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증언]

나의 북한 생활



 

다음 글은 서울 통일교육원에서 열린 본회 주최 제4회 탈북동포돕기
대학(원)생 자원봉사자 수련회에서 행한 강의 녹취록이다.



 

임 홍 근 (북한이탈주민)


제 나이는 마흔세살 1960년 생입니다. 제가 북한을 탈북한 때는 97년도 5월이고 한국에 귀순한 날짜는 2000년 1월 27일입니다. 제가 탈북한 동기는 먹거리를 찾아서 넘어오다보니까 중국으로 왔고 중국으로 와서는 다시 한국을 바라보게 되는게 일반적으로 우리의 심리입니다. 거기에 더불어서 나도 무조건 한국에 가야된다, 내가 중국땅에서 견디어 내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한국땅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정치적 운동이나 목적 이런 것은 크게 안중에도 없고 하도 살아가기가 힘들어 오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물론 오기까지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우선 북한을 탈북하게 된 배경과 저의 경력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1960년에 태어나 76년도에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17살에 군복무를 시작했습니다. 86년도까지 10년 동안 군복무를 하고 86년부터 87년도까지 평양영화연극대학 창작과를 1년 동안 수료하고 87년도 9월부터 함경도에 있는 은덕석탄대학이라는 곳에 다니고 거기서 5년 후에 졸업을 했습니다. 북한의 주원료는 현재까지 석탄입니다. 한국 쪽을 보면 원유나 에너지를 다른데서 많이 얻지만 북한은 화력발전소를 돌려서 전기를 생산한다고 봐야합니다. 수력발전이란 것은 하늘의 탓으로 믿기 때문에 크게 전기를 얻어낼 가망이 없는 것이라 생각해 북한에는 화력발전소가 상당히 많습니다. 큰 것만 해도 다섯 개정도 됩니다. 북한에는 탄광들이 각 곳에 널려 있는데 기본 탄광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은 함경도지역, 양강도, 자강도지역 이쪽에 탄광들이 많이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평안도 지역하고. 여기에서 얻어낸 석탄으로 화력발전소들이 석탄을 대다 보니까 북한은 석탄대학교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여기서는 들어볼 수 없는 말인데 거기서 석탄대학교를 나왔다는 것은 일할 때는 월급도 많고 전망도 좋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석탄대학을 5년 동안 다니고 그 다음에는 3대혁명소조를 91년부터 시작해서 94년도까지 3년 동안 나갔습니다. 소조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 말하면 특별검사제 도입이라고 할까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김정일이 암행어사라 하면서 군복무를 10년하고 제대된 대학생으로 3대혁명소조라는 것을 조직해서 각 큰 회사들이나 시군구청들에 내려보냅니다. 북한의 제일 윗기관이 노동당이라는 당기관인 것만큼 이것을 감시하고 비리 같은 것을 통보받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목적은 지역주의, 지방주의 같은 것을 막자는 목적으로 3대혁명소조를 도입했습니다. 3년 동안 동원됐는데 제가 맡은 곳은 안주탄광연합입니다. 북한에서 안주탄광연합이라고 하면 한국쪽으로 말하면 삼성이나 엘지 같은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큰 회사입니다.

북한의 정치라는 것은 감시를 하고 서로 자기네끼리 물고 뜯기를 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형식적으로는 좋습니다. 생활총화요, 분기당생활총화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많이 통제를 하지만, 소조라는 것을 통해서 밑의 부정비리를 들춰내서 자료를 잡습니다. 비리를 들춰낸다하면 북한체제에 맞게 우선 발언이나, 충성심이나, 김일성 동상을 정성으로 청소하는가, 여기의 교회만큼 상당히 많은 사상연구실을 잘 관리하느냐를 중점적으로 놓고 그 뒤에 물자취급이라던지 남녀관계라던지 사회적으로 해가 된다는 것을 들춰내서 위에 보고하면 위에서 때리는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소조입니다. 소조를 제가 3년 동안 나갔다가 정식으로 일자리를 배치받은 것이 함경남도 금여군에 있는 금여탄광입니다. 제가 이 건설직장 부직장장으로 배치받았습니다. 제가 그 곳에 배치받아서 탈북하기 2년 전까지 부직장장으로 생활했는데 종업원이 한 500명 정도 됩니다. 그 사람들을 다 버리고 결국은 혼자 도망쳤습니다.

