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 2005.04.11, 15:15
한국 교회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해외 선교를 처음 시작한 곳은 중국 산둥성 내양현이었다. 1912년 한국 장로교회는 이곳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 11월 한국인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세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들이 보낸 보고서에는 산둥 선교의 시작이 재미있게 설명돼 있다. 내양지역의 수준은 매우 낮았다. 대부분 주민들은 구식교육을 받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현의 지사가 이들을 방문하였다. 이것은 지역주민들에게 기독교의 위치를 새롭게 인식시켜 주었다. 얼마 후 현 지사는 한국에서 온 선교사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어주겠다는 초청장을 보내왔다. 이것은 큰 영광이기도 했지만 걱정이기도 했다. 귀한 잔치에는 거기에 걸맞은 답례를 해야 하는데 선교사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논한 끝에 초청에 대한 답례로 한시를 써서 보내기로 했다.
선교사 중 김영훈 목사는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서 매우 유려한 한문으로 시를 지어 현 지사에게 보냈다. 시의 결론은 현 지사가 기독교인이 될 것을 간절하게 권고하고 신자가 되면 선한 통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현 지사에게 보낸 한시는 묘하게도 내양현에서 가장 유식한 한학자인 장수명에게 보이게 되었다. 장수명은 한국인 선교사의 한시에 흥미를 느끼고 선교사들을 방문하였다. 서로 언어는 달랐지만 문자가 같아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장수명은 자신의 학식을 바탕으로 선교사들의 논리를 반박하였다. 그러나 오랜 토론 끝에 장수명은 굴복하였다. 성서가 구원의 책이라는 것과 예수가 구세주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당시 70세가 넘었던 노학자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 그는 한국 선교사들로부터 신앙을 전해 받은 첫 개종자가 되었다.
당시 내양지방 학자들 가운데 40세 이상은 모두 장수명의 제자들이었다. 그의 개종은 산둥 선교의 큰 기초가 되었다. 얼마가지 않아 선교사들은 많은 개종자들을 얻게 되었고 예배당 건축을 위한 헌금도 마련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산둥 선교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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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글: 한국선교운동사/중국 산동성 선교
중국 산동성 선교
-방효원·방지일과 초기 선교사역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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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최대의 선교지 중국
2. 산동성 선교 약사(略史)
3. 방효원, 방지일목사의 산동성 선교
4. 산동성 선교와 선교 전략적 교훈
5. 중국 선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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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최대의 선교지 중국
중국은 세계 최대의 선교지이다. 세계 인구의 25%가 중국인(화교포함)이며, 1949년 공산 정권 이후 50여 년 동안 기독교인의 수가 오히려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추측과는 달리 공산 정권 수립 당시 80만 명이던 개신교 신자가 지금은 5천만에서 1억까지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은 세계 최대의 선교지일 수밖에 없다.
인구도 인구려니와 거대한 용 으로 자처하는 중국 대륙은 한반도와 이어져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상고시대로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이다. 특히 한국 교회의 선교 역사 가운데에서도 중국의 역할을 배제할 수 없다. 확실한 사료가 나타나기까지는 그 개연성만 추측할 수 있을 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신라 삼국 통일의 시기(주후 668년)에 당나라에 전래된 경교가 한국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원나라에 전파된 카톨릭이 한국을 스쳐갔을 것이라는 흔적 등을 미루어 보아 기독교 전래 역시 중국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귀츨라프(Karl F. A. Gutzlaff)나 런던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으로 왔다가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목사 등도 모두 중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압록강까지 다가온 로쓰(John Ross)와 그의 매부인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등도 모두 만주 우장을 중심으로 활동한 중국에 온 선교사들이다. 로쓰는 후에 한국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의 알렌(H. Allen) 역시 중국 상해와 남경을 거쳐 1884년 9월 20일 인천 제물포로 입국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이 세계 최대의 선교지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렇다고 함부로 덤빌 수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지난 19일 한국을 방문한 중국기독교교회협의회(CCC) 팅(K.H. Ting)주교는 지금 아무런 사전 협약 없이 중국에 들어 온 외국인 선교사가 5천명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 정부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공식적으로 CCC와 선교협약을 맺자고 제의하였다. 믿어지기 어려울 정도로 쉽게 중국 선교의 문이 열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무슨 정책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따르기도 하나 중국은 분명히 더 많은 선교사가 파송되어야 할 나라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중국 선교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첫 해외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 중국 선교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중국 선교의 구체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초대 한국 교회는 중국에 선교사를 단순하게 파송만 하지는 않았다. 총회가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한 이후 치밀한 사전 준비와 계획이 있었으며, 중화 장로교회와의 관계도 중시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선교 사역을 감당한 선교사로 방효원, 방지일 부자(父子) 선교사이다. 김재오는 이들 부자의 선교 사역 40년을 산동성 선교의 모델로 보았다. 그 내용을 참고하면서 한국 교회의 산동성 선교를 통한 선교 운동을 고찰해 본다.
