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교회의 현황과 가능성
오 동 일
먼저 본인은 기독교(종교)가 현재 중국사회에 줄 수 있는 의미를 생각해 봄으로, 오늘 이 자리에서 종교적 논의를 진행함의 정당성을 확보해보려 한다.
一. 중국(사회주의)에서의 기독교
1. 기독교는 사회주의와 함께 갈 수 있는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종교에 대한 절대적 신앙과 그 신앙을 누릴 수 있는 종교자유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종교자유에 대해 제한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회주의 정권을 반대해왔다. 그러나 이로서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모두 이야기 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서로 조화(相適應)될 수 있는가? 全國政協 부주석이면서 중국기독교대변자인 丁光訓(띵광쉰)은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을 19세기의 유럽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중국적인 상황과는 부합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확실히 역사적으로 공산주의가 반기독교적인 출발점을 갖게 된 것은, 마르크스 당시 유럽은 기독교적인 세계로서, 그들은 현실을 “신적인 질서”로 불가항력적인 질서 인정하는 경향이 있어, 압박과 착취의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혁명을 일으키는데 기독교가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기독교 비판은 유럽과는 다른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기독교의 보수성 때문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와의 결탁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 역사적인 맥락이 다르다. 그러나 현존의 중국기독교는 제국주의적 성향을 탈피하였기에 중국 내에서의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적대적인 모습에서 어느 정도 탈피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갈등 발생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가치 차원에서도 기독교는 사회주의와 함께 갈 수 있다.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는 “자유”라고 한다면,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는 “평등”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강조한다면, 사회주의는 “분배”를 강조한다. 자유와 평등, 생산과 분배는, 대립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보완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두 체재의 강조점의 차이는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기독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가치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눔과 섬김”의 가치를 추구한다. 여기서도 “생산”보다는 “분배”가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생산 없는 분배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가치적 측면에서 볼 때에도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함께 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역사적 차원에서도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진행되었었던 기독교사회주의(基督敎社會主義 christian socialism)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사회주의 기독교 신앙과 정신으로 사회주의사상에 의거하여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사회노동문제를 해결하려는 사상과 운동. 단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교회사업의 일환으로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등을 설립하여 사회노동문제의 독자적인 해결을 지향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활동은 기독교사회주의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사회주의는 신교를 믿는 나라에 한정되어 있다.
는 1849년 영국에서 창간이 된 잡지 《기독교사회주의자(Christian Socialist)》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란 원래 기독교의 사업임을 주장하면서 노동자의 자주적 투쟁을 부정하고 노동자의 계몽활동과 협동조합활동을 전개한 J. 모리스·C. 킹즐리·J. 러들로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것은 곧 소멸되었으나 스위스·네덜란드·독일에 유사한 활동이 파급되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19세기 후반 사회민주당의 발전에 대항하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사회주의의 영향을 저지하기 위하여 A. 슈퇴커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국수적인 기독교사회주의와 J. 나우만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 복음사회주의가 전개되었다. 제 1 차 세계대전 후 바이마르 헌법 하의 독일에서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한 흐름으로 주목해야 할 종교적 사회주의가 P. 틸리히 틸리히(P. Tillich)는 1929년에 독일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으나 특기할 만한 활동을 하진 않았다.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은 1919년 5월에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관계에 관한 교회의 질문에 대해 그가 내린 그의 답변 "교회의 질문으로서의 사회주의"에서 드러나 있다 :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본질상 어떤 시대에나 어떤 상황에서도 가능한 체험이고 모든 사회 ·경제형태와 독립되어 있는 체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하나의 질서와 동일시하고 기독교의 내면적 인격적 특징을 박탈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자신으로부터 - 진리인식이든 개인의 인격형성이든 사회생활이든 - 인간의 생활을 형성할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내면성에만 기독교를 묶어두려는 모든 형태의 기독교를 거부한다. 기독교가 모든 종류의 경제 · 사회형태와 결합하고 그래서 사회주의와 결합하는 것도 가능하고 필수적이다. 기독교의 이름 하에 사회주의를 원칙적으로 배격하는 것은 기독교의 보편성에 어긋난다. 그래서 만약 사회주의적 이념이나 정당이 원칙적으로 기독교와 교회를 반대하지 않고, 매우 넓은 사회주의의 그룹들 안에 윤리적 ·종교적 정신을 실현하려는 열망이 살아있다면, 교회가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를 중심으로 주장되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종교적 근원을 밝히고, 또한 자본주의적인 생산과 소비가 원자화(原子化)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비인격화와 물화(物化)의 위험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는 신학과 그 실천을 제언(提言)하였다. 