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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체험한 북한정치범수용소의 현실 - 김용 (2007-11-24)
 
김 용
93 ~ 98년 정치범수용소 체험자


나는 1998년 9월 25일 정치범 관리소를 탈출하여 중국과 몽골을 거쳐 1999년 10월 22일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나는 1993년 8월부터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운영하는 제14호 정 치범관리소에서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말 못하는 짐승과도 같은 끔찍한 일들을 체험했다. 내게 주어진 죄명은 얼굴도 모르는 부친의 경력 때문이었다.

나는 1993년 5월에 처음 체포되었다. 당시 나는 국가안전보위부 무역국 에서 일본 서해 아사히 주식 무역회사 대리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체포된 이유는 이력을 기만하고 국가안전보위부에 침투하였다는 것이었다. 체포직후 나는 평양시 룡성구역 마람에 있는 특수아지트에 끌려가 심문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심문 내용은 "특수기관인 국가 안전보위부에 무슨 목적으로 침투했는가" "어떤 목적에서 간첩의 자식이 애국자의 탈을 썼는가" 하는 것이었다.

보위부 심문관들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직사각형(5㎝×5㎝) 각목을 무릎 안쪽으로 끼워 넣고 꿇어앉힌 뒤, 위에서 구둣발로 무지하게 밟아대고 손에 족쇄(수갑)를 채워 발끝만 겨우 땅에 닿을 정도로 매달아 놓고 밤이면 독감방에 배꼽까지 물을 채워놓고 한 순간의 쪽잠도 잘 수 없게 감시했다. 반복되는 고문으로 온몸이 물에 퉁퉁 부어 올라 몸을 가 누지 못해 쓰러지면 구둣 발로 차서 일으켜 세우고 다시 고문을 계속하곤 했다. 나는 고문을 받는 도중 평양시 대동강구역에 위치하고 있는 문수 특수아지트에도 가서 고문을 당하였다. 그렇게 3개월간을 죽음의 생지옥 을 오가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 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고문에 못 이 겨 그들의 요구에 실토를 하자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4살 때부터 부모의 슬하에서 재롱을 부릴 나이에 애육원(고아원)에 가서 초등학원을 다녔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내 부모들보다 김일성과 북한 당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렇기에 나는 성장해서도 당과 수령 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양심껏 일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어머니의 진술서와 황해북도 서흥군 안전부 주민등록 지도 원 김철만(대위, 가명)의 진술서를 꺼내놓고 나와 공모한 사실을 고백하라고 위협했다. 나는 이런 과정을 3달간 갖은 악형을 다 받은 끝에 1993년 8월 다른 곳으로 이송했다. 죄인들을 호송하는 지프차에 실려 평양에서 5시간 가량 달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갔고 5개나 되는 감시 초소를 통 과하여 차가 멎자, 호송원이 나를 내리게 했다. 차에서 내린 내가 어리둥절하여 사방을 둘러보자 "야, 이 새끼야 꿇어앉아, 대가리 박아."하며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잠시후 서로 서류를 넘겨 주면서 몇 마디를 나누더니 외부차는 더 이상 통과할 수 없는 곳이라 나를 호송해온 차는 나를 인계해주고 곧장 돌아가 버렸다.