2. 첫 해외 선교지 산동성의 선교 약사(略史)
1912년 9월 1일, 평양의 여자 성경학원에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일찍이 1907년에 독노회가 창설되었음을 감사하는 뜻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총회가 조직되자 중국 산동성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것은 최초의 해외 선교에 대한 결의였다.
총회가 창립되고 나서 수행한 첫 번째 일은 해외선교부의 조직이었다. 독노회가 설립될 당시에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하고 나서 국외의 서간도, 만주, 동경, 시베리아, 미국, 멕시코까지 전도인을 파송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어디까지나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을 위한 것이었지 이민족(異民族)에게 선교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해외 선교는 아니었다. 그러나 외국 민족에게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곧 우리 교회의 존재 확인으로 국가가 없어지고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과 같이 취급받던 시대에 한국의 정체성(Identity)을 갖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특히 이 일은 독노회의 전도국장을 5년간 역임한 길선주목사의 적극적인 노력과 선교사들 및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찬성으로 결의된 것으로 그 첫선교사는 재령교회 박태로목사가 임명받았다. 이에 박태로목사는 1913년 5월 5일 안주교회 김찬성목사와 선교지 선정을 위하여 중국으로 떠났다. 산동성 지푸(Chefoo)에 도착한 이들은 중화예수교장로회 화북대회를 방문하여 내양현(奈陽縣)일대를 선교지로 허락 받았다.
그곳에는 이미 미북장로교의 선교부가 있었으나 모든 재산을 한국 선교사들에게 이관하고 철수하기로 한 것도 첫 해외 선교지에서 기록될 만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1913년 9월에 열린 제2회 총회는 해삼위 선교사 최관흘이 정교회로 개종함으로 총회에서 제명 처분을 받게 되는 안타까움이 있었으나, 중국에 선교사를 보내어 교회를 설립하여 그 곳 노회에 속하게 하다 라는 결의와 함께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추가로 임명하였다. 그 해 11월 3인의 선교사 가족들이 내양현에 도착하여 선교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박태로목사는 1916년 4월 26일 귀국하였고, 1917년 4월 김영훈, 사병순도 질병과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귀국하였으며, 1917년 5월 7일 박태로목사는 방효원목사와 함께 재파송되었으나 결국 박태로목사는 병세가 위독하여 1918년 9월 6일 세브란스에 입원 중 별세하였다. 1917년 추가로 파송된 김병규와 함께 사역한 방효원은 8월 총회에 선교 보고를 올림으로 1917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총회 기간 중 산동성 선교 보고가 있었으며, 방효원, 홍승한이 산동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918년 제7회 총회는 박상순목사를 총회 추가로 임명하였으며, 그 해 11월 박상순은 의사 김윤식과 함께 부임하였다. 선교사회가 조직된 것은 1919년이다. 방효원목사가 회장을 맡았으며 동시에 병원부지를 매입하기로 결의하였다.