또 사회주의를 윤리적 과제로서 규정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의지의 윤리적 근거를 부여한 것으로, 수동주의(受動主義)에 빠져 있던 독일사회민주당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미국에서도 186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신교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사회주의가 대두되었다. 독일 저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도 일평생 사회주의를 위해서 투신했는데, 특별히 정치적인 것도, 레닌주의적인 것이나 마르크스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실용적이고 기독교적인 것, 즉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였다. 그는 전적으로 블룸하르트, 쿠터, 라가츠와 함께 그리스도교적 사회주의자로 머물러 있었다. 진정한(기독교적) 사회주의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더라도 그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반영하는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일 근대 사회에서 급진적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를 접목시키려 한 목사 루돌프 토트(1839-1887)를 통해서 종합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된다.“사회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의 해결에 기여하고자 하는 자는 오른편에 국민경제를, 왼편에 사회주의자들의 학문적 문헌을 그리고 앞에는 신약성서를 펼쳐 놓고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요소 중 하나가 결핍되면 해결은 빗나가게 된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2. 기독교는 사회발전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1) 인간학적 차원 프롬은 "종교란 하나의 집단에 공유되는 사고와 행동의 모든 체계로서, 개인에게 정향의 틀과 헌신의 대상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개념은 프롬의 인간정신에 관한 진화론적 관점에 의해 도출된다. 즉 인간이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영역이 점차 축소되고 상대적으로 이성, 자의식 및 상상력에 의해 행동하고 사유하는 능력이 커지면서,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하나의 준거틀 - 비유컨대 방향을 알게 하는 지도(map), 그리고 목표 - 이 요청되는데, 이것이 바로 헌신의 대상과 정향의 틀이라는 것이다. 프롬은 종교에 대한 소망과 욕구, 즉 정향의 틀과 헌신의 대상에의 욕구를 갖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따라서 과거의 모든 사회에 종교가 존재했듯이 미래 사회에서도 종교가 존재할 것이라고 단정한다.
2) 개인심리적 차원 종교는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소속감을 깨닫게 해 주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지지해 주며, 실망하고 실패했을 때 위로를 주며, 개인의 정체성을 계발하는 데 공헌한다. 또한 인간생활과 노력의 유의미성을 보장하는 기초적 근거를 제공하고 표현적 욕구의 출구와 인간감정의 정화를 제공한다. 종교는 또한 사회규범과 규칙을 정당화함으로써 인간의 법률을 지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을 사회화하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의 일부를 담당한다. 이러한 종교의 기능들은 모두 사회응집에 기여하는 측면들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영국에서 쓰면서 영국의 혁명을 예언하였지만, 영국에 파리대혁명과 같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으나, 요한 웨슬레와 같은 기독교부흥운동으로 바른 가치관(“청지기 사상” 등)을 사회에 형성되고 정착되면서 “자본주의 악”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3) 사회학적인 차원 고전마르크스주의에서는 종교를 주로 종속변수로서만 취급해 왔지만 신마르크스주의에서는 종교와 사회변동의 관계에서 더욱 복잡한 결론을 유출해 내고 있다. 엥겔스의 후기 사상으로부터 유래되는 신마르크스 주의는 종교를 경제구조로부터 비교적 자율적인 영역으로 간주한다. 또 사회변동에 있어서 부분적인 독립변수로서의 종교의 기능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종교이해를 더 풍부하게 했고 복잡하게 하였다. 고전마르크스 주의와 대조하면서 신마르크스주의는 다음을 제안한다. (1) 종교는 사회적 생산관계의 단지 수동적인 결과가 아니다. 종교는 사회적 역동성의 한 능동적인 요소이며, 사회과정에 의해 조건 지워지기도 하고 조건짓기도 한다. (2) 종교는 사회과정 안에서 언제나 종속적인 요인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특별한 사회 구조의 발생과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3) 종교는 사회 안에서 반드시 재생산적이고 보수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사회 변혁을 일으키는 주된 통로 중의 하나이다. 이제 신마르크스주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종교가 사회변동을 일으키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어떤 조건 아래서, 어떤 방식으로 종교가 변동을 억제하기보다 자극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특히 변화를 자극하는 종교의 가능성은 어떤 사회의 유형이 다른 사회의 유형으로 전이될 때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극대가 되는 경향이 있다.108) 베버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 예언자들은 사제나 주술가들과는 매우 다르게 관습을 타파하고 전통을 폐지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선포하기도 한다. 따라서 변화지향적인 지도자의 원형은 예언자이다. 종교운동은 소멸해 가는 구질서로부터 멍에를 벗겨주고 새 질서를 지양케 함으로써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있어서 삶에 방해가 되었던 집단 노선을 대치할 새로운 통일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함으로써 사회변동을 일으킬 수 있다. 간디는 종교적인 정신으로 인도를 평화롭게 영국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의 수단으로 흑인들의 인권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약자들의 권익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투신하였으며, 한국의 민주화에도 기독교의 공헌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8세기의 기독교는 찰스대제 및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제국을 재건할 이념을 마련해 주었고, 10세기에 이르러서는 신성 로마제국의 건설이 가능하도록 기독교는 동일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마두로는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집단들에게 종교적 중재 없이는 사회의 변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처럼 사회적인 문제의식이 교회 안에서 수렴되면, 그 문제의 해결은, 교회를 통하여 조직화되고 발전되며 문제해결을 위한 집단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운동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4) 종교가 중국 조선족사회에 주는 의미 종교의 이러한 특성은 현 중국조선족사회의 형성과 발전에도 큰 의미를 준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개혁개방과 더불어 세계화의 흐름에 편입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중국의 체제변환은 사람의 새로운 삶의 형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을 필요로 한다. 