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교회에 대한 인식이 참으로 다양하여 한 마디로 말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선교사는 물론 한국교회가 삼자교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까지 삼자교회에 대한 이해는 주로 삼자교회 자체의 선전선동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삼자교회에 대해 알 수 있었던 또 다른 루트는 중국복음선교회(CMI)의 자료들을 통해서였다. 또한 중국에서 삼자교회와 협력하여 그들의 대변인이 되었던 NCC 계열 인사들의 왜곡된 선전, 그리고 내밀하게 삼자교회와 협력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강의나 기고를 통해서 아는 것이었다.
여기에 우리의 삼자교회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있다. 삼자교회가 선전하는 삼자교회의 실체는 사실과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고, 친 삼자교회적인 사람들이 전하는 삼자교회에 대한 인식도 편향적일 수밖에 없거나 표피적인 것이다.
그리고 화교들이 전해주는 삼자교회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도움이 되었으나 현실하고는 거리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가정교회가 삼자교회를 보는 인식을 직접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근래 삼자교회에 대한 가정교회의 인식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를 얻게 되어 정리하여 내놓는다.
삼자교회의 실상을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 현실이 나로 생각하도록 하였다.
나는 평범한 신도로서 처음 주님을 믿을 때 교회에 대한 의식이 약하였다. 나는 50년대 교회 내부의 치열하고 잔혹한 투쟁에 대하여 들어보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개방 후 규모가 큰 삼자교회에 가보면 성경에 있는 선한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에 만족할 수 없어서 삼자교회에 더 이상 다니지 않았다.
나는 몇 명의 신도와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우리 중에는 그 누구도 신학원에 다닌 적이 없기에 매번 집회 때마다 설교할 수 없어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열심히 읽을 뿐이었다. 성경을 한 번, 또 한 번 열심히 읽었더니 점차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었다.
나의 영적 생명은 확실히 성장하고 있어서 좋은 결과를 얻어내고 있었다. 이 때 가정집회는 지하교회이며 비법적이기에 금지하고 신도들을 체포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로 집회가 금지 당하고 체포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벌금 선고가 가장 가벼운 형벌이었다.
나는 이것이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50년대의 그 투쟁이 나 자신과 관계가 없다면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나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런 현실에 직면하여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선택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에는 삼자회(삼자회 영도하의 교회)와 가정교회(삼자회에 속하지 않은 가정 집회)가 있다. 그러므로 중국의 모든 신도들은 삼자회와 가정교회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사실상 신도들이 갖고 있는 입장이 이미 자기의 선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삼자회와 가정교회의 차이를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무의식간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는 자기 마음을 어기는 것도 있고, 마지 못해 따른 것도 있고, 또 심지어 다른 동기와 목적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간노선은 존재하지 않고 선택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말아야 하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엡5:17). 그래서 삼자회와 관련된 서적들을 보았다.
그 중에 <금릉신학지(金陵神學志)>와 삼자회의 발기인 오요종의 <암흑과 광명>은 삼자회의 신학사상과 삼자교회의 모토를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삼자회는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삼자회에 참석하지 않고, 삼자회의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삼자회의 신학교육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삼자회의 길을 가지 않겠다는 길을 선택하였다.
중국헌법에는 종교신앙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즉 중국공민은 종교를 신앙하고 신앙하지 않는 자유가 있으며 종교신앙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한 개의 종교에서도 교파별 선택의 자유도 있다. 그래서 나는 헌법이 부여한 합법적인 공민권을 이용하여 광명정대하게 나의 선택을 공개하려는 것이다.
3. 신학은 마땅히 대가(大家)가 논해야 한다.
성경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만민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하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관직을 가진 사람을 물론하고 누구라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깃발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넘겨주어 진리의 깃발을 휘날리게 하는 것이 모든 신도들의 사명이다. 하나님이 주신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경전이며 모든 신도들의 신앙의 근거이기에 비방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삼자회 지도자들은 맹목적으로 자기를 높이고 성경을 내리 누르고 실용적인 수법으로 성경의 해석을 왜곡하고 마음대로 더하거나 삭제하였다. 성경의 의미를 늘여 연장하거나 성경의 어떤 부분을 설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한 성경은 다 맞는 것이 아니기에 그대로 따르지 말고 비판적인 방법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도 모자라서 성경의 내용을 다시 편찬할 것을 건의하였다. 중국과 관계없는 부분을 삭제하고 중국의 도교, 불교, 유교 경전을 보태어 중국문화에 적합한 성경으로 만들자고 하였다. 삼자회는 예수의 이름을 빼지 않고 종교의 대연합을 도모하여 세계의 진정한 종교를 건립하자고 공언하였다. 그들은 진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다른 종교에도 있으므로 복음의 진정한 도에 대하여 혁신을 하자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듣기 좋게 새로운 소식, 새로운 빛, 법 중의 법, 신선한 만나, 중국문화에 뿌리를 둔 기독교라고 한다. 그들은 이 교회가 아니면 앞날이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기존의 교회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고, 생존 공간을 획득하지 못할 것이며, 역사에 의해 도태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구세주로 자처하였고 신도들을 잘못 들어간 길에서 구하여 개조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외국의 新派신학(자유주의신학)을 대량 들여와 우리의 두뇌를 씻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중국교회의 지도권을 탈취하였고 선량한 남녀신도들을 우롱하였다.
4. 삼자회의 신학은 現代派(자유주의 新神學) 신학사상체계이다.
근대에는 기독교의 신학 분파는 아주 많으나 대략 현대 신파와 복음파의 두 개 분파로 나눌 수 있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는 다섯 가지 관점이 있다.
현대파는
1) 성경은 마땅히 역사적 비판의 방법으로 이해해야 하고, 일점일획도 오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연의 발전에 따라 진화되는 것이다. 심지어 사람은 원숭이가 진화되어 온 것이라고 여긴다.
2) 말씀이 성육신하는 것은 승인하나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는 하나의 우화(寓話)로 본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은 동정녀와 충분한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3)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능력을 표시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분노의 하나님이나, 구속의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하는 것은 믿지 말아야 한다.
4) 부활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부활을 육체의 부활로 여기지 않는다.
5)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것은 단지 시적 의미의 상징이고 정의가 죄악을 정복하는 것을 상징한다.(오요종의「암흑과 광명」, pp.189-191)
이 다섯 가지는 기독교의 기본신앙과 관계된 것이다. 복음주의는 이런 다섯 가지 점에서 자유주의와 맞서고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삼자회의 창시자이고 첫 번째 지도자인 오요종은 철저한 자유주의자로서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저서 <암흑과 광명>에 있는 그의 신앙고백에서 산상보훈은 매우 감동적이라고 하였다.
그는 신학 문장에서 <주여! 나의 구주여>라는 말을 많이 인용한다. 이것으로 자기 신앙의 순수함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단락에서 그는 한 번도 <주여! 나의 구주여!>를 인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복음의 기본 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오요종은 성육신, 동정녀 탄생, 부활, 삼위일체, 최후의 심판, 예수 재림 등을 모두 황당하고 괴이한 것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것을 믿지 않아도 종교신앙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암흑과 광명, p.76)
오요종이 창설한 삼자회가 어떤 신학관점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밝혀진다. 오요종이 자기는 복음주의를 초월하는 사람이라고 자칭하는데, 이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신앙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금의 삼자회 지도자인 정광훈은 "오요종은 나의 40여년간의 스승이며 친밀한 벗이다"라고 하면서 "훌륭한 스승이 훌륭한 제자를 낳는다"고 하였다.
훌륭한 자유주의의 스승이 훌륭한 자유주의 제자를 배양해 낸다는 말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오요종을 계승한 신학적 관점은 현대파와 한 혈통일 뿐 만 아니라 오요종보다 더 현대적이어서 오요종과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고 표면에 두터운 양가죽을 더 입었을 뿐이었다.
정광훈은 오요종보다 투명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더 크게 신자들을 미혹한다. 반세기가 지나서야 신도들이 정광훈의 현대파적인 행태를 식별하게 되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들은 중국의 변혁기인 1949년 신중국이 설립되었을 때 전통적인 신앙을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전통에 반하는 사고의 결과 "신학에서는 솔직하게 조금도 보류함이 없이, 두려움 없이 한 차례 혁신을 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관계되는 기본 진리인 신앙과 불신의 분야, 동정녀 탄생한 예수, 중생, 부활, 이신칭의 등은 말 할 것도 없고 인성론, 기독론, 구속론 및 타종교에 대한 태도 등등에 대하여 혁신적이다.
그들은 혁신에 대하여 일종의 설법이 있다. 심지어 성경의 내용까지 고쳤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일반 자유파도 아니며 어떤 초월파도 아니다. 다음에 기술하는 것은 삼자회의 신학기관지인 <금릉신학지(金陵神學誌)>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신학사상은 삼자회의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좌우할 것이기에 신학지에 기록된 글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1 성경 내용을 개편하고 도교, 불교, 유교 경전을 더한다.
중국의 저명한 삼자회 기독교학자인 사부아(謝扶雅)교수는 봉상례(封尙禮)목사에게 성경을 개편할 것을 건의하였다. 삼자회 지도자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홍콩의 곽서겸(郭書謙)이 쓴 이 글을 신학지에 게재하였다.
다음은 그와 관련된 내용이다. 곽서겸이 말하기를 "중화기독교의 성경을 개편해야 하는가? 우리 중국기독교는 이런 넓은 가슴과 담량이 있는가? 사교수의 건의를 접수할 것인가?
여러 교파의 지도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상의할 줄 믿는다. 성령의 계시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 사교수는 1970년 말에 함경계간(函景季刊) 주필 봉상례 목사에게 중화기독교가 사용할 성경을 제출하였다. 그 성경은 신약전서, 구약록요(舊約錄要), 유경비지(儒經備旨), 도불권우(道佛拳隅)로 구성되었다.(신학지 24기-25기 p.81)
삼자회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정식으로 광대한 신도들에게 성경 개편의 건의를 전하였다. 그들은 이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면 성경은 중화문화에 맞는 성경이 되고 기독교도 중국문화에 뿌리박을 수 있고 발달 할 수 있다.
곽서겸은 그 글에서 진일보하여 사교수가 무엇 때문에 유교, 도교, 불교의 경서를 성경에 보탰는가를 해석하였다. 사부아는 "중국의 유가 경전 중에 사서오경, 역경, 대학, 논어, 맹자는 몇 천년을 사용해 왔다. 그래서 이미 중화의 일부분으로 되었다. 도가의 노장(老壯)과 중국의 불장(佛臧) 등은 중국의 고승이 쓴 것이기에 절대로 구약의 선지서보다 손색이 없다.