선교지역이 내양과 즉목 지역으로 분리된 것은 1922년이며, 1923년에 주현칙의사가 부임하여 김윤식과 함께 의료 선교에 전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1925년 총회의 재정 곤란으로 홍승환은 귀국하였으나 1931년 의사인 안준호는 즉목에서 의료활동의 시작과 함께 맹인학교를 개설하였다. 1932년에는 여자인 김순호선교사가 파송되었으며, 방효원은 내양성경학교를 정비하여 교장에 취임하였고, 내양의 애린학교와 즉목의 애도학교가 크게 발전하는 가운데 1933년에는 내양노회를 창립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방지일선교사가 중국으로 파송된 것은 1937년이다. 그는 내양에 부임하여 청도지역까지 선교지를 확장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석권한 이후에도 박해를 받으며 선교를 계속하였으나, 1955년 추방령을 받아, 1957년 6월 홍콩을 통하여 귀국하였다.
3. 방효원, 방지일목사의 산동성 선교
1) 산동성 선교의 기초 (파종기)
산동성 선교의 역사는 장로회 총회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해외 선교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 출발이 결코 순탄하지 아니했다. 이미 래양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선교를 시작하였으나 그 성과가 미약하였다. 그 때에 한국 총회는 박태로목사를 선교사로 임명하여 파송하였고(1913년 5월), 철수하는 미국 선교부로부터 쓰던 시설을 인도 받았으며, 연이어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추가로 임명한 것이다(1913년 9월). 미북장로교로부터 시설을 물려받을 때 넘겨받은 신자들도 5-6명이 있었다. 당시는 선교사들이 아직 언어훈련을 하고 있는 단계였으나 1915년 이전 교인 수 40명에 출석 인원은 30여명이었으며, 처음으로 3명에게 세례를 베플었다.
안타까운 것은 박태로 목사의 질병이었다. 열악한 상황에서 의료 시설까지 미흡한 상태라 1916년 부득이 귀국하였다가 조금 회복되자 다시 1917년 6월 다시 래양으로 돌아갔다가 그 다음 달 귀국하여 1918년 9월 6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았다. 래양 선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된 것이다.
이미 고찰한 것처럼 김영훈, 사병순도 결국 귀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당시 산동 지방에는 성찬 예식 참여가능자가 28명이었으며, 세례지원자가 35명, 초신자가 28명이나 되는 성장을 이루었다.
결국 질병과 싸우며, 열악한 환경 가운데 선교로 몸부림치다 순교(직)하거나 귀국하고 말았으나 산동성 선교의 토대를 든든히 쌓은 인물은 역시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이다.
2) 방효원 선교사와 그의 선교 사역(성장기)
1917년 박태로 목사의 재파송과 함께 다섯 살된 아들(방지일)을 부친(방만준 영수)에게 맡겨두고 래양으로 파송된 방효원은 파송 후 3년간 어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4월도 못되어 의사소통은 물론 중국어로 설교까지 할 정도가 되었으며, 그가 살고 있는 내양의 남부 외곽 낭우만(南關)은 선교 본부가 되었다.
홍승한선교사와 통역을 맡은 김병규 외에도 박상순, 의사 김윤식, 그리고 이대영선교사와 의사 주현칙 등으로 래양에서 즉목으로 선교 지역이 확장되면서 놀라울 정도로 성장해 나갔다. 1919년 11월 산동과 지나의 장로교회는 한국 선교단에게 내양현 전체를 맡기게 되었으며, 1918년에서 1936년 사이에 단일교회가 21개, 세례교인이 1,088명(32명에서)으로 늘어나게 되어 산동노회로부터 독립 장로교 관할구를 조직하는 허가까지 받게 되었다. 한국인 선교사들과 그들을 보살피는 교회는 지나동 교구와 산동 교구였으나 새로운 독립구를 조직하게 된 공로는 산동선교회가 개척하였거나 부흥시킨 교회들이다.
방효원은 산동 선교회의 종교 교육을 한국에서 일반화된 몇 가지를 채택하였다.
