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기도원<祈禱院>
1. 기도원의 역사.
기도원의 역사는 수도원<修道院>으로부터 유래되었고 수도원들은 수도사<修道士>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기독교에 수도사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지만 크게 집약하면 세 가지다. 첫째는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규율이 문란해지자. 오직 신앙적 삶에만 전념하고자 하는 자들이 수도사가 된 것이고 둘째는 교회 지도자들이 타락하고 부패한 가운데 독단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자 이에 반발하여 평신도적 순교자가 되겠다는 영웅 심리에서 수도사가 된 것이며, 셋째는 신비주의 사상에 의하여 수도사가 된 것이다. 수도사들은 이러한 이유들에 의하여 교회, 또는 일상적 삶으로부터 스스로 격리하여 광야나 묘지등에 은둔하면서 철저한 금욕적, 경건적 신앙의 삶을 살았다. 수도사들이 계속하여 증가하자 그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리하여 수도원들이 건립되었다.
이제 수도사들은 광야적, 개인적 수도 생활을 청산하고 수도원에서 더욱 엄격하고 경건한 규율을 지키는 신앙적 삶을 살게 되었다. 그들은 자급자족 규율에 따라 노동을 하면서 식생활을 해결하였고 노동을 통하여 얻어지는 수입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다. 수도사들의 경건함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원하여 수도사가 되었고, 도처에 남녀 수도원들이 건립되었다. 한편 수도사들은 본래 신앙은 경건하였으나 신학이 없었다. 특히 그들은 기도와 찬양에만 열중하였을 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매우 등한하였기 때문에 신학이 전혀 없었다. 반면에 그들은 나름대로의 체험적 신앙 때문에 신비주의적 신앙에 젖어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수도사들이 신학적으로 무지한 점을 공격하였고 수도사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하고 변질된 신앙을 공격하였다. 이로서 수도원과 교회, 수도사와 교회 사이에 충돌과 반목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교회와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혐오하던 많은 사람들은 수도사들을 존경하게 되었고 귀족들과 국가도 수도원을 더욱 신임하여 교회에 내던 헌금과 각종 지원을 수도원으로 돌렸다. 그리하여 수도원들은 귀족들과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재정이 풍요하게 되었다. 반면에 수도사들에 대한 존경과 재정의 풍요로 인하여 수도원들이 부패하고 타락하였다.
처음에는 엄격한 규율과 경건적 신앙으로 철저한 금욕주의적 삶을 유지하던 수도사들이 점점 풍요해지는 재정과 자신들을 존경하는 것에 크게 매료되어 명예와 권세를 욕심내게 되었고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로 노동을 비롯한 금욕주의적 삶을 스스로 버렸다. 그들은 고기와 포도주를 탐하였으며 금지하였던 결혼까지 하였다. 이제 그들은 금잔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금대접에 담긴 각종 고기들을 먹는 것이 진정한 수도사들의 권위라고 주장하였다.
지나친 음주와 육식으로 인하여 그들의 몸은 심히 비대해졌고 호화로운 삶으로 인하여 각종 질병이 만연하였다. 수도원들이 부패하고 타락하자 이를 우려한 교회 지도자들이 수도원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수도원 개혁으로 인하여 참신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수도원들이 건립되었다. 수도원 개혁자들은 수도원의 부패와 타락 원인이 <신학 부재>에 있었음을 명심하여 수도원을 신학의 요람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수도원은 기독교 신학의 산실이 되었고 훗날 신학교의 전신이 되었으며 세계 복음 선교의 주체가 되었다.
수도원들은 이제 어느 개인의 명성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범 교회적 차원에서의 집단 체제를 이루었다. 그러나 기독교 개혁 이후에 기독교의 완전 자유가 확산되면서 수도원들은 다시 개인적 수도원으로 환원되었고 그로 인하여 신학보다는 신앙 위주의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 특히 기독교 개혁이후에 각 교파와 교단이 난립되어지는 가운데 아무도 통제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상황이 됨에 따라 신학 부재의 개인들이 명예, 권위, 재물, 등등에 대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수도원들을 건립하게 되었고 그러한 수도원등이 도처에 난립하면서 수도원은 기독교를 타락시키고 부패시키고 오류시키는 비 진리의 산실이 되었다.
2. 기도원의 필요성.
기도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기독교에 절대 필요하다.
1) 복음의 전파.
기도원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한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기도원 집회를 통하여 복음을 접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사업, 건강, 가정, 등등의 각종 문제를 당한 사람들이 심신을 달래기 위하여 또는 어떤 막연한 기대에 의하여 기도원을 찾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를 해결 받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평안을 얻고 소망을 가짐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2) 신앙의 확신.