현재는 과도적인 적인 단계로 여러 가지 면에서 혼란과 불안을 안고 있다. 건강한 사회를 이루려면 건전한 가치관의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건강한 사회는 법을 지키며, 도덕적 인간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심지어 “적과의 동침”이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일찍이 이러한 사회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이성적인 종교”를 요청한 바 있다. 즉 종교적 차원의 바탕에서만 온전한 윤리도덕이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경쟁과 속도의 시대”에, 인간은 쉽게 자아를 잃어버리고 하나의 도구로 전략되어 소외를 겪으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정신적,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산다. 그들은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폭탄”과 같은 것이다. 신앙은 그러한 개인에게 확신을 주고, 희망을 주며 동시에 자신을 비판적으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재조정하게도 한다. 이와 같이 종교는 힘든 세상을 이길 정신적 힘을 줄 뿐만 아니라, 개인적 갈등이 약화 혹은 해소되고 심지어 더 나아가 利他的인 면들도 보이면서,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도모하게 된다. 심지어 위에서 말하다시피, 건전한 사회형성을 위해서 적극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앞으로는 중국에서도 법치를 통한 시민사회의 형성, 성숙한 시민사회의 역할이 대두될 것이다. 앞으로 중국사회에서도 시민문화가 형성 및 꽃피울게 될 것인데,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시민의식”과 “시민문화”일 것이다. 문화의 핵은 종교이다. 시민에게 중요한 것은 책임의식이다. 무엇이 이러한 것들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저는 종교적인 가치관이 그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맑스 베버의 <자본주의와 기독교정신>이나 종교개혁자 칼빈의 사상이 서구 근대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하는 인식들에서도 그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入世적 정신과 섬김과 나눔의 가치는 건전한 사회, 성숙한 시민을 형성하는데 중요하다. 자본주의적 가치(소유)가 형성되는 가운데, 기독교의 “청지기적 물질관”과 “책임의식”이 사회의 발전과 성숙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선족 사회가 변혁과 성숙으로 나아가는데 기독교가 공헌할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二. 조선족 기독교의 현황과 과제
앞에서 이론적(이상적)인 면을 다루었다면, 여기에서는 우리 조선족교회가 당면한 실질적(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이상과 현실은 항상 간격이 존재한다. 이상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을 제외하고 현실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 이상과 현실은 항상 함께 이야기되어져야 한다. 이상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인식하고, 해결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이상은 그러한 힘을 제공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이상에로 묶어주기도 한다. 오늘의 조선족교회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먼저 조선족교회가 걸어온 여정을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간략한 역사
중국 조선족교회의 출발을, 1903년 연변 지역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조선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들어온 것을 기점으로 본다. 그러나 이때부터 1945년 이전까지는 중국인으로서보다는 조선인으로서 살던 시기였으므로 <조선인교회>로 존재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부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면서 <조선족교회>로 불려지게 되었다. 조선족교회도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폐쇄되었다가, 개혁개방 이후에 종교자유의 정책이 시행되면서 다시 종교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1981년 서탑(西塔)교회와 연길(延吉)교회가 문을 열면서 조선족교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1982년에는 유일한 조선족 신학교인 동북신학원(東北神學院)이 다시 문을 열어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이때부터 조선족교회는 중국교회의 일원으로 지금까지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해왔다. 몇 년 전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 200만 명 중 기독교인의 수는 12만 명(등록된 신자수)이라고 한다. 조선족교회는 짧은 기간에 발전하여 조선족이 거주하는 모든 마을에 교회가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2. 조선족교회의 현재 문제점
조선족 교회는 이와 같이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하면서, 재건의 짧은 기간을 경과하였기에 여러 가지 미성숙과 그에 따른 문제점들을 안 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사역자들의 교육 부족”과 교회재정의 한계로 인한 “대외 의존적인 면모” 및 “교육시설의 한계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조선족교회들의 시선을 대외(사회)로 돌리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해결에 급급하거나 자신의 현재에 안주하게 만들게 된 것 같다. 조선족교회의 문제점들은 다양한 차원에서 지적될 수 있으나 본인은 아래 세 가지만 이야기해보려 한다. 1) 개교회주의 교회는 宇宙的(보편적)인 공동체이다. 모두 동일한 신앙고백과 동일한 백성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地域性도 강조된다. 교회는 전체적인 교회의 연대와 하나 됨을 강조하지만, 개교회의 중요성도 간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족교회는 교회들 사이의 연대성은 매우 박약하며,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있다. 