산동 선교회에 속한 모든 교회는 학교를 개설하였으며, 여자 성경 공부반을 두었다.
봉헌 순서가 주일 예배에 도입되고, 개인 전도가 강조되었다.
산동 성경 학원을 개설하였으며, 지모에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하여 세 선교사가 세 지역을 분할하여 담당하였다.
즉목 북부지구와 래양의 남동부는 방효원 목사가, 동부 지구 즉, 즉목의 동부는 이대영 목사가, 서부 지구인 래양의 남서부는 박상순 목사가 나누어 맡았다. 산동 선교의 최전성기였다.
방효원 목사는 19년간의 산동 선교를 마치고 1936년 상해를 거쳐 귀국하였는 데, 그는 상해에서 1935년부터 망명 애국자들의 본거지였던 상해 한인교회를 담임목사로 애국 인사들의 우국 지도자로 나라 사랑을 실천하였다.
후에 그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반일 사상 등으로 2년 구형 후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수감생활로 인한 병으로 귀국한 후에는 선천 남교회, 토하교회, 평남 대동군 등에서 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53년 1월 1일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중 68년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수난기의 산 증인 방지일 선교사
방효원 목사의 장남으로 1911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다.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시무한 그는 1933년 평양 숭실학교 영문과, 1937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목사로 안수를 받아 같은 해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방지일목사의 산동성 선교는 도착과 함께 고난이 시작된다. 중일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며(1937년), 연이어 공산당이 또 중국을 장악하였기 때문이다(1945년). 일제에 의하여는 독립 운동가로 낙인이 찍혀 추방 명령을 받게 됨으로 선교 활동이 어려웠고,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반공주의자로 지목되어 추방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산동 선교의 활동 중 산동대회의 외인 총무와 청도 한국인 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가장 많은 신자의 수를 기록한 때는 1939년에서 1942년 사이이다. 이미 몇몇 교회가 폐쇄를 당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대영목사와 함께 래양, 즉목, 청도 등 3개 선교국의 전적인 책임을 맡아 선교한 결과 1940년에는 110명의 수세자가 있었고, 1942년에는 총 1,742명의 세례 신자가 생겼다.
방지일 목사의 선교 활동은 래양 지역은 주로 순회 목회로 진행되었고, 청도 지역에는 교회 개척으로 시작되었다. 첫 예배는 거리에서 시작되었으나 곧 자립 교회로 성장하였다. 30여명에 이르는 교회들이 청도 내의 여러 지역에서 속속히 생겨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성장에는 방지일 나름대로의 독특한 선교 방안이 있었다.
교회는 설립 시부터 조직화되어야 한다. 그래도 몇이라도 모이면 예배 처소가 좁건 넓건 비록 야외요 뜰이라도 비로 쓸기를 해야 한다. 정리할 일이 있다. 그 중에 좀 할 수 있는 이에게 맡긴다. 처음부터 할 줄 알건 모르건 예배가 시작되면 예배 순서에 봉헌 순서가 있게 된다. 봉헌된 헌금은 누가 맡아야 한다. 목사 자신이 관리하는 것보다 그 수치를 계산함이라 이를 할 만한 이에게 위임하여 맡긴다.
그 외에도 그는 선교는 가르치는 선교, 주고받는 선교, 알려고 하는 선교, 그리고 일의 성과가 있는 선교여야 함을 강조한다.
방지일은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 낸 이후에도, 그리고 선교국의 본국 송환령으로 동역자 이대영목사도 떠났으나(1948년) 10년을 더 버티며 선교하였다. 더욱 그의 선교적인 목회의 절정은 1949년 이후 공산당이 더욱 호전적이 되어 그를 체포함에도 불구하고 청도에 시아오주엔충 교회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가 귀국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단순한 종교적인 핍박이나 추방령 때문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그를 미국과 일본의 이중 스파이로 고소하여 그를 북한에 추방하려는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지일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1957년까지 선교지를 지키다가 홍콩을 통하여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도 그의 선교 사역은 멈추지 않았다.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 1979년 은퇴하기까지 경기노회장, 총회장, 기독공보 사장, 총회 재단 이사 등을 역임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저서들의 출판을 통하여 목회와 교육과 선교 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방지일은 그의 선교와 동일한 방법으로 1957년부터 지금까지 42년 동안 월요 성경공부 를 지도하고 있는 데, 이 공부를 통하여 목회자만 2천 여명이나 배출되었다는 사실을「기독공보」는 전하고 있다.