"야, 이 새끼야 타라."하는 소리에 마중 나온 지프차에 올라탔다. "야, 이 새끼. 개 대가리 같은 거자꾸 들갔어." 그들은 내 머리를 구둣발로 밟아 차 바닥에 닿게 짓눌렀다.
그 순간 나는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억울한 마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이 '영치품 창고'라고 쓴 건물 앞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나에게 "야, 이 새끼야, 팬티까지 다 벗으라"면 서 나에게 고포(넝마)짝같은 옷을 던져 주었다. 나는 팬티도 없이 주는 옷을 입고 멍하니 서있는데 옆에서 갑자기 "야, 이 새끼 아직 속이 살았구나. 꿇어앉아."하며 나를 강제로 꿇어앉히고 머리를 땅에 닿게 하였다. 후일 안 일이지만 제14호 관리소의 규정에는 선생님들이(간수, 계호원) 있거나 지나갈 때에는 손을 뒤로 얹고 돌아서서 이마가 땅에 닿게 꿇어 앉아 있다가 선생님들이 다 지나간 다음 지나간 쪽을 보지 말고 반대쪽을 보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잠시후 2명이 나를 지프차에 태우고 산굽이를 돌아 산중턱에 있는 '무진 2갱'이라는 현장에 끌고 올라왔다. 알고 보 니 나를 인계받아온 보위원이 나의 담당 선생님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14호 정치범 관리소' '무진 2갱'에서 악몽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근무했었기 때문에 일단 관리소에 들어오면 다 시는 바깥 세상구경을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원래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운영하는 정치범 관리소는 1972년 전 국가정치 보위부장 김병하의 발기로 김일성의 교시를 받아 설립되었다. 그 전에는 1968년 김일성의 계급로선에 의해 황해남·북도의 개성, 금천, 룡연, 장연, 안악, 은률, 취야, 장풍, 개풍, 판문 등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월남자 가족과 6·25 전쟁당시 치안대 가담자, 지 주, 일제 친일파들의 살아남은 본인 및 가족들을 북쪽의 주민들과 교방(교환)한다는 구실로 기차의 화물차량에 실어 12개의 지역에 특수구역을 선정해 놓고 그 속에서 외부와의 접촉 및 서신거래 등 모든 것을 차단하 여 사회안전성 안전과(果)에서 관리하였다. 또한 이렇게 격리된 본인에 한하여 죄가 엄중하다고 판단된 자들은 개천 교화소와 청진에 있는 수성 교화소를 정치범 교화소로 만들고 별도로 정치범들을 수용시켰다. 이처럼 만들어진 북한의 정치범 관리소는 현재 전국에 10여 개가 운영되고 있으며 내가 수용된 14호 관리소 수용자 중 노력자만 15,000명에 달하며, 어린이들과 6·25당시 함남도 장진호반에서 포로가 된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의 일부가 수용되어 있다. 이들은 발전하는 북한의 현실을 똑똑히 보게 해주라는 김일성의 교시에 의하여 관리소에 갖은 악형을 다 받으며 수용되었다.

북한은 세계의 여론과 저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대는 바뀌어도 혁명의 과녁은 변하지 않았다는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 노선을 관철한다는 신념에 기초하여 현재까지도 장본인도 아닌 2대, 3대까지도 고통을 당하고 있다. 내가 수용되어 있던 14호 관리소는 반동의 씨족이 퍼지면 안된다고 하면서 관리소에 입소되면 남, 여를 따로 갈라 수용시키고 있으며 가족들이 들어오는 경우에는 12살 미만의 어린이들이 있는 세대는 남자는 따로 갈라놓고 어린이는 인민반 4학년까지만 어머니가 데리고 있을 수 있다. 어린이들은 12살이 되면 남, 여를 서로 분산시켜 수용하게 되어 있다. 1990년 14호 관리소에서는 수용자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관련자 1,500명을 사살하여 폐갱에 처넣고 매장시켰다. 그 후로는 살아 남은 수용자들의 수용시설의 출입문을 철문으로 교체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들어가면 철문을 굳게 잠그고 아침에 열어 주곤 하였다.

내가 입소한 첫해인 1993년 10월경 강제노역을 하게된 곳은 밤나무골이 기 때문에 가을이면 산골짝에 밤알들이 수북히 쌓이곤 했다. 그러나 산에는 경비가 삼엄하고 안전원들의 눈을 피해 산에 한발자국이라도 올라갔다가 들키면 도주분자로 인정하고 즉석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어 수용자들은 눈앞에 놓인 밤알을 감히 주어먹지 못하였다. 하루는 석탄을 실어 나르는 전차(광차의 견인차) 운전공 김광수(53세, 가명)가 광차길에 밤알 몇 알이 굴러 내려와 있는 것을 보고 광차를 세우고 그 밤알을 주우려고 했다. 그런데 어디서 보았는지 "야, 이 새끼야" 하고 김광수를 불러 세웠습니다. 갱안에 동발목을 나르고 있었던 나는 고함소리에 그 쪽을 바라보았다. 당시 우리를 감독하는 선생은 너무도 악착같은 자여서 '오빠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김광수는 밤알에만 정신을 빼앗겨 선생이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밤알을 줍고 있었다. 선생은 그의 허리를 발로 차 쓰러뜨리고 사정없이 때리더니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지 허리에서 권총 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김광수의 머리를 구두발로 내려 밟은 채로 그의 이마에다 권총을 대고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총을 맞은 김광수의 입과 머리에서는 피가 솟구쳐 나왔다. 그러나 선생은 "이런 해독분자는 죽어야 한다"면서 감독에게 이 새끼를 끌고 가라고 명령하였다. 감독이 달려가 쓰러진 그를 안았다. "야, 이 새끼야 동정하는가. 끌고 가." 선생은 감독에게 소리를 질렀다. 할 수 없이 감독은 쓰러진 김광수의 다리를 잡고 질질 끌다시피 철로를 따라 내려갔다. 철로의 광차 침목에 털석거리며 끌려가는 김광수의 시체는 마치 산짐승을 잡아끌고 오는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렇게 숨진 김광수의 손에는 밤색의 반짝이는 두 알의 밤이 으스러지게 잡혀있었다. 이 광경을 본 수감자들은 공포와 함께 분노에 휩싸였다. 이것이 바로 관리소의 현실이다.