예수는 유대의 율법과 선지교훈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버리지 말고 승인해 주어야 한다. 만약 예수가 신주(神州)에서 태어났다면 그 역시 중화민족의 윤리도덕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버리지 말고 성사가 되게 해야 한다. 그는 최후로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개정하는 것을 상의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건의의 출발점은 중국의 기독교가 중국문화에 맞는 성경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성경의 본의를 배반한다고 평론할 수 없다."
본래 현대파인 오요종이 성경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부인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오늘 삼자회의 현대파는 성경에서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믿을 필요가 없다(신학지 21기 p.30)고 하면서 성경을 다시 재편하는 것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성경에 다른 종교의 경서를 더하여 써 넣겠다고도 하였다.
성경을 사람에 따라 마음대로 고친다면 역대의 성도들의 신앙이나 순교자들은 원통한 것이다. 중국의 사교수가 중국의 도교, 불교, 유교를 보태면, 인도의 사교수도 인도교나 요가의 경전을 더할 수 있지 않는가? 각 나라마다 고유의 이교가 있는데 자기의 생각대로 각 나라의 특성에 따라 고쳐, 각 나라 특색의 종교가 된다면 기독교는 어떠한 종교가 되겠는가?
성경을 빙자해 말하기를 성령의 계시를 기다려 완성하리라 한다. 성령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가? 그의 계시의 말씀을 그가 변개하시겠는가? 게다가 악령이 성경을 고칠 수 있겠는가?
동시에 그의 글 속에서 "넓은 가슴과 용기"는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려냐, 네가 전능자와 같아 지려냐"의 사단의 용기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하나님의 계시를 변개하겠는가? 계속 말하기를 "구약의 오경, 6선지서와 다윗의 시는 성도가 배워야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나 전기는 사학자가 연구할 것이지 성도가 꼭 읽고 배워야할 필요가 없다.
또 하나님처럼 자처하여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쓰라 하여 쓴 것을 사교수가 읽을 필요가 없고 삭제해야하고, 도교, 불교, 유교의 경전을 더하려 한다. 사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고, 연구하게 하는 사의 머리는 누군가? 사단이다!
사가 성경의 개편에 대한 건의는 개인 의견이다. 글을 쓴 곽을 대대적으로 추천한 것도 개인의 일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믿던, 모든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문제는 중국기독교 신학출간물의 대표인 금륭신학지가 사의 글을 전면 보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독자는 이런 종교 지도자들이 사의 건의에 동의한다고 이해 할 것이다. 너희들이 성경을 개편하려 했다면 무엇 때문에 뒷 표지에 당당하게 성경의 권위를 확인하고 정통신앙을 견지하자고 커다랗게 인쇄하였는가? 책 내용에는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의 권위를 비방하는 글이 나왔는가?(주: 이 것은 95년 24-25부터 책 뒤에 인쇄한 것)
이것은 너희들이 양의 가죽을 쓰고 교회에 들어온 잔혹한 승냥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마7:15) 너희의 행위는 분명히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것이고, 성도들을 기만하는 비겁한 행위이기에, 반드시 밝혀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중요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국내외의 중국 정통교회라 자처하며 전 중국 기독교 대표라는 명의를 걸고, 합법교회이며, 높은 자리에 앉아, 신학지의 고문이며, 편집, 주필, 교정하는 너희들은 우리 평신도들을 어디까지 우롱하려는 것이냐?
너희는 하나님의 교회를 어디로 끌고 가려느냐? 너희는 참 선지자냐, 거짓 선지자냐? 나는 너희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짓선지자라 말한다. 우리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국성도의 대표의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
너희 거짓선지자들아 하나님께서 이 일에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들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찌니라"(신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4;2).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5-6)
계시록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마음대로 말씀을 고칠 줄을 아시고 태초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점점 엄하게 경고하셨다. 말씀하시기를 성경을 마음대로 고치는 자는 최후 심판의 저주를 받으리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이르노니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에함을 저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4.2 믿음과 불신의 경계를 돌파하다.
믿음과 불신은 분명한 경계가 있다. 이는 각 사람마다 생사의 선이다.(요3;36) 엄숙한 개념인데 삼자회 지도자는 공개적으로 믿음과 불신의 선을 넘어서 믿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
하나님의 뜻인 인애와 공의를 실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이 대략적인 구조이지만 아직 완전한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고, 다만 그의 취향은 개방적으로 여러 진보적인 요소들을 용납하고 종교의 문호개방을 하자는 것이다.(신학지 35기 p.43)
이 말은 아주 분명히 그들의 신앙이 믿음과 불신앙에 관계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신학지 3기 p.23), "지금까지도 교회에 믿음과 불신의 선상에 선 사람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사람 누구도 자기의 자녀로 본다"(신학지 19기 p.67) 그들이 신앙, 불신앙을 파괴함이 개방적이라는 뜻은 그들이 이해하기에 인류의 문화, 과학, 예술, 정의 화평, 쟁취, 진보등은 모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며,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며. 다른 종교의 종교인도 포함하여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것이 그들의 대단원의 중심 사상이다. 그들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 알리라."(요일2;29하)의 성경을 근거로 한다. 이것은 포장의 의미이다. 성경이 말하길 "너희가 그의 의로운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에서 "의를 행하는 자마다"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가리킴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도 요한이 그들을 격려하는 것은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28절)는 목적이다. 그들은 왜 이 말씀을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는가? 그것은 정광훈이 "지금 중국의 배경 아래서 이신청의 교리를 신자와 불신자의 윤리 행동 상에 불필요한 거리로 만들었다.(신학지24-25기, p.41)고 한 것에 기인한다.
그들은 신앙과 불신앙을 모호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를 혼란하게 했다. 그들은 "만약 예수가 사람을 질책하는 것은 비기독교인인 불교도나 이슬람 등등의 기타 교도가 아니라 부정의 한 사람이다."(신학지5기, p.78) 라고 말하였다.
삼자회는 신파 지도자들의 원칙을 적용해 필요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며 교회지도자의 권위를 수호하고 무엇을 설교하며, 하지 말아야 함을 임의로 명령을 내린다. 이는 절대 불가한 것이다. 성도는 진리를 벗어난 설교를 용납할 수 없다. 성도의 손에는 성경이 있고, 누가 말하던 성경의 원칙을 준수해야한다.
신앙과 불신앙은 분명한 한계가 있고, 해석이 필요 없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5;1) 위의 말씀이 분명히 말하듯 믿는 사람은 살 것이고 불신자는 죽을 것이다. 이를 어길 수 있으랴?
하나님께서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삼자의 지도자 정광훈은 이신청의를 강조하여 말하는 사람은 뼈에 사무치게 증오한다하며, 여러 가지로 풍자하였다. "어떤 사람의 신학이란 그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에워싸고 돈다---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믿고 안 믿는 것이나 구원문제도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예수 믿는 신앙은 무엇이 있는가? 덕일진(德日進: 떼아르 드 샤르뎅)은일 말하기를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풍부할 수 있다 한다.(신학지3기, pp.19-20)
기독교는 확실히 풍부하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실제의의가 있는가? 하나님의 풍부는 모두 주안에서이며, 믿음을 전제로 한다. 만약 사람이 믿음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오면 예수와 관계가 없고 계약 밖의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은 아무 소망이 없으며 하나님도 없다(엡2;12).
이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분부한 사명은 전도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 기독교는 전도의 종교이고, 안 믿는 자에게 전도하여 믿게 하는 것이 중심 사명이고 제일 중요한 일이다.
다만 정주교는 상상외로 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고 믿고 안 믿는 문제를 글로 표현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하는 주교는 이미 4복음서를 읽어보았다. 믿음을 강조하신 분은 먼저 예수님이시다. 사람이 묻기를 무엇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시니"(요6;29).
또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쳐신 것은 믿음! 믿음! 믿음! 아주 여러 번이다.(요6:35,37,39,40,44,47,51,54,56)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 외침은 죄인을 찾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 후 인류 역사상 오늘날까지 찾으시는 말씀이다. 이것은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음성이다. 이에 믿음만이 유일한 대답인 것이다.
'믿음은 사람의 이성이 하나님에 대한 항복(降服)과 귀의(歸依)이다. 믿음을 갖은자는 예수 안에서 도장 위에 도장을 찍음이다. 성령이 내주하고, 영원히 살고, 영생을 얻는다. 믿음은 이와 같이 중요하고 엄숙한 문제인데 "문장을 쓰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말을 하는 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금능신학원 부원장 진택민은 말하기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의 적지 않은 성도들은 자주 믿음과 불신앙, 영적인 문제 사이에 놓여있다. 전 인류를 이분화해 하나는 기독교 요, 하나는 비 크리스챤---이렇게 문제를 본다.
이는 너무 간단하며 주관적이 아닌가.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말할 때 교리에 매달려 해석해서는 안 된다.(신학지2기, p.5) 인류에 대해 기독교 방식으로 분리하면 자연히 하나는 기독교 다른 하나는 비기독교이지 몇 개로 분리되겠는가?
이것이 단순화며 주관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사실에 맞게 객관화 한 것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명백한 일을 가지고 믿음과 불신앙의 경계를 부수고 믿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려 하는가?
새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이전에 어떤 사람은 늘 두 문제가 대두되는데 (믿음의 문제, 영에 속한 문제) 복음파와 현대파 사이에서 많은 분열과 필요 없는 다툼을 조성했다.
현재 30여년의 경험을 결산해 볼 때 중국의 현대 신학의 특징을 말하면 종교주의를 벗어났다.(신학지2기, p.5) 그들은 이 몇 마디말로, 새로운 현대파를 만들며 게다가 이 다툼은 필요 없으며, 이것이 혼란시킨다고 설득한다. 복음파와 현대파의 신학관점은 절대적으로 대립되며, 믿음과 불신의 구별이다.
이는 양자의 경계를 긋는 것이고 교회의 누룩을 없애는 것인데 이를 사람이 분열을 초래하며 필요 없는 다툼이다 말할 수 있는가? 종파를 초월하는 것은 마땅한데 현대파는 종파가 아니다. 그러니 이 두 개의 개념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서로는 자기가 초월파라 하며 서로 위에 있으려 하며 겉으로는 공정한 것처럼 한다. "신학사상 상 우리는 서로 존중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전의 신파와 구파 그리고 복음파와 현대파의 불일치를 벗어나자는 것이다.(신학지13기, p.18)
이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요종의 현대자유파 보다 더 발전한 것이고 멀리간 것이다.