4. 산동성 선교와 선교 전략적 교훈
초기 한국 교회의 산동성 선교는 한국 교회의 위치와 방향 설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내적으로는 선교하는 교회상을 정립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국가가 없어지고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과 같이 취급받던 당시에 외국 민족에게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한국교회의 존재를 확인하는 최선의 방법 이 되었다.
더구나 모든 제도와 문물을 중국으로부터 전수 받았고, 배우기만 했던 한민족이 대국으로 섬겨만 왔던 중국 사람들을 복음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은 김재오의 한국 장로교회가 경험한 교회의 산동성 선교에 대한 요약이다.
첫째, 산동 선교는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이다.
둘째, 산동 선교는 동양인에 의해 동양인이 복음화된 선교 운동의 새 출발이다.
셋째, 산동 선교는 정신, 결과, 기구, 선교사의 질, 선교 전략, 방법, 동역자의 관계 등에서 가장 성공적인 타문화권 선교였다.
넷째, 산동 선교는 복음, 의료 서비스, 교육 목회를 포함하여 포괄적인 사역이었다.
다섯째, 산동 선교는 선교국의 통할을 받는 단일 구조가 선교에 효괴적임을 입증하였다.
평가하는 입장과 방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산동성 선교는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오늘날의 선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선교 기록을 통하여 살펴볼 때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중요한 전략적인 교훈이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선교 현지 중심의 선교 전략이다.
당시의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의 선교지 배당을 철저히 현지 교회의 지시와 허락에 의존하였다. 박태로 목사가 안주교회의 김찬성 목사와 함께 선교지 선정을 위하여 산동성 지푸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그 때는 중화예수교 장로회 화북대회 기간 중이었다. 내양현 일대의 선교지 허락은 이 대회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이후 산동 지역의 오현지역으로 선교 구역이 확대되어 내양노회가 창립되고, 산동대회 산하 16개 노회 중 하나로 가입되는 절차도 철저히 현지 교회 조직에 따라 순응한 것이다. 방지일은 일제시대 때에도 그의 신분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현지 교회 중심의 소속이 분명하였기 때문임을 회고한다.
내 개인의 국적은 일본이라 여기와서 마루를 닦으라고 한다면 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는 올 때 중화 기독교회 목사직으로 왔기 때문에 우리 신분은 엄염히 중국 목사요, 그러므로 목사직이나 우리교회는 중국 교회인고로 일인이 어떻게 못함을 분명히 아시오, 성직은 당신이 손대지 못하오.
파송 당시 총회가 파견함과 동시에 중국교회로 이명시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나 인도나 홍콩에 서울 OO교회, 부산 XX교회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둘째, 지속적인 선교사 파송 전략이다.
산동성 선교는 여러 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아니하였다. 지속적으로 2기, 3기, 4기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파송하였다. 그래서 중국 선교 사상 최대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버지 방효원과 그 장남 방지일이 같은 선교지에서 선교 활동하게 됨으로 부자(父子)가 그 사역을 계승하여(1936년과 1937년) 헌신함으로 총회적인 차원 뿐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선교의 귀감이 되는 귀한 모델을 제시해 주었다.
셋째, 파송국의 성공한 선교 전략의 선교 현지 적용이다.