내가 '지하 6편도'에서 굴진공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1편도는 지하 120m에 달하며 6편도는 720m의 땅속 깊이에 있다. 그날도 나는 돌을 광차에 실어 권양기장이 있는 200여m 되는 곳까지 끌어내야 하는데 처음 해보는 일이어서 힘에 겨웠다. 하루는 돌이 많아서 광차가 밀리게 되어 정신없이 돌을 광차에 싣고 있었다. 갑자기 "어느 새끼들이야" 하는 소리에 나는 관리소의 죄수가 행하게 되어 있는 규정대로 굴 벽쪽으로 꿇어앉아 손을 뒤에 얹고 머리를 이마가 땅에 닿게 하고 선생이 지나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딱'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진흙창같은 갱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리니 나의 머리에는 구멍이 나고 목을 타고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야수 같은 선생놈이 나의 머리를 권총 손잡이로 까서 쓰러뜨리고 일을 못하는 놈들은 죽어도 좋다고 떠벌리는 것이었다. 그때의 상처로 나의 머리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원한의 상처가 남아있다. 그때 나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든지 기어이 살아서 복수를 하리라는 분노가 치솟았다.

나와 함께 일하던 사람은 북한의 체육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농구선수였다. 그는 57세로서 아버지가 지주라는 신분 때문에 관리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가 하루는 '오빠시'라는(산 속에 살고 있는 야생벌로서 맹독성의 침을 갖고 있으며 독종이라는 뜻의 표현) 선생이 가지고 다니는 소꼬리 채찍을 주웠는데 너무 배가 고파 물에 불려서 먹어버렸다. 다음날 소꼬리 채찍을 잃어버린 오빠시 는 그를 찾아내어 수용자들 앞에 세워놓고 사정없이 매질을 해댔다. 그리고는 감독을 시켜 변소칸에서 회충(蛔蟲)을 건져오게 했습니다. 오빠시는 "야, 이 새끼야, 이것도 고기니 처먹으라."며 나무꼬챙이에다 끼워 쓰러진 그의 입에 쑤셔 넣는 것이었다. 그는 그날 저녁 너무 매를 맞아서 고열이 나고 온 몸이 퉁퉁 부어 올랐다. 내가 간호를 하느라고 그의 머리를 내 무릎에 얹어 놓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는 내 무릎에 누워 "야, 내가 아버지의 재산을 넘겨받은 것이 무슨 죄가 되어 이렇게 고역을 치러야만 하는가"며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그는 후유증으로 인해 3일만에 처절한 운명을 맞고 말았다.