94년부터 식량난이 시작되어 95년도부터 물건을 팔아먹기 시작하고 집안에 제가 소조를 다녀오면서, 북한에서 양복이라고 생각하면 상당히 좋은 물건으로 생각합니다. 여기 TV라던가 이런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거 7벌 정도 있었던 것, 받아온 것을 다 바꾸어 먹었습니다.

북한에 식량난이 들어서 횡재한 놈들이 누구냐 하면 기본군부대의 가족들과 권력층입니다. 국가정보원이라던가 경찰가족들이나 권력층 가족들이 이 통을 통해서 북한돈을 많이 거머쥐고 집을 큰 것을 차지하고 옛날 골동품, 유물 등을 많이 장식하고 북한의 일상 생활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식량으로 휘둘렀습니다. TV 한대는 북한에서 금값입니다. 노동자가 4~5년 동안 월급을 쓰지 않고 모아야 TV를 한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불과 강냉이 열사발 정도에 바꾸고 재봉기도 강냉이 세자루 정도에 바꾸고 첫날 이불 같은 것도 나중에 다 바꾸어 먹었습니다. 우리가 여섯 대식구인데 이것을 벌어 먹이는데 헐하지 않았습니다. 95년도부터 배급소에 배급준다는 것이 3개월에 한번씩이었습니다. 하루에 강냉이 가루 3킬로 정도를 배급소에서 나누어줬는데 그것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팔아먹고, 바꾸어 먹고 나니 더이상 바꾸어 먹을 것도 없고 96년도 6월부터 정말 힘들었습니다.

97년도 1월달에 우리 장인이 사망하시고 3월달에 장모님이 사망하셨습니다. 상가를 치르고 나니 견딜힘이 없어 아내보고 이대로 우리가 살 수 없다 뛰어야겠다 하고 거듭 토로를 했습니다. 토로를 했지만 아내는 승인을 안하고 어떻게 중국땅으로 뛰려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함경도 은덕군에 계시기 때문에 중국땅이란 곳은 그렇게 먼 곳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가족 내력을 보면 북한에서 보면 종파가족입니다. 우리 아버님이 평양시 평촌부 안전부장을 몇년 하셨습니다. 북한사회안전부 군관학교 1기 졸업생들이 그때 당시 사회안전부 부장이요, 부부장을 다 차지하고 있었는데, 김일성 비위에 거슬리는 그룹을 형성해서 가담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은덕군으로 쫓겨가서 거기서 살았습니다. 중학교 시절을 거기에서 보냈고 또 대학기간이나 소조기간을 계속 집에서 왔다갔다했기 때문에 중국 정치가 어떤지 알게 되었고, 중국으로 가면 먹거리가 많다고 해서 미련을 많이 품었습니다.

북한사람들의 일반인식에서 중국에 대한 인식이 90%라면 한국에 대한 인식은 10%정도 됩니다. 왜냐하면 한국이란 곳은 군사분계선으로 가로막혀 있는 갈 수 없는 곳이고, 적대시하는국가여서 한국에 대한 미련은 별로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미련은 상당히 많습니다. 중국이라는 곳은 옆에 있는 나라고 중국주민들이 북한에 장사하러 많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북한주민들이 중국에 대해서 상당히 기대감을 많이 품고 있고 상당히 우상화하고 일반이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습니다. 논의하는 것 자체가 여기 말로 국가보안법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97년 5월 5일 밤 12시에 내가 중국땅에 가서 먼저 자리를 잡을테니 기다려달라, 기다리면 내가 데리려오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한 석달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어찌나 먹거리가 없던지, 집에서 먹거리를 가지고 떠난다는 것은 생각해 볼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목표를 잡고 떠난 것이 양강도 혜산쪽입니다. 함경남도 금령군에서 양강도쪽으로 가자면 육로로 가야합니다. 북한에서 기차표는 아예 믿을 것이 못됩니다. 기차는 이삼일씩 멈춰섰다가 다시 가고 하니까요. 왜냐하면 북한의 전력은 화력발전인데 이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군수공장에 제일 먼저 대줘야하고 나머지는 평양쪽에 대야합니다. 일반 열차까지 전기를 대줄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육로를 선택하게 됐는데 처음에 집을 떠날 때 먹거리를 해결하면서 가야하기 때문에 입던 내의 몇 조각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고원, 함흥을 들러 내의를 가지고 두부 한모 바꿔먹고 북한에서 꼬장떡이라는 강냉이떡으로 바꿔 먹고 자동차를 갈아타면서 몰래 도둑질해 타기도 하고, 감자 삶은 것 등을 내의 조각이랑 바꾸면 운전사에게 주기도 하면서 양강도 혜산 쪽에 도착했습니다. 떠날 때는 기약할 수 없는 길이긴 하지만 신심을 가졌습니다. 북한 전역을 다녀봐도 아직은 젊었고 힘이 있으니까 중국이란 곳을 들어가서 내 가족들을 데리고 올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악을 써서 중국까지 도착할 수 있겠다 하고 신심을 가지고 떠났는데 도강할 때까지는 일이 순조롭게 풀렸습니다.