한국 교회의 성장은 네비우스 선교 전략 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이미 살펴 본 바 있다. 산동지역은 네비우스가 선교하던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네비우스가 그의 선교 방법을 적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평가된 지역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파송된 산동성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원리에 의하여 훈련받은 선교사이다. 성공적인 선교지에서 자란 선교사들이 산동성으로 파송되어 네비우스 원리에 의한 선교 사역을 하게 된 것이다. 순회 전도는 물론, 성경 중심의 신앙과 교육 선교, 특히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다 하였다. 공산주의의 탄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신앙과 교회를 지켜 온 성도들의 서신을 최근 방지일은 그의 책, 『임마누엘』을 통하여 공개하기도 하였다. 선교의 경험과 훈련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교사의 개인적인 자질과 선교적 열의이다. 산동성 선교의 한 알의 밀알이 된 박태로 목사로부터 방효원, 방지일로 이어지는 선교사들의 구원에 대한 열정과 그들의 건전한 선교 정신과 훌륭한 개인적인 인품이 한국 초기 선교의 훌륭한 경험을 산출시켰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중국 선교를 위하여
중국의 종교 정책이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선교 정책적인 면에서도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부 관료들과 삼자 애국운동 위원회의 고위 목회자들이 인정하는 종교 조직 외에는 어떤 단체도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 가정교회와 삼자교회의 불화는 어제나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실제적으로 더 큰 문제를 일으키며 더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게 된 것은 최근에 입국한 서구 위주, 물질 위주, 업적 위주의 선교사들에 의한 피해와 상처라는 것이다.
특히 가정교회가 입은 상처는 과거 공산당에 의하여 입은 상처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입고 있다는 하소연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앞서 소개한 것처럼 삼자 교회의 지도자인 팅주교의 제안이나 그들이 말하는 선교 협약에 대해서도 침묵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인 것이다.
비록 그것이 정치적인 제안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중국 선교의 문을 여는 길이라면 구태여 외면할 수도 없거니와 지하교회의 실정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시된 중국 선교의 방법 중 가장 이상적인 방안은 현재 중국 내부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 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국의 정치적·법적 상황으로는 결코 쉽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으로 제시되는 방법이 외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을 통한 복음화의 방법 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기 조국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 상황일 뿐 아니라 대만 정부와의 미묘한 관계가 차츰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기적으로 관망하는 자세이며, 우리가 선교적인 입장에서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제3국인 한국이나 미국, 서방 교회들이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 이다.
방송을 통한 선교나 조선 자치령 이 시행되는 지방에 병원, 학교, 회사를 설립하는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으나, 김인수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의 경험을 통한 선교 전략에 충실할 수 있는 방법이 고려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초기 한국 교회가 최초의 해외 선교로서 중국 선교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산동성 선교의 경험은 중국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훈들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먼저 중국 현지 중심으로 선교 정책을 수립하여야 한다.
바울의 선교 전략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 (All things to all men)이 되엇던 것처럼, 우리의 방법을 고집하거나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으로 성령이 네게 임하면 이 아닌 물질이 네게 임하면 , 달러가 네게 임하면 권능을 받고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황금 어장이라고 해서 어장을 내 방식으로 마구 휘젓는 선교 방식은 피해야 한다.
지속적인 선교가 필요하다.
단기적인 방안이 아니라 장기적인 선교 정책이 필요하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중국의 상황에서 선교사 자신의 업적 위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조선족을 영적으로 훈련시킬 필요가 있으며, 서둘지 않는 방법이라면 지하교회 교인이건 삼자교회 교인이건 지속적인 방법으로 성경적인 신앙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 기업 진출이나 학원 설립, 지도자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들은 당장의 성과나 업적은 나타나지 않으나 내일을 기약할 수 잇는 중요한 방법이 된다. 안타까운 것은 조선족이나 중국인에게 대한 노동력 착취나 사기 행위 등은 앞으로의 선교에 있어서 엄청나게 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한 선교 전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나 지도자들 특히 선교를 위한 인력에 대한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결코 선교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중국선교이다. 한국 선교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한국 교회의 장점이다. 결국 중국 선교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서 한국적인 신앙 훈련에 철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새벽기도 훈련, 철야 예배와 소그룹 성경공부, 전도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등이 그이다. 국내에서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해외에서 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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