그것이 교회공동체로서의 상호 책임의식의 부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의도적으로 다른 교회 성도들을 자신의 교회로 유입시킴으로 교회들 간의 불신과 불화를 가져온다든지, 어떤 지역에는 과밀한 교회개척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교회들 간의 세력차이로 위압감이 형성되고, 또한 어려운 교회들은 방치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2) 미자립성 조선족교회는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립하지 못한 상태인 것 같다. 물론 여기서의 미자립은 신학적인, 경제적인 차원을 모두 포괄한다. 신학적인 차원에서는 그냥 책에서 배운 신학적인 지식을 반복하는 형식이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내재화하거나 자신의 상황에 맞는 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힘이 거의 부족하다. 그래서 그냥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교회스스로 자신의 손과 발을 묶는 경우가 생기며, 그에 따른 극단적인 사례들도 발생한다. 경제적인 미자립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아직도 교회성도들은 대부분 하층민들로서 경제적인 어려운 분들이 다수다. 물론 대도시교회들은 상황이 다르다. 이러한 경제적인 미자립성이 의존성을 낳고, 그에 따른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3) 對사회적 책임성 부재 앞에서 말한 “개교회주의”와 “미자립성”은, 자연적으로 對사회적책임의식의 부재로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정립의 부재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교회와 사회의 관계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으나,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교회들은 二元論적으로 교회와 사회를 대립시키고, 진보적인 교회들은 一元論적 관점으로 교회와 사회의 차이를 지나치게 약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를 “대립”되면서도 “함께 하는” 존재로 보는 견해들이 대부분이다. “대립성”은 투쟁을 낳는다기보다는 “대안성”으로 나타나며, “함께 한다”는 것은 “책임의식”으로 나타난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두레교회와 두레공동체운동”(김진홍 목사)이라고 생각된다. 본인 이와 같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不一不二”라는 동양적 개념을 정립한다. 교회와 사회는 “하나도 둘도 아니다.” 그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면서도 분리되지 않음을 나타는 개념이 된다. 교회의 대 사회적인 참여가 시급히 요청되는 이 시대에, 조선족교회는 각성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3. 조선족 교회의 과제: 나아갈 방향
모든 것은 생각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족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희망적인 종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역시 교회 사역자들의 “의식전환”부터 시작해야 한다. 중국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학건설”이 발로 그런 취지의 발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선족교회들은 한국교회에만 우리의 시선을 고정할 것이 아니라, 중국교회의 전체적인 흐름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따라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본인은 조선족교회의 건설을 위해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해본다.1) 지도력 육성 앞에서 말했다시피, 조선족교회는 자신(주체적인)의 지도자들을 필요로 한다. 조선족 교회 지도자는 조선족교회의 분명한 “목표의식”(通時的인 사고)과 “방법론”과 “리더십”을 겸비한 사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성의 확립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리고 지도력은 또한 교회를 “부흥”(성장)시킬 수 있어야하며, “시대적(사회적인)인 사명”(同時代的인 사고)을 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지도력 양성을 위해서는, “교육의 장”이 필요하며 그에 따른 신학적 정립도 시급하다.
2) 교회들 간의 연대 교회들의 “연대”가 없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연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연대를 말들 수 있는 “의식”(정신)이 필요하며, 연대의 목표나 동기나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른 리더십과 동력도 필요하다. 여기서 “연대”라고 하면 조선족교회들 간의 연대가 우선되겠지만, 중국교회들과의 연대, 한국교회와의 연대, 세계교회들 간의 연대를 아우른다고 생각된다. 교회는 이미 형성된 이러한 네트워크를 활성화하고 활용한다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의 연대야말로 교회정신의 진정한 발로라고 생각된다. 예수께서 “우리가 하나된 것 같이 너희도 하나 되라.”고 교회에 부탁했기 때문이다. 3) 조선족교회와 사회와의 생산적인 연대 “교회와 사회의 관계”와 “종교의 사회적인 차원”을 다룰 때에는 언급되었다시피, 교회와 사회는 연대할 수 있다. 물론 교회내적인 연대와는 차원을 달리 하겠지만, 다른 차원에서의 연대도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민족이 잘 살고,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는 그 누구를 막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에는 교회와 사회를 갈라놓는 “강박증”과 같은 것이 우리 중국사회와 조선족사회에 존재해왔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우리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것일 수 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이를 극복해야 할 과제를 우리세대가 맡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종교의 사회적인 차원”에서 제시되기 했지만, 사회가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대하는 가에 따라 교회의 대사회적인 성격이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종교내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회도 종교에 대해서 수수방관하지 말고 종교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가져야한다. 우리에게는 개방적인 사고와 생산적인 삶이 요청된다.
三. 결 론
교회는 사회와 동떨어진 자율적인 존재도, 사회에 기생하는 종속적인 존재도 아니다. 상호작용, 상호영향을 주는 것이다. 건전한 상호작용이 요청된다. 교회는 조선족 사회의 일부분으로서, 사회와 교회는 함께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관계정립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 이 시점에 교회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건전한 敎會相은 이 시대적인 아니 神的인 요청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너”와 “나”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오 동 일
먼저 본인은 기독교(종교)가 현재 중국사회에 줄 수 있는 의미를 생각해 봄으로, 오늘 이 자리에서 종교적 논의를 진행함의 정당성을 확보해보려 한다.