오늘날 연합이란 권력선전의 꾀이고, 중국교회를 신파로 통일하는 과정이다. 연합은 거짓이며 복음신앙으로 고치려는 것이 진짜이다. 간단히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 그들은 몇 개의 영향있는 복음파의 지도자들을 조직하였다면서 몇 마디 외쳐대는 "다수는 소수를 돌봐준다"는 말로 속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의 신학과 교회의 나아가는 방향과 성경에 부합되는지의 여부를 관찰해야한다. 이것이 관건이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무엇을 초월했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교훈을 초월한 것이고,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다(요이 9), 이것이 그들의 진면목이다.
4.3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불필요한 것이다.
"예수의 탄생은 동정녀 수태인가 아닌가? 예수의 인간과 다른 점은 완전한 신인합일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신인합일인가? 이 두 가지는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다"(신학지2기, p.31)
이 말은 오요종계의 현대파의 말이다. "동정녀 출생의 예수는 하나의 만들어진 얘기고, 우화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의 성령수태로 인한 동정녀 출생을 부정하는 것이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육신의 부인이며 나아가 예수의 구속주의 자격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가 만약 동정녀 탄생한 것이 아니면 그는 필연적으로 부모가 난 것이다. 그러면 태중에서 죄를 갖고 나온 것이다. 그의 십자가에 달림은 자기의 죄를 담당한 것이며 대속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구속 은혜까지 뿌리 채 뽑아버린 독설이 아닌가?
만약 예수가 일반사람과 정도 차이만 있고 본질적 차이가 없다면, 성육신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마귀가 인간의 마음에 심어놓는 중요한 일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며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으로 정죄되었다.
(마26;63-66, 요5;18)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부활케 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게 하셨다.(롬1:4)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고 자기를 말씀하셨다. 필연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인간과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주이며 인간을 창조 하셨기 때문이다.
4.4 돌이켜 자신을 새롭게 하면 중생한다,
신이 있는가 없는가는 작은 일이며. 사소한 일이다. 신학지 2기 p.31에 이런 말도 있었다. "나는 이번 대륙과 북경의 중앙 통전부장 평걸삼과 화평반점에서 만날 때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사선생, 우리는 이미 많은 착오를 범했어요!' 그의 이 말은 매우 성실하고 담백한 것이었다. 누가 잘못이 없겠는가? 돌이켜 새롭게 함은 예수의 중생의 길이 아닌가. 신이 있다 없다함이 작은 일이며, 사소한 일이다.'
'중생'은 에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처음 하신 말씀이다. 중생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다(요3;5-6). 게다가 謝는 잘못을 인정함이 그가 중생이라 말하고,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는 긴밀한 관계가 없고 작은 일이며 사소한 일이다.
사의 말로 통전부장은 중생하였다. 다만 그는 무신론자이다. 예수를 믿지도 않으며 게다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중생케 하시나? 그의 중생은 스스로 다시 태어남인가, 정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 사(謝)는 도대체 누구인가? 앞에서 나왔듯이 성경을 다시 고치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이 사부아 교수이다. 그는 중국특색의 중국교회 신학을 건설함에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다만 예수만 탐구하고, 사람들의 수요와 사랑을 예수의 숭고한 인격에 의해 나라사람을 변화시킨다,
새로운 인류를 건립하기 위해 회개에 의한 구원과 동정녀 수태와 부활 등 기본소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신학지14-15기, p.33) 이렇듯 믿지 않는 사교수가 신학지에 자기 이름이 오르내리므로 신앙의 선배 영웅인 것처럼 치켜세운다. "완벽한 신학이론이 있으며, 아시아의 신학의 숲을 족히 이룰 수 있다"(신학지24-25기, p.79)
사실 사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며 성경을 고치는 가짜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저주하며 죽이실 것이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신18;20)
우리는 신학자의 이야기를 맹목적이 아닌 사실을 변론하여 받아들이는데, 그들은 단지 한번의 숨을 내쉰 것이지만, 처음의 하나의 잘못이 백 사람의 잘못을 만든다.
4.5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이며, 사람이 명백히 알지 못하면, 누구라도 바르게 설교할 수 없다.
이것은 정광훈의 어느 부활절 날의 설교인데 제목은 주님이시다.(신학지 2기상) "오늘날 전세계의 1/4이 부활을 믿고 있어 그것을 없앤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은, 사람들은 명백하게 모르지만, 다만 10억의 사람 생각에 부활의 대표진리는 대단히 심오하다. 이것은 신앙상식에 위반되며 2000년이나 불변하였다.
누구도 분명히 설교하지 못하지만, 이것은 한번에 없앤다는 것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 한 단락의 말을 반복하여서 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비상식적이다. "사람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또"누가 정확하게 밝히 설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당신은 물론 '1/4의 인구가 믿고, 십억인구가 심오히 의미를 갖고 2000년 역사가 있다해도' 모두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글 중에 정은 다시 부활정신에 대해 예를 들기를 장극가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살았지만 죽었고, 어떤 자는 죽었지만 살아있다" 곽말로가 문일다를 기념할 때 말하기를 "하늘 아래서 많은 금과 돌과 석고와 나무로 문일다를---우리는 지금 당신의 죽음을 기념할 수 없고, 당신의 다시 삶을 축하한다." 정은 또 고시(故試)를 인용하여 죽은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정이 말하는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정신의 부활이다. 글로 기록된 그리스도의 부활은 "누구라 분명히 말하랴" 이 누구의 글자는 예수와 사도가 모두 떠났으므로 역사 속에서 아무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께서 친히 강하게 증거하신 것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베드로, 요한, 아곱은 유력하게 부활을 증거하였다. 특별히 고린도전서15장에서 사도바울도 강력하게 증거하였다.
2000년이 지났지만 그의 증거의 음성은 약화되지 않았다. 매번 성경을 읽을 때마다 믿음이 더 강해진다. 바울이 말하기를 주님이 부활 후 게바에게 보이시고, 12사도에게 보이시고,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다. 여기까지 설교하시고 더 고조를 높여 말하기를 "친히 500명에게 보이시고, 그 중의 반 정도는 아직 여기 있다."
여기까지 읽고, 그들의 마음은 격동하여 끓어올랐다. 그때 있었던 사람은 제일 좋은 증거이다. 그리고 우리도 오늘 살아있는 증거이다. 바울이 당시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그때 바라본 사람들 중 살아있는 사람이 있고 그는 필연적으로 자기 눈으로 주의 부활을 본 사람이다. 얼마나 힘이 있는가!
누가 감히 믿지 않으리요! 어찌 분명히 설교하지 못하리요!? 그러나 그가 쓴 "주입니다"에서 바울의 강한 음성과 비교할 때 얼마나 창백하고 무력한가, 정말로 '반동'이며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기념하는 주의 부활의 이름을 빌어 주님의 부활을 실제로 부정하는 것이다.
4.6 현대파의 인성론: 인성은 본래 선하다(性善)
이것이 삼자 지도자의 인성론이다. "정주교의 이해에 따르면 원시인의 인성은 첫 사람의 타락에 따른 완전손상 상태에 있지 않았다.(전적 타락이 아니다)
---죄의 문제에 대해 전통적 그리스도 선교는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중국의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정주교도 죄의 교리에 대해 엄숙하게 대처하지 못했다.--이점에 중국에서 강조되는 전통적인 성선설이 이 세기의 3-4십년대 자유주의 신학과 맑스주의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신학지 24-25기, pp.40-41)
이것은 정광훈의 친구인 미국의 신학자의 80회 생일잔치 때 말한 것의 일부인데 정의 인성론의 솔직한 진술이다.
다시 정의 말을 보면 "중국의 몇 천 년이래 성현과 학자의 가르침 중 몇 사람의 뛰어난 인물이 말한 인생의 죄악에 관한 것이 있다.
중국의 고대 전설 중에는 시조의 타락에 대한 이론이나 죄의 존재에 대한 해석이 없다. 맹자는 공자보다 아래임을 인정하면서 성선설을 가르쳤다. 송조 이후 20세기 20년대까지 중국의 지식인은 모두 이렇게 인생을 이해하였다. 중국의 어린 학생들은 바로 삼자경을 읽는다. 삼자경의 시작은 인생의 처음은 선하다는 것이다.(신학지4기, p.9)
정이 다시 말하길 "사람이 어느 정도 타락되었을 때 사람이 말하길 완전히 손상되었다하는데 맞는가 틀리는가?---중국의 과거 수 백년간 아이들이 입학해 첫 수업은 바로 인생의 처음은 선하다이다."(신학지13기, p.6)
성선은 중국 전통철학중 하나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성론은 성선설을 거부한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3:22)
진택민 말에 의하면 "우리는 긍정적으로 세상과 사람은 좋은 것으로 보아야한다."(신학지 2기, p49) 진은 창세기 1장의 "하나님 보시기에 창조한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더라"를 인용하여 "우리는 긍정적으로 세계와 사람을 좋은 것으로 보아야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독교가 세상에 대한 기본태도"라 한다. 이 말을 사람들은 해석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진의 성경에는 창세기 3장이 없는가? 오늘의 세계와 사람은 창세기 1장에 관계하지 않고 3장에 관계한다.
죄의 문제는 교리 상 민감한 부분이다. 죄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부인하면 발붙일 곳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죄가 있다는 것을 억지로 승인한다. 전적 타락의 이 말에서 정광훈과 전택민이 강조하는 것은 죄에 대해 뭔가 목적이 있는 것이다.
정광훈은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도는 인류의 타락과 선의 결핍에 대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만이 죄에서의 구원이다라고 설교한다. 그러나 신중국의 출현으로 많은 새로운 현상과 현실에 있어 전통신앙에 대한 반감과 의심을 갖는 일부 성도들이 생겨났다."(신학지14-15기 , p.2)
사실은 성도가 그런 것이 아니다. 여전히 정광훈 스스로 하는 의심이다. 여기서의 전통신앙은 인간의 죄성을 지적한다. 그래서 의심을 갖는 전통 성도라 함은 바로 정광훈이 사람의 죄성에 의혹을 제출하는 것이다.