국경에 가면 50미터마다 보초병이 서 있습니다. 제가 군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타산을 하고 혜산쪽에 붙어서 밤 한시부터 두시경에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헤엄쳐서 넘었는데 그때 상당히 물은 차가웠지만 워낙 긴장하니까 차가운 느낌은 없었습니다. 군생활을 했기 때문에 무기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듣고도 보초병이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구분할 수가 있었습니다. 양쪽에서 아무 반응도 없어서 무사히 헤엄쳐서 넘어왔는데 양강도 혜산과 마주하고 있는 장백현이었습니다.

제가 장백현에 넘어서자마자 세시간만에 붙잡혔습니다. 중국땅에 넘어서자마자 배가 고팠습니다. 또한 이국땅에 대한 환상을 가졌던 것이 먹거리입니다. 우선 한끼라도 배불리 먹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제가 어느 집 대문을 두드렸는데 그 집주인이 나와서 중국말로 뭐라 하면서 묻다가 대문을 쾅 닫았습니다. 그런데 그 표정을 보니 중국 한족이 아니라 조선족이었습니다. 그집 대문을 떠나 50미터 즈음 걸어가니까 그 집주인이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중국말을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00미터 즈음 벗어나니까 삼거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사방으로 중국 경찰들이 몰려와서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장백현의 중국변방대대라고 탈북자를 구류하는 곳에 이틀동안 있었습니다. 이때 제일 생각나는 것이 제발 한끼라도 제대로 먹여서 북한으로 송환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전기고문도 들이대고, 다시 넘어오겠는가 하는 다짐도 받고 서류도 쓰게 합니다. 하루밤 사이에 탈북자들이 50명 정도 붙잡혔습니다. 제가 이틀밤 있었는데 남자, 여자, 어린이, 노인 할 것 없이 다 붙잡혀왔는데 밥 한끼 주지도 않고 때렸습니다. 제가 여기에 와서 월간조선 등에 그때 상황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남자들 같은 경우는 팬티만 입히고 가죽채찍으로 때리고 여자의 경우도 똑같이 취급을 합니다. 인권이나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틀 후 혜산시 도보위부로 송환되었는데, 도보위부까지 중국 경찰들이 직접 들어 갔습니다. 인민들이 다 구경을 하고 정말 제가 그때 생각을 한 것이 ‘정말 나라 망신이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보위부라는 곳이 혜산시내를 빙빙 돌아가면 있는데 중국 경찰들이 수갑을 채운 채로 100여명을 한줄로 죽 세워서 끌고 가는데 온 혜산시민들이 다 구경했습니다. 그때 정말 눈물이 나고 나라가 망해가는 설움이랄까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도보위부에 이틀 정도 심문을 받고 다른 곳으로 호송될 때 도망쳤습니다. 북한에는 수갑도 없어서 손에다 밧줄을 꽁꽁 묶어서 100명 정도 질질 끌고 노동단련대라는 곳으로 호송되었습니다.

북한에도 부류가 있었습니다. 중국체류기간이 3개월 이상 된 것은 엄하게 보고 한 보름 이상 취조를 하고, 저처럼 중국에 넘어가자마자 며칠 안있어 붙잡힌 것은 6개월 정도 강제노동을 시킵니다. 북한에서 도보위부에서 취조할 때 제일 치중하는 것은 한국선교사들을 만났는가 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알아봅니다. 이런 것은 도보위부에서도 성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실수로 어느 교회에 가서 한국선교사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 끝장입니다. 밧줄 묶은 것을 손이 까져가면서 풀고 혜산 시장을 지나갈 때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노동단련대에 들어가면 하루 급식량으로 강냉이나 콩을 섞어서 삶아서 몇 숟가락 주고, 노동강도가 너무 셉니다.