一. 중국(사회주의)에서의 기독교
1. 기독교는 사회주의와 함께 갈 수 있는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종교에 대한 절대적 신앙과 그 신앙을 누릴 수 있는 종교자유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종교자유에 대해 제한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회주의 정권을 반대해왔다. 그러나 이로서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모두 이야기 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서로 조화(相適應)될 수 있는가? 全國政協 부주석이면서 중국기독교대변자인 丁光訓(띵광쉰)은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을 19세기의 유럽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중국적인 상황과는 부합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확실히 역사적으로 공산주의가 반기독교적인 출발점을 갖게 된 것은, 마르크스 당시 유럽은 기독교적인 세계로서, 그들은 현실을 “신적인 질서”로 불가항력적인 질서 인정하는 경향이 있어, 압박과 착취의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혁명을 일으키는데 기독교가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기독교 비판은 유럽과는 다른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기독교의 보수성 때문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와의 결탁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 역사적인 맥락이 다르다. 그러나 현존의 중국기독교는 제국주의적 성향을 탈피하였기에 중국 내에서의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적대적인 모습에서 어느 정도 탈피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갈등 발생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가치 차원에서도 기독교는 사회주의와 함께 갈 수 있다.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는 “자유”라고 한다면,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는 “평등”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강조한다면, 사회주의는 “분배”를 강조한다. 자유와 평등, 생산과 분배는, 대립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보완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두 체재의 강조점의 차이는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기독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가치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눔과 섬김”의 가치를 추구한다. 여기서도 “생산”보다는 “분배”가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생산 없는 분배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가치적 측면에서 볼 때에도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함께 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역사적 차원에서도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진행되었었던 기독교사회주의(基督敎社會主義 christian socialism)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사회주의 기독교 신앙과 정신으로 사회주의사상에 의거하여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사회노동문제를 해결하려는 사상과 운동. 단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교회사업의 일환으로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등을 설립하여 사회노동문제의 독자적인 해결을 지향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활동은 기독교사회주의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사회주의는 신교를 믿는 나라에 한정되어 있다.
는 1849년 영국에서 창간이 된 잡지 《기독교사회주의자(Christian Socialist)》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란 원래 기독교의 사업임을 주장하면서 노동자의 자주적 투쟁을 부정하고 노동자의 계몽활동과 협동조합활동을 전개한 J. 모리스·C. 킹즐리·J. 러들로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것은 곧 소멸되었으나 스위스·네덜란드·독일에 유사한 활동이 파급되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19세기 후반 사회민주당의 발전에 대항하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사회주의의 영향을 저지하기 위하여 A. 슈퇴커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국수적인 기독교사회주의와 J. 나우만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 복음사회주의가 전개되었다. 제 1 차 세계대전 후 바이마르 헌법 하의 독일에서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한 흐름으로 주목해야 할 종교적 사회주의가 P. 틸리히 틸리히(P. Tillich)는 1929년에 독일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으나 특기할 만한 활동을 하진 않았다.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은 1919년 5월에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관계에 관한 교회의 질문에 대해 그가 내린 그의 답변 "교회의 질문으로서의 사회주의"에서 드러나 있다 :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본질상 어떤 시대에나 어떤 상황에서도 가능한 체험이고 모든 사회 ·경제형태와 독립되어 있는 체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하나의 질서와 동일시하고 기독교의 내면적 인격적 특징을 박탈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자신으로부터 - 진리인식이든 개인의 인격형성이든 사회생활이든 - 인간의 생활을 형성할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내면성에만 기독교를 묶어두려는 모든 형태의 기독교를 거부한다. 기독교가 모든 종류의 경제 · 사회형태와 결합하고 그래서 사회주의와 결합하는 것도 가능하고 필수적이다. 기독교의 이름 하에 사회주의를 원칙적으로 배격하는 것은 기독교의 보편성에 어긋난다. 그래서 만약 사회주의적 이념이나 정당이 원칙적으로 기독교와 교회를 반대하지 않고, 매우 넓은 사회주의의 그룹들 안에 윤리적 ·종교적 정신을 실현하려는 열망이 살아있다면, 교회가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를 중심으로 주장되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종교적 근원을 밝히고, 또한 자본주의적인 생산과 소비가 원자화(原子化)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비인격화와 물화(物化)의 위험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는 신학과 그 실천을 제언(提言)하였다. 