전적 타락의 개념은 사람이 악한 일을 한다거나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파괴적이다가 아니라 죄가 이미 사람의 각 방면을 타락시킨 것을 의미한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8) 동시에 죄는 전 인류에 미치는 것이다. 이 교리는 아주 정확히 자기와 주위상황에 맞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죄에 대해 전도함을 반대한다. 그것은 바로 구속에 대해 터무니없고 아무 내용이 없다.
"우리는 복음의 기초를 죄악 가운데 둠을 반대한다. 복음은 교회가 앞길이 있기에 필요하다. 인류가 전망이 없고 세계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중에 구속의 수단이 계획되었고, 사람이 완전 타락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을 찾는다.
인류는 하나님 창조의 면류관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관리하게 하셨다. 그래서 구속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신학지14-15기, p.18) 이것은 지독한 독초요 성경을 벗어난 극악인 것이다.
죄를 말하지 마라. 그러면 복음은 어디에 기초하는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사람의 결국은 사망인데 무슨 전망이 있는가?
사람이 이와 같은데 세상은 무슨 희망이 있는가? 만약 사람과 세상이 앞날에 희망이 있다면 구속이 왜 필요한가? 누가 구하는가? 하나님의 창조 중 구속의 수단은 왜 필요한가?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서 구원할 가치가 있어 구했다면, 이 말은 사람은 어느 면에서 확실한 가치가 있고 게다가 이 가치는 하나님의 생명의 가치와 같고, 하나님의 생명과 바꿀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구원의 은혜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복음의 교리를 위반한 것을 드러냄이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구속은 그의 은혜인 사랑일 뿐이다. 그의 이름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의에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시25:11,23;3) 그렇다해도 사람은 무엇을 선택할 수 없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속에서 사람을 동반함은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히2;6)
4.7 반드시 버려야할"그의 이름 외에는" 교도주의
"만약 기독교가 오늘날 중국의 처지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자면 필수적으로 전통을 버려야하는데 "전통적인 그의 이름 외에는"의 교도주의, 다원화의 세계 속에서 모든 배타주의, 모두 고립을 피할 수 없으며 자기를 내몰며 모퉁이에 처하게 한다.(신학지17기, p.13)
"그이름 외에는"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절대적인 진리인데 삼자회의 지도자들은 공개적으로 이 말을 버려야한다고 한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는가? 전도 때 귀를 기우려야할 그 이름 외에는 구원을 얻을 이름이 없다. 이 정도로 정확히 인도한다. 그 외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 없다.
전도인이 자기는 그것을 불신하며, 하필 기독교를 신앙하는가? 그렇다면 자기를 기만하며 남도 기만하는 것이 아닌가?
진짜와 가짜 신앙은 반드시 분명한데 어찌 배타주의라 하는가? 원칙이 없고 적당히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이 말들이 사실 적합했어도 무는 소용이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또 무슨 실제 의의가 있는가? 적당히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의 이름 외에는 이것을 버리라는 의미는 그리스도 외에 진리와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보편구원론과 모든 종교를 하나로 바로 종교 대 연합의 전주인 것이다.
신학지6-7기 p.12에서 그가 말하길 "우리는 실지로 상상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의 말씀을 베들레헴과 팔레스타인 소수의 사람에게 국한되었다는 것----- 그의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고 매 시대 각 사람에게 줄 수 있는데----각 지방의 문화와 선지자 성자들을 통해 자기를 계시하시고---만약 기타 종교를 철저히 잘못이다 말하며 기독교의 선에 위배된다면 필자는 기독교를 생명의 고등교육으로 보고 사상을 중등교육으로 보겠다.
" 필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반드시 유교도가 되어 중등교육을 받고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은 기독교 신자가 되는가? 이 도리는 성경에서 말한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 계시를 하시고 성현에 말하심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그들을 정확히 인도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고 거짓 종교를 만들어 내 하나님과 맛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게다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 세상에 말씀하셨는데 사람이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고 반대하는 입장에 서고, 떠나고, 이교를 의지하고, 그것을 대오로 믿고 그들과 형제를 맺으며 생명을 갈망한다면.
이것은 타락이고 배교이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욕이요 도에 빛나간 행위이다. 삼자회의 가는 방향은 이교도와 연합이다. 우리는 절대 따를 수 없고 그들은 죄악 속에 있는 것이다.
4.8 세계 각종교의 연합
이 제목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그들이 발표한 잘못된 이론을 보라(신학지21기. pp. 24-26) "기독교도들이 말하길 기독교는 유일한 진리이고 권위의 종교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와 추종하는 자들은 모두 가짜이다.
만약 개종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 --- 이렇게 자기 중심의 진리는 드러내지 않은 신념이다. 즉 하나님은 유한하여서 하나의 방식으로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만약 기독교의 권위로 다른 더 나은 우리의 문화와 영향력 있는 기타 종교를 부인하며 결합을 거세게 거절한다면 너무 어리석지 않는가!--- 그들의 마음은 너무 좁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보시지 않겠는가---성경에서는 하나님은 동등한 기초아래 인류를 창조하셨다.
사람의 머리로는 하나님의 비밀을 도대체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인류는 자기의 구체적인 존재로서 부동한 각도에서 이 긍극적인 진리를 탐구한다.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지 않는 전제아래 우리는 지금 우리의 신학을 갱신할 때이다"
믿음과 불신을 돌파하고, '그 이름 외에'를 버린 신파신학의 결국은 종교의 대 연합이다. 이것은 신파신학의 방향이다. 이것이 삼자신학의 치명적인 잘못이다. 이것은 공개적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며 말과 글로 벌하며, 위장을 폭로하며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위의 글에서 삼자회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그들은 완전한 거짓선지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성경의 절대권위를 허물고, 가짜종교와 동등시하고, 신앙을 혼합하고, 교회가 대음녀의 길로 빠지게 하였다. 사실 삼자회는 중국기독교의 대 이단이다.
광명과 흑암이 어디가 같은가. 그리스도와 열거한 자들이 어디가 같으며, 성전과 우상이 어디가 같은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들 가운데로 나아감이다. 성별하여 주께로 돌아 오라. 하나님 한 분이신 기독교는 세상에 짝이 없고 유일한 구원인 것이다.(사44:24,45:5,43:10,11,13)
자칭 하나님을 믿는 삼자의 지도자들아,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거짓 종교의 신은 가짜다.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눈이 있어도 못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고 입에는 숨이 없는 것이 신인가? 바울이 아덴의 우상을 보고 그들과 연합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마음을 고치고(사람의 생활, 동작, 존재.) 창조주 하나님께로 귀속하라고 권고할 것인가?
이것이 바울의 자기중심적인 좁은 마음의 절대화란 말인가? 성령의 감동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마음이다.(하나님을 이해하는 각도가 다르고, 이교도의 가는 길이 서로 다르고, 이르는 길은 같고, 추구하는 것이 달라도 하나에 이르고) 각도가 다른데 어찌 바울을 감동시켜 아덴 사람을 권유하겠는가?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그의 흘린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 다시 말해 예수는 문이요. 저 문을 통하면 구원을 받는다. 예수는 영원에 이르는 유일의 길이다. 주님이 제자를 떠나시기 전의 물으심에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메 우리가 누구에게 가오리까?" 베드로는 주 외에 영생의 길이 없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확실하게 한가지 방법으로 구원하신다. 이것으로 하나님이 유한하다 하겠는가.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지만 성경이 알려 주는 방법은 한가지 방법만을 사용하신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선택이다. 무엇이 불복할 것이 있는가? 무식한자 중 가장 큰 무식한자는 하나님을 논하는 것이다.
삼자회의 지도자 세상에 지혜자들, 그러나 자칭 예수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담하게 내가 믿는 것이 바로 절대적인 진리이다라고 승인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렇게 승인한다 "자기 중심으로 마음이 좁고 우둔하다." 이를 하나님을 세상의 지혜로 우둔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같은 관념을 가진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한다.
금능신학원의 진택민부원장은 스위스신파 신학자인 공한사(孔漢斯)를 특별 숭배 추천한다. 孔은 보편주의(普世主義) 대연합론자이다. 공은 말하길 "보편주의는 기독교 내부에만 국한하지 말고, 필수적으로 모든 종교 내에 포함한다. 오늘날 진리와 오류의 경계를 간단히 기독교와 다른 종교사이에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모든 각 종교에는 모두 크고 작은 진리와 오류가 있다.---그 누구도 그 진리를 점유하지 못했다.(신학지6-7기, p.103) 孔한사는 공정하게 모든 종교 안에 진리와 오류가 있다라고 했다.
때문에 그는 대연합을 요구하며 서로 엑기스를 취하여 생존하자 한다. 공은 이미 "세계적종교"를 건립하기 시작하고, 그를 위해 표준을 제시했다. "즉 1) 진리에 맞아야 하며, 독점하거나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 2) 인생의 윤리 척도에 맞아야 하며, 인본주의를 내리면 안 된다. 3) 각 종교는 바르게 전하고(正傳) 본래의 진리를 버려서는 안 된다."(신학지13기, p.29)
진택민이 다시 말하길 孔한사의 공덕을 노래하고 칭찬하기를 당대의 대신학자다.--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화합하고 보편신학의 선봉용사요 사도다.(21항) 이 시대의 선지자다(22항) 孔한사가 90년대와 21세기에 새로운 공헌을 하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30항)
진은 孔한사를 왜 이렇게 숭배하는가? 그것은 삼자회의 지도자 역시 세계 대 연합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정광훈은 그의 우주적 그리스도에서 신학론 중에서 말하길 "그리스도의 구원행위에서 인류에 진보, 해방, 민주, 박애의 운동을 하나에 연결 시켰다.---하나님의 구원하심은 교회의 영역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우주적이다.
제2차 바티칸 회의에서처럼 "모형있는 교회 외에 많은 진리와 성화 요소가 확실히 있고, 누구를 막론하고 양심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구속에 주의 도움을 받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요소들이 모두 크고 작은 독립된 선들이라면 기독교는 하나의 완전하고 아름다운 원이다."(신학지14-15기, p.4)
정은 언어 예술에 능하다. 특별히 민감한 문제에 대하여 직접 말하지 않고 빙빙 돌려서 말한다. "세계 종교 대연합"은 제일 중요한 카드이다. 이 카드가 삼자의 진면모이다. 바로 양이 탈을 쓴 잔혹한 이리의 모습이 아닌가!
정은 갑자기 제2차 바티칸 회의를 들먹이며 함축성 있게 말했지만, 본인의 말의 뜻은 분명한 것이다. 정의 유형교회 외에 '진리와 성화의 요소'는 바로 세계 각 종교를 말함이며, 인류의 추구하는 진리의 각 사상 의식이나 정치 주장이나 운동모두 정광훈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에서 이 모두가 크고 작은 각개의 독립된 선이며 최종적으로 한 개의 원으로 되는 것이다. 즉 대연합이다.