정 일할게 없으면 땅을 팠다가 메우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천천히 하는 것이 아니라 벽돌 같은 것을 들것에다 들거나 등에 메고 뛰게 합니다. 잘못하면 각목으로 때리고, 내가 잘못하면 내가 속한 조가 같이 벌을 받기 때문에 서로 투쟁이 심합니다. 서로 질시하고 통제합니다. 제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거기에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에서는 영양실조와 몸이 혹사하는 것을 못견뎌서 많이 죽습니다.남자들 10명 중에 3명 정도는 죽는다고 보면 됩니다. 북한에서는 또한 그것을 응당하다고 여깁니다. 거기에는 죽어도 가기 싫어서 도망쳤는데 요행히 성공해서 다시 두만강쪽으로 붙었습니다. 제가 두만강 쪽을 붙어서 압록강을 건넌 것과 똑같이 넘었는데 성공해서 용정현 계산툰으로 갔습니다. 여기로 넘어오니까 확실히 조선족들이 달랐습니다. 중국돈 300원의 포상금이 있기 때문에, 이 돈이면 중국 한달 월급입니다, 그것을 받겠다고 신고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집 주변의 조선족들이 달라붙어서 가게를 박살내고 밤마다 그 집에 돌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후 다시는 신고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짜고짜로 대문을 두드렸더니 사람을 훑어보고는 팔소매를 잡아끌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아무 말도 안하고 밥을 가득 해주는데 내가 넘어와서 처음 먹은 밥이 남한 밥그릇으로 10공기를 먹고도 배가 부르지 않았고 두부도 세모 정도 먹고 나니까 한숨이 놓이고 그 다음에는 식곤증이 나서 한 세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습니다.

자고 일어나니까 집주인이 차비를 줄테니까 떠나라고 했습니다. 여기 연변은 탈북자들이 너무 많이 넘어와서 위험하다고, 우리가 보호해 줄 힘도 없으니까 안쪽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흑룡강성이 동북 3성중에는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연변 쪽은 인심이 박하고 흑룡강성 주민들이 인심들이 좋습니다. 흑룡강쪽 조선족들의 구성을 보면 조상들이 전라도나 경상도인 사람들이 80%됩니다. 이 사람들은 인심이 후합니다. 연변은 북한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 80%정도 되어서 생활의 질도 저조하고 박하고 악하지만 흑룡강성 주민들은 인심이 후하고 저를 목단강 쪽까지 갈 수 있는 차비를 주어서 목단강까지 들여보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 정착해서 한두달 동안 열심히 일하면 가족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들어와 본 중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중국 한달 월급으로는 애당초 아이들을 데리고 올 엄두도 내지 못하겠고 그렇다고 해서 넘어갈 처지도 못되고 일단 돈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이천원 정도 중국 돈이 들어가야 합니다. 한화로 계산하면 한 25만원정도, 이 돈을 중국땅에서 벌려면 한 일년정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방도가 서지를 않아서 할 수 없이 제가 농사를 짓겠다고 했습니다. 말도 모르니까 어디서 월급제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9개월 동안 농사를 지었습니다. 주인집이 처음에는 인심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인지 아침 6시 30분에 깨워서 밤 9시 30분까지 일을 시켰습니다. 농사라는 것 한번도 해보지도 못했고, 일이라는 것도 한번도 해보지도 못했는데 지게를 지고, 모든 일을 수공업으로 합니다. 제가 9개월 동안 남의 두 세배 정도 일하니까 주인집에서 먹은 것이랑 다 계산하고 나서 천원 정도 주었습니다. 천원 가지고는 아이들을 빼내올 수가 없었습니다. 9개월 동안 일하다 보니까 주위에 친한 분들이 있어서 그분들이 주인집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이 사람이 남들보다 두 세배 더 일했고, 가족을 데리고 오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돈을 더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집에서 할 수 없이 돈 2천 5백원을 주었습니다. 상당히 큰돈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조선족 브로커들을 발동시켜서 우리 아이들을 좀 꺼내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우리 애들을 꺼내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북한에서 꽃제비를 날아다니는 제비로 많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으며 산다’라는 뜻인데 우리 애들이 그렇게 굴려다니는 것을 조선족들이 찾고,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넘기기 위한 작전을 썼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못견딜 것 같고, 제 여동생도 못견딜 것 같으니까 오빠가 중국에 가 있다니까 그곳이 천당인줄 알고 무작정 넘어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데리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에서 친한 사람들에게 이천원 정도 더 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부모님이랑 애들이랑 다 넘어왔습니다.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제가 중국에 있어보니까 온 가족이 다 다니기에는 너무 위험했습니다. 계속 쫓겨다녀야 하고. 어디 발붙일 곳도 없고 어디 하나 보호해 주려고 하는 것이 희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사를 짓던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농사를 지어서 우리 부모님이나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습니다. 먹거리는 한국보다 더 싸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먹거리만 해결할 수 있다면 한국보다 살기 편한 곳이 중국입니다.

