그래서 교포 선교사와의 면담, 조선족 교회 지도자들과의 면담을 통해서 그 대략을 추적해 보려고 한다.

조선족 가정 교회 지도자로 있다가 한국에 입국하여 신학을 공부를 하는 이학철에 의하면 1987년부터 흑룡강성에서 교포 선교사들을 여러 명 만났다고 한다. 김응삼의 증언과 비교해 볼 때 이 때를 전후하여 교포 선교사들이 동북3성에 들어온 것 같다. 그들의 정확한 수는 파악할 수 없지만 대략 수십명을 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들은 홍콩이나 한국, 또는 미국에 거주하면서 정기적으로, 또는 비정기적으로 동북3성을 순회하면서 조선족 가정 교회와 협력하여 선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서 그 당시 교포 선교사들의 조선족 선교를 추적해 보려고 한다. 김형제 선교사는 재미교포 1세로서 한국 교회와 관계없이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L.A 은혜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에 왔다. 그는 그곳에서 자생했거나 삼자 교회에서 이탈해 온 교인들이 세운 가정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가정 교회들은 세례나 성찬식을 집례할 목사가 없었는데 김형제 선교사가 집례해 주었고,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 처해 있을 때 미국과 한국 교회들에게서 선교비를 모금하여 전달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에는 목사가 희귀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 필요했다. 개척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던 그는 조선족 가정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교회 개척과 성장에 심혈을 기울여 한 때는 450여개 처소에 이르는 가정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 사례를 교포 선교사들의 사역 전반에 적용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는 있다고 생각된다.

3. 한국 교회의 조선족 선교
한국 교회가 조선족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90년이 되어서
부터인 것 같다. 선교는 한국 목사들이 중국을 방문하여 조선족 교회 지도자들을 단기간에 걸쳐 교육시키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선교사도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수많은 한국 교회 목사들이 중국을 방문하여 조선족 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도 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일정한 장소에 모아놓고 단기신학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의 조선족 선교는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이벤허는 다음과 같이 한국 교회의조선족 선교 사역의 형태를 분류하고 있다.
1) 현지를 방문하여 교회지도자 단기신학훈련을 실시.
2) 선교지 답사 형식의 사역.
3) 교회개척 사역.
4)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선교사역.
5) 제자훈련.
6) 조선족을 한국에 초청하여 신학교육을 받게 함.
7) 학교설립.
8) 극동, 아세아 방송선교.
9) 성경과 신앙서적 보급.
10)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선족 교회의 연원은 만주 조선인 교회이다. 초기에는 특징이 없던 만주 조선인 교회가 정세의 변화에 따라 이주해 온 민족주의자들이 교회에서 지도력을 행사함으로 민족 교회가 되어서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일제의 만주 토벌과 공산주의의 박해에 직면하여 민족 교회로서의 성향은 영적인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내세지향의 성향으로 변하였다. 또한 만주에서의 민족주의자들의 퇴거와 공산주의의 영향, 해방으로 인한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환국등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교체되었고, 남은 자들은 양적, 질적으로 조선인 교회를 계승하기에는 너무나 역량이 부족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만주 조선인 교회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하여 조선족 교회가 되었다. 지도력의 공백 상태에서 미미한 교세를 지탱하던 조선족 교회는 문혁이 일어나자 폐쇄되고 말았다. 중국이 개방되면서 조선족 교회도 재건되었지만 이미 조선족 교회는 만주 조선인 교회의 후신의 위치에서 단절되고 중국의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교회로 변하였다. 가정 교회들도 구성원들이 만주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의 소수민족인 조선족이 되었기에 어떤 형태의 조선족 교회이건 간에 조선족 교회는 한국 교회의 만주 지역 교회로서가 아니라 중국
교회의 일원으로 접목되어 있는 것이다.

 

중국인민공화국 치하의 조선족 교회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일제의 괴뢰 정부였던 만주국이 소멸되고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당군이 만주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만주 조선인들은 공산군을 도와 해방전쟁에 큰 공헌을 하여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정권을 수립하면서 연변에 조선인들의 자치주가 건설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거민으로 불리던 재중 조선인은 중국의
공민이며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 분류되게 되었다. 당시 중국과 북한 사이에 체결된 국적문제는 동북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자동적으로 중국의 거민이 되지만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중국과 북한의 협의에 의하여 중국의 공민이 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만주 조선인 교회는 조선족 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해방 후 만주 조선인 교회가 조선족 교회로 변천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세한 내용을 알수는 없다. 중화인민공화국 치하에서의 조선족 교회에 대한 기록이 전혀없고 구전(口傳)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구전도 전체적인 것이 못되고 극히 지엽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화인민공화국 치하 조선족교회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살필 수는 없고 편린같은 자료들을 참조하여 단편적으로 개 교회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해방전 만주 지역의 조선인 교회 교세는 장로교에 6개노회, 309개 교회, 65명의 목사, 3명의 선교사, 84명의 남전도사, 20명의 여전도사, 40,500명의 교인이 있었고, 감리교는 만주 선교연회에 52명의 교역자, 4,500명의 교인이 있었다. 그 외에 성결교, 동아기독교, 조선기독교 등이 약간 있었다. 그들의 상당수가 귀국하였다고 추정하더라도 남아 있는 교세가 어느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심양 서탑교회는 1913년 5월 20여명의 교인들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의주교회의 도움을 받았으며 평북노회에 속해 있다가 후에 의산노회로 분립되자 의산노회의 관할로 들어갔다. 1935년 10월 봉천노회가 설립되자 봉천노회의 중심 교회가 되었고 나아가서는 만주 조선인 교회 전체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 해방이 되자 환국하려는 동포들이 봉천으로 집결해서 서탑교회는 흥왕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동포들의 대거 귀국과 중국의 공산화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1951년까지 남은 교인 20여명이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1951년부터는 교회에서 좇겨나 동(東)교회에서 중국 침례교회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1957년 7월부터는 연경신학원을 졸업한 오애은의 인도로 따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나 문화혁명이 일어나 예배가 금지되었다.

연길교회는 1915년 설립되었는데 공식 교회 명칭은 조선 예수교 장로회 국자가교회였다. 예배당은 4대 김강선 목사가 시공하여 6대 서금선 목사가 준공하였다. 해방 후 근근히 이어져 오다가 1966년 문화혁명으로 교회가 폐쇄되었다.

목단강시 평안교회 목사 유영로에 의하면 1945년 해방이 된 후 흑룡강성에 있는 대부분의 목사들이 귀국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들과 유력한 교인들도 대부분 귀국하였다. 그래서 흑룡강성 교회는 타 지역 교회보다 더 지도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이상에서 단편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중화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조선족 교회는 교세가 급속히 감소하고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출발하여
명맥을 유지하기도 벅찬 상태에서 살아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개방된 후 교회가 재건될 수 있었고, 가정 교회도 세워지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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