나의 이렇게 이해함은 주관적 추측이 아니다. 정을 좋은 동역자라 인정하는 진택민 부원장이 인용한 천주교신학자 파니카( 尼 )는 말하길 "그리스도--진리의 풍부성은 역사적 예수를 훨씬 능가한다. 때문에 진리는 변하지 않고 다만 진실한 방식으로 다른 종교 중에서 표현할 수 있고, 나사렛 예수 외에 다른 역사형식으로도 출현할 수 있다."
진이 스스로 말하길 "이제 다시 정광훈의 우주적 그리스도를 보게되면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설교에서 우주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진리는 동의어 이다.(신학지17기, p.3) 정광훈의 우주적 그리스도와 파니카의 그리스도--진리는 동의어이며 뜻도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광훈의 우주적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각 종교 중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각 사람의 몸에 자리를 잡았다. 이는 확실한 정광훈의 관점이다. 그는 해방신학을 찬양하는데 이렇게 말한다. "전도는 그리스도가 인간에 오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그리스도가 나오게 해야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기에 그들에게서 그것을 발견해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신학지3기, p.17)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글 중에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글을 볼 수 있다. "한 불교도 몸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 이것은 완전히 마귀의 진리이다! 공공연히 이것을 중국 기독교 최고의 시사지 금능신학지에 실었다. 이것에서 그들의 흑심을 알 수 있다. 삼자회를 어디로 인도하려는가?
기독교 영수와 주교인 정광훈 자신의 어깨에 중국 기독교 나아갈 길의 중임이 메어져 있다. 그의 신학관은 교회의 현재와 미래의 대 방향을 좌우한다. 하지만 정은 한사람의 대 연합자요 보편주의자 이다. 때문에 신학 유학생 중 하나는 우주적 그리스도를 읽고 "나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신학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주적 그리스도 신학관은 우리의 시야를 교회 외에 각 방면을 발전시킬 수 있고 만유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자기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제한하였다.--교회 안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과 불신사이에 경계를 두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반함이며 하나님은 세인을 자녀로 보고계시다.(신학지19기, p.67)
정광훈의 신학의 관념은 중국 전통철학의 영향을 받은 동시에 서방자유주의의 각종 신파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늘에 와서 정은 성도와 신학생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것이 대단한 것이다.
삼자회는 비주류 신파신학다. 그들은 신학의 철학화을 통해 하나의 학파를 만들고 한 모퉁이에서 큰 인물들을 배출 시켰다.
종교 지도자들은 아름다운 글을 써 세상에 펴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평신도들은 앞사람의 먼지만 바라보는 꼴로 소화시키지 못하는데 어찌 진리를 분별할 수 있으리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딤전6:20)고 경계하였다.
이 말은 또한 경건한 오늘의 평신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마음에 아로새겨라. 소털 같은 신학의 숲에서 길을 잃지 말고, 주님을 영접한 자들은 깨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라.
5. 삼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5.1 삼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정광훈이 말하기를 삼자회 조직은 줄곧 정치성이 비교적 강한 조직이라 인정되고 있다. 한 차례 한 차례 정치 운동에 따라 모든 국가는 점점 고도로 집중된 일원화 지도자를 찾는데 교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적지 않은 지방에서 교회의 일에 실제 지도권은 삼자조직에 집중되었다.
이렇게 되어 적지 않은 지방 삼자는 애국의 기치를 높이 들어 자치 자양 자전의 군중운동과 군중조직이 교회 옆에 혹은 교회 위에 있게 되었다. 교회 같으면서 교회가 아니고 정부 같으면서 정부가 아니다. 이러한 한 개의 교회 지도자 관리 부분이다.(신학지 10기, p.2)
정은 또 50년대 후기 당시 역사적 원인으로 삼자는 교회를 관리하는 기구로 되었다. 교회 위의 지도자로 되었다. 바울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교회관은 중시 받지 못하였다. 삼자조직이 통치하는 교회,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삼자의 머리를 더했다.(신학지18기, p.30)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몸이다. 이것은 성경의 교회에 대한 교훈이고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는 집단은 당연히 교회가 아니고 더구나 하나님의 교회는 아니다. 몸의 머리가 장삼이면 그 몸은 장삼의 것이다. 몸의 머리가 이사이면 몸은 이사의 것이다.
몸이 머리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의 정치적 성향이 강한 삼자조직이 삼자회의 머리라면 삼자회는 교회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교회인가 아닌가? 당연히 삼자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잘 분별하여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5.2 삼자회는 여러 머리의 교회.
"삼자의 책임자는 목사가 아니고, 신학훈련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일을 관리하고, 목사를 관리하고 성도를 관리한다. 모인 사람과 재물을 관리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어느 신자는 농으로 목사 아닌 자가 목사를 관리한다 한다.(신학지24-25기, p.51) "종교 공작 부문에서 정도가 지나치게 월권행사를 하는 상황이며 예로 어느 지방에서는 진리를 사모하는 자에게 세례를 주는 것도 모두 그들의 비준을 받아야한다. 이럼에도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교회를 관리한다고 한다.(신학지24-25기, p.52)
"어느 지방 정부부문에서는 교회를 아주 엄격하게 관리한다. --교회가 구속을 받기 때문에 원래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잃었다.(신학지24-25기, p.106) 어떤 지방의 교회활동에 대하여 일명 '三定' 관리방법을 택한다. 즉 부문, 사람, 장소의 세 가지를 정한다.
한 부분의 성도와 성직자들은 다만 규정된 어느 장소에서만 종교의 활동을 해야한다. 위반자는 법으로 처벌한다.(신학지10기, p.10) 어느 지방은 교우증과 성도증을 발급한다.(신학지18기, p.30) 어느 지방의 종교사무와 간부들은 종교단체의 돈을 점유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일은 한번 두번의 일이 아니다.(신학지10기 p.15)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자회는 각 삼자와 협회(양회라 함)에서 종교활동의 관리를 받는다. 전국의 성, 지방, 시, 현의 양회와 종교부문에서 층층이 내려오면서 우산을 돌려 물을 뿌리 듯 각층의 단위를 만든다. 때문에 삼자회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머리는 아니지만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머리가 많은 교회다. 모든 머리는 교회를 관리한다. 교회는 그들의 지도를 받는다. 하나의 몸에는 하나의 머리가 있어야 하는데 삼자는 머리가 여러 개다. 머리가 여러 개인 삼자회는 괴물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5.3 삼자회는 스스로 빛을 낸다.
한 몸에 여러 머리는 비정상이다. 행동상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 그들의 신앙 원칙에 지불한 대가로 생존공간을 쟁취하였다. 교회를 잘 치리하지 못하여 문제는 점점 많아지며 목사를 고발하는 편지가 어떤 때는 매일 백 통이 넘는다. 집안의 험은 밖으로 안 전하려해도 그럴 수 없었다.
아예 내부를 정돈해 드러내어 삼자의 현상을 새롭게 수립해야했다. 그래서 군중들에게 인상을 바꿔주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다음은 그들이 폭로한 문제인데 사람을 놀라게 한다. "왜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삼자를 가까우면서도 멀리하는가? 그리고 많은 일부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반대한다. 사광의 선생은 자르는 아픔 중에 부정을 내어놓는다.
'어떤 지방의 삼자 애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상태와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 어느 성도들과 책임자의 의견을 따르며 삼자애국회를 벗어났다. --어떤 지방의 양회지도자는 삼자의 깃발들과 삼자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들을 하는데 외국사람들에게 비굴하고, 심지어 외국 종교세력의 대리인이 된다. 재무 장부는 오래 동안 공포하지 않고 교회는 개인의 세상으로 되었다.
한 사람이 말하면 모든 것이 결정된다. 성도들은 목양을 받지 못하고 상한심령을 끌어안고 일어나지 못하고 갈 수밖에 없다. 돈만 보고 덕을 보지 않으며 인재들의 중시하지 않는 신앙의 기초를 갖고 위에서의 분부만 듣고 성도의 목소리는 듣지 않으며, 어떤 이는 개방의 기회를 이용해 삼자의 도를 역행하고 꾀를 써 자신의 입지만을 세우며 어렵게 이어온 삼자의 단결을 부숴 버린다.'---근심스럽다 몇 글자로 형용할 수 있는가?" (신학지26기, p.46)
삼자회 내에서 생긴 많은 문제는 우리가 확대경으로만 찾도록 작은 것이 아니라, 많게는 교회의 성질과 같지 않은 현상이 교회의 간증에 영향을 받게 했다. 오늘날 교회의 권력화는 교회의 책임자는 높은 곳에 있고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사욕을 채우므로 성도들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남긴다.
일부 교회의 책임자들의 크고 작은 아래 기관에 일들을 상부에(정부) 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우를 받겠지만 성도 앞에서는 위신을 잃었다. 그들은 심지어 권력을 이용하여 교회 내에 명령을 내리고 교회가 교회답지 않게 한다.
5.4 삼자회는 이제 삼자가 아니다.
삼자회는 삼자의 기치에 세워졌다. 지금은 삼자의 실제 내용이 없어졌다. 삼자는 자치 자양 자전을 말한다. 자치(自治)는 성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치리함이다. 그렇지만 삼자의 머리는 삼자조직이다. 이 조직은 목사와 사람과 돈과 물질을 모두 관리한다. 성도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성도가 교회를 관리한다는 것은 헛된말에 지나지 않는다. 자양(自養)은 성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살린다는 말이다. 특히 외국의 돈에 의지하지 않는데 이것은 교회의 자주의 관건이다. 50년대초 삼자기치가 세워진 후, 외국에서 오는 경제 도움을 끊었다. 이것은 교회를 중국화 하는데 제일 중요한 보장이다.