관리소에서 여성들은 한낮 파리 목숨과도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14호 관리소에서는 간부 초대소라는 것이 있는데 이곳은 평양에서 부부장(고위간부) 급이 내려오면 숙식하는 특각이다. 관리소에서는 평양에서 간부들이 내려오면 여성 수용자들 속에서 예쁘고 잘 생긴 21∼25살 사이의 처녀들을 선발하여 목욕을 시켜서 간부들에게 바치게 되고, 간부들은 이런 여성들을 온갖 노리개로 유린하고는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이 두려워 '도주분자'라는 역적의 딱지를 붙여 서류를 꾸며놓고는 비밀리에 죽여버린다. 그리고 상급에서 또 다른 자들이 내려오면 같은 방법으로 수많은 처녀들을 성노리개로 유린하여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14호 관리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행들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사실은 정치범 관리소가 현재 화학무기의 실험대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의 순간순간을 위험하고 저주스러운 14호관리소에서 1995년 10월 나는 대동강을 경계로 한 18호 적대범 관리소로 이송되게 되었다. 나는 18호 관리소로 이송 되어 오면서 14호 관리소에서 보고들은 일체의 말을 한마디라도 발설하는 경우에는 개처럼 끌어다가 처형한다는 위협을 당하며 서약서를 썼다. 손도장을 찍은 나에게 14호 선생들은 "김정일 동지의 광폭정책에 의해 경한 18호 관리소에 이관한다"면서 "18호 관리소에서 가게 되면 생활을 잘하라"고 당부했다. 18호 관리소는 14호에 비하면천국과도 같았다. 우선 방송과 신문을 볼 수 있었다. 14호 때에는 일체의 방송 및 출판물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어 있으며 어쩌다 일을 잘하였다고 평가를 받으면 구내 방송차가 와서 '모란봉', '능수버들'과 같은 조선민요를 한 곡 불러주고 가면 그것의 최대의 배려였기 때문이다. 이것만해도 18호 수용소로 온 것이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김정일의 '광폭정치'의 은혜를 입은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18호 관리소에 와서 '영등갱'에서 굴진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나는 18호 관리소에 와서야 비로소 나의 어머니가 18호 관리소에서 수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태어나서 40년만에 처음으로 한 집안에서 어머니와 생활하게 되었다(18호 관리소에서는 가정생활도 함께 할 수 있으며 한 달에 30원의 노임도 주고 위수구역 안에서는 산에도 올라가 산나물도 뜯어먹을 수 있었다). 나는 18호 관리소에 온지 15일만에 관리소 보위부에서 찾는다고 하여 가보니 평양에서국가보위부 X국 국장인 이장철(가명)이 내려와 있었다. 이장철 국장은 나에게 14호에서 18호 관리소로 이관하게 된 것은 국가보위부 XXX 부부장이 많이 힘썼다고 하며 일을 잘하라고 하였다. 그는 18호 보위부장에게 내가 국가보위부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보위부 정문을 나서며 XXX 부부장이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XXX는 나의 직속상관으로 나의 사업총화를 그의 사무실에 가서 개별총화를 하였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친 혈육과 같이 지내던 사람인데 내가 체포당시 김정일의 방침으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서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후 나는 일도 경한 일인 광차수리를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18호 관리소체계와 구성은 다음과 같다. 원래 사회안전부에서 운영하던 관리소들 중 적대법 대상으로 추려서 14호 관리소 지역을 대동강을 중심으로 절반 갈라 한쪽은 김정일의 방침에 의해 18호 관리소가 차지하고 있으며 구성 인원 중에 1대(8·15 세대)는 죽고 2대, 3대가 수용되어 있으며 수용자수는 3만명이 노력자이고어린이와 늙은이를 포함하여 2만명으로 총 5만 명이 수용되어 있다. 그리고 관리소 한쪽을 봉쇄하고 북한에서 고위급 간부들이 과오로 들어와 일하는 혁명 화 작업반이 있는데 이곳에는 30명 정도 수용되고 있으며 그들이 수용자 들과 말을 하게되면 반동의 물을 먹는다며 그들과의 접촉은 일체 차단되어 있다. 관리소 경비는 무장인원 2개 대대가 산 정점에 3미터 높이의 고압 철조망을 늘리고 그 밑에는 삼각형으로 깊이 3미터, 너비 1.5미터의 함정들을 파놓고 함정 속에는 60밀리 철근을 박아 떨어지면 찔리게끔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는 200미터 간격으로 높이 5미터의 경비 초소(망루)를 설치하고 중화기인 경기관총을 걸어 놓고 2시간 교대로 근무를 서며 그 밑으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잠복 초소 가 있어 잠복근무로 감시를 하게 되어 있다. 항상 위병대가 순찰하면서 봉쇄하고 있어삼엄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14호 관리소에 비하여 18호는 천국이라고 생각하던 나의 생각은 3개월도 못되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관리소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 갱에 들어가기 전에 아침마다 모여 대열점검 및 몸수색을 하게 되어 있다. 하루는 수색을 끝내고 현장인 갱속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를 하고 있는데 굴진공인 허철호(45세)의 몸에서 담배종이가 나왔다. 관리소에서 수용자들이 사용하는 담배종이는 보통 신문지로 하게 되는데 허철호가 가진 종이에는 김일성의 이름이 크게 씌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발견한 갱장이란 놈은 큰 것이나 잡은 것처럼 그를 수감자들 앞에 내세워 놓고 자기 애비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는 반동놈의 새끼라면서 그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 다. 그리고 그를 수감자들이 많이 다니는 길옆에 있는 나무에 꽁꽁 묶어놓고 교대로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1월달이었는데 산골짜기의 기온은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이어서 홑옷을 걸친 허철호는 삽시간에 몸이 얼어붙었다. 갱장은 이런 자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날 아침까지 24시간을 꼬박 그곳에 묶어 놓았다. 그는 결국 손과 발에 동상을 입어 진물이 나오고 온몸이 퉁퉁 부어 쓰러지고 말았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 지나치는 수용자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진저리를 쳤다. 그렇다고 그를 동정하면 공범자로 같이 취급을 받기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고 거저 속으로 불쌍히 생각할 뿐이었다.