또 사회주의를 윤리적 과제로서 규정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의지의 윤리적 근거를 부여한 것으로, 수동주의(受動主義)에 빠져 있던 독일사회민주당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미국에서도 186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신교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사회주의가 대두되었다. 독일 저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도 일평생 사회주의를 위해서 투신했는데, 특별히 정치적인 것도, 레닌주의적인 것이나 마르크스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실용적이고 기독교적인 것, 즉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였다. 그는 전적으로 블룸하르트, 쿠터, 라가츠와 함께 그리스도교적 사회주의자로 머물러 있었다. 진정한(기독교적) 사회주의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더라도 그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반영하는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일 근대 사회에서 급진적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를 접목시키려 한 목사 루돌프 토트(1839-1887)를 통해서 종합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된다.“사회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의 해결에 기여하고자 하는 자는 오른편에 국민경제를, 왼편에 사회주의자들의 학문적 문헌을 그리고 앞에는 신약성서를 펼쳐 놓고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요소 중 하나가 결핍되면 해결은 빗나가게 된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2. 기독교는 사회발전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1) 인간학적 차원 프롬은 "종교란 하나의 집단에 공유되는 사고와 행동의 모든 체계로서, 개인에게 정향의 틀과 헌신의 대상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개념은 프롬의 인간정신에 관한 진화론적 관점에 의해 도출된다. 즉 인간이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영역이 점차 축소되고 상대적으로 이성, 자의식 및 상상력에 의해 행동하고 사유하는 능력이 커지면서,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하나의 준거틀 - 비유컨대 방향을 알게 하는 지도(map), 그리고 목표 - 이 요청되는데, 이것이 바로 헌신의 대상과 정향의 틀이라는 것이다. 프롬은 종교에 대한 소망과 욕구, 즉 정향의 틀과 헌신의 대상에의 욕구를 갖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따라서 과거의 모든 사회에 종교가 존재했듯이 미래 사회에서도 종교가 존재할 것이라고 단정한다.
2) 개인심리적 차원 종교는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소속감을 깨닫게 해 주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지지해 주며, 실망하고 실패했을 때 위로를 주며, 개인의 정체성을 계발하는 데 공헌한다. 또한 인간생활과 노력의 유의미성을 보장하는 기초적 근거를 제공하고 표현적 욕구의 출구와 인간감정의 정화를 제공한다. 종교는 또한 사회규범과 규칙을 정당화함으로써 인간의 법률을 지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을 사회화하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의 일부를 담당한다. 이러한 종교의 기능들은 모두 사회응집에 기여하는 측면들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영국에서 쓰면서 영국의 혁명을 예언하였지만, 영국에 파리대혁명과 같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으나, 요한 웨슬레와 같은 기독교부흥운동으로 바른 가치관(“청지기 사상” 등)을 사회에 형성되고 정착되면서 “자본주의 악”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3) 사회학적인 차원 고전마르크스주의에서는 종교를 주로 종속변수로서만 취급해 왔지만 신마르크스주의에서는 종교와 사회변동의 관계에서 더욱 복잡한 결론을 유출해 내고 있다. 엥겔스의 후기 사상으로부터 유래되는 신마르크스 주의는 종교를 경제구조로부터 비교적 자율적인 영역으로 간주한다. 또 사회변동에 있어서 부분적인 독립변수로서의 종교의 기능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종교이해를 더 풍부하게 했고 복잡하게 하였다. 고전마르크스 주의와 대조하면서 신마르크스주의는 다음을 제안한다. (1) 종교는 사회적 생산관계의 단지 수동적인 결과가 아니다. 종교는 사회적 역동성의 한 능동적인 요소이며, 사회과정에 의해 조건 지워지기도 하고 조건짓기도 한다. (2) 종교는 사회과정 안에서 언제나 종속적인 요인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특별한 사회 구조의 발생과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3) 종교는 사회 안에서 반드시 재생산적이고 보수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사회 변혁을 일으키는 주된 통로 중의 하나이다. 이제 신마르크스주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종교가 사회변동을 일으키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어떤 조건 아래서, 어떤 방식으로 종교가 변동을 억제하기보다 자극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특히 변화를 자극하는 종교의 가능성은 어떤 사회의 유형이 다른 사회의 유형으로 전이될 때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극대가 되는 경향이 있다.108) 베버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 예언자들은 사제나 주술가들과는 매우 다르게 관습을 타파하고 전통을 폐지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선포하기도 한다. 따라서 변화지향적인 지도자의 원형은 예언자이다. 종교운동은 소멸해 가는 구질서로부터 멍에를 벗겨주고 새 질서를 지양케 함으로써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있어서 삶에 방해가 되었던 집단 노선을 대치할 새로운 통일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함으로써 사회변동을 일으킬 수 있다. 간디는 종교적인 정신으로 인도를 평화롭게 영국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의 수단으로 흑인들의 인권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약자들의 권익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투신하였으며, 한국의 민주화에도 기독교의 공헌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8세기의 기독교는 찰스대제 및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제국을 재건할 이념을 마련해 주었고, 10세기에 이르러서는 신성 로마제국의 건설이 가능하도록 기독교는 동일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마두로는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집단들에게 종교적 중재 없이는 사회의 변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처럼 사회적인 문제의식이 교회 안에서 수렴되면, 그 문제의 해결은, 교회를 통하여 조직화되고 발전되며 문제해결을 위한 집단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운동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4) 종교가 중국 조선족사회에 주는 의미 종교의 이러한 특성은 현 중국조선족사회의 형성과 발전에도 큰 의미를 준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개혁개방과 더불어 세계화의 흐름에 편입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중국의 체제변환은 사람의 새로운 삶의 형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을 필요로 한다. 