지금은 외국의 경제지원이 삼자에 몰래 침입했고, 해방전의 그런 다른 회가 없고, 다른 명목이 나타났다. 개방 후 각양각색의 돈이 들어옴으로 삼자 지도자들은 이것이 가장 큰 유혹이었음을 시인한다. "해외의 일종의 개인조직과 기금회에서 교회와 신학원에 큰돈을 헌납하여 현대화의 공헌에 투자하였다. 이런 유의 공헌은 유혹이 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거절 못하게 한다. 때문에 삼자원칙이 위기에 봉착한다.(신학지21기 p.21)
그들은 거절하려고 하면 아쉽고, 받자니 자양의 기치가 걸려 공개적으로 못하고 변칙의 방법이 통용된다. 그래서 "개혁개방의 형식아래서 우리교회가 자양원칙을 견지하며 동시에 해외교회와도 조건 없는 유익을 나눈다."(신학지24-25기, p.22) 이것은 관리방법의 말이다. 자양원칙을 견지해야하고 국외의 돈도 가질 수 있다. 가지다를 나누다로 말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돈을 갖은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소량이니 조건이 없는 등으로 말하면 하늘이 웃지 않겠는가? 사실 주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자양하지 않는 것에 문을 연 것이다. 위에서 녹색의 불을 켜 나눌 수 있다면 아래서 당연히 제재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외국 사람이 조건을 붙일 필요가 없다. 스스로 주권을 팔아먹은 것이다. 이것은 거지의 말하는 모습이고 그것을 암시하는 모습이다. 그들 자신의 폭로를 보면 "어떤 교회지도자들은 거지처럼 외자를 얻기 위해 교회의 주권을 팔아먹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정말 거지같다.(신학지24-25기, p.31)
"현재 우리나라는 예전보다 더 개방적이다. 해외에서 오는 사람도 점점 많아진다. 별난 사람 다 있고, 돈도 더 많아지기에 암시적 요소가 더욱 많다.(신학지18기, p.28) 즉 글의 폭로가 없어도 신학지의 매년의 대 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 국제간의 서로의 방문은 성도들로는 되어질 수 없다. 그들이 손님을 접대하는 격은 모두 큰 차원이다. 모두 고급의 차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양으로선 유지 할 수가 없다. 때문에 삼자회는 자양도 없는 것이다. 자전(自傳)은 삼자 중 제일 주목하는 것이다. 그들의 자전은 누가 와서 전하는가 만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전하는가 이다. 중국에 전도가 되면서부터 무엇을 전하는가? 의 문제는 줄곧 해결이 되지 못하고 지금 그들이 정권을 잡아서 근본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결국 무엇을 전하는가? 그들은 과거를 모두 부정하고 그들의 신파신학을 전한다. 이것은 그들이 50년대 성립될 때 결정한 취지이다. 정광훈은 우주적 그리스도를 쓰고 신학지14-15기 pp.1-6에 실렸다. 이 글은 중국 기독교 생긴 이래 유일한 기독교 신학이라고 추천을 받았다. 그들은 예전의 전도자가 전한 성도들의 믿음은 모두 틀렸기에 모두 바꿔야한다. 정광훈의 이 신학관으로 성경중의 기본도리를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앞에서 쓴 삼자회 신파 신학 사상체계는 그들의 부분적 신학 관점이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실은 삼자회 신파신학의 총강이다. 정은 이 문장의 마지막에서 우주의 그리스도는 응당 "그것은 더는 전통적인 기독론을 만족시키지 못하기에 새로운 기독교의 출현을 희망한다"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의 자전은 다른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이런 자전은 우리에게 필요없다.
우리가 요구하는 삼자는 성도 자신이 교회를 관리하고 자기의 것으로 교회를 배양하고.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성경에 의하여 하나님의 도를 바르게 설교하는 것이다. 오늘 삼자회는 이미 변질한 삼자이다. 이름만이 있고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삼자회는 더 이상 삼자가 아니다.
5.5 깊이 고려할 필요가 없다.
삼자는 80년대에 교회를 잘해가고 도리에 따르는 구호가 있다. 삼자는 잘해나가지 못하고 게다가 관계가 나빠지는 곤란한 함정에 빠졌다. 90년대 상황도 바뀌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래는 음미해볼 말이다.
삼자는 비계의 비교와 같다. 중국의 이 건물이 진선미의 자태로 동방의 지평선위에 세워졌을 때 자연적으로 비계는 보이지 않았다. 삼자는 교회의 건물을 건설하기 위해서이다.(신학지18기, p.29) 삼자회는 스스로 삼자조직을 비계로 승인한 것이다. 현재 그는 생각하기를 허리가 굳어짐이다. 이미 동방의 지평선 위에 세워졌다.
때문에 그들은 비계를 운반하려한다.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논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심사숙고해야 할 것은 무엇 때문에 교회 건립을 하는데 비계가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교회의 건립의 원칙이라면, 성경의 도리라면 초기교회의 비계는 무엇인가? 역대 각국 각지의 하나님의 교회의 비계는 또 각각 무엇인가? 이것이 문제점이다.
지난 세기 십자가가 외국을 통해서 중국으로 전해졌기에 사람들에게 서양의 도의 형상을 주었다 하면 삼자회가 생겨 심지어 잉태하여 낳아, 권력의 결과아래 놓이게 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교회를 관리하는 형상을 준다. 그들은 스스로 과연 다른 사람은 우리가 교회를 관리한다고 스스로 말을 한다. 사람들이 삼자는 전쟁하는 정치운동과 격력한 투쟁중에서 태어 낳다는 것을 잊지 못한다.
아래에 투쟁적 고소를 서술한다. 당시 공소의 대상은 제국주의 어떤 전도관련자이다. 다만 모든 전도자는 아니다. 더욱이 중국의 전도자는 아니다. 실제 조작 중 이런 신앙의 경건은 영에 속한 것이고, 일시 삼자의 고려도, 한도에 같이 일한 것, 모두 반애국이므로 타격하자, 여기서의 타격은 피로 쓴 글자이다. 이것은 아벨 이후 흘린 아벨의 피이다. 의인의 피 역사는 최후에 공정한 판단이 있을 것이다.(신학지24-25, p.51)
지금 계속 심사숙고하여 보라. 교회는 사랑의 단체인데 어떻게 정치운동을 할 수 있는가? 심지어 공안을 동원할 수 있을 까? 삼자회는 하나님의 교회인가?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그의 교회를 건립하였는가? 만약 50년대 초처럼 先知식의 충성된 종과 여인들의 제거가 삼자회의 본질을 능히 알게 나타낼 수 있다면, 반세기 이후 지금 이런 사람의 말처럼 흰 종이에 검은 글자를 쓰듯 범사에 하나님 것을 찾음을 똑똑히 보아야 한다.
삼자회가 하나님의 교회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쟁론할 필요가 없다.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교회라 하는가 하고 솔직 담백하게 말한다. 그들은 투쟁의 수단으로 생존의 공간을 열었다. 그러나 형상은 깨졌다. 스스로 잘못된 관계로 빠지고 말았는데 이는 자업자득이다. 개방 후 그들을 계속 정치적 수단으로서 국제 기독교를 겨냥했다. 철판하나가 아니다.
모두를 격파했다. 먼저 기독교 세계연합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국외 복음파와 교통한다. 삽시간에 세계와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승리는 교회 자신의 건설을 돕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몸은 성장해야 한다. 성장은 신체 내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교회는 생명의 유기체이다. 이것 또한 삼자가 중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과 불신을 돌파하면서 생명을 논할 수 있는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책임지지 않으며 생명을 구하는 도를 논하지 않는다. 단 외국사람에게만 잘 보여 교회를 건전하게 건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머리 문제는 엄숙한 문제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앞자리에 놓아야한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인간을 사랑함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자회는 생명의 도를 중시하지 않고 입에만 달고 다닌다. 그들의 신학 사상은 실제와 결단하는 것인데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은 그들 자신이다. 가정집회는 핍박에 의해 나온 것이다. 생각해 보라 50년대 가정 집회는 반혁명 단체로 처단되었다. 누가 감히 가정집회를 가지겠는가? 하지만 삼자회는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나도 이렇게 삼자회 조직을 떠난 것이다. 다른 교회를 세워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반대하고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은 진리를 논하고 진리를 행한다. 역대의 탐관 부패자 척결에서 그들의 자신이나 자녀는 없다. 그 중의 적지 않은 사람은 공직에서 우수한 인력이다. 나 역시 그렇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좋은 성도는 좋은 시민이다.
이밖에 또 하나의 문제를 생각해 봐야한다. 삼자회 속에는 확실히 중생 구원된 신도가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럼 우리는 같이 참가하지 않고 같이 삼자회를 건설하지 않는가? 따로 나올 필요가 있는가? 이 문제는 교회 발전의 방향에 관계된다. 우선 교회의 머리와 교회발전의 추세를 식별해야한다. 이는 교회의 권력과 긍극 목적에 관계되는 것이다. 한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이일을 할 것인가? 결과는 어떨까 까지 생각해 봐야한다. 결과가 더 중요하다.
삼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권위를 행사하지 못한다. 삼자회는 그의 여러 머리의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노출현상의 유래이다.
삼자회의 발전의 방향이 삼자회 스스로의 신학에 의해 정해졌다. 삼자회 신파신학은 보편주의 종교 대연합 신학 관념이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세계 각 종교 대 연합으로 결합할 것이다. 오늘날 삼자회는 대연합의 여론이다. 일만하고 진리는 관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며 삼자회 속에서 일하나 결과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 그래서 떠돌다 나올 수밖에 없다.
중국의 목장은 매우 크다. 삼자회는 대목장의 몇 개의 점에 불과하다. 북경의 1천만 인구에 삼자교회당은 7개뿐이다. 북경이 큰가 7개가 큰가? 교회당 밖의 목장과 비길 바가 못된다. 당연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교회내의 모두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건립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것이 순결한 신부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음녀가 앉은 물과 같은 죄를 거절한다. 봉사는 길이 있는 것이다. 진리의 길이 없는 봉사는 없는 것이다.
6. 삼자회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삼자회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삼자회가 많은 거짓 이미지(假想)를 갖고있기에 삼자회의 본질을 투시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6.1 삼자회의 외모는 교회 같지만 실질은 크게 부패한 모임이다.
외모로 보면 삼자회는 모든 면에 장식이 구비되어 있다. 넓은 교회당이 있고 긴 가운을 입고 강단에 선 목사, 백의 천사같은 성가대, 같은 성경을 갖고 줄지어 앉은 신도들, 많은 이름을 가진 종교 지도자, 그 외에 합법적인 보호의 우산이 있다.
그러나 삼자회의 내부는 어떠한가? 현대파가 있는가 하면 복음주의자도 있다. 현대파와 복음파는 물과 불의 서로 상용되지 않고 조화되지 않는 두 개의 대립되는 관점이다. 신앙과 불신앙간의 구별이 서로 뒤엉켜지고 연합의 가짜 이미지를 부여하고 합일의 초대장을 들고 해외에 가서 선전선동을 한다.