1996년 5월경의 일이다. 어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 날마다 야산에 올라가 산나물과 칡뿌리를 파다 나에게 풀죽이나마 한 공기씩 해주곤 하였다. 사회에도 식량이 부족한데 18호 관리소는 10일분 식량을 공급하면 그것으로 30일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식량은 턱없이 모자랐다. 풀죽에다 통강냉 이 한두 알을 넣어 먹는 사람들이 기운이 얼마나 있겠는가. 허기진 어머 니는 나물을 뜯으러 산에 올라갔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날이 어두울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나는 아침 6시에 출근하면 밤 11시나 12시경에 집에 들어오기 때문에 어머니가 쓰러진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저녁에 산을 순찰하던 경비원에게 어머니가 발견되었다. 경비원은 어머니에게 " 밤에 왜 산에 있는가?" 고 다그치면서 어머니를 도주자라고 손에 족쇄를 채워가지고 질질 끌고 보안 소에 가두어 벼렸던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 정신없이 담당 선생에게 달려가 보니 어머니의 뼈만 남은 손에 족쇄를 채우고 얼굴은 얼마나 맞았는지 온통 터지고 멍이 들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보위원에게 늙은이가 몰라서그러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사정을 하자 그 보위원은 "야, 이 새끼야 저녁 5시면 산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을 모르는가?" 하며 구둣발로 사정없이 걷어찼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관리소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관리소에 특별히 규정을 위반하거나 사형수를 취급하는 특별 아지트에 갇히게 되었다. 70고령이 넘은 늙은 어머니는 대동강반에서 돌 쌓기하는 일을 강요당하며 잘 걷지 못하자 어머니의 다리 사타구니에몽둥이를 끼우고 젊은 놈 둘이서 메고 가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다리 사이에 몽둥이를 끼운 채 매달려가며 넘어가지 않으려고 나무를 꼭 쥐고 오들오들 떨며 끌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아들인 나의 가슴은 어떠했겠는가. 이것이 바로 광폭정치, 은덕정치를 한다며 사람의 인권을 가장 귀중히 여긴다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이 떠벌리는 북한의 현실이었다.

그 후 나의 어머니는 대소변도 가늠하지 못하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러한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를 낳아 책임지지 못한 부친에 대한 원망도 해보고 저주도 해보 았으나 나오는 것은 한숨과 절망뿐이었다. 그러는 나의 손을 꼭 잡으시고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야, 나는 더 살 것 같지 않으니 너 하나라도 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이렇게 말씀하시며 나를 빤히 쳐다보시는 어머니는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어머니의 눈길에서 나는 그 분이 바라시는 바를 읽을 수 있었다. 병들고 늙은 어머니를 이 사지판에 혼자 남겨두고 떠난다는 결심을 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며칠후 어머니에게 " 어머니 만약 내가 없으면 어머니 혼자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라고 묻자 어머니는 아들의 결심을 알아차린 듯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사내가 사소한 일에 사로잡히면 큰 일을 못한다. 남쪽에 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거기에는 6·25때 월남한 너의 외삼촌도 있고 너의 아버지 친지분들도 있을텐데……."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며 도리어 저에게 힘을 주시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나는 굳게 결심을 했다. "언젠가는 떠나리라…."

그후 나는 사령부 침해 사건의 연루자로 18호 관리소 특수 아지트에서 또 한차례의 시련을 겪고 난 뒤 몸은 극도로 허약해졌다. 나의 몸은 '허약 3도'였다. '허약 3도'란 관리소에 쓰는 영양실조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인데 인체가 극도로 허약해지면 엉덩이 골반뼈만 남아 두 주먹으로 항문의 골반뼈에 집어넣어도 들어갈 정도로서 뼈만 남은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각오를 하고 내가 없어지면 어머님이 받을 피해를 생각하여 나는 결백하다는 유서를 써서 내가 집에 못 들어오면 (관리소)담당 선생님에게 찾아가 주라고 어머니에게 전해주었다. 아들이 어머니의 손에 전해준 것은 '유서'였다. 나는 1998년 9월 18호 관리소를 탈출하는데 성공해 같은 해 겨울 두만강을 건넜다.
http://kor.nkhumanrights.or.kr/bbs/bbs/board.php?bo_table=evidence&wr_id=33&pag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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