현재는 과도적인 적인 단계로 여러 가지 면에서 혼란과 불안을 안고 있다. 건강한 사회를 이루려면 건전한 가치관의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건강한 사회는 법을 지키며, 도덕적 인간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심지어 “적과의 동침”이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일찍이 이러한 사회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이성적인 종교”를 요청한 바 있다. 즉 종교적 차원의 바탕에서만 온전한 윤리도덕이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경쟁과 속도의 시대”에, 인간은 쉽게 자아를 잃어버리고 하나의 도구로 전략되어 소외를 겪으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정신적,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산다. 그들은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폭탄”과 같은 것이다. 신앙은 그러한 개인에게 확신을 주고, 희망을 주며 동시에 자신을 비판적으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재조정하게도 한다. 이와 같이 종교는 힘든 세상을 이길 정신적 힘을 줄 뿐만 아니라, 개인적 갈등이 약화 혹은 해소되고 심지어 더 나아가 利他的인 면들도 보이면서,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도모하게 된다. 심지어 위에서 말하다시피, 건전한 사회형성을 위해서 적극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앞으로는 중국에서도 법치를 통한 시민사회의 형성, 성숙한 시민사회의 역할이 대두될 것이다. 앞으로 중국사회에서도 시민문화가 형성 및 꽃피울게 될 것인데,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시민의식”과 “시민문화”일 것이다. 문화의 핵은 종교이다. 시민에게 중요한 것은 책임의식이다. 무엇이 이러한 것들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저는 종교적인 가치관이 그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맑스 베버의 <자본주의와 기독교정신>이나 종교개혁자 칼빈의 사상이 서구 근대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하는 인식들에서도 그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入世적 정신과 섬김과 나눔의 가치는 건전한 사회, 성숙한 시민을 형성하는데 중요하다. 자본주의적 가치(소유)가 형성되는 가운데, 기독교의 “청지기적 물질관”과 “책임의식”이 사회의 발전과 성숙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선족 사회가 변혁과 성숙으로 나아가는데 기독교가 공헌할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二. 조선족 기독교의 현황과 과제
앞에서 이론적(이상적)인 면을 다루었다면, 여기에서는 우리 조선족교회가 당면한 실질적(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이상과 현실은 항상 간격이 존재한다. 이상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을 제외하고 현실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 이상과 현실은 항상 함께 이야기되어져야 한다. 이상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인식하고, 해결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이상은 그러한 힘을 제공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이상에로 묶어주기도 한다. 오늘의 조선족교회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먼저 조선족교회가 걸어온 여정을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간략한 역사
중국 조선족교회의 출발을, 1903년 연변 지역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조선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들어온 것을 기점으로 본다. 그러나 이때부터 1945년 이전까지는 중국인으로서보다는 조선인으로서 살던 시기였으므로 <조선인교회>로 존재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부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면서 <조선족교회>로 불려지게 되었다. 조선족교회도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폐쇄되었다가, 개혁개방 이후에 종교자유의 정책이 시행되면서 다시 종교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1981년 서탑(西塔)교회와 연길(延吉)교회가 문을 열면서 조선족교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1982년에는 유일한 조선족 신학교인 동북신학원(東北神學院)이 다시 문을 열어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이때부터 조선족교회는 중국교회의 일원으로 지금까지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해왔다. 몇 년 전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 200만 명 중 기독교인의 수는 12만 명(등록된 신자수)이라고 한다. 조선족교회는 짧은 기간에 발전하여 조선족이 거주하는 모든 마을에 교회가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2. 조선족교회의 현재 문제점
조선족 교회는 이와 같이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하면서, 재건의 짧은 기간을 경과하였기에 여러 가지 미성숙과 그에 따른 문제점들을 안 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사역자들의 교육 부족”과 교회재정의 한계로 인한 “대외 의존적인 면모” 및 “교육시설의 한계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조선족교회들의 시선을 대외(사회)로 돌리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해결에 급급하거나 자신의 현재에 안주하게 만들게 된 것 같다. 조선족교회의 문제점들은 다양한 차원에서 지적될 수 있으나 본인은 아래 세 가지만 이야기해보려 한다. 1) 개교회주의 교회는 宇宙的(보편적)인 공동체이다. 모두 동일한 신앙고백과 동일한 백성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地域性도 강조된다. 교회는 전체적인 교회의 연대와 하나 됨을 강조하지만, 개교회의 중요성도 간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족교회는 교회들 사이의 연대성은 매우 박약하며,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있다. 