말타고 꽃구경하는 식인 외국인은 그 안의 실징적인 것을 보지 못한다. 삼자회 밖의 신도나 심지어 삼자회 내부의 신도들도 분별하지 못하고 삼자회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교회의 현 상태에 대해 이러 저러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삼자회는 중국의 유일한 정통교회이고 가정교회는 모두 오합지졸이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삼자회나 가정교회나 모두 하나님이 교회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는 사람은 극력 양자의 합의를 촉구하려 한다. 그들의 좋은 마음은 도리어 거꾸로의 범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삼자회는 가짜교회이고 가정교회만이 하나님이 중국에서 일으킨 진짜 교회다. 그것은 가정교회의 머리가 예수이고 진정으로 삼자를 실행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신도자신들이 교회를 관리하고 자신들이 교회를 먹여 살리고 평신도들을 일으켜 세워 양떼를 목양하게 했다.
가정교회가 아직 유년 단계에 처해 있어 자발적이고 조직이 없고, 지도자가 없으며 광활한 지역에 분산되어 집중하여 통일적인 관리를 할 수 없다. 사역자들은 조직신학의 장비가 없어 제각기 강의하기에 이단사설이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뿌리가 똑바르고 싹이 꼿꼿하기에 필연코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점차 성장될 것이다."
6.2 삼자회는 전후가 다르다.
삼자회는 교회의 외형을 갖고 있어 사람들이 식별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더욱 깊은 미혹성이 있다. 바로 삼자회의 앞뒤가 다르고, 상하가 통일되지 않고,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삼자회가 생존하기 위한 필요 때문에 책략상 변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변하든 삼자회의 본질을 떠나지 않는 삼자회는 여전히 삼자회이다. 본질적으로 삼자회는 한 번도 변화된 적이 없다. 삼자회의 지도자가 변하지 않았고, 삼자회의 신학이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앞으로 발전되고 더욱 구체화된다. 이것이 삼자회의 본질이다. 책략상 변하는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새로운 형상을 세우지 않으면 적을 많이 둘 것이고 자아 고립, 내부가 더 혼란하고 신도들은 모두가 버리고 저절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럼 먼저 삼자회 전후가 다르다는 것을 보자. 50년대 삼자회가 발표한 글들은 사기 등등하고 피 냄새가 하늘을 찔렀지만 지금은 화약냄새가 감소되었다. 머리가 되어진 삼자회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내세워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정광훈은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글에서 "생각하기에 은혜는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부여한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님이 성육신이 인류에 준 영향이 아담의 타락이 인류에 대한 영향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우리가 본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되는 것이다."(신학지14-15기, p.4)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해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 그러면 예수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신자든 불신자든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영향력이 아담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설법은 성경의 가르침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보편구원론으로 연장시킨다.
과거에 머리만 강의하던 그들이 오늘날 사랑을 크게 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지금은 그들이 변하였다는 가짜 이미지를 심어준다. 과거 그들은 삼자회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자이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반혁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삼자회가 하나의 정부요, 관변단체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 삼자회는 공안보다 더 공안같이 하여 신도들의 인상은 삼자회는 교회 중의 공안국이어서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지금 종교 지도자들은 신도들을 체포하는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모 지방에서 두 번이나 집회를 취체당하고 사람들을 잡아간 일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삼자회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전화를 걸어 공안국에 보고하였다고 하여 그들은 이것을 공(功)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그전과 다른 점이라면 과거처럼 공개적으로 공안국 요원을 데리고 가지 않았을 따름이다.
해외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지금 삼자회는 모든 외국 선교사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재삼 설명하고 과거 이름을 거명했던 허드슨 테일러한테도 우호의 손을 내민다. 과거 자주 보던 라는 말도 삼자회 글에서 다시 볼 수 없다. 필경 <之流> 설법은 삼자회에 크게 타격을 준다. 삼자회가 확대하고 단결하는데 불리하며, 적을 많이 만들게 되고 자아 생존을 위협한다. 그들은 과거가 투쟁이었다는 것을 승인하면서도 계속 싸우고, 스스로도 보장할 수 없으며, 서로의 좋은 관계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의 투쟁도 좋고 지금의 화목도 좋으나 모두 자기를 위하는 책략 수단일 뿐 아무리 변해도 중심은 변하지 않는다.
6.3 삼자회는 상하가 통일되지 않는다.
삼자회에 예배드리러 가서 가끔 사람을 감동시키는 설교를 들을 수 있어서 삼자회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친척하나는 한번 삼자회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는 예기를 나에게 했다. 나 역시 감동을 받았다.
다만 그는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지도층에서는 강력 반대함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말하기 "많은 전도인들이 교회의 전통교리를 선포한다. 중요 사람은 서방에서 오고 내용상 보수와 복음파에 속하고 형식상에서 부흥파에 속한다. 그들은 현대화와 현장화를, 비정통, 위험과 이단으로 보고 일체의 현대화와 현장화의 혁신하는 것을 냉담하고 의심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태도이다.(신학지21기, p.21)
성도들은 설교가 좋다고 여기지만 위에서는 욕한다. 그럼 왜 위에서는 반대를 하는데 아래인 교회에서는 기독교 진리가 담긴 설교를 하는가? 이것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중국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복음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일관적인 정치 설교에 매우 반감을 갖는다. 그래서 잠시 일부 복음파의 목사들이 강대상에 올라가는 것을 허용한다.
앞에서 이미 말한바와 같이 삼자회는 한차례의 정치운동과 공소 투쟁중에서 탄생했다. 당시의 배경아래 삼자회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반동에 속했다. 못 견디는 자는 삼자회에 참가하는 것이 유일한 출로이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전도자가 참가했다. 단 사람들이 비록 삼자회에 참석하지만 원래의 신앙이 하루아침에 현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목사들이 일단 강단에 오르면 기독교의 진리를 설교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오늘날 상하 불일치의 현상이 형성되게 된 원인이다.
삼자회의 상층이 바로 신파신학의 관점이고 삼자의 주류이다. 복음파 목사가 성도들을 돕고 꼴을 먹이지만 상층은 이런 현상을 중심에서 떠나고 분열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기에 문 앞에서 팔고 있는 물건은 점주의 물건이 결코 아니지만 최종지배자는 상층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전의 과도형식의 표면현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6.4 삼자회의 겉과 속의 불일치
겉과 속의 불일치는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불일치 현상과 실질의 불일치이다. 표면상에서 중국기독교가 대연합을 했다. 중국은 기독교 중에서 유일하게 종파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것을 종교 지도자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나팔을 분다. 그러나 내부는 연합은 할 수 없어서 된 것이고, 본래 그들은 등파성(等派性)이 강한 작은 집단을 만들어서 연합의 앞에 뿌리려 했지만 현실이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을 알고 일시 결합하여 과도적 현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길 현재 계단적 연합 즉 저층차(底層次)적 연합이라고 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연합을 그들은 거치장스러워 하고 그들의 신학 창조를 뜻대로 하였다. 그들은 진퇴양난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아무런 제약 없는 독자적 천하이다.
삼십년 경험으로 볼 때 이런 각종 기독교 성도들을 모두 포함해 광범위한 연합은 신학사상의 창조성과 교회의 개척성을 제한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주 기타 신도들의 감정을 건드릴까봐 걱정하고 취약한 연합을 파괴 할까봐 조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가 진퇴양난에 빠진 것을 말하는데. --아무런 구속 없는 선택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 아닌가?
기독협회가 생긴 이후 표면상은 모두가 좋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이 협력의 글자가 꼴 보기 싫어 일찍부터 없애려 하였다. 다만 잠시 조용하기 위해 지도자는 말하기를 "중국의 기독교 협회는 저 협(協)자를 잠시 보류해 두어야 할 것 같아 보인다" 이말 중 협(協)자를 취소하는데 당연히 시간이 문제이고 어쩔 수 없이 잠시 기다린다.
교회에서 아직 복음신앙을 들을 수 있는 것을 보아 앞에서 말한 신파신학 관점이 아직 전반적으로 모든 층에까지 미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삼자의 상층은 광대한 복음파 성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심각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그들은 매우 조심하여 급히 서두루지 않고 접어두어 드러내지 않는다. 일단 터져 버리면 취약한 아래층과의 연합이 와해되어 그들이 중국 기독교 천하를 통일하려는 중간다리가 끊어져 버리기에 낭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광훈은 그들의 신학자들에게 잠시 말을 적게 하고 서두르지 말아 성도들의 종교 감정을 돌봐야 한다고 자주 말한다. 그러다가 적당한 시기가 오면 성도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완전히 약해서가 아니라 '역량의 원천을 숨긴'이라 하고 잠시 참는 것으로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보면 "합일을 위하여 신학자들은 필수적으로 자신을 억제해야 하며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평신도 앞에서 너무 앞서 주장을 내놓지 말아야한다. 하나의 중국교회를 위하여 신학을 집필했다면 반드시 평신도의 신앙과 감정을 고려해야한다. 그러나 그들이 도전할 수 없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신학지24-25기, p.43)
중국기독교연합회(CCC)는 매우 약하기에 교회의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바삐 새로운 사상을 내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속박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약함이 표출되지만 다른이들을 너그럽게 하고 교회의 현실을 존중해 역량의 근원을 숨겨야 한다.(신학지24-25기, p.44) 넓게 보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있다. 우리들이 신학적 사고를 할 때 어떤 문제는 강의를 못하게 하거나 적게 말하게 한다. --단결을 위하여 우리의 신학 사유와 표현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일정 한도로 제한을 받는다. 이리하여 돌보는 것이 많아지게 끔 되고 새로운 창조가 부족한 형세가 된다. -- 단결을 공고히 하려면 신학의 새로운 것이 적어져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처럼 현재의 광경을 참아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신학지18기, p.23-24)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신파신학의 새로운 창조를 잊지 않고 있음을 매우 중시한다. 그것은 어느 날 아침 중국기독교 성지를 정복하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신학자들이 잠시 쉬는 동안에 삼자회는 자기들의 계승자를 배양해 낸다. 그들의 희망은 후 세대를 위탁하려고, 신학원을 계승자를 배양하는 실험 밭으로 만들었다.