저는 북한에서 19살부터 글을 많이 썼습니다. 제가 당원도 되고 대학에 가자면 제 아버지가 종파 딱지가 붙었기 때문에 요동을 치지 않으면 가망이 없었습니다. 생활하는 짬시간마다 글을 썼습니다 제가 속한 중대가 북한에서는 군무자축전이라는 것을 개최합니다. 80년도부터는 2년에 한번씩 개최됐는데 제가 나가서 상도 타고 그 다음에 공군선전대에 21살에 정식으로 작가로 올라가서 28살까지 작가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농사로는 가망이 없기 때문에 글이라도 써보면 뭉칫돈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북조선작가로 변신해서 흑룡강신문이요 흑룡강 잡지, 연변에 있는 도라지요, 백두산이요 하는 많은 잡지들과 베이징에도 많은 잡지들이 있습니다. 제가 중국생활을 일년정도 했으니까 그것을 기반으로 글을 썼는데 성공이었습니다. 천 5백원정도 몇달 받으니까 너무나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 글 쓰는 것은 생각도 없었는데 한달에 천원, 이천원 받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KBS 해외동포문학상에 응모했는데 운 좋게도 일등으로 당선되어서 300만원을 받았습니다. 99년도에 태창흥국 시나리오공모전에서 50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욕심이 자라서 내가 중국에서 중국조선족 작가로 글을 쓰는게 아니라 한국 서울을 겨냥해야겠구나하고 생각한 것이 월간조선이었습니다. 월간조선을 겨냥해서 98년도 시작해서 2000년 귀순할 때까지, 그리고 귀순해서도 현재까지도 드문드문 글을 써내고 있고 그래서 글 쓴 것 하나로 4,500만원정도 뽑았습니다. 뽑으니까 월간조선에서 한달에 130만원부터 150만원을 정상적으로 받았고 그 돈으로 중국땅에서 살아야하겠다 생각하고 아파트도 사고 이것저것 두루 샀습니다.

한국에 IMF 때도 해외동포들을 지원할까 하는 생각도 하고 여유가 있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인간이고 아이들 앞날을 봐서도 내가 자란 모국이 있어야겠고, 내가 보호국이라 부를 수 있는 땅이 있어야겠고, 떳떳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있었습니다. 그때 제 주머니에 돈이 있었고, 항상 이천원 정도는 용돈으로 넣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님과 아이들도 내가 안배해 준 자리에서 크게 염려하지 않게 잘 따랐고, 크게 애로되는 것은 없으니까 그런 생각들이 많이 들었습니다. 갈등도 많았고 고민도 많았습니다. 중국땅에서 사는 동안 월간조선에서 면담을 와서 두번 이야기 나누었는데 한국땅이라는 곳이 상당히 힘이 든다, 중국땅에서 살아라, 한국은 오지 말라고 얘기했지만 내가 중국땅에서 살자니 언어소통이 안되고 내가 언제까지나 먹거리만 먹으면서 돼지처럼 살아야하겠는가 하는 생각에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제가 남한으로 넘어올 때 한화로 천 삼백만원 정도 지불을 했습니다. 현재 우리 아버님은 한국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뇌출혈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사히 한국에 넘어왔다니까 좋아하시다가 그날밤에 흥분하셔서 술 마시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내가 온 덕에 우리 아버님을 사망시켰습니다. 남한에 도착한 후 온 서울시내를 오후 5시까지 돌아다녔습니다.