성도들 중에는 신앙적 연륜이 짧아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으며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적 기쁨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사와 열정적 충정도 없다. 이러한 성도들은 자신의 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강한 불만과 안타까움에 하나님을 향하여 갈급한 심령으로 기도를 하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현장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그러한 기회를 제한할 때가 있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기도원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며 그들은 그러한 여건 속에서 하나님께 진정과 신령의 기도를 하는 가운데 방언, 환상, 환청, 등등의 하나님 은혜를 체험하며 때로는 말씀 안에서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체험하며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한다. 그리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을 수립하는 것이다.
3) 신앙의 점검.
현대 기독교인들은 매우 바쁘고 복잡한 현실 속에 살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점검할 만한 시간적 장소적 여유가 없다. 반면에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점검하고 싶은 안타까움을 안고 산다. 기도원은 그러한 성도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한다. 성도들은 기도원의 특별한 시간적 공간적 여유에서 자신의 싱앙을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후회와 참회의 기도를 하고 심기일전의 새로운 신앙적 삶을 수립하고 다짐한다.
4) 성도의 휴식.
현대 기독교인들은 매우 바쁘고 복잡한 현실을 살면서 심신이 항상 피로하다. 성도들이 모든 것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현실의 복잡다난함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심신의 피로를 누적시킨다. 기도원은 이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심신의 평안과 영적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한다. 성도들은 기도원이라는 특별한 영적 휴양지에서 최고의 명약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받고 치유 받는 가운데 심신의 피로를 완전히 풀고 건강한 영적, 육적,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기도원은 특히 하나님 종들의 휴식처로서 최적지이다. 하나님 종들은 계속되는 사명의 진행으로 언제나 심신이 피로하다. 그러나 그들은 부여받은 사명의 특수함 때문에 마음 놓고 휴식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다. 따라서 기도원은 그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최상의 휴양지이다.
5) 최고의 기도처.
기도원은 최고의 기도처이다. 성도들은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을 기도를 통하여 극복하고 절제한다. 성도들은 삶 자체가 기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간적 공간적 여유 하에서 마음 놓고 기도하고 싶은 열정에 심히 안타까워한다. 새벽예배, 금요철야예배 등등이 계속되고 있으나 성도들은 그와 같은 기도시간보다도 더욱 기도에 전념하고 싶은, 그리고 그렇게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기도원은 최고 최상, 최적의 기도처이다. 기도에 갈급한 성도들은 기도원이 제공하는 특별한 시간적 공간적 분위기하에서 마음껏 기도하고 충분히 기도함으로서 그동안 못 다한 기도를 함과 동시에 기도 못한 안타까움을 풀게 되는 것이다.
6) 말씀의 교육장.
기도원은 기도 처소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할 수 있는 교육장으로서 최고의 시간과 장소이다. 성도들은 개인적, 교회적 사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기도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훌륭한 교육장인 것이다.
3. 기도원의 오류.
현재 한국의 전국 각지에는 그 숫자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 기도원들이 난립되어져 있다. 그러나 기도원들은 대부분 기도원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시설은 물론이요 내용에 있어서 심히 열악하다. 특히 1980년대 이후부터 도시 각처에 난립되어져 있는 개척교회 형식의 기도원들은 기도원이라기보다는 다만 하나의 기도처소에 불과하다. 반면에 그 수많은 기도원들은 기독교를 오류시키고 왜곡시키는 비 진리의 산실들이다. 기도원을 운영하는 <원장>들은 거의 대부분 신학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자들이며 개중에는 아예 신학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자들도 있다. 때문에 그들은 신학으로 기도원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기도원을 운영하며 특히 체험적 신앙에 의하여 기도원을 운영한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섭리를 오류시키고 왜곡시키므로서 기독교와 성도들을 비 진리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 기도원들을 통하여 오류, 왜곡되어지는 비 진리적 실태 중에 심각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신학적 오류.
기도원들이 도처에 난립되어지고 대형화 하면서 기도원들은 기도원에 대한 특색과 능력을 갖추려 하였고 그리하여 시도된 것이 각종 체험과 은사에 대한 강조였다. 기도원들은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을 기도원의 특별 능력으로 내세웠고 어떤 기도원은 금식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성들은 모두 <성령 체험>이라는 공통분모로 집약되었다. 하나님의 은사인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이 연습과 훈련을 통하여 취득된다는 주장 하에 <방언 연습><예언 훈련><신유 학습> 등등이 시행되어졌고, <우리 기도원에서는 개도 방언 받는다>는 망언이 등장하였으며 성령 체험이 강조되는 가운데, <성령 받아라><성령충만 받아라><저기 성령 간다 붙잡아라><저기 불 간다 불 받아라-불 불 불 불 -불 받아라>하는 망령된 외침이 성도들의 통성 기도와 북소리에 맞추어 계속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영광>에서 <하나님의 축복-강복>으로 강등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기독교의 핵심인 <신학-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히 오류되고 왜곡되고 비 진리로 변질되었다.