계승자에게 말하기를 "신학생은 사상상 낡은 사상은 비교적 적고, 그들은 신 사회에서 성장해 쉽게 새 사물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신학원내의 큰 강에서 자전을 심는다.(여기서 자전은 신파신학)(신학지3기, p.12) 삼자회는 후계자 양성을 하는 동시에 또 다방면과 다양한 계략으로 복음파의 신앙을 바꾸려한다. 금릉신학원의 진택민 부원장은 절대다수의 복음파의 중국성도는 극랍부특(克拉夫特)의 책을 추천하여 그들의 사상을 넓혀주고 배타주의 사상을 고쳐 주고 싶다.(신학지17기, p.13).
그들의 책략을 종합해보면 길은 몇 갈래로 나누어 동시에 병행하려한다. 연합을 과도형식으로 하고 소리 높여 모두를 받아들이고 다수로 소수를 부르고, 일시적 종교 인사들의 감정을 안정시키고, 복음파 목사들 앞에서 잠시 승부하는 것을 참고 먼저 삼자회 내부의 안정과 표면적 단결을 취하여 해외 기독교의 국제 승인을 얻는다. 이와 동시에 신파신학을 새로이 창조함을 가속화한다. 적극적으로 후계자를 배출하고, 동시에 연합도중 시기가 생기지 않도록 복음파의 신앙에 대하여 트집을 잡는다.
그들은 생각하기에 일단 시기가 성숙되어 실험 밭의 새싹들이 중국의 기독교의 큰 밭에 이식하기에 충분하면 중국교회는 자연스럽게 모두가 신파신학이 된다. 그때가 되면 각 종파를 장기적으로 세뇌 동화하는데, 방향은 그들의 사상관점에 적응하게 하여 순조롭게 변화하여 신파의 방향을 따르며 같이 일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기독교협회의 협(協)자도 실제상 취소된다. 이렇게 되면 삼자회가 중국기독교 통일의 한 집으로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50년대에 들고 나온 깃발이 중국기독교삼자혁신위원회라는 것을 잊지 말라. 그때 어떤 사람이 제안하길 혁신이라는 두자가 눈에 가시처럼 보여--복음신앙을 고쳐 없애는 것으로 보인다 하여 혁신이라는 말을 애국이라고 고쳤다. 비록 애국이라는 말에 반발은 하지 못하지만 눈이 있는 사람은 어떤 깃발을 사용하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성경의 기본신앙을 바꾸지 않으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삼자회가 정말 하나님의 교회라면 우리는 그들이 중국의 교회를 통일하기를 희망한다. 반갑게 참가할 것이다. 이렇듯 종파가 없는 교회를 건립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학의 대방향은 교회를 대연합으로 이끌어 가 간음을 행하는 교회를 건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과 선을 분명히 한다. 그가 행하는 길에서 우리의 발자취를 남길 수 없다. 시편 1편 3자의 부(不)로 착실하게 옮겨야한다. 不從, 不站, 不坐, 때문에 꼭 지적할 것은 우리와 삼자회는 파벌의 쟁탈이나 종파의 쟁탈이 아니다.
삼자회의 인식에 대하여 우리는 반드시 그들의 신학을 알아야 삼자의 본질과 해악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원한이나 개인이 포착한 표면적 현상이나 치우친 감정으로 삼자회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나와 삼자회는 개인적 원한이 없다. 삼자회가 나를 해치지 않았다. 내가 삼회회에 있을 때 배불리 먹지 못하여서 나왔다. 현재 그들의 쏟아져 나오는 문서들에서 잘못된 것들을 보았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 방향이 성경의 교리와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나는 그들과의 선을 분명히 하게되었다. 내가 만약 계속 삼자회에 있다면 신앙에 간음을 하는 거짓 교회를 도와 세우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특히 마음 착한 해외성도들은 삼자회의 진정한 성도와 복음파 목사만 보며, 삼자의 원칙적인 잘못을 일반적인 결점으로만 보고 있다. 그래서 천천히 고쳐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은 아래와 같은 맹점이 있다.
1) 그들은 삼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머리가 그리스도가 아닌 신체를 건립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건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허무는 것이다.
2) 그들은 삼자회의 신파 신학의 방향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방향이 교회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신파의 신학은 반드시 신파신학 방향의 교회를 세운다. 세계기독교연맹이 신파신학의 삼자를 지지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해외 복음파의 일부 사람들도 그들과 연합하여 현대파가 지도하는 가짜교회를 공동으로 건립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심사숙고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들 신파신학의 지도층은 보지 않고 일부 목사만을 본다. 이 과도시기에 기독교 신앙을 설교하는 것을 보고 삼자가 하나님의 교회라 보고 당연시하며 지지하고 있다. 신파가 삼자의 중요 신학사상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결국 신파신학의 교회를 설립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이런 중요한 신학 입장과 교회의 가는 길의 문제에서 우리는 반드시 멀리 바라보면서 양쪽이 다 좋은 그런 파는 될 수 없다. 신앙은 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은 신앙, 진리는 진리이다. 50년대의 신앙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이겼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이 존재하는 한 신앙의 후배가 있을 것이다. 사심 없이 경건히 성경을 읽게 되면은 복음신앙을 사람이 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진리전쟁의 승리의 북소리는 다시 울리게 될 것이다.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7. 결말
성도라면 반드시 교회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중생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 집의 식구이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태어나면 집에 속하게 되고, 집은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그의 일생의 행위가 이 집을 세우는데 작용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나도 원래는 그러했다. 우리는 하나님 손에 있는 살아 있는 돌이다, 하나님의 영적 궁전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를 통하여 나타난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이 몸에서 점차로 자라나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지어져 간다. 최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교회가 우리와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교회를 건립하면 교회의 나아갈 길을 접하게 되며 교회의 세움을 말하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는 교회를 건설할 것인가가 대두된다. 게다가 열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열심을 증거하였으나 참 지식이 없었기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평신도로 교회의 지도자나 교회 발전을 장악한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는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길을 걸으며 객관적으로 볼 때 교회의 건설에 헌신한다. 무지는 쉽게 다른 사람을 뒤따른다. 맞으면 요행이고 틀리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 때문에 바보 같아서는 안 된다. 특히 지도자는 성경의 신학사상과 부합하여야한다. 그것은 신학의 방향이 교회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은 황량하다. 자신은 지붕이 있는 집에 있다고 안심할 수 있는가? 건강한 성도는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 혼란한 처지를 개인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의 말로서, 특히 교회의 나아갈 길의 원칙을 삼아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교회 입장에 굳건히 서야한다. 만약 거짓 교회가 앞길을 막아서면 개인의 힘으로 시대의 파도를 구 할 수 있겠는가? 확실히 힘들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조심스레 명석하게 운용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신임이요 최고의 영광과 존엄이요 사람에 대한 제일 정확한 시험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경에 기록되어 후대에 경고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 안에서 경험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북쪽의 여로보암왕은 두 마리의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숭배하게 하였다. 이것은 여로보암이 한일이다.
무엇 때문에 성경에서 "이것이 이스라엘을 죄중에 빠지게 하였다"고 말하는가?(왕상12;30) 그는 왕이다. 백성이 어이 권력자의 말을 듣지 않겠는가? 백성은 어찌해야 하는가? 이 동일한 시대 배경 하에 심지가 굳은 레위인과 여호화를 찾는 이스라엘 백성은 왕이 여호와의 도를 벗어나자 자신들의 산업을 버리고 단호히 남하하였다.
여호와의 규정대로 예루살렘에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금송아지를 섬기지 않았다.(대하 11;13-16) 이 한 무리의 레위인과 백성이 여로보암의 죄에 속하지 않았다. 분명하게 남아 있는 자들은 여로보암이 여호와를 떠난 죄 속으로 같이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어째서 레위인과 여호와를 추구하는 백성이 남하하여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가?
마음 편히 북쪽에 남아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에게 기도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평민을 받아들이는가, 레위인은 그들의 제사장이 아니란 말인가? 당연하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무식한 사람들이다. 여호와를 율법에서 어떻게 제사하고 또 율법의 규정이 어떠한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상시에 추구하지 않았기에 정확히 알지 못하여 판단을 흐리고 방향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많은 사람들은 율례와 규범 그리고 율법을 알았지만 왕과의 대항이 무서워 득실을 고려하기 때문이며, 양심을 속여 변명하기를 "여호와여 금송아지는 여로보암이 만든것이며 표면상으로는 숭배하는 척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신이시며, 구하나니 책하지 마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옵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는 힘없는 작은 백성인데 우리에게 왕의 명령에 따르며 권력에 복종하라 하셨다. 군왕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었으니 여로보암의 말에 복종함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경배하겠습니까? 없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나의 마음은 그래도 성실한 것인데. 금송아지도 좋고 벧엘도 좋고 레위인도 아닌 것도 모두 외면적 일이다. 예절을 따질 필요가 없다. 심령과 성실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두는 스스로 안위하고 양심의 가책을 벗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은 원칙이다. 조금도 융통 협상의 여지가 없다.
성경의 다른 곳에는 계시록 2장에서 두아두라 교회를 말했다. 자칭 여선지 요시벨이 나와 사단의 심오한 도리로 하나님의 종을 가르치고 신앙에서 간음의 죄를 범하게 하고, 이교도 우상숭배자와 음행을 행했다 이런 음란의 도가 교회에 주류가 될 때 요시벨의 교훈을 듣지 않는 무리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시대의 승리자로 불러주셨다(계2;18-26) 계 2,3장 일곱교회중 라오디아교회는 유일하게 칭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실패의 라오디아 시대에도 승리자가 있었다(계3;21) 이 사실은 오늘날 모든 충심으로 주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안위와 고무가 된다.
여로보암은 다시 존재하지 않으나 여로보암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대로 고치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요시벨은 오늘날 볼 수 없으나 하나님의 종을 유인하고 신앙에서 간음을 행하고 주님의 도를 혼란시키는 죄는 역사 중에서 여러 번 나타났다.
오늘날 종교 대연합의 소리는 시대의 새소식처럼 들리고 솟아 보이고, 조류에 휩쓸리게 하는 힘이 있다. 바짝 따르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파도에 휩쓸려 매몰되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되며, 보수로 보이고, 완고하며 극단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오늘 삼자회는 종교대연합의 신학을 공개적으로 내어놓았다.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선택에 대한 책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져야 한다.
'† CHINA > 중국교회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교회의 최초의 중국선교 (0) | 2007.09.01 |
---|---|
조선족교회의 현황과 가능성 (0) | 2007.09.01 |
중국교회의 실상과 선교방향~ (0) | 2007.08.31 |
중국 동북의 가정교회 (0) | 2007.08.31 |
중국 가정교회의 형성과 발전 (0) | 2007.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