그것이 교회공동체로서의 상호 책임의식의 부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의도적으로 다른 교회 성도들을 자신의 교회로 유입시킴으로 교회들 간의 불신과 불화를 가져온다든지, 어떤 지역에는 과밀한 교회개척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교회들 간의 세력차이로 위압감이 형성되고, 또한 어려운 교회들은 방치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2) 미자립성 조선족교회는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립하지 못한 상태인 것 같다. 물론 여기서의 미자립은 신학적인, 경제적인 차원을 모두 포괄한다. 신학적인 차원에서는 그냥 책에서 배운 신학적인 지식을 반복하는 형식이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내재화하거나 자신의 상황에 맞는 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힘이 거의 부족하다. 그래서 그냥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교회스스로 자신의 손과 발을 묶는 경우가 생기며, 그에 따른 극단적인 사례들도 발생한다. 경제적인 미자립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아직도 교회성도들은 대부분 하층민들로서 경제적인 어려운 분들이 다수다. 물론 대도시교회들은 상황이 다르다. 이러한 경제적인 미자립성이 의존성을 낳고, 그에 따른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3) 對사회적 책임성 부재 앞에서 말한 “개교회주의”와 “미자립성”은, 자연적으로 對사회적책임의식의 부재로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정립의 부재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교회와 사회의 관계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으나,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교회들은 二元論적으로 교회와 사회를 대립시키고, 진보적인 교회들은 一元論적 관점으로 교회와 사회의 차이를 지나치게 약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를 “대립”되면서도 “함께 하는” 존재로 보는 견해들이 대부분이다. “대립성”은 투쟁을 낳는다기보다는 “대안성”으로 나타나며, “함께 한다”는 것은 “책임의식”으로 나타난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두레교회와 두레공동체운동”(김진홍 목사)이라고 생각된다. 본인 이와 같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不一不二”라는 동양적 개념을 정립한다. 교회와 사회는 “하나도 둘도 아니다.” 그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면서도 분리되지 않음을 나타는 개념이 된다. 교회의 대 사회적인 참여가 시급히 요청되는 이 시대에, 조선족교회는 각성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3. 조선족 교회의 과제: 나아갈 방향
모든 것은 생각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족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희망적인 종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역시 교회 사역자들의 “의식전환”부터 시작해야 한다. 중국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학건설”이 발로 그런 취지의 발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선족교회들은 한국교회에만 우리의 시선을 고정할 것이 아니라, 중국교회의 전체적인 흐름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따라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본인은 조선족교회의 건설을 위해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해본다.1) 지도력 육성 앞에서 말했다시피, 조선족교회는 자신(주체적인)의 지도자들을 필요로 한다. 조선족 교회 지도자는 조선족교회의 분명한 “목표의식”(通時的인 사고)과 “방법론”과 “리더십”을 겸비한 사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성의 확립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리고 지도력은 또한 교회를 “부흥”(성장)시킬 수 있어야하며, “시대적(사회적인)인 사명”(同時代的인 사고)을 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지도력 양성을 위해서는, “교육의 장”이 필요하며 그에 따른 신학적 정립도 시급하다.
2) 교회들 간의 연대 교회들의 “연대”가 없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연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연대를 말들 수 있는 “의식”(정신)이 필요하며, 연대의 목표나 동기나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른 리더십과 동력도 필요하다. 여기서 “연대”라고 하면 조선족교회들 간의 연대가 우선되겠지만, 중국교회들과의 연대, 한국교회와의 연대, 세계교회들 간의 연대를 아우른다고 생각된다. 교회는 이미 형성된 이러한 네트워크를 활성화하고 활용한다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의 연대야말로 교회정신의 진정한 발로라고 생각된다. 예수께서 “우리가 하나된 것 같이 너희도 하나 되라.”고 교회에 부탁했기 때문이다. 3) 조선족교회와 사회와의 생산적인 연대 “교회와 사회의 관계”와 “종교의 사회적인 차원”을 다룰 때에는 언급되었다시피, 교회와 사회는 연대할 수 있다. 물론 교회내적인 연대와는 차원을 달리 하겠지만, 다른 차원에서의 연대도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민족이 잘 살고,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는 그 누구를 막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에는 교회와 사회를 갈라놓는 “강박증”과 같은 것이 우리 중국사회와 조선족사회에 존재해왔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우리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것일 수 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이를 극복해야 할 과제를 우리세대가 맡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종교의 사회적인 차원”에서 제시되기 했지만, 사회가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대하는 가에 따라 교회의 대사회적인 성격이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종교내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회도 종교에 대해서 수수방관하지 말고 종교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가져야한다. 우리에게는 개방적인 사고와 생산적인 삶이 요청된다.
三. 결 론
교회는 사회와 동떨어진 자율적인 존재도, 사회에 기생하는 종속적인 존재도 아니다. 상호작용, 상호영향을 주는 것이다. 건전한 상호작용이 요청된다. 교회는 조선족 사회의 일부분으로서, 사회와 교회는 함께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관계정립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 이 시점에 교회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건전한 敎會相은 이 시대적인 아니 神的인 요청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너”와 “나”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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