저들은 방언, 예언, 신유, 금식, 축복<강복> 등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고 성령 체험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그리고 함부로 바꾸고 고치고 빼고 더하는 각종 비 진리적 만행을 시도 때도 없이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기도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신학>이 무수히 오류, 왜곡, 변질되는 비 진리적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의 신학이 사라져 버리고 <기복 신학><현세위주 신학> <인본주의 신학> <체험주의 신학> 등등이 만연하게 된 이면에는 이와 같은 기도원들의 각종 비 진리적 만행이 있는 것이다.
2) 신앙적 오류.
기도원이 신학적 오류의 산실이 되면서 성도들의 신앙이 동반하여 오류되었다. 하나님의 축복<강복>이 강조되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보다는 현세적인 강복에 더욱 전념하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의 의미는 크게 퇴색된 반면에 질병을 고쳐주시고 사업을 번창하게 하시고 승진, 진학, 취직, 경제 등등의 현세적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의 기도 제목이 되었다. 방언, 예언, 신유, 등등에 대한 체험이 강조되면서 방언 못하는 성도들은 성령 체험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시되었고 성령 체험이 없는 신앙은 곧 성령을 받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어 죽은 신앙<구원받지 못한 신앙>으로 확대해석 되었다.
특히 목회자들은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의 은사를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성행하였고 그러한 은사를 받지 못한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반면에 그러한 은사가 있는 목회자들은 더욱 받들어지고 존중되었으며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받으려는 성도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때문에 목회자들은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의 은사를 받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하였고 그러한 틈을 노리고 사기꾼들이 범람하여 <방언체험 학교> <예언은사 취득 학교> <신유은사 취득 방법> 등등이 등장하였으며 그에 관한 각종 세미나가 열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의 은사를 받지 못한 목회자들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거짓 방언> <거짓 예언> <거짓 신유> 은사를 행사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고 사이비 목회자들이 대거 등장하여 <무당 사역>이 시작되었다. 성도들이 은사 열풍에 휩싸여 자신들의 앞날에 대한 문제를 알기 위하여 동분서주함에 따라 <기도하는 자>를 자처하는 사이비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성도들의 앞날을 예고해 주는 <무당 사역>을 하게 된 것이다. 성도들은 신학적인 목사의 설교보다는 <예언자>들의 말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예언자들을 찾아 기도원을 전전하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입신<入神>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다는 신앙 간증들이 급증하였다. 입신자들에 의하여 천국에 대한 각종 모습이 부흥회, 기도원 집회를 통하여 소개되어지자 천국에 대한 호기심이 성도들을 자극하였고 그것이 종말론적인 집회들로 연계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다는 자들의 집회가 성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시간과 장소가 선포되었다. 이장림, 하방익, 권미나, 등등에 의한 종말론이 주장되어지는 가운데 1992년 10월 26일 휴거설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설이 선포된 것이다. 이때에 수많은 성도들이 미혹되어 교회와 가정을 버리고 종말론자들의 집단에 뛰어 들어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렇듯 기복신앙, 체험주의 신앙, 종말 신앙 등등의 신앙적 오류와 변질들은 모두 기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 것이다. 지금도 기도원들에서는 여전히 각종 신학적 오류들이 남발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 오류들이 양산되고 있다.
4. 해결책.
기도원들에 의하여 비롯되어지는 신학적, 신앙적, 오류, 왜곡, 변질, 등등의 비 진리를 근절시키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교파, 교단에 대한 아집<我執>과 자신의 유익과 명예에 대한 집착<執着>을 버리고 <하나의 기독교>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존하는 기도원들을 모두 흡수, 통합하여 범 기독교적 차원에서 관리 운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원들이 기도원으로서의 기능만 발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 교육, 휴양, 복음전파, 등등을 수행하도록 확장하고 개편해야 한다. 전국 각처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기도원들을 많이 설립하고 능력 있는 전문가들을 양성 배치하여 성도들이 주기적으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기도하고 휴양함으로서 차원 높은 신앙적 삶을 살게 해야 한다. 물론 그와 같은 범 기독교적 차원의 기도원들이 설립되고 운영된다하여도 사리사욕에 눈이 멀고 양심이 마비된 자들에 의한 교회적 또는 개인적 기도원들이 여전히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더욱 추구하는 자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 기독교적 차원의 기도원들이 차원 높게 운영되면 그들은 자연히 퇴출될 것이며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여도 기도원을 통한 비 진리가 현재와 같이 극성을 떨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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