돌아다니다가 조선일보에 가서 내가 넘어왔다고 하니까 놀라서 차를 권하고 사진을 찍고 국정원에 전화하니까 와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재 한국생활을 했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월간조선에서 계약기자 생활을 일년 했는데 한 일년동안 일하면서 원고료 타먹고 나니까 이제 더이상 나에게 관심이 덜해져서 무직업자가 되고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의 기업문화를 배워보려고 다단계판매회사 청호정수기에서 한 석달동안 월급도 못받으며 일하면서 정수기도 나가서 팔라고 하는데 남에게 권하기도 싫고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만두고 현재는 이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북한에 대해 인식을 받은 것은 북한의 정치라는 것은 성경의 순리와 교리를 모방해서 정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어머니 외가쪽이 기독교와 상당히 연관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묘하게 도입했는지 북한에 있을 때는 느끼지도 못했는데 말씀침투요 뭐니 하는 것을 여기 와서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고 정식으로 하느님이라고 명명해놓고 있고 예수님이 강림한 것처럼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까지는 잘 먹혀있고 성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의 유훈통치를 실현한다고 하면서 대통령이나 그런 공식적인 지위에 오르지 않고 국방위원장이니 하며 김일성의 유훈통치를 마저 실현한다는 이런 식인데, 훗날에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이가 대를 이어받지 않겠냐 하니, 이런 것은 어림도 없는 짓입니다. 김정일이 지금도 자기 이미지를 겨우 이어나가고 있는데 북한의 신문이나 방송을 살펴보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아직도 60%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아직도 김정일이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해서 우려먹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경제라는 것은 제1경제와 제2경제로 나눠볼 수 있는데 제1경제라는 것은 인민경제인데, 제1경제가 북한에서 가지고 있는 예산은 절반도 안됩니다. 북한에 정무원총리가 공식적으로 있지만 제2경제담당비서가 정무원총리보다 더 서열우위에 있습니다. 북한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주민을 통제하는 방법을 보면 거짓말도 100번 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북한이 계속 주입하니까 북한 군인의 경우는 거의 순순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이고 장교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교들의 쿠데타 사건이 98년도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60명 가량이 처형당했습니다.

일반 문화적으로는 남한과 거의 비슷합니다. 제를 지내는 방식이나 심지어 술주정하는 방식도 비슷하고 가정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다른 것은 북한의 여성들은 상당히 가부장적 제도에 얽매어 살기 때문에 남자에게 복종하고, 여기는 대신 남자가 여자에게 꼼짝 못합니다. 여기 와서 보니까 여자들 목소리가 어찌나 높은지. 여자들 많으니까 저도 남한에 오면 장가 금방 갈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오산입니다. 북한은 인구비례를 보면 여자가 남자에 비해 1.5배정도 차지한다고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총각들도 장가 못가고 이러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여자가 25살 정도만 되면 늙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아파트만 해도 장가 못간 홀아비들이 많습니다.

문화적으로 보면 통일하면 이질적인 감이 들지 않겠는가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탈북자들도 문화적인 면에서는 적극 적응이 되고 숙련이 됩니다. 당하고 일하고 하는데 상당히 힘이 들고 여기 오면 보장해주겠지 하는 생각을 탈북자들은 많이 품게되고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지배되는 것에서 자기 특기를 살리지 못하고 보장해주지 않느냐 혹은 내가 왜 힘든 일을 하느냐 하는 문제들이 대두되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들은 한국사회에 와서 힘든 일도 하는데 너희 북한 사람들은 왜 못그러느냐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이해하셔야 될 점들이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일정한 기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정착기간을 삼년 정도는 걸려야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은 자기능력을 알고 자기가 일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순복음교회에 탈북자가 50명 정도 나가고 있는데 제가 거기서 회장을 맡아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살펴보면 삼년 정도 있다가 자기가 돈이 없으면 아무 일이라도 하게 되는데, 갓 나와 정착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 놓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봅니다. 저도 현재 남한에 온지 2년 4개월이니까 6개월 정도 지나면 3년이 됩니다. 다른 것을 해보다가 안되면 버스에라